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한국근대사 [웹북] <역사>/7.독립운동 (단체.인물.의병) 52

[웹북] 김원봉 (1808~1958) - 의열단 단장

김원봉김원봉대한민국의 임시정부 국무위원임기 1944년~?주석 김구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제2대 로동상임기 1952년 5월 29일~1958년 9월 11일주석 김두봉(북 국가수반) / 김원봉(북 국가수반 권한대행 겸직) / 최용건(북 국가수반)수상 김일성 신상정보출생일 1898년 9월 28일출생지 대한제국 경상남도 밀양군 부내면 내이리 / (現 대한민국 경상남도 밀양시 내이동 901번지)거주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사망일 1958년 11월 13일(60세)?학력 경성 중앙고등보통학교 졸업 / 신흥무관학교 자퇴 / 황푸 군관학교 졸업경력 의열단장 / 조선민족혁명당 총서기 겸 당무위원 / 조선의용대장 / 광복군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 / 임정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 / 조선인민공화당 중앙위원장 겸 당무위원 / ..

[웹북] 의열단 (1919~1928) - 김원봉

의열단 의열단 義烈團한국의 독립운동에 참전활동기간 1919년 11월 9일 ~ 1928년이념 무정부주의지도자 김원봉본부 상하이활동지역 한반도 / 중국대륙 / 일본 열도병력 천여 명이후단체 조선민족혁명당 / 조선민족독립당동맹단체 대한민국 임시정부적대단체 일본군적대국가 일본 제국 일본 제국의열단(義烈團)은 약산 김원봉을 단장으로 하는 무장독립운동단체로 1919년 11월 9일 설립됐다. 이들은 프랑스 조계지역(외국인 치외법권지역)인 중국 상하이에서 무력항쟁으로 일본제국의 대한제국에 대한 식민통치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을 했다. 이들이 상하이에서 활동한 이유는 프랑스와 일본의 대립으로 인해, 프랑스 경찰이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보호했기 때문이다. 의열단은 비폭력투쟁인 3.1운동이 일본의 폭력으로 실패한 것을 보았으..

[웹북] 김창숙 (1879~1962) - 성균관대 초대총장

김창숙김창숙 성균관 대학교 초대 총장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패용한 모습) 김창숙성균관대학교 초대 총장임기 1953년 4월 1일~1956년 2월 2일 이름별명 자(字)는 문좌(文佐)호(號) 직강(直岡), 심산(心山), 벽옹(躄翁)별명(別)은 김우(金愚) 신상정보출생일 1879년 7월 10일출생지 조선 경상도 성주군 대가면사망일 1962년 5월 10일(82세)사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 을지로동 국립중앙의료원에서 병사국적 대한민국 경력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대한민국 임시의정원 부의장서로군정서 군사선전위원장명륜전문학교 교장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민의회 국무위원미군정청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성균관대학 학장유도회총본부 위원장고려대학교 정법대학 정치학과 특임교수성균관대학교 초대 총장부모 김호림(부)..

[웹북] 이재명 1887~1910)- 독립운동가

이재명 李在明1909년 12월 24일자 황성신문. 12월 22일 낮에 명동성당에서 이재명이 대한제국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을 피습, 칼로 흉부를 자격하여 이완용이 병원으로 이송됐다는 보도출생 1887년 10월 16일조선 평안도 선천군사망 1910년 9월 30일(22세) 일제 강점기 경성부 경성감옥에서 사형 집행됨.거주지 평안남도 평양 / 하와이주 호놀룰루/한성부성별 남성국적 대한제국본관 진안학력 평안남도 평양 일신보통학교 졸업직업 항일 독립운동가종교 개신교상훈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이재명 (독립운동가)이재명(李在明, 1887년 10월 16일 ~ 1910년 9월 30일)은 대한제국 시기의 독립운동가이다. 약관의 나이로 이완용을 처단하려 했으나 실패 후 체포되어 사형 판결을 받고 형장에서 순국..

[웹북] 한국광복군 (1940~1946)

한국 광복군의 기한국 광복군의 문장한국광복군 성립 전례식 기념사진 한국 광복군 韓國 光復軍한국의 독립운동, 태평양 전쟁, 중일 전쟁, 버마 전역에 참전 한국 광복군활동기간 1940년 9월 17일 ~ 1946년 5월 16일이념 한국 민족주의지도자 지청천 / 이범석 / 김원봉 / 김학규 / 박시창 / 김홍일본부 중화민국 충칭병력 339명~564명상위단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유래단체 한국독립군 / 조선의용대이후단체 대한민국 국군동맹단체 국민혁명군동맹국가 미국 / 대영제국 / 중화민국적대국가 일본 제국 참여한 전투 한국의 독립운동 / 태평양 전쟁 / 중일 전쟁버마 전역서울 진공 작전 (1945년) 한국 광복군 한국 광복군(韓國 光復軍) 또는 줄여서 광복군(光復軍)은 1940년 9월 ..

[웹북] 한국국민당 (1935)

한국국민당 (1935년)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은 대한민국의 한국의 독립운동단체로 1935년 김구를 중심으로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차이석, 송병조, 김붕준, 엄항섭, 조성환 등이 함께 설립하였다. 중일전쟁 도중 충칭으로 옮겨와서 중국에 있던 독립운동 7개의 단체중 공산주의 전선인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민족전위동맹, 조선혁명자연맹을 제외한민족운동 진영의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만이 한국독립당으로 통합하였다.Sources Wikipedia

[웹북] 한인애국단 (1931)

역사결성 (1931) 주요 활동이봉창 의거 (1932. 1. 8)일본군 비행장 폭파 미수 (1932. 3)윤봉길 의거 (1932. 4. 29) 거사 이후김구 피신 및 장제스와의 제휴 체결 (1932)언론 활동 및 해체 (1935~1936) 해체 이후7의사 유해 환국 (1946)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은 1931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주석 김구가 일본 제국의 주요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조직한 독립운동단체이다. 1932년 도쿄에서 이봉창 의거(사쿠라다몬 사건)와 상하이에서 윤봉길 의거 등을 거행하여 전세계에서 일본 제국에 대항했다. 거사 이후 한인애국단은 1936년까지 언론을 통해 이봉창·윤봉길 등에 대한 추모 활동을 하였고, 그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 역사결성 (1931)김..

[웹북] 신한혁명당 (1915)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은 1915년 3월 중국 상하이에서 조직된 독립 운동 단체이다.신한혁명당창립성낙형(成樂馨), 유동열(柳東說) 등 독립운동가들은 북경에서 상해로 가서 박은식(朴殷植), 신규식(申圭植), 이상설(李相卨)·이춘일(李春日)·유홍렬(劉鴻烈) 등을 만나서 신한혁명당을 조직하였다. 1915년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이었는데, 이들은 동맹국이 승리할 것이라고 보았다. 때문에 전쟁이 끝나면 독일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1914년 11월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던 일본을 공격할 것이며, 이때 국가적으로 일본에 원한이 있고 당시 반중정서가 심화되던 중국도 함께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때 이들의 힘을 빌린다면 독립을 성공할 수 있을것이라 생각했다. 독일과 중국은 당시에 모두 제정정치 국가였는데 이들의 도움을..

[웹북] 조선민족 혁명당 (1926~1947)

조선민족혁명당 朝鮮民族革命黨로고조선민족혁명당약칭 민족혁명당이념 좌익 내셔널리즘당원(1935) 2200명 당직자의장 김원봉 역사창당 1926년, 1935년(재창당)해산 1947년후계정당 인민공화당주석 우사 김규식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은 상해 임시정부를 둘러싼 독립운동 단체들이 일제과 싸우기 위하여 통일동맹을 하여 만들어진 단체로 5당이 모여 결성이 되었다.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단체로 분류되고 있다. 조선혁명청년연맹(朝鮮革命靑年聯盟)은 조선민족혁명당을 일컬어 님 웨일즈가 사용한 명칭이기도 하다. 1926년 김원봉이 창당했으나 1935년 해외단체를 통합, 국제정세의 약화에 따라 주의, 사상을 초월한 공동전선으로 단합할 것을 목적으로 하여 김규식, 신익희 등이 중심이 되어 한국 독립당, 조선 혁명당, ..

[웹북] 한국독립당 (1930~1970)

한국독립당 지청천이 북만주에서 만든 한국독립당(1930~1933)에 대해서는 한국독립당 (1930년) 2007년에 창당된 정당에 대해서는 한국대독당 (2007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한국독립당 대한민족당 공견대족진영 애국단체연합 韓國獨立黨약칭 한독당 (비공식) / KIP (영문) 이념 공화주의 / 보수주의 / 반공주의한국의 독립운동 (~1945) 당직자대표 조소앙 (초대) 역사창당 1930년 1월 25일해산 1970년 1월 25일통합된 정당 신민당 내부 조직중앙당사 중화민국 장쑤성 상하이시 (~ 1945)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1945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은 1930년 1월 25일 상하이에서 결성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당이었다.대한의 독립을 위하여 일본 제국에 대항한 단체로 이동녕·안창호·..

[웹북] 효창공원

서울 효창공원 (서울 孝昌公園)대한민국의 사적종목 사적 (구)제330호 (1989년 6월 8일 지정)시대 조선주소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2가 2번지 및 마포구 신공덕동, 공덕동정보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정보효창공원효창공원(孝昌公園)은 원래 정조의 첫째 아들 문효세자와 몇달 후 죽은 그의 어머니 의빈 성씨의 무덤으로 효창원(孝昌園)이었으나, 두 무덤은 서삼릉으로 강제 이장 당하고, 이름도 효창공원이 되었다. 현재는 김구의 묘소를 비롯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이동녕, 군사부장 조성환, 비서부장 차이석의 묘소와, 윤봉길·이봉창·백정기의 묘소 등 임시정부 요인들의 묘지가 있다. 역사1925년 촬영한 당시 효창원의 모습. 1921년 일제는 해당 지역을 골프장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원래는 지금의 공원..

[웹북] 조선인 의용대 (활동기간: 1938~1941)

조선의용대 / 朝鮮義勇隊 조선의용대 중일 전쟁에 참전활동기간 1938년 ~ 1941년이념 국제주의지도자 김원봉. 최창익상위단체 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전위동맹동맹단체 국민혁명군적대단체 일본 제국 육군 조선의용대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영어: Korean Volunteers Army) 또는 조선항일의용군(朝鮮抗日義勇隊) 혹은 국제여단(國際旅團)은 대장 김원봉과 조선민족혁명당의 주도로 1938년 10월 10일 중국 후베이성 한커우 (현명칭 우한)(漢口)에서 결성된 독립군이다. 조선민족전위동맹 산하의 단체로 분류된다. 창설중일전쟁 이전 중국 본토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은 국민당 정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김구나 김원봉의 진영에 들어가 국민당의 경제적인 도움을 받았다. 애국단, 한국국민당, 의열단, 민족혁..

[웹북] 대한인국민회 (1910)

1915년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오른쪽 열한번째는 이승만, 가운데 단상에 선 이는 안창호) 대한인국민회 국민회(國民會)는 1909년 2월 1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공립협회와 하와이의 합성협회(1907. 9.)가 통합하여 샌프란시스코에 조직된 재미 한인 독립운동 단체이다. 1910년 2월 10일 샌프란시스코의 대동보국회(1907. 3.)와 통합하여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Korean National Association)로 개편되었다. 안창호, 박용만, 이승만 등이 참여하고 이끌었다. 1922년~1924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교민단령'에 따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와 지방총회가 대한인교민단으로 개편되었으나, 이승만과의 갈등으로 1933년 대한인교민단을 해소하고 대한인국민회를 복설하였다. 194..

[웹북] 대한인동지회 (1921)

대한인동지회대한인동지회(大韓人同志會)는 1921년 7월 7일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민찬호, 안현경, 이종관이 설립한 독립운동단체이다. 독립운동 자금 조달과 지원 업무, 한인 2세·3세의 교육업무를 주관 하였다. 1948년 이후 한인교민 단체로 활동하고 있다. 약칭은 동지회(同志會)이다.1924년 11월 16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대한인동지회 총회 모습.역사 / 결성 (1921)1921년 7월 7일, 호놀룰루에서 민찬호, 안현경, 이종관이 대한인동지회 설립을 공고하였다. 사무실은 1929년까지 대한인하와이교민단 총회관인 호놀룰루시 밀러가 1306번지였다. 7월 15일 15개조 규약을 발표하였다.동지회는 일부 조항을 통해 총재에게 복종할 의무를 규약으로 삼고 있었고, 이승만은 동지회의 초대 총재..

[웹북] 한인애국단 (1931)

한인애국단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은 1931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주석 김구가 일본 제국의 주요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조직한 독립운동단체이다. 1932년 도쿄에서 이봉창 의거(사쿠라다몬 사건)와 상하이에서 윤봉길 의거 등을 거행하여 전세계에서 일본 제국에 대항했다. 거사 이후 한인애국단은 1936년까지 언론을 통해 이봉창·윤봉길 등에 대한 추모 활동을 하였고, 그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 역사 / 결성 (1931)김구는 국내, 만주와 연락이 되지 않자 미주 동포들에게 편지를 써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였다. 시카고 공동회의 김경, 미주의 대한인국민회의 안창호와 김호 등, 하와이 대한인동지회의 이승만, 멕시코의 김기창과 이종오, 쿠바의 임천택 등을 비롯한 여럿이 모금에 참여하였..

[웹북] 권동진 (1861~1847) - 3.1운동 민족대표 33인

권동진 / 權東鎭애당 권동진 선생애당 권동진 선생조선국 경상도 함안군 군수임기 1880년 4월 9일 ~ 1881년 5월 31일군주 고종 이형이름별명 아호(雅號)는 애당(愛堂), 우당(憂堂).도호(道號)는 실암(實菴).신상정보출생일 1861년 12월 15일출생지 조선 충청도 괴산군거주지 조선 충청도 괴산군 / 조선 경기도 포천군 / 조선 한성부 / 대한제국 한성부 / 일제강점기 경성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사망일 1947년 3월 9일(85세)사망지 미 군정 조선 서울특별자유시경력 독립운동가, 종교인, 정치인 신한민족당 총재 겸 대표최고위원한국독립당 고문 겸 대표최고위원정당 한국독립당배우자 채씨 부인자녀 권영직(아들), 권정숙(딸)종교 천도교 군사 경력복무 조선 육군복무기간 1881년 ~ 1882년근무 조선..

[웹북] 정춘수 (1875~1951) - 3.1운동 민족대표 33인(변절)

정춘수 鄭春洙당교회 前 경성 동대문교회 목사  정춘수 (1875)개인정보출생 1875년 2월 11일 조선 충청도 청주사망 1951년 10월 27일(76세) 대한민국 충청북도 청주교파 유교(성리학) → 개신교(감리회) → 천주교(세례명: 요셉)거주지 대한제국 충청북도 청원  / 대한제국 충청북도 청주 / 대한제국 함경남도 원산 / 대한제국 한성부 / 일제강점기 함경남도 원산 / 일제강점기 경성부 / 대한민국 충청북도 청주전직 신간회 사무위원 겸 기독교행정위원 / 조선공산당 당무위원 겸 전임위원학력 한성 협성신학교(현재, 감리교신학대학교)정춘수(鄭春洙, 일본식 이름: 가타니 슌주(禾谷春洙), 1875년 2월 11일 ~ 1951년 10월 27일)는 천주교 신자이며 파면된 감리교 목사이다. 친일 반민족 행적으로..

[웹북] 박희도 (1989~1952) - 3.1운동 민족대표 33인 (변절)

박희도朴熙道   박희도 (1889년) 본명 박희도로마자 표기 Park Hee-do출생 1889년 8월 11일사망 1952년 9월 25일국적 한국경력 3.1 운동 민족대표 33인직업 독립운동가, 기독교 목회자, 사상가, 언론인소속 동광종교 개신교박희도(朴熙道, 1889년 8월 11일 ~ 1952년 9월 25일)는 구한 말과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기독교 목회자, 사상가였다. 일제강점기의 개신교 계열 인물로 언론인과 목회자로 활동했다. 1919년 3.1 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사람으로 이갑성과 함께 33인 중 최연소자였다. 3.1 운동으로 투옥됐다가 풀려난 이후 자치론 경향으로 흘러가 민족개량주의 노선으로 기울다 1934년 전후로 친일파로 변절. 월간 잡지 '동광'(동양지광)의 창립인, 주간 사장..

[웹북] 최린 (1878~1958) - 3.1운동 민족대표 33인 (변절)

최린 崔麟 최린 총독부의 중추원 참의임기 1934년 4월 1일 ~ 1940년 4월 30일군주 히로히토 신상정보출생일 1878년 1월 25일출생지 조선 조선 함경도 함흥군사망일 1958년 12월 4일(80세)사망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북도 선천군학력 일본 일본 메이지 대학교 법학과 학사정당 무소속종교 천도교최린(崔麟, 1878년 1월 25일 ~ 1958년 12월 4일)은 일제강점기의 친일파이다. 3.1 운동에 참여하여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다가 친일 인사로 변절했다. 호는 고우(古友) · 여암(如庵)이고 일본식 이름은 가야마 린(佳山 麟)이다. 생애생애 초기1878년 1월 25일에 태어났다. 어린 시절 한학을 배우다가 한성부로 상경하여 개화파 청년들과 교유하게 된다. ..

[웹북] 3.1운동 민족대표 33인

민족대표 33인(民族代表三十三人)은 1919년 3·1 운동 때 발표된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명을 가리킨다. 종교별로 나누어 대표를 선정하여 개신교 인사 16명, 천도교 인사 15명, 불교 인사 2명이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에 모이기로 했던 조선의 민족대표 33인은 오후 3시가 되어서야 기독교계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를 제외한 29인이 태화관(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소재)에 모였다. 그들은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였고, 모든 행사가 끝난 때가 오후 4시 무렵이었다. 그들은 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자부로에게 전화를 걸어 독립선언 사실을 알렸다. 헌병과 순사들이 태화관에 들어닥쳐 민족대표를 남산 경무총감부와 지금의 중부경찰서로 연행하였다. 상하이로 망명해 체포를 피한 김병조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