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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북] 08월 05일 (527 이차돈 순교)

동방박사님 2024. 8. 4.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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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월 05일 한국사 사건일지

527 이차돈 순교 / 1919 대한여자애국단 결성 / 1953 판문점서 포로교환 개시 / 1982 국회문공위, 일본교과서 왜곡시정 촉구 4개항 결의문채택 / 1995 대한민국 최초의 인공위성 무궁화호, 미국케이프커내버럴 기지서 발사성공  / 2008 작가 박경리 사망

이차돈

경주 백률사 터에 있었던 이차돈 관련 기념비

경주 이차돈 순교비

경주 백률사 터에 있었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시기의 이차돈 관련 기념비

경주 이차돈 순교비(慶州 異次頓 殉敎碑)는 신라 법흥왕 14(527) 불교 공인을 위해 순교한 이차돈을 추모하고자 건립한 석비(石碑)이다. 201423일 문화재청에서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 예고하였다.

이 비의 건립연대는 명확하지 않지만, 삼국유사(三國遺事)』 「원종흥법(元宗興法)과 원화첩(元和帖)에 따라 신라 헌덕왕 9~10(817~818)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차돈 순교비는 각각 별석으로 조성된 받침돌과 6면의 몸돌로 구성되어 있다. 몸돌 상단에 원기둥 형태의 촉이 돌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덮개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몸돌 제1면에는 이차돈의 순교 장면이 새겨져 있는데,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등에 전하는 것처럼 목에서 흰 피가 한 길이나 솟구치고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리며 땅이 진동하는 모습을 선명하게 돋을 새김하였다.

2면에서 제6면은 가로와 세로로 교차하도록 평행 음각선을 그어 7, 25칸의 정간(井間)을 치고 한 글자씩 음각하였다. 서체는 예서 (隸書)의 필의가 가미된 해서(楷書)이고, 찬자(撰者)와 서자(書者) 등은 알 수 없다.

이차돈 순교비는 신라 527년에 이루어진 불교 공인을 기록한 현존 최고의 1차 사료라는 점, 특히 제1면의 조각을 통해 신라의 복식사 및 조각사 연구에도 유용한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고 판단된다.

법명 이차돈

출생 506년 / 입적 527(22) / 한국의 불교

이차돈(異次頓, 506(지증왕 7)[1] ~ 527(법흥왕 14)[2] 915(음력 85)은 신라 법흥왕(法興王)의 근신이자 불교 순교자이다. 거차돈(居次頓)이라고도 하며, 삼국유사에는 염촉(厭觸 또는 猒觸), 이처(伊處), 처도(處道)라는 다른 이름 표기도 소개되어 있다. 신라의 불교 전래 과정에서 있었던 재래 종교와의 갈등을 상징하는 인물로 한국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로 꼽힌다.

삼국사기의 이차돈

삼국사기에는 불교를 공인하였다는 기록과 함께 김대문의 계림잡전(鷄林雜傳)을 인용하여,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할 당시 대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고 이때 이차돈이 나서서 불교를 공인할 것을 적극 주장하며자신을 죽임으로서 왕의 위엄을 세우고 신하들의 반대를 가라앉힐 것을 청했다.

이에 왕은 대신들을 모아 놓고 불교를 공인할 지의 여부를 의논하였고, 대부분의 대신들이 반대하는 가운데 이차돈이 나서서 찬성하였다. 왕은 대신들이 모두 반대하는데 이차돈 혼자서 찬성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그를 처형할 것을 명했다. 이차돈은 죽기 직전에 "부처께서 계신다면 내가 죽은 뒤 이적(異蹟)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그의 목이 베여 떨어지는 순간 붉은색이 아닌 흰색의 피가 한 길 넘게 솟구쳤고, 하늘이 컴컴해지면서 꽃비가 내렸다. 대신들은 이후 불교를 받아들이는 것에 어떠한 반대를 하지 못했고, 법흥왕은 불교를 공인하게 되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의 이차돈

삼국유사권제3 흥법(興法)3 '원종흥법염촉멸신'조는 헌덕왕(憲德王) 9(817)에 작성된 촉향분예불결사문(髑香墳禮佛結社文)향전의 두 가지 자료를 인용하였다. 불교를 공인하고자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친 법흥왕에게 사인(舍人) 염촉이 나아가 "거짓 명령을 전한 죄를 물어 신을 형벌에 처하여 목을 베시면 만백성이 모두 복종하여 감히 하교를 어기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청했다. 왕은 염촉의 말대로 온갖 형틀을 갖추어 놓고 신하들을 불러 "과인이 절을 짓겠다는데 왜 일부러 늦추느냐?" 라며 꾸짖었고, 신하들은 겁에 질려 그런 일이 없다고 변명했다는 기록과 함께, 주석으로 처리된 향전에는 거꾸로 염촉이 왕명을 내세워 절을 지으라는 뜻을 신하들에게 전하자 신하들이 달려와 왕에게 반대하고 나섰고 왕은 염촉이 왕명을 거짓으로 전달했다며 염촉에게 책임을 물었다고 전하고 있다.

왕은 염촉을 불러 꾸짖은 뒤 처형했고, 염촉은 죽음을 앞두고 "대성법왕(大聖法王)께서 불교를 일으키고자 하시므로 나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세상의 인연을 버리오니, 하늘은 상서로움을 내리시어 사람들에게 두루 보이소서"라고 맹세하였다. 그의 베어진 목에서 흰 젖이 한 길이나 솟구치고 하늘은 어두워지면서 석양이 그 빛을 감추었고 땅이 흔들렸으며 비가 떨어지는 등 온갖 자연현상들이 일어났으며, 베어진 염촉의 시신은 북망산 서쪽 고개에 묻히고 아내가 그의 명복을 위해 자추사를 지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 자추사가 세워진 땅은 향전에 따르면 염촉의 목이 베여 날아가 떨어진 자리였고, 자추사는 훗날 백률사(栢栗寺)라 불리게 되었다.

삼국유사권제3 탑상제4에는 흥륜사(興輪寺)의 금당에 신라 불교의 성인 10인의 소상이 동서 벽에 안치되었는데, 동쪽 벽에 서쪽으로 보도록 안치된 다섯 상 가운데 하나가 염촉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차돈의 가계

이차돈의 가계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왕족인 것으로 추정되며, 성씨는 김씨라는 설과 박씨라는 설이 존재하며, 김씨 설에 의하면 내물왕(재위: 356~ 402)의 아들 습보 갈문왕(생몰년 미상)의 후손이고, 박씨 설에 의하면 흘해왕(재위: 310~ 356)의 후손이 된다.

증조부 : 흘해 이사금 / 조부 : 공한(功漢) /아버지 : 길승(吉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