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문학의 이해 (독서)/10.한국근대문학

지하촌 (2023)

동방박사님 2024. 3. 27.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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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그는 애기를 그의 뛰는 가슴속에 꼭 대며 자기가 아무렇게서라도 살아야 할 것 같았다. “내가 왜 죽어, 꼭 산다. 너희들을 위하여 꼭 산다” 하고 중얼거렸다. 애를 낳기 전에는, 아니 보다도 이 아픔을 겪기 전에는, 죽는다는 말이 그의 입에서 떠나지 않았고 또 진심으로 죽었으면 하고 생각도 많이 하였다. 그러나 마침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서 아차아차한 고비를 넘기고 겨우 소생한 그는 어쩐지 죽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삶의 환희를 느꼈다. 그가 하필 이번뿐만이 아니라 이러한 경우를 여러 번 당하였으나 그러나 남편의 생전에는 죽음에 대하여 한 번도 생각해보지도 않았으며 역시 죽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죽음이란 아무 생각 없이 대하였을 뿐이었다.
---「소금」중에서

K야, 너는 지금 상급 학교에 가게 되지 못한다고, 혹은 스위트 홈을 이루게 되지 못한다고 비관하느냐? 너의 그러한 비관이야말로 얼마나 값없는 비관인가를 눈 감고 가만히 생각해보아라. 네가 만일 어떠한 기회로 잠시 동안 너의 이상하는 바가 실현될지 모르나 그러나 그것은 잠깐 동안이고 너는 또다시 대중과 같은 그러한 처지에 서게 될 터이니 너는 그때에는 그만 자살하려느냐.
---「원고료 이백 원」중에서

그는 벌떡 일어나 걸었다. 그 이상 더 옛날을 더듬을 수는 없었다. 목이 찢어지는 듯 가슴이 막혀서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타박타박 걸었다. 이 길 위에 오빠의 신발 자국이 어딘가 남아 있을 것 같다. 그는 또 주저앉는다. 휘끈 돌아보니 저편에서 사람이 오는 것 같아 그는 화닥닥 일어나니 꼭 어머니인 듯한 여인이 이리로 온다. 그는 서슴지 않고, “어머니야” 하고 쫓아가니, 어떤 낯모를 여인이 저즘저즘하다가 지나친다. 그 여인이 보이지 않도록 바라보면서 어머니가 지금쯤은 주무실까, 한 번 더 가보고 싶어서 발길을 돌리니 몸이 비틀하고 꼬이면서 집에까지 갔다가 돌아올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어둠」중에서

출판사 리뷰

한국 근대 여성주의 리얼리즘의 선구자
강경애의 대표 중단편소설 11편 수록

배제된 존재들을 마주하는 여성의 다양한 얼굴


올곧은 작가 의식과 예리한 포착력으로 근대의 풍경을 핍진하게 그려내 한국 여성문학사의 주요 작가로 자리매김한 강경애의 중단편선 『지하촌』이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마흔아홉번째 책으로 출간되었다. 그가 소설가로서 내디뎠던 첫걸음에 해당하는 「파금」부터 일제강점기 빈궁문학의 수작으로 회자되는 「지하촌」, 작품 활동 후기의 경향이 잘 드러나 있는 「어둠」과 「마약」까지, 엄선된 대표 작품 11편을 묶었다.

일찍이 한글을 깨치고 어릴 적부터 탁월한 작문 실력을 발휘했던 강경애는 1924년 「책 한 권」이라는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고, 점차 평론과 수필, 소설 등으로 그 폭을 넓혀나갔으며, 장편소설 『인간 문제』를 비롯한 많은 걸작을 남겼다. 참담하고 곤궁했던 일제강점기 민중의 삶을 여성의 다양한 얼굴로 형상화한 그의 작품들은 한국 근대 여성문학을 논함에 있어 결코 제할 수 없는 중요한 자산이다. 강경애는 일제 치하에서 성적·지리적·계급적·민족적으로 배제된 존재들을 때로는 공부한 신여성의 얼굴로, 때로는 처절한 어머니의 얼굴로, 또 때로는 미친 여자의 얼굴로 똑바르게 마주한다. 강경애가 빚어낸 얼굴들은 전부 당대를 실제로 살아낸 이들의 것이므로, 그들이 통과하는 작품 속 현실 또한 실로 ‘리얼’할 수밖에 없다.

‘강경애식 여성주의 리얼리즘’의 정수를 보여주는 이번 중단편선의 책임 편집은 한국 근현대 여성문학에 꾸준히 관심을 기울여온 국문학자 김양선이 맡았다. 작품 발표 당시의 원본과 현대어 저본, 연구 자료 등을 꼼꼼하게 참고하고 작가 특유의 표현과 작품의 분위기를 최대한 고스란히 살림으로써 텍스트의 정확성을 기했다. 일상화된 이주 경험과 여성의 돌봄 노동, 약자와의 연대 등이 여전히 사회적 의제로 오르고 있는 요즘, 강경애가 평생토록 몰두했던 문제의식을 충실하게 담아낸 이 책을 통해 독자는 유의미한 물음표를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이주(移住)와 이산(離散)의 공간
간도에 살다 간 ‘입체적’ 어머니들


강경애의 작품 세계를 이루고 있는 수다한 여성 인물 중 특히나 눈에 띄는 것은 ‘어머니’들이다. 온갖 어려움 아래에서 끈질기게 삶을 일구어나가는 강경애 소설 속 어머니들은 모성을 동력으로 삼는데, 이때 작가는 “출산과 양육을 신비화하거나 여성의 보편적인 자질로 추상화하지 않”으며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덧씌운 이상적인 어머니 노릇, 주어진 모성성에 대한 통념을 우회적으로 비판”(작품 해설 「식민 시대 여성주의 리얼리즘의 성취」)한다. 납작한 모성 신화로부터 빠져나와 생생한 현실로 뛰어드는 그들의 ‘입체적’인 모성은 생존과 계급 투쟁에 대한 의지로도, 당세에 만연했던 부조리에 대한 고발로도 읽힌다. .

당대 민중의 물질적·정신적 결핍을 깊이 있게 다룬 「소금」은 친자식들에 대한 책임감과 젖어미로서 키운 아이를 향한 그리움 사이에서 갈등하는 봉염 어머니를 등장시킴으로써 모성의 현실적인 국면을 보여준다. “산 사람은 먹어야” 하며 “그러구 살 도리를 또 해야” 한다는 용애 어머니의 말과 (검열로 인해 지워진) 무산자 계급의 단결과 결속을 강조하는 결말은 그 모성을 난국 타개의 물꼬로 변주하여 풀어내고자 한 작가적 시도로도 읽힌다. 한편 이번 중단편선의 표제작인 「지하촌」은 가사와 농사일이라는 이중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악착같은 모성애와 생명력으로 삶을 버텨내는 칠성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낙관적인 전망마저 불가한 극악의 현실을 환기한다.

강경애 작품 속 어머니들이 맞닥뜨리는 수난에는 당시 간도의 현실이 깊숙이 끼어들어 있다. 예컨대 「소금」의 봉염 어머니가 겪는 가족의 해체와 가없는 유랑은 항일무장운동 쇠퇴 이후의 간도 상황과 맞닿아 있고, 「모자」의 승호 어머니와 「마약」의 보득 어머니를 위기에 빠뜨리는 가부장의 부재 및 타락 역시 당시의 간도 정세에 기인한다. 이주와 이산을 거듭하고 작가 생활의 대부분을 간도에서 보낸 그의 생애를 고려해볼 때, 강경애는 식민지 현실의 비참과 이를 돌파하기 위한 투쟁의 필요성을 간도라는 공간적 배경에 효과적으로 펼쳐놓았던 것이다.

허위와 가장의 얼룩 한 점 없도록……
폭로와 각성으로 닦아낸 성찰의 거울


차라리 이 붓대를 꺾어버리자. 내가 쓴다는 것은 무엇이었느냐. 나는 이때껏 배운 것이 그런 것이었기 때문에 내 붓끝에 씌어지는 것은 모두가 이런 종류에서 좁쌀 한 알만큼, 아니 실오라기만큼 그만큼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저 한 판에 박은 듯하였다.
―「간도를 등지면서」(『동광』, 1932. 8)

수필을 통해 밝히고 있듯, 강경애는 문사(文士)로서의 역할과 소명에 비추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성찰한 참된 지식인이었다. 허위를 물리치고 가장을 거부하고자 했던 작가의 치열한 고투의 기록은 그의 소설에도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부르주아 신여성의 허울을 신랄하게 풍자한 「그 여자」에서 주인공 마리아는 노동자 농민을 향해 ‘내 땅’ ‘내 동포’를 외치면서도 그들의 처지에 진실로 공감하지 못하는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되며, ‘미라’ ‘흡혈귀’와 같은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에 견주어진다. 연설을 들으면서 곧장 밭의 소중함과 직접 겪어온 지주의 착취를 떠올리는 군중과 달리, 마리아는 그저 “자연미를 구경하는 호기심”과 “어떤 명작이나 하나 얻을까 하는 바람”으로 농촌을 바라본다. 이러한 대비를 통해 강경애는 마치 서로 “딴 인종”처럼 느껴지는 이들 사이의 간극과 한계를 선명하게 짚어낸다.

작중인물의 후일담을 귀 기울여 듣는 여성 지식인 청자가 등장하는 「유무」와 「번뇌」 그리고 강경애의 자전소설 「원고료 이백 원」은 작가의 자기반성적 태도와 좀더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그는 특히 「원고료 이백 원」을 통해 사적인 욕망과 공동의 대의를 두고 벌어지는 여성 지식인의 내적 갈등을 솔직하게 내보이는 한편, 이를 “모던껄” “일류 문인” “입으로만 아! 무산자여 하고 부르짖는 그런 문인”이 되지 않겠다는 단호한 선언으로 매듭짓는다. 직접 번 돈으로 “평생의 원이던 반지나 혹은 구두나를 선선히 해 신”는 대신 동지들을 돕기로 결심하는 「원고료 이백 원」 속 ‘나’의 모습은 실제 강경애가 ‘성찰적 지식인’으로서 보였던 행보와 포개어진다. 글을 쓰는 문학인으로서 “참말 인생의 그 어느 한 부분이라도 진지하게 그려보았”(「유무」)는지 스스로에게 엄중히 묻는, 그럼으로써 다시금 결의와 각오를 다지는 강경애 소설 속 여성 지식인들의 진정성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의 마음에도 큰 울림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