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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아야 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모든 것 (2024)

동방박사님 2024. 5. 21.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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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2023년 10월, 이스라엘에 대한 하마스의 기습 공격으로 전 세계가 또 한 번 충격에 빠졌다. 이스라엘은 즉각 보복 공격을 단행했고, 단기간에 종료될 것으로 예상했던 이번 분쟁은 2024년 4월, 지금도 진행 중이다. 폭격과 파괴가 계속되면서 분쟁은 우리의 관심에서 조금씩 잊히고 있지만,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현 상황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다. 세계 최대의 감옥이라 불리는 가자지구는 어떤 곳일까. 그리고 100년째 이어져 온 이 분쟁은 도대체 왜 끝나지 않는 것일까?

목차

한국어판 서문
서문
지도

1장 기본 정보

분쟁의 주체는 누구인가?
이스라엘인은 누구인가?
이스라엘인과 유대인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팔레스타인인은 누구인가?
팔레스타인인과 아랍인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싸우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분쟁에서 종교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영토의 크기는 얼마나 되는가?
누가 먼저 그 지역에 거주했는가?

2장 분쟁의 시작

분쟁은 언제 시작되었는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유럽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이유는 무엇인가?
시온주의란 무엇인가?
시온주의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테오도르 헤르츨은 누구인가?
시온주의는 식민주의의 한 형태였는가?
영국은 분쟁 초기에 어떤 역할을 했는가?
하지 아민 알 후세이니는 누구인가?
이스라엘이 탄생한 것은 홀로코스트 때문이었나?
팔레스타인에 대한 유엔 분할 계획은 무엇인가?

3장 아랍-이스라엘 전쟁

아랍과 이스라엘은 몇 차례나 전쟁을 벌였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망했는가?
1948년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에 맞서 전쟁을 벌인 이유는 무엇인가?
1947~1949년 전쟁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초래한 결과는 무엇인가?
1948년 많은 팔레스타인인이 난민이 된 이유는 무엇이며,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1956년 시나이 전쟁이란?
1967년 전쟁은 왜 일어났는가?
1967년 전쟁은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1973년 전쟁의 의미는 무엇인가?
1982년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한 이유는 무엇인가?
1차 레바논 전쟁의 결과는 어떠했나?

4장 평화 프로세스

평화를 위한 첫 번째 시도는 언제였나?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만들어졌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 회담은 언제 시작되었나?
오슬로 협정이란 무엇인가?
이스라엘과 PLO는 왜 오슬로 협정에 서명했는가?
이츠하크 라빈의 암살은 오슬로 평화 프로세스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오슬로 평화 프로세스는 무너진 이유는 무엇인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 협정에서 해결해야 할 주요 쟁점은 무엇인가?
미국은 평화 프로세스에서 어떤 역할을 해왔는가?

5장 점령지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점령지’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스라엘의 군사 통치는 서안지구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어떤 제약을 가하고 있는가?
이스라엘이 서안지구에 긴 장벽을 건설한 이유는 무엇인가?
서안지구에 이스라엘 정착촌이 있는 이유는 무엇이며, 이스라엘인들은 왜 그곳에 살기로 선택했을까?
이스라엘 정착촌이 논란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철수한 이유는 무엇인가?
하마스는 어떻게 가자지구에서 정권을 잡았나?
하마스의 통치와 이스라엘의 봉쇄는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
지난 10년 동안 가자지구가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전쟁터가 된 이유는 무엇인가?

결론: 평화를 향한 긴 여정
두 국가 해법, 가능할까?
한 국가 해법은 가능한가?
두 가지 해결책이 모두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해야 갈등을 해결하거나 줄일 수 있을까?
 

저자 소개

영국 런던 출신의 작가이자 학자, 비평가.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정치학, 철학, 경제학 학사 학위를 취득한 후 존스홉킨스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노스이스턴대학교의 홀로코스트 및 대량 학살 인식 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이스라엘 연구협회, 워싱턴 D.C.에 본부를 둔 싱크탱크인 전략 국제문제연구소에서도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현재 캘리포니아대학교 로스앤젤레스캠퍼스 로잘린드 & 아서 길버트 ...
 
역 : 장정문
이화여자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후 외국계 기업에서 근무했으며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사라져 가는 존재들』, 『일상에 숨겨진 수학 이야기』, 『주기율표』, 『사파리』, 『정글』 등이 있다.

책 속으로

이러한 시위, 그리고 국제 언론과 각국 정부가 보이는 관심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이 전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을 다시 한번 여실히 보여준다. 전 세계 어디에서나 사람들은 이 분쟁에 대해 나름의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의견은 분쟁과 그 역사, 다양한 쟁점에 대한 폭넓은 지식보다는 현재 언론 보도나 소셜 미디어에 의해 형성된, 잘못된 정보에 기반한 것일 수 있다.
--- p.12~13

한편, 지난 40년 동안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와의 관계가 점진적으로 개선된 것과는 달리(물론 후퇴한 때도 있었지만), 이스라엘과 이란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두 나라는 한때 동맹국이었지만,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새롭게 등장한 이란 정부는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감과 팔레스타인 지원을 급진적 이념의 핵심 신조이자 외교 정책의 중심축으로 삼았다(이란 정권이 국내 지지 기반을 다지고 이슬람 세계에서 호감도를 높이며, 지역적 야망을 강화하려는 방법이었다). 이란 정권은 공식 담화에서 이스라엘을 악마화하고(이스라엘을 ‘작은 사탄’이라고 지칭했다),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거부하고, 이스라엘 파괴를 반복적으로 주장해 왔다. 이스라엘에 대한 이란의 반대는 단순한 수사적 표현을 넘어선다. 이란은 이스라엘에 맞서 싸우는 무장 이슬람 단체(특히 레바논의 헤즈볼라와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및 이스라엘의 적대국인 시리아에 막대한 자금과 무기를 지원해 왔다. 이란이 시리아, 헤즈볼라, 하마스와 함께 구축한 이른바 ‘저항의 축’은 이스라엘에 가장 큰 위협이 되고 있다. 실제로 이스라엘 정부와 대부분의 이스라엘인은 현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분쟁보다 이란의 위협에 더 신경을 쓴다. 오늘날 이스라엘의 최대 관심사는 팔레스타인이나 아랍 국가가 아닌 이란이다.
--- p.31~32

양측의 종교적 극단주의는 평화 조성을 어렵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폭력 행위에 동기를 부여하고 이를 정당화하고 묵인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하마스, 팔레스타인 이슬람 지하드 및 기타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는 이스라엘인에 대한 자살 테러를 정당화하기 위해 종교를 이용해 왔다. 이슬람에서는 자살이 금지되어 있지만, 자살 테러를 자살이 아닌 ‘순교’로 규정하며 정당화한 것이다. 이들은 순교를 미화하고, 순교자는 곧바로 천국에 감으로써 내세에서 풍성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종교적 헌신이라 찬양한다. 순교자가 되는 것이 계명을 이행하는 것이라는 믿음은 자살 테러를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종교가 이러한 공격의 유일한 동기는 아니지만, 공격에 큰 영향을 끼친 건 사실이다.
--- p.61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은 분쟁 초기에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한 영국에 분개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건국에 영국의 힘이 컸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인 역시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다. 양측 모두 영국이 상대편에 유리하게 행동했다며 맹렬히 비난한다. 영국은 도대체 어떤 일을 했기에 이러한 분노를 불러일으켰을까? 어떻게 팔레스타인의 아랍인과 유대인 모두를 분개하게 하고 소외시켰으며 그들 사이의 갈등에 불을 붙였을까?
--- p.99

팔레스타인의 미래에 관한 미국의 외교 정책을 결정한 가장 중요한 요인은 실용주의였다. 우선 유럽을 떠도는 최대 25만 명의 유대인 난민을 재정착시켜야 했고, 팔레스타인에서 중동을 불안정하게 하고 소련이 개입할 수도 있는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고자 하는 열망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또한 미국 정부는 이 지역에 민주적이고 친서방적인 유대 국가가 들어선다면 소련의 영향력을 억제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소련과의 냉전 상황에서 미국의 전략적 이해관계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를 향한 인도주의적 관심을 압도했고, 미국의 외교 정책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유대인이 홀로코스트에서 겪은 고통에 대한 보상과 유대 국가를 가져야 한다는 도의적인 믿음은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했던 셈이다.
--- p.117

1947년 11월 29일, 장시간에 걸친 열띤 토론 끝에 유엔 총회 회원국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다수가 UNSCOP 분할 계획의 수정 버전인 ‘유엔 결의안 181호’를 채택하기로 결의했다. 그 자리에 있던 몇몇 유엔 대표들이 박수를 치자 아랍 국가 대표들은 항의하며 퇴장했다. 초조한 마음으로 라디오 생방송을 통해 투표 결과를 접한 전 세계 유대인들은 기뻐하며 축하했고, 아랍인들은 분노를 참지 못했다.
--- p.122

어떤 이유로든 서안지구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인이 이스라엘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검문소를 통과하고 이스라엘 군인과 대면해야 한다. 이스라엘에서 합법적으로 일하는 팔레스타인인은 7만 명 정도 되는데(대부분 건설업에 종사한다), 이들은 매번 검문소의 좁은 콘크리트 복도, 철제 회전문, 전동식 게이트를 통과하기 위해 몇 시간 동안 뜨거운 태양 아래, 또는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긴 줄을 서서 기다린다. 짧은 통근 시간이 길고 힘들고 답답한 여정으로 바뀌는 경우가 잦은 것이다.
--- p.273

이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서안지구 유대인 정착민은 이념적 이유보다는 경제적 이유로 그곳에 살고 있다. 그중에는 철저한 세속주의자도 있고, 극도로 종교적인 유대인도 있다. 그러나 이들이 서안지구에 거주하는 이유는 일반적으로 정착촌의 주택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면서도 삶의 질이 더 좋기 때문이다. 특히 초정통주의 가정(한 가정당 평균 6.9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의 경우 저렴한 주택이 더욱 절실하게 필요한데, 이스라엘에는 주택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최근 몇 년 동안 서안지구의 초정통주의 유대인 전용 정착촌으로 이주하는 유대인이 늘고 있다.
--- p.292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마침내 이스라엘 정착민과 군인들이 가자지구를 떠나자 환희와 승리의 기쁨에 휩싸였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스스로 가자지구를 통치하고 경제적 번영을 이루고자 했던 바람과 달리, 가자지구의 경제는 이스라엘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철수하자 가자지구의 수출이 감소하고 실업률이 증가하는 등 급격한 경제 침체가 이어졌다. 가자지구의 생활 여건은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오랫동안 염원했던 이스라엘 철수는 경제적 혜택을 가져다주기는커녕 오히려 경제적으로 더 나빠지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하마스가 이곳을 장악하자 상황은 훨씬 더 악화되었다.
--- p.313

하마스가 가자지구를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에 유리한 일이다. 이스라엘의 하마스 공격(2008~2009, 2012, 2014)은 하마스를 파괴하거나 권좌에서 끌어내리려는 의도가 아니었다(일부 이스라엘 내각 구성원은 이러한 목표를 옹호하기도 했지만). 이스라엘은 하마스를 억제하고 약화시키기를 원하면서도, 하마스가 가자지구를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약화시키지는 않았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재점령하여 통치하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들고 위험하며, 국내 여론도 좋지 않다. 따라서 아이러니하게도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를 통치하고, 이 지역의 안정을 유지하며, 이곳에서 활동하는 급진 무장 단체를 감시하는 일을 하마스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이스라엘로서는 하마스가 가자지구를 계속 통치하는 것이 ‘가장 덜 나쁜’ 선택지인 셈이다.
--- p.341

출판사 리뷰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분쟁
그 기원과 복잡한 배경을 명쾌하게 설명하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오랜 기간 수많은 외교적 노력과 평화 회담이 이어졌지만 분쟁은 끝나지 않았고, 국제 사회의 지속적인 관심에도 불구하고 이 분쟁은 많은 오해를 받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분쟁의 역사가 너무 길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이해하려면 제1차 세계대전은 물론 그 이전의 중동 역사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매듭을 풀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최근의 사태로 인해 날마다 수많은 정보가 쏟아져 나오며 분쟁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어렵게 만든다. 사람들은 대개 미디어를 통해 정보를 얻지만, 미디어의 편향성과 피상적 보도 방식 역시 오해를 증폭시키는 데 일조한다. 대부분의 보도가 분쟁의 깊은 역사와 맥락을 제외하고 현재의 사건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브 왁스만은 분쟁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돕고자 이 책을 집필했다. 그는 대학 강의와 강연에서 가장 자주 받았던 질문들을 떠올리며 명확한 답변을 제시하고자 했고, 이를 질의응답 형식으로 기술해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이를 통해 분쟁에 대한 기본적인 배경지식이 없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고, 이미 일정 수준의 지식이 있는 사람도 원하는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영토와 종교 문제가 뒤얽힌 뿌리 깊은 대립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은 두 민족이 같은 땅을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며 시작됐다. 이 땅은 유대교와 이슬람교 모두에게 종교적으로 중요하며, 따라서 분쟁은 복잡한 종교적 서사를 내포한다.

대부분의 전쟁이 구체적인 시작 날짜가 있는 것과 달리,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은 명확한 시작점이 없다. 두 민족 사이의 긴장이 폭발한 결정적인 계기는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러시아 제국에서 일어난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사건이었다. 새로 즉위한 차르는 암살의 배후로 유대인을 지목했고 러시아에 거주하던 대규모 유대인 집단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포그롬’으로 알려진 반유대인 폭동의 물결 속에서 마침내 19세기 말 러시아 유대인의 집단 탈출이 시작되었다. 팔레스타인으로 몰려온 유럽계 유대인은 지역의 인구 구성을 바꾸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이주민과 현지 아랍인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면서 분쟁의 씨앗이 싹을 틔웠다.

그런 점에서 반유대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유대인 조국 건설을 주장했던 시온주의는 당시 상황에 딱 들어맞는 움직임이었다. 시온주의는 유럽에서 억압받던 유대인을 위한 민족해방운동과 비슷하지만, 팔레스타인 땅으로 이주한 유대인은 자신들의 존재를 정당화했고 그들을 침입자로 여기는 토착민의 반발을 진압하는 등 유럽 제국주의 국가와 유사하게 행동했다. 그러나 시온주의와 유럽 식민주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존재한다. 팔레스타인 땅으로 이주한 유대인은 특정 국가의 주도하에 그곳으로 보내진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도망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중요한 역사적, 종교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그곳에 정착했지만 현지 아랍인 입장에서는 시온주의나 유럽 식민주의 모두 자신들의 땅을 침범하는 외부 세력일 뿐이었다. 이러한 배경은 현재까지 이어지는 긴장의 근본적 원인 중 하나다.

영국, 지키지 못할 약속으로 분쟁을 촉발하다

잘 알려져 있듯이 영국은 모순적인 세 가지 비밀 약속을 했다. 첫째는 이스라엘 건국에 기여한 가장 유명한 선언인 ‘밸푸어 선언’으로, 영국이 시온주의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유대 국가 건설에 협조하겠다는 약속이다. 하지만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6년, 아랍 국가가 오스만 제국에 반란을 일으키면 그 대가로 아랍 독립 국가 수립을 지원하겠다는 약속, 즉 ‘후세인-맥마흔 협정’을 맺었다. 게다가 영국은 동맹국이었던 프랑스와도 비밀리에 세 번째 약속을 했는데, 이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 이 지역이 포함된 오스만 제국을 해체해 각자의 영향권 아래 두기로 한 ‘사이크스-피코 협정’이다. 따라서 전후 영국의 팔레스타인 통치는 시작부터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준비하는 동시에 그 자리에 유대 국가를 수립하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하는, 완전히 상반된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이러한 약속들은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통치하는 동안 민족 간의 긴장을 심화시켰다.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의 폭력적 분쟁을 악화시킨 영국은 양측 모두로부터 비판을 받았으며 결국 ‘팔레스타인 문제’를 유엔에 넘기고 철수했다. 그러자 유엔은 팔레스타인을 아랍 국가와 유대 국가로 분할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당시 아랍 인구가 유대인의 두 배가 넘었음에도 영토의 반 이상을 유대 국가에 할당한 것이었다. 분노한 아랍인들의 공격과 시온주의 민병대의 보복이 이어지며 내전이 발생했다. 이렇게 시작된 양측의 전쟁 상태는 일시적인 휴전과 폭력 소강상태를 반복하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캠프 데이비드 협정, 오슬로 협정 등 평화 회담과 외교적 노력이 이어졌으나, 평화 프로세스의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분단과 대립의 상징인 서안지구의 장벽
논란과 갈등의 중심에 놓인 정착촌 문제


이스라엘 정부는 이스라엘과 서안지구 사이에 긴 장벽을 건설하고 있다. 이 장벽을 바라보는 양측의 시선은 확연히 다르다. 이스라엘인은 이 장벽을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가 이스라엘로 침투하는 것을 막는 방어 수단으로 여기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이 장벽은 이스라엘 점령의 상징이자 이스라엘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이렇게 상반된 인식이 생겨난 이유는 무엇일까?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큰 인프라 프로젝트인 장벽 건설이 완료되면(현재까지 3분의 2가 완공되었다) 총길이는 약 700킬로미터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며, 장벽 1킬로미터당 약 200만 달러가 소요되어 지금까지 든 비용만 해도 26억 달러가 넘는다. 이스라엘 정부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큰 비용이 들고 논란이 많은 프로젝트에 착수한 것일까?

1967년 5월, 당시 요르단 통제하에 있던 서안지구에는 단 한 명의 이스라엘인도 살지 않았다. 그러나 50년이 지난 오늘날, 이 지역에는 약 40만 명의 이스라엘인이 130여 개의 민간인 공동체, 즉 ‘정착촌’에 거주한다. 이곳에 사는 유대인은 팔레스타인의 테러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총기를 소지하고, 경찰이 보는 앞에서도 이웃 팔레스타인인을 폭행한다. 서안지구에 이스라엘 정착촌이 있는 이유는 무엇이며, 이스라엘인들은 왜 그곳에 살기로 선택했을까?

국가 안보를 위해 통제하는 이스라엘
자유와 존엄성을 보장받으려 투쟁하는 팔레스타인


오늘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단지 영토 문제로 보는 것은 양측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분쟁의 여러 측면을 간과하는 것이다. 분쟁의 중심에 있던 영토 문제는 수년에 걸쳐 안보와 정체성 문제로 확대되었고, 그 과정에서 양측이 서로를 평화적 공존이 불가능한 적으로 인식하면서 분쟁은 생존을 담보로 한 실존의 문제로 변모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중요도가 바뀌고 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은 군사력이 성장함에 따라 더 이상 생존을 위협받지 않는다. 따라서 오늘날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국가의 존립이 아니라 국경이 어디가 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이는 팔레스타인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팔레스타인 민족에게 중요한 것은 국가의 존재 여부보다는 미래 팔레스타인 국가의 규모와 위치, 권리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다가 아니다. 현재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 살고 있는 평범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자유와 존엄성이다. 이들에게 팔레스타인 국가를 건설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통제와 군사적 통치에서 벗어나고, 점령지에서의 고난과 모욕적인 삶을 벗어나기 위한 방편이다. 반면, 이미 국가 지위를 획득한 평범한 이스라엘인들에게는 안보가 최우선 과제다. 따라서 팔레스타인인의 자유에 대한 욕구와 이스라엘인의 안보에 대한 욕구를 조화롭게 충족시키는 것이 이 장기적인 분쟁을 해결하는 열쇠일 것이다.

균형적인 시각에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역사를 돌아보고 현재를 진단하며 미래를 전망하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공정하고 객관적인 저자의 시선이다. 군사력이나 피해 규모의 측면에서 현저하게 기울어진 현 상태를 비판하며 약자에게 동조하거나,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는 테러를 비판하며 미국을 비롯한 서구 강대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등 어느 한쪽을 옹호하는 주장을 펼치는 책은 이미 많다. 하지만 저자는 시종일관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며, 날카로운 통찰을 바탕으로 양측의 주장이 지닌 장단점을 분석하고 상반된 입장을 공정하게 대변한다.

분쟁의 역사와 현 상황, 미래에 대한 현실적인 가능성까지, 좀 더 깊이 있는 이해를 추구하는 독자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시의적절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