책소개
이마사코는 누구인가?
이방자가 구술하고 강용자가 쓴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마사코입니다』
격랑의 역사를 관통한 한 여인의 기억으로, 열여섯 살 때 한·일 정략결혼의 희생자가 된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의 회고록이다. 대한제국의 몰락과 함께 열한 살 때 일본에 볼모로 끌려간 영왕(영친왕) 이은의 동반자로 황족에서 평민으로 , 두 조국의 갈등과 대중의 질시 속에 살아온 파란만장한 삶을 적었다. ‘낙선재의 여인’으로만 알려진 그녀의 말년 사회복지 활동과, 황실 후계자였던 외아들 이구와의 가슴 아픈 사연도 생생하게 담고 있다. 자전 기록이 많지 않은 대한제국 황실 역사에 대한 가장 중요한 직접 증언이며, 기록이 될 것이다.
이 책은 총 7부로 1부 낙선재 조약돌에서 영왕 이은이 순종의 후계자가 되어 볼모로 일본에 끌려가는 망국의 시대상황을 다루고 2부에서는 일본 주도의 정략결혼 내막과 영왕 부부의 만남을 3,4부에서는 첫아들 이진의 죽음과 고종의 독립운동, 순종의 서거, 영왕의 해외 순방과 영왕의 약혼녀 민갑완 규수와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5부에서는 운현궁 이우공의 죽음과 영왕의 일본생활의 고뇌가 그려진다. 소극적이고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고 비판 받던 영왕의 행적이 소문과 달라 재평가가 필요한 부분이다.
1984년 경향신문에 연재된 『세월이여 왕조여』를 기본 텍스트로 하고, 이후 황손 이구가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2005년까지 조선 황실의 근황을 정리하여 보완했다. 또한 일반인에게 생소한 대한제국 황실을 이해하기 쉽도록 조선왕실 가계도와 당시 양국 궁궐 지도, 이방자 연표, 참고문헌 등을 꼼꼼히 정리했다. 대한제국 말기 황실을 증언하는 기록은 손에 꼽을 정도로 희귀한데, 이 책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로서 고종과 순종 황제, 순명효황후(윤비) 등 역사의 회오리바람 속에 놓인 황실 인물을 직접 겪은 이야기를 진솔하게 기록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조선의 마지막 황실 연구 자료로서 그간 나온 여러 가지 회고록의 오류를 바로잡고 인간 이방자의 생생한 고백을 통해 역사 속의 인간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목차
조선 왕실 가계도
관련 지도
1 낙선재 조약돌
우주의 찰나
천황이 죽었다
16세, 아침 신문
전의를 처형하라
댓잎에 빗방울
소녀는 운다
서울에서 보낸 소식
엎드린 사람들
빗발치는 전화
잘 있으시오
2 깊은 오월
술렁대는 백모란
전하를 웃긴 조선말
함녕전의 소독약
싱글벙글 스즈키
국수장국이 먹고 싶다
호랑이굴에 간 몽양
백발을 바치다
꿩 138쌍
3 하얀 예감
믿기 싫은 소식
청량리는 저쪽이요
세 번째 눈물
1923년 9월 1일
얼어붙은 무덤
상하이로 탈출하다
김 시종의 비밀
라디오와 비단 쿠션
머리 푼 왕비
4 인도양 검은 파도
비원에 내리는 비
미와 경부를 붙여라
민 규수의 반대
프랑스 조계 살인 사건
이 백작 부부라 불러라
네덜란드의 조선인 편지
어둠 속에 걷고 있다
5 도쿄 안의 종묘
끈질긴 화병
이우, 목숨 걸다
눈부신 날의 기억
누가 불렀냐
한국이야 한국
학춤과 메밀가루
숙명여고라 합니다만
당신이 왜 그곳에
6 경계인의 선택
팡팡걸과 단팥죽
오시려면 오시오
유엔군을 위한 한국어 책
집을 비우라
미국 여인 줄리아
불 탄 서류
젊은 군인의 환대
7 오, 남산
감사합니다 오모니
마음의 대화
수만의 시선
물러가라 물러가라
피와 땀, 인내와 인내
조국 없는 고아 왕
낙선재 앞뜰에서
맺음말
주요 인물
이방자 연표
참고문헌
사진 출처
책 속으로
도대체 납득할 수 없는 사실에 머릿속이 휭휭 돌고 눈앞이 어지러워 활자가 커졌다 작아졌다 했다. 신문을 들고 있는 손과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1부 낙선재 조약돌」중에서
밤 8시 15분 서울발 열차를 타기 위해 덕수궁을 떠날 때까지 나는 진이 임종한 방에 앉아 있었다. 올 때는 같이 왔었는데 이제 나 혼자 떠나가는구나 생각하니 새삼 목이 메었다. 용산을 지날 때 전하가 “청량리는 저 쪽이오…” 하며 동쪽을 가리켰다. 어두운 저쪽 산의 어딘가에 이제는 볼 수 없는 진이 잠든 숭인원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전하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이곳으로 올 때는 사랑하던 아들을 잃고 이렇게 슬프게 떠날 줄을 상상이나 했던가. 이 바다를 건너 올 때는 높은 파도와 뱃멀미에 고통을 받으면서도 내 품에 진이 있었고 그래서 흐뭇한 기쁨에 들떴었는데 이제 잔잔하고 고요한 바다이지만 가슴에 몰아치는 파도는 현해탄의 깊이보다 더 검고 무거운 것이었다.---「3부 하얀 예감」 중에서
전하가 말하고 있는 동안에 물 끼얹은 듯 조용하기만 하던 학생 들 속에서 다시 훌쩍이며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이은이 항상 여기에 있으면서도 고국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여러분은 공부하는 몸이니 하나라도 더 배워서 장차 훌륭한 아 내요, 어머니가 되어주기 바랍니다….”
전하의 목소리는 점점 가라앉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이제 모두 흐느껴 울고 있었다. 나도 눈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전하를 보니 전하의 눈에도 눈물이 괴어 있었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느라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5부 도쿄 안의 종묘」중에서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 씨가 대통령이 되자 전하는 이제는 귀국하고 싶다고 했다. 이대통령은 전주 이씨로 왕실의 종친이고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쳐 온 애국자인 만큼 그가 대 통령이 되어 민주정치를 베풀면 조국이 크게 발전할 것이라고 믿은 전하는 주일 대표부를 통해 여러 번 귀국 희망을 전했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을 한국의 국유재산이므로 주일 대표부 건물로 쓰도록 내어 놓으라는 훈령을 보내 왔다. 이 집의 집세로 겨우 연명하는데 그것을 내놓으면 우리는 어디로 가란 말인가. ---「6부 경계인의 선택」중에서
육영수 여사는 이러한 우리의 사정을 알고는 대통령께 여러 번 부탁 드려 1971년에 우리의 생계비를 월 60만 원으로 올려주었다. 참으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인상이었다. 육 여사는 또 자행회 사업에도 무척 관심을 가지고 나를 격려하고 도와주었다. 자행회에는 정신지체아 어린이들이 늘어나는데 수용할 시설이 없었다. 이들을 위한 학교와 훈련시설이 필요했다. 육 여사는 1971년 자행회 부설 자혜학교 건립 기금으로 1000만 원을 내놓았다. 1000만 원이면 지금은 1억 원도 넘는 큰돈이었다. 이 기금과 은행에서 융자받은 1500만 원을 합쳐 1972년 10월, 경기 도 수원시 탑동에 자혜학교를 건립했다. 갈 곳이 없던 수십 명의 정신지체아들이 신축한 학교에서 뛰어놀고 공부하고 훈련받는 모습은 정말 눈물겹도록 기쁜 것이었다. 육 여사는 그 뒤에도 계속 우리의 행사에 참여하고 도와주려고 애써 주었다. 불우한 어린이나 정신지체아들에게 관심을 갖고 늘 따 뜻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우리를 감싸주었던 육 여사의 인품과 다정한 마음씨를 나는 지금도 존경하고 잊을 수가 없다.
출판사 리뷰
풍부한 주석, 이방자 사후 조선 황실 이야기를 담다
내용 중 사실 관계가 부정확하거나 오늘날 읽기에 불편한 점은 바로잡고 주석으로 보충하여 당시의 증언을 이해하기 쉽도록 했다. 풍부한 사진도 근현대사의 한복판을 들여다보게 해 준다. 회고록이 끝나는 1984년부터 이방자 여사가 타계한 1989년, 황손 이구가 비극적 죽음을 맞은 2005년까지 조선 황실 후손들의 근황을 정리하여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준다.
책의 구성
이 책은 총 7부로 1부 낙선재 조약돌에서 영왕 이은이 순종의 후계자가 되어 볼모로 일본에 끌려가는 망국의 시대상황을 다루고 2부에서는 일본 주도의 정략결혼 내막과 영왕 부부의 만남을 3,4부에서는 첫아들 이진의 죽음과 고종의 독립운동, 순종의 서거, 영왕의 해외 순방과 영왕의 약혼녀 민갑완 규수와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5부에서는 운현궁 이우공의 죽음과 영왕의 일본생활의 고뇌가 그려진다. 소극적이고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고 비판 받던 영왕의 행적이 소문과 달라 재평가가 필요한 부분이다.
6부에서는 아들 이구와 부인 줄리아의 사연과 구황실재산의 행방, 이승만 대통령의 환국 거부, 박정희 의장과의 만남, 극심한 생활고와 조국의 냉대가 그려진다. 7부에서는 1970년 영왕 서거 후 한국사회에서 장애인을 돌보며 사회복지사업에 선구자로서 자활과 교육에 힘쓴 각고의 노력이 감동적으로 기록된다. 실제로 그녀는 1963년 63세에 환국하여 세상을 뜬 1989년까지 26년을 오직 조선왕실의 마지막 황태자비로, 낙선재의 주인으로, 장애인의 어머니로 봉사하며 살았다. 경향신문 연재를 마치고 난 강용자 논설위원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검소하고 소박한 말년의 이방자를 엿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1985년 이후 이구의 행적과 영왕 부부의 유지를 이어가고 있는 사회복지법인 명휘원의 활동, 구황실재산의 행방, 의친왕 계열 황실 후손들의 근황 등을 덧붙여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이방자가 구술하고 강용자가 쓴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마사코입니다』
대한제국은 행방불명고종이 죽고 순종이 죽었으므로 대한제국의 황제는 일본에 끌려간 이은이다. 이승만은 그의 귀국을 막았고 돌아왔을 때 이미 말을 잃었다. 황실재산 목록은 화재로 소실되었고 마지막 황태손 이구는 일본에서 사망했다. 어디 있는가, 500년 사직은?
1916년 8월 3일 아침, 별장에서 무심히 신문을 집어든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이 왕세자 전하의 사진과 나란히 있는 것은 틀림없는 나의 사진이었다.이 왕세자 전하와 내가 약혼했다는 주먹만한 활자가 내 이마를 쳤다.“이럴 수가 있나?”“내가 왕세자 전하와 약혼을 하다니!”“약혼 사실을 신문에서 알게 되다니!”도대체 납득할 수 없는 사실에 머릿속이 휭휭 돌고 눈앞이 어지러워 활자가 커졌다작아졌다 했다. 신문을 들고 있는 손과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본문 19쪽
이마사코는 누구인가?
우리가 이방자라고 부르는 여인, 일본 황족 나시모토미야 모리마사의 딸이다. 일본 황태자비 물망에도 올랐으나 고종 황제의 세 번째 아들 영왕 이은의 배필로 정해졌다. 열여섯 살 에 한·일 정략결혼의 희생자가 된 여인이다. 1920년 4월 대한제국 황태자 이은과 결혼, 마지막 황태자비가 되었다.
이은을 ‘영친왕’이 아니라 ‘영왕’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은은 1900년 고종 황제에 의해 대한제국의 ‘영왕’으로 책봉되었다. ‘친(親)’ 자를 넣어 영친왕으로 부르는 것은 일본식으로 내려부르는 호칭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이방자 여사는 “일본의 강칭에 의한 영친왕 칭호보다는 ‘영왕’이라는 본래의 칭호를 원한다”는 유지를 남겼고 이 책은 그를 영왕으로 부른다.
영왕 비로 간택되었던 민갑완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는가?
고종 황제가 일본의 정략결혼을 막고자 미리 영왕 비로 간택했던 여성이다. 주영공사를 지낸 민영돈의 딸로 열한 살 때 황태자비로 간택되었으나 일본에 의해 강제파혼 당했다. 태자비로 한 번 간택되면 파혼을 해도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 못하고 일생을 혼자 지내야 하는 것이 조선의 관습이었다. 이 일의 충격으로 아버지 민영돈은 급사하고 집안이 파산하여 상하이로 망명, 고통의 세월을 보냈다. 해방 후 귀국해서 독신으로 살다가 1968년 후두암으로 생을 마쳤다.
이은과 이방자의 결혼 생활은 행복인가, 불행인가?
“망국한을 되씹으며 몸부림치는 그분을 보며 나는 한·일 융화보다 외로운 그분의 따뜻한 벗이 되고자 했다. 험하고 암담한 인생길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인간으로서 깊은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라고 이방자는 말한다.
영왕 부부의 첫아들 진은 한국에 와서 독살당한 것인가?
1920년 일본에서 결혼식을 치른 영왕 부부는 2년 후인 1922년, 7개월 된 첫아들 진과 함께 귀국해 조선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귀국한 지 2주째 되던 날, 진은 급성 소화불량으로 갑작스레 숨을 거둔다. 급사에 대해 독살설이 제기되었으나 궁중 사람들 대부분은 “고종 황제의 원수를 갚겠다고 그런 참혹한 짓을 저지를 사람은 없다”고 부인했다.
아들의 급사에 대한 이방자의 생각은 무엇인가?
“지금도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아들 진이 일본인의 피를 받았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영왕은 조선독립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주장이 사실인가?
영왕은 ‘침묵의 왕자’로 알려져 있다. 볼모로 끌려온 조선의 왕이자 일본 군인이었다. 그의 복잡한 심리와 행동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조선독립에 대한 그의 태도는 확실치 않았고 확실할 수 없었다. 이 책에서는 가장 가까웠던 사람, 이방자의 관찰을 살필 수 있다.
영왕 부부는 왜 해방 후 바로 귀국하지 않았나?
귀국 의사를 비쳤으나 왕실 복원을 우려한 견제로 귀국하지 못했다. 이승만 정권은 황실재산을 국유화하면서 조선황실의 맥을 단절시키려고 했다.
그들은 언제 한국 땅을 다시 밟았나?
1963년에 환국했다. 영왕은 휠체어에 실려 56년 만에 조국 땅을 밟았으나 뇌일혈로 말을 잃은 상태였다. 6년 6개월을 투병하다 1970년 5월 1일 73세로 서거했다.
패전 뒤 귀국까지 일본에서는 어떻게 살았는가?
1947년 일본 헌법이 바뀌면서 일본 왕족들은 특권을 잃고 평민이 되었다. 영왕 부부도 평민이 되어 재일한국인으로 등록했고, 일본정부의 지원은 하루아침에 모두 끊겼다. 이때부터 수입이 전혀 없었으므로 자동차, 골동품 등을 팔아 생활했고, 딱한 처지를 알게 된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근근이 생계를 꾸렸다. 이방자 여사는 이때 마지막까지 소중히 간직했던 황후대례복 3점을 우리나라 박물관으로 가져오지 못하고 우에노 국립박물관에 맡길 수밖에 없었던 것을 두고두고 안타까워했다.
조선황실의 재산은 다 어디 있는가?
6·25 전쟁 이후 구황실재산사무총국이 만들어지고 1960년 재산목록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해 6월 6일 원인 모를 화재로 사무총국 건물 2층이 전소되면서 서류가 모두 소실되었다.
그렇다면 조선황실 재산이 행방불명이란 말인가?
정리를 맡았던 이창석 사무차장의 말에 따르면 임야나 토지 등 막대한 부동산이 당시 권력가들의 손에 다 들어갔다고 한다. 서울 교외의 수십만 평 토지는 물론이고 왕릉의 땅까지 소유자가 바뀌었다는 주장이다.
둘째이자 외아들인 이구의 한국 생활이 순탄치 못했던 까닭은 무엇인가?
1931년 일본에서 태어난 이구는 이방자 여사가 첫째 아들 진을 잃은 뒤 여러 차례 유산의 아픔을 겪고 9년 만에 낳은 아들이다. 미국 MIT공대에서 건축학을 전공하고 미국 여성 줄리아 멀록과 결혼했다. 1963년 영왕 부부가 환국할 때 함께 귀국해 낙선재에서 생활했다. 서울대학교, 연세대학교에서 건축설계를 강의하고 항공 측량회사를 운영하기도 했지만 한국생활이 순탄치 않았다.
이구와 이방자는 왜 불화했나?
종친들은 서양인이자 아이를 낳지 못하는 줄리아와의 이별을 종용했다. 이구가 진행하던 사업도 망했다. 결국 줄리아와 이혼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무속인과 동거한다. 이방자는 어떻게든 이구를 설득해 귀국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 책은 대한제국에 대한 다른 기록과 무엇이 다른가?
대한제국의 몰락을 지켜본 윤비나 영왕이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이 책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로서 고종과 순종 황제, 순명효황후를 직접 겪은 마지막 황태자비의 경험을 진솔하게 기록했다. 조선의 마지막 황실 연구 자료로서 그간 나온 여러 가지 회고록의 오류를 바로잡았다. 인간 이방자의 생생한 고백을 통해 역사 속의 인간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지은이 강용자는 누구인가?
소설가이자 경향신문 기자로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다. 1984년 5월 14일부터 10월 24일까지 〈〈경향신문〉〉에 회고록 〈세월이여 왕조여〉를 연재했다.
연재 당시 독자 반응은 어땠는가?“그 일본 여자 얘기를 왜 쓰느냐?”, “일본 황족의 딸이고, 우리의 피를 더럽히고, 영왕을 망친 요물 아니냐?” 하는 반응이 있었다. 그러나 연재가 계속되면서 “우리 역사에 대해 우리가 너무 몰랐다”, “역사를 많이 배우게 되었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당신은 누구인가?
이 책을 엮은이 김정희다.
무엇을 했는가?
강용자의 텍스트를 교정하고 조선황실의 근황을 정리·보완했다. 주석을 달고 조선황실 가계도와 당시 양국 궁궐 지도, 이방자 연표, 참고문헌을 정리해 이 책에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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