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조약
조일수호조규
통칭・약칭 강화도 조약 · 한일수호조약 · 병자수호조약
서명일 1876년(고종 13년) 2월 27일
서명장소 조선 조선 경기도 강화유수부 연무당 (대한민국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언어 한문 · 일본어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영어: Japan-Korea Treaty of 1876) 또는 강화도 조약(江華島條約)은 1876년 2월 27일(고종 13년 음력 2월 3일) 조선과 일본 제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다.
다른 명칭으로는 한일수호조약(韓日修好條約) 또는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 등으로 부르기도 하며, 흔히 강화도 조약으로 알려진 이 조약의 정식 명칭은 조일수호조규, 일본측에는 병자수교조약이라고도 부른다.
한일 관계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근대 국제법의 토대 위에서 맺은 최초의 조약이며, 흔히 일본의 강압적 위협으로 맺어진 불평등 조약으로 얘기되지만, 일본의 요구가 일방적으로 관철된 조약은 아니다. 일본 측은 조약의 내용보다 조약 체결 그 자체를 우선하여 반정부 세력이 '정한론'을 매개로 결집하는 걸 막으려 했고, 수호조약을 체결한 우호 국가를 대상으로 징벌하자고 주장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배경
일본은 자신들이 일으킨 운요호 사건을 핑계로 1876년 1월 30일 조선에 군함과 함께 전권대사를 보내 협상을 강요하였다. 이때 일본에서는 정한론자도 조선 개혁론자도 있었다. 운요호 사건에 대한 조선 정부의 사죄, 조선 영해의 자유항행, 강화 부근 지점의 개항 등을 조건으로 조선을 개국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표면상으로 운요호 사건의 평화적 해결, 통상수호조약의 체결이란 구실로 1876년(고종 13)에 구로다 기요타카를 전권대사, 이노우에 가오루를 부사(副使)로 보냈다. 이들은 일진(日進)·맹춘(孟春) 등 3척의 군함으로 1876년(고종 13) 1월 부산에 입항하여, 교섭이 진전되지 않으면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여 육군을 증가해서 보낼 것을 본국에 요청한 뒤에 강화도로 향하고,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로 하여금 예비교섭을 시켰다. 이에 조선 정부는 매우 긴장하여 시원임대신회의(時原任大臣會議)를 개최하고 대책을 토의한 뒤에 신헌(申櫶)을 접견대관, 윤자승(尹滋承)을 부관으로 임명하여 교섭에 대처하게 하여, 강화도를 회담 장소로 결정하고 정식 회담을 열었다.
명, 청 대의 해금정책( 쇄국정책 )을 사대주의에(조공무역 공무역) 찌들어 해금정책을 같은시대에 시행했던 조선의 상황은 근대무역(통상)에 대해 장님과 같은 상황이었다. 이때 일본은 자주국가라 명시하였으나 해금 철폐조약인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1882.8.23)에서 청은 조선을 속방(屬邦)이라 명시했다. 조미수호통상조약(1882.5.22)에서 처음으로 관세권이 설정되면서, 결국 일본도 더 이상 무관세를 고집할 수 없었다. (1883년 7월 25일 조선과 일본 사이에 새로운 통상장정 조일통상장정이 맺어졌다.)
결과
당시 강화도 조약의 체결을 위해 조선측에서는 신헌이, 일본측에서는 구로다 기요타카가 만났다. 이 때 구로다 기요타카가 《만국공법》을 언급하며 조약 체결을 제안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1877년 12월 17일에는 하나부사 요시모토가 《만국공법》과 《성호지장(星軺指掌)》을 조선측에 기증하였다. 당시에는 강화도 조약 체결이후 양국 공사의 상호 파견 주재에 대해 조선과 일본간 견해가 충돌하고 있었다. 공사 교환에 소극적이던 조선의 자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하나부사 요시모토는 위의 두 책을 전달하며 공사 교환이 서구 조약체제 하에서 상식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임을 설명하였다.
총 세 번의 회의를 열었는데, 조선 정부에서는 흥선대원군 일파와 유생들의 반대로 의견이 제각각이었으나 박규수·오경석 등의 주장과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의 권고, 고종의 적극적인 개항 의사에 따라 개국을 결정했다.
조선이 개국을 결정하게 된 이유는
세계 대세로 볼 때에 개국을 해야만 할 객관적 조건이 성숙했으며,
일본 정부의 무력시위가 국내의 척화론(斥和論)보다 강력히 작용했으며,
민씨 일파가 개국을 버리고 쇄국을 하게 된다는 것은 민씨파의 실각, 즉 흥선대원군의 득세를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었고,
청나라가 개국을 찬성한 것,
고종이 개항에 적극적이었던 점 때문이었다.
사태가 이와 같이 되자 일시중단 상태에 있던 강화도 회담도 급속히 진전되어 1876년 2월 26일에 조인을 끝마친다.
내용
대일본국은 대조선국과 본디 우의(友誼)를 두터이 하여온 지가 여러 해 되었으나 지금 두 나라의 정의(情意)가 미흡한 것을 보고 다시 옛날의 우호 관계를 닦아 친목을 공고히 한다.
이는 일본국 정부에서 선발한 특명 전권 변리 대신 육군 중장 겸 참의 개척 장관(陸軍中將兼參議開拓長官) 구로다 기요타카와 특명 부전권 변리 대신 의관 이노우에 가오루가 조선국 강화부(江華府)에 와서 조선국 정부에서 선발한 판중추부사 신헌(申櫶)과 부총관 윤자승(尹滋承)과 함께 각기 받든 유지(諭旨)에 따라 조관(條款)을 의정(議定)한 것으로서 아열거한다.
제1관 조선국은 자주 국가로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이후 양국은 화친의 실상을 표시하려면 모름지기 서로 동등한 예의로 대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상대방의 권리를 침범하거나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우선 종전의 교제의 정을 막을 우려가 있는 여러 가지 규례들을 일체 혁파하여 없애고 너그럽고 융통성 있는 법을 열고 넓히는 데 힘써 영구히 서로 편안하기를 기약한다.
제2관 일본국 정부는 지금부터 15개월 뒤에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조선국 경성(京城)에 가서 직접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하며, 해사신(該使臣)이 주재하는 기간은 다 그때의 형편에 맞게 정한다. 조선국 정부도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국 동경(東京)에 가서 직접 외무경(外務卿)을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하며, 해사신이 주재하는 기간 역시 그 때의 형편에 맞게 정한다.
제3관 이후 양국 간에 오가는 공문(公文)은 일본은 자기 나라 글을 쓰되 지금부터 10년 동안은 한문으로 번역한 것 1본(本)을 별도로 구비한다. 조선은 한문을 쓴다.
제4관 조선국 부산(釜山) 초량항(草梁項)에는 오래 전에 일본 공관(公館)이 세워져 있어 두 나라 백성의 통상 지구가 되었다. 지금은 종전의 관례와 세견선(歲遣船) 등의 일은 혁파하여 없애고 새로 세운 조관에 준하여 무역 사무를 처리한다. 또 조선국 정부는 제5관에 실린 두 곳의 항구를 별도로 개항하여 일본국 인민이 오가면서 통상하도록 허가하며, 해당 지역에서 임차한 터에 가옥을 짓거나 혹은 임시로 거주하는 사람들의 집은 각각 그 편의에 따르게 한다.
제5관 경기(京畿), 충청(忠淸), 전라(全羅), 경상(慶尙), 함경(咸鏡) 5도(道) 가운데 연해의 통상하기 편리한 항구 두 곳을 골라 지명을 지정한다. 개항 시기는 일본력(日本曆) 명치(明治) 9년 2월, 조선력 병자년(1876년) 2월부터 계산하여 모두 20개월로 한다.
제6관 이후 일본국 배가 조선국 연해에서 큰 바람을 만나거나 땔나무와 식량이 떨어져 지정된 항구까지 갈 수 없을 때에는 즉시 곳에 따라 연안의 지항(支港)에 들어가 위험을 피하고 모자라는 것을 보충하며, 선구(船具)를 수리하고 땔나무와 숯을 사는 일 등은 그 지방에서 공급하고 비용은 반드시 선주(船主)가 배상해야 한다. 이러한 일들에 대해서 지방의 관리와 백성은 특별히 신경을 써서 가련히 여기고 구원하여 보충해 주지 않음이 없어야 할 것이며 감히 아끼고 인색해서는 안 된다. 혹시 양국의 배가 큰 바다에서 파괴되어 배에 탄 사람들이 표류하여 이르면 곳에 따라 지방 사람들이 즉시 구휼하여 생명을 보전해주고 지방관에게 보고하며 해당 관청에서는 본국으로 호송하거나 가까이에 주재하는 본국 관원에게 교부한다.
제7관 조선국 연해의 도서(島嶼)와 암초는 종전에 자세히 조사한 것이 없어 극히 위험하므로 일본국 항해자들이 수시로 해안을 측량하여 위치와 깊이를 재고 도지(圖志)를 제작하여 양국의 배와 사람들이 위험한 곳을 피하고 안전한 데로 다닐 수 있도록 한다.
제8관 이후 일본국 정부는 조선국에서 지정한 각 항구에 일본국 상인을 관리하는 관청을 수시로 설치하고, 양국에 관계되는 안건이 제기되면 소재지의 지방 장관과 토의하여 처리한다.
제9관 양국이 우호 관계를 맺은 이상 피차의 백성들은 각자 임의로 무역하며 양국 관리들은 조금도 간섭할 수 없고 또 제한하거나 금지할 수도 없다. 양국 상인들이 값을 속여 팔거나 대차료(貸借料)를 물지 않는 등의 일이 있을 경우 양국 관리는 포탈한 해당 상인을 엄히 잡아서 부채를 갚게 한다. 단 양국 정부는 대신 상환하지 못한다.
제10관 일본국 인민이 조선국이 지정한 각 항구에서 죄를 범하였을 경우 조선국에 교섭하여 인민은 모두 일본국에 돌려보내 심리하여 판결하고, 조선국 인민이 죄를 범하였을 경우 일본국에 교섭하여 인민은 모두 조선 관청에 넘겨 조사 판결하되 각각 그 나라의 법률에 근거하여 심문하고 판결하며, 조금이라도 엄호하거나 비호함이 없이 공평하고 정당하게 처리한다.
제11관 양국이 우호 관계를 맺은 이상 별도로 통상 장정(章程)을 제정하여 양국 상인들이 편리하게 한다. 또 현재 논의하여 제정한 각 조관 가운데 다시 세목(細目)을 보충해서 적용 조건에 편리하게 한다. 지금부터 6개월 안에 양국은 따로 위원(委員)을 파견하여 조선국의 경성이나 혹은 강화부에 모여 상의하여 결정한다.
제12관 이상 11관 의정 조약은 이날부터 양국이 성실히 준수하고 준행하는 시작으로 삼는다. 양국 정부는 다시 고치지 못하고 영원히 성실하게 준수해서 화호(和好)를 두텁게 한다. 이를 위하여 조약서 2본(本)을 작성하여 양국 위임 대신이 각각 날인하고 서로 교환하여 신임을 명백히 한다.
대조선국 개국(開國) 485년 병자년(1876년) 2월 2일
대관(大官) 판중추부사 신헌
부관 도총부 부총관 윤자승
대일본국 기원 2536년 명치(明治) 9년 2월 6일
대일본국 특명 전권 변리 대신 육군 중장 겸 참의 개척 장관 구로다 기요타카
대일본국 특명 부전권 변리 대신 의관(議官) 이노우에 가오루
조약 직후 일본 정세
일본은 메이지 유신(1867년) 이후 9년이 지난 시점인 이 조약 체결 직후 1877년 초 몰락사족(사무라이)에 의한 반란(서남전쟁)이 일어났다. 주동은 사이고 다카모리(메이지 유신의 주역중에 한명)에 의한 것. 4만의 사족들과 징병제로 뽑은 7만의 농민군이 전쟁을 치루어 전쟁물자면에서 우위에 선 신정부(농민군)가 승리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일본 마지막 내전이 되었다.
부록 및 후속 조약
조일수호조규 부록
조일수호조규를 보완하기 위해 6개월 뒤, 1876년 8월 24일(음력 7월 6일)에 체결된 조약이다. 총 11관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4관)간행이정은 10리로 정했으며, 특히 (7관) 일본인이 조선내에서 일본화폐를 사용할 수 있도록 규정하여, 조선 내 화폐체계 이원화와 일본의 경제침투를 가져오는 단초가 되었다.
조일무역규칙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가 맺어지던 해인 1876년 8월 24일 조일수호조규부록과 함께 조일무역규칙이 맺어진다. 총 11관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특히 (6관)양곡의 무제한 유출 허용, (7관)일본 수출입 상품에 대한 무관세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그 불평등성을 더욱 심화시켰다.
조일수호조규 속약
1882년 8월 30일(음력 7월 17일), 임오군란의 후속대책으로 제물포 조약이 체결되면서, 같은 날 함께 조인되었다. 총 2관으로 (1관)간행이정 50리(100리), 양화진 개장과 (2관)일본 외교관의 조선여행 가능을 내용으로 한다.
조일통상장정
1876년 강화도조약을 맺은 직후, 조선과 일본 두 나라 사이의 통상관계에 대한 간단한 약조를 규정한 조일무역규칙은 수출입 상품에 대한 무관세를 규정한 불평등한 조약이었다. 이에 조선정부는 특히 관세권의 회복을 위해 외교적 노력을 모색하였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 처음으로 관세권이 설정되면서, 결국 일본도 더 이상 무관세를 고집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1883년 7월 25일 조선과 일본 사이에 새로운 통상장정이 맺어졌다.
총 42관으로 주목되는 부분은 (9관)"입항하거나 출항하는 각 화물이 해관을 통과할 때는 응당 본 조약에 첨부된 세칙(稅則)에 따라 관세를 납부해야 한다. (37관)"조선국에서 가뭄과 홍수, 전쟁 등의 일로 인하여 국내에 양식이 결핍할 것을 우려하여 일시 쌀수출을 금지하려고 할 때에는 1개월 전에 지방관이 일본 영사관 에게 통지(방곡령)." (42관)"현재나 앞으로 조선 정부에서 어떠한 권리와 특전 및 혜택과 우대를 다른 나라 관리와 백성에게 베풀 때에는 일본국 관리와 백성도 마찬가지로 일체 그 혜택을 받는다.(최혜국대우)" 할 수 있다는 조항이다. 관세자주권 확보와 식량약탈을 제도적으로 규제하려는 내용으로 이전 조약과 성격이 다르다.
[Sources Wikipedia]
책소개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고, 근대의 의미를 되묻는다.
1876년 2월 27일 강화도 연무당에서 조선과 일본 간에 서구적 형식의 조약이 체결됐다. 이른바 강화도조약. 강화도조약의 정식 명칭은 조일수호조규다. 조일수호조규는 조선이 근대로 이행한 기점으로 평가된다. 이 조약은 조선이 서구 근대 국제질서와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편입되는 계기가 되었고, 한일관계에서도 수백 년간 이어져 온 교린 질서가 서구 근대의 외교제도와 관념으로 대체된 전환점이었다.
이 책은 조선과 일본 간에 조일수호조규를 맺기까지의 배경과 체결 과정을 국내외 미간 문서와 외교문서에 기초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조약 체결에 담긴 일본의 의도와 당시의 일본 정세 및 조선의 대응을 파악하고, 조선 근대사와 조일관계사의 거시적 맥락에서 조일수호조규의 역사적 의미를 새롭게 고찰하였다.
목차
서문
운요호 사건과 이토 히로부미 / 김흥수
1. 머리말
2. 운요호 사건의 배경
3. 부아소나드 ‘각서’와 이토 히로부미
4. 운요호 사건의 실상
5. 운요호 사건의 쟁점
6. 조작된 공식 보고서
7. 맺음말
곤경에서의 탈출 : 조일수호조규의 체결 과정 / 김종학
1. 강요된 불평등 조약인가, 자주적 개항인가?
2. 운요호 사건의 흑막
3. 일본 사절단의 사명과 사전 외교 공작
4. 협상 과정
5. 결론
** 부록
조일수호조규 부속 조약의 겉과 속 / 김흥수
1. 머리말
2. 조일수호조규와 미야모토 오카즈
3. 수호조규 부록과 무역장정 체결
4. 미야모토 이사관 파견의 이면
5. 결론을 대신하여-미야모토와 하나부사의 조선정책
조일수호조규 체결 전후 영국의 대조선정책 / 한승훈
1. 머리말
2. 19세기 중반 영국 외교관의 조선 인식과 정책 구상
3. 조선과 일본의 갈등 고조에 따른 파크스의 간섭 계획
4. 1876년 조일수호조규 체결과 영국의 조선 문호 개방안
5. 맺음말
쇄국에서 개국으로 : 조일수호조규와 조선의 정치사회 변화 / 전상숙
1. 머리말
2. 조일수호조규와 일본의 대륙진출정책
3. 조일수호조규 이후 일본의 북진대륙정책과 대륙국가화
4. 조일수호조규 이후 조선의 정치?회적 변화
5. 맺음말
혼돈과 새로운 기회 모색 : 한국 근대정치사 속에서 조일수호조규의 의의 / 김정호
1. 머리말
2. 조일수호조규 체결과 혼돈의 시작
3. 조일수호조규 체결과 새로운 기회 모색
4. 맺음말
출판사 리뷰
그동안 조일수호조규에 대한 연구는 일방적으로 일본인들이 기록한 사료에 의거해 이루어졌다면, 이 책은 강화도 협상 당시 조선 전권대표였던 위당 신헌의 《심행일기》를 비롯해, 일본학계에도 알려지지 않은 미간 사료에 근거한 최초의 연구이다. 따라서 지난 100년간 일본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구축한 근대사 담론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우리의 시각에서 근대사를 재조명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3525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 since 2010:티스토리]
책소개
1876년 조선이 일본과 체결한 강화도조약은 최초의 근대적인 불평등 조약으로 꼽힌다. 강화도조약은 1871년에 체결된 청일수호조규와 함께 동아시아의 전통적 사대교린 질서가 주권 개념을 주된 명분이자 구성 원리로 하는 근대 국제법 질서로 이행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역사적 사건이다. 과연 우리는 강화도조약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이 책은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 조선의 접견대관이었던 위당 신헌이 일본 사절단과의 협상 경과 및 조약 체결 과정을 일기체로 기록한 『심행일기』를 완역한 역주본이다. 『심행일기』는 『고종실록』,『용호한록』에 게재된 불완전한 기사에 의존해 온 강화도조약에 관한 연구를 한 단계 높일 수 있는 훌륭한 사료로, 강화도조약에 관한 일본과 한국의 기록이 극명히 다르다는 점에서 과거사 복구를 위해 연구할 가치가 높다고 하겠다.
목차
서문
해제
강화도조약 체결 과정의 주요사건 일지
심행일기 상
사진으로 보는 강화도조약
심행일기 하
【부록】
1. 심행잡기沁行雜記
2-1. 선고 판중추부사 부군 행장先考判中樞府事府君行狀
2-2. 보국숭록대부 판중추부사 신공 시장輔國崇祿大夫判中樞府事申公諡狀
3. 구로다 카요타카黑田淸隆의
《사선일기使鮮日記》에 따른 일본 변리사절단의 주요 행적
4-1. 정월 18일 운현서雲峴書
4-2. 왜관시말倭館始末
4-3. 히로츠 히로노부廣津弘信의 구진서와 별함
4-4. 대원위록기大院位錄記·답상대원군서答上大院君書
【原文】
沁行日記 上
沁行日記 下
沁行雜記
先考判中樞府事府君行狀
輔國崇祿大夫判中樞府事申公諡狀
正月十八日 雲峴書
倭館始末
廣津弘信口陳書及別函
大院位錄記·答上大院君書
찾아보기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4388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 since 2010:티스토리]
책소개
조약을 따라 한국 근현대사의 결정적 장면을 따라가는 여행!
역사책에는 항상 나오지만 봐도 봐도 머리만 아플 뿐, 정작 우리는 조약을 잘 모르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조약은 지금의 우리 역사를 만든 결정적 사건들이기에, 조약만 알아도 한국 근현대사의 가장 크고 중요한 봉우리를 정복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책은 이러한 조약들의 결과와 의미뿐 아니라 체결 장소, 배경, 전개 과정까지 아우르고 있어, 조약을 통해 우리 역사를 더욱 깊이 들여다볼 귀중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목차
1부 강화도조약에서 한일병합까지
강화도조약은 왜 조선 멸망의 시작점이 되었을까 13
조선은 왜 미국과 수교를 맺었을까 24
역사 간이역 | 태극기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35
청나라는 우리와 어떤 조약을 맺었을까 36
역사 간이역 | 몰라보게 변한 제물포 47
일본의 뻔뻔함이 가장 드러나는 조약은? 50
일본이 분통을 터뜨린 조약은? 59
영국과 미국은 왜 일본 편을 들었을까 68
역사 간이역 | 조약 체결의 중심지, 런던 83
을사늑약은 왜 국권을 뺏긴 결정적 조약일까 86
간도는 왜 중국 땅이 되었을까 98
나라를 빼앗기기 전 마지막으로 맺은 조약은? 106
역사 간이역 | 우리 역사를 바꾼 장소, 중명전과 흥복헌 115
2부 정전협정에서 위안부 합의까지
6·25전쟁은 어떻게 멈추었을까 121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득일까, 실일까 135
역사 간이역 | 우리와 인연이 깊은 워싱턴 D.C. 142
한미행정협정 SOFA의 가장 큰 문제점은? 146
우리는 왜 일본의 사과를 받지 못하고 있을까 157
한일기본조약은 왜 굴욕적이라고 할까 167
역대 정부의 통일정책은 어떻게 다를까 181
자주국방을 위해 무슨 조약을 맺었을까 197
우리는 외환위기를 어떻게 극복했을까 205
절대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조약은 무엇일까 219
조약 연표 230
책 속으로
--- pp.45~46
을사늑약은 체결 당시부터 국제사회에 효력 없는 조약으로 인식되었어요. 그렇다면 을사늑약이 무효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가장 큰 이유로는 일본이 군대를 동원하여 온갖 불법적인 방법으로 강제 체결한 데 있어요. 1899년 8월 14일에 반포된 대한제국의 근대적 헌법인 대한국 국제 제9조에 따르면 대한제국에서는 조약을 체결하는 권한이 고종에게만 있어요. 그래서 고종이 아닌 외부대신의 직인만 찍힌 을사늑약은 효력이 발생할 수가 없어요. 또한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 국가를 대표하여 파견된 외교 사절) 하야시는 조약에 관련된 권한을 위임받았다는 전권위임장을 교환하지 않고 조약문에 서명했어요. 이것은 두 사람에게 조약을 맺을 권한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pp.94~95
그런데 영일동맹이 왜 런던에서 체결되었을까요?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해요. 도움을 주는 영국이 굳이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일본까지 와서 조약을 맺을 필요가 없었거든요. 영국은 아쉬운 쪽이 찾아와서 부탁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자신들이 일본까지 찾아가서 동맹조약을 맺으면 협상의 주도권을 빼앗기는 동시에 체면이 구겨진다고 판단했거든요. 그렇다고 런던에서 동맹을 맺는 것이 일본에 손해도 아니었어요. 일본도 어떻게든 러시아의 기세를 누르기 위해서는 세계 이목이 늘 집중되는 런던에서 동맹을 맺는 게 더 효과적이라 생각했어요.
--- pp.71~72
데라우치는 을사늑약 때처럼 순종과 병합에 반대하는 관료를 위협하기 위해 창덕궁을 헌병 경찰로 에워쌌어요. 그러고는 창덕궁 대조전의 부속 건물인 흥복헌에서 한일병합조약을 승낙받으려고 어전회의를 열었어요. 자신이 거처하는 방 옆에서 대한제국의 멸망을 논의하는 어전회의 내용을 들은 순정효황후(순종의 아내)는 황급히 국새(國璽, 나라를 대표하는 도장)를 치마 속에 숨겼어요. 어떻게든 국새를 숨겨 한일병합을 막아 내겠다는 생각밖에는 없었어요. 하지만 순정효황후의 숙부 윤덕영이 황후의 치마를 들춰 국새를 빼앗아 가면서 무효로 돌아가고 말아요.
--- pp.112~113
대한민국이 높은 경제성장을 하자 미국은 방위비 분담금을 요구했어요. 분명 SOFA 제5조 1항에 미군 경비는 미국이 부담하기로 되어 있는데 말이죠.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규정에 어긋나는 미국의 부당한 요구를 거부하지 못했어요. 미국에 안보를 의지하고 있는 현실 때문에요. 결국 대한민국 정부는 미국의 요구에 따라 1991년 한미방위비분담특별협정SMA을 맺었어요. 이제는 대한민국이 주한 미군 기지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근로자 인건비, 미군 시설 건설 및 연합 방위 증강 사업, 군수 지원비 등을 담당하게 되었어요. 문제는 대한민국이 매년 부담해야 할 방위비 분담금이 계속 늘어난다는 점이에요.
--- pp.155~156
아직도 일부 사람은 한일기본조약으로 받은 자금이 오늘날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며 좋게 평가해요. 과연 그럴까요? 우선 한일기본조약으로 받은 금액은 이승만 정부가 1949년 일본에 요구했던 73억 달러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금액이에요.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받은 금액보다도 적어요. 무엇보다 일본이 준 돈은 경제성장에 투입된 전체 비용의 일부에 불과해요. 일본이 준 돈으로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적은 금액이에요.
--- pp.179~180
다행스럽게도 위안부 합의는 절차상 조약으로 인정될 수 없어요. 조약으로 인정되지 않으니 법적 효력도 발생하지 않아요.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협약 제2조 a항은 “‘조약’이라 함은 한 문서 또는 더 많은 문서에 구현되고 있는지, 또 특정한 명칭과 관계없이 서면 형식으로 국가 간에 체결된다. 또한 국제법에 따라 규율되는 국제적 합의를 의미한다.”라고 정의하고 있어요. 그런 점에서 홈페이지에 양국 외교부 장관의 회담 결과를 공지한 뒤, 기자회견 하는 것으로 마무리한 위안부 합의는 조약의 조건을 갖추지 못해요.
출판사 리뷰
역사가 바뀐 순간들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는 조약을 빼놓고는 감히 말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36년 동안 이루어진 일제 식민 지배라는 치욕적인 역사를 우리에게 남긴 을사늑약을 비롯해 1997년 온 국민을 경제 위기에서 구해낸 IMF 합의까지, 우리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에는 항상 조약이 있었다.
종잇장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조약문의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이 우리의 역사를 어떻게 바꿔 놓았는지를 알게 된다면 누구나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에서는 “조선은 중국(청나라)의 속방”이라는 문구 하나 때문에 청나라가 조선의 내정을 마음대로 간섭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이 그 예다. 그런 만큼 이 책에서는 각 조약의 주요 조항을 하나하나 살피며 뜻도 모르고 줄줄이 외우기만 했던 조약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차근차근 되짚는다.
어렵다고 미루지만 말고
이참에 한국 근현대사까지 꿰뚫자!
조약, 협약, 협정, 각서, 선언... 조약이나 이에 맞먹는 국가 간의 합의는 왜 이리 많고 온통 어려운 한자투성이인지! 그뿐인가, 웬만한 것들은 이름이 너무 길어 외우기조차 어렵다. 조약의 ‘조’ 자만 나와도 멈칫했던 경험이 누구나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지금까지 많은 청소년에게 역사 공부의 걸림돌이었던 조약을 시대순으로 살피며,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와 근대적인 조약을 맺기 시작한 1876년부터 2021년의 역사까지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특히 이 책에서는 조약이 체결된 장소에 주목한다. 스포츠 경기에서 홈그라운드가 가지는 이점이 분명 있듯이, 조약 당사국들은 어떻게든 자국에 유리한 곳에서 조약을 맺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렇기에 ‘역사 간이역’에서는 중명전과 흥복헌 등 굴욕적인 역사의 현장이었던 우리 궁궐뿐 아니라, 세계적인 조약 체결의 중심지인 런던이나 워싱턴 D.C.와 같은 도시를 조약의 역사 측면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특별히 소개한다.
과거를 알아야 미래가 보인다
아픈 역사는 뒤로 하고
밝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하여
우리가 조약을 알아야 하는 진짜 이유는 조약과 협정을 지키지 않으면 국가가 멸망할 만큼 엄청난 후폭풍이 일어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는 구한말 강화도조약부터 한일병합조약까지 일본을 비롯해 서구 열강들과 불평등한 조약을 맺는 바람에 나라를 잃어버린 아픔을 겪었다. 또한 광복 이후에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더불어 과거사에 대해 일본의 사과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 한일기본조약), 경제적·군사적으로 여전히 미국에 높이 의존하는 결과를 낳았다(한미상호방호조약, 한미행정협정SOFA).
하지만 조약 때문에 우리가 불이익만 감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국력이 신장하면서 우리도 과거를 거울삼아 조약의 잘못된 조항을 바로잡으려고 끊임없이 노력 중이다. 그 결과로는 미군이 한국에서 저지른 범죄를 벌하도록 한 SOFA 개정과, 자주국방의 초석을 마련한 한미미사일양해각서 해제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자칫 조약은 불합리하다고만 생각할 수도 있지만, 현명하게 체결하면 우리에게 충분히 도움이 되면서도 올바른 방향으로 이용할 수 있다. 이 책을 읽고 조약을 알면 더는 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고 더 나은 대한민국의 앞날을 만들어나갈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8228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 since 2010: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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