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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일그러진 근대사 바로 보기
1910년, 대한제국은 사라졌다. 일본의 강제에 의해 병합된 대한제국은 국권을 상실하고 35년의 긴 세월 동안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경술국치의 현장은 어디일까. 을사조약의 현장이 그럭저럭 관심과 보존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데 반해 경술국치의 현장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암울했던 역사의 흔적을 기억하는 것이 달가운 일은 아니지만 경술국치의 현장이며 역대 통감과 총독의 소굴이었던 곳에 표지석 하나 정도를 남기자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통감관저, 잊혀진 경술국치의 현장』에는 통감관저 외에도 식민 통치 권력의 본거지였던 남산 왜성대의 조선총독부가 소개된다. 또한 을사조약의 현장인 수옥헌과 한국주차일본군사령관저였던 대관정과 같이 역사적 내력을 간직한 공간도 다뤄진다. 그리고 전차, 대한제국의 법률, 고종황제의 가족사진 등 일제강점기에 관련된 역사적 소재도 실려 있다.
역사는 과거를 바라보는 틀이다. 동시에 역사는 잘못된 역사적 이해를 바로잡고, 오류가 있는 사료를 정정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 책은 식민지 시기의 역사 이해와 우리가 과거사를 다루는 태도 모두를 꼬집는다.
1910년, 대한제국은 사라졌다. 일본의 강제에 의해 병합된 대한제국은 국권을 상실하고 35년의 긴 세월 동안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경술국치의 현장은 어디일까. 을사조약의 현장이 그럭저럭 관심과 보존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데 반해 경술국치의 현장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암울했던 역사의 흔적을 기억하는 것이 달가운 일은 아니지만 경술국치의 현장이며 역대 통감과 총독의 소굴이었던 곳에 표지석 하나 정도를 남기자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통감관저, 잊혀진 경술국치의 현장』에는 통감관저 외에도 식민 통치 권력의 본거지였던 남산 왜성대의 조선총독부가 소개된다. 또한 을사조약의 현장인 수옥헌과 한국주차일본군사령관저였던 대관정과 같이 역사적 내력을 간직한 공간도 다뤄진다. 그리고 전차, 대한제국의 법률, 고종황제의 가족사진 등 일제강점기에 관련된 역사적 소재도 실려 있다.
역사는 과거를 바라보는 틀이다. 동시에 역사는 잘못된 역사적 이해를 바로잡고, 오류가 있는 사료를 정정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 책은 식민지 시기의 역사 이해와 우리가 과거사를 다루는 태도 모두를 꼬집는다.
목차
제1부 낯선 근대의 거리, 불편한 역사의 현장
1. ‘통감관저’, 잊혀진 경술국치의 현장
-그곳에는 이제 어떠한 흔적이 남아 있을까?
2. 조선총독부, 남산 왜성대에 우뚝 솟다
-과학의 요람으로 사라진 식민통치 권력의 본거지
3. 누가 인왕산에 ‘동아청년단결’이란 바위글씨를 새겼나?
-1939년 제15회 대일본청년단대회가 남긴 뼈아픈 상처
4. 왜 하필 매국노의 집터에서 독립선언은 이뤄졌을까?
-삼일만세사건의 현장인 ‘명월관지점’ 혹은 ‘태화관’의 내력
5. 독립관(獨立館), 결국 매국노 송병준의 담배공장이 되다
-일진회(一進會) 일당의 소굴로 변한 독립관의 내력
6. 대한제국 궁내부의 게스트 하우스, 주차장터로 남다
-한국주차일본군사령관저였던 대관정(大觀亭)의 내력
7. 을사조약의 현장 수옥헌(漱玉軒) 혹은 중명전(重明殿)의 내력
-현존하는 덕수궁 중명전 건물은 과연 언제 건립되었을까?
제2부 섣부른 역사고증, 때로 만들어진 전통
8. 누가 자꾸 ‘원구단’을 ‘환구단’이라 우기는가?
-‘?’이라는 글자의 소릿값에 대한 오해와 진실
9. 저 돌북은 왜 황궁우 옆에 놓여 있을까?
-원구단, 황궁우, 석고단, 조선호텔이 어우러진 공간
10. 대한제국의 제1호 법률이 도량형법, 과연 맞나?
-당시의 법령체계를 잘못 이해한 공허한 ‘최초’ 주장
11. 대한제국 시절 전차 개통, 동양 최초 맞나?
-도쿄보다 빠르지만 교토보다는 늦었던 서울의 전차 부설
12. 남대문 홍예의 통로바닥이 높아진 것이 전차 때문?
-명확한 자료고증 없는 성급한 복원 시도는 역사 훼손
13. 고종황제 가족사진, ‘조작’됐다
-박물관에서 퇴출되어야 할 엉터리 역사자료
제3부 땅 이름에 관한 오해 혹은 진실
14. ‘호미곶(虎尾串)’, 암만 봐도 억지스런 땅 이름
-동을배곶은 왜 난데없이 호미곶으로 둔갑했나?
15. 가수 배호는 ‘삼각지(三角地)’의 유래를 알았을까?
-일제가 이 땅에 남겨놓은 ‘세모꼴’ 지명의 흔적
16. 창덕궁과 남산총독부를 잇는 가교, 관수교(觀水橋)
-청계천 관수교라는 이름의 부활은 과연 합당한가?
17. 인천 송도(松島)는 과연 또 다른 왜색지명일까?
-대전?목포?청진에도 ‘송도정(松島町)’이 있었다
18. 과연 유릉(裕陵) 때문에 ‘능동(陵洞)’이 생겨났을까?
-어린이대공원이 있는 능동의 지명 유래에 대한 재검토
19. 왜색지명 ‘태합굴’, 잠시 세상을 시끄럽게 하다
-이른바 ‘통영태합굴해저도로’에 대한 자료 고증
제4부 뒤틀어진 식민지시대의 일상 속에서
20. 국회의원의 봉급은 왜 세비(歲費)라고 부르나?
-그 뿌리는 1889년의 일본제국 ‘의원법(議院法)’(?)
21. 대일본제국, 마침내 시간마저 점령하다
-동경 135도, 그리고 일본·조선·만주·대만의 표준시
22. 80년 전에도 ‘우량아선발대회’는 있었다
-첫 공식 대회는 1928년 매일신보 주최 ‘유유아심사회’
23. “덕수궁 전하께오서 옥돌에 재미를 붙이샤......”
-망국의 황제는 어떻게 소일하였나?
1. ‘통감관저’, 잊혀진 경술국치의 현장
-그곳에는 이제 어떠한 흔적이 남아 있을까?
2. 조선총독부, 남산 왜성대에 우뚝 솟다
-과학의 요람으로 사라진 식민통치 권력의 본거지
3. 누가 인왕산에 ‘동아청년단결’이란 바위글씨를 새겼나?
-1939년 제15회 대일본청년단대회가 남긴 뼈아픈 상처
4. 왜 하필 매국노의 집터에서 독립선언은 이뤄졌을까?
-삼일만세사건의 현장인 ‘명월관지점’ 혹은 ‘태화관’의 내력
5. 독립관(獨立館), 결국 매국노 송병준의 담배공장이 되다
-일진회(一進會) 일당의 소굴로 변한 독립관의 내력
6. 대한제국 궁내부의 게스트 하우스, 주차장터로 남다
-한국주차일본군사령관저였던 대관정(大觀亭)의 내력
7. 을사조약의 현장 수옥헌(漱玉軒) 혹은 중명전(重明殿)의 내력
-현존하는 덕수궁 중명전 건물은 과연 언제 건립되었을까?
제2부 섣부른 역사고증, 때로 만들어진 전통
8. 누가 자꾸 ‘원구단’을 ‘환구단’이라 우기는가?
-‘?’이라는 글자의 소릿값에 대한 오해와 진실
9. 저 돌북은 왜 황궁우 옆에 놓여 있을까?
-원구단, 황궁우, 석고단, 조선호텔이 어우러진 공간
10. 대한제국의 제1호 법률이 도량형법, 과연 맞나?
-당시의 법령체계를 잘못 이해한 공허한 ‘최초’ 주장
11. 대한제국 시절 전차 개통, 동양 최초 맞나?
-도쿄보다 빠르지만 교토보다는 늦었던 서울의 전차 부설
12. 남대문 홍예의 통로바닥이 높아진 것이 전차 때문?
-명확한 자료고증 없는 성급한 복원 시도는 역사 훼손
13. 고종황제 가족사진, ‘조작’됐다
-박물관에서 퇴출되어야 할 엉터리 역사자료
제3부 땅 이름에 관한 오해 혹은 진실
14. ‘호미곶(虎尾串)’, 암만 봐도 억지스런 땅 이름
-동을배곶은 왜 난데없이 호미곶으로 둔갑했나?
15. 가수 배호는 ‘삼각지(三角地)’의 유래를 알았을까?
-일제가 이 땅에 남겨놓은 ‘세모꼴’ 지명의 흔적
16. 창덕궁과 남산총독부를 잇는 가교, 관수교(觀水橋)
-청계천 관수교라는 이름의 부활은 과연 합당한가?
17. 인천 송도(松島)는 과연 또 다른 왜색지명일까?
-대전?목포?청진에도 ‘송도정(松島町)’이 있었다
18. 과연 유릉(裕陵) 때문에 ‘능동(陵洞)’이 생겨났을까?
-어린이대공원이 있는 능동의 지명 유래에 대한 재검토
19. 왜색지명 ‘태합굴’, 잠시 세상을 시끄럽게 하다
-이른바 ‘통영태합굴해저도로’에 대한 자료 고증
제4부 뒤틀어진 식민지시대의 일상 속에서
20. 국회의원의 봉급은 왜 세비(歲費)라고 부르나?
-그 뿌리는 1889년의 일본제국 ‘의원법(議院法)’(?)
21. 대일본제국, 마침내 시간마저 점령하다
-동경 135도, 그리고 일본·조선·만주·대만의 표준시
22. 80년 전에도 ‘우량아선발대회’는 있었다
-첫 공식 대회는 1928년 매일신보 주최 ‘유유아심사회’
23. “덕수궁 전하께오서 옥돌에 재미를 붙이샤......”
-망국의 황제는 어떻게 소일하였나?
출판사 리뷰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해인 2010년, 경술국치의 현장이었던 ‘통감관저’ 등 일그러진 우리 근대 역사의 흔적을 찾아가 치욕의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고 기록하고자 하는 책, 『통감관저, 잊혀진 경술국치의 현장』이 출간되었다.
그 어느 때보다 100년 전의 해묵은 기억과 기록들을 간추려보고, 이를 되새기고, 다시 짚어야 할 것은 다시 짚고 넘어가야 할 시점이기에 출간의 의미가 클 것이다.
오랫동안 근대사에 관한 기록들을 집요하게 파헤치고 성과를 모아내는 작업을 해온 저자의 세 번째 저작물인 『통감관저, 잊혀진 경술국치의 현장』의 주제는 이번에도 역시 일제강점기 이후 역사의 찌꺼기처럼 남겨진 장소와 건물과 사람과 사건과 현상과 사실에 관한 것들이다.
우리가 상식처럼 여기지만 알고 보면 터무니없는 오해와 오류로 범벅된 사례들이 여전히 넘쳐나는 까닭에, 사실관계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근대사의 현장들에 대한 바로 잡기의 시도가 계속될 수밖에 없으리라.
경술국치의 현장이었던 ‘통감관저’는 물론이고 식민통치권력의 본거지였던 남산 왜성대의 ‘조선총독부’, 을사조약의 현장인 ‘수옥헌’과 한국주차일본군사령관저였던 ‘대관정’과 같은 역사적 공간의 내력을 일괄하여 살펴보는 이 책의 여정은 의미가 깊은 한국과 서울 탐방길이 될 것이다.
‘한일합병조약’의 체결장소, 남산 왜성대 총독관저
을사조약의 현장이 그럭저럭 관심과 보존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과는 달리 정작 ‘경술국치’의 현장에는 아무런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동아일보」 1920년 8월 29일자에 사진 한 장과 다음과 같은 설명문이 붙어 있다.
“오늘! 십 주년 전의 금월 금일이 한국이 일본에 합병되던 날이올시다. 금년 팔월 이십구일이 일한합병의 십 주년 기념일이올시다. 사진은 일한합병조약에 양국 편에서 도장을 찍던 곳이니 지금 총독관저 안에 있는 처소이오. 그 방에 서 있는 사람은 당시 일본 대표자되는 한국통감으로 합병조약을 체결한 테라우치 마사타케요, 왼편의 인물은 한국 편으로 조약에 도장을 찍은 당시 한국 총리대신 이완용.”
대한제국의 멸망을 가져온 이른바 ‘한일합병조약’의 체결장소는 과연 어디일까? 몇몇 자료에는 지금의 서울종합방재센터(즉 예전의 국가안전기획부 남산청사)가 자리한 곳이라고 하는 설명도 없지 않으나, 실제로는 소방방재본부에서 서울종합방재센터 쪽으로 들어가는 길목의 숲 속에 있는 ‘다목적광장’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제법 너른 공터가 바로 예전의 남산 왜성대 총독관저가 있었던 자리이다.
근거로는 몇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일례로 1911년 1월 1일에 발행된 유락사(有樂社)의 ‘사진화보 그래픽(寫眞畵報 グラフック)’ 특별증간호 「일본지조선(日本之朝鮮)」에 남산총독관저의 전경을 촬영한 사진자료가 있는데, 여길 보면 진입로의 형태가 지금 모습과 흡사하다.
현재 이곳에는 식민통치자들의 본거지가 있었다는 흔적은 그 어디에도 보이질 않는다. 공원 벤치와 농구 골대가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있을 따름이다. 암울했던 역사의 흔적을 기억하고 들춰내는 일이 그리 달가울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곳이 ‘경술국치’의 현장이었으며 이 땅을 지배했던 역대 통감과 총독의 소굴이었다는 사실을 담은 표지석 하나 정도는 남겨두었으면 하는 게 저자의 바람이다.
누가 인왕산에 ‘동아청년단결’이란 바위글씨를 새겼나?
서울 시민에게 친숙한 모습을 자랑하는 인왕산에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던 숨겨진 상처가 있다. 아니, 조금만 세심히 살펴보면 누구나 그 모습을 여실히 들여다볼 수 있다.
인왕산에 올랐다가 창의문 방향으로 하산행로를 잡고 막 철제계단 등산로를 내려서자마자 오던 길로 되돌아보면, 인왕산 정상의 동편으로 흘러내린 듯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암벽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이것이 곧 ‘병풍바위’이다. 아직은 출입이 제한되어 있어, 이곳에는 간혹 정식허가 절차를 거친 몇몇 산악회 회원들의 발길만이 찾아들 뿐인 상태이다.
웅장한 암벽의 자태를 감상하고 있노라면, 바위의 아래쪽에 보일 듯 말 듯 무슨 글씨의 흔적 같은 것이 여럿 눈에 들어온다. 무슨 글씨를 새겼다가 다시 깎아낸 듯이 그 내용을 알 수 없게 만들어진 흔적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친필로 쓴 ‘동아청년단결(東亞靑年團結)’이라는 구호를 새겨놓은 바위글씨였다. 일제강점기, 인왕산이 서울 시내의 어디에서나 제일 잘 올려다보이는 공간이라는 사실 때문에 생긴 역사의 생채기인 것이다.
1939년 가을에 식민지 조선의 수도 경성에서 이른바 ‘대일본청년단대회(大日本靑年團大會)’가 개최되었고, 이를 영원히 기리기 위한 사업의 하나로 인왕산 암벽에 기념각자(記念刻字)로 남겨놓은 것이 바로 이 글씨였다. 그리고 「조선일보」 1962년 6월 26일자에 “[인왕산(仁旺山)의 추흔(醜痕)”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소설가 월탄 박종화 선생의 다음과 같은 칼럼을 보면 그 시절까지도 인왕산의 바위글씨가 남아 있었던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인왕산 절벽암반 위에는 일제가 최후 발악을 하던 때 새겨놓은 ‘대동아청년단결(大東亞靑年團結) 황기(皇記) 2599년 9월 16일 남차랑(南次郞) 운운’이란 문구가 그냥 남아 있는데 이번 서울시에서는 민족정신 앙양과 자주정신 고취에 미치는 바 영향이 많다고 하여 82만 원을 들여 삭제 공사를 추진 중이라 하며 3월 말까지는 끝날 것이라는데 이와 아울러 일반 시민도 왜색 간판을 자진 없애주기를 바란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군국주의 시절의 망령이 마치 낙인을 찍어놓은 것처럼 또렷하게 남아 있으니 저들의 만행을 어찌 잊을 수 있을 것인가?
식민지 시대의 일상사 속에 담긴 이야기들
이밖에도 이 책에는 고종황제의 가족사진이 ‘조작’되는 과정, 삼일만세사건의 현장인 ‘명월관지점’ 혹은 ‘태화관’의 내력 등이 실려 있다. 또한 청계천 관수교라는 이름의 부활은 과연 합당한가 하는 문제도 살펴본다.
그리고 도쿄보다 빠르지만 교토보다는 늦었던 서울의 전차 부설 문제, 대한제국의 제1호 법률이 도량형법이라는 주장에 대한 문제제기도 이루어지고 있다.
동을배곶이라고 불리다가 난데없이 호미곶으로 둔갑한 지명에 얽힌 이야기, 국회의원의 봉급을 왜 세비(歲費)라고 부르는가에 대한 유래, ‘동경 135도, 일본·조선·만주·대만의 표준시’에 대해 알아야 할 것들, 80년 전에도 있었던 ‘우량아선발대회’, 당구를 치면서 소일한 망국의 황제 모습 등 식민지시대의 소소한 일상을 알 수 있는 사연들도 실려 있다.
역사에 관한 글을 정리한다는 것은 거기에 담긴 교훈과 지혜를 찾아내는 일에 주안점이 주어지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에 앞서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잘못된 역사기록과 해석의 착오는 없는지를 찬찬히 가려내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도 그만큼 중요한 일이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정리한 여러 편의 얘기를 통해서나마 벌써 잊혀졌거나 잘못 알려졌던 관련 사실들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한번쯤 곰곰이 되새겨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그 어느 때보다 100년 전의 해묵은 기억과 기록들을 간추려보고, 이를 되새기고, 다시 짚어야 할 것은 다시 짚고 넘어가야 할 시점이기에 출간의 의미가 클 것이다.
오랫동안 근대사에 관한 기록들을 집요하게 파헤치고 성과를 모아내는 작업을 해온 저자의 세 번째 저작물인 『통감관저, 잊혀진 경술국치의 현장』의 주제는 이번에도 역시 일제강점기 이후 역사의 찌꺼기처럼 남겨진 장소와 건물과 사람과 사건과 현상과 사실에 관한 것들이다.
우리가 상식처럼 여기지만 알고 보면 터무니없는 오해와 오류로 범벅된 사례들이 여전히 넘쳐나는 까닭에, 사실관계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근대사의 현장들에 대한 바로 잡기의 시도가 계속될 수밖에 없으리라.
경술국치의 현장이었던 ‘통감관저’는 물론이고 식민통치권력의 본거지였던 남산 왜성대의 ‘조선총독부’, 을사조약의 현장인 ‘수옥헌’과 한국주차일본군사령관저였던 ‘대관정’과 같은 역사적 공간의 내력을 일괄하여 살펴보는 이 책의 여정은 의미가 깊은 한국과 서울 탐방길이 될 것이다.
‘한일합병조약’의 체결장소, 남산 왜성대 총독관저
을사조약의 현장이 그럭저럭 관심과 보존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과는 달리 정작 ‘경술국치’의 현장에는 아무런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동아일보」 1920년 8월 29일자에 사진 한 장과 다음과 같은 설명문이 붙어 있다.
“오늘! 십 주년 전의 금월 금일이 한국이 일본에 합병되던 날이올시다. 금년 팔월 이십구일이 일한합병의 십 주년 기념일이올시다. 사진은 일한합병조약에 양국 편에서 도장을 찍던 곳이니 지금 총독관저 안에 있는 처소이오. 그 방에 서 있는 사람은 당시 일본 대표자되는 한국통감으로 합병조약을 체결한 테라우치 마사타케요, 왼편의 인물은 한국 편으로 조약에 도장을 찍은 당시 한국 총리대신 이완용.”
대한제국의 멸망을 가져온 이른바 ‘한일합병조약’의 체결장소는 과연 어디일까? 몇몇 자료에는 지금의 서울종합방재센터(즉 예전의 국가안전기획부 남산청사)가 자리한 곳이라고 하는 설명도 없지 않으나, 실제로는 소방방재본부에서 서울종합방재센터 쪽으로 들어가는 길목의 숲 속에 있는 ‘다목적광장’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제법 너른 공터가 바로 예전의 남산 왜성대 총독관저가 있었던 자리이다.
근거로는 몇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일례로 1911년 1월 1일에 발행된 유락사(有樂社)의 ‘사진화보 그래픽(寫眞畵報 グラフック)’ 특별증간호 「일본지조선(日本之朝鮮)」에 남산총독관저의 전경을 촬영한 사진자료가 있는데, 여길 보면 진입로의 형태가 지금 모습과 흡사하다.
현재 이곳에는 식민통치자들의 본거지가 있었다는 흔적은 그 어디에도 보이질 않는다. 공원 벤치와 농구 골대가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있을 따름이다. 암울했던 역사의 흔적을 기억하고 들춰내는 일이 그리 달가울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곳이 ‘경술국치’의 현장이었으며 이 땅을 지배했던 역대 통감과 총독의 소굴이었다는 사실을 담은 표지석 하나 정도는 남겨두었으면 하는 게 저자의 바람이다.
누가 인왕산에 ‘동아청년단결’이란 바위글씨를 새겼나?
서울 시민에게 친숙한 모습을 자랑하는 인왕산에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던 숨겨진 상처가 있다. 아니, 조금만 세심히 살펴보면 누구나 그 모습을 여실히 들여다볼 수 있다.
인왕산에 올랐다가 창의문 방향으로 하산행로를 잡고 막 철제계단 등산로를 내려서자마자 오던 길로 되돌아보면, 인왕산 정상의 동편으로 흘러내린 듯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암벽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이것이 곧 ‘병풍바위’이다. 아직은 출입이 제한되어 있어, 이곳에는 간혹 정식허가 절차를 거친 몇몇 산악회 회원들의 발길만이 찾아들 뿐인 상태이다.
웅장한 암벽의 자태를 감상하고 있노라면, 바위의 아래쪽에 보일 듯 말 듯 무슨 글씨의 흔적 같은 것이 여럿 눈에 들어온다. 무슨 글씨를 새겼다가 다시 깎아낸 듯이 그 내용을 알 수 없게 만들어진 흔적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친필로 쓴 ‘동아청년단결(東亞靑年團結)’이라는 구호를 새겨놓은 바위글씨였다. 일제강점기, 인왕산이 서울 시내의 어디에서나 제일 잘 올려다보이는 공간이라는 사실 때문에 생긴 역사의 생채기인 것이다.
1939년 가을에 식민지 조선의 수도 경성에서 이른바 ‘대일본청년단대회(大日本靑年團大會)’가 개최되었고, 이를 영원히 기리기 위한 사업의 하나로 인왕산 암벽에 기념각자(記念刻字)로 남겨놓은 것이 바로 이 글씨였다. 그리고 「조선일보」 1962년 6월 26일자에 “[인왕산(仁旺山)의 추흔(醜痕)”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소설가 월탄 박종화 선생의 다음과 같은 칼럼을 보면 그 시절까지도 인왕산의 바위글씨가 남아 있었던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인왕산 절벽암반 위에는 일제가 최후 발악을 하던 때 새겨놓은 ‘대동아청년단결(大東亞靑年團結) 황기(皇記) 2599년 9월 16일 남차랑(南次郞) 운운’이란 문구가 그냥 남아 있는데 이번 서울시에서는 민족정신 앙양과 자주정신 고취에 미치는 바 영향이 많다고 하여 82만 원을 들여 삭제 공사를 추진 중이라 하며 3월 말까지는 끝날 것이라는데 이와 아울러 일반 시민도 왜색 간판을 자진 없애주기를 바란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군국주의 시절의 망령이 마치 낙인을 찍어놓은 것처럼 또렷하게 남아 있으니 저들의 만행을 어찌 잊을 수 있을 것인가?
식민지 시대의 일상사 속에 담긴 이야기들
이밖에도 이 책에는 고종황제의 가족사진이 ‘조작’되는 과정, 삼일만세사건의 현장인 ‘명월관지점’ 혹은 ‘태화관’의 내력 등이 실려 있다. 또한 청계천 관수교라는 이름의 부활은 과연 합당한가 하는 문제도 살펴본다.
그리고 도쿄보다 빠르지만 교토보다는 늦었던 서울의 전차 부설 문제, 대한제국의 제1호 법률이 도량형법이라는 주장에 대한 문제제기도 이루어지고 있다.
동을배곶이라고 불리다가 난데없이 호미곶으로 둔갑한 지명에 얽힌 이야기, 국회의원의 봉급을 왜 세비(歲費)라고 부르는가에 대한 유래, ‘동경 135도, 일본·조선·만주·대만의 표준시’에 대해 알아야 할 것들, 80년 전에도 있었던 ‘우량아선발대회’, 당구를 치면서 소일한 망국의 황제 모습 등 식민지시대의 소소한 일상을 알 수 있는 사연들도 실려 있다.
역사에 관한 글을 정리한다는 것은 거기에 담긴 교훈과 지혜를 찾아내는 일에 주안점이 주어지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에 앞서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잘못된 역사기록과 해석의 착오는 없는지를 찬찬히 가려내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도 그만큼 중요한 일이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정리한 여러 편의 얘기를 통해서나마 벌써 잊혀졌거나 잘못 알려졌던 관련 사실들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한번쯤 곰곰이 되새겨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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