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인물사 연구 (독서>책소개)/2.한국인물평전

신정순평전 - 첫 여성 마취과 의사의 잠들지 않은 삶

동방박사님 2022. 12. 2. 09:52
728x90

책소개

“죽어서 다시 태어나도 마취과 의사를 하리라”

마취과, 이 단어는 생소하다. 마취과는 내과나 외과와 마찬가지로 의학의 한 분과이지만, 일반인들에게는 낯설다.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마취’는 의사가 담당하는 것이 환자와 수술을 담당하는 의사를 위해 바람직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이게 되고, 이후 이 분야에 진출하는 의사의 수가 증가하였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마취과는 언제, 어떻게 생겨났으며, 이 분야 시초는 누구였을까? 역사를 거슬러 가보자. 한국전쟁(6·25)이 발발하자, UN 16개국에서 전투병을 파병하였고,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이탈리아, 인도 5개국이 인도적 차원으로 의료지원단을 파견했다. 이때 가장 먼저 문을 연 것은 부산에 ‘스웨덴 적십자병원’이었다(1953년 부산 ‘스웨덴병원’으로 개칭). 전후에 이 국가들이 철수하게 되자, 한국 정부는 이 국가들에게 계속적인 진료를 요청한다. 이에 스칸디나비아 3개국(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UN한국부흥위원회(UNKRA), 한국 정부는 3자가 협력하여 스칸디나비아 교육병원을 세우기로 한다. 이에 1958년, 을지로6가에 ‘국립의료원’이 문을 연다(스칸디나비아병원으로도 불림).

신정순, 그녀의 삶은 이 역사와 함께 한다. 의대 재학 중인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피난을 가지 못해 인민군의 포로로 잡혀 북으로 끌려갔지만 생사를 건 탈출에 성공한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내 미군병원에서 의사생활을 시작했고, 이후 스웨덴 적집자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새로운 의료 기법을 받아들이게 된다. 수많은 부상자들을 보고 외과 의사의 길을 선택하려 했으나 스웨덴의 마취과 전문의 노던(Norden)을 보면서 외과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마취과를 선택한다. 이후 국립의료원 최초의 한국인 마취과 의사가 된다.

1961년, 국립의료원 재직 중 WHO의 장학금을 받고 코펜하겐 마취학 교육센터로 유학을 떠난다. 덴마크 병원 시설은 매우 현대적이고 각 과와 유기적인 협력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놀란다. 이후 한국에 들어와 마취과 분야를 발전시키고, 국립의료원 수련의(인턴·레지던트)의 커리큘럼 등을 만든다. 이는 한국 최초 수련의들의 수련과정 프로그램이다.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원칙에 벗어나지 않았다. 1950~1960년 한국의 의학발전에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고, 그 중심에 마취과 전문의 신정순이 있었다.

 

목차

발간사를 대신해서
축하의 글

1장. 가족과 유년시절 1928. 05~1946. 06

가족과 성장배경
이화고등여학교 진학

2장. 힘들었던 의대 진학과 대학생활 1946. 09~1951. 10

여성으로서는 힘들었던 의대 진학
쉽지 않았던 의사의 길
한국전쟁 포로 생활과 생사를 건 탈출
전시연합대학에서의 교육과 졸업

3장. 마취과 전문의로의 길 1951. 11~1958. 08

의사생활의 시작-거제도 포로수용소 내 미군병원
짧은 방황-고아 구제사업에 헌신
마취과의(麻醉科醫)로의 길-스웨덴 적십자병원 마취과
마취과 전문의로서의 선택-부산대학교 의과대학 병원

4장. 국립의료원 초대 개원 멤버 1958. 09~1960. 12

국립의료원 탄생과 마취과 초대 의료진으로서의 역할
국립의료원 초기 운영상황
국립의료원 최초의 한국인 마취과 의사
삶의 동반자와의 만남

5장. 덴마크 유학 1961. 01~1961. 12 / 1968. 05~06

코펜하겐으로의 유학길
코펜하겐 도착
코펜하겐 마취학 교육센터
전반기 교육 프로그램
후반기 교육 프로그램
덴마크에서의 생활상
한국에 왔던 동료들과의 재회
유학의 성과
보수교육(1968.05~06)

6장. 국립의료원 마취과 최초의 한국인 과장 1962. 01~1968.02

1960년대 여성 전문의로서의 삶
마취과전문의 자격 취득 및 마취과학회 활동
국립의료원 한국인 최초의 마취과 과장
국립의료원 사직과 가톨릭병원 마취과에서의 근무

7장. 모교에서의 새출발과 헌신 1968. 02~1993. 08

모교에서의 새 출발
의료원 및 3개 병원의 마취과·수술실 기획
전문의 양성의 기틀 마련
전공의 수련환경 개선을 위한 노력
마취과학교실의 미래를 위한 헌신

8장. 은퇴 후의 일상 1993. 09~2010. 08

정든 모교를 떠나며
은퇴 후의 삶 그리고 영면

9장. 가족이야기: 부모를 따라 의사가 된 딸의 회고|김애리

한 집안의 장녀였던 어머니
아버지-방사선 전문의 김기정 교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우리 가족
엄마로서의 삶-어머니와 나
한 집안의 며느리로서의 어머니
어머니의 유지(遺志)

부록1: 국립의료원 수련의 커리큘럼 팸플릿
부록2: 지난날을 回顧하며
Copenhagen의 Anesthesia Institution
추모사
신정순 연표
 

저자 소개

저 : 김애리
 
신정순 교수의 무남독녀다. 어머니를 닮은 의사가 되고자 의학을 전공했다.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 부속병원에서 병리학 수련을 받았다. 미국 오클라호마 대학에서 유방암 연구를 했고, 샌프란시스코 대학에서 피부병리에 관해 연수했다. 현재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병리학교실 주임교수이다.
 
저 : 윤정환
 
역사학자이다. 연세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일본 근현대사를 전공하였다. 의사학 관련 프로젝트를 다수 진행하였으며 한남대학교, 서울예술대학교 등에서 역사 과목을 가르쳤다. 현재 국립 한밭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책 속으로

“인공호흡기(ventilator)조차 부족한 시절, 어머니는 손에 물을 묻혀가며 암부백을 사용한 수동인공호흡(ambu bagging)을 하면서 환자의 호흡을 유지시키며 마취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어머니의 손은 늘 거칠고 두꺼웠다. 후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내 남편이 한 추모사에서 ‘어머니께서 쓰러져서 병석에 누우시고서야 비로소 어머님의 손이 부드러워지셨다’고 울먹이던 말에 평생 마취의사를 천직으로 아시고 ‘죽어서 다시 태어나 다시 의사가 되는 영광이 있다면 다시 마취 의사를 하겠다’고 하신 말씀이 떠올라 그동안 참아왔던 눈물을 멈출 수가 없 었다.”
--- pp.98~99

마취통증의학과 김재환 교수에 따르면 “1983년 구로병원, 1984년 여주병원, 1985년 안산병원이 개원하면서 고려대학교는 의료원 체제를 갖추게 되었고, 1991년 혜화병원이 안암병원으로 증축 이전 하면서 고려대학교 마취과학교실도 의료원과 함께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는데, 이러한 발전의 중심에 항상 신 교수님이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 p.291

한국인 스태프들도 1년마다 바뀌는 부서장(과장)들에 적응하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물론 1년 넘게 의료원에 남아 있던 과장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1년의 임기를 채우고 귀국했으며 원활한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아 공백이 생기는 경우도 발생하였다. 1년마다 바뀌는 스칸디나비아 측 부서장의 업무 연결과 일관된 향후 국립의료원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서 (또한 스칸디나비아 측 지원이 끝날 때를 대비하여) 한국인 부서장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신정순은 초대 한국인 마취과 과장을 맡아 훌륭히 그 역할을 수행하였다.
--- p.133

우리나라에서 마취과가 민간 부분에서 선보이기 시작한 것은 1950년 부산항의 덴마크 병원선에서 세카 박사(Dr. Ole Secher, 1958년 국립의료원 1대 마취과 과장으로 부임), 포천의 노르웨이 이동병원에서 헤거 박사(Dr. Bjorn Heger, 1959년 및 1966년 마취과 2·8대 과장으로 부임)가 마취과 진료를 담당하면서부터이다. 1952년에는 스웨덴 적십자병원이 대민 진료를 하였는데 닥터 노던(Dr. Ingrid Norden, 신정순의 스승이자 동료)이 마취를 담당했다. 여기에서 신정순이 마취교육을 받아 한국에서 처음으로 마취만 전문으로 담당하는 의사가 되었다.
--- p.136

신 교수님은 성형외과 전공의가 환자의 수술받을 팔을 차가운 스텐레스 보조수술대에 그냥 올려놓으면 크게 야단치셨습니다. 환자의 팔이 차갑지 않겠냐고 하시면서, 천을 보조수술대 위에 깔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은 너무 당연한, 환자에 대한 배려인데도 지금도 그렇게 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신 교수님은 수술이 끝나서 환자를 깨울 때도 우악스럽게 큰 소리로 환자를 깨우지 않고, 환자 귀에 소근소근 환자를 다정하게 부르며 깨우셨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그렇게 해서 마취에서 깬 환자는 잘 각성되었다고 받아들일 수 있고, 그렇게 환자를 깨우는 것도 환자에 대한 존중이고 배려라고 여겨집니다.
--- pp.451~452

신 교수님이 많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33년 동안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마취통증의학과의 토대를 세우고 발전시키는 기반을 만드셨고, 또 과의 발전을 위해 기부를 하셨고, 이것은 지금도 후학을 양성하는 데 귀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고대의대 마취통증의학교실은 다른 대학, 교실에 비해서 여교수님들이 많은데, 저는 이것도 신 교수님의 덕분이라고 믿습니다.
--- p.453
 

출판사 리뷰

신정순, 한국 최초 마취과 전문의

신정순은 마취과(痲醉科)라는 당시 한국에서는 생소한 전문과를 담당하였고, 여성으로서 국립의료원 최초의 한국인 마취과장을 역임했다. 그는 구제 일본식 이론 중심의 의학교육을 받았지만, 졸업 후 의사생활을 미군 야전병원에서 시작해 미국식 의학 시스템을 경험했고, 이후 스웨덴 적십자병원에 근무하면서 의사 초년기를 보내 북유럽식 병원시스템에 익숙했던 인물이었다. 그 당시 세계적으로 부족했던 마취 의사 양성을 위해 WHO에서 주관한 덴마크 코펜하겐 마취의사 연수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서구의 선진 의학기술을 습득하면서 자신만의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해당 연수 프로그램은 한국에서 매년 1명씩 참여할 수 있었는데(해당 프로그램을 이수한 국내 의사는 10여 명 정도이다), 신정순은 최초로 WHO 장학금을 지원받아 코펜하겐으로 유학을 떠났던 의사였고, 1961년 1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해, 한국 마취학 분야를 선도했다.

국립의료원 개원 당시, 스칸디나비아 측 의료인과 한국 측 의료인 간 가교역할

국립의료원이 문을 열자, 신정순은 본격적인 마취과 전문의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특히 한국전쟁 기간부터 1957년까지 파견되었던 스칸디나비아 측 의료진들 중 일부가 본국으로 철수하였다가 국립의료원이 개원하자 다시 돌아와 일했기 때문에 스칸디나비안 측 의료진과의 진료경험과 병원운영에 경험이 많았던 신정순이 한국인 의료진과 스칸디나비아 측 의료진 사이의 가교역할을 도맡아 했으며, 국립의료원 초기 병원운영 안정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었다.

신정순은 국립의료원 개원 초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어야만 했던 국립의료원 설립 초창기에, 한국 측 인력과 스칸디나비아 측 인력의 접점을 찾아 공통의 목표를 제시하고 함께 수행하는 데 있어서 많은 혼란과 어려움이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정순처럼 서구의 의료진 특히 스칸디나비아(스웨덴) 의료진들과 함께 근무했던 경험은 매우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신정순은 양측이 원활한 관계 속에서 의료업무를 진행할 수 있도록 하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 국립의료원 구성원 중 그 누구보다 많은 경험과 이해, 의사소통의 노하우가 있었고, 영어로 대화가 가능했다. 부산 스웨덴 적십자병원으로부터 이어진 인맥과 인연으로 국립의료원의 성공적 안착을 도왔고, 그녀 스스로도 마취과 전문의로서 한층 더 큰 성장을 이뤄낼 수 있었다. 한국 의학이 발전하도록 노력한 숨은 공로자 중 한 명이다.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새 출발 그리고 헌신

모교인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새 출발을 한다. 혜화동 병원 신관이 건립될 당시, 신관으로 옮겨갈 수술실, 구로와 안산, 여주병원 개원 당시 3개 병원의 수술실, 중환자실, 또 안암병원 수술실 등을 세팅하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3개 병원(1983년 구로병원, 1984년 여주병원, 1985년 안산병원)이 하드웨어적인 골격을 갖추어가는 동안에도 환자 안전을 위해 수술실을 지키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몰두하는 열정을 보여주었다. 동시에 고려대학교 마취통증의학 교실이 후진 양성의 요람이 되는 기틀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구심점이 된 것이 바로 신정순의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