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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 책은 강화가 초라한 피난처가 아니라 한 나라의 도읍지로 인정받게 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며, 강화도성의 가치를 다시 보게 하는 또 하나의 출발점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목차
책머리에
Ⅰ. 머리말
1. 연구 목적
2. 연구 방법
Ⅱ. 江都에 관한 그동안의 이해
1. 문헌에 나타난 강도의 성곽과 궁궐
2. 여러 견해
1) 성곽체제
2) 궁궐의 위치
3. 고고학적 조사현황
Ⅲ. 江都의 지리적 변화와 입지적 특징
1. 해안선의 변화
2. 입지적 특징
Ⅳ. 江都 성곽의 현황과 실체
1. 궁궐의 위치와 궁성의 규모
1) 궁궐의 위치
2) 궁성의 범위와 규모
2. 강화읍 외곽토성의 구조와 성격
1) 현황과 구조
2) 토성의 특징과 축조시기
3. 강도 해안 외성의 실체
1) 강화도 환축 외성의 실재 여부
2) 강도 동쪽 해안 일대 외성의 존재
Ⅴ. 江都의 성곽체제와 공간구조
1. 외성?중성?내성의 비정
1) 외성
2) 중성과 내성
2. 강도의 성곽체제
1) 성곽체제와 축조 배경
2) 개경과 강도의 성곽체제 비교
3. 강도의 공간구조
1) 개경의 도시구조와 강도
2) 강도 공간구조의 특징
3) 사원과 능묘로 본 강도
Ⅵ. 맺음말
참고문헌
찾아보기
도서출판 혜안 T)02-3141-3711 김태규 정리
Ⅰ. 머리말
1. 연구 목적
2. 연구 방법
Ⅱ. 江都에 관한 그동안의 이해
1. 문헌에 나타난 강도의 성곽과 궁궐
2. 여러 견해
1) 성곽체제
2) 궁궐의 위치
3. 고고학적 조사현황
Ⅲ. 江都의 지리적 변화와 입지적 특징
1. 해안선의 변화
2. 입지적 특징
Ⅳ. 江都 성곽의 현황과 실체
1. 궁궐의 위치와 궁성의 규모
1) 궁궐의 위치
2) 궁성의 범위와 규모
2. 강화읍 외곽토성의 구조와 성격
1) 현황과 구조
2) 토성의 특징과 축조시기
3. 강도 해안 외성의 실체
1) 강화도 환축 외성의 실재 여부
2) 강도 동쪽 해안 일대 외성의 존재
Ⅴ. 江都의 성곽체제와 공간구조
1. 외성?중성?내성의 비정
1) 외성
2) 중성과 내성
2. 강도의 성곽체제
1) 성곽체제와 축조 배경
2) 개경과 강도의 성곽체제 비교
3. 강도의 공간구조
1) 개경의 도시구조와 강도
2) 강도 공간구조의 특징
3) 사원과 능묘로 본 강도
Ⅵ.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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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출판 혜안 T)02-3141-3711 김태규 정리
출판사 리뷰
현재의 강화 ‘고려궁지’는 실제 고려시대 궁궐터가 아니었다!
현재 강화도에는 13세기 여몽전쟁(麗蒙戰爭) 때 고려의 강화 궁궐이었다는 ‘고려궁지’가 유적지로 일부 복원되어 있다. 그러나, 그간 수 차례의 발굴조사에도 불구하고 고려궁지에서는 고려시대 궁궐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어떻게 된 것일까?
이 책에서 저자 이희인 박사는 지금까지 우리에게 알려진 강화도성의 모습은 실제와 다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는 강화도성=강도(江都)는 ‘고려궁지’에 궁궐이 자리했고, 내륙으로부터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섬 동쪽 바닷가에 외성을 건설했으며 중성이 도읍의 중심을 에워싼 모습이었다. 그러나 고려궁지에서는 궁궐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고, 강도의 성곽과 시·공간적으로 연계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던 강화외성과 강화산성이 강도시기와 관련 있다는 증거도 확인되지 않았다. 때문에 그간의 강도에 관한 지식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저자에 따르면, 강화는 전쟁을 피해 잠시 머물렀던 피난처가 아니라 또 하나의 고려 수도였다. 도읍의 건설은 전쟁을 피해 급박하게 이루어졌지만 개경을 모델로 설계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강화도성의 흔적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궁궐터가 어디였는지, 천도 후에 쌓은 것으로 전하는 외성과 중성, 내성의 실체도 확실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도는 여몽전쟁 기간 동안 공식적으로 개경을 대체하고, 도시의 모습이 투영된 공간인 점은 분명하다. 저자는 안개 속에 있는 강도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시각을 견지하고 객관적 자료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보면서 그동안의 강도에 대한 이해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 책은 강도의 공간구조, 그 가운데 궁궐과 성곽 위치 및 체제를 중심으로 그동안의 통설을 비판한 저자의 구체적인 견해를 다루고 있다.
강도 궁궐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
강도에 대한 새로운 주장은 섬의 지리적 특성에 주목하면서 시작된다. 강화도는 천도기(遷都期)부터 간척(干拓)으로 인해 지형변화가 극심하게 이루어진 곳으로, 천도기 도읍의 공간구조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해안선과 지형을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저자는 우선 과학적 자료를 바탕으로 천도 당시의 지형에 대한 복원을 시도한다. 아울러 최근의 발굴 성과를 분석하고 그동안 강도를 연구하는데 가장 중요한 자료였던 문헌자료도 여러 사료와 비교해 다시 검토한다.
그렇다면 실제 고려시대 강화도성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먼저 궁궐을 보자. 지금까지 ‘고려궁지’가 강도의 궁궐터로 알려졌지만 정작 여러 차례의 발굴조사에서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궁궐은 도읍의 상징이면서 도시 구조를 결정짓는 공간이기 때문에 강도의 모습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궁궐의 위치가 분명히 밝혀져야 한다. 저자는 강화도성의 궁궐 자리는 ‘고려궁지’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고려궁지’에서는 궁궐의 흔적이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궁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강화읍 관청리 일원에서 개경의 궁궐과 구조가 비슷한 건축물의 흔적이 발견되어 궁궐터 발견에 희망을 주고 있다. 강도 궁궐은 지금의 강화읍 관청리 일대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데, 지금까지 조사된 유적의 내용과 분포, 지형 조건으로 보아 ‘고려궁지’ 서남쪽의 궁골 일대에 자리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음으로 성곽이다. 궁궐의 실체는 아직 땅속에 묻혀 있지만 성곽은 상대적으로 잘 남아있다. 강도가 자리했던 강화읍 일대를 에워싼 성곽, 즉 도성이 남아 있어 강도의 규모를 짐작하게 해준다. 이 성은 판축으로 쌓은 토루 위에 다시 흙으로 그 위를 덮는 구조의 토성으로 강화읍 동쪽 구간을 제외하고 길이가 약 11km다. 성벽이 확인되지 않은 동쪽 해안 구간을 성의 범위에 포함하면 강도 도성의 길이는 약 16~17km가 된다. 이는 개경 나성의 길이 약 23km 보다는 작지만, 둘레 약 18km인 조선시대 서울의 한양도성과 비슷한 규모다. 강도가 전쟁시에, 그것도 섬에 건설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러한 도성의 규모는 강도를 임시 피난처로만 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강화도의 삼면 또는 동쪽 해안을 따라 쌓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해안 외성의 존재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고 본다. 일부 문헌에 전하는 강화도 삼면 환축 외성 기록은 후대에 구전되는 과정에서 과장되거나 왜곡된 주민들의 전언을 기초로 한 것으로 강화도의 해안선 변화와 입지적 특성, 당시의 군사적 정황 등을 고려할 때 근거가 없다. 또 조선시대 강화외성은 강도 외성을 토대로 축조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한다. 강도시기와 조선시대는 해안선 자체가 달랐고 강화외성 발굴에서 강도시기의 흔적이 전혀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도를 동쪽과 남쪽에서 둘러싸 쌓았다는 외성에 대해서도 외성의 흔적으로 보았던 불은면 일대의 토루는 조선시대 말(馬)을 키우던 목장성의 흔적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만 강도시기 강화도 동쪽 해안에 제방이 축조되어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지만 승천포~초지까지 이어진 대규모 제방은 없었고, 성벽이 없는 도성 동쪽 해안 구간의 방어를 위해 갑곶 일대에 제방이 축조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 제방은 외성이 아니라 방어선이며, 지금까지 중성으로 알려진 도성이 강도의 외성이라고 본다.
중성은 강화산성 동문 부근에서 확인된 유적을 성벽 흔적으로 추정한다. 구체적인 범위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최씨 무인정권 집권자인 최항(崔沆)의 묘지명에 중성이 황도를 감쌌다는 기록과 남아 있는 성벽의 축선으로 보아 궁궐이 위치했었을 오늘날 관청리 일대를 둘러싸는 형태였을 것으로 판단한다. 강도의 중성은 개경의 황성과 같은 성격으로 볼 수 있다. 내성은 강도시기에 실제로 축조된 성곽이 아니라 중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종합해 보면 강도에는 ‘외성-중성(내성)-궁성’의 3개의 성곽이 존재했는데, 이를 개경과 비교해 보면 강도의 외성과 중성은 각각 개경의 나성과 황성에 상응한다. 이처럼 개경과 강도의 성곽체제가 비슷한 것은 기본적으로 강도의 성곽을 건설하는데 개경의 경험이 반영되었음을 시사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사원과 능묘의 분포 양상을 통해서 강도의 공간구조의 특징을 소개한다. 강화도에서 고려시대에 운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절터 가운데 상당수가 도성 바깥에 분포한다. 이러한 분포 양상은 나성 안쪽에 사원들이 밀집해 분포하는 개경과 차이가 있는데, 이는 도성의 축조 시점이 다를 뿐만 아니라 강도의 공간 부족에 따른 결과로 파악된다. 개경은 나성 축조 이전부터 사원이 축조되기 시작해 점차 외곽으로 사원이 건설되어갔지만 강도는 도성이 먼저 축조되고 그에 따라 도성내 공간이 부족한 상태에서 급속한 도시화가 이루어지면서 사원들이 도성의 바깥쪽에 자리 잡게 된 것으로 추정한다.
지금 강화도에는 왕릉 4기와 석실분 3기, 고려시대 분묘(군) 14개소가 자리한다. 왕릉을 제외하더라도 강화도내 고려시대 분묘의 밀집도는 다른 지역에 비해 상당히 높다. 이는 천도이후 개경과 내륙 지역 주민들이 강화로 이주하면서 인구가 급증했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강도 왕릉의 구조는 개경의 그것과 같은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질 좋은 자기와 구슬, 금동제 봉황문 장식 등 수준 높은 유물이 출토되어 강도의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
여몽전쟁 기간 동안 고려의 도읍이 자리했던 강화도는 분단의 현실 속에서 고려 도성 구조를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자 지역이다. 또 개성과 강화가 가지는 역사적 연계성은 남북 간 협력의 활용제가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강화도성에 대한 학술적 조사와 연구의 가치가 높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이 책은 강화가 초라한 피난처가 아니라 한 나라의 도읍지로 인정받게 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며, 강화도성의 가치를 다시 보게 하는 또 하나의 출발점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현재 강화도에는 13세기 여몽전쟁(麗蒙戰爭) 때 고려의 강화 궁궐이었다는 ‘고려궁지’가 유적지로 일부 복원되어 있다. 그러나, 그간 수 차례의 발굴조사에도 불구하고 고려궁지에서는 고려시대 궁궐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어떻게 된 것일까?
이 책에서 저자 이희인 박사는 지금까지 우리에게 알려진 강화도성의 모습은 실제와 다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는 강화도성=강도(江都)는 ‘고려궁지’에 궁궐이 자리했고, 내륙으로부터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섬 동쪽 바닷가에 외성을 건설했으며 중성이 도읍의 중심을 에워싼 모습이었다. 그러나 고려궁지에서는 궁궐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고, 강도의 성곽과 시·공간적으로 연계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던 강화외성과 강화산성이 강도시기와 관련 있다는 증거도 확인되지 않았다. 때문에 그간의 강도에 관한 지식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저자에 따르면, 강화는 전쟁을 피해 잠시 머물렀던 피난처가 아니라 또 하나의 고려 수도였다. 도읍의 건설은 전쟁을 피해 급박하게 이루어졌지만 개경을 모델로 설계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강화도성의 흔적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궁궐터가 어디였는지, 천도 후에 쌓은 것으로 전하는 외성과 중성, 내성의 실체도 확실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도는 여몽전쟁 기간 동안 공식적으로 개경을 대체하고, 도시의 모습이 투영된 공간인 점은 분명하다. 저자는 안개 속에 있는 강도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시각을 견지하고 객관적 자료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보면서 그동안의 강도에 대한 이해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 책은 강도의 공간구조, 그 가운데 궁궐과 성곽 위치 및 체제를 중심으로 그동안의 통설을 비판한 저자의 구체적인 견해를 다루고 있다.
강도 궁궐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
강도에 대한 새로운 주장은 섬의 지리적 특성에 주목하면서 시작된다. 강화도는 천도기(遷都期)부터 간척(干拓)으로 인해 지형변화가 극심하게 이루어진 곳으로, 천도기 도읍의 공간구조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해안선과 지형을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저자는 우선 과학적 자료를 바탕으로 천도 당시의 지형에 대한 복원을 시도한다. 아울러 최근의 발굴 성과를 분석하고 그동안 강도를 연구하는데 가장 중요한 자료였던 문헌자료도 여러 사료와 비교해 다시 검토한다.
그렇다면 실제 고려시대 강화도성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먼저 궁궐을 보자. 지금까지 ‘고려궁지’가 강도의 궁궐터로 알려졌지만 정작 여러 차례의 발굴조사에서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궁궐은 도읍의 상징이면서 도시 구조를 결정짓는 공간이기 때문에 강도의 모습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궁궐의 위치가 분명히 밝혀져야 한다. 저자는 강화도성의 궁궐 자리는 ‘고려궁지’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고려궁지’에서는 궁궐의 흔적이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궁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강화읍 관청리 일원에서 개경의 궁궐과 구조가 비슷한 건축물의 흔적이 발견되어 궁궐터 발견에 희망을 주고 있다. 강도 궁궐은 지금의 강화읍 관청리 일대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데, 지금까지 조사된 유적의 내용과 분포, 지형 조건으로 보아 ‘고려궁지’ 서남쪽의 궁골 일대에 자리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음으로 성곽이다. 궁궐의 실체는 아직 땅속에 묻혀 있지만 성곽은 상대적으로 잘 남아있다. 강도가 자리했던 강화읍 일대를 에워싼 성곽, 즉 도성이 남아 있어 강도의 규모를 짐작하게 해준다. 이 성은 판축으로 쌓은 토루 위에 다시 흙으로 그 위를 덮는 구조의 토성으로 강화읍 동쪽 구간을 제외하고 길이가 약 11km다. 성벽이 확인되지 않은 동쪽 해안 구간을 성의 범위에 포함하면 강도 도성의 길이는 약 16~17km가 된다. 이는 개경 나성의 길이 약 23km 보다는 작지만, 둘레 약 18km인 조선시대 서울의 한양도성과 비슷한 규모다. 강도가 전쟁시에, 그것도 섬에 건설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러한 도성의 규모는 강도를 임시 피난처로만 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강화도의 삼면 또는 동쪽 해안을 따라 쌓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해안 외성의 존재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고 본다. 일부 문헌에 전하는 강화도 삼면 환축 외성 기록은 후대에 구전되는 과정에서 과장되거나 왜곡된 주민들의 전언을 기초로 한 것으로 강화도의 해안선 변화와 입지적 특성, 당시의 군사적 정황 등을 고려할 때 근거가 없다. 또 조선시대 강화외성은 강도 외성을 토대로 축조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한다. 강도시기와 조선시대는 해안선 자체가 달랐고 강화외성 발굴에서 강도시기의 흔적이 전혀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도를 동쪽과 남쪽에서 둘러싸 쌓았다는 외성에 대해서도 외성의 흔적으로 보았던 불은면 일대의 토루는 조선시대 말(馬)을 키우던 목장성의 흔적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만 강도시기 강화도 동쪽 해안에 제방이 축조되어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지만 승천포~초지까지 이어진 대규모 제방은 없었고, 성벽이 없는 도성 동쪽 해안 구간의 방어를 위해 갑곶 일대에 제방이 축조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 제방은 외성이 아니라 방어선이며, 지금까지 중성으로 알려진 도성이 강도의 외성이라고 본다.
중성은 강화산성 동문 부근에서 확인된 유적을 성벽 흔적으로 추정한다. 구체적인 범위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최씨 무인정권 집권자인 최항(崔沆)의 묘지명에 중성이 황도를 감쌌다는 기록과 남아 있는 성벽의 축선으로 보아 궁궐이 위치했었을 오늘날 관청리 일대를 둘러싸는 형태였을 것으로 판단한다. 강도의 중성은 개경의 황성과 같은 성격으로 볼 수 있다. 내성은 강도시기에 실제로 축조된 성곽이 아니라 중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종합해 보면 강도에는 ‘외성-중성(내성)-궁성’의 3개의 성곽이 존재했는데, 이를 개경과 비교해 보면 강도의 외성과 중성은 각각 개경의 나성과 황성에 상응한다. 이처럼 개경과 강도의 성곽체제가 비슷한 것은 기본적으로 강도의 성곽을 건설하는데 개경의 경험이 반영되었음을 시사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사원과 능묘의 분포 양상을 통해서 강도의 공간구조의 특징을 소개한다. 강화도에서 고려시대에 운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절터 가운데 상당수가 도성 바깥에 분포한다. 이러한 분포 양상은 나성 안쪽에 사원들이 밀집해 분포하는 개경과 차이가 있는데, 이는 도성의 축조 시점이 다를 뿐만 아니라 강도의 공간 부족에 따른 결과로 파악된다. 개경은 나성 축조 이전부터 사원이 축조되기 시작해 점차 외곽으로 사원이 건설되어갔지만 강도는 도성이 먼저 축조되고 그에 따라 도성내 공간이 부족한 상태에서 급속한 도시화가 이루어지면서 사원들이 도성의 바깥쪽에 자리 잡게 된 것으로 추정한다.
지금 강화도에는 왕릉 4기와 석실분 3기, 고려시대 분묘(군) 14개소가 자리한다. 왕릉을 제외하더라도 강화도내 고려시대 분묘의 밀집도는 다른 지역에 비해 상당히 높다. 이는 천도이후 개경과 내륙 지역 주민들이 강화로 이주하면서 인구가 급증했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강도 왕릉의 구조는 개경의 그것과 같은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질 좋은 자기와 구슬, 금동제 봉황문 장식 등 수준 높은 유물이 출토되어 강도의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
여몽전쟁 기간 동안 고려의 도읍이 자리했던 강화도는 분단의 현실 속에서 고려 도성 구조를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자 지역이다. 또 개성과 강화가 가지는 역사적 연계성은 남북 간 협력의 활용제가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강화도성에 대한 학술적 조사와 연구의 가치가 높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이 책은 강화가 초라한 피난처가 아니라 한 나라의 도읍지로 인정받게 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며, 강화도성의 가치를 다시 보게 하는 또 하나의 출발점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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