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책소개
강직하면 권세에 핍박 받고, 아첨하면 후세에 멸시 당한다!
명대 문인들의 삶을 통해 본 지식인들의 삶과 벼슬살이의 어려움
과거를 돌아봄으로써 현재를 반성하고 미래를 살아가는 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이 책은 명나라 300여 년을 살아간 17명 문인들의 이야기이다. 행복한 삶을 위해 스펙을 쌓아 좋은 직장을 얻고 승진하는 것이 현대인의 일이라면, 명(明)대는 천하를 경영하고 국정을 잘 다스려보겠다는 ‘천하사무’의 원대한 이상을 품고 관직에 오르는 것이 사대부들의 사명이었다. 이렇게 관료제도 속으로 들어간 사대부들은 어떤 운명과 마주쳤을까? 과연 천하사무라는 꿈을 제대로 펼칠 수 있었을까?
요즘도 마찬가지지만 시대를 막론하고, “강직하게 살면 당대 권세에 핍박 받고, 뜻을 굽혀 아첨하면 후세에 멸시 당한다.”라는 동한(東漢) 시대에 유행하던 동요의 한 구절처럼 명대 사대부들도 기로에 부닥치곤 했다. 즐거움과 환희의 순간보다는 억압과 불편한 현실에 고민하던 이 책에 소개된 17명 명대 문인들의 삶을 통해 우리는 그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아간 지식인들의 고뇌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엿봄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천하사무’라는 큰 뜻은 아니더라도 현재를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명대 문인들의 삶을 통해 본 지식인들의 삶과 벼슬살이의 어려움
과거를 돌아봄으로써 현재를 반성하고 미래를 살아가는 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이 책은 명나라 300여 년을 살아간 17명 문인들의 이야기이다. 행복한 삶을 위해 스펙을 쌓아 좋은 직장을 얻고 승진하는 것이 현대인의 일이라면, 명(明)대는 천하를 경영하고 국정을 잘 다스려보겠다는 ‘천하사무’의 원대한 이상을 품고 관직에 오르는 것이 사대부들의 사명이었다. 이렇게 관료제도 속으로 들어간 사대부들은 어떤 운명과 마주쳤을까? 과연 천하사무라는 꿈을 제대로 펼칠 수 있었을까?
요즘도 마찬가지지만 시대를 막론하고, “강직하게 살면 당대 권세에 핍박 받고, 뜻을 굽혀 아첨하면 후세에 멸시 당한다.”라는 동한(東漢) 시대에 유행하던 동요의 한 구절처럼 명대 사대부들도 기로에 부닥치곤 했다. 즐거움과 환희의 순간보다는 억압과 불편한 현실에 고민하던 이 책에 소개된 17명 명대 문인들의 삶을 통해 우리는 그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아간 지식인들의 고뇌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엿봄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천하사무’라는 큰 뜻은 아니더라도 현재를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목차
편집자의 말: 명대 문인들을 통해 본 지식인, 그리고 관료들의 삶의 지침서 _05
1장 : 군신관계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유기劉基 | 1311~1375 _11
뛰어난 재주로 개국공신이 되었지만 의심이 많은 주군에게 버림받다
송렴宋濂 | 1310~1381 _27
평민 천자와 재야 출신 측근, 그러나 천하는 그를 품어주지 않았다
이선장李善長 | 1314~1390 _40
창업의 제일공신이었지만 모반죄로 사형에 처해지다
2장 : 역린을 건드리는 직언으로 화를 자초하다
방효유方孝孺 | 1357~1402 _53
십족을 멸한다는 위협에도 인의를 저버리지 않았다
해진解縉 | 1369~1415 _66
역린을 건드리고도 살아남았지만 완곡한 간언에 죽임을 당하다
이몽양李夢陽 | 1473~1530 _84
정치계에서도 거침이 없으니 관료사회는 그를 용납하지 않았다
강해康海 | 1475~1540 _96
비범한 재능이 화가 되어 우울한 말년을 보내다
3장 : 재주에 도취하여 세상으로부터 버림받다
당백호唐伯虎 | 1470~1524 _113
세속을 초월하는 재주를 지녔지만 세상은 그를 알아주지 않았다
축윤명祝允明 | 1461~1526 _123
세상을 경시하며 자유분방하게 살다
서문장徐文長 | 1521~1593 _132
실패한 막료가 뛰어난 예술적 성취를 이루다
4장 : 진정한 도(道)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
왕수인王守仁 | 1472~1529 _145
공적과 학문 모두 소인배에게 이용당하다
하심은何心隱 | 1517~1579 _163
강학으로 지방을 교란하다? 주류세력에게 당한 비극적인 최후
이지李贄 | 1527~1602 _175
말과 문장의 자유가 없다면 차라리 이단이 되리라!
5장 : 붕당싸움, 다른 파를 제거하라
고헌성顧憲成 | 1550~1612 _199
군자에게 정치란 어울리지 않음을 보여준 붕당과 당쟁의 희생양
고반룡高攀龍 | 1562~1626 _216
살고 죽는 것이 다르지 않다
정진선鄭振先 | 1572~1628 정만鄭? | 1594~1639 _226
당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부자의 억울한 죽음
전겸익錢謙益 | 1582~1664 _241
문인이 정치에 참여했다 당한 비극의 극치
옮긴이의 말: 지식인의 선택과 운명 _287
1장 : 군신관계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유기劉基 | 1311~1375 _11
뛰어난 재주로 개국공신이 되었지만 의심이 많은 주군에게 버림받다
송렴宋濂 | 1310~1381 _27
평민 천자와 재야 출신 측근, 그러나 천하는 그를 품어주지 않았다
이선장李善長 | 1314~1390 _40
창업의 제일공신이었지만 모반죄로 사형에 처해지다
2장 : 역린을 건드리는 직언으로 화를 자초하다
방효유方孝孺 | 1357~1402 _53
십족을 멸한다는 위협에도 인의를 저버리지 않았다
해진解縉 | 1369~1415 _66
역린을 건드리고도 살아남았지만 완곡한 간언에 죽임을 당하다
이몽양李夢陽 | 1473~1530 _84
정치계에서도 거침이 없으니 관료사회는 그를 용납하지 않았다
강해康海 | 1475~1540 _96
비범한 재능이 화가 되어 우울한 말년을 보내다
3장 : 재주에 도취하여 세상으로부터 버림받다
당백호唐伯虎 | 1470~1524 _113
세속을 초월하는 재주를 지녔지만 세상은 그를 알아주지 않았다
축윤명祝允明 | 1461~1526 _123
세상을 경시하며 자유분방하게 살다
서문장徐文長 | 1521~1593 _132
실패한 막료가 뛰어난 예술적 성취를 이루다
4장 : 진정한 도(道)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
왕수인王守仁 | 1472~1529 _145
공적과 학문 모두 소인배에게 이용당하다
하심은何心隱 | 1517~1579 _163
강학으로 지방을 교란하다? 주류세력에게 당한 비극적인 최후
이지李贄 | 1527~1602 _175
말과 문장의 자유가 없다면 차라리 이단이 되리라!
5장 : 붕당싸움, 다른 파를 제거하라
고헌성顧憲成 | 1550~1612 _199
군자에게 정치란 어울리지 않음을 보여준 붕당과 당쟁의 희생양
고반룡高攀龍 | 1562~1626 _216
살고 죽는 것이 다르지 않다
정진선鄭振先 | 1572~1628 정만鄭? | 1594~1639 _226
당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부자의 억울한 죽음
전겸익錢謙益 | 1582~1664 _241
문인이 정치에 참여했다 당한 비극의 극치
옮긴이의 말: 지식인의 선택과 운명 _287
책 속으로
유기의 죽음 뒤에는 분명 호유용의 정치적 보복이 있었다. 그러나 역사학자 오함(吳?)은 “유기의 죽음은 사실 태조의 음모에 의한 것이다. 호유용이 유기와 원한이 있는 것을 황제가 알았고 자신도 모르게 이용당한 것이다.”고 했다. 만약 이 말이 맞는다면 유기의 비극은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다. 또 유기에게는 선지자적인 예언 능력이 있다 했는데 어찌 이런 결말을 예측하지 못했단 말인가. 만약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당연히 모친의 충고를 새겨듣고 주원장의 휘하에 들어가지 말았어야 하지 않을까!
--- p. 25, 「유기」
윤수형(尹守衡)도 『명사궁(明史窮)』에서 비슷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황제도 송렴이 덕을 이야기하는 성실한 군자라는 것을 알았지만 결국 유배와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무슨 연유일까?”
그것은 ‘공명이 가져다주는 피로함’을 깨우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세상에 나오지 않고 은거하면서 공부에 만족했다면, 그래서 이후의 빛나는 공적이 없었다면 당연히 이런 비극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몇 사람이나 이러한 깨우침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 p. 38, 「송렴」
해진이 이처럼 거리낌 없이 대신들을 평했던 것은 자신은 ‘군자의 정정당당함’이라고 생각했겠으나 이는 관료사회에 뿌리 깊게 존재하는 잠재규칙(潛在規則)을 어긴 것으로,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해진은 유기(劉基)가 태조 앞에서 양헌, 왕광양, 호유용을 품평하다가 결국 호유용에게 보복 당한 것을 잊었던 것일까?
--- p. 77, 「해진」
만약 호종헌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서문장의 참모 생활은 계속되었을 것이고 대필 문서나 쓰다가 시문서화(詩文書?)의 예술적 성과를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호종헌의 죽음이 서문장에게는 화가 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예술적 성취를 이끌어내게 되었으니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그는 말년에 자신의 본 모습을 표현함으로써 대가로 추앙받게 되었다.
--- p. 141, 「서문장」
왕수인은 학생들에게 성현의 말씀을 반복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느낀 바’, 즉 심득을 이야기했다. 그는 특정한 함의-‘구제심이득(求諸心而得)’, 즉 공자의 기준으로 시비를 판단하지 말고 내 마음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것이 용장역으로 좌천당한 후 얻은 ‘깨달음’이었다. 만약 이 몇 년이라는 시간이 없었다면 어찌 ‘심득(心得)’이란 깨달음이 있었겠는가? 인생은 참으로 묘한 것이다.
--- p. 150, 「왕수인」
유가는 정치에서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를 가장 높은 단계라고 추앙했지만 정작 문인들의 정치참여는 항상 진퇴양난의 문제였다. 권력은 강직하고 아첨을 모르는 사람들을 포용하지 못했고, 반면 권세 있는 자에게 아부하며 빌붙으면 후세 사가들의 조롱을 피하지 못했다.
--- p. 25, 「유기」
윤수형(尹守衡)도 『명사궁(明史窮)』에서 비슷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황제도 송렴이 덕을 이야기하는 성실한 군자라는 것을 알았지만 결국 유배와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무슨 연유일까?”
그것은 ‘공명이 가져다주는 피로함’을 깨우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세상에 나오지 않고 은거하면서 공부에 만족했다면, 그래서 이후의 빛나는 공적이 없었다면 당연히 이런 비극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몇 사람이나 이러한 깨우침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 p. 38, 「송렴」
해진이 이처럼 거리낌 없이 대신들을 평했던 것은 자신은 ‘군자의 정정당당함’이라고 생각했겠으나 이는 관료사회에 뿌리 깊게 존재하는 잠재규칙(潛在規則)을 어긴 것으로,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해진은 유기(劉基)가 태조 앞에서 양헌, 왕광양, 호유용을 품평하다가 결국 호유용에게 보복 당한 것을 잊었던 것일까?
--- p. 77, 「해진」
만약 호종헌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서문장의 참모 생활은 계속되었을 것이고 대필 문서나 쓰다가 시문서화(詩文書?)의 예술적 성과를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호종헌의 죽음이 서문장에게는 화가 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예술적 성취를 이끌어내게 되었으니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그는 말년에 자신의 본 모습을 표현함으로써 대가로 추앙받게 되었다.
--- p. 141, 「서문장」
왕수인은 학생들에게 성현의 말씀을 반복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느낀 바’, 즉 심득을 이야기했다. 그는 특정한 함의-‘구제심이득(求諸心而得)’, 즉 공자의 기준으로 시비를 판단하지 말고 내 마음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것이 용장역으로 좌천당한 후 얻은 ‘깨달음’이었다. 만약 이 몇 년이라는 시간이 없었다면 어찌 ‘심득(心得)’이란 깨달음이 있었겠는가? 인생은 참으로 묘한 것이다.
--- p. 150, 「왕수인」
유가는 정치에서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를 가장 높은 단계라고 추앙했지만 정작 문인들의 정치참여는 항상 진퇴양난의 문제였다. 권력은 강직하고 아첨을 모르는 사람들을 포용하지 못했고, 반면 권세 있는 자에게 아부하며 빌붙으면 후세 사가들의 조롱을 피하지 못했다.
--- p. 277, 「전겸익」
출판사 리뷰
벼슬길은 부침이 심하고, 세상일은 알 수가 없다!
본서는 명대 사대부들의 평탄하지 않은 삶을 기록한 것이다. 저자인 판수즈 선생은 “책에 언급한 명사들은 대부분 평탄하지 못한 삶을 살다가 결국 비극으로 끝을 맺었다. 이들의 기록을 읽으면서 마음속으로 깊은 회한을 느꼈다.”라고 하였다. 그는 50여 년 동안 『만명사(晩明史)』, 『국사16강(國史十六講』), 『장거정과 만력황제(張居正與萬曆皇帝) 』등을 통해 이미 많은 독자들의 환영을 받은 바 있다.
이 책에 소개된 17명의 명대 문인들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기상을 가지고 뛰어난 학문적 성취로 남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성장한 인물들이다. ‘천하사무’라는 원대한 이상을 품고 군주를 보필하여 천하를 제패하거나 통치에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상적이라 믿었던 군신 관계는 본래 큰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군주의 사랑은 한시적이고 수시로 변하여서 결국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맺은 채 청사(靑史)에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이 책을 통해 명대 전반에 대한 시야를 넓히고, 그 시대를 살아간 지식인들과 사건에 대한 기록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을 기대한다. 결론적으로 명대 문인들의 일생은 즐거움과 환희의 순간보다는 억압과 불편한 현실에 고민하는 측면이 더 많았다. 이를 교훈으로 삼으면 오늘날의 지식인들, 그리고 관료들의 삶의 지침서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명대 문인들의 운명을 통해 본 지식인들의 삶과 벼슬살이의 어려움
오랜 시간, 중국의 전통 사대부들은 유가(儒家) 사상의 영향을 받아 “뜻을 가지면 천하의 백성들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들도록 노력해야 한다.”(『맹자·진심장구상(孟子·盡心章句上)』라는 이상을 품고 정치에 참여하였다. 특히 명대(明代) 사대부들은 전 시대인 원대(元代)보다 더 힘든 상황에서 천하를 경영하고 국정을 잘 다스려보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조정에 들어갔다. 그러나 현실 여건상 자신의 이상을 펼치기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고 화를 피하려 노력했지만 결국 불행한 최후를 맞거나 혹은 쫓겨나 강호를 떠돌며 세상 규범에 구애받지 않는 생을 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 이렇게 고상한 이론으로 무장한 뒤 진출한 관료제도 속에서 사대부들은 어떤 운명과 마주쳤는가? 그들은 과연 천하사무라는 꿈을 제대로 펼칠 수 있었을까?
전통사회에서 군권(君權)은 절대적이고 최후의 것이었으며, 관료들의 신권(臣權)은 그로부터 파생한 것이었다. 즉 정치와 행정이 분명하게 분리되지 않던 시대에 정치적 이상은 관료들의 행정조직을 통해 전국 각지의 말초 단위에서 실현하는 과정이었다. 유가(儒家)는 자칫 무한정으로 발휘될 듯한 군권에 대해 높은 이상적 가치를 부여하고 교육을 통해 모범적인 황제를 만들어 잘못된 군권 행사를 제한하려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정치에서 보여준 직접적인 성취보다도 더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따라서 유무형의 절대적 권력을 가지고 있는 군권의 행사는 항상 관료제도의 강한 저항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다. 성현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높은 이상과 절개를 가졌던 신하들은 정형화된 모습에서 벗어나려는 군권 행사에 대해 관직을 걸거나 때로는 목숨까지 내버리며 강하게 저항하였다. 수많은 천하사무 참가자들이 현실 정치에 좌절한 뒤의 비극적인 삶과 비참한 최후가 관료사회뿐 아니라 민간에서 오랫동안 회자되었다. 성군시대에 훌륭한 신하로서 좋은 정책을 실행하였더라도 권력싸움에서 실패하거나, 혼란한 시대에 충언과 절개로 죽음을 불사하며 후세에 롤 모델이 되었던 사대부들의 삶이 특히 그러했다.
강직하면 권세에 핍박 받고, 아첨하면 후세에 멸시 당한다!
“활시위처럼 강직한 사람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아 시체가 길가에 버려지게 되지만, 갈고리처럼 구부러지며 권세에 아부하는 사람은 높은 자리에 올라 온갖 부귀를 누리며 산다.”(直如弦, 死道邊; 曲如鉤, 反封侯.)
동한(東漢) 시대에 유행하던 동요의 구절로, 『후한서(後漢書)』에 기록되어 있는 말이다. 이처럼 중국의 전통 사대부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강직하게 살면 당대 권세에 핍박 받고, 뜻을 굽혀 아첨하면 후세에 멸시 당한다.”는 선택의 기로에 부닥치곤 하였다.
명대 300여 년 동안에도 이와 같은 삶을 살다간 사대부들이 끊이지 않았다. 강직하거나 아첨하는 것은 모두 사대부들의 가치관과 도덕적 선택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전통 사대부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삶의 목표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학문이 뛰어나다고 해서 정계에 나아가 성공한 관료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뜻을 세우고 천하의 백성들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들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이상을 품고 정치에 참여하였지만 대부분 평탄하지 못한 삶을 살다가 결국 비극으로 끝을 맺는 경우가 많았다.
명말 청초 문인으로 『국각(國?)』을 지었던 담천(談遷)은 “관리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훗날 관직에 나가려는 많은 이들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벼슬살이의 어려움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시대를 리더하는 지식인, 고위 관료에의 꿈을 지닌 인재들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경구로 삼아야 할 대목이다.
본서는 명대 사대부들의 평탄하지 않은 삶을 기록한 것이다. 저자인 판수즈 선생은 “책에 언급한 명사들은 대부분 평탄하지 못한 삶을 살다가 결국 비극으로 끝을 맺었다. 이들의 기록을 읽으면서 마음속으로 깊은 회한을 느꼈다.”라고 하였다. 그는 50여 년 동안 『만명사(晩明史)』, 『국사16강(國史十六講』), 『장거정과 만력황제(張居正與萬曆皇帝) 』등을 통해 이미 많은 독자들의 환영을 받은 바 있다.
이 책에 소개된 17명의 명대 문인들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기상을 가지고 뛰어난 학문적 성취로 남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성장한 인물들이다. ‘천하사무’라는 원대한 이상을 품고 군주를 보필하여 천하를 제패하거나 통치에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상적이라 믿었던 군신 관계는 본래 큰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군주의 사랑은 한시적이고 수시로 변하여서 결국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맺은 채 청사(靑史)에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이 책을 통해 명대 전반에 대한 시야를 넓히고, 그 시대를 살아간 지식인들과 사건에 대한 기록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을 기대한다. 결론적으로 명대 문인들의 일생은 즐거움과 환희의 순간보다는 억압과 불편한 현실에 고민하는 측면이 더 많았다. 이를 교훈으로 삼으면 오늘날의 지식인들, 그리고 관료들의 삶의 지침서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명대 문인들의 운명을 통해 본 지식인들의 삶과 벼슬살이의 어려움
오랜 시간, 중국의 전통 사대부들은 유가(儒家) 사상의 영향을 받아 “뜻을 가지면 천하의 백성들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들도록 노력해야 한다.”(『맹자·진심장구상(孟子·盡心章句上)』라는 이상을 품고 정치에 참여하였다. 특히 명대(明代) 사대부들은 전 시대인 원대(元代)보다 더 힘든 상황에서 천하를 경영하고 국정을 잘 다스려보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조정에 들어갔다. 그러나 현실 여건상 자신의 이상을 펼치기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고 화를 피하려 노력했지만 결국 불행한 최후를 맞거나 혹은 쫓겨나 강호를 떠돌며 세상 규범에 구애받지 않는 생을 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 이렇게 고상한 이론으로 무장한 뒤 진출한 관료제도 속에서 사대부들은 어떤 운명과 마주쳤는가? 그들은 과연 천하사무라는 꿈을 제대로 펼칠 수 있었을까?
전통사회에서 군권(君權)은 절대적이고 최후의 것이었으며, 관료들의 신권(臣權)은 그로부터 파생한 것이었다. 즉 정치와 행정이 분명하게 분리되지 않던 시대에 정치적 이상은 관료들의 행정조직을 통해 전국 각지의 말초 단위에서 실현하는 과정이었다. 유가(儒家)는 자칫 무한정으로 발휘될 듯한 군권에 대해 높은 이상적 가치를 부여하고 교육을 통해 모범적인 황제를 만들어 잘못된 군권 행사를 제한하려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정치에서 보여준 직접적인 성취보다도 더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따라서 유무형의 절대적 권력을 가지고 있는 군권의 행사는 항상 관료제도의 강한 저항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다. 성현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높은 이상과 절개를 가졌던 신하들은 정형화된 모습에서 벗어나려는 군권 행사에 대해 관직을 걸거나 때로는 목숨까지 내버리며 강하게 저항하였다. 수많은 천하사무 참가자들이 현실 정치에 좌절한 뒤의 비극적인 삶과 비참한 최후가 관료사회뿐 아니라 민간에서 오랫동안 회자되었다. 성군시대에 훌륭한 신하로서 좋은 정책을 실행하였더라도 권력싸움에서 실패하거나, 혼란한 시대에 충언과 절개로 죽음을 불사하며 후세에 롤 모델이 되었던 사대부들의 삶이 특히 그러했다.
강직하면 권세에 핍박 받고, 아첨하면 후세에 멸시 당한다!
“활시위처럼 강직한 사람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아 시체가 길가에 버려지게 되지만, 갈고리처럼 구부러지며 권세에 아부하는 사람은 높은 자리에 올라 온갖 부귀를 누리며 산다.”(直如弦, 死道邊; 曲如鉤, 反封侯.)
동한(東漢) 시대에 유행하던 동요의 구절로, 『후한서(後漢書)』에 기록되어 있는 말이다. 이처럼 중국의 전통 사대부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강직하게 살면 당대 권세에 핍박 받고, 뜻을 굽혀 아첨하면 후세에 멸시 당한다.”는 선택의 기로에 부닥치곤 하였다.
명대 300여 년 동안에도 이와 같은 삶을 살다간 사대부들이 끊이지 않았다. 강직하거나 아첨하는 것은 모두 사대부들의 가치관과 도덕적 선택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전통 사대부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삶의 목표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학문이 뛰어나다고 해서 정계에 나아가 성공한 관료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뜻을 세우고 천하의 백성들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들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이상을 품고 정치에 참여하였지만 대부분 평탄하지 못한 삶을 살다가 결국 비극으로 끝을 맺는 경우가 많았다.
명말 청초 문인으로 『국각(國?)』을 지었던 담천(談遷)은 “관리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훗날 관직에 나가려는 많은 이들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벼슬살이의 어려움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시대를 리더하는 지식인, 고위 관료에의 꿈을 지닌 인재들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경구로 삼아야 할 대목이다.
옮긴이의 말 / 이화승
판수즈 선생은 푸단대학에서 명청사 연구로 많은 업적을 남긴 원로학자이다. 최근 중국학계에서는 학자들이 은퇴 이후 비로소 소재에 구속받지 않고 더 자유롭고 왕성한 활동을 통해 대중에게 다가가는 경우가 많다. 깊이 있는 학술적 토론보다는 오랜 시간 축적했던 연구를 기초로 일반인들이 느끼는 현실적 문제를 대중의 눈높이로 다루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국가 경영에 관심을 가진 뛰어난 지식인들이 현장에서 숭고한 이상을 펼쳐보기도 전에 자리와 권세에 빠져 세간의 지탄을 받곤 한다. 또 어떤 젊은이들은 관직을 단지 안정된 직장이라는 이유만으로 선택하다보니 관직이 가진 공적인 의미와는 거리가 먼 단조로운 생활에 지루해하기도 한다.
천하사무를 위해 긴장감을 가지고 사사로운 이익과 단호하게 선을 긋고 살 수 있겠는가? 관료는 외형적으로 보이는 정치적, 법률적 책임보다도 더 높은 내면의 도덕적 가치를 지켜야 하는 자리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몇 해 전에 경세가(經世家)를 자처하며 천하사무에 뜻을 품었던 한 선배가 지병으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던 것을 보고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경험이 있다. 정계는 여전히 당쟁과 영합이 판을 치고 언어의 유희가 난무하는데 마지막 순간까지 놓지 못할 만큼 천하사무란 그렇게 매력적인 것이었을까?
판수즈 선생은 푸단대학에서 명청사 연구로 많은 업적을 남긴 원로학자이다. 최근 중국학계에서는 학자들이 은퇴 이후 비로소 소재에 구속받지 않고 더 자유롭고 왕성한 활동을 통해 대중에게 다가가는 경우가 많다. 깊이 있는 학술적 토론보다는 오랜 시간 축적했던 연구를 기초로 일반인들이 느끼는 현실적 문제를 대중의 눈높이로 다루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국가 경영에 관심을 가진 뛰어난 지식인들이 현장에서 숭고한 이상을 펼쳐보기도 전에 자리와 권세에 빠져 세간의 지탄을 받곤 한다. 또 어떤 젊은이들은 관직을 단지 안정된 직장이라는 이유만으로 선택하다보니 관직이 가진 공적인 의미와는 거리가 먼 단조로운 생활에 지루해하기도 한다.
천하사무를 위해 긴장감을 가지고 사사로운 이익과 단호하게 선을 긋고 살 수 있겠는가? 관료는 외형적으로 보이는 정치적, 법률적 책임보다도 더 높은 내면의 도덕적 가치를 지켜야 하는 자리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몇 해 전에 경세가(經世家)를 자처하며 천하사무에 뜻을 품었던 한 선배가 지병으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던 것을 보고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경험이 있다. 정계는 여전히 당쟁과 영합이 판을 치고 언어의 유희가 난무하는데 마지막 순간까지 놓지 못할 만큼 천하사무란 그렇게 매력적인 것이었을까?
'41.중국.동아시아 이해 (독서>책소개) > 1.중국역사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 팽창에 대한 전략 (2022) (0) | 2022.10.03 |
---|---|
장거정 평전 : 과연 시대는 개혁을 바라는가 - 명나라 말기 (0) | 2022.09.13 |
상인이야기 (0) | 2022.09.13 |
일하는 사람들의 조상신 이야기 (0) | 2022.08.26 |
오랑캐의 역사 : 만리장성에서 밖에서 보는 중국사 (0) | 2022.08.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