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전쟁교훈여행 (2010~) (여행지)/2.한국전쟁기념관

자유수호평화박물관 - 실내전시관 (6.25 한국전쟁)

동방박사님 2023. 1. 15.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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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습남침 북한 공산군은 1950년 6월25일 새벽4시 불법적으로 기습남침을 감행하였다. 병력과 무기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던 우리국군은 부득이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전초기 파죽지세로 진격해 오는 북한군과 서울시청 앞의 북한군 탱크.
피난행렬 :북한군의 공세에 밀려, 남으로 남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봇짐을 진 채 피난길을 떠나는 사람들.
유엔군 참전 : 한반도에서 침략군을 격퇴하기 위한 연합군이 구성되었다 1950년 7월14일 맥아더 장군이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으로부터 유엔깃발을 전달 받고있다.
인천상륙작전 :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여 전세를 역전시켰다. 마운트메켄리 함상에서 상륙작전을 지휘하고 있는 맥아더 유엔사령관.
서울수복 : 1950년 9월28일 북한군 치하 90일만에 마침내 수도 서울을 수복하였다. 국군 해병 제 2대대 6중대 용사들이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있는 감격적인 순간.
1.4후퇴 : 통일이 곧 실현될 듯 했으나 갑작스런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다시 역전되고 말았다. 중공군이 밀려오자 자유를 찾아 폭파된 대동강 철교를 곡예 하듯 필사적으로 건너는 북한 주민들과 또다시 서울을 버리고 자유를 찾아 피난길에 오르는 행렬 (1951.1.4)
포로송환.휴전 :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이로서 3년1개월 2일간 계속되었던 처참한 동족상잔의 비극이 막을 내렸다.
전쟁의 상처 : 기나긴 전쟁으로 국토는 거의 페허가 되었고 모든 재산은 잿더미가 되었다. 6.25로 인한 물적 피해는 우리 민족사에 크나큰 상흔으로 남겼다.
이산의 아픔 : 휴전은 3.8선 대신 휴전선이라는 새로운 분단을 낳았다. 인적이 끊어진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이산의 아픔은 계속되고 있다.
잊지말자 6.25 : 이 땅에서 벌어졌던 참혹한 6.25 전쟁은 결코 잊어서는 안될 우리의 슬픈 역사이다. 남북 동질성을 희복하여 조국의 통일을 이룩하는 날 분단의 비극은 막을 내릴 것이다

전쟁이전의 남한 (아래사진 참조)

1945년 8월15일 일본의 패망과 함께 한반도의 북쪽은 소련군이 남쪽은 미군이 일본의 항복을 접수하게 되었다. 미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9월7일 남한에 진주한 후 군정을 실시하면서 소련과 한반도 문제를 협의. 처리하기 위한 회담의 개최를 모색하였다. 미국은 유엔을 통해 한국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소련의 반대로 평화적 정부수립에 난항을 겪는다. 결국 1948년 남한 안에서만 총선거가 실시되어 제헌국회가 열리고, 이승만대통령을 초대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정부수립을 대외에 선포하게 되었고 유엔 총회에서 이를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하였다. 북한은 소련군 철수 이후 맘한내 미군의 철수를 요구하였고 미국은 한국정부가 요구한 무기지원에도 응하지 않은 채 1949년 6월 한반도에서 미군을 철수 시켰다. 또한 남한 내의 공산주의자들은 사회 혼란을 조장하며 각종 폭동과 반란을 일으켰으며 북한에서 남파된 2,300여명의 인민 유격대가 합세하는 등 남한 사회느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공비토벌에 몰두하여 전방 방어준비 태세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전쟁이전의 북한 (아래사진 참조)

소련군은 1945년 8월8일 대일 선전포고와 함께 한반도로의 남진을 시작하여 24일 평양에 진주하였다. 그 후 소련은 북한전역에 걸친 군정체제를 완료했으며 그들의 추종자 김일성으로 하여금 임시 인민위원회를 만들과 실권을 장악하도록 하는 등 소련의 위성국가화 하려는 계획에 주력하였고, 1948년 2월8일 에는인민군 창설까지 마쳤다. 그리고 그해 9월9일, 정식으로 김일성 중심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였다. 이로써 한반도는 이념과 체제가 다른 2개의 정부가 수립되었고 이는 후일 한국전쟁의 발발의 원인이 되었다. 그 후 소련은  북한에서 철수한 뒤에도 T-34전차와 각종 전투 장비를 지원하는 등 북한의 남침게획을 중공과 함께 적극 지원하였다. 북한은 중공군 소속의 한인부대를 북한 인민군으로 전환시키는 등 병력을 증강, 전시체제로 전환하였으며 전쟁 직전에는 위장평화 공세를 취하면서 대부대훈련을 위장하여 군주력을 38선까지 집결시키고 남침을 위한 정찰명령과 전투명령을 하달하였다. 

북한의 남침

북한은 1948년 2월8일 조선인민군이라는 정규군을 창설 후 공산정권의 전위대를 양산시켰다. 그 해 10월19일 한국군 내부의 공산분자들을 선동하여 여수, 순천 사건을 일으켰다. 이들은 토벌군에 진압되기 전까지 양민학살과 약탈 및 방화 등을 자행하였으며, 잔당들은 지리산으로 도주하여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8년에는 남침전쟁을 목표로 지하조직을 재건하고 10차레에 걸처 2,300여명의 무장공비를 남파시켰다. 실질적 북한의 조정자인 소련은 북한의 암침을 유리하게 만들려는 속셈으로 주한 미군의 조속한 철수를 종용하였고, 1949년 3월 17일 '조.소 군사 경제 및 문화협정' 이라는 미명아래 소련군 무기를 도입하여 군을 중무장시켰다. 또한 1949년 5월부터 38선 일대에서 불법사격과 공격작전을 전개하는 등 6.25전쟁 전까지 약840여 건의 크고 작은 무력도발을 일으켰다. 전쟁준비를 위해 중공군 소속의 한인계 동북의용군과 한인의 의용군들이 북한으로 입북하였고, 1950년 6월22일 공격부대들에게 남침을 위한 전투명령을 하달하였다. 38선 상에 전투배치를 완료하여 모든 전쟁 준비를 마친 북한은 6월25일 새벽, 38선 전 지역에 걸쳐 야포와 박격포의 공격준비사격을 시작으로 T-34 전차를 앞세운 시습남침을 개시하였다.

동두천전투

6.25일 제7사단이 포천과 동두천 부근에서 서전을 치른데 이어, 대전에서 증원한 제 2사간이 의정부 부근에서 격돌하게 되어 동두천은 수도서울의 관문과도 같아 피아간에 주력이 되었다.

그런데 북한군은 처음부터 여기에 공격의 중점을 두고 병력과 화력을 집중투입한데 반하여 국군 측에서는 아무런 대비없이 이와 맞섬으로써 전투의 초기상황은 급박하게 변해갔다.

이때 의정부에 전투력의 대부분을 주둔시키고 있던 제7사단은 제1연대를 초성리 남쪽 176고지로 진출시켰다. 이곳에서 제 3중대는 전차 2대를 앞세우고 남하중인 북한군 1개 대대규모의 적을 기습하여 격퇴시키고 소요산에 위치하고 있던 제 2대대 지휘하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소요산에서 밀고 밀리는 육박전이 펼쳐졌으며 제2대대는 11시가 넘도록 소요산진지를 사수하고 있었다.

제2대대가 소요산에서 고군분투하는 동안 제1연대는 제1대대를 마차산에 투입하고 제3대대를 봉암리에 배치하였다. 그러나 제1대대가 마차산의 방어진짖를 점령하였을 무렵에는북한군이 이미 이 고지를 우회하여 간파리 방향으로 남하중에 있었다.

따라서 1대대는 마차산 정상에서 소요산의 교전상황을 구경하는 처지가 되었으며  또한 3 대대지역에도 적이 출현하지 않았음으로 제1연대는 그와 같은 긴박한 상황 하에서 2개 대대를 유휴병력으로 대기시킨 결과가 되었다.

한편 제1연대를 직접 지원하던 제5야전포병대대 제2중대는 주저항선 남쪽 보산동 부근에 준비된 진지를 점령한 지 얼마 후에 남하하는 북한군의 1개 대대를 집중포격하여 대부분을 격퇴하였으나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난 후패주했던 북한군은 전차를 앞세우고 공격을 재개하였다.

이때 제1연대 57mm 전차포중대장은 창말고개 (동두천 북쪽 2km 지점)에서 선두 전차 2대의 측면을 사격하여 모두 파괴하였고 이에 당황한 북한군은 다시 초성리 쪽으로 철수해 버렸다.

이러한 승리의 쾌보가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거쳐 방송되는 과정에서 국군의 반격이 개시되었다고 비약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무렵 제1연대는 탄약이 떨어져 재보급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보급사정이 풀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한편 북한군 제4사단은 이날 15:00을 전후하여 제107전차연대를 선봉에 내세우고 동두천을 맹공격 하기 시작하였다. 이와맞선 제2대대는 10시간 동안이나 힘겨운 싸움을 게속하였으나 마침내 동두천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북한군은 아군의 주저항선을 돌파한 여세를 몰아 일몰과 더불어 동주천 시내로 진입하였고 국군은 어둠 속에서 시가전을 펼쳐으나 역부족하여 양주 적정으로 철수하여 집결하게 되었다.

그결과 동두천 전투의 패전으로 포천과 의정부 전선이 무너진 뒤로 그 파급영향은 거의 전 전선에 미치게 되어 서울이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인천상륙작전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의 지휘 하에 유엔군은 북한군을 일거에 포위 격멸한다는 전략목표로 전쟁초기부터 비밀리에 추진해 온 인천상륙작전을 1950년 9월15일 개시하였고, 16일 제8군도 낙동강방어선에서 총반격작전을 개시함으로써 한국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유엔군은 3개월동안 걸친 수세에서 벗어나 공세로 전환하여 북한군의 주력을 섬멸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서울의 수복

한국 해병2개 대대와 미 제1해병사단은, 행주날 부근에서 9월20일 한강을 도하, 공격을 계속하였, 25일에는 미 7사단 32연대와 국군 제17연대가 신사동 쪽에서 도하에 성공하여 남산일대를 점령하였다. 또한 9월27일 새벽, 한국 해병대가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서 서울을 탈환하게 되었다. 이는 서울을 빼앗긴지 90일 만의 수복이었으며, 97일 만에 38선도 희복하였다.

38선의 돌파 (1950.10.1)

유엔군은 약 3개월 동안에 걸친 수세에서 벗어나 공세로 전환하여 북한의 주력을 섬멸하고 서울을 수복한 데 이어 38선으로 진출함으로써 이전의 국토를 희복하였다. 이때 38선 돌파는 중소 개입의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과 더불어 한민족의 운명을 좌우하는  대단히 중요한 사항이었다. 자유진영 내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찬반양론이 첨예하게 대립되는 가운데 미국은 9월27일 38선 돌파에는 유엔이 북한을 침략자로 결의한 '6.28결의'에 의거 합법적이며, 이결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북진작전을 실시해야 한다는 결정을내렸다.

유엔의 활동

1945년 일본의 패망과 미국, 소련 두 강대국에 의해 재편된 세계 질서속에서 얻어진 한반도의 독립은 불완전한 상태였다. 이미 전후처리회담인 1943년 카이로회담을 통해 한반도으 신탁통치는 기정사실화 되었고 2년 뒤인 얄타회담을 통해 일전기간의 신탁통치가 잠정 합의된 상태였다.

1947년 9월 한국문제를 의제로 채택한 유엔총회는 한반도의 평화적독립국가 수립을 위해 미국을 중심으로 11월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설치와 총선거에 관한 결의문을 압도적인 찬성으로 채택하였다.

1948년 5월10일 소련의 반대에 따라 남한만의 유엔 한위 감시 아래 총선거를 실시, 대한민국 정부가 8월15일 수립되었고 12월12일 유엔총회에서는 이를 공식 승인하였다. 이와 동시에 한반도 내 외국군 철수에 관한 결의가 진행되어 1949년 6월29일 주한미군 철수가 완료되었다.

1950년 6월25일 6월25일 북한이 소련과 중공의 도움으로 무력도발을 시도하자 한국정부는 유엔과 미국에 군사지원을 요청하였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6월28일 한국군사지원 결의안을 채택하여 7월7일 유엔군사령부설치를 결의하였다. 미군은 유엔군총사령관 맥아더를 임명했다.

한.만 국경선 진격

한국군과 유엔군의 38선 돌파와 북진을은 순조롭게 진전되어가고 있었다. 이때 미 군부 내에서는 10월 중에 한국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낙관적인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실제 동부전선으로 진격한 국군 제1군단과 미 제10군단은 10월10일 원산을 탈환, 10월17일에 함흥을 거쳐 11월25일 청진에 입성하였다. 한편, 미 제7사단 17연대는 11월21일 한반도와 만주 국경선상에 있는 초산에 돌입하여 국토통일을 눈앞에 두게 되는 듯 하였다. 이에 유엔군사령부도 한국에서의 병력철수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하는 등  전쟁 이후의 상황에 신경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중공군의 개입

중공은 미군이 개입하기 이전에 북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것이라 예상하였다. 그러자 유엔군의 신속한 대응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당시 중공의 최우선 국가 목표였던 '대만수복' 작전마저 연기하고 북한을 지원하기 위해 참전준비를 서둘렀다. 모택동은 1950년 10월1일에 스탈린과 김일성으로부터 중공군의 파병요청을 받고 동북변방군을 인민지원군으로 개칭하여 한반도를 출병하였다. 중공군의 16일 선발대를 투입한 데 이어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하던 19일 저녁, 4개 군을 도하시킴으로서 한민족의 염원인 통일 실현을 목전에서 사라지게 하였다.

유엔군의 재 반격기

종전을 위해 한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11월24일 총공세를 개시하였으나 아군의 예상과는 달리 중공군이 참전함으로서 한국전쟁은 예기치 못한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되었고 전쟁은 유엔군과 중공군의 대결구도로 발전함으로써 한반도에 국한되느냐 아니면 또 다른 세계대전으로 확전이냐의 기로에 처하게 되었다. 이틀만에 중공군의 반격에의해 1950년 12월 흥남철수작전을 시작으로 계속된 후퇴는 서울까지 다시 빼앗기게 되었다. 후퇴를 거듭한 한국군과 유엔군는 1951년 1월25일을 기하여 일제히 반격작전을 개시하였고 3월15일 1.4후퇴 이후 70일 만에 서울 재탈환, 3월 말에는 38선까지 희복하였다. 이에 대한 반격으로 중공군은 참전이후 최대병력을 동원한 인해전술의 '춘계총공세'를 시작하였다. 한국군 및 유엔군도 사력을 다해 구파발~홍천~하진부리~강릉을 연결하는 선에서 이를 저지하였고 이들에게 무제한적인 화력을 운용하여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한국군과 유엔군은 공산군의 대규모공세를 저지하는데 성공하자 곧 반격 작전을 실시하여 세번째로 38선을 희복하고, 6월15일에는 주요 거점을 확보한 다음 공격을 중단하고 격렬한 저하에 대비한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포로송환

포로송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휴전회담에 의거 포로송환 위원회가 구성되었지만 포로수와 교환방법에 대한 양측의 공방이 계속되자, 유엔군 측 제의로 우선 부상포로 및 환자포로의 교환이 이루어졌다.  1953년 6월8일, 마침내 유엔군 측의 '지원송환 원칙' 과 공산군 측의 ' 전체송환 원칙' 의 절충으로 포로송환 문제가 타결를 보게 되었으며, 반공포로는 자유세계에 남거나 제3국으로의 송환 길이 열리게 되었다. 하지만 양측의 엇갈린 주장으로 포로문제를 합의하는데만 20개월이 소요되었으며, 이 때문에 휴전도 그만큼 늦어지게 되었다.

국제연합

국제연합 (U.N.)은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유지하며,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국제협력을 증진시키는 역할을 하는 국제기구이다.  1946년 붕괴된 국제연맹을 게승한 것으로 명칭은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에 의해 고안되었다.  1945년 10월24일 창설되었으며, 총회.안전보장이사회.경제IMF 등으로 구성된 전문기구 그리고 국제연합개발계획.국제연합환경계획.국제연합난민고등판무관. 국제연합인권고등판무관 등의 보조기구로 구성되어 있다. 이 기구의 설립 목적은 국제평화 및 안전유지에 있고 국가와 국가간 선린관계의 유지를 통해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의 인도적 문제해결을 위한 국제적협력을 꾀하며, 인권과 자유를 존중하는 의무를갖는데 있다.

6.25전쟁과 유엔

유엔과 한국이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정부수립 이전인 1947년부터이지만,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1950년 6월25일 북한군이 불법 남침을 개시한 6.25 전쟁에서였다. 이들의 침략으로 한반도의 평화가 파괴되자 유엔은 미국의 주도적 역할 아래 국제질서를 희복하기 위해 적극적인 군사개입을 결정하였고, 유엔 창설 이후 처음으로 6.25전쟁에 유엔군을 파견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미국을 주축으로 전투부대를 파견한 16개국과 의료지원 부대를 파견한 5개국은 휴전이 조인될 때가지 유엔의 깃발 아래 한국전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데 되었다

평양탈환작전 가상도

평양탈환작전 (1950.10.15~20)

평양탈환작전은 북진당시 서부전선으로 진격한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이 중부전선으로 진출한 국군 제7사단 제8연대와 함께 평양을 포위공격하여 북한군 제17사단과 제32사단으로 주축으로 펴넝된 8,000여명의 혼성부대를 격퇴하고 평양을 탈환하는 공격작전이었다. 이 작전에서 국군 제1사단은 평양 동측방으로 진입하고 미 제1기병사단은 남쪽에서 흑교리로 진격하였으며, 국군 제7사단 제8연대는 북쪽으로 진입하여 3면에서 포위공격을 가하여 평양을 탈환하였다. 이 때 국군 제1사단은 맨 먼저 평양시내로 돌입하여 평양 첫입성의 영광을 안았다. 이 작전으로 북한군은 평양에서 후퇴하여 청천강 북쪽으로 물러서게 되었으며,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한.만 국경선으로 향한 진격작전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북한의 심장부를 점령함으로서 얻을 수 있는 이점을 최대한 살리지 못하였다. 즉 북한의 주요수뇌부는 이미 평양을 버리고 함경도나 중국지역으로 들어간 후 중공군의 지원을 요청하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흥남철수 작전 가상도

흥남철수작전 (1950~12.14~24)

유엔군은 추수감사절까지는 전쟁을 종결짓는다는 판단하에 10월24일 중공과의 국경지대를 목표로 진격작전을 시작했다. 이때 유엔군 사령부는 중공군의 참전을 우려하고 있었지만 그 징후를 포착하지 못하고 그들의 참전시기가 지난 것으로 판단하였다. 하지만 중공군은 참전하였으며 6.25 전쟁을 새로운 전쟁으로 변모시켰다. 중공군은 10월19일 압록강을 은밀히 건너 참전하였다. 그들은 청천강 북쪽으로 전개하여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다가 10월25일 아군의 공격을 되받으며 기습적대공세를 취하였다. 이것이 중공군의 1차 공세였다. 중공군은 이후에도 4차례의 공세를 가하였으나 그 세력을 상실하고 방어로 전환하였다. 유엔군은 공산군의 1차 공세를처 청천강에서 저지하고 11월에 최종공세를 다시 폈으나 이미 30개사단으로 증강된 중공군이 2차공세로 맞섬에 따라 청천강 북쪽과 장진호 일대에서 일대 결전이 전개되었다. 아군은 청천강에서 포위망을 벗어나는 과정에서 많은 손실을 입고 평양과 흥남 철수를 단행 하였다.

지평리전투 가상도

지평리 전투 (1951.2.13~16)

지평리 전투는 중공군의 1951년 2월공세 당시에 미 제2사단 제 23연대가 배속된 프랑스 대대와 함께 원주 북방의 지평리에서 중공군 제39군 예하 3개사단의 집중공격을 막아낸 방어전투이다. 이잔투에서 미제23연대와 프랑스대대는 좌우 인접부대가 중공군의 공격에 밀려 철수하게 됨에 따라 중공군 제39군의 사면포위하에 놓이게 되었으나, 지평리를 고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병력을 전면방어태세로ㅗ 배치하여 중공군의 파상공격을 고립상태에서 4일 동안이나 막아 내었으며, 그후 미 제5기병연대가 후방으로부터 중공군의 포위망을 돌파하고 그곳까지 진출함으로써 전선의 연결링 이루어져 중공군의 2월공세를 막아 내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전투로 중공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2월공세에 실패하였으며, 유엔군은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이후 최초로 전세를 만회할 수 있게 되어 재반격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또한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몰아붙이는 공세가 실패한 것도 처음 이었다. 이에다라 유엔군은 중공군에 대하여 자신을 갖기 시작하였으며 이후38도선 희복을 위한 작전에 반격를 가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