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역사이야기 (관심>책소개)/6.화교이야기

한반도 화교사 : 근대의 초석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경제사

동방박사님 2022. 8. 26. 06:24
728x90

책소개

근대 화교사의 연구 수준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킨 역작!
동북아화교사의 획을 긋는 근대사학의 필독서
화교 60년의 역사를 한·중·일의 방대한 자료로 분석한 기념비적 대작


이 책은 188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화교사학의 공백을 메운 경전(經典)과 같은 작품이다. 우리 사회를 함께 일구어온 이웃이면서도 시야에서 놓치기 쉬운 한반도화교의 존재를 방대한 문헌 자료와 체계적인 구술 조사를 바탕으로 하여 새롭게 그려내는 데 성공하였다. 중국·일본·한국 등에서 수집한 대량의 1차 사료를 활용하여 화교사의 큰 공백을 메웠을 뿐 아니라 중국근대사, 동아시아사에 다양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화교의 생태(生態) 발전 이외에도 한·중·일 경제의 공업, 무역발전의 실태 그리고 민족, 정치, 이민의 사실 및 사상 관념, 한·중·일 삼자의 관계영향을 밝혀냈다. 먹거리, 입을 거리 이야기가 풀어져 나오는 생생한 생활사이면서, 도시화에 따른 근교 채소재배 등 농업 현장과 성당 짓기 등 근대 건축업의 현장을 복원하는 중후한 산업사의 면모도 보여준다.

 

목차

추천의 글
서장_ 중국인의 조선 이주와 ‘중국 충격(Chinese Impact)’

제I부화교 직물상
제1장_ 화교 직물상의 위상과 형성
제2장_ 화교 직물수입상의 통상망
제3장_ 화교 직물수입상의 조선 내 유통망
제4장_ 조선총독부의 화교 직물상에 대한 대응
제5장_ 1931년 화교배척사건이 화교 직물상에 미친 영향
제6장_ 중일전쟁 시기 화교 직물상의 몰락
제I부 보론_ 화교 경영 행잔의 해방 후 무역활동
제I부를 마치며

제II부 삼도업(三刀業)
제7장_ 화교 중화요리점의 형성과 발전1880~1920년대를 중심으로
제8장_ 화교 중화요리점의 위기와 응전 1927~1945년의 시기를 중심으로
제9장_ 화교 이발소와 양복점
제II부를 마치며

제III부 화교 제조업
제10장_ 화교 주물업
제11장_ 화교 양말 제조업
제III부를 마치며

제IV부 화농(華農)
제12장_ 화농 채소재배의 형성과 발전
제13장_ 화농 채소재배의 위축
제14장_ 중일전쟁 시기 화농의 채소재배 및 판매의 변화
제IV부를 마치며

제V부 화공(華工)
제15장_ 광량만염전 축조공사의 화공 문제
제16장_ 화교의 성당건축시공 활동(1880~1930년대) 서울과 대구를 중심으로
제V부를 마치며

종장_ 근대사 속의 조선화교

부록_ 일제강점기 조선화교 회사 신용조사 목록
참고문헌
책을 마무리하며
찾아보기
 

저자 소개

저 : 이정희
 
경북 성주군에서 태어나 경북대학교 경제학과에서 학사와 석사학위를 마쳤다. 일본 교토대학에서 조선화교 연구로 문학박사(동양사학) 학위를 취득했다. 일본 교토부京都府 소재 후쿠치야마(福知山 : 舊 成美大) 공립대학에서 15년간 교수로 근무하다 2014년부터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999년 대구 영남일보 기자 시절 화교의 차별 문제를 인식한 후, 화교연구에 매진해 20년째 한 우물을 파고 있다....
 

책 속으로

조선 거주 외국인 가운데 화교는 일관되게 인구의 9할 이상을 차지, 일제강점기 조선사회에서 외국인이라면 화교였다. (…) 화교 인구와 통치자인 조선 거주 일본인 인구를 비교해보자. 화교 인구는 1910년 일본인 인구의 6.4%에 지나지 않았지만, 1930년에는 11.9%, 1942년에는 9.2%로 약 10% 수준에 도달했다. 이처럼 화교 인구의 절대적인 수는 일본인의 10분의 1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화교와 일본인 인구의 구성을 본다면 쌍방의 인구 차는 또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 31쪽, 서장 「중국인의 조선 이주와 ‘중국 충격(Chinese Impact)’」 중에서

화교 직물수입상점의 점원은 개항기에 경영규모가 큰 상점도 10여 명에 지나지 않던 것이 1920년대는 30~40명으로 3~4배 증가한 것에서 경영규모가 이전보다 확대되어 상해에 지점을 설치할 정도로 발전한 것이 첫 번째 요인이다. 또 하나는 1924년 6월 인천-상해 간 항로의 개설이다. 이 항로가 설치되기 이전 상해에서 수입하는 직물은 지부 및 대련에서 환적되어 인천에 수송되었는데 화물환적의 불편함과 환적비가 발생했지만 이 항로의 개설로 그와 같은 불편함과 환적비가 사라진 것이다. 인천-상해 항로에 헤이안마루(平安丸, 1,580톤)가 운항한 이후는 “대부분이 상해에서 직접 수입되기에 이르러 주로 인천에 양륙(揚陸)되었다”라고 한다.
- 112~113쪽, 제2장 「화교 직물수입상의 통상망」 중에서

또 하나 크게 주목되는 점은 중일전쟁을 경계로 사라진 직물상점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1920년대 가장 규모가 컸던 직물상점의 하나인 영래성, 덕순복은 1931년 화교배척사건 이후 사라졌고, 중일전쟁 이전까지 건재했던 협흥유와 금성동은 1942년에는 찾아볼 수 없다. 중일전쟁을 전후하여 문을 닫은 것으로 보인다. (…) 1942년 당시 영업하던 직물상점 가운데 쌍성흥, 천합잔, 동성영, 영성흥, 유풍덕의 5개소가 영업을 지속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직물상점은 중국산 견직물과 면직물뿐만 아니라 화장품, 각종 잡화 등도 함께 판매했다. 반면 서울의 경우 해방 이전의 화교 직물상점 가운데 영업을 하고 있는 곳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 240~241쪽, 제6장 「중일전쟁 시기 화교 직물상의 몰락」 중에서

각 중화요리점의 연간 매상액을 1928년 경성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경성의 호떡집 96개소의 연간 매상 총액은 26만 7,900원으로 1개소의 평균 매상액은 2,790원이었다. 중화요리 음식점 72개소의 연간 매상 총액은 30만 1,300원으로 1개소의 평균 매상액은 4,185원이었다. 중화요리 음식점의 평균 매상액이 호떡집의 평균 매상액을 약 1,400원 상회한 것을 보면 음식점의 규모가 약간 더 컸던 것을 알 수 있다. 고급 중화요리점 26개소의 연간 매상 총액은 101만 4,380원으로 1개소의 평균 매상액은 3만 9,015원에 달하여 호떡집 및 중화요리 음식점의 약 10배 수준이었다. 고급 중화요리점의 연간 평균 매상액 4만 원은 당시 화교의 상업 가운데 규모가 가장 컸던 직물상점, 잡화상점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 280쪽, 제7장 「화교 중화요리점의 형성과 발전」 중에서

1927년 화교배척사건의 가장 큰 피해지역은 인천이었다. 먼저 중화요리점 관련 인적 피해를 살펴보자. 인천부 용강정 27번지에서 호떡집을 경영하는 산동 영성현 출신의 이춘정(李春亭)은 부인 유(劉) 씨와 아들 1명, 딸 1명과 같이 거주했다. 12월 15일 오후 6시 습격을 당하여 유 씨는 얼굴 찰과상과 다리 타박상의 중상을 입었다. 그는 14일간 입원하여 입원비로 41원이 들었고, 약 반년간의 요양 기간이 필요했다. 남편 이춘정은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자식 2명은 피해를 입었다. 딸 이탁녀(李琢女, 5세)는 이마에 큰 중상을 입어 14일간 입원하고 42원의 입원비가 들었다. 아들 이맹자(李孟子, 7세)도 이마 타박상의 경상을 입었다. 이춘정의 주택은 군중의 습격을 받아 호떡제조 원료인 밀가루, 쌀, 설탕, 유리상자 등 17.2원의 물적 피해도 입었다. 인천 내리의 중화요리 음식점인 해흥관(海興館)은 12월 15일 습격을 받았는데 고객 유옥경(劉玉慶, 40세, 상업, 영성현)은 오후 6시 습격을 당해 어깨 타박상을 입었다.
- 309~310쪽, 제8장 「화교 중화요리점의 위기와 응전」 중에서

이처럼 각 민족이 각각의 이발조합을 조직하여 단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발요금 일원화는 쉽지 않았다. 이발 요금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은 세 민족의 이발조합을 통합하는 수밖에 없었다. 1916년에 들어 화교 이발소의 영향이 더욱 표면화되면서 조선인과 화교 이발조합을 일본인 이발조합과 통합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 이러한 상황은 제1차 세계대전 시기의 급속한 물가상승으로 인해 각 이발조합은 이발요금 인상 조치를 취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1917년 10월 경성의 일본인 이발조합은 상등 30전, 중등 25전, 하등 20전으로 기존의 요금보다 각각 5전씩 인상했다. 조선인 이발소와 화교 이발소도 각각 인상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종결 후 발생한 경기침체로 1920년부터 다시 이발요금 인하의 바람이 불었기 때문에 수입 감소를 우려하여 인하에 반대하는 이발조합도 있었다.
- 345쪽, 제9장 「화교 이발소와 양복점」 중에서

조선인 주물공장이 제조하는 솥은 경쟁력이 낮았기 때문에 대일본 및 중국 수입품이 증가하여, 일본인이 조선 내에 주물공장을 잇따라 설립하여 솥을 제조했다. 그보다 조금 늦게 화교가 솥 제조에 참가하여 값싼 가격, 우량의 품질을 무기로 조선인 공장 및 일본인 공장 제조의 솥뿐 아니라 대일본 및 중국 수입품을 대체했다. 결과적으로 화교 주물공장이 솥 시장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 395쪽, 제10장 「화교 주물업」 중에서

화농은 가지, 호박, 파, 옥수수 등의 채소를 근면히 재배하고 일본인 거류민의 집집마다 방문하여 염가로 판매해, 재배와 판매의 뛰어남이 일본인 농민이 도저히 경쟁할 수 없을 정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인천 일본 영사관의 보고와 같이, 개항기 채소재배 및 판매에서 화농과 일본인 농민을 비교하여 일본인 농민의 분발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 453쪽, 제12장 「화농 채소재배의 형성과 발전」 중에서

화공은 왜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공사현장에서 도주한 것일까? 그 원인에 대해 도주한 화공 78명의 연명으로 주진남포 영사관에 제출한 6월 18일자 탄원서를 근거로 보도록 하자.
제1의 원인은 초공두 측의 불성실함이었다. 공두(工頭)는 출발 전 승선과 동시에 금전(전대금으로 보임)을 지불한다고 약속했는데도 화공 대부분은 금전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 또한 탄원서에 의하면, 초공두 측은 화공을 모집할 때 철도공사의 작업을 한다는 것, 임금과 식대를 합하여 1일 50전을 지급한다고 속였다는 것이다.
- 547쪽, 제15장 「광량만염전 축조공사의 화공 문제」 중에서

이들 벽돌 직공은 조선에 정주하지 않는 계절노동자였다. 그들은 대체로 11월 말경 짐을 싸서 중국의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이듬해 4월경 봄이 되면 다시 돌아와서 작업했다. 즉, 4~11월의 약 8개월간 공사를 하고 번 돈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4개월을 고향에서 생활하고 다시 돌아오는 형태였다. 따라서 명동성당의 공사는 이 5개월의 기간에 정상적으로 이뤄질 수 없었다. 그것은 뮈텔 주교의 일기에 명동성당의 공사가 재개되었다는 내용이 자주 등장하는데 대부분 4월 달의 일기에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604쪽, 제16장 「화교의 성당건축시공 활동(1880~1930년대)」 중에서

한편, 조선총독부의 화교정책은 중국인의 조선 이주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요인이었다. 조선총독부가 민영사업 및 관영사업에 화공의 고용 비율을 제한한 조치, 100원의 입국 제시금제도는 중국인의 조선 이주에 하나의 장벽으로 작용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 1927년과 1931년의 화교배척사건은 중국인의 조선 이주에 걸림돌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화교의 대량 귀국을 초래, 화교 인구의 감소로 이어졌다.
- 625쪽, 종장 「근대사 속의 조선화교」 중에서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화교에 대한 작은 관심이 대작으로 이어지기까지
―20년간 발로 뛰며 수집한 사료가 ‘한반도화교사’로 태어나다

중국인은 왜 한반도에 이주하여 화교가 된 것일까? 화교사회는 어떻게 조직되고 작동하고 있었던 것일까? 중국의 한반도 주재 외교기관은 화교를 어떻게 보호했을까? 화교와 조선인 및 한국인은 어떤 관계에 있었으며 서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을까?
이 책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질문에서 시작하여 방대한 연구로 이어진 성과물이다. 기자 생활을 거쳐 일본과 한국의 대학을 오가며 연구와 교육에 매진해온 저자는 발로 뛰면서 20년간 자료를 모았고, 이를 통해 한국의 미진한 화교연구의 빈 공간을 방대한 자료로 채워나간 것이다.
2012년 5월 일본 교토대학 학술출판사에서 『조선화교와 근대동아시아(朝鮮華僑と近代東アジア)』를 출판했고, 이를 바탕으로 하고 이후 7년간의 연구 성과를 추가하여 이제 한국에서 『한반도화교사』를 출간하게 되었다.
저자는 조선 말기에서 일제강점기로 이어지는 기간의 화교 명칭에 ‘한반도화교’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는 ‘조선화교’, ‘한국화교’.‘북한화교’를 아우르는 명칭이다.

근대 시대 촘촘히 드러나는 화교들의 생활상
―한반도화교사를 공부하거나 화교 문제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한글뿐 아니라 어느 언어로 기술된 서적보다도, 이 책은 1880년대부터 1940년대 해방 전후기까지 화교 문제를 가장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다. 비단과 면포 상인으로부터, 공장 경영·노동자, 농업 이민자, 이발소, 양복점, 음식점을 경영하던 기술자들, 그리고 일반 노동자(쿨리)의 삶 등 한반도 곳곳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살았던 화교들의 생활상을 촘촘히 다루고 있다. 청국의 총영사관, 국민당 정부의 외교자료, 일본 총독부 내의 보고서, 경찰보고서나 재판문서, 조선화교들이 쓴 회고록, 화교협회 회의록, 일본 오사카 신용평가회사인 상업흥신소의 자산신용록 자료, 심지어는 한국에 주재했던 선교사들의 개인 서간 등 한국어·일본어·중국어·영어 자료를 이용하고, 거기에 수많은 화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다양한 시각에서 한반도화교의 역사적 실체에 접근하였다. 비단 중점적으로 다루는 한반도 근대기는 물론 그것을 넘어서 현대에까지 이어지는 한국화교 문제에 대한 가장 자세하고 방대한 연구임에 틀림없다.

가장 논쟁적인 시대, 가장 그대로의 모습으로 화교상을 보여주다
―화교 문제뿐 아니라 한국의 개화기 및 일제강점기 시기를 연구하는 분들께

책이 다루는 1880~1940년대는 한국사 연구자들에게 가장 논쟁적인 시대 중 하나이다. 그리고 이 시대에 대한 연구는 근대화론, 식민지 수탈론, 근대성론 등과 같은 다양한 담론을 생산하며 풍성한 논의를 자극하기도 하지만, 거꾸로 그러한 담론에 갇혀 자기에게 유리한 사실만을 강조하기도 한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책은 다양한 자료를 분석하여, 담론에 의해 박제된 현실이 아닌 한반도를 살아갔던 다양한 인간 군상의 삶과 갈등을 생생하게, 심지어는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 연구에는 이윤을 좇아 일본산 면포을 사서 유통하는 화교, 화교 이발소가 너무 가격을 내리지 못하게 막아달라는 일본인 이발사들의 요구에 마땅한 근거 법령이 없다며 전전긍긍하는 총독부 경찰관, 가격경쟁력과 품질을 지키기 위해 화교 자본의 투자와 화공을 받아들이는 식민지 조선의 ‘민족자본가들’ 등이, 기존의 담론에는 사로잡히지 않고 묵묵히, 더러는 영악하게 자신의 삶을 영위해갔던 한반도의 사람들이 조금의 군더더기도 없이 자신의 삶을 드러낸다. 그래서 한국의 개화기 및 일제강점기 연구자들에게도 더할 나위 없는 자료와 사실의 보고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근대동북아의 노동과 자본이 국경을 넘나든 기록들
―한반도사를 넘어 근대 동아시아를 살펴보고자 하는 분들께

책은 비단 한반도뿐 아니라 동시대 동아시아가 하나의 경제권·생활권으로 어떻게 작동했는가를 화교들의 행적을 통해 추적한 명저이다. 비록 한반도화교 문제에 집중했다고는 하나, 그들의 비즈니스와 이민 네트워크를 따라 중국 상해에서, 하북, 산동, 만주, 일본의 차이나타운, 대만, 심지어는 동남아시아까지 섭렵하고 있다. 그래서 노동시장이 어떻게 국가 권력에 따라 권역화되는지, 상업과 금융은 어떻게 부단히 그 권역의 경계들을 넘나드는지, 일본 정부는 식민지와 점령지, 일본 본토에서 각각 어떤 우선 순위를 가지고 화교 정책을 만들었는지 등 종종 추상적일 수도 있는 질문들에 동아시아의 격동기를 살아왔던 화교라는 역사적 행위자를 통해 아주 구체적으로 답하고 있다. 그래서 만약 제국주의, 자본, 국민국가라는 다양한 개념들이 어떻게 근대 동아시아라는 무대에서 그 실체를 드러내는지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이만한 연구가 드물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한반도 직물상을 주도하던 화교들이 화교배척사건과 중일전쟁을 건너오기까지
―제I부: 화교 직물상의 형성·발전·쇠퇴 과정과 정치사회적 사건들의 영향

제I부는 화교 직물상의 형성, 발전, 쇠퇴의 과정이 동아시아를 무대로 어떻게 펼쳐졌는지 추적한다.
제1장은 화교 직물상이 조선의 직물상업계 및 화교사회 및 경제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검토한 후, 화교 직물상이 산동방(山東幇, 산둥방)을 중심으로 어떻게 형성되는지, 산동성(山東省, 산둥성)과 어떠한 연계가 있는지 고찰한다.
제2장은 화교 직물상이 일본인 직물상 및 조선인 직물상을 압박하는 세력을 형성한 원인을 분석한다. 경성 및 인천 소재 화교 직물수입상이 면직물, 견직물, 마직물을 어떠한 화교 통상망을 통해 대량으로 수입하게 되는지, 수입 과정에서 일본인 직물상과 협력 및 길항(拮抗)의 관계는 없었는지, 그리고 대량 수입을 가능하게 한 조선 내 직물산업의 실태는 어떠했는지에 유의하면서 검토한다.
제3장은 화교 직물수입상이 수입한 직물은 어떠한 화교 유통망을 통해 판매되었는지 검토한다. 화교 직물수입상의 유통망은 각 부(府)에 소재한 화교 직물도매상, 각 군(郡)에 소재한 화교 직물소매상 및 행상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 관계가 어떠한 유기적 결합을 이루고 있는지 살펴본다. 그리고 조선인 및 일본인 직물상과의 거래는 어떻게 이뤄졌는지도 주목하여 검토한다.
제4장은 동아시아에 걸친 통상망과 조선 내 쇠사슬처럼 연결된 유통망을 토대로 조선의 직물상업계에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한 화교 직물상에 대해 조선총독부는 어떠한 정책으로 대응했는지 수입을 제한하는 관세정책을 중심으로 검토한다.
제5장은 1931년 화교배척사건이 화교 직물수입상을 비롯한 화교 직물상 전체에 어떤 타격을 주었는지 검토한다. 화교 직물수입상의 통상망, 국내 화교 직물상의 유통망이 이 사건으로 어떻게 파괴되고 약화되는지 중앙과 지방으로 나눠 살펴본다.
제6장은 화교 직물상은 화교배척사건이 진정된 후 점차 회복하지만 중일전쟁과 조선총독부의 전시통제강화로 완전히 쇠퇴하게 되는데 그 궤적을 추적한다.
제I부 보론은 조선화교의 중요한 경제활동의 하나로 객잔과 무역업을 병행한 행잔(行棧)이 어떻게 경영되고 있었는지 인천 화상 만취동(萬聚東)을 중심으로 고찰한다.

호떡집과 짜장면의 사회사, 한반도에 자리 잡은 화교의 직종들
―제II부: 화교의 3대 직종, 중화요리점, 이발소, 양복점의 흥망성쇠

제II부는 중화요리점, 이발소, 양복점의 이른바 삼도업(三刀業)에 대해 검토한다. 세계의 화교는 이주지서 삼도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많았는데 조선화교도 똑같았다. 조선화교의 삼도업의 생성 및 발전의 과정을 추적한다. 이발소와 양복점은 1930년대에 들어 쇠퇴한 반면, 중화요리점은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검토한다.
제7장은 화교 중화요리점이 화교의 이주 초기인 1880년대에 이미 형성되고 1920년대는 호떡을 중심으로 중화요리가 조선사회에 대중화된 것을 밝힌다. 화교 중화요리점의 성공 원인이 중화요리의 특징, 싼 가격, 화교중화요리조합에 있다고 보고 검토한다.
제8장은 1927년과 1931년 화교배척사건 그리고 중일전쟁이 있었음에도 화교 중화요리점은 1930년대에도 발전을 거듭하는데 그 실태를 추적한다. 조선총독부의 전시통제강화로 인해 화교 중화요리점의 경영이 위축되는 실태도 분석한다.
제9장은 화교 이발소와 양복점의 생성과 전개과정을 조선인 및 일본인 업자와의 경쟁관계에 주목하여 살펴본다. 이발소와 양복점은 화교의 이주 초기에 생성되어 조선인 및 일본인이 위협을 느낄 정도로 발전하지만, 1930년대는 쇠퇴의 길에 들어선다. 그 이유를 화교 중화요리점과 비교하여 검토한다.

솥·냄비 그리고 양말, 화교가 주도한 제조업종들
―제III부: 주물업, 양말 제조업을 통해 본 화교 제조업의 양상과 길항관계

제III부는 일제강점기 화교 제조업의 실태를 주물업과 양말 제조업을 중심으로 검토한다. 화교의 제조업은 상업에 비해 미약한 세력을 형성했지만, 주물업과 양말 제조업 분야에서는 조선인과 일본인을 압박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공업의 입장에서 두 제조업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살펴본다.
제10장은 화교 주물업은 일제강점기에 솥, 냄비의 제조 분야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구축하게 되는데 그 원인을 동향(同鄕) 네트워크와 높은 기술력에 두고 논의를 전개한다. 조선인 및 일본인 주물업과의 길항관계에 주목하면서 검토한다.
제11장은 신의주의 화교 양말 제조업이 1920년대 평양의 조선인 양말 제조업에 위협을 주는 일대 세력으로 부상한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생산, 판매의 각 측면에서 검토한다. 또한 화교 양말 제조업이 1931년 화교배척사건에 의해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타격을 받게 되는 실태도 살펴본다.

화교 채소재배상, 희망의 땅 한반도로 진출해 오다
―제IV부: 채소 농사와 판매까지, 한반도에서 농사를 지은 화농의 역사

제IV부는 화농(華農)의 채소재배 실태 파악을 통해 화농이 일제강점기 조선의 농업에 어떻게 연관되는지,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를 중심으로 검토한다.
제12장은 화농이 대도시 채소 공급을 독점하는 실태 및 원인을 개항기부터 1920년대까지의 시기, 경기도를 대상으로 검토한다. 화농의 채소재배의 특징, 화교 채소 판매망, 산동성과의 연관성에 주목하여 논의를 전개한다.
제13장은 화농의 채소재배활동이 1931년 화교배척사건에서 중일전쟁 발발 이전까지 시기에 위축된 원인을 분석한다. 1931년 화교배척사건의 영향, 조선총독부의 화교 이주 제한 조치, 인천부청의 화교 경영 채소시장 운영개입, 인천 화농의 농회(農會) 내분 등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제14장은 화농의 채소재배 및 판매활동이 중일전쟁 및 조선총독부의 전시통제강화로 어떻게 변화하는지 검토한다. 조선의 채소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화농을 활용한 사례를 소개하고, 채소 배급제로 인해 화농의 수입이 감소한 점을 분석한다.

염전 축조와 성당 건축, 화교 노동자들의 이주와 삶
―제V부: 화공의 염전 축조와 건축 그리고 단순 육체노동까지

제V부는 화공(華工) 문제를 다룬다. 화공이 중국에서 조선으로 이주한 원인과 경위, 그들의 이주에 따른 조선인 노동자와의 관계, 화공 문제로 인한 외교 마찰 및 교섭 등을 다룬다. 또한 화공이 조선의 노동현장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검토한다.
제15장은 광양만(廣梁灣) 염전축조 공사에 1909~1911년도에 고용된 약 4,000명의 화공을 둘러싼 문제를 다룬다. 화공은 나쁜 작업조건으로 잇따라 공사현장에서 도주하는데 그 원인을 추적한다. 또한 이 문제를 둘러싼 청국과 일본 간의 외교교섭이 펼쳐지는데, 이 교섭을 통해 일제강점 직전과 일제강점 직후에 양국 교섭에 미묘한 차이가 발생한 사실을 밝힌다.
제16장은 단순 육체노동자인 쿨리[苦力, coolie]가 아닌 벽돌조적공과 미장이와 같은 숙련 기술자인 화공이 조선에서 어떤 활동을 펼치는지 살펴본다. 이들 숙련 기술 화공이 근대 조선의 종교건축의 시공활동에 큰 기여를 하게 된 원인과 화교 건축청부회사와의 관계를 일본인 건축청부회사와 비교하여 검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