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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 학살 부정의 진상 (2023) - 램지어 교수의 논거를 검증한다

동방박사님 2023. 9. 4.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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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관동대지진 학살은 가짜 뉴스의 폭발이었다!”
하버드대학 램지어 교수의 관동대지진 학살 부정론, 그 진상을 밝히다

하버드대학 존 마크 램지어 교수가 2019에 발표한 논문이 큰 파장을 일으켰다. 「경찰 민영화: 일본의 경찰, 조선인 학살 그리고 민간 경비 회사」란 제목의 논문은, ‘관동대지진’의 혼란에서 조선인을 학살한 일본 자경단은 기능부전의 사회가 만들어낸 경찰 민영화의 한 사례라고 주장하며 이는 정당한 방위 행위였다고 강변한 것이다. 논문의 표지에는 ‘하버드’라는 큰 글자와 함께 케임브리지대학 출판국에서 책으로 펴낼 예정이란 문구를 넣어, 그야말로 ‘세계 최고의 권위’를 두루 갖춘 모양새였다. 램지어 교수는 2000년에 “위안부는 계약에 의한 매춘부였다”는 내용의 논문으로 물의를 일으킨 바 있다. 또한 일본 미쓰비시 그룹의 지원을 받아 활동하는 일본 법률 연구자로서 2018년에는 일본 문화홍보에 이바지하여 일본 훈장 ‘욱일중수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책의 저자이자 역사 전문 기자인 와타나베 노부유키는 2021년에 이 논문을 접하고 램지어가 주장하는 ‘학살 부정론’을 검증하기에 나선다. 그 검증 방법은 램지어 교수가 논거로 제시한 신문 기사들이 작성된 배경과 그 실태를 낱낱이 살피는 것이다. 이는 40년 경력 기자의 전문 분야이기도 하다. 100년 전 당시의 신문 기사들이 어떤 상황과 환경에서 작성되었는지를 신문 기사 자료, 연구 보고서, 기자로서의 경험적 지식 등을 바탕으로 톺아본다. 그리하여 조선인 학살의 원인이 된 유언비어라는 ‘가짜 뉴스’, 신문 기사를 통해 유포된 ‘가짜 뉴스’, 그리고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정부가 조작한 ‘가짜 뉴스’가 나오게 된 배경을 전하고, 학살의 실상과 그 원인에 대한 분석도 이어나간다. 그리고 그 기억이 오늘날 일본 사회에 사라진 채 전해지지 않은 원인에 대한 냉철한 통찰도 담아내고 있다.

2023년 9월 1일은 관동대지진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일본 사회에는 여전히 “학살이 없었다”고 주장하거나, “살해당한 조선인은 있었지만, 그들은 범죄자이기 때문에 일본인의 자위 행동이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학살 부정론은 일본 국내에서 도쿄도지사가 추도식에 추도문을 보내는 것을 취소하는 사태뿐 아니라 램지어 교수의 논문처럼 해외에까지 그 무대를 넓히고 있는 형국이다. 관동대지진의 진실이 잊혀가고 왜곡되는 상황에서, 이 책의 역자이자 역사학자인 이규수는 이렇게 말한다. “100년 전의 관동대지진을 기억하는 일은 ‘조선인이 학살당했다’는 피해만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다. 일본 군대와 경찰, 자경단의 야만을 새삼스럽게 폭로하려는 의도도 아니다. 이른바 반일 감정에 바탕을 둔 과도한 민족주의에 동조하기 위한 것 또한 아니다. 한일 양국이 역사적 진실을 공유하고 부조리한 과거를 거울 삼아 평화 체제를 구축하는 일이 역사학 본연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목차

한국어판 서문
머리말

제1장 램지어 교수의 논문 읽기

1. 치안이라는 정상재
2. 조선인 범죄의 검토
3. 전후 일본의 경비 산업

제2장 논거 자료를 확인하다

1. 범죄가 없었다는 자료
2. 램지어 교수의 논거 자료

제3장 논거가 된 신문 기사를 읽다

1. 조선인 폭도 보도
2. 우스이 고개의 폭탄 테러 계획

제4장 10월 20일 전후의 신문 기사

1. 조선인과 관련된 보도 해금
2. 시민의 반응
3. 정부의 압력으로 만들어진 허위 보도

제5장 도쿄대학 신문연구소의 연구

1. 전후의 연구
2. 인용된 《가호쿠신보》 기사

제6장 학살은 왜 일어났을까?

1. 학살의 실상
2. 귀환병들의 경험

맺음말
옮긴이의 말
참고문헌
부록 관동대지진 관련 사진 자료
찾아보기
 

저자 소개 

저널리스트이자 논픽션 작가. 1955년에 태어나 와세다대학교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했다. 2018년까지 아시히신문사의 기자로 일하면서, 아오모리시 산나이마루야마三?丸山 유적 출현, 중국 시안 견당사 묘지墓誌 발견, 지바시 가소리패총加?利貝塚 재평가 등 여러 특종을 보도하고 역사 자료 발굴에 힘썼다. 논문으로 「「731부대―묻혀버린 세균전의 연구 보고(731部隊―埋もれていた細菌?の?究報告)」(《세카이(世界)》 2012...
 
역 : 이규수
 
역사학자. 1962년에 태어나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히토쓰바시대학 대학원 사회학연구과를 졸업했다. 히토쓰바시대학 한국학연구센터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는 전북대학교 고려인연구센터 학술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 수탈과 궁삼면 토지탈환운동』(2021), 『제국과 식민지 사이』(2018), 『한국과 일본, 상호 인식의 변용과 기억』(2014), 『제국 일본의 한국 인식, 그 왜...

책 속으로

이 밖에도 유언비어에 대한 조사와 연구는 수두룩하다. 나는 그 가운데 “유언비어는 거짓말이 아니었다”는 내용을 입증한 자료를 본 적이 없다. 램지어 교수의 견해는 이와 같은 기존 연구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논거는 무엇인가? 우선 제시한 것은 ‘젊은이가 많으면 범죄가 많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젊은이가 법을 어기는 경우가 다른 세대에 비해 많다고 해도, 그것이 방화나 살인 같은 중대한 범죄에까지 해당하는 것일까? 하물며 유언비어의 내용은 집단 무장봉기나 폭탄 투척, 독 살포 등과 같이 사전 준비와 조직이 필요한 행동이다. 그런데도 ‘젊은이가 많다’는 것이 근거가 될 수 있을까?
--- p.63

철로를 따라 전국을 연결하는 국철 통신망을 통해 전언 게임처럼 전해진 정보였다. 그것을 《나고야신문》 기자가 나고야의 철도 관련 시설에서 입수해 기사화했다고 볼 수 있다. ‘열차에 폭탄’이라고 하니 그 사태는 심각했다. 호외를 발행하겠다는 판단도 당연했을 것이다. 이 기사가 보도한 범죄가 이후 수사에서 어떻게 밝혀졌는지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오보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왜 그런 기사가 나오고 호외가 발행됐는지 그 윤곽이 드러나는 듯하다. 이렇게 살펴보면 이 기사의 해석에서도 램지어 교수의 견해에 동의할 수 없다.
--- p.107

조선인 학살은 공공연한 장소에서 자행되었고 많은 사람이 목격했으니, 일본이 법치국가인 이상 이를 전혀 없었던 일로 할 수는 없었다. 군과 경찰이 관여한 사실도 많은 사람이 목격했지만, 자경단의 잘못으로 돌리며 모든 책임을 떠넘기려는 움직임이 역력했다. 이에 대해, 자경단은 물론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의문점이 증폭되었다는 것을 우에스기의 발언이 드러내고 있다. 자경단은 경찰에 협조하거나 지시를 따랐을 뿐인데도, 경찰은 죄를 그들에게 뒤집어씌우려 했다.
--- p.123

군과 경찰의 관여가 드러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한 정부는 모든 책임을 자경단에 떠넘기려 했다. 하지만 우에스기 신키치 교수의 발언과 흑룡회의 활동이 보여주듯이, 여러 곳의 반발이 거세져 자경단에게 중죄를 물을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조선인 학살은 많은 사람이 공공연한 장소에서 목격한 사실이기 때문에 없던 일로 간주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일본인에 의한 조선인 학살을 정당화하려면 ‘유언비어가 전한 조선인의 범죄는 실재한 것’으로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정부는 이 모순된 상황을 다소나마 꿰맞추기 위해 ‘없던 일을 있었던 것’으로 하고, ‘있었던 일을 없었던 것’으로 조율했다.
--- p.142

청일전쟁과 동시에 1894년 시작된 동학농민군과의 싸움을 비롯해 1910년 한국병합을 전후하여 일본의 지배에 저항한 의병의 진압 작전으로 인해, 일본군은 만 단위 수의 조선인을 죽였다. 1919년에는 3·1운동을 진압하고, 이후에도 일본군은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는 ‘불령선인’과 ‘조선인 빨치산’을 상대로 싸웠다. 자경단의 중심이 된 재향군인 중에는 그런 조선 전선에서 귀환한 사람들이 포함되었다. 지진의 혼란 속에서 자경단이 적으로 판단해 찾아 나선 것이 ‘불령선인’과 ‘조선인 빨치산’이었다. 이런 사실은 조선 전선과 학살의 깊은 연결 고리를 보여준다.
--- p.204
 

출판사 리뷰

역사 전문 기사의 철저한 논문 검증

램지어 교수는 논문에서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방화를 저지르고 우물에 독을 뿌렸다는 유언비어를 사실인 것처럼 강조한다. 그는 “중요한 것은 학살 여부가 아니라 조선인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범죄를 저질렀고, 실제 자경단이 죽인 조선인이 얼마나 되느냐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근거로 그는 당시에 보도된 신문 기사들을 제시한다.

이 책의 저자 와타나베는 램지어 교수 논문에 등장하는 신문 기사들을 하나하나 읽어가며 그의 주장을 반박한다. 그는 주로 신문 기사가 오보임을 증명한다.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오보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살피고 추적하는 것이다.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 당시, 도쿄와 연결되는 통신 시설은 모두 끊긴 상황이었다. 신문 기자들은 긴박한 상황에서 본연의 임무를 다해, 하나의 기사라도 더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보를 모았다. 그러한 기록은 와타나베가 제시한 여러 신문사의 사사(社史)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거리의 피난민에게 들은 풍설이나 철도 통신망을 통해 얻은 정보, 그리고 군의 전문(電文) 등이 사실 확인을 거치지 않은 채 마구 호외로 발행된 것이었다. 그러한 ‘가짜 뉴스’는 시민들에게 유언비어가 마치 사실인 것처럼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었다.

가짜 뉴스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공공연한 장소에서 벌어진 조선인 학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저자 와타나베는 이렇게 말한다. “조선인 학살을 정당화하려면 ‘유언비어가 실재한 것’으로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정부는 이 모순된 상황을 다소나마 꿰맞추기 위해 ‘없던 일을 있었던 것’으로 하고, ‘있었던 일을 없었던 것’으로 조율했다. 정부는 거짓 발표를 한 것이다. 권력이 의도적으로 유포한 가짜 뉴스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지진 직후의 ‘유언비어를 보도한 오보’와는 다른 형태의 혼란이라 볼 수 있는, ‘정부의 발표를 보도한 오보’가 이렇게 방대하게 생겨난 것이다.”

학살은 왜 일어났는가?

조선인 학살은 공공연한 장소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왜 이런 학살이 일어났을까? 일본인은 유언비어의 어떤 부분이 두려웠던 것일까? 이 책의 저자 와타나베는 그 원인에 대해 몇 가지 사실을 지적한다.

우선 당시 ‘불령선인’이라 불리던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인식이다. 많은 신문이 조선인 범죄에 대해 의심하는 기색도 없이 보도했으며, 특히 《가호쿠신보》(9월 4일 자) 1면 칼럼에는 유언비어로 나도는 조선인 범죄에 대해 “그들의 평소 행동을 보면 있을 법한 일이다”라고까지 표현한다. 이에 대해 와타나베는 “사람들이 믿는 유언비어의 중심에 있던 것은 조선인이 집단으로 일본이라는 나라에 싸움을 걸어온다는 구도였다. ‘불령’이란 ‘불평을 품고 순종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식민지 조선인이 일본에 대해 불평을 품고 있다는 인식이 공유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 하나는 재향군인이란 귀환병들의 존재다. 일본군은 동학농민군과의 싸움을 비롯해 1910년 한국병합을 전후해 만 단위 수의 조선인을 죽였다. 이후에도 3.1운동과,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는 ‘불령선인’과 ‘조선인 빨치산’을 상대로 싸웠다. 그런 조선 전선에서 귀환한 사람들이 재향군인이 되었고 자경단을 조직한 것이었다. 와타나베는 이렇게 말한다. “쌀 소동에 대한 반성으로 경찰이 자경단을 발족했을 때, 그 중심에 재향군인이 편입되어 들어갔다. 거기에 지진 재해가 발생해 유언비어가 흘러 들어갔다. 그 내용에는 조선 전선에서의 체험을 떠올리게 하는 현장감이 있었다. 어떻게든 몸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무기를 찾고, 망설임 없이 조선인을 죽인 게 아니었을까?”

※ 이 책의 부록에는 재일사학자 강덕상 선생의 유물을 관리하고 있는 [강덕상자료센터]에서 제공한 관동대지진 관련한 이미지가 상당수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