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9 시인 한용운 출생 / 1910 한일병합조약 발효로 국권침탈 / 1950 다부동전투 종료 / 1961 한국노총 결성 / 1987 오대양 집단 변사사건 / 1998조인주 WBC슈퍼플라이급 세계챔피온 획득 / 2002 헌법재판소, 부부자산 소득 합산과세 위헌결정 / 2005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사 3090명 1차명단 발표
한용운
한용운 龍雲
한용운
법명 용운(龍雲) / 출생 1879년 8월 29일 / 조선 충청도 결성현 현내면 박철리 잠방골 / 입적 1944년 6월 29일(64세) / 일제강점기 경성부 동대문구 성북정 심우장 / 입적원인 중풍 / 거주지 일제강점기 경성부 동대문구 성북정 심우장 / 국적 대한민국 / 속명 한정옥(韓貞玉) / 경력 신간회 중앙위원장 / 종파 조계종 / 칭호 아명 한유천(韓裕天)·한봉완(韓奉玩) / 호 만해(萬海·卍海) / 직업 승려, 시인, 독립운동가 / 배우자 유숙원(재혼), 전정숙(이혼) / 자녀 한보국(아들), 한영숙(딸) / 부모 한응준(부), 방숙영(모) / 친척 한윤경(형)
만해 기념관
한용운(韓龍雲, 1879년 8월 29일 (음력 7월 12일) ~ 1944년 6월 29일)은 일제강점기의 시인, 승려,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청주. 호는 만해(萬海)이다. 불교를 통한 언론, 교육 활동을 하였다.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으며, 그것에 대한 대안점으로 불교사회개혁론을 주장했다. 3·1 만세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이며 광복 1년을 앞둔 1944년 6월 29일에 중풍병사(입적)하였다.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을 추가보완하였고 옥중에서 '조선 독립의 서'(朝鮮獨立之書)를 지어 독립과 자유를 주장하였다.
1910년 일본이 주장하는 한일불교동맹을 반대철폐하고 이회영, 박은식, 김동삼 등의 독립지사(志士)들을 만나 독립운동을 협의하였다. 1918년 11월부터는 불교 최초의 잡지인 《유심》을 발행하였고 1919년 3.1 만세 운동 당시 독립선언을 하여 체포당한 뒤 3년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풀려났다. 1920년대에는 대처승 운동을 주도하여 중에게도 결혼할 권리를 달라고 호소하기도 하였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 언론활동에 참여하였다. 1927년 2월부터는 신간회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과 이듬해 신간회 경성지부장을 지냈다.
1918년 《유심》에 시를 발표하였고, 1926년〈님의 침묵〉등의 시를 발표하였다. 님의 침묵에서는 기존의 시와, 시조의 형식을 깬 산문시 형태로 시를 썼다. 소설가로도 활동하여 1930년대부터는 장편소설《흑풍》(黑風),《후회》,《박명》(薄命), 단편소설《죽음》등을 비롯한 몇편의 장편, 단편 소설들을 발표하였다. 1931년 김법린 등과 청년승려비밀결사체인 만당(卍黨)을 조직하고 당수가 되었으나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를 적발하는 과정에서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저서로는 시집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 《조선불교유신론》,《불교대전》,《십현담주해》,《불교와 고려제왕》 등이 있다.
친일로 변절한 최남선에 관하여서는 1937년 자신에게 최남선을 언급한 김홍규에게는 "아직도 최남선이 살아 있소?"라고 하는가 하면, 최남선이 탑골공원에서 인사를 하자, 처음에는 알은체도 하지 않다가 최남선이 자신을 못 알아보겠냐면서 계속 이름을 말하자 "내가 아는 육당은 이미 죽었소."라면서 차갑게 대했다.
생애
유년기
조선전기 한명회 동생으로 전구서승(典廏署丞)을 지낸 서원군 한명진(韓命溍)의 이양공파 20대손이다. 한응준의 차남으로 태어났고, 그의 형은 한윤경(1860년~1929년)이다. 자필이력서와 승적부의 출생지는 충청남도 홍주군 주북면 옥동(玉洞)이다. 3.1운동 후 재판 때 고향을 홍성의 '남문리'라고 답변하였다. 현재 출생지로 알려진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는 그의 아들인 한보국의 제적등본에 따른 기록이다.
부친 한응준(韓應俊 ?~1895)은 양반 사대부 가문 출신으로 고종 22년(1885년) 종4품 선략장군 행충무위부사용자의 교지를 받았고, 또다른 차정첩(差定捷)에 의하면, 종5품충훈부 도사(都事)의 관직을 수행하였다. 고종 31년(1894년) 갑오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전령(傳令)을 받고 호연초토사 이승우(홍주목사)의 참모관으로 활약하여 홍주성에서 동학군을 물리치는데 일조를 하였다. 홍양기사에 의하면 반년동안 풍찬노숙의 괴로움을 겪다가 1985년 3월 15일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한윤경의 제적등본기록).
유년시대에 관해서는 본인의 술회도 없고 측근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름은 유천(維天)으로 불리었고 본적명은 정옥(貞玉)이다. 6세부터 한학을 배웠으며 9세에 문리를 통달하여 신도이라 칭송이 자자하였다.
소년 시절
16살 되던 해인 1894년부터 홍성읍내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전한다. 그 해에 음력1월부터 12월까지 갑오농민운동이 일어났고, 7월 25일에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그의 부친 한응준은 홍주성에서 관군의 참모관으로 활약하며 동학농민군 방어에 성공하였으나 이듬해 병고로 사망하였다. 회고록에 의하면 18세인 1896년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서울로 향하였다가 설악산 오세암에 입산하여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의 아들 한보국의 제적등본에 의하면, 부친의 3년상을 치른 후에 20살이 되던 해인 1898년 2월 10일 전정숙과 결혼하였다. 1904년 12월 21일 전정숙에게서 아들 한보국(1904년~1977년)을 얻었으나 그는 이미 강원도 백담사에서 출가를 하였다. 후일 한보국이 부친인 그를 보러 왔을 때 그는 외면하였다고 한다.
방랑 생활
청년기의 만해
건양 1년인 1896년에 그는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갔다. 후일 그는 '나는 왜 중이 되었나'라는 그 자신의 술회에 간략하에 언급하기를 세상에 대한 관심과 생활의 방편으로 집을 떠나 오세암에 입산하여 처음에는 머슴으로 일하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출가의 원인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당시 고향 홍성군 홍주에서도 동학농민운동과 의병운동이 전개된 것으로 미루어 역사적 격변기의 상황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오세암에 머무르면서 그는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선(禪)을 닦았다. 불교에 입문한 뒤로는 주로 교학적 관심(敎學的關心)을 가지고 대장경을 열람하였다.
대한제국(1897년~1910년) 활동
출가와 문학
백담사 경내의 만해기념관
1905년 1월 26일 강원도 백담사에 가서 김연곡(金蓮谷)을 은사로 하여 정식으로 출가, 김연곡에게 득도한 다음 전영제(全泳濟)에게 계(戒)를 받아 승려가 되었고, 만화(萬化)에게서 법을 받았다. 계명은 봉완(奉玩)이며 법호는 용운(龍雲)이며, 후에 필명 및 아호는 만해(萬海·卍海)라 하였다. 이후 수년 간 불교활동에 전념했다. 이즈음에 불교 관련 서적뿐만 아니라 량치차오의〈음빙실문집 飮氷室文集〉등을 접하면서 근대사상을 다양하게 수용하였다. 1905년 11월 17일 덕수궁 중명전에서 을사늑약(제2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는 등 명목상 보호국이나 사실상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이 때를 전후해서 [영환지략(瀛環志略)-서계여 저술],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양계초 저술] 등을 읽고 세계동향을 알기 위해 세계여행을 계획하고 백담사에서 하산하여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갔으나 밀정으로 인하여 구사일생으로 귀국하였으나, 각처에서 의병 활동으로 어지럽게 되자 함경남도 안변 석왕사를 찾아가 암자에서 참선생활을 하였다.(삼천리 제6호 회고록)
"「영환지략瀛環地略」이라는 책을 통하여 비로소 조선 이외에도 너른 천지 잇는 것을 인식하고 행장을 수습하여 원산을 거처서 서백리아에 이르러 몃 해를 덧업는 방낭생활을 하다가 다시 귀국하여 安邊釋王寺에 파뭇겨 叅憚 生活을 하엿다. 그러다가, 동양문명의 집산은 동경에서 되니 東京으로 갈 차로 이듬해 봄에 처음으로 서울에 발을 드려노앗다."<삼천리 제5권 제9호 처음 서울 오든 때-회고록>
1908년 명진학교(현 동국대학교) 보조과(일어과와 측량과) 수학 후 4월에 일본의 시모노세기, 교토, 동경, 닛고 등지를 주유하며 신문물을 시찰하였고, 동경 조동종대학(현 고마자와駒澤大學)의 아사다교수와 교유하여 불교와 서양철학을 수강하였다. 이 때에 유학 중이던 최린(崔麟), 고원훈, 채기두 등과 교류하였고 9월 귀국하였다. 10월 20일 일본의[2]조선 전국 사찰 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서울 원흥사(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의 설립에 참여하였다. 12월 10일 서울에 경성명진측량강습소를 개설 소장에 취임하였다. 1909년 초에는 조선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논저《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기 시작하였다(1913년 회동서관 간행). 1910년 한문으로 된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 즉 불교의 대중화작업에 주력하였다.
승려들의 결혼 자유화 주장
1909년 초부터 그는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집필하였고, 1910년 12월 8일 백담사에서 탈고하였다. 동시에 그는 백담사에서 거의 독학하다시피하며 대장경을 암송하고 한문과 인도어로 된 불교 경전들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였다. 한편 1910년부터 그는 승려의 결혼을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만해는 1910년 3월 승려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허락해 달라는 문건인 [중추원 헌의서]를 청원서 형식으로 대한제국 중추원에 제출하였고, 경술국치(한일합방) 이후 9월에는 조선총독부 통감부에 [승려취처에 관한 건백서]를 테라우치 통감에게 제출하였다. 승려에게 결혼을 금지하라고 부처님이 가르친 것은 아니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이 미혹을 떠나 깨달음을 얻고 악을 고쳐 선을 행하도록 바라셨으나, 중생의 끈기가 각기 달라서 부득불 천하에서 정을 제거하고 욕망을 끊어 버린 사실들을 모두 연설하였던 것이니, 각기 좋아하는 것을 좇아 인도하시고자 희망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계율에 있는 금혼은 본디 방편의 하나에 불과한 것일뿐, 불교의 궁극의 경지와는 거리가 먼 것이니 이를 제거한들 어찌 손상됨이 있겠습니까. ”
— 건백서 중에서
대중의 결혼생활, 가장이라는 짐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중생들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승려의 결혼을 허가해 달라는 그의 주장은 그대로 묵살당한다.
한일합방 직후 총독부가 조선인을 차별대우하고 일본인을 우대하자 그는 불만을 드러냈다. 만해의 상좌였던 춘성스님에 의하면 만해는 평소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차별 정책에 대해 "왜놈의 머슴살이 같으니라구!"라며 불만을 토로하였다 한다.
일제강점기 활동
불교 사회 혁신 운동
1910년 8월 29일에 한일 합방 조약이 체결된 이후로, 원종의 이회광이 일본과 맺은 한일불교동맹조약인 [조동종맹약]을 분쇄하기 위해 12월 광주 증심사로 내려갔다. 1911년 1월 석전 박한영, 진진웅, 김종래, 장금봉 등과 순천 송광사, 동래 범어사에서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하여 일본의 조동종(曹洞宗)과 한국불교의 통합을 꾀한 이회광 등의 친일적인 불교행위를 규탄, 저지하였다. 송광사에 임제종 종무소를 설치하였고 [조선임제종 종무원] 관장에 취임하였다. 11월 서울에서 임제종 중앙포교당(조선선종포교당) 건립을 착수하였다. 그 해 6월 3일 일제가 한국불교를 억압하고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제정·공포한 법령인 [사찰령]이 공포되었고, 한국불교교단은 삼십본산연합사무소에 귀속되었다. 일제의 사찰령에 맞서 한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하려는 노력으로 1912년 4월 10일 중앙포교당이 준공되자 5월 26일 한용운, 백용성, 이화능 등 중앙포교당을 개설하였다. 6월 21일에 경서부 관청에 소환된 이후 이회광의 원종은 [조선불교선교양종]으로, 임제종은 [조선선종중앙포교당]으로 개칭되었다.
1912년 9월 10일부터 10월 8일까지 만주 동북삼성(東北三省)을 방문하여 독립군의 훈련장을 순방하면서 그들에게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는 일에 전력하던 중에 통화현 굴라재에서 일진회 첩자로 오해를 받아 목에 총을 맞고 마취없이 총알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은 후 귀국하여 동래부 범어사로 내려갔다. 1913년 2~3월에 조선불교월보 13호, 14호에 조선불교유신론 9장 ‘승려의 단결’편을 간행전 기고했다. 필명을 만해생(萬海生)으로 문헌상 처음으로 만해라는 아호를 사용하였다. 5월 25일에 [조선불교유신론]을 회동서관에서 출판하였다.
1914년 4월 서울에 유학 온 불교 '고등강숙' 학생들이 불교를 발전시키려는 목적으로 설립한 단체인 조선불교강구회(朝鮮佛敎講究會) 총재에 취임하였다.
경전을 대중화하기 위해 [불교대전]을 편찬할 계획으로 양산 통도사에 보관된 고려대장경을 열람하였고, 4월 30일 범어사에서《불교대전 (佛敎大典)》을 간행하였다.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계의 각성과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8월에 조선불교회 회장에 취임하였다. 불교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불교유신을 직접 수행하고자, 30본산 주지들을 배제하고, 승려와 신도를 융합한 통일기관을 창립하였다. 그러자 30본산 주지들의 반발로 [불교동맹회]로 개칭하여(매일신보8.22. 동소문밖 청수동 근처 청암사에 모여 협의), 서울 낙원동에 본부를 두겠다고 경성북부경찰서에 9월10일경 신고했으나, 30본산 주지의 권한을 벗어났다며 등록 거부 당하였다, “고등강숙”의 학생들이 만해를 따르자, 이회광은 공문을 보내 상경을 막으려다 결국 학교를 폐쇄시켰다.
1915년 6월 20일 청나라 승려 내림(來琳)의 증보본에 의거하여 정선강의 《채근담》 국한문 혼용체 주해본을 저술하였다. 10월에 조선선종 중앙포교당 포교사에 취임하여 계몽활동, 근대화 필용성,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5년 개교한 중앙학림 학생들이 만해를 따랐다. 불교강구회, 각황사 등에서 강연하였다.
불교포교 대중화와 선교진흥론
1914년에는 불교 포교의 보편화 대중화를 선언하고 조선불교청년동맹(朝鮮佛敎靑年同盟)을 결성하였다. 조선불교청년동맹의 강령을 손수 지었는데 이를 보면, 첫째로 정교분리(政敎分離), 둘째로는 여러 불교 종단의 통일 또는 연합, 셋째 불교와 사찰의 사회적 진출의 필요 등을 제시하였다. 이는 대중불교의 확산을 위하여 그 출발점을 청년 운동으로 삼아야 한다는 그의 실천행이었다. 그는 불교 포교가 보편화되려면 일단 청년들에게 침투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선교 활동, 동학의 포교 확산, 사이비 종교 등의 확산에 긴장한 그는 불교 역시 대중에게 침투하여야 함을 역설하고 불교가 중생의 곁에 가장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으로 청소년과 청년층을 공략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불교의 보편화 운동의 실천을 위하여 '승려에서 대중에로', '산간에서 길가로' 등을 내걸었다.
또한 불교 포교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교단, 종단간의 갈등을 줄이고 협력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이는 선교진흥론(禪敎振興論)으로 발표되었다. 그에 의하면 불교의 진흥을 위한 필수불가결의 요건은 수행 이상을 확립하는 일이라 하였다. 이에 한용운은 지금까지 조선의 불교는 오교구산과 선교양종이니 해서, 마치 교의(敎義)와 종지(宗旨)가 다른 것처럼 잘못 인식되어 왔다. 선과 교의 본질은 하나이다. 왜냐하면, 선이란 불교의 마음이며, 교란 불교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양자는 서로 배치되는 개념이 아니며, 양자의 이론적 합일과 연대의 실천이 불교 진흥, 포교 확산의 관건이라고 주장하였다. 동시에 한용운은 선원(禪院)이나 강원(講院)의 지도 이념이나 이론, 실수(實修) 등에 있어 외전(外典)도 첨가해야 한다, 그리고 속된 것을 전적으로 배격하지 말 것을 호소하였다. 그는 선교일치를 주장해온 조선 불교의 일승정신(一乘精神)이 새로운 시대의 좌표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또한 해외포교에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서 미국, 중국 등지에 해외법당을 세워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조선보다 먼저 불교를 받아들인 곳이고 미국인들은 대다수가 개신교나 천주교 신자처럼 인식하던 당대의 승려들과 불자들은 그의 해외 포교 주장을 실현 불가능한 이상으로 취급했다.
불교 경전의 한글화
만해는 1910년부터 대장경과 화엄경 등을 비롯한 불교 경전의 내용을 한글로 번역하여 소개하였다. 1930년대 이후에도 그는 불교 경전의 한글화를 주장했다. 경전의 내용이 한문이나 산스크리트어로서 일반 중생이 읽기에는 너무 힘들다, 어렵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대장경의 한글 번역이다. 현대포교의 요체는 문서에 의한 홍포였다.
그는 아무리 좋은 말씀도 이해를 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라 주장하였다. 불교 경전의 대부분이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일반인이나 문맹률이 높던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읽고 이해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방대한 대장경을 쉽게 옮기는 일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불교의 교리와 활동, 고승 등에 대한 내용을 한글로 표현했으며 《불교대전》에는 대장경 등의 내용을 한글로 해석하였는데 이는 바로 그와 같은 시도의 결정이다. 대장경의 요지를 발췌하여 대의를 옮겨 적은 불교대전은 20세기 한국 불교이론서와 《불교성전》들의 효시가 되었다. 그밖에도 그는 불교학 진흥과 포교의 활성화를 위하여서는 각종 금석문(金石文)이나 사장된 자료들이 일반에 소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잡지 발행
1918년 9월 1일 제자 춘성 등과 함께 월간 불교잡지《유심 (惟心)》을 창간하여 12월까지 3권을 발행하고 중단되었으나, 이 잡지를 통해 불교 논설만이 아니라 계몽적 성격을 띤 글을 발표했고, 또 신체시를 탈피한 신시〈심 (心)〉을 발표하여 문학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당시 조선불교의 침체와 낙후성과 은둔주의를 대담하고 통렬하게 분석과 비판을 한 저서 조선불교유신론을 발표하여 사상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월간 유심지에서 그는 시 '심 (心)'과 수필 고학생, 남모르는 아이들을 발표하는 등 불교의 보편화와 친숙화를 꾀한다. 불교의 홍보, 포교와 함께 계몽, 자각, 자유정신,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논설들을 다수 실은 월간지 유심은 뒷날 그가 관계한《불교》잡지와 함께 가장 괄목할만한 문화사업의 하나가 되었다.
3.1 만세 운동과 투옥
1920년 7월 2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 3.1 운동에 참가한 민족대표 48인 공판에 관한 기사, 다섯째 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한용운
3·1 운동, 민족대표 33인 및 민족대표 49인 .
1918년 12월에 발표한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감동하여 1919년 1월부터는 전국적인 만세 운동 준비에 참여하고, 백용성 등과 함께 불교 지도자들을 소집하여 손병희 등 천도교 지도자들과 이상재 등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과 회합하였다. 그는 독립선언문의 내용을 둘러싸고 최남선과 의견충돌을 하였다. 내용이 좀더 과감하고 현실적이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으나, 최남선 등은 만해의 주장이 급진적이고 과격하다며 반대했고 결국 만해가 제시한 조건들 중 마지막의 행동강령인 공약 제3조 '최후의 일인까지 쾌히 우리의 의사를 발표하자' 만이 수용, 독립선언서에 수록되었다.
1919년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일설에는 용성 선사의 도장도 그가 찍었다 한다. 경성 탑골공원에서 독립 선언서 낭독과 만세 운동에 가담했다가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었다. 민족대표자들은 평화 시위를 기획하였는데 시위는 격화되었고, 민족대표자들은 자수를 결심한다. 이종일의 회고에 의하면 "수감중 만해는 일제의 고문 및 위협에 벌벌 떠는 나약한 민족대표들에게 인분을 퍼부었다."고 한다.
그는 만세운동을 진행하던 중 탑골공원에서 총독부 경무국 순사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어 피신한 다른 민족대표자들이 자수함으로써 바로 서대문형무소로 넘겨지고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복역하였다.
수감과 석방
한편 체포된 만해는 동대문 시장에 투옥되어 복역하며 재판을 받았다. 이때 옥중에서 변호사는 물론 사식과 보석을 거부할 것을 결의하고 수감생활을 한다. 그리고 옥중에서 '조선독립의 서'를 집필하다가 발각되어 결국 원본을 형사에게 제출했다. 그러나 만해는 한편으로 '조선독립의 서'를 일본인 서울지방법원 검사에게 제출하기 이전에 일부를 휴지에 작은 글씨로 옮겨 적었다. 그리고 그것을 접어 형무소 밖으로 나가는 의복의 갈피에 집어넣었다. 이렇게 외부로 나온 그 선언서는 상해까지 전달되었다. 인간의 권리와 자유와 평등에 대한 길을 가로막는 어떠한 형태의 무력, 군사력, 압제 정치는 결국 스스로의 덫에 걸려 스스로 패망하게 되리라는 내용이었다. 옥중에서 작성한 '조선독립의 서'는 종이를 노끈처럼 말아 유일하게 그의 옥바라지를 하던 춘성 스님을 통해 상하이로 보내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1919년 11월 4일의 기사 부록에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대요'라는 제목으로 발표, 보도되었다.
1921년 12월 22일 3.1독립운동 민족대표자 최린, 함태영, 오세창, 권동진, 이종일 등과 함께 가출옥되자 많은 면회객이 찾아왔다. 그런데 그가 인사를 하는 것을 보고 면회객들은 이상하게 여겼다. 이에 만해는 자신을 마중하러 나온 인사들에게 "너희들은 이런 출옥의 인사를 할 줄은 알고, 인사를 받을 줄은 몰랐더냐?" 하고 대성질타하였다.
출옥 후에는 언론에 칼럼을 발표하는 동시에 1922년부터 1923년까지 민립대학 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등의 민족운동에도 참여했다. 이 기간 중 그는 김성수, 조만식, 안재홍, 이광수, 방응모 등을 만나 인맥을 쌓기도 했다. 글 못지않게 연설가로서도 남다른 능력을 지니고 있던 그는 1922년 5월 전조선학생대회 주최로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강연회가 개최되자 3인의 종교 지도자의 한 사람이자 연사의 1인으로 초빙되었다. 대회가 열린 날 두 번째 연사로 나선 만해가 강연하자 청중이 열광하여 결국 다음 사람이 강연을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1922년 9월 잡지《개벽》에 옥중시 '무궁화 심으라'를 발표하였다.
사회 단체 활동과 님의 침묵
신간회 및 님의 침묵독립의 열변을 토하였다. 1920년대에 부인이 있는 대처승이 속인들에게 사이비 중이라고 모욕을 당하는 것을 보고 대처승 운동을 주도하여 중에게도 결혼할 자격을 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1924년부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논설위원을 겸하며 계몽, 사회 참여를 촉구,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칼럼을 송고하였다.
1923년 1월 동아일보에 논설 '조선 급(及) 조선인의 번민(煩悶)'을 발표한다. 1924년 1월 6일 조선불교청년회 초대 총재에 취임하며 청년조직을 항일운동에 걸맞게 바뀌었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다. 5월15일 <십현담주해>를 법보회에서 발행, 5월 20일 <님의 침묵>을 회동서관에서 발행하였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님은 갔습니다
푸른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나 있는 작은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黃金)의꽃가티 굿고빗나든 옛 맹서(盟誓)는 차듸찬띠끌이되야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나러갓슴니다
날카로은 첫 키스의 추억(追憶)은 나의 운명(運命)의 지침(指針)을 돌너노코 뒷거름처서 사러젓슴니다
나는 향긔로은 님의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은 님의얼골에 눈멀었슴니다
사랑도 사람의일이라 맛날때에 미리 떠날것을 염녀하고경계하지 아니한것은아니지만
리별은 뜻밧긔일이되고 놀난가슴은 새로은 슬븜에 터짐니다
그러나 리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만들고 마는것은 스스로 사랑을깨치는것인줄
아는까닭에 것잡을수업는 슬븜의 힘을 옴겨서 새 희망(希望)의 정수박이에 드러부엇슴니다
우리는 맛날때에 떠날것을염녀하는 것과가티 떠날때에 다시맛날것을 믿슴니다
아아 님은갓지마는 나는 님을보내지 아니하얏슴니다
제곡조를못이기는 사랑의노래는 님의沈默을 휩싸고돔니다
님의 침묵에서 그는 한글 표준어를 쓰지 않고 충청도 방언과 토속어가 세련되지 않은 표현으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향토적 정감의 방언 및 토속어 애용과 서민적인 시어의 활용은 님의 침묵에 민중정신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1925년부터 백담사에서 집필하여 1926년 경성 안동서관에서 발행한《님의 침묵》은 당시 자유주의적, 남녀간의 연애를 위주로 하던 한국문단의 영향을 받지 않고 생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현실과 이상,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요구되는 주체적 자세에 대해 노래했으며, 더욱이 그것을 풍부한 시적 이미지로 아름답게 형상화해 수준 높은 민족문학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조선의 독립, 혹은 자연을 '님'으로 표현하여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부처로도 해석되고 이별한 연인으로도 해석되는 화법을 구사하여 총독부 학무국의 검열 탄압을 피하였다.
신간회 창설에 참여
1927년 1월 19일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이인, 김병로, 허헌, 조병옥, 허정숙 등과 함께 종교, 사회단체를 망라한 사회단체 신간회의 결성에 불교계 대표자의 한사람 겸 경성부 서부 지역 대표자의 한 사람으로 적극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의 한 사람이 되었다. 신간회 조직을 결성하는 주도적으로 참여한 그는 1928년 다시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의 한사람에 선출되고 신간회 경성지회 회장(京城支會會長)에 피선되어 허정숙 등과 신간회 경성지회에서 활동하였다.
1927년 12월 조선불교청년회(朝鮮佛敎靑年會)의 체제를 개편하여 조선불교청년동맹(朝鮮佛敎靑年同盟)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였다.
한편 1929년 3월 6일 그의 속가 형 한윤경이 사망하였다(70세). 그는 150섬 이상을 수확하던 홍성군의 대지주였다. 한윤경의 아들이자 조카인 한창국은 일찍 죽고 한창국의 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한다.
1929년 광주항일학생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학생 시위를 보고 그것을 민족적·민중적 운동으로 확산시키고자 민중대회를 계획했으나, 조선총독부 밀정에게 발각, 총독부 경무국에 의해 무산되었다.
1930년 5월 김법린, 김상호, 이용조, 최범술 등이 조직한 청년승려비밀결사 만당(卍黨)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1931년 6월 [불교]지를 인수, 불교사 사장으로 취임하여 많은 논설을 발표하였다. 이후 많은 논문과 논설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특히, 고루한 전통에 안주하는 불교를 통렬히 비판하였으며, 승려의 자질 향상, 불자에게 생계를 의존하지 않기, 기강확립, 생활불교 등을 제창하였다.
또한 주량 조절만 가능하다면 승려들도 음주를 하게 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1930년 잡지《불교(佛敎)》의 필진이 되었다. 1931년 6월 잡지 《불교》를 인수하여 사장으로 취임했다. 그전까지는 권상로(權相老)가 맡아오던 이 잡지를 인수하여 불교의 홍포에 온 정력을 기울였다. 같은 해 김법린·최범술·김상호 등이 조직한 청년법려비밀결사인 만당(卍黨)의 당수로 추대되었다. 1931년 6월부터 2년 남짓 동안은 친일로 전향한 권상로에게 인수한 《불교》를 발간하는 일에 전념한다. 그러나 경영난으로 1933년 9월 결국 권상로에게 재인계하고 만다.
반일 강연 활동
그는 조선 불교가 일본 불교에 예속되지 않고 독립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한편 한 강연에서 그는 조선총독부나 일본 불교에 아첨하는 일부 승려들을 질타하기로 했다.
그간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묻자 아무도 그 물음에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은 똥이올시다. 똥! 그런데 그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겠습니까?"라고 하자 역시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가난한 불자들의 시신을 염습해본 적이 있는 한 사람은 시체라고 하였다. "내 경험으로는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이 송장 썩는 것이올시다. 똥 옆에서는 식음을 할 수 있어도 송장 썩는 옆에서는 차마 음식이 입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라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듣고 일부는 좌석을 이탈하려 하였으나 좌중에 압도당해 움직일 수 없었다. 이어 만해는 "시체보다 더 더러운 것이 있으니 그것이 무엇일까?"하고 물었다. 아무도 답을 하지 않자 한용운은 굳은 표정으로 강연대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그건! 바로 여기 앉아 있는 31본산 주지 네놈들이다!"라고 일갈하고는 즉시 단상에서 내려와 퇴장해버렸다. 반일 혹은 일본 불교에의 흡수를 반대하는 그를 두고 불령선인이라는 지적이 계속되었고 그는 결국 조선총독부 형사들의 감시하에 놓이게 된다.
한편 총독부로부터 생계비와 연구비를 지원받는 조건으로 전향한 육당 최남선이 탑골공원 근처에서 마주쳤을 때 "오랜만이오. 만해."라고 먼저 인사하자 그는 "당신이 누구요?"며 냉정하게 답하였다. 최남선이 "나는 육당이오. 나를 몰라보겠소?"라고 하자 만해는 "뭐, 육당? 그 사람은 내가 장례 지낸 지 오랜 고인이오."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생애 후반
소설 집필 활동
1931년 53세의 나이에 재혼에 뜻이 있어 동지들의 소개로 13살 연하의 유숙원(1892년~1965년)과 재혼하였다. 유숙원은 결혼하기 전까지 단성사 옆에 위치했던 진성당병원의 간호사로 일하였다. 1933년에 金漁 김벽산(金碧山)스님이 집터를 기증하자, 조선일보사장 방응모, 박광 등 몇 분의 성금으로 절반의 비용을 지원받아 심우장을 짓기 시작하였다. 이때 총독부돌집을 마주보기 싫다고 북향으로 짓도록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다음 해에 딸 영숙(1934년 9월 1일)이 태어났으며, 1935년에 완공되자 입주하여 심우장에서 여생을 보내며 작품활동을 지속하였다.
1935년 장편소설 《흑풍》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다.《흑풍》에서는 검열을 피하기 위해 배경을 청나라를 무대로 하고, 억압에 대한 투쟁정신을 묘사하여 조선총독부에 대한 저항성을 은근히 보여주고 여성해방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삽입하여 반봉건 정신 및 여성도 인격체라는 견해를 설파하였다. 1936년 단재 신채호의 시신이 비밀리에 입국한 것을 접하고 방응모와 함께 신채호의 묘비건립과 정약용 서세100년기념회 개최에 참여했다. 1936년 《조선중앙일보》에 장편 《후회 後悔》를 연재하였다. 이러한 소설을 쓴 까닭은 원고료로 생활에 보탬을 얻기 위한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도 소설을 통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려는 의도가 더 큰 것으로 이해된다.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 서대문형무소에 재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937년 4월 13일 서간도 독립운동단체의 지도자였던 김동삼이 경성감옥에서 사망하였다. 아무도 그의 시신을 거두거나 수습하려 하지 않았는데 한용운이 홀로 찾아가 통곡하며 시신을 수습하여 심우장에서 장례를 치루었다.
태평양 전쟁 전후
심우장, 태평양 전쟁 및 학도병
석방 후 불교 혁신과 작품활동을 계속하였고 1938년에는 장편 《박명(薄命)》을 발표하였다. 1938년부터는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에 반대하여 학도병 거부 운동을 벌였다. 작품으로는 여러 장편 외에 장편소설인 《박명(薄命)》이 있고, 저서로는 시집《님의 침묵》을 비롯하여《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불교대전》,《불교와 고려제왕(高麗諸王)》등이 있다.
그는〈님의 침묵〉 외에도《신인 문학》과《삼천리》에 시 '꿈과 근심', '실제 (實際)',《조광》에 수필 '최후의 5분간', 조선일보에 장편소설 흑풍, 박명, 조선중앙일보에 소설 후회와 중편소설 죽음 등을 발표하였다.
중일전쟁 이후로도 그는 계속 징용이나 보국대 또는 일본군을 찬양하는 글을 쓰지 않으며 강연도 하지 않았다. 또한 강연 협조 등도 거부하였다. 또한 1937년부터 강요된 신사 참배와 일장기 게양을 거부하고, 조선총독부의 일본식 호적에 이름조차 올리지 않았다.
만년에는 경성부 성북동의 심우장을 친히 지어 거처했는데, 심우장은 후일 서울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다. 1939년 경상남도 사천군 다솔사(多率寺)로 내려가 회갑을 맞으면서 몇몇 동지들과 함께 자축연을 가졌다. 다솔사는 당시 민족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본거지였다.[출처 필요]
사망
태평양 전쟁, 학도병 및 창씨개명
1940년 5월부터는 창씨개명 반대운동을 하였고 1943년에는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말년에는 방응모, 정인보, 안재홍, 홍명희, 김성수, 만공 등과 교류하며 그들이 보내주는 생활비로 어렵게 생활하였다. 일제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비타협적인 독립사상을 견지하다가, 성북동 집인 심우장에서 냉방으로 생활하였다.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만해의 생계는 그의 친구인 안재홍, 방응모, 김성수, 송진우, 조만식, 최남선, 이광수, 윤치호 등이 십시일반으로 부담해주었다. 말년에 중풍으로 고생하였지만 1944년 6월 28일 조선총독부의 특별 훈련으로 공습경보가 발령되었을 때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후 계속 혼수상태로 있다가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승랍 49세, 세수 66세로 입적하였다.
그가 사망하였던 1944년은 일본 제국이 패망하기 1년 전이자 광복을 1년 앞두고 있던 때라 그토록 염원하던 조국의 독립은 끝내 생전에 보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가 사망한지 1년 후인 1945년 8월 15일에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본 제국이 패망하게 되면서 대한민국이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사후
만해의 흉상
사망한지 1년 후인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면서 조선은 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한용운 본인은 1년 전에 고인이 되었기 때문에 그토록 염원하였던 광복의 모습은 보지 못하였다.
동지들에 의하여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미아리 사설 화장장에서 다비된 뒤 망우리 공동묘지에 유골이 안치되었다. 후일 그 옆에는 부인 유숙원 여사의 묘소가 오른편에 매장되었다.
그는 문학을 전문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님에 대한 그리움과 곧은 지조를 표현한 작품들을 통해 해방후에도 인기를 끌게 되었다. 그후 문인, 저항 시인, 대처승, 출가 승려로만 인식되다가 1960년대부터는 그의 독립운동 역사가 학자들에 의해 재조명 받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1967년 그가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던 탑골공원에는 후에 승려 운허에 의해 《용운당 만해 대선사비》(龍雲堂 萬海 大禪師碑)가 세워졌다.
고향인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남산공원에 동상이 세워졌고 홍성읍내 장터에도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1973년 신구문화사에서 《만해 전집》6권이 간행되었다.
그의 결성면 성곡리 박철동 잠방굴마을 생가지는 1989년 12월 24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75호로 지정되었다.
1990년에 생가가 복원되고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1991년에는 만해의 업적을 기리는 만해학회가 설립되었다.
그밖에 만해기념관, 만해사상선양회 등이 세워졌다.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는 만해문학박물관이 건립되었다.
후에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만해 생가지에는 생가복원에 이어 사당을 건립하고 안내판을 설치하였다.
작품성
시와 작품에 있어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였으며 조선의 독립 또는 자연을 부처님에 빗대어 불교적인 '님'으로 형상화했으며, 고도의 은유법을 구사하여 조선총독부나 일제 정치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제도(衆生濟度)를 노래하여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검열을 교묘하게 피하였다. 여기에서의 님은 보는 관점에 따라 조선의 독립, 자연, 부처님 혹은 이별한 연인 등으로도 해석이 가능한 어법을 구사하였다.
그는 대표작 님의 침묵을 비롯한 시집, 작품집에서 중심을 이루고 있는 '님'은 연인·조국·부처 등 다의적인 의미를 지니며 그에 따라 '님의 침묵'이라는 표현은 당시의 민족적 상황을 은유적으로 상징하였다. 또한 세속적인 정감의 진솔성이 불러일으키는 인간적 설득력과 함께 세속적인 사랑을 표출하면서도 세속사의 진부함에 떨어지지 않으며 목소리 높여 민중정신을 강조하지도 않는다는 작품평도 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시적 주체인 '나'가 님과 이별하여 님이 부재하고 침묵하는 시대로 규정하면서도, 님은 이 자리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나'는 진정으로 님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는 변증법적인 진리 또는 부처에 대한 믿음, 이별한 연인에 대한 애정을 확신, 재다짐하는 것을 드러내고, 새로이 '나'는 이 자리에는 계시지 않는 님 또는 돌아올 님과 다시 합일될 수 있다는 뜻을 노래한다. 또한 내가 님과 새로이 만나기 위해서 나는 님이 존재하지 않지만 님에 대한 의리와 절개를 지키고 님에 대한 철저한 복종이 요구되는데, 그 절개와 의리, 복종을 통해서 비로소 '님'에 대한 신의도 지키면서 한편으로 '나'는 자유로워진다는 '복종과 자유의 변증법'을 노래한 것은 역사의 필연성의 인식을 통해 진정한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출한다. 그는 식민지하에 있는 조국의 운명과 독립의 필연성 또는 오지 아니한 극락세계와 다시 만나게 되는 그 날, 그리고 그 날을 위한 실천, 변함없는 믿음을 통해 진정한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진리를 작품들을 통해 형상화, 승화시켰다.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그의 시는 오언절구나 칠언절구, 3.4조 등 당시 조선의 시조, 시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산문시의 전형이 되었다. 은유와 역설의 자유로운 구사를 보여주며, 정형적인 틀을 완전히 벗어난 산문적 개방 속에서도 내재율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근대 자유시의 완성에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저서
2019년 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선정된 포스트.
《불교대전 (佛敎大典)》(1913년)
《조선불교유신론 (朝鮮佛敎維新論)》(1913년)
시집 《심》
시집 《님의 침묵》
《유마힐소설경강의 維摩詰所說經講義》(1933년)
《십현담주해 (十玄談註解)》
《불교와 고려제왕 (高麗諸王)》
《조선독립의 서 (朝鮮獨立之書)》
번역서
《정선강 채근담》
소설
《흑풍》(1935년)
《후회》(1936년)
《박명 (薄命)》(1938년)
[Sources Wikipedia]
책소개
『만해 한용운 평전』은 공약삼장을 만해 선생이 추서했다고 주장하며 독립투사로서, 실천적 종교가로서, 시인이자 소설가로서의 파란만장한 삶을 찬찬히 조명한다. 특히 지금까지 출판한 각종 전기류에서 만해의 아버지가 의병활동을 한 것처럼 묘사되어 있지만 이 책에서는 오히려 의병 활동을 탄압하는 위치에 있었으며, 만해의 의식 속에는 늘 ‘부친 콤플렉스’가 잠재돼 있어 더욱 민족적 대의를 추구하게 되고 정도를 당당하게 걸을 수 있었다는 주장도 아울러 펼치고 있다.
실천적 종교가로서의 만해는 명논설 『조선불교유신론』을 통해 그 진면목을 유감없이 펼쳐 보인다. 이 논설은 당시 조선 불교의 현상을 비판하고 당면 과제를 지적하여 자유?평등주의 사상에 입각, 개혁안을 제기한 실천적 지침서였다. 여기에는 만해의 모든 교육과 사색과 견문이 쇠락한 조선 불교의 현상에 대해 전면적이고 비판적인 형태로 집약되어 있는 것은 물로 만해의 장래의 사상과 행동이 총체적으로 부각되어 있다. 하지만 이 논설에는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승려의 결혼를 허해야 한다는 14장은 이미 만해가 통감부에 보낸 건백서의 주장을 실어 호되게 비판받기도 했다.
독립투사로서의 만해는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3?1운동을 주도하고 공약삼장을 추서하는 등 민족대표로서 유일하게 변절하지 않았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일본인 검사와 경찰의 심문 과정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조선독립이유서」를 작성해 독립의 당위성을 대내외 천명하였다. 이 논설은 「독립선언문」보다 한걸음 나아간 것이요, 조리가 명백하고 기세가 웅건할 뿐 아니라 정치 문제에 몇 가지 예언을 해서 적중한 명문이라고 조지훈은 그 의미를 평가했다.
시인이자 소설가로서 만해는 한국 시문학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는 『님의 침묵』을 남겼다. 여기서 님은 민족, 조국, 민중, 불타, 중생, 불교의 진리 등으로 해석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민족의 독립과 조국애의 열망을 담고 있다. 아울러 만해 문학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선시’를 개척해 지눌대사의 법통을 잇기도 했다. 한편 문학적 수준이 떨어진다는 비판도 있지만 『흑풍』 『박명』 등의 장편소설을 연재해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보여준다. 이밖에도 만해는 불교 개혁과 민중 계몽을 위해 『불교』를 발행했고, 국내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 단체인 신간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처럼 만해 한용운은 다양한 분야에서 일제에 드러내놓고 저항한 유일무이한 독립투사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은 만해를 일컬어 크게 치면 칠수록 큰소리로 울리는 역사의 종, 민족의 종인 ‘천석들이 종’으로서 평가하고 있다.
목차
제1장 만해의 그릇과 불교와 인연
천석들이 종 / 불도로서 불교사적 비중 / 홍성에서 태어나다 / 가출과 출가의 배경 / 불도에 정진, 각종 경전 독파/ 러시아와 일본 여행 / 국치 겪고 만주에서 총격 받다
제2장 불교혁신운동에 횃불을 높이 들고
호국 불교 사상의 법맥과 전통 / 일본 승려 사노의 도성 입성 해금 전말 / 왜색 불교 타파 선두에 서다 / 통감부에 「건백서」 보내는 실책을 범하다
제3장 불후의 명논설 『조선불교유신론』
국치 통분 삭이며 『조선불교유신론』 집필 / ‘망매지갈’의 의미 / 『조선불교유신론』의 요지 / 대처론에 대한 사회적 파문 /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대처식육론 싸움 / 백용성의 대처식육반대 「건백서」
제4장 경전 간행과 오도, 불교 대중화 운동
『불교대전』 편찬하여 대중화 기여 / 『채근담』 편찬하여 일반인 수양에 도움 / 오세암에서 깨달음을 얻다 / 불교 교양 잡지 『유심』 발행
제5장 불교계 민족 대표로 3 · 1운동 주도
3 · 1운동 준비에 앞장서다 / 불교 · 유림 민족대표 교섭 책임을 맡다 / 서대문감옥에 수감되고 고문에 시달리다 / 3대 원칙 제시하고 실천 / 공약삼장을 만해가 작성했다는 주장의 근거 / 두 주장의 팽팽한 대립
제6장 서대문감옥의 태산 같은 지도자
감옥 안팎의 독립 의지 / 3 · 1운동 당시 서대문감옥의 실상 / 「조선독립이유서」, 상해 『독립신문』에 실리다 / ‘철창 문학’의 진수, 시와 시조
제7장 「조선독립이유서」, 무엇을 담았나
자유와 평화에 대한 선언 / 총독 정책에 대하여 / 조선 독립의 자신감 밝혀 / 「조선독립이유서」의 한계 / 『십현담주해』에 열정을 쏟다 / 『유마힐소설경』을 강의하다
제8장 한국 시문학의 금자탑, 『님의 침묵』
시작의 과정 / 시작의 배경은 무엇인가 / 최남선 ‘극복’이라는 주장도 / ‘님’은 누구(무엇)인가 / 시집에 대한 다양한 평가 / 만해 시의 가치 / 『님의 침묵』 시 20선 / 순수 우리 언어로 선시 개척
제9장 신간회 참여와 여성 · 노동 문제 관심
1920년대 국내의 상황 / 계량주의자들의 득세와 의열 투쟁 / 신간회 발기인 참여와 경성지회장 선임 / 광주학생운동으로 요시찰인 지목받아 / 타고난 문인, 많은 글 쓰고 발표 / 여성해방운동에 각별한 관심 / 농민 · 노동자 문제에도 선각적 관심
제10장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와 소설 집필
미발표 소설 「죽음」과 『흑풍』/ 『흑풍』의 스토리 / 장편 소설 『박명』 / 만해 소설의 문학성 비판 견해도
제11장 불교 잡지 내며 언론 활동에 나서다
자신의 언론 갖고자 『불교』 잡지 인수 / 불교 개혁과 민중 계몽위해 잡지 선택 / 사회 명사들 필자로 참여 / 소크라테스처럼 ‘등에’ 역할
제12장 재혼, 성북동에 심우장 짓고 거하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 광기를 더해 가는 일제 통치 / 여성 취향의 분위기 잠재 / 아버지 콤플렉스에 시달려 / 서른여섯 살 간호원 유숙원과 재혼 / 북향으로 지은 심우장의 사연 / 김동삼 선생 5일장을 지내다
제13장 심우장에 촛불은 꺼지고
전시 동원 체제에서 어용 단체 속출 / 잔혹한 군홧발에 민족혼 짓밟히고 / 딸 영숙 태어나다 / “최남선은 이미 죽어 장송했소” / 호적이 없는 일생 / 불교사회주의에 경도되기도 / 천추의 한 남긴 채 입적 / 「알 수 없어요」 / 만해, 누구이고 무엇을 남겼는가 / 만해가 남긴 일화 / 유작 시와 시조 / 유작 시조 15편
부록
「아버지 만해의 추억」/ 「죽다가 살아난 이야기」/ 「나는 왜 중이 되었나」/ 「국보적 한글 경판의 발견 경로」/ 「북대륙의 하룻밤」/ 최근 미공개 한시 10수 발견 / 처염상정의 연꽃처럼 / 「한용운 선사 묘소에서」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20377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 since 2010:티스토리]
책소개
Ⅰ장은 '조선불교유신론'의 해제이다. 역자는 저자 한용운의 생애와 저술 당시의 시대적 상항에 대해 자세히 고찰했다. 또 『조선불교유신론』의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만해 사상의 근간이 된 량치차오(梁啓超)와 사회진화론에 대해서도 살폈다.
Ⅱ장은 '조선불교유신론' 을 번역한 부분인데, 한용운은 조선불교 개혁을 토로하고, 불교는 미신이 아니라 고금동서의 모든 철학을 종합·포섭하고 있는 위대한 사상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불교의 이상(理想)은 평등주의 내지는 구세주의(救世主義)에 있는 것으로 이는 서양의 자유주의와도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다고 역설했다.
인류 문명이 발전해 갈수록 불교가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불교의 근대화를 위해서는 미신적인 요소가 있는 탱화와 번잡한 의식들을 버려야 하고, 승려도 체계적 교육을 받아야 하며, 결혼 생활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사원의 주지 선출 문제, 교단 조직과 체계를 정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Ⅲ장은 ['조선불교유신론' 의 번역과 그 연구(부제: 만해학(萬海學)의 ‘빛과 그림자’)]이다. 여기서 역자는 '조선불교유신론' 의 새번역의 필요성과 이 책에 대한 평가를 비롯해 만해의 일본행이 만해 사상에 끼친 영향력을 분석했다. 부록에는 '조선불교유신론' 의 영인본이 실렸다.
목차
1. 저자 한용운(韓龍雲)에 대하여…………………………………………… 9
2. 저술의 시대 상황적 배경: 전통과 근대의 갈림길……………………… 12
3. 『조선불교유신론』의 내용…………………………………………………… 14
4. 만해의 사상적 배경: 량치차오(梁啓超)와 사회진화론……………… 17
Ⅱ장.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역주(譯註)
1. 서(序)… …………………………………………………………………………… 21
2. 서론(緖論)……………………………………………………………………………… 23
3. 불교의 성질을 논함(論佛敎之性質)……………………………………… 29
4. 불교의 주의(主義)를 논함(論佛敎之主義)……………………………… 55
5. 불교의 유신(維新)은 먼저 파괴부터 해야 함을 논함
(論佛敎之維新宜先破壞)…………………………………………………… 64
6. 승려의 교육을 논함(論僧侶之敎育)……………………………………… 68
7. 참선을 논함(論參禪)…………………………………………………………… 84
8. 염불당 폐지를 논함(論廢念佛堂)………………………………………… 95
9. 포교를 논함(論布敎)… ……………………………………………………… 106
10. 사원의 위치를 논함(論寺院位置)… …………………………………… 120
11. 불가(佛家)에서 숭배하는 소회(塑繪)를 논함(論佛家崇拜之塑繪)…… 143
12. 불가(佛家)의 각종 의식을 논함(論佛家之各種儀式)………………… 161
13. 승려의 인권회복은 반드시 생산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임을 논함
(論僧侶之克復人權必自生利始)… ……………………………………… 169
14. 불교의 앞날이 승니(僧尼)의 결혼여부와 관련됨을 논함
(論佛敎之前途가 關於僧尼嫁娶與否者)……………………………………… 182
15. 사원 주직(住職)의 선거법을 논함(論寺院住職選擧法)………… 206
16. 승려의 단결을 논함(論僧侶之團體)… ………………………………… 212
17. 사원의 통할을 논함(論寺院統轄)… …………………………………… 232
18. 결론(結論)… ……………………………………………………………… 238
Ⅲ장. 『조선불교유신론』의 번역과 그 연구
- 만해학(萬海學)의 ‘빛과 그림자’ -
1. 『조선불교유신론』 새 번역의 필요성… ………………………………… 245
2. 『조선불교유신론』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 248
3. 만해의 일본행과 『조선불교유신론』의 관계…………………………… 251
4. 본 번역본에 대하여…………………………………………………………… 259
『조선불교유신론』 영인본 / 별면
출판사 리뷰
Ⅰ장은 『조선불교유신론』의 해제이다. 역자는 저자 한용운의 생애와 저술 당시의 시대적 상항에 대해 자세히 고찰했다. 또 『조선불교유신론』의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만해 사상의 근간이 된 량치차오(梁啓超)와 사회진화론에 대해서도 살폈다.
Ⅱ장은 '조선불교유신론' 을 번역한 부분인데, 한용운은 조선불교 개혁을 토로하고, 불교는 미신이 아니라 고금동서의 모든 철학을 종합·포섭하고 있는 위대한 사상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불교의 이상(理想)은 평등주의 내지는 구세주의(救世主義)에 있는 것으로 이는 서양의 자유주의와도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다고 역설했다. 인류 문명이 발전해 갈수록 불교가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불교의 근대화를 위해서는 미신적인 요소가 있는 탱화와 번잡한 의식들을 버려야 하고, 승려도 체계적 교육을 받아야 하며, 결혼 생활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사원의 주지 선출 문제, 교단 조직과 체계를 정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Ⅲ장은 ['조선불교유신론' 의 번역과 그 연구(부제: 만해학(萬海學)의 ‘빛과 그림자’)]이다. 여기서 역자는 '조선불교유신론' 의 새번역의 필요성과 이 책에 대한 평가를 비롯해 만해의 일본행이 만해 사상에 끼친 영향력을 분석했다.
부록에는 '조선불교유신론' 의 영인본이 실렸다.
조선의 승려, 조선 불교의 근대화를 꿈꾸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한국인들의 애송시 [님의 침묵]의 첫 구절이다. 만해 한용운은 조선이 식민지 하에 있던 1926년 당시, 민족 독립에 대한 희망을 ‘님의 침묵’이라는 시로 형상화했다. 이 시는 그 후 지금까지 수많은 이들에게 낭송되고 있다.
한용운은 1896년, 18세의 나이로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입산해 승려가 되었다. 오세암에서 그는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고 선(禪)을 닦았다. 이후 세상사에 대한 관심으로 블라디보스토크 등 시베리아와 만주 지역을 여행하기도 했다.
그 후 1905년에 재입산하여 설악산 백담사(百潭寺)에서 연곡(連谷)을 은사로 정식으로 득도(得度)했다. 1908년에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서 공부하다 마침 금강산에 방문한 일본 불교 조동종(曹洞宗) 관계자들의 후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5월부터 약 6개월간 조동종대학(曹洞宗大?, 현재의 고마자와대학[駒澤大?])에 입학하여 불교와 서양철학 등을 배우며 새로운 문물을 익혔고, 조선인 일본유학생들과도 교류했다.
만해가 이 책을 저술하게 된 동기는 약 6개월간 일본 불교계를 견문했던 경험에 있다. 이 시기에 일본 불교는 이미 매우 발전해 있었다. 당시 일본에는 불교대학, 불교유치원, 포교당, 복지시설, 출판사 등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마련된 다양한 시설들이 있었다. 만해는 이런 발전상을 보면서 조선의 열악한 불교 현실을 떠올렸던 것으로 보인다. 또 일본에서는 각종 현안에 대하여 근대화의 주장이 풍미하고 있었다. 만해는 일본 불교계의 이런 분위기에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이란 ‘우물’을 벗어나 세계를 여행하고 근대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일본에서의 경험을 통해 그는 조선이란 나라와 조선 불교를 좀 더 큰 틀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역자 인터뷰
1. 조선불교유신론에 대한 번역은 몇 가지가 있는데, 왜 다시 번역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기존의 번역본과 비교해서 선생님 번역본이 갖는 장점은 무엇인가요?
《조선불교유신론》의 한글번역은 1972년 서경수 편역이 나온 이래, 1983년 이원섭 번역(2007년 개정판), 1991년 정해렴 편역, 2014년 조명제 번역 등이 간행되었습니다. 기존 번역본에서 문제점을 느끼고 새번역을 시도하면서 가장 의식했던 것은 불교학자이자 시인으로 저명한 이원섭(1925~2007) 선생의 번역본입니다. 여러 번역본 가운데 굳이 이원섭 번역본을 거론하는 이유는 《조선불교유신론》 번역의 기본 틀을 제시한 작업으로 그 이후 번역본들에서 나타나는 장점과 단점을 모두 지닌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원섭 번역본은 불교학자이자 시인이라는 저자의 이력에 걸맞게 불교 관련 부분이나 만해가 인용하고 있는 고전의 한시(漢詩) 번역에 뛰어납니다. 하지만 그러한 장점이 무색하리만큼 만해가 사용한 불교용어나 인용하고 있는 고전 혹은 근대 중국과 일본 서적 등의 출처를 밝히지 않거나, 밝힌 것 가운데서도 종종 오류가 보입니다. 기존 번역본 가운데 가장 훌륭한 편이라 할 만큼, 그에 비례해 아쉬운 부분이 두드러지는 셈입니다. 제가 단점을 지적하기는 했지만, 이원섭 번역본이 없었다면 아마도 《조선불교유신론》은 여전히 암호문과 다를 바 없이 읽히지 않는 책으로 방치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조선불교유신론》의 번역사에서 이원섭 번역본의 성과와 한계를 정확하게 평가하는 것이야말로 이원섭 선생의 노고에 대한 가장 여법한 회향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 번역본의 장점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번역투의 일관성 : 《조선불교유신론》의 원문은 한글 토나 조사만 한글이고, 그 한글의 문투도 ‘~하니라’, ‘~하랴’, ‘~하나니’ 등 옛 말투로 되어 있습니다. 이원섭 번역본은 원문의 한자 부분을 비교적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한 반면, 한글의 문투는 현대어법과 원문의 옛 말투를 살린 대목이 섞여 있어 일관성이 부족합니다.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말처럼 번역에서 직역과 의역의 선택은 늘 고민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번역을 잘 한다 해도 원문의 의미를 고스란히 전달하기 힘든 부분이 어김없이 나타나 번역자를 괴롭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번역본에서는 원문의 의미를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옛 말투를 현대의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한글 문장으로 옮겼습니다.
둘째, 원문의 인명과 지명 확인 : 이원섭 번역본은 《조선불교유신론》의 원문에 자주 등장하는 서양철학자의 인명이나 지명 등을 명확히 밝히지 않은 채 애매한 부분은 두루뭉술하게 넘어간 대목이 많습니다. 근현대 중국에서는 외국어를 표기할 때 그 외국어의 발음과 비슷한 소리가 나는 한자를 빌어 표기했습니다. 이런 방식을 음차(音借)라고 하는데, 예를 들면 독일의 철학자 칸트(Kant)는 ‘康德’, 프랑스의 정치가 나폴레옹(Napoleon)은 ‘拿破侖’ 등으로 적는 것입니다. 이 한자 이름에서 원래 서양인명을 역추적하는 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1910년대 당시의 표기와 현대 중국어의 표기가 달라진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만해가 본문에서 언급한 서양인의 인명이나 지명은 대개 중국 근현대 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의 글에서 인용한 것인데, 인용과정에서 누락된 것인지 량치차오의 문장과 다르게 표기되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조선불교유신론》 원문에 사용된 한자식 서양인명과 지명의 원어표기를 찾아내는 작업은 먼저 량치차오의 문장을 비롯해 중국에서 나온 각종 외국인명사전과 지명사전 등 각종 공구서를 세밀하게 조사해 대조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제 번역본에서는 그와 같은 작업을 통해 《조선불교유신론》 본문에 사용된 서양인명과 지명의 원어를 밝히는 한편, 이원섭 번역본에서 잘못 설명하고 있는 부분을 바로잡았습니다.
셋째, 원문의 출처에 대한 확인 : 이원섭 번역본의 큰 문제점 중 또 하나는 《조선불교유신론》 본문 가운데서 만해가 인용하고 있는 문장의 출처를 제대로 밝히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만해의 문장은 문체나 서술 스타일, 용어 등 상당수가 량치차오의 글에서 인용한 대목이 많습니다. 앞에서 지적한 서양인명과 지명의 문제도 이와 연관이 있는 셈으로, 《조선불교유신론》 본문에서 서양철학자를 언급하고 있는 부분은 거의 량치차오의 문장에서 가져온 사실만 보더라도 만해 문장의 주요 출처가 량치차오의 글이라는 점은 명백합니다.
그런데도 이원섭 번역본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제 번역본은 기존 번역본과 달리 《조선불교유신론》 본문의 단순한 해석을 넘어, 만해가 본문에서 인용하고 있는 문장의 출처를 가능한 찾아 밝히고, 인용문과 원문 간의 변형 등에 대한 텍스트 비판에 역점을 두었습니다.
2. 만해의 《조선불교유신론》을 번역하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선생님 공부의 궤적 속에서 만해 사상과 그가 쓴 《조선불교유신론》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1] 번역의 계기
저는 연세대학교 철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에서 일본 근현대 불교사상사 특히 일본불교계의 조선 유입과 그에 대응한 조선불교계/조선총독부의 동향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2013년 1학기 대학원에 개설된 [불교철학특강] 수업에서 조선시대 불교철학사의 흐름을 다루는 가운데, 만해의 《조선불교유신론》 원문 일부를 강독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이 수업을 통해 처음으로 만해의 《조선불교유신론》 원문을 비록 일부나마 정밀하게 읽어본 셈인데, 국한문혼용체의 문장을 수월하게 이해하기란 결코 만만치가 않았기 때문에, 기존에 나온 번역본을 많이 참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기존 번역본을 보면서 수업 내내 마음 한 구석에 찜찜한 느낌이 남았고, 수업이 끝난 후에도 그 느낌을 떨쳐내기 힘들어 한동안 고민에 빠졌습니다. 저를 괴롭힌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선사(禪師), 독립운동가, 불교개혁가, 시인, 작가 등 다양한 면모를 지닌 만해인지라, 그에 대한 연구는 약간의 과장을 보태면 이미 한우충동(汗牛充棟)이란 말이 무색할 만큼 많은 성과가 축적되어 있었고, 만해의 《조선불교유신론》에 관한 연구만 해도 논문과 단행본 합쳐 약 200여건에 이른다. 만해를 논하는 이들은 어김없이 《조선불교유신론》을 인용하는데, 이처럼 빈번하게 인용된 《조선불교유신론》은 과연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이었을까?
만해학의 근간을 이루는 기본텍스트인 《조선불교유신론》은 1910년 집필, 1913년 간행되어 이미 ‘출판 100주년’을 넘겼다. '조선불교유신론'은 국한문혼용체로 한글 토나 조사를 빼면 순한문체나 다름없고, 이미 전통한문이 원활한 의사소통수단의 기능을 상실한 시대에 국한문혼용체 문장을 읽자면 외국어로 된 문장을 독해할 때와 같은 긴장감이 따른다. 긴장감의 정도는 연구자든 일반 독자든 그다지 차이가 없기에 누구나 쉽고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한글번역본이 필요하다.
《조선불교유신론》의 한글번역은 1972년 서경수 편역이 나온 이래, 1983년 이원섭 번역(2007년 개정판), 1991년 정해렴 편역 등이 간행되었다(2013년 현재). 그 밖에도 만해의 시나 문장을 묶어 편집한 형태로 발간된 것까지 포함하면 번역본이 적지 않다고 하겠지만, 출판 100주년을 지난 현재까지 시중에서 구해볼 수 있는 몇몇 《조선불교유신론》 번역본은 ‘편역’이란 이름으로 이원섭 역본을 그대로 옮겨 싣거나, 이원섭 역본의 오류마저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007년에 나온 이원섭 개정판도 여전히 기존 번역본(1983)의 불명확한 대목이나 오류를 반복한 채 세로쓰기를 가로쓰기로 바꾼 정도에 그쳤다.
이처럼 《조선불교유신론》의 믿을만한 한글번역본이 제대로 없는 상황에서 만해를 운운하고 《조선불교유신론》을 운운하는 것은 만해에게 죄송할뿐더러 만해학 연구의 허약한 토대를 여실하게 드러내는 사례가 아닐까?”
근현대 한국불교를 공부하는 이들 가운데 누군가 제대로 된 번역본을 다시 냈으면 좋겠단 생각만 하다가, ‘기왕 손을 댄 김에 그간 소홀했던 한국불교사, 나아가 만해를 다시 만나보자’는 심정으로 설익은 공부를 무릅쓰고 《조선불교유신론》의 새번역에 착수했습니다.
2] 저의 공부와 만해 사상의 의미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일본 근현대 불교사상사 특히 일본불교계의 조선 유입과 그에 대응한 조선불교계/조선총독부의 동향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조선불교유신론》의 번역을 위해 기존 연구사를 검토하다보니, 만해는 승려인 동시에 독립운동가로서의 이미지가 강한 나머지, 그와 일본의 관계는 오로지 ‘항일’로만 일관된 것처럼 서사구조가 고착된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만해를 둘러싼 시대적 상황, 사상적 영향은 물론, 《조선불교유신론》의 저술 배경과도 직결되는 일본 불교계와의 관계는 결코 ‘항일’이라는 키워드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만해는 1908년 4월 금강산 유점사에서 공부하다 마침 일본 불교의 종파인 조동종(曹洞宗)의 불교사절이 금강산에 방문한 것을 계기로 일본에 건너가게 됩니다. 이때의 사정은 만해의 회고인 '나는 왜 승(僧)이 되었나'에 나타나 있는데, 만해가 일본행에서 관심을 가졌던 것은 문명의 중심처로서의 일본의 현실이었습니다. 일본에 건너간 그는 조동종의 간부 승려의 후원을 받아 조동종대학(曹洞宗大?, 훗날의 고마자와대학[駒澤大?])에 입학했고, 불교와 서양철학 등을 배우며 일본의 각처를 순방하고, 조선인 일본유학생과도 교류했습니다. 만해가 일본에 건너간 시기, 일본 불교계에서는 기존 전통불교 종단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한편 불교계의 각종 현안에서 근대화의 주장이 풍미하고 있었으니, 이 시기 그가 일본에서 보고 느낀 것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아마도 불교의 대중화일 것입니다. 불교대학, 유치원, 포교당, 복지시설, 출판사 등 불교의 대중화를 위한 다양한 시설을 보면서 만해는 조선의 열악한 불교 현실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따라서 그가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 후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하면서 불교근대화의 모델로 일본불교를 상정했으리라는 추정은 무리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고려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당시 일본불교계의 중심교단이 시행했던 근대화 조치 가운데 내재된 구조적 모순이 엄존하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일본 불교의 근대화를 전향적으로 평가하거나, 정토진종과 같은 중심교단 내에서 자행되던 부락사원에 대한 차별 구조적 행태나 재정적 타락상 등 빈번한 추문사건 등의 사회문제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해의 눈에 비친 일본 불교가 근대화의 모델이었다면, 근대화의 이면에서 사회문제로 잔존했던 일본 불교계의 모순적 상황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의 시야를 벗어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상의 문제들을 고려해 볼 때, 만해와 그의 《조선불교유신론》은 제 연구 주제의 일부라 할 근현대 일본불교가 조선불교에 끼친 긍정적 혹은 부정적 영향을 설명하기 위한 사례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3. 《조선불교유신론》을 읽다보면 조선불교를 개혁하고자 한 만해의 마음이 매우 절박해 보입니다. 序에서는 당시 상황에 대한 만해의 절망적 인식도 엿보입니다. 번역하시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구절이나 주장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학술의 유신을 외치는 이가 있고, 정치의 유신을 외치는 이가 있고, 종교의 유신을 외치는 이가 있고, 그 밖에도 유신, 유신 외치는 소리가 온 세상에 가득해 이미 유신을 했거나 지금 유신을 하고 있거나 앞으로 유신을 하려는 이들이 셀 수 없이 잇따르고 있는데... 조선 불교만은 고요히 아무 소리가 없으니, 모를 일이다. 이것은 과연 무슨 징조일까. 조선 불교는 정말 유신할 것이 없어서인가, 아니면 유신할 만한 것이 못 되는 것인가.” ('서론(序論)' 중에서)
“마음이 육체의 지배를 받는 노예는 물질의 노예요 학리(學理)의 노예는 정신적 노예니, 물질의 노예는 일시적 노예지만 정신적 노예는 영원한 노예다. 사람이 무슨 마음으로 영원한 노예가 되기를 즐거워하겠는가. 배우는 사람은 책을 대할 때 글의 깊고 얕음(深淺)과 아름답고 추함(美惡)을 논하지 않고, 마땅히 내 지혜로 하나하나 검토해, 내 마음에 맞지 않으면 그것이 위대한 성인이나 큰 철인(哲人)의 이론이라 해도 헌신짝처럼 버려야 하고, 내 마음에 맞으면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이나 매우 보잘 것 없는 사람의 말이라도 진기한 꽃을 보듯 감상하며, 자주 달리 연구하여 진리에 합치하도록 힘써, 만일 그것이 진리에 합치하면 철칙(鐵則)을 만들어 천고(千古)의 진리라도 뒤집어 자립하며, 일세(一世)를 거슬러도 마음에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상의 자유는 사람의 생명이며 학문의 중요한 기틀이다.“ ('승려의 교육을 논함(論僧侶之敎育)' 중에서)
만해를 ‘신격화’ 하거나 ‘항일투사’의 이미지를 덧씌우지 않고, 《조선불교유신론》 내용을 오늘날의 학문적 연구방법론으로 분석해 그 정당한 평가를 정립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작업입니다. 만해가 외친 ‘조선불교유신’이 19세기 서구 유럽사상을 수용한 메이지 사상계의 ‘문명론’, 그 사상의 영향을 받은 량치차오의 《음빙실문집》, 그리고 일본불교계의 근대화 추진노선 등을 수용하는 가운데 드러난 시대적 한계 역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입니다.
그러나 만해의 문제의식 가운데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하는 대목이 적지 않습니다. 또 100여 년 전 만해가 바라보았던 조선불교계의 현실과 오늘날 한국불교계의 현실이 묘하게 겹치는 부분도 여러 대목 눈에 띕니다. 일일이 거론할 수는 없지만, 우선 위에서 예로 든 대목만 하더라도 만해가 단순한 승려가 아니라 시대의 변화를 뛰어넘어, 또 불교라는 울타리를 뛰어넘어, 사상가로서 충분히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 인물임을 확인할 수 있는 구절이라 생각합니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20375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 since 2010:티스토리]
만해 한용운
충남 홍성출생. 3.1운동 독립선언 불교계대표로 참가한 후 끝까지 지조를 지킨 최고의 애국지사이며, 시인이었던 만해는 도산 안창호가 1973년 도산공원으로 이장되면서 현재 망우리공원의 유일한 최고훈격 대한민국장 수여자이다.묘비에 적힌 "부인유씨재우"는 유씨 부인이 만해의 오른쪽에 묻혀 있다는 의미인데 여기서 "오른쪽"은 바라보는 입장에서가 아니라 고인이 머리를 북으로하고 누운 상태에서 오른쪽을 말한다. 만해는 불교의 진흥을 위해 절은 산에서 내려와야 하고 우리민족은 장래에는 1억의 인구를 가져야 한다며 대처승을 주장하고 스스로 실천했다. 1944년 지병인 신경통으로 와병하다 안타깝게도 나라의 독립을 보지못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시신의 미아리의 화장장에서 불교식으로 화장된후 이곳 망우리에 안장 되었다. "님은 갔지마는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엿습니다. 제곡조를 못이기는 사라의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사고돕니다. [님의침묵중에서]
만해 한용운 (1879~1994) 시인 애국지사 묘소 등록문화재 제519호
한용운은 (1879. 8.29 ~1944.6.29.)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승려, 시인이다. 3.1운동 독립선언을 주도하였던 민족대표33인의 한사람으로 옥중에서 <조선독립이유서>를 지어 나라의 독립과 자유를 주장하였고.<불교유신론>을 발간 함으로써 불교계의 개혁을 주장하였고. <불교유신론>을 발간함으로써 불교계의 개혁을 주장하여 일제의 조선불교 침탈을 저항하였으며 ."님" "당신"등의 상징을 통해 민족정신과 일제에대한 저항의식을 표현한 서정시 90여편을 묶은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 하였다.
한국 근대 최대의 전인적 규모의 사상가, 예술가, 실천가 였던 선생이 부인과 함께 안장된 이 곳은 선생의 애국정신을 기리는 역사적. 교육적 가치가 커 2012년 등록문화재로 등록되었다.
만해 한용운 (1879~1994) 시인 애국지사 묘소 등록문화재 제519호
한용운은 (1879. 8.29 ~1944.6.29.)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승려, 시인이다. 3.1운동 독립선언을 주도하였던 민족대표33인의 한사람으로 옥중에서 <조선독립이유서>를 지어 나라의 독립과 자유를 주장하였고.<불교유신론>을 발간 함으로써 불교계의 개혁을 주장하였고. <불교유신론>을 발간함으로써 불교계의 개혁을 주장하여 일제의 조선불교 침탈을 저항하였으며 ."님" "당신"등의 상징을 통해 민족정신과 일제에대한 저항의식을 표현한 서정시 90여편을 묶은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 하였다.
한국 근대 최대의 전인적 규모의 사상가, 예술가, 실천가 였던 선생이 부인과 함께 안장된 이 곳은 선생의 애국정신을 기리는 역사적. 교육적 가치가 커 2012년 등록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충남 홍성출생. 3.1운동 독립선언 불교계대표로 참가한 후 끝까지 지조를 지킨 최고의 애국지사이며, 시인이었던 만해는 도산 안창호가 1973년 도산공원으로 이장되면서 현재 망우리공원의 유일한 최고훈격 대한민국장 수여자이다.묘비에 적힌 "부인유씨재우"는 유씨 부인이 만해의 오른쪽에 묻혀 있다는 의미인데 여기서 "오른쪽"은 바라보는 입장에서가 아니라 고인이 머리를 북으로하고 누운 상태에서 오른쪽을 말한다. 만해는 불교의 진흥을 위해 절은 산에서 내려와야 하고 우리민족은 장래에는 1억의 인구를 가져야 한다며 대처승을 주장하고 스스로 실천했다. 1944년 지병인 신경통으로 와병하다 안타깝게도 나라의 독립을 보지못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시신의 미아리의 화장장에서 불교식으로 화장된후 이곳 망우리에 안장 되었다. "님은 갔지마는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엿습니다. 제곡조를 못이기는 사라의노래는 님의 침묵르 휩사고돕니다. [님의침묵중에서]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3386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 since 2010:티스토리]
만해 한용운은 누구인가?
만해 한용운 선생 (1879~1944)은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나 27세에 설악산 백담사에서 승려가 되었다. 불교계 의 개혁과 재중 화를 위해 조선불교 유신론 (1913)과 불교 대전(1914)을 차례로 저술하였으며, 불교잡지유심을 창간하여 언론 활동을 통한 불교 대중화에 앞장섰다. 만해 선생은 민족대표 33인으로 3.1 운동을 주도하였다. 특히 옥중에서 쓴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에서 인간의 기본정신인 자유. 평등. 평화사상에 입각한 독립은 당연한 민족의 자존심이라며 끝까지 변절하지 않은 민족적 지도자로 평가받는다. 또한 1926년에 발표한 시집 님의 침묵은 일제 치하의 암울한 시기에 우리들의 염원을 "님"이라는 동양적 정신과 한글의 운율로 표현하여 시문학사, 사상사에 있어 불후의 명작으로 꼽힌다. 선생은 일본의 회유와 압박을 끝까지 거부하고 일관되게 독립운동을 하였다. 55세 때부터 조선총독부를 마주 보기 싫어 북향으로 지은 심우장에서 해방 1년 전인 1944년 6월 29일 영양실조로 생을 마감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인 대한민국장 이 추서 되었다.
남한산성과 만해
남한산성은 위대한 호국정신의 산실이자 민족의 치열한 역사가 숨 쉬는 곳이다. 성곽을 축조하고 산성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조선 인조 임금 때부터였다. 당시 산성 축조에 동원된 인력들은 8도의 승군들이었다. 따라서 성내 곳곳에는 사찰들이 들어섰으며 국청사, 개원사, 천주사 등 그 이름에서도 풍기듯 '나라를 지키고 국가를 안위하는' 절들이었다. 1636년 병자호란 시에는 조선의 백성으로서 끝까지 적과 싸울 것을 주장하다 순절한 삼학사 (홍익환, 윤집, 오달제)의 영혼을 모신 조선 선비의 영원한 고향땅 남한산성이 되었다. 이러한 승군들의 호국정신과 병자호란 당시 끝까지 지조와 절개를 지켰던 삼학사의 애국 충정이 깃든 남한산성에 자랑이자 큰 스승인 만해 한용운 선생의 기념관을 설립했다.
만해 한용운의 육신의 고향은 충남 홍성, 정신의 고향은 내설악 백담사이며 마지막 삶의 현장은 서울 성북동 심우장으로, 이곳들은 만해 한용운과 인연 깊은 장소들이다. 현재 남한산성 만해 기념관은 1981년 성북동 심우장에서부터 시작되어 1990년 남한산성으로 이전하여 만해정신의 중심 도량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남한산성은 조선의 호국 승군들에 의해 축성된 호국정신의 상징적 장소이다. 이곳에 만해기념관을 설립함으로써 호국정신과 민족자존의 정신이 함께 빛나는 곳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뜻을 세우다
만해 한용운은 조선 왕조 말 국운이 기울어가던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선 군에서 한응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유천이었다. 충훈부 도사였던 선친 한응준은 어린 유천에게 역사상 빛나는 의인들과 세상 형편, 국내외 정세를 소상히 설명해 주었다. 이와 같은 선친으로부터의 감화는 어린 유천으로 하여금 시대정신과 역사의식에 눈떠가게 하였다.
불교인으로 지향
만해 한용운은 근대사 격량의 소용돌이 앞에서 무력한 자신을 발견하고 27세에 설악산 백담사에서 승려가 되었다. 스승 김연 곡 스님의 도움으로 양게 초의 영환 지략을 읽고 세계정세와 서양철학에 관심을 갖고 세계일주 여행을 계획하여 실천에 옮긴다. 그 후 일본의 신문물도 견학하였다. 1910년 인간 정신의 유신을 위한 조선불교 유신론을 탈고한다. 또한 만주 일대의 독립군을 방문, 격려하는가 하면 임제종 운동을 통하여 한일 불교운동 동맹조약을 분쇄하며 1912년한문 독본, 1913년 조선불교 유신론 1914년 불교 대전 1917년정선 강의 채근담을 차례로 내놓으면서 민족계몽운동에 앞장을 섰다.
3.1 운동의 선봉에 서서
1919년 만해 한용운은 3.1 운동의 선봉에 서서 민족을 대표하여 연설하고, 만세삼창을 선창하였다. 또한 자유.평등.평화의 대강령을 밝힌 장문의 독립선언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를 옥중집필 했다. 옥중에서는 옥중투쟁 3대원칙 (1.변호사를 대지말것, 2.사식을 취하지 말것, 3.보석을 요구치 말 것)을 정하여 몸소 실천에 옮긴다. 독립 선언 후 만해는 이제 내 나라에 죽으니 한이 없다 는 생사를 초월한 정신으로 자신이 추가한 공약삼장을 그대로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굳세게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3.1운동 100주년 기념- 독립선언서
위 독립선언서는 게이오대학에서 재학 중이던 유학생 염상섭이 1919년 3월 19일 일본 오사카에서 재대판 한국인 노동자대회에 개최 당시 발표할 목적으로 등사 복제한 것이다
만해 한용운은 설악산 오세암에서 중국 동안 상찰 선서 (?~961)의의 선화 게송인 십현담에 주. 해를 달았다. 만해는 선의 이치에 이해가 깊었다. 그는 선에서 사회를 움직이는 원동력ㅇ; 솟아 나와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는 1926년 사랑의 증도가 님의 침묵에서 자유. 평등. 평화의 사상을 침묵 속에 담고 그 침묵의 노래를 상징적 님을 향하여 투영했다.
심우장의 정절
만해 한용운은 말년(1933년, 55세)에 이르러 비로소 성북동 막바지에 집한칸을 갖게 되었다. 조선총독부와 마주 보기 싫다 하여 남향의 집을 북향으로 고쳐지은 것으로 유명한 심우장이다. 심우는 만해 한용운 니 손수 지은 택호로 소를 찾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는 소를 마음에 비유하여 "마음자리 바로 찾아 무상 대도를 깨치기 위한 집"이라는 뜻이다. 심우장에서 만해 한용운은 비밀 결사인 만당의 영수로 추대되고 단채 신채호 선생의 애국지사 묘비명을 손수 썼으며,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한 독립운동의 선구자 일송 김동삼 선생의 시신으 모셔다 장레를 치르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린 곳 이기도 하다. 일제의 황민화 정책, 창 씨 개명운동. 조선인 학병 출정 등을 반대하던 북향집 심우장은 만해 한용운이 손수 심은 향나무 한 그루와 함께 우리의 역사를 묵묵히 말해주고 있다.
만해가 떠난 그 후
1944년 6월 29일 민족운동가, 불교사상가, 근대 시인으로 집약되는 만해 한용운 선사는 66세를 일기로 심우장에서 입적했다. 학병. 징병을 거부하고 일제의 배급을 거부하며 영양실조가 되었던 선사의 육신은 조국 광보 글 한해 앞두고 영원히 잠들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영원히 남아 역사의 등불이 되고 있다. 그는 민족의 갈망을 절심 하게 노래한 시인이었고 또 구국 일념으로 살아온 독립지사였고, 가혹한 고난과 탄압 속에서도 의연함을 보이며 꺾임 없는 지조로 불굴의 투지로써 겨레를 이끌었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5289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 since 2010:티스토리]
만해 한용운 연혁
1979 8.29 충남 홍성군 결성면에서 출생
1906 인제 백담사에서 출가
1919 3.1운동시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참여하여 독립선언서를 발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1921 속초신흥사 승려로 원적을 둠
1926 님의침묵 회동서관에 발행
1933 성북구 심우장을 지어 정착, 민족지사와의 교류 밎 문학활동
1944 6.29 심우장에 입적, 망우리 묘소에 봉안
만해 한용운 심우장
등록번호 : 사적 550호 / 시대 1933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로 29길 24
이 집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중 한분이자 <님의침묵> 의 시인 만해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이 1933년부터 1944년까지 살았던 곳이다. 동쪽으로 난 대문으로 들어가면 북쪽으로 향한 기와집인 심우장과 관리동 그리고 만해가 직접 심었다는 향나무 등이 있다. 심우장은 전체 규모가 5칸으로,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온돌방, 오른쪽에 부엌이 있다. 부엌 뒤쪽에는 식사 준비를 하는 찬 마루방이 있다.
한용운의 서재였던 온동방에는 尋牛莊 (심우장) 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 이름은 깨우침을 찿아 수행하는 과정을 소를 찿는 일에 비유한 불교 설화에서 따온 것이다. 심우장은이 있는 성북동 일대는 1930년대 서울이 확장 되면서 주거지로 개발 되었는데, 이 집은 당시의 여느 집과 다르게 검소하고 소박한 외향을 보여준다. 한용운은 조서불교를 개혁하려고 했던 승려이자 조국의 독립에 힘쓴 독립운동가이며 근대 문학에 큰 업적을 남긴 시인 이었다.
한용운이 만년을 보낸 심우장은 그의 이 같은 면모를 살필 수 있는 역사 현장으로 1985년 7월5일 서울시 지정문화재 기념물 7호로, 2019년 4월8일 사적 550호로 승격하여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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