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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북] 08월 03일 (1943 독립운동가 안희제 사망)

동방박사님 2024. 8. 3.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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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월 03일 한국사 사건 주요일지

1900 독립운동가 정정하 출생 / 1943 독립운동가 안희제 사망  / 1950 다부동전투 시작 / 1983 삼성반도체 64KD램 개발성공 / 2005 황우석 교수팀, 개 복제 셰계 첫성공

안희(安熙濟)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 사진캡처

안희제(安熙濟, 1885년 음력 84~ 194383)는 대한민국의 독립 운동가이다. 본관은 탐진(耽津). 호는 백산(白山)이다.

생애

경상남도 의령군 출생이다. 어릴 때는 한학을 공부하다가 양정의숙을 졸업하고 동래군과 고향 의령에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사업에 몰두하면서 계몽 운동을 펼쳤다.

1909년 윤세복, 서상일, 남형우 등과 함께 대동청년당 조직에 가담하였고, 이듬해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자 만주로 1차 망명한 뒤 독립 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독립 운동을 위해서는 자금을 모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그는 귀국한 후 1914년 부산에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실업가로서 독립 운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19193·1 운동 발생 이후 의령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고,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백산무역주식회사를 통해 임시정부에 자금을 조달했다. 이외에도 장학회인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기도 하였으며, 1925년 중외일보를 인수해 운영하기도 했다.

1930년대 들어 가산을 정리해 만주 지역으로 재차 망명한 뒤 옛 발해 지역에 발해농장과 발해학교를 설립하였다. 망명 후 그는 대동청년단 시절부터의 동지인 윤세복이 교주로 있는 대종교에 1931년 입교하고, 민족 정신의 창달에 힘썼다.

194211월 일제가 윤세복 등 대종교 지도자들을 한꺼번에 검거한 임오교변(壬午敎變)으로 체포되었고, 여러 차례 고문 끝에 194383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가 몇 시간 뒤에 사망했다. 이 당시 헤이룽장성 액하감옥에서의 일제의 고문은 가혹했던 것으로 전해지며, 이로 인해 임오교변으로 체포된 21명 중 10명이 살아나오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는 이때 사망한 열명의 대종교인을 가리키는 대종교 순국십현(殉國十賢)의 한 사람이다.출처 위키피디아

사후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고향인 의령에 생가가 복원되어 있다.

부산에는 백산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책소개

1945년 이후 이미 반세기가 지나면서 일제 강점기 치하의 어두웠던 역사에 대한 기억도 흐릿해지고 있다. 특히 한국의 독립을 위해 애쓴 독립운동가에 대한 망각이 빨라졌다. 이 책은 독립운동가 안희제를 조명한 책이다. 독립운동에는 많은 자금이 든다. 안희제는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교육구국운동·비밀결사단체활동·민족산업육성운동·경제권수호운동·항일언론투쟁·문화운동·대종교를 통한 민족운동 등 다방면에 걸쳐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활동했다. 책 제목이 말해주듯, 안희제의 활동은 독립운동 자금의 젖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목차

글을 시작하며

1 독립운동가의 기개를 키운 의령 설뫼마을
2 근대교육의 보급을 위해 교육구국운동에 앞장서다
3 교남교육회에서 계몽운동에 매진하다
4 비밀결사 대동청년단을 결성하다
5 독립운동 자금을 위해 백산상회를 설립하다
6 독립운동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기미육영회를 조직하다
7 부산예월회를 조직하여 문화운동을 확산하다
8 협동조합운동에 앞장서다
9 중외일보 사장에 취임해 날카로운 항일 필봉을 휘두르다
10 국외 독립운동기지로 발해농장을 경영하다
11 대종교에 귀의하다
12 임오교변으로 순국하다
13 경교장의 통곡소리

글을 맺으며
독립운동가 안희제의 삶과 자취
참고문헌
찾아보기

저자 소개

저자 : 이동언
건국대학교 사학과를 나와 동대학원을 졸업하였다. 한국근현대사를 전공하고 현재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으로 있다. 서일대·순천향대학교 강사를 지냈고 백범학술원 비상임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논저로는 「일제하 조선금융조합의 설립과 성격」(1992), 「백산 안희제 연구」(1994), 『제천 애국지사 이용태의 삶과 사상』(공저, 2005)이 있다.

출판사 리뷰

다양한 방면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 자금 조달에 앞장서다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한민족은 국권회복을 위해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 과정에서 독립운동 자금 조달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경제적인 여력 없이는 독립운동을 추진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안희제安熙濟는 이렇게 가장 중요한 독립운동 자금 조달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활동한 독립운동가였다.

안희제처럼 다양한 독립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는 흔치 않다. 그는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 조달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고, 온갖 위험에도 굴하지 않고 활발히 활동했다. 안희제는 일제 침략이라는 민족적 위기상황 속에서 국권회복을 위해 교육구국운동·비밀결사단체활동·민족산업육성운동·경제권수호운동·항일언론투쟁·문화운동·대종교를 통한 민족운동 등 다방면에 걸쳐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국내에서의 활동은 의신·창남·구명학교 설립·대동청년단 결성·백산상회 설립·기미육영회 조직·부산예월회를 통한 문화운동 확산·협동조합운동·중외일보를 통한 언론투쟁 등으로 요약할 수 있고, 국외에서는 독립운동기지 개척을 위한 발해농장의 경영, 그리고 만년에는 민족종교인 대종교에 귀의하여 많은 업적을 남긴 것을 들 수 있다.

안희제의 활동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점은 무엇보다도 독립운동 자금 조달이다. 배가 고파서 우는 어린아이에게 엄마가 젖을 물리는 심정으로 안희제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어떠한 위험과 역경에서도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 조달의 젖줄이 되고자 했다.

안희제의 생애를 완전히 복원하고 제대로 다 밝히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독립운동가로서 평생을 살다간 안희제의 발자취를 찾아 그의 생애를 새롭게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아울러 그의 구국이념과 나라사랑 정신을 되새겨 귀감으로 삼고자 한다.
- 머리말 중에서

책소개

조국근대화의 선구자인 백산 안희제 선생의 생애를 분야별 전공학자들의 글로 엮은 책.

목차

- 화보로 보는 백산 안희제
- 백산 안희제 연보
- 의령 입산리 안씨의 전통과 문화유산
- 대동청년당의 결성과 활동
- 안희제의 계몽운동과 문화운동
- 백산무역주식회사의 설립과 경영
- 백산 안희제의 항일 언론활동
- 백산 안희제의 대종교 독립운동과 순국
- 백산 안희제의 민족운동사적 위치
- 백산 고택의 숨은 이야기
- 백산 안희제 자료집

* 백산공가장급유사약록(白山公家狀及遺事略錄)
* 백산시초(白山詩抄)
* 임종당시상황(臨終當時狀況)

저자 소개

저자 : 백산안희제선생순국70주년추모위원회
- 백산안희제선생순국70주년추모위원회 위원장 | 조동걸(국민대 명예교수, 前 한국국학진흥원장) 위 원 | 김대상(前 부산사학회 회장)김동두(前 성균관 이사)이만열(숙명여대 명예교수)정진석(한국외대 명예교수)최 염(최준 종손)최영식(前 동아일보 논설위원)안경하(사손)안경식(손자)박재욱(손서)장석흥(국민대 교수)권대웅(대경대 교수)이병철(부산일보 부장)이동언(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최창호(...
 
2013년은 백산 안희제 선생 순국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순국70주년추모위원회가 발족하여 안희제선생의 생애와 민족운동을 재조명하기 위해 학술회의를 개최하고 학계 원로선생님들과 중진연구자들 연구실적을 모아 간행한 추모논총입니다. 백산 안희제선생 관련 사진자료와 자료집을 함께 엮었습니다. 백산 안희제선생은 대한민국의 국가적 인물이요 민족지도자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독립군

출판사 리뷰

올해가 白山 安熙濟 선생 순국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백산선생은 약관에 보성전문학교와 양정의숙에 다니면서, 구국교육으로 宜新學校·南學校·龜明學校를 설립하여 계몽주의를 일으킨 조국근대화의 선구자입니다. 그리고 1909년에는 徐相日·金東三·南衡宇 등 동지들과 함께 독립운동 단체로 大東靑年黨을 결성한 독립운동의 선구자이기도 합니다. 이어 朝鮮國權回復團과 大韓光復會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1914년에는 白山商會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의 재정 기초를 수립해 갔습니다. 백산상회는 1918년에 白山貿易株式會社로 확장하여 자산가 182명의 주식을 모아 독립운동을 지원하였습니다. 한국의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 Oblige)의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이듬해에는 己未育英會를 만들어 安浩相·李克魯·申性模 등의 청년을 유학시켜 조국의 동량으로 키웠습니다.
그리고 1920년에는 東亞日報 창간 발기에 참여하고 이어 민립대학기성회와 협동조합운동을 일으켰습니다. 1929년에는 中外日報 사장을 맡는 등 민족 언론에도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제1차세계대전 전후 경제공황이 심각하게 몰아쳐 일본은 5·15사건과 2·26사건으로 軍國主義 독재를 강화하고 밖으로는 새로운 식민지 개척을 획책하며 1931년 滿洲事變을 일으키고 몽골로 침략하면서 1937년 中日戰爭을 도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식민지 조선의 희생은 더욱 악화되고 한국인의 독립운동은 갈수록 암담한 압박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리하여 白山先生은 새로운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구상하여 滿洲 牧丹江省 東京城 근방에 渤海農場을 건설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발해농장은 4km에 달했고 수로가 16km에 이르는 광대한 농장입니다. 그래서 300호의 농업이민을 단행했던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민족종교인 大倧敎사업을 부흥·강화하여 동포를 독립운동 요원으로 훈련시켰습니다. 이것을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결국 1942년 壬午敎變을 일으켜 대종교 관계자, 발해농장 관리자, 대동청년당 요원 등, 독립운동지도자 21명을 감금 고문하여 白山先生을 비롯한 10명의 志士가 순국하였습니다. 백산선생은 1943년 9월 1일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다음날인 9월 2일 고문 후유증으로 永濟病院에서 돌아가셔서 고향 입산리 뒷산에 모셨습니다. 그리고 1945년에 해방되었으나 조국이 분단되고 분단 조국의 남북상쟁으로 독립운동을 수습 정리할 겨를이 없어 백산선생의 업적도 방치되어 왔습니다.
1960년 4·19혁명을 맞아 민족문제의 부각과 함께 백산선생기념사업이 발의되어 처음에는 의령군 향토사업으로 추진되다가 1987년부터 부산을 중심으로 경상남도 사업으로 발전하여 '백산 안희제 연보'에서 보는 바와 같이 큰 성과를 올렸습니다. 그때 '백산 안희제 선생'이란 책자가 출간되었습니다. 거기에는 권수기(權壽基)를 중심으로 한 의령문화원의 역할이 컸고 동시에 의령교육청과 경남교육위원회의 민족교육 발전을 위한 노력이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이제 백산 안희제는 의령군이나 경상남도에 한정된 인물이 아닙니다. 그의 업적으로 보면 대한민국의 국가적 인물이요 민족 지도자로 부상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지난 5월 15일에 순국 70주년 추모위원회가 발족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백산선생의 생애를 관조한 개설적인 설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을 분야별로 각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분야별 전공학자를 모셨습니다.
① 계몽주의와 문화운동 ② 대동청년당의 조직과 활동 ③ 백산상회의 설립과 백산무역주식회사의 활동 ④ 중외일보 등의 언론활동 ⑤ 발해농장의 설립과 농업이민 ⑥ 대종교활동과 순국 등이 분야별 요목이 될 것입니다. (간행사 中)
 
 

백산 안희제선생 생가

백산 안희제선생의 생가는 안채와 집사실의 2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목조와가 및 초가지붕으로 되어있다. 안채는 정면4칸 측면 2칸의 팔각지붕 가옥으로 조선후기 민가건축양식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역사적의미가 깊은 곳이다. 뒷산에는 백산 안희제 선생이 학문을 딱았던 고산제가 남아 있다.

의령 안희제 생가(宜寧 安熙濟 生家)는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에 있는, 한국의 독립 운동가 백산(白山) 안희제의 생가이다.199318일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193호로 지정되었다.

생가는 안채와 사랑채 2동으로 되어있다. 안채는 앞면 6·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팔작지붕이다. 왼쪽에서부터 마루··대청··부엌 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는 앞면 4칸 규모의 초가로 안채와 바짝 붙어 있다.

두 건물은 모두 동쪽을 향하고 있고, 남쪽으로 마루를 1칸씩 구성하고 있어 특이하다. 또한 다양한 기능을 가진 방이 필요함에도 별도의 건물을 두는 것이 아닌, 한 건물 내에서 해결하는 조선시대 후기의 주택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생가 서쪽편 뒷산에는 안희제가 학문을 닦았던 고산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