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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왕이 되지 못하고 죽은 14명의 왕세자들
조선왕조의 수많은 이야기 중 왕이 되지 못하고 죽은 왕세자의 이야기가 많다. 폐세자가 5명, 요절한 왕세자가 6명, 요절한 황태자가 1명으로 모두 12명이나 된다. 그리고 2명의 왕세손이 조기 사망하여 왕이 되지 못했다. 『왕이 되지 못한 비운의 왕세자들』은 병으로건, 독살되어서건, 폐세자가 되어서건, 나라가 망해서건 왕위 서열 1위였음에도 왕이 되지 못하고 죽은 14명의 왕세자들과 왕세손들의 이야기를 사료에 입각해 정리한 후, 그들의 묘를 찾아 답사한 내용을 사진과 함께 싣고 있어 왕이 되지 못한 왕세자들의 비운을 생생히 전한다. 또한 책의 말미에 실린 ‘간추린 조선왕조이야기’와 부록으로 ‘조선왕계도’, ‘조선의 왕릉 42기’, ‘조선의 원’, ‘조선의 대원군 묘 3기’, ‘태조의 4대조 왕릉 4기’, ‘조선왕릉 상설도’를 싣고 있어 조선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조선왕조의 수많은 이야기 중 왕이 되지 못하고 죽은 왕세자의 이야기가 많다. 폐세자가 5명, 요절한 왕세자가 6명, 요절한 황태자가 1명으로 모두 12명이나 된다. 그리고 2명의 왕세손이 조기 사망하여 왕이 되지 못했다. 『왕이 되지 못한 비운의 왕세자들』은 병으로건, 독살되어서건, 폐세자가 되어서건, 나라가 망해서건 왕위 서열 1위였음에도 왕이 되지 못하고 죽은 14명의 왕세자들과 왕세손들의 이야기를 사료에 입각해 정리한 후, 그들의 묘를 찾아 답사한 내용을 사진과 함께 싣고 있어 왕이 되지 못한 왕세자들의 비운을 생생히 전한다. 또한 책의 말미에 실린 ‘간추린 조선왕조이야기’와 부록으로 ‘조선왕계도’, ‘조선의 왕릉 42기’, ‘조선의 원’, ‘조선의 대원군 묘 3기’, ‘태조의 4대조 왕릉 4기’, ‘조선왕릉 상설도’를 싣고 있어 조선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목차
서문 “왕위 서열 1위가 물거품이 되어버리다니…”
1장 폐세자의 삶이란 억울하기 짝이 없나니
조선 최초로 살해된 왕세자 되다 / 의안대군 이방석(제1대 왕 태조의 아들)
14년 동안의 왕세자 생활이 물거품 되다 / 양녕대군 이제(제3대 왕 태종의 아들)
할머니와 아버지를 잘못 만나 살해되다 / 폐세자 이황(제10대 왕 연산군의 아들)
유배지에서 왕세자빈과 땅굴을 파다 죽음을 맞다 / 폐세자 이지(제15대 왕 광해군의 아들)
2장 요절한 왕세자를 만나다
사촌동생인 단종과 같은 해에 세상 뜨다 / 의경세자 이장(도원군, 추존왕 덕종, 제7대 왕 세조의 아들)
적통의 왕위 계승을 무너트리다 / 순회세자 이부(제13대 왕 명종의 아들)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떠 죽음을 앞당기다 / 소현세자 이왕(제16대 왕 인조의 아들)
종묘 사직에 기여한 바 없는데 / 효장세자 이행(경의군, 추존왕 진종, 제21대 왕 영조의 아들)
간절한 기다림 속에 태어나다 / 문효세자 이향(제22대 왕 정조의 아들)
대리청정 중에 세상을 떠나다 / 효명세자 이영(추존왕 문조, 제23대 왕 순조의 아들)
3장 폐세자 된 후 복위된 왕세자
사도思悼! 생각하면 슬프다 / 사도세자 이선(장헌세자, 추존왕 장조, 제21대 왕 영조의 아들)
4장 대한제국 최초이자 유일한 황태자
일본인으로 살다 고국에 돌아와 숨을 거두다 / 의민황태자 이은(영친왕, 제26대 왕 고종의 아들)
5장 단명한 왕세손
할아버지의 통곡 속에 잠들다 / 의소세손 이정(제21대 왕 영조의 손자, 사도세자의 아들)
생후 9개월 만에 의문사하다 / 황세손 이진(제26대 왕 고종의 손자, 의민황태자의 아들)
글을 마치며 간추린 조선왕조이야기
부록 1 조선왕계도
부록 2 조선의 왕릉 42기
부록 3 조선의 원 14기
부록 4 조선의 대원군 묘 3기
부록 5 태조의 4대조 왕릉 4기
부록 6 조선왕릉 상설도
1장 폐세자의 삶이란 억울하기 짝이 없나니
조선 최초로 살해된 왕세자 되다 / 의안대군 이방석(제1대 왕 태조의 아들)
14년 동안의 왕세자 생활이 물거품 되다 / 양녕대군 이제(제3대 왕 태종의 아들)
할머니와 아버지를 잘못 만나 살해되다 / 폐세자 이황(제10대 왕 연산군의 아들)
유배지에서 왕세자빈과 땅굴을 파다 죽음을 맞다 / 폐세자 이지(제15대 왕 광해군의 아들)
2장 요절한 왕세자를 만나다
사촌동생인 단종과 같은 해에 세상 뜨다 / 의경세자 이장(도원군, 추존왕 덕종, 제7대 왕 세조의 아들)
적통의 왕위 계승을 무너트리다 / 순회세자 이부(제13대 왕 명종의 아들)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떠 죽음을 앞당기다 / 소현세자 이왕(제16대 왕 인조의 아들)
종묘 사직에 기여한 바 없는데 / 효장세자 이행(경의군, 추존왕 진종, 제21대 왕 영조의 아들)
간절한 기다림 속에 태어나다 / 문효세자 이향(제22대 왕 정조의 아들)
대리청정 중에 세상을 떠나다 / 효명세자 이영(추존왕 문조, 제23대 왕 순조의 아들)
3장 폐세자 된 후 복위된 왕세자
사도思悼! 생각하면 슬프다 / 사도세자 이선(장헌세자, 추존왕 장조, 제21대 왕 영조의 아들)
4장 대한제국 최초이자 유일한 황태자
일본인으로 살다 고국에 돌아와 숨을 거두다 / 의민황태자 이은(영친왕, 제26대 왕 고종의 아들)
5장 단명한 왕세손
할아버지의 통곡 속에 잠들다 / 의소세손 이정(제21대 왕 영조의 손자, 사도세자의 아들)
생후 9개월 만에 의문사하다 / 황세손 이진(제26대 왕 고종의 손자, 의민황태자의 아들)
글을 마치며 간추린 조선왕조이야기
부록 1 조선왕계도
부록 2 조선의 왕릉 42기
부록 3 조선의 원 14기
부록 4 조선의 대원군 묘 3기
부록 5 태조의 4대조 왕릉 4기
부록 6 조선왕릉 상설도
책 속으로
조선에서 왕자로 태어난 그들은 과연 몇 명이나 행복을 느끼며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났을까? 왕세자나 왕세손으로 책봉되어 왕이 된 왕자들 역시 행복했을까?
조선왕조 27명의 왕들 중 14명만 왕을 낳았고, 13명은 왕을 낳지 못했다. 왕을 낳은 14명 중에서 5명은 2명의 아들을 왕위에 올려 19명만 왕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나머지 8명은 추존왕과 대원군의 아들들이다. 그러니 왕세자나 왕세손으로 책봉되지 않고, 왕이 된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다.--- p.15
의안대군 방석은 부모의 뜻에 따라 왕세자로 책봉되었지만 무시무시한 이복형 방원에 의해 폐세자가 되어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어쩌면 부모의 과잉 사랑이 그의 목숨을 일찍 앗아가게 한 것은 아닐까. 아버지 태조가 어머니 신덕왕후 강씨에게 푹 빠져 원비 소생 자식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 이 같은 비극을 초래하게 만든 것이다.--- p.31
양녕대군의 실덕失德이 계속되자 바로 아래 동생 효령대군은 장차 자신에게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깊이 들어앉아 모든 걸 삼가고 글 읽기에 몰두했다. 양녕대군이 마침 효령대군의 방을 지나다 이를 보고 “어리석다. 너는 충녕대군에게 성덕聖德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효령대군은 크게 깨달은 뒤 그 길로 자주 가던 절에 달려가 온종일 북을 두드렸다고 한다.--- p.43
폐왕 연산군의 아들 이황과 광해군의 아들 이지만 그야말로 찬밥 신세가 되어 죽어서도 대접을 못하고 있다. 그들은 묘도 선물 받지 못했다. 그 누구도 그들의 무덤을 조성해주지 않았다. 무덤조차 없으니 참으로 애달프다. 아버지가 폐왕이 되어 더는 왕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폐세자지만 광해군의 유일한 아들이니만큼 광해군 묘 부근으로 옮겨 묻어주지 그랬나 싶다.
폐세자가 된 그들의 아버지 연산군은 11년 9개월, 광해군은 15년 1개월이나 왕위에 올라있었는데도 겨우 초라한 묘를 선물 받았다. 그러니 왕세자의 자리에 있었던 이황과 이지의 묘가 남아있을 리 없다. 그들은 후손들의 관심에서도, 역사 속에서도 점점 더 희미해지게 되었다. 묘조차 남아있지 않은 폐세자 이지의 꿈을 송두리째 앗아가게 만든 아버지 광해군은 문성군부인 류씨와 함께 나란히 잠들어 있다. 광해군의 소원대로 할머니 공빈 김씨(선조의 제1후궁)의 성묘와 가까이에 묻혔다.--- p.466~67
사람은 죄짓고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기는 어렵다. 그러니 의경세자도 아버지로 인해 왕위에서 쫓겨난 단종 생각에 마음 편할 날이 없었을 것이다. 거기다 첩첩산중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유배를 갔으니 그래도 할아버지 세종과 할머니 소헌왕후 심씨에게는 같은 손자들인데 어찌 탈이 안 나겠는가. 의경세자도 연산군 아들 폐세자 이황과 광해군 아들 폐세자 이지와 마찬가지로 아버지를 잘못 둔 비운의 왕세자였다. 그는 아버지 세조가 피를 나눈 삼촌들은 물론 집현전 학자들 대부분을 살해했음에도 폐왕이 되지 않은 덕분에 폐세자가 되지 않아 살해당하지 않은 것만 해도 천운이 아닐까 싶다.--- p.85
인조는 8년 전 소현세자가 인질로 끌려갈 때 통곡하며 지금의 일산까지 배웅했다고 전한다. 그리고는 청나라 사신에게 “아들이 추위를 많이 타니 온돌방에 재워 달라”는 부탁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따뜻했던 아버지는 어디로 가고 아들을 죽였다는 의심을 받는 관계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 p.104
안타깝게도 효장세자가 혼례를 치르던 날 설사병에 걸려 회복하지 못한 채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실록은 전한다. 어찌 이런 불상사가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그때 효장세자가 사경을 헤매자 영조는 곤룡포까지 벗어던지고 그를 끌어안은 채 “왕위라도 내놓을 테니 왕세자만은 구해 달라”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영조에게는 그때까지 적자가 한 명도 탄생하지 않았으며 후궁 소생으로도 효장세자가 유일한 아들이었다.--- p.129
그는 또 옷에 대한 광증 중 하나로 옷 갈아입기를 무서워하는 의대병衣帶病이라는 질병에도 시달렸다. 어렵게 장만한 옷이 자신의 마음에 안 들면 새 옷이어도 그냥 벗어 불태워버리고, 마음에 들면 그 옷이 다해지고 찌들어도 좀처럼 갈아입지 않았다고 한다. 동궁전에 나오는 예산은 별로 없는데 수시로 옷을 만들어 바쳐야 했던 혜경궁 홍씨도 이래저래 마음고생을 많이 한 모양이다. 그 당시 그녀는 친정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사도세자의 병증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한중록』등 여러 곳에 나와 있다. 그의 장인 홍봉한도 사도세자의 병증에 대해“무엇이라고 꼭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병이 아닌 것 같은 병이 수시로 발작한다.”고 했다.--- p.172
영친왕은 일본에 끌려가지만 않았다면 조선의 여인과 가례를 치렀을 것이다. 1907년 그가 일본에 끌려가기 전 약혼한 여인이 있었다. 영친왕의 약혼녀 이름은 민갑완(1897~1968)이다. 그녀는 명성황후 민씨의 친족이었던 승후관 민영돈의 딸로 11세에 왕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 그녀는 150대 1의 경쟁을 뚫고 왕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약혼 선물까지 받은 비운의 왕세자빈이다. 1962년 영친왕의 약혼녀 민갑완에 대한 이야기가 『백년한百年恨』이란 책으로 출간되었다.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을 담은 이 귀중한 책은 민갑완 자신이 구술하고 조카딸이 썼다. 그녀는 “간택이라는 허울 좋은 ‘인간의 계약’으로 말미암은 공방생활 50년의 역사는 가시밭길 바로 그것이었다.”고 자신의 인생을 한 마디로 표현했다. 책이 출판된 이듬해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그녀가 구술하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면 이 안타까운 이야기는 알려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다행히 자신의 기구한 삶을 역사와 함께 되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조선왕조 27명의 왕들 중 14명만 왕을 낳았고, 13명은 왕을 낳지 못했다. 왕을 낳은 14명 중에서 5명은 2명의 아들을 왕위에 올려 19명만 왕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나머지 8명은 추존왕과 대원군의 아들들이다. 그러니 왕세자나 왕세손으로 책봉되지 않고, 왕이 된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다.--- p.15
의안대군 방석은 부모의 뜻에 따라 왕세자로 책봉되었지만 무시무시한 이복형 방원에 의해 폐세자가 되어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어쩌면 부모의 과잉 사랑이 그의 목숨을 일찍 앗아가게 한 것은 아닐까. 아버지 태조가 어머니 신덕왕후 강씨에게 푹 빠져 원비 소생 자식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 이 같은 비극을 초래하게 만든 것이다.--- p.31
양녕대군의 실덕失德이 계속되자 바로 아래 동생 효령대군은 장차 자신에게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깊이 들어앉아 모든 걸 삼가고 글 읽기에 몰두했다. 양녕대군이 마침 효령대군의 방을 지나다 이를 보고 “어리석다. 너는 충녕대군에게 성덕聖德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효령대군은 크게 깨달은 뒤 그 길로 자주 가던 절에 달려가 온종일 북을 두드렸다고 한다.--- p.43
폐왕 연산군의 아들 이황과 광해군의 아들 이지만 그야말로 찬밥 신세가 되어 죽어서도 대접을 못하고 있다. 그들은 묘도 선물 받지 못했다. 그 누구도 그들의 무덤을 조성해주지 않았다. 무덤조차 없으니 참으로 애달프다. 아버지가 폐왕이 되어 더는 왕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폐세자지만 광해군의 유일한 아들이니만큼 광해군 묘 부근으로 옮겨 묻어주지 그랬나 싶다.
폐세자가 된 그들의 아버지 연산군은 11년 9개월, 광해군은 15년 1개월이나 왕위에 올라있었는데도 겨우 초라한 묘를 선물 받았다. 그러니 왕세자의 자리에 있었던 이황과 이지의 묘가 남아있을 리 없다. 그들은 후손들의 관심에서도, 역사 속에서도 점점 더 희미해지게 되었다. 묘조차 남아있지 않은 폐세자 이지의 꿈을 송두리째 앗아가게 만든 아버지 광해군은 문성군부인 류씨와 함께 나란히 잠들어 있다. 광해군의 소원대로 할머니 공빈 김씨(선조의 제1후궁)의 성묘와 가까이에 묻혔다.--- p.466~67
사람은 죄짓고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기는 어렵다. 그러니 의경세자도 아버지로 인해 왕위에서 쫓겨난 단종 생각에 마음 편할 날이 없었을 것이다. 거기다 첩첩산중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유배를 갔으니 그래도 할아버지 세종과 할머니 소헌왕후 심씨에게는 같은 손자들인데 어찌 탈이 안 나겠는가. 의경세자도 연산군 아들 폐세자 이황과 광해군 아들 폐세자 이지와 마찬가지로 아버지를 잘못 둔 비운의 왕세자였다. 그는 아버지 세조가 피를 나눈 삼촌들은 물론 집현전 학자들 대부분을 살해했음에도 폐왕이 되지 않은 덕분에 폐세자가 되지 않아 살해당하지 않은 것만 해도 천운이 아닐까 싶다.--- p.85
인조는 8년 전 소현세자가 인질로 끌려갈 때 통곡하며 지금의 일산까지 배웅했다고 전한다. 그리고는 청나라 사신에게 “아들이 추위를 많이 타니 온돌방에 재워 달라”는 부탁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따뜻했던 아버지는 어디로 가고 아들을 죽였다는 의심을 받는 관계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 p.104
안타깝게도 효장세자가 혼례를 치르던 날 설사병에 걸려 회복하지 못한 채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실록은 전한다. 어찌 이런 불상사가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그때 효장세자가 사경을 헤매자 영조는 곤룡포까지 벗어던지고 그를 끌어안은 채 “왕위라도 내놓을 테니 왕세자만은 구해 달라”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영조에게는 그때까지 적자가 한 명도 탄생하지 않았으며 후궁 소생으로도 효장세자가 유일한 아들이었다.--- p.129
그는 또 옷에 대한 광증 중 하나로 옷 갈아입기를 무서워하는 의대병衣帶病이라는 질병에도 시달렸다. 어렵게 장만한 옷이 자신의 마음에 안 들면 새 옷이어도 그냥 벗어 불태워버리고, 마음에 들면 그 옷이 다해지고 찌들어도 좀처럼 갈아입지 않았다고 한다. 동궁전에 나오는 예산은 별로 없는데 수시로 옷을 만들어 바쳐야 했던 혜경궁 홍씨도 이래저래 마음고생을 많이 한 모양이다. 그 당시 그녀는 친정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사도세자의 병증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한중록』등 여러 곳에 나와 있다. 그의 장인 홍봉한도 사도세자의 병증에 대해“무엇이라고 꼭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병이 아닌 것 같은 병이 수시로 발작한다.”고 했다.--- p.172
영친왕은 일본에 끌려가지만 않았다면 조선의 여인과 가례를 치렀을 것이다. 1907년 그가 일본에 끌려가기 전 약혼한 여인이 있었다. 영친왕의 약혼녀 이름은 민갑완(1897~1968)이다. 그녀는 명성황후 민씨의 친족이었던 승후관 민영돈의 딸로 11세에 왕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 그녀는 150대 1의 경쟁을 뚫고 왕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약혼 선물까지 받은 비운의 왕세자빈이다. 1962년 영친왕의 약혼녀 민갑완에 대한 이야기가 『백년한百年恨』이란 책으로 출간되었다.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을 담은 이 귀중한 책은 민갑완 자신이 구술하고 조카딸이 썼다. 그녀는 “간택이라는 허울 좋은 ‘인간의 계약’으로 말미암은 공방생활 50년의 역사는 가시밭길 바로 그것이었다.”고 자신의 인생을 한 마디로 표현했다. 책이 출판된 이듬해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그녀가 구술하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면 이 안타까운 이야기는 알려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다행히 자신의 기구한 삶을 역사와 함께 되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 p.222
출판사 리뷰
왕이 되지 못하고 죽은 14명의 왕세자들
영국의 경제사가 토니(Richard Henry Tawney)는 “역사가들은 승리한 세력은 눈에 띄는 곳으로 끌어내고, 그들이 집어삼킨 세력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어 넣음으로써 현존하는 질서에 불가피성이라는 외관을 부여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라는 불가피성을 인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E. H. 카(Edward Hallett Carr)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승자만이 아니라 패자도 역사를 이끈 주역임을 강조한다. 패자들의 역사는 ‘비운’이라는 수식어를 동반한다. 사람들은 승자의 운명보다 순조롭지 못하거나 슬픈 운명을 산 인물들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다. 그들의 비극적인 삶을 봄으로써 마음에 쌓여 있던 우울함, 불안감, 긴장감 따위가 해소되고 마음이 정화되기 때문에 비운의 인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
비운의 왕, 비운의 왕비, 비운의 왕자, 비운의 공주, 비운의 후궁 등의 이야기가 문화콘텐츠가 되어 책으로, 영화로, 연극으로, 뮤지컬 등으로 재구성되는 이유는 단순한 흥미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내재된 비극성에 대한 근원적 끌림이 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의 수많은 이야기 중 왕이 되지 못하고 죽은 왕세자의 이야기가 많다. 폐세자가 5명, 요절한 왕세자가 6명, 요절한 황태자가 1명으로 모두 12명이나 된다. 그리고 2명의 왕세손이 조기 사망하여 왕이 되지 못했다.
『왕이 되지 못한 비운의 왕세자들『은 병으로건, 독살되어서건, 폐세자가 되어서건, 나라가 망해서건 왕위 서열 1위였음에도 왕이 되지 못하고 죽은 14명의 왕세자들과 왕세손들의 이야기를 사료에 입각해 정리한 후, 그들의 묘를 찾아 답사한 내용을 사진과 함께 싣고 있어 왕이 되지 못한 왕세자들의 비운을 생생히 전한다.
또한 책의 말미에 실린 ‘간추린 조선왕조이야기’와 부록으로 ‘조선왕계도’, ‘조선의 왕릉 42기’, ‘조선의 원’, ‘조선의 대원군 묘 3기’, ‘태조의 4대조 왕릉 4기’, ‘조선왕릉 상설도’를 싣고 있어 조선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조선의 폐세자
조선왕조는 1392년 7월 17일 개국해 1910년 8월 29일 일본에 의해 강제 합병될 때까지 519년가량 나라를 통치했다. 그러는 동안 4명의 왕세자가 폐위되어 살해를 당하거나 억울한 삶을 살았다. 조선의 왕세자들 중 원래 폐세자가 된 왕세자는 4명이 아니라 5명이다. 사도세자가 복위되어 폐세자의 딱지를 떼게 되어 4명이다. 복위되지 못한 4명의 폐세자들 중 태조의 막내아들 의안대군과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은 그들의 아버지가 왕위를 잘 지켰기 때문에 죽어서나마 대접을 받고 있다.
왕이 되지 못한 왕세자들 중에서도 폐세자들 만큼 억울한 경우도 없다. 별 탈 없으면 왕이 되었을 서열 1위에서 한순간 추락하게 되는 이들의 삶이 가장 처절할 것이다. 그야말로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이들의 삶을 들여다봄으로써 인생무상을 느끼게 된다.
요절한 왕세자들
조선왕조에서 왕이 되지 못하고 요절한 왕세자가 6명이나 된다. 세조의 아들 의경세자 이장, 명종의 아들 순효세자 이부,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 이왕, 영조의 아들 효장세자 이행,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 이항,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 이영 등 6명이 보장받은 그들의 삶을 활짝 꽃피워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조선의 왕자로 태어나 왕세자로 책봉까지 받았는데 뭐 그리 급해 이 세상을 등지고 떠났을까? 이들은 애석하게도 하늘이 내린 명이 짧아 이 세상을 떠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소현세자와 같은 경우에는 혈기 왕성한 나이에 아버지가 살해했다는 의심을 받으면서 죽어간 왕세자도 있다. 요절한 6명의 왕세자들을 만나본다.
폐세자 된 후 복위된 왕세자
폐세자 중 사도세자만이 죽은 뒤 유일하게 복위되었다.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들어가기 전 서인으로 폐위되었다가 죽은 뒤 뒤주 밖으로 나와 왕세자로 복위되었다. 사도세자는 아들 정조가 죽고 세월이 한참 흐른 뒤 1899년 9월 고손인 제26대 왕 고종에 의해 장조로 추존되었다.
“영조는 소주방에서 쌀을 보관하는 뒤주를 가져오라고 명했다. 그리고는 사도세자를 서인으로 폐하고 뒤주에 가두었다. 사도세자는 이 안에 들어가 쪼그리고 앉아 땡볕에서 8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 똥오줌 범벅이 되어 죽어갔다.”
이 현장을 생각하니 무서운 생각이 든다. 사도세자만큼 드라마틱한 삶을 산 왕세자도 드물다. 오죽했으면 소설이나 영화에서 가장 많이 그의 삶을 조명했을까 싶다.
대한제국 최초이자 유일한 황태자
의민황태자는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의 이복동생으로 1897년 10월 고종에 의해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선포된 후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우리는 그를 의민황태자 아니 영친왕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는 대한제국이 일본과 합방되어 나라를 빼앗기게 되면서 대한제국 최초이자 마지막 황태자가 되고 말았다. 조선의 유일한 황태자를 만나본다.
단명한 왕세손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영조의 손자인 의소세손 이정, 의민황태자의 아들이면서 고종의 손자인 황세손 이진은 비운의 왕세손들이다. 의소세손은 영조의 장손으로 태어난 지 3세에 세상을 떠났고, 황세손 이진은 의민황태자와 이방자 여사 사이에서 태어난 대한제국 유일한 황세손이지만 출생한 지 8개월 남짓도 안 되어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했다. 의소세손 이정과 나라를 잃은 슬픔에 더하여 독살설까지 제기된 단명한 왕세손 이진을 만나본다.
영국의 경제사가 토니(Richard Henry Tawney)는 “역사가들은 승리한 세력은 눈에 띄는 곳으로 끌어내고, 그들이 집어삼킨 세력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어 넣음으로써 현존하는 질서에 불가피성이라는 외관을 부여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라는 불가피성을 인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E. H. 카(Edward Hallett Carr)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승자만이 아니라 패자도 역사를 이끈 주역임을 강조한다. 패자들의 역사는 ‘비운’이라는 수식어를 동반한다. 사람들은 승자의 운명보다 순조롭지 못하거나 슬픈 운명을 산 인물들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다. 그들의 비극적인 삶을 봄으로써 마음에 쌓여 있던 우울함, 불안감, 긴장감 따위가 해소되고 마음이 정화되기 때문에 비운의 인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
비운의 왕, 비운의 왕비, 비운의 왕자, 비운의 공주, 비운의 후궁 등의 이야기가 문화콘텐츠가 되어 책으로, 영화로, 연극으로, 뮤지컬 등으로 재구성되는 이유는 단순한 흥미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내재된 비극성에 대한 근원적 끌림이 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의 수많은 이야기 중 왕이 되지 못하고 죽은 왕세자의 이야기가 많다. 폐세자가 5명, 요절한 왕세자가 6명, 요절한 황태자가 1명으로 모두 12명이나 된다. 그리고 2명의 왕세손이 조기 사망하여 왕이 되지 못했다.
『왕이 되지 못한 비운의 왕세자들『은 병으로건, 독살되어서건, 폐세자가 되어서건, 나라가 망해서건 왕위 서열 1위였음에도 왕이 되지 못하고 죽은 14명의 왕세자들과 왕세손들의 이야기를 사료에 입각해 정리한 후, 그들의 묘를 찾아 답사한 내용을 사진과 함께 싣고 있어 왕이 되지 못한 왕세자들의 비운을 생생히 전한다.
또한 책의 말미에 실린 ‘간추린 조선왕조이야기’와 부록으로 ‘조선왕계도’, ‘조선의 왕릉 42기’, ‘조선의 원’, ‘조선의 대원군 묘 3기’, ‘태조의 4대조 왕릉 4기’, ‘조선왕릉 상설도’를 싣고 있어 조선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조선의 폐세자
조선왕조는 1392년 7월 17일 개국해 1910년 8월 29일 일본에 의해 강제 합병될 때까지 519년가량 나라를 통치했다. 그러는 동안 4명의 왕세자가 폐위되어 살해를 당하거나 억울한 삶을 살았다. 조선의 왕세자들 중 원래 폐세자가 된 왕세자는 4명이 아니라 5명이다. 사도세자가 복위되어 폐세자의 딱지를 떼게 되어 4명이다. 복위되지 못한 4명의 폐세자들 중 태조의 막내아들 의안대군과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은 그들의 아버지가 왕위를 잘 지켰기 때문에 죽어서나마 대접을 받고 있다.
왕이 되지 못한 왕세자들 중에서도 폐세자들 만큼 억울한 경우도 없다. 별 탈 없으면 왕이 되었을 서열 1위에서 한순간 추락하게 되는 이들의 삶이 가장 처절할 것이다. 그야말로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이들의 삶을 들여다봄으로써 인생무상을 느끼게 된다.
요절한 왕세자들
조선왕조에서 왕이 되지 못하고 요절한 왕세자가 6명이나 된다. 세조의 아들 의경세자 이장, 명종의 아들 순효세자 이부,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 이왕, 영조의 아들 효장세자 이행,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 이항,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 이영 등 6명이 보장받은 그들의 삶을 활짝 꽃피워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조선의 왕자로 태어나 왕세자로 책봉까지 받았는데 뭐 그리 급해 이 세상을 등지고 떠났을까? 이들은 애석하게도 하늘이 내린 명이 짧아 이 세상을 떠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소현세자와 같은 경우에는 혈기 왕성한 나이에 아버지가 살해했다는 의심을 받으면서 죽어간 왕세자도 있다. 요절한 6명의 왕세자들을 만나본다.
폐세자 된 후 복위된 왕세자
폐세자 중 사도세자만이 죽은 뒤 유일하게 복위되었다.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들어가기 전 서인으로 폐위되었다가 죽은 뒤 뒤주 밖으로 나와 왕세자로 복위되었다. 사도세자는 아들 정조가 죽고 세월이 한참 흐른 뒤 1899년 9월 고손인 제26대 왕 고종에 의해 장조로 추존되었다.
“영조는 소주방에서 쌀을 보관하는 뒤주를 가져오라고 명했다. 그리고는 사도세자를 서인으로 폐하고 뒤주에 가두었다. 사도세자는 이 안에 들어가 쪼그리고 앉아 땡볕에서 8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 똥오줌 범벅이 되어 죽어갔다.”
이 현장을 생각하니 무서운 생각이 든다. 사도세자만큼 드라마틱한 삶을 산 왕세자도 드물다. 오죽했으면 소설이나 영화에서 가장 많이 그의 삶을 조명했을까 싶다.
대한제국 최초이자 유일한 황태자
의민황태자는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의 이복동생으로 1897년 10월 고종에 의해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선포된 후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우리는 그를 의민황태자 아니 영친왕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는 대한제국이 일본과 합방되어 나라를 빼앗기게 되면서 대한제국 최초이자 마지막 황태자가 되고 말았다. 조선의 유일한 황태자를 만나본다.
단명한 왕세손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영조의 손자인 의소세손 이정, 의민황태자의 아들이면서 고종의 손자인 황세손 이진은 비운의 왕세손들이다. 의소세손은 영조의 장손으로 태어난 지 3세에 세상을 떠났고, 황세손 이진은 의민황태자와 이방자 여사 사이에서 태어난 대한제국 유일한 황세손이지만 출생한 지 8개월 남짓도 안 되어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했다. 의소세손 이정과 나라를 잃은 슬픔에 더하여 독살설까지 제기된 단명한 왕세손 이진을 만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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