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9 안중근 의사 출생 / 1912 시인 노천명 출생 / 1919 강우규의사 조선총독에 포탄 / 1945 연합군최고 사령부, 미국. 소련 양군의 한반도 분할 정책 발표 / 1975 전국 중앙 학도 호국단 창설 / 1989 제30회 국제 기능 올림픽 페막. 한국 8연패 / 2000 비전향장기수 63명 북한으로 송환 / 2010 태풍 콘파스, 수도권. 강원을 관통하며 한반도를 강타.
강우규 / 신상정보
출생 1855년 4월 20일 / 조선 평안도 덕천 / 사망 1920년 11월 29일(65세) / 일제 강점기 경성부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교수형) 집행됨. / 거주지 대한제국 함경남도 홍원 / 성별 남성 / 국적 대한제국 / 본관 금천(衿川) / 직업 독립운동가 겸 한의사 출신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 종교 개신교(장로회) / 가족 자녀는 2남 3녀 (그 중 장남 강중건, 차남 강중근)
활동 정보 / 관련 활동 독립운동
강우규(姜宇奎, 1855년 7월 14일~ 1920년 11월 29일)는 일제강점기의 한의사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자(字)는 찬구(燦九), 호(號)는 왈우(曰愚)이다. 1919년 조선총독부 총독으로 부임해 온 사이토 마코토를 저격하였으나 폭탄이 다른 데로 떨어져 거사에 실패하였다.
생애
교육 계몽 활동
그는 조선 평안도 덕천에서 출생했다. 지난날 한때 경상도 진주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고 경상도 밀양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다. 그는 평안도 덕천 귀향 후 어려서부터 한의학을 공부하였다. 1884년부터는 함경도 홍원으로 이주하여 한의사로 인술을 베푸는 한편, 아이들에게는 성리학 학문을 가르쳤다. 전언에 의하면 모종의 애국운동에 관하여 신변이 위태롭게 되자 피신 겸 이곳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홍원으로 이주한 강우규는 홍원에서 온 후 농사를 하지 않고 읍내에 자리를 잡고 주로 상업에 종사하였던 것 같다. 특히 그는 홍원으로 솔가할 당시 상당액의 거금을 갔고 왔다고 알려지고 있다. 강우규는 홍원의 중심가인 남문거리에서 아들 중건을 앞세워 잡화상을 운영하였다. 이 상점에서 주로 물감, 담뱃대, 면사, 포목 등을 팔았다고 한다. 아울러 그는 장사꾼들에게 장사 밑천도 되어주고 돈을 저리로 빌려주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국운이 기울어짐을 보고 만주 북간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가 세력들과 연계하여 조선의 독립을 의논했고 4년 후 라오허현으로 이사하여 독립운동을 모의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조선이 강점되자 강우규는 이에 크게 분개하였다. 당시 그는 50이 넘은 중노인이었다.
강우규는 일제에 의하여 조국이 강점당하자 국권으로 회복하기 위해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1910년 가을 강우규는 망명을 결심하고 우선 큰 아들 중건부부와 자녀 3명을 노령으로 이주시켰다.
그는 이듬해인 1911년 봄에 함경남도 홍원군 용원면을 떠나 북간도 두도구로 이거 하였다. 그곳에서 한약방을 경영하였다.
1915년 요동의 라오허현으로 옮겨가 거주하면서 블라디보스토크를 왕래하면서 독립운동을 꾀했으며, 요하 주변의 농토를 개간하여 한인촌인 신흥촌(新興村)을 건설했다. 이 마을은 강우규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이룩된 것이며, 후에 노령과 북만주를 무대로 활동하는 독립군의 주요 근거지가 되었다. 1917년 지린성 동화 현에 광동중학교를 세워 동포 교육에 전력하며 독립정신 고취에 힘썼다.
국내 잠입
그 뒤 광동중학교와 신흥촌을 다른 한인 교포에게 넘긴 뒤 그는 국내에 잠입한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가입해 있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노인단 지린성 지부장이 되어 조선 총독을 암살하기로 결심하였다. 그 해 러시아인으로부터 수류탄을 구입하고, 허형과 함께 원산부를 거쳐서 경성부로 잠입했다.
1919년 9월 2일, 내외 정세와 총독의 동정을 살피던 중, 하세가와 요시미치의 후임으로 사이토 마코토가 임명되어 부임한다는 것을 알고, 사이토의 내한 당일 현재의 서울역인 남대문역에서 조선 총독으로 신임된 사이토 마코토를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터졌으나 빗나갔고, 빗나간 폭탄으로 인해 수명의 구경꾼들이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그가 던진 폭탄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여 신임 총독 사이토를 환영 나온 일제 관헌 및 그 추종자들 37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현장에 있던 올리버 에비슨 박사가 윤치호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사이토 마코토 제독에게 어떤 일행이 폭탄을 던졌는데, 폭탄이 빗나가 근처에 있던 구경꾼들이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에비슨에 의하면 총독 일행은 폭탄에 피폭되지 않고, 구경꾼들이 부상당했다 한다.
남대문역 광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는 현장에서는 몸을 피했으며, 거사 뒤 현장에서 빠져나와 오태영(吳泰泳)의 소개로 장익규(張翊奎), 임승화(林昇華) 등의 집에 숨어다니다가, 도피 중 독립운동 탄압, 검거를 전문으로 하던 총독부 고등계 형사인 친일파 김태석(金泰錫) 등에게 체포되어 그해 9월 17일 수감되었다. 이후 총독부 고등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최종 판결에서, 총독 암살미수혐의와 민간인 사상 혐의로 사형 구형,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하였다. 그는 체포되어 재판받고, 교수형 당하기까지 법정에서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고 당당했다고 알려져 있다.
연보
1859년 6월 2일 평남 덕천에서 출생
1883년 함경남도 홍원으로 이주해 한약방을 경영하며 재산을 모아 교육계몽운동을 펼침
1911년 북간도로 망명
1914년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 당시 애국지사 계봉우와 교류
1915년 지린성 라오허현으로 이주, 한인 동포들과 마을을 이루고 ‘신흥동’이라 명명
1919년 3.1운동 소식을 듣고 신흥동에서 독립선포식을 거행,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이승교, 김치보, 박은식 등이 결성한 대한민국노인동맹단에 가입, 라오허현 지부장으로 활동.
영국제 폭탄을 가지고 귀국하여 서울에 잠입.
9월 2일 남대문역에서 사이토 마코토의 마차에 폭탄을 던졌으나 암살에 실패, 이후 체포됨
1920년 11월 29일 경성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 집행됨.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
가족 관계
아들 : 강중근(~2015)
손녀 : 강영재(~1985)
사후
유해는 처음에는 현 은평구 신사동 소재 공동묘지에 묻혔는데 54년 수유리로 이장됐다가 67년 국립묘지(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1962년 3월 건국공로훈장 중장(뒤에 대한민국장으로 개정)이 추서되었다.
강우규 사후, 당시 경성(서울)에 남아있던 유가족은 장남 강중근과 손녀 강영재가 있었으나 1985년 12월 강영재가 별세한 후 후손은 절손되었다.
독립기념관에 어록비가 제작되면서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 당하기 직전에 유언으로 남긴 한시가 적혀 있다.
“ 단두대상에 홀로서니 춘풍이 감도는구나 斷頭臺上 猶在春風 (단두대상 유재춘풍)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有身無國 豈無感想 (유신무국 기무감상) ”
평가
지바 경기도 경찰부장은 "미운 마음은 없습니다. 입장을 바꿔보면 강우규는 우국지사였습니다."라고 평가했다.
강우규의 의거는 3.1운동 이후 최초의 의열투쟁으로서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에게 큰 경고가 되었음은 물론 국내외의 한인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그의 의거는 물론 재판과정과 수형생활, 처형과정에서도 당당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재판과정 자체가 운동의 연속선상에서 한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Sources Wikipedia]
책소개
일제총독 재등실에게 폭탄을 던진 65세 노혁명가 강우규!
1919년 9월 2일 이후 그는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설이 되었다!
내가 평생에 세상에 대하여 너무 한 일이 없음이 오히려 부끄럽다. 내가 이때까지 우리민족을 위하여 자나깨나 잊지 못하는 것은 우리나라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돌아다니면서 아무리 애를 쓴대야 내가 죽느니만 같지 못할 것 같다. 즉 내가 이번에 죽으면 내가 살아서 돌아다니면서 가르치는 것보다 나 죽는 것이 조선청년의 가슴에 적게나마 무슨 이상한 느낌을 줄 것 같으면 그 느낌이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이다. 이제 내가 이만큼 애쓰다가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 조선청년의 가슴에 인상만 배긴다면 그만이다. 내가 죽을지라도 나의 가슴에 한 되는 것은 나 죽은 후에 조선청년들의 교육이다. 지금은 조선사람 가운데 매우 사람 같은 사람이 많아서 청년의 교육을 소홀히 하지 아니 하겠지만은 그저 그래도 눈을 감고 앉았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고 하는 십삼도에 널려 있는 조선청년들이 보고 싶다. 아! 보고 싶다. 일러 주고 싶다.
---〈동아일보〉 1920년 5월 28일자, 강우규 의사의 옥중 유언
…원래 의술을 잘 아시니까 일 년에도 수천 원을 버시지만은 그 돈을 한 푼도 내게 주시지 아니하고 전부 학교에 기부하시면서, “너는 너대로 살아라. 나는 나 할 일이 있으니까” 하십니다. …사형선고가 되니까 내가 낙심할까 보아 일부러 웃으시며, “생사를 두려워하는 것은 하등배이니라. 너, 조금도 애비 죽는다고 어찌 알지 말고, 아무쪼록 잘 살아가거라” 하시면서 울지도 못하게 하시옵니다. “내가 죽더라도 육체의 애비가 죽는 것이니까 영혼의 애비는 원히 살아있을 것이다” 하시면서 아무렇지도 않으십디다.
---〈동아일보〉 1920년 5월 4일자에 실린 강의사 아들 강중건의 말
목차
제1장 조선 후기와 일제 점령기 역사적 상황
1. 망국 군주 고종의 부족한 리더십
2. 일제의 무단 통치
·재등실 총독 취임사
·재등실의 ‘조선 민족운동에 대한 대책’(1920)
3. 일제의 문화 통치
·조선 민족운동에 대한 대책
·조선교육조서
4. 역대 조선 총독과 그들의 만행
제2장 우리 민족의 항일독립투쟁
1. 3?1운동
2. 독립운동의 주인공이 된 모든 민중들
3. 3?1운동 이후 개인이 일으킨 최초의 항일의거
제3장 강우규의 생애와 독립사상 형성
1. 강우규의 젊은 시절
2. 우리 의학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쇠퇴
·조선시대 의학의 발전
·조선 후기 한의학 - 개항과 서양의학의 쇄도
·조선 후기 의사규칙과 개혁 시도
·국운쇠퇴와 한의학의 수난
·일제 강점기 한의학 - 일제의 식민지 의료정책
·의생규칙과 신분 격하
·학술지 발간과 의학강습
·한의학에 일기 시작한 새 기운
3. 민족운동가로의 변화?교육 및 선교 사업 시작
·이동휘와의 만남
·교육 및 선교 사업 시작
4. 강우규, 민족운동에 뛰어들다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강우규, 노인동맹단에 참여
·노인동맹단의 대표적인 활동
제4장 백발노인의 독립운동
1. 강우규 의거의 서막
·신임 총독을 맞이하는 불행했던 경성의 풍경
·강우규 의거와 사상자 명단
·어수선했던 1919년의 조선
·남대문 역에 퍼진 폭탄의 울림:
노인이 조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지다 .
2. 거사 준비 과정과 탄생
3. 의거 후 재판 과정
·악덕 친일 경찰 김태석
·프랑스의 나치 협력자 숙청
(임기상 《숨어 있는 한국 현대사》 중에서, 2014 )
·제1회 공판
·제2회 공판
4. 애국정신이 담긴 상고취지서 요약
·의열투쟁의 배경: 재등실 총독 폭탄 투척 이유
·최자남에 대한 변론
·상고이유와 1심과 2심 판결에 대한 비판
·동양 삼국의 ‘동양평화론’을 거듭 강조하다
5. 사형 선고 후 강우규의 태도와 순국
제5장 강우규 의거가 남긴 의의
참고문헌
중요자료 1〈매일신보〉에 실린 강우규 의사 관련기사
중요자료 2 상고 취지서
연보 - 강우규가 걸어온 인생
저자후기
책 속으로
--- p.15
강우규의 손녀 강영재의 증언에 따르면, 이동휘가 국권회복과 기독교 선교를 위해 고향인 함경도를 방문했을 때 두 사람이 처음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동네 사람들은 고향에 방문한 이동휘를 존경하는 마음에 극진히 대접했고, 그러던 중에 강우규의 집에도 방문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친분을 쌓아 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 시절 이동휘는 종교와 교육 활동에 이미 뼈를 태운 상태였고, 강우규는 이러한 사회 활동을 통해 민족혼을 되살리려는 열정을 가진 이동휘에게 매혹되어 새로운 인생의 노선을 설립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던 것 같다.
--- p.76
당시 1920년 5월 8일 〈동아일보〉에 ‘강우규의 상고문은 자기 손으로 직접 쓴 비분강개한 긴 글’이란 기사가 보도되었다. 강우규는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상고문을 작성했는데, 여기에는 재등실 총독을 처단한 배경을 비롯해 최자남에 대한 변호, 상고 이유와 1심과 2심 재판에 대한 판결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동양평화를 위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작성하였다.
그 누구의 손과 두뇌를 빌리지 않고 자기 자신이 직접 자신의 입장을 변론한 만큼, 강우규의 애국심과 독립을 염원하는 우국충절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상고취지서에서 자신이 우리 민족 2,000만 동포를 대신해 국권을 회복하고 독립을 이루기 위해 거사를 일으켰다는 거사 목적을 밝히고 있다.
--- p.130
당시 사형을 선고받은 후 강우규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또한 그는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 모든 사람들이 예상했듯이 그는 재판정에서 심문을 받을 때도, 사형이 선고된 후에도 조국을 사랑하는 독립에 대한 염원에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꺾일 줄 모르는 강인한 기개로 당당하게 그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재판정에서 고함을 지르며 호통을 쳤다. 또한 아들 강중건이 변호사를 선임할 것을 권했지만 확고하게 거절하고 나섰다.
손녀 강영재의 증언에 따르면, 사형 구형에 대한 판결이 확정된 후 강우규는 재판장에게 무섭게 호통을 치며 노여운 마음을 표했다고 한다. 재판정에 있던 의자를 검사에게 던지며 “고얀 놈들”이라 소리를 질렀다. 또 재판소 구치소로 가는 길에서도 재판정을 하나 둘씩 빠져 나오고 있는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독립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 p.136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 공원에서 개최된 일본의 전승축하 기념식에 참석한 일본군 수뇌부를 폭살한 청년 의사 윤봉길은 모두 기억하면서 정작 윤봉길 의거가 탄생하는 데 초석을 다져 준 강우규는 뇌리에서 잊혀져 갔던 사실이 안타까운 우리 역사였다. 이렇게 강우규 의거가 많은 젊은 의사들의 의거가 탄생하도록 자극제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너무나 훌륭한 독립운동가로 기억되는 유관순,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이들이 10대, 20대, 30대의 나이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던 나이에 비하면 강우규의 의거는 당시 65세로 노인이 이룬 최초의 의거였던 사실에 민족사적 의의가 있으며 수많은 조선 청년들의 모범이 되는 3?1운동 이후 최초의 의열투쟁이었던 셈이다.
출판사 리뷰
한의사, 교육자, 독립운동가. 혁명가. 평안남도 덕천군의 빈한한 농가에서 출생.
어린 시절부터 한학과 한의학을 습득하여 한의사로 활동하였으며, 의술이 뛰어나 30대 초반에 이미 거금을 모았고 1885년경 함경남도 흥원으로 이주, 상업에 종사하다가 1909년경 단천 출신의 유명한 독립운동가 이동휘를 만나 민족의식에 눈을 떴다. 1917년 만주 길림성 요하현에 신흥동을 개척하고 광동(光東)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19년 3.1운동 소식을 듣고 신흥동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4월 블라디보스톡으로 가 한인독립운동단체 [노인동맹단]에 가입하고, 러시아인에게서 구입한 폭탄을 지닌 채 원산을 거쳐 서울로 잠입, 1919년 9월 2일 서울역에서 일제 신임총독 재등실(齋藤實)에게 폭탄을 던지는 의거를 완수했다. 불행히도 재등실은 폭살시키지 못했으나, 37명의 일제주구들이 죽거나 다쳤으며, 3.1운동 이후 처음으로 일제의 만행과 강압통치에 대해 민족의 강력한 의열항거로 맞섰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 거사 당시 강우규 의사는 65세 고령의 노인이었다.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하였으며, 1962년 3월 정부는 강우규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책소개
목차
1. 남대문역에 울린 폭탄의 굉음
신임 총독 부임을 앞둔 서울
천지를 뒤흔든 폭탄 소리
콜레라에 폭풍우 피해까지
2. 사건의 범인은 백발의 투사
폭탄사건의 범인은 백발의 강우규
'공범' 인의 신상명세와 행적
3. 재판정에서도 꺾이지 않는 기개
변호인 없이 진행된 재판
당당한 기개로 자신의 뜻을 밝히다
4. 공범의 재판이 시작되다
최자남·허형·오태영 심문
공범의 심문이 끝나고
5. 사형 선고를 받다
심 재판에서 사형 선고
최자남 변호를 위해 공소 제기
6. 우국충절로 가득한 상고취지서
직접 준비한 '상고취지서'
낙심하는 아들을 위로하는 강우규
고등법원에서 사형 판결 최종 확정
7. 친일경찰 김태석의 반민특위 재판
김태석의 친일 행적
심판대에서 김태석의 거짓 증언
8. 의거를 도운 동지들의 체포
한흥근·안돈후·조병철 재판
9. 생애와 독립사상
교육 및 선교사업에 헌신
노인동맹단 요하현 지부장 맡아
기독교 정신과 동양평화론
국립현충원에 영원히 잠들다
의열투쟁가 강우규의 삶과 자취
출판사 리뷰
항일투쟁은 조직적·집단적인 형태와 함께, 개인 차원의 '특공작전' 방식인 의열투쟁이 하나의 독립운동방략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의열투쟁은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점에서 약소(弱小)세력들의 대표적인 투쟁방략 가운데 하나였다.
강우규는 65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3·1만세운동 여파로 하세가와 총독이 물러나고 후임으로 해군대장 출신의 사이토가 부임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폭살키로 결심했다. 그리고 1919년 9월 2일 사이토가 부산을 거쳐 남대문역(현 서울역)에 도착하자 그를 향해 폭탄을 던져 30여 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강우규 의사의 사이토 총독 폭살의거는 우리 독립투쟁사에서 두 가지 독특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첫째, 1919년 3·1만세운동 이후 민족진영에서 독립투쟁의 한 방략으로 정립된 의열투쟁 노선을 실천한 점이다. 이것은 1908년 3월 23일 전명운, 장인환 두 의사가 미국 샌프란시스코 페리부두에서 친일미국인 스티븐스를 처단한 일과, 이듬해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중국 하얼빈 역두에서 한국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맥을 강우규 의사가 이었다고 할 수 있다.
3?1만세운동 과정에서 일본 군경에 저항한 무수한 항일투사들이 있었지만 식민통치의 최고책임자인 조선총독 제거를 목표로 거사를 준비한 사람은 드물었다. 강 의사는 의거 처음부터 목표를 조선총독으로 잡고 주도면밀한 준비를 통해 거사를 결행했다. 비록 총독을 척살하지는 못했지만 강 의사의 의거가 항일투쟁사와 동양사에 끼친 영향을 감안하면 소기의 성과는 충분히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한국 독립운동사상 최고령자의 폭탄투척의거라는 점이다. 의열투쟁에 나선 대부분의 의·열사는 20~30대 청장년층이었다. 반면 의거 당시 강 의사는 만 64세였다. 당시 평균수명이 50세도 채 안된 점을 감안하면 강 의사의 의거는 당시로선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강 의사가 의거 후 현장에서 체포되지 않은 이유 역시 '노인'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강 의사의 의거는 이후 여러 청년에게 영향을 미쳤다. 강 의사의 의거 후 민족진영의 청장년들이 의열투쟁 대열에 대거 동참하였는데, 약산 김원봉이 결성한 의열단과 상해임시정부에서 김구가 조직한 한인애국단 등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김익상, 김상옥, 나석주 의사는 의열단원이었으며, 이봉창, 윤봉길 의사는 한인애국단원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강 의사의 뒤를 이은 청년 의·열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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