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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연산군, 그는 누구인가
연산군만큼이나 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리는 사람도 드물다. 연산군의 쇄국정책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고 연산군을 비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왕권 강화와 외세에 저항한 자주적인 자세는 마땅히 본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연산군』은 연산군 뿐만 아니라 연산군이 조선을 움직인 시대 전반을 조명하려는 책이다.
연산군이 집권했던 시대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극렬한 갈등과 대립, 살육으로 얼룩져 있다. 전환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는 학자들에 따라 천양지차로 서술의 태도가 갈렸다. 조선 중기의 정치사를 꾸준히 천착해온 김범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원은 연산군에 관련된 1·2차 사료를 빠짐없이 검토한 뒤, 기존의 연산군 시대 이해에서 부족한 점을 지적하고 그 시대의 역사상을 최대한 현실적으로 그려내 객관적 의미망을 일궈냈다.
책의 중심 주제는 정치사이지만, 당시의 경제·사회·문화 등 여러 양상을 포괄하려 했고 미시적 주제(예컨대 연산군 개인의 성격이나 병력)들도 주의 깊게 살펴보면서 그것이 거시적 사안들과 관련된 측면을 검토했다. 주관적 평가나 추정보다는 구체적인 자료에 의거해 연산군이란 인물을 생생히 되살려내려 시도한 평전적 연구이다.
연산군만큼이나 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리는 사람도 드물다. 연산군의 쇄국정책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고 연산군을 비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왕권 강화와 외세에 저항한 자주적인 자세는 마땅히 본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연산군』은 연산군 뿐만 아니라 연산군이 조선을 움직인 시대 전반을 조명하려는 책이다.
연산군이 집권했던 시대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극렬한 갈등과 대립, 살육으로 얼룩져 있다. 전환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는 학자들에 따라 천양지차로 서술의 태도가 갈렸다. 조선 중기의 정치사를 꾸준히 천착해온 김범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원은 연산군에 관련된 1·2차 사료를 빠짐없이 검토한 뒤, 기존의 연산군 시대 이해에서 부족한 점을 지적하고 그 시대의 역사상을 최대한 현실적으로 그려내 객관적 의미망을 일궈냈다.
책의 중심 주제는 정치사이지만, 당시의 경제·사회·문화 등 여러 양상을 포괄하려 했고 미시적 주제(예컨대 연산군 개인의 성격이나 병력)들도 주의 깊게 살펴보면서 그것이 거시적 사안들과 관련된 측면을 검토했다. 주관적 평가나 추정보다는 구체적인 자료에 의거해 연산군이란 인물을 생생히 되살려내려 시도한 평전적 연구이다.
목차
머리말
연산군 계보
연표
책을 시작하며
전근대 신분제도와 왕정의 원리 | 이 책의 시각과 내용
제1장 성종대의 정치적 유산
1. 성종대의 정치 구조
삼사의 위상 제고와 정치적 정립 구도의 형성 | ‘훈구-사림’ 문제의 이해
2. 모후의 사사
폐비 윤씨의 가계 | 성종의 비빈들 | 입궁과 왕비 책봉 | 폐비 사건의 전말 1-폐비와 별거 | 폐비 사건의 전말 2-폐서인과 출궁 | 폐비 사건의 전말 3-사사 | 폐비 사건의 원인과 결과
제2장 갈등의 시작과 무오사화(연산군 1~4년)
1. 기초적 사항의 검토
『연산군일기』의 자료적 성격 | 문학과 영상의 형상화 | 세자 시절의 자질 | 문리의 불통
2. 즉위와 갈등의 시작
수륙재 논쟁과 유생의 처벌 | 외척의 임용과 포상 | 내시와 봉보부인에 대한 탄핵 | 폐모의 추숭 | 대신과 삼사의 대립 | 노사신과 삼사의 충돌 | 성종의 정치적 유산 | 국왕과 삼사의 갈등
3. 무오사화의 발발과 전개
사화의 시작 | 사화의 전개 1-김일손의 사초 | 사화의 전개 2-붕당의 단초 | 사화의 전개 3-「조의제문」의 발견과 해석 | 신문과 진술 | 삼사의 연루 | 연루자들의 처벌 | 사화의 분석
제3장 왕권의 일탈과 갑자사화(연산군 5~10년)
1. 왕권의 자의적 행사
삼사의 위축 | 사치의 증가 | 사냥에의 탐닉 | 응방의 확대 | 연회와 음행 | 접근의 차단
민가의 철거 | 발언의 통제
2. 정치적 지형의 재편
재개되는 삼사의 발언 | 국왕과 삼사의 충돌 | 대신들의 간언 | 대신과 삼사의 협력
3. 갑자사화의 폭발과 전개
고조되는 국왕의 불만 | 이세좌의 실수 | 사화의 발발-홍귀달 사건 | 폐모 사건의 보복 | 피화인의 분석 | 재산의 몰수 | 숙청의 일단락
제4장 폭정과 폐위(연산군 11~12년)
1. 일상화된 폭정
제압된 신하들 | 왕권의 절대화 | 경직되는 태도 | 제도의 변개 | 발언의 봉쇄 | 토목공사의 확대 | 민가 철거의 재개 | 금표의 확장 | 사냥에의 몰두 | 황음의 만연 | 추문의 확대 | 재정 지출의 급증 | 정무의 태만
2. 폭정의 종결
불안해하는 폭군 | 반정과 폐위, 그리고 사망
3. 개인적 사항들
비빈과 자녀들 | 부왕과 대비에 대한 증오 | 편집증적 심리와 행동
책을 마치며
주註
갑자사화 피화인 명단
참고문헌
연산군 계보
연표
책을 시작하며
전근대 신분제도와 왕정의 원리 | 이 책의 시각과 내용
제1장 성종대의 정치적 유산
1. 성종대의 정치 구조
삼사의 위상 제고와 정치적 정립 구도의 형성 | ‘훈구-사림’ 문제의 이해
2. 모후의 사사
폐비 윤씨의 가계 | 성종의 비빈들 | 입궁과 왕비 책봉 | 폐비 사건의 전말 1-폐비와 별거 | 폐비 사건의 전말 2-폐서인과 출궁 | 폐비 사건의 전말 3-사사 | 폐비 사건의 원인과 결과
제2장 갈등의 시작과 무오사화(연산군 1~4년)
1. 기초적 사항의 검토
『연산군일기』의 자료적 성격 | 문학과 영상의 형상화 | 세자 시절의 자질 | 문리의 불통
2. 즉위와 갈등의 시작
수륙재 논쟁과 유생의 처벌 | 외척의 임용과 포상 | 내시와 봉보부인에 대한 탄핵 | 폐모의 추숭 | 대신과 삼사의 대립 | 노사신과 삼사의 충돌 | 성종의 정치적 유산 | 국왕과 삼사의 갈등
3. 무오사화의 발발과 전개
사화의 시작 | 사화의 전개 1-김일손의 사초 | 사화의 전개 2-붕당의 단초 | 사화의 전개 3-「조의제문」의 발견과 해석 | 신문과 진술 | 삼사의 연루 | 연루자들의 처벌 | 사화의 분석
제3장 왕권의 일탈과 갑자사화(연산군 5~10년)
1. 왕권의 자의적 행사
삼사의 위축 | 사치의 증가 | 사냥에의 탐닉 | 응방의 확대 | 연회와 음행 | 접근의 차단
민가의 철거 | 발언의 통제
2. 정치적 지형의 재편
재개되는 삼사의 발언 | 국왕과 삼사의 충돌 | 대신들의 간언 | 대신과 삼사의 협력
3. 갑자사화의 폭발과 전개
고조되는 국왕의 불만 | 이세좌의 실수 | 사화의 발발-홍귀달 사건 | 폐모 사건의 보복 | 피화인의 분석 | 재산의 몰수 | 숙청의 일단락
제4장 폭정과 폐위(연산군 11~12년)
1. 일상화된 폭정
제압된 신하들 | 왕권의 절대화 | 경직되는 태도 | 제도의 변개 | 발언의 봉쇄 | 토목공사의 확대 | 민가 철거의 재개 | 금표의 확장 | 사냥에의 몰두 | 황음의 만연 | 추문의 확대 | 재정 지출의 급증 | 정무의 태만
2. 폭정의 종결
불안해하는 폭군 | 반정과 폐위, 그리고 사망
3. 개인적 사항들
비빈과 자녀들 | 부왕과 대비에 대한 증오 | 편집증적 심리와 행동
책을 마치며
주註
갑자사화 피화인 명단
참고문헌
출판사 리뷰
연산군과 그의 시대
사료에 근거해 촘촘하게 복원하다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구도로 조선 정치사를 이해해온 관행은 수정되어야 한다.”
“갑자사화의 원인 중 하나는 신하들의 재산을 압류하는 것이었다.”
“연산군이라는 시련 이후 조선의 정치제도는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 책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극렬한 갈등과 대립, 살육의 파노라마를 그렸던 연산군 시대를 제대로 조명해보려는 작업이다. 조선 중기의 정치사를 꾸준히 천착해온 김범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원은 연산군에 관련된 1·2차 사료를 빠짐없이 검토한 뒤, 기존의 연산군 시대 이해에서 부족한 점을 지적하고 그 시대의 역사상을 최대한 현실적으로 그려내 객관적 의미망을 일궈냈다. 책의 중심 주제는 정치사이지만, 당시의 경제·사회·문화 등 여러 양상을 포괄하려 했고 미시적 주제(예컨대 연산군 개인의 성격이나 병력)들도 주의 깊게 살펴보면서 그것이 거시적 사안들과 관련된 측면을 검토했다. 주관적 평가나 추정보다는 구체적인 자료에 의거해 연산군이란 인물을 생생히 되살려내려 시도한 평전적 연구이다.
■ 연산군 시대에 더 이상 남겨진 것은 없다
전근대 사회인 조선을 들여다보는 핵심 프리즘은 왕정체제를 중심으로 한 신분제이다. 특히 신분을 상승시키려는 욕망과 그것을 저지하려는 의지가 거세게 충돌할 경우 견고한 제도에 균열을 만들어냈다. 충돌의 강도와 빈도가 증폭되면 결국 기존 사회는 해체되어 새로운 체제로 이행한다. 이 책의 주제인 조선 제10대 국왕 연산군(재위 1495~1506)이 통치한 시대는 그 두 세력의 갈등과 충돌이 가장 격렬하게 표출된 기간이었다. 이 책은 그런 과정을 실증적으로 추적하면서 그 원인과 결과, 의미를 포괄적으로 살펴본다.
광폭했던 정치사와 비극적 요소가 뒤섞였던 까닭에 그간 연산군은 적잖이 조명되어왔다. 그런 가운데 이 책이 차별성을 갖는 지점은, 철저하게 사료를 바탕으로 그 시대의 내면을 세밀하게 살펴보며 구체적인 실상들을 낱낱이 밝혔다는 데 있다. 연산군은 극도의 혼란스러운 정치를 펼치다 반정으로 12년 만에 치세를 종결당했고, 3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과정이 격동적이며 이례적이었던 만큼 그것을 복원하고 분석하는 데는 더욱 침착한 시각과 서술이 필요하다는 것이 저자의 문제의식이다.
■ 비밀스럽고 돌발적이었던 최초의 사화 -무오사화
이 책은 성종이 남긴 정치적 유산으로서, 훈구대신들을 제어하고 견제하는 세력으로 키웠던 삼사의 기능과 역할을 짚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성종은 25년의 치세 중 물리적 억압이나 숙청을 행하지 않고 유교정치의 기반을 마련한 성군으로 평가되었다. 그런 그가 역설적이게도 왕비의 폐출과 사사를 집행했는데, 이것은 연산군의 정치가 거대한 폭정으로 귀결되는 가장 큰 원인이 된다.
『연산군일기』는 왕이 폐위되고 그런 행위를 ‘반정’이라 칭한 세력이 스스로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입장을 역사 서술에도 투영했을 가능성이 크기에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 실제로 『연산군일기』의 편찬과정은 순조롭지 못했는데, 연산군의 편집증적인 추적과 소급 처벌을 겪은 관원들이 중종 치세에도 편수에 참여하길 꺼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점을 고려해도 저자는 『연산군일기』의 자료적 가치는 훼손되지 않는다고 본다. 무엇보다 『연산군일기』를 다른 왕대의 실록과 비교해 체재와 편찬 방식이 똑같은 점 등을 상세한 표를 통해 제시하는데, 저자는 그간 학계에서 자료의 의도적인 변개나 위조, 왜곡된 서술 등을 자행했으리라고 판단한 것에 대해서는 조목조목 비판하며 『연산군일기』의 사료적 가치를 규명한다.
그런 다음 저자는 연산군의 어린 시절부터 짚어나간다. 세자 때 그의 학습능력은 다른 왕에 비해 뒤처지지 않았지만, 문제는 그가 당시 학문적 본류인 경·사보다는 여기餘技로 취급되던 문학에 더 큰 관심과 재능을 보였다는 점이다. 즉, 연산군은 이성보다 감성이 풍부했고, 어쩌면 왕으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일 수 있는 이해력과 관련해서는 실록 도처에서 부정적인 평가가 발견된다. 핵심적인 문제점은 문리文理의 불통이었다. “금년에 벌써 17세인데도 아직 문리를 해득하지 못하셨습니다”라는 우승지 권경희의 지적 등 다양한 근거를 통해 저자는 연산군이 역사적 문제의 인과관계나 맥락을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했다고 주장한다. 사안을 혼동하고 우선순위를 뒤바꾸는 그의 판단 착오가 세자 시절의 학습에서 단초를 보인다.
이 책은 또한 ‘능상凌上’이라는 연산군의 표현에 주목했다. 치세 초반 무오사화가 일어나기까지는 국왕과 대신이 한편에 서고 그 대척점에 삼사가 포진하는 구도였다. 왕에 대한 간쟁과 탄핵이 본 임무였던 삼사는 연산군대에 폭발한 두 차례의 사화에서 핵심적인 반대 세력으로 떠오른다. 삼사는 왕이 행한 외척의 임용과 포상, 내관의 전횡, 봉보부인에 대한 우대 등에 대해 거침없이 비판하고 관련 대신들을 국문하라며 끈질기게 요청했다. 삼사의 탄핵은 짧게는 두 달부터 길게는 1년까지 끈질기게 제기됐다. 폐비의 추숭과 외친의 우대라는 두 가지 사안은 연산군이 가장 집중적으로 노력한 문제였다. 반면 삼사는 이 문제에서 항상 즉각 반대 입장을 나타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연산군은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이를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 파악했다.
이런 과정의 첫 귀결이 바로 연산군 4년에 벌어진 무오사화였다. 대신과 삼사는 본원적인 기능상 서로 긴장·비판하는 관계였지만, 연산군 초반 둘의 대립은 감정적으로 치달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첨예하게 대립한 이가 영의정 노사신이었다. 정언 조순은 “노사신의 고기를 먹고 싶다”는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다. 유교 의례가 아니라며 왕실에서 지내오던 수륙재 시행을 반대했던 삼사는 이를 찬성한 노사신을 두고 중국의 간신인 조고 등과 견주면서 나라를 망칠 간웅奸雄이라고 지목했다. 결국 노사신이 물러나면서 정치 구도에서 삼사의 힘은 더욱 팽창했다.
■ 훈구-사림의 틀은 유효한가?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는 비밀스럽고 돌발적으로 시작되었다. 그것은 전면적인 숙청이 아니었고, 소수의 핵심 인물들을 처벌함으로써 그 배후의 전체에게 경고하려는 상징적이며 심층적인 의도를 지닌 정치적 사건이었다고 저자는 규명한다. 그간 학계에서는 무오사화를 ‘훈구와 사림 세력의 충돌’로 해석해왔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정치사는 ‘훈구-사림’의 틀에 의거해 설명·해석되곤 했다. 이러한 분석틀은 식민사학(특히 당파성론과 정체성론)을 학문적 차원에서 극복한 데 의의가 있는 등 큰 지지를 얻어왔다. 그러나 저자 김범은 이런 통설이 몇 가지 측면에서 수정·보완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즉 도식적으로 분석되었던 양 세력 때문에 복잡하고 강고하게 짜인 조선 지배세력의 혈연 및 친족관계가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으며, 전체적으로 도덕적 포폄에 입각한 관점에서 접근했다는 점이다.
특히 연산군대 무오사화와 관련해 저자는 김종직 일파와 삼사를 사림으로 분류해 훈구세력과 대척점에 두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본다. 가문적 유대와 혈연의식이 지배했던 조선에서 아무리 사림세력이라 할지라도 훈구대신을 조상으로 두었을 경우 훈구대신에 전적으로 반대되는 사상을 갖기란 어렵다는 게 이유의 하나다. 특히 사림세력의 종장인 김종직의 정치적 행보와 경제적 상황, 사상적 지향 등은 훈구세력과 더 많은 유사성을 지니고 있음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그 외 훈구세력의 한 명인 이극균이 대표적 사림세력인 김굉필을 천거한 사실 등에서 이분법적 구도의 왜곡은 여실히 드러난다. 저자는 무오사화는 김종직 일파와 삼사라는 두 집단을 동시에 처벌하고 경고한 복합적 사건이라고 판단하면서, 삼사의 과도한 언론활동을 교정한다는 목표로 국왕과 대신들이 일차적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본다.
■ 왕권의 일탈과 갑자사화의 발단
무오사화 이후 연산군의 치세가 정치제도나 개혁과 관계없이 사치, 사냥, 음행 같은 욕망을 무제한으로 실현하고자 전제적 왕권 행사로 나아가자, 국왕에 동조해온 대신들도 왕의 자의적 권력 행사를 비판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즉 후반의 정치구도는 대신과 삼사가 가까워지고 국왕은 고립되는 추세로 되어갔다. 제한적이며 상징적인 공격이었던 무오사화와 달리 갑자사화가 대신과 삼사를 아우른 신하 대부분에 대한 국왕의 무차별적인 숙청으로 귀결된 까닭은 이런 정치 지형의 재편에서 비롯되었다.
연산군은 중국에 가는 사신에게 물건을 많이 사오라고 지시하고 북경 사행 가는 능라장에게는 각종 색깔의 염색과 직조기술을 익혀오게 했으며, 일본 사신이 입고 있는 의관에 관심을 보이고, 무분별한 포상과 내수사·궁궐의 비용 등을 늘려갔다. 그러나 더 심각한 건 정사의 태만에 빠져든 것이다. 이것은 바로 본질과 비본질을 혼동한 연산군의 결정적 과오였다.
연산군의 유흥의 대표적인 것으로 사냥과 관련된 기관인 창덕궁 안의 내응방의 확대를 들 수 있다. 응방은 사냥에서 사용할 매를 주로 길렀고, 또 왕의 기호나 용도에 따라 갖은 짐승을 사육했다. 이 기관이 연산군 재위 5년 100명이었다가 재위 10년에는 1000명으로 확대된다. 그런데 궁궐에서 짐승을 대량으로 기르다보니 궐 안에 사냥개가 떼지어 짖고 피투성이가 된 돼지가 홍문관 책방 안으로 뛰어드는 황당한 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 재위 9년 11월 20일에 왕은 직접 북 치고 노래하고 춤추면서 신하들의 사모를 벗기고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희롱하기까지 했다. 연산군의 음행도 서슴지 않고 이뤄졌다. 그 시작은 암·수말이 교접하는 장면을 구경하는 엽기적컀 관음이었다. 이후 음행은 본격화돼 정업원의 여승들을 겁탈하고 나중에는 사대부의 아내들을 겁탈하기까지에 이른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그가 온갖 유희를 은밀하고 단독으로 즐기는 데 대단히 집착했다는 사실이다. 격리에 대한 연산군의 집착은 과도했다. 경복궁과 창덕궁의 담장을 높이 쌓는 것뿐 아니라 궁궐 주변의 사가들을 철폐시키기까지 해 백성들은 굶주리거나 거처할 곳이 없어 고통을 겪는 극한의 상황에까지 치닫는다. 연산군은 이런 데 만족하지 않고 발언 자체를 통제하려는 비상직적인 선까지 나아간다. 연산군은 지근 부서인 승정원부터 단속했다. 왕의 전교를 절대 누설하지 못하게 금했으며, 국왕의 동선을 누출한 혐의로 질책받기도 했다.
하지만 무오사화 이후 일시적으로 위축되었던 삼사는 곧 그 위상을 회복했다. 특히 사치나 유희 같은 일탈 행위는 삼사의 발언을 촉발시켰다. 즉 삼사의 언론활동이 활발히 재개될 핵심적 발판은 연산군 자신이 제공한 것이었다. 삼사의 간쟁에 연산군은 “술이나 마시고 가라” 등의 조롱조로 대응했고, 홍문관도 압박했다. 연산군의 폐단은 재위 8년 삼정승 한치형, 서준, 이극균이 올린 시폐 10조로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은 이 상소의 주청자와 내용을 가장 증오했는데, 삼정승이 지목한 문제점들은 ① 경연과 시사視事를 폐지한 것 ② 대군과 공주에게 시장柴場을 너무 많이 하사한 것 ③ 후원에서 신하들을 접견하지 말아야 하는 것 ④ 공사公事가 많이 지체되는 것 ⑤ 내시가 신하들의 계청을 더디게 출납하는 것 등 10가지였다. 왕은 자신이 고립되어가는 데 대한 원인을 성찰하지 않았고 능상의 폐단이 대신들에게까지 만연된 것이라고 분석해, 조선 역사에서 가장 거대한 정치적 비극인 갑자사화로 귀결시킨다.
■ 조선 정치사 최대의 비극 - 갑자사화
주목할 만한 것은 첫째, 갑자사화에서 가해자는 국왕 한 사람이었으며 피해자는 대부분의 신하였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그 사건은 ‘사림의 피화’라는 의미의 ‘사화’로 묶이는 무오·기묘·을사사화와 크게 달랐다. 이런 측면은 그 사건들을 매개로 한국사의 중요한 통설의 하나로 자리잡은 ‘훈구-사림 세력’이라는 개념을 재고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워준다.
갑자사화는 그 원인과 전개 과정 또한 독특했다. 이는 능상의 척결과 폐모 사건의 보복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발발했고, 기괴할 정도로 소급 처벌이 적용되었다. 더욱이 갑자사화는 연산군이 반정으로 폐위될 때까지 유례없이 ‘장기적인 숙청’이 되었다. 피해의 규모와 양상도 그만큼 끔찍했다. 피화 대상에는 살아 있는 신하들뿐만 아니라 이미 사망한 대신들도 다수 있었고 성종의 후궁과 궁궐의 나인·내관 등도 포함되었으며, 그 방식도 드물게 참혹했다. 이 책은 갑자사화의 피화 규모를 최대한 자세하게 밝히는 작업을 하는데, 이로써 연산군과 그의 통치에 대한 평가의 근거로 삼는다.
갑자사화의 직접적인 발단은 이세좌·홍귀달 사건이었다. 널리 알려졌듯이 전자는 잔치에서 어의에 술을 엎지른 실수였고, 후자는 손녀를 입궐시키라는 왕명을 즉시 이행하지 않은 사안이었다. 특히 이세좌는 폐비에게 사약을 전달했던 좌승지였다는 우연이 겹치면서 능상의 처벌과 폐모 사건의 복수라는 갑자사화의 도화선을 형성했다.
재위 10년 3월 20일 연산군은 성종의 후궁 정씨의 아들 안양군 이항과 봉안군 이봉을 창덕궁으로 압송해 폭행했다. 맹렬한 복수심에 불탄 국왕의 광기 어린 행동은 『연산군일기』에 생생히 묘사되었다. 그 기록에 따르면 연산군은 모후의 사사에 관련된 핵심 인물을 귀인 엄씨·정씨와 소혜·정현왕후로 판단해 “내수사를 시켜 엄씨·정씨의 시신을 찢어 젓을 담가 산과 들에 흩어버렸”고, 신하들에게 선왕의 오판을 바로잡지 못한 죄를 돌렸는데, 거기에 공교롭게 이세좌와 홍귀달이 포함돼 있었다.
갑자사화의 규모와 방식은 거대하고 참혹했다. 부관참시, 쇄골표풍, 파가저택처럼 극한적인 형벌이 적용되었다. 저자는 갑자사화 피화인 명단을 조사해 표로 제시하는데, 총 239명으로 정리된다. 이를 보면, 대신보다는 삼사의 피해가 훨씬 커 삼사를 제압하려던 연산군의 목적을 보여주지만, 질적인 부분에서는 오히려 대신의 피해가 더욱 치명적이었다고 저자는 판단한다. 특히 ‘훈구-사림’의 개념과 관련해 이 부분에서 음미할 것이 있다. 저자는 대신과 삼사의 고유한 임무는 해당 관원의 개인적인 성향보다 우선적인 규정력을 가졌고, 상하의 관직 체계는 긴밀한 인적 연속성을 갖고 끊임없이 이동했음을 고려한다면 훈구-사림 역시 별개의 실체가 아닌 서로 연결되는 유동적인 집단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 연산군은 왜 ‘추쇄도감’을 설치했는가
갑자사화와 관련해 신하들의 재산을 몰수한 사실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신의 사치에 따라 재정 문제가 심각해지자 연산군은 신하들의 재산몰수를 추쇄도감을 따로 설치할 만큼 철저하게 진행시켰다. 윤필상의 재산을 보면 국가 1년 예산의 4.5퍼센트에 해당할 만큼 거대한 부를 쥐고 있었다. 저자는 사치에 따른 재정 고갈은 갑자사화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는데, 특히 연산군은 자신의 소비를 제지해온 부자 신하들에게 매우 깊은 분노를 품고 있었다고 보았다.
폭정은 일상화되었다. 왕은 신하들의 교류를 단속해 서로 혼인한 집안끼리라도 방문을 허하지 않았다. 신하들에 대한 예우도 격하되었다. 재상에게 존칭을 못 쓰게 했고, 어명을 받든다 하여 승지를 영의정 윗자리에 앉혔다. 모욕은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왕의 거둥이나 환궁 때 신하들은 비가 와 진흙탕일지라도 자리를 깔 수 없었고, 대신과 유생은 도로와 담장 건축에, 대간과 승지는 사냥의 진행 상황을 규찰하는 데 투입되었다. 완전히 제압된 신하들의 모습은 재위 11년 후반부터 사용한 허한패許閑牌에서 볼 수 있다. “한가롭게 쉬는 것을 허락한다”는 이 패를 받지 못하면 신하들은 왕이 사냥이나 유흥으로 늦게 환궁할 땐 한밤이라도 귀가하지 못했다. 반면 충성은 더욱 강요되었다. 모든 신하는 임금을 섬기는 도리를 판자에 새겨 벽에 걸어놓고 봐야 했다. 관원들의 사모 앞뒤에 각각 ‘충忠·성誠’이라는 글자를 새기게까지 했다. 이런 이유로 당시 관직은 기피 대상이 되었고, 부모들은 벼슬할까 두려워 자식들에게 학문을 배우지 못하게 했다. 연산군의 독존의식은 학문과 종교의 절대적인 존재였던 공자에게도 적용되었다. 연산군은 공자가 성인이더라도 신하의 신분이니 사배 대신 재배만 하게 했고, 공자의 위패는 성균관이 철거되면서 문묘를 떠나 태평관-의정부-종학-장악원-서학을 전전했다.
연산군은 주요 제도를 변개하거나 완전히 혁파하기 시작했다. 먼저 가장 번거롭고 거추장스러웠던 경연과 삼사가 대상이 되었다. 연산군은 경연관을 진독관으로 고쳤다가 그것마저 곧 폐지했으며 홍문관과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대간의 서경도 없앴다. 유교 국가의 상징이었던 성균관과 문묘는 원각사와 도성 남쪽으로 쫓겨갔으며, 사간원과 대제학을 폐지한 것은 가장 핵심적인 조처였다. 발언권은 완전히 봉쇄됐다. 가령 잔칫상을 배설한 사람의 이름을 상 아래 쓰게 해 음식이 잘못되었을 경우 책임을 그 사람에게 물은 것은 편집증의 한 예를 보여준다. 기록도 통제됐다. 김일손과 그 사초에서 비롯된 무오사화를 들면서 아예 가장사초를 작성하지 못하게 했는데, 이는 사실상 실록 편찬을 금하는 조처였다. 또한 승명패를 제작해 궐문과 승정원 등에 걸게 했는데, 거기에 “입은 화의 문이고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감추면 몸이 편안하고 어디서나 굳건할 것이다”라고 기록해 신하들의 입을 아예 통제했다.
■ 수천 명의 기녀들 예우에 세금의 절반 탕진
유흥과 함께 여색에의 탐닉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연산군은 우선 기녀의 숫자를 대폭 늘렸는데, 장악원의 정원은 두 배인 300명으로 확대되었다. 장악원은 곧 원각사로 옮겨져 가흥청 200명, 운평 1000명, 광희 1000명을 상주시키고 총률摠律 40명에게 날마다 가무를 가르치게 했다. 기녀를 선발할 때 딸을 숨기다가 적발되면 아버지를 처벌했는데, 140명이 여기에 연루됐다. 15~25세의 나이 제한도 풀었다. 연산군의 엽색행각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흥청·운평·광희로 대표되는 기녀들과 관련된 사항일 것이다. 이들에 들어간 비용은 엄청났으며, 운평은 후에 1000명을 더 선발하기도 했다. 이런 여성들에 관해서는 『장화록藏花錄』이라는 책자를 만들어 기록했다. 또 이들을 예우하고자 호화고라는 창고를 따로 설치했는데, 전국의 전세田稅 절반이 이곳으로 들어갔다.
궁인들은 국왕 한 사람에게만 봉사해야 했기에 결혼이 금지됐으며, 기혼자는 강제로 별거해야 했다. 이를 어겼던 한 사례를 들여다볼 만한데, 연산군은 몰래 만나 부부의 정을 나눈 운평 소진주와 남편 하옥정을 능지형에 처한 뒤 시신을 두루 보게 하고 일족도 장 100대를 때린 뒤 전가사변 시켰으며 그녀가 살던 고을도 혁파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자 연산군은 그녀와 이름이 같거나 이름 중에 소笑·진眞·주珠 자가 들어 있는 사람은 모두 고치게 했다. 연산군의 음행은 ‘거사擧舍’라는 시설로도 살펴볼 수 있다. 가마 같은 기구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연산군은 들고 다닐 수 있는 작은 방을 만들어 행차 중에도 성욕이 발동하면 그것을 설치하고 흥청과 음행을 했다. 또한 경회루 연못 옆과 동궁 월랑에 작은 집을 짓고 음행을 즐겼는데, 각각 ‘음궁淫宮’과 ‘음실’로 불렸다. 여성 편력과 관련해 특기할 만한 사항은 신하나 종친의 부인과도 적지 않은 추문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중 월산대군 부인 박씨와 관련해서 논란이 가장 분분한데, 이 책에서는 연산군이 박씨에게 베푼 물품의 종류와 수량을 근얰로 연산군보다 22세 연상인 그녀와의 관계에 심증을 두고 있다.
이처럼 연산군의 채울 수 없는 욕망의 극한은 정무의 태만으로 이어졌다. 갑자사화 이후 죄수들은 죄상이 밝혀지지 않아 수감소는 죄인들이 눕지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재위 11년부터는 모후의 기일에도 유흥을 즐겼고, 폐위 직전에는 모후의 국기를 거행하지 않겠다고 공식적으로 전교했다. 그의 속마음은 “어머님 나이야 길든 짧든 운수라고 단념하지만 나만은 타고난 그대로 살리라”라는 연산군의 시에 가장 잘 담겨 있는 듯하다. 재위 말기 삼엄한 경비를 더욱 확대해나갔음에도 폭군의 불안은 더욱 커졌고 재위 마지막 해에는 거의 체념하는 심리를 보이기도 했다. 재위 열흘도 남기지 않은 시점에 잔치를 열던 연산군은 스스로 피리를 연주하더니 “인생은 풀에 맺힌 이슬 같아서 만날 때가 많지 않은 것”이라는 처량한 시를 읊으며 눈물을 흘렸다.
■ 부왕에 대한 증오 … 시련은 역사적 교훈으로
연산군은 자신의 불행했던 개인사 때문에 부왕과 대비에게 커다란 증오를 드러내며, 부왕이 세운 정치적 정립구도에도 큰 불만을 품었다. 그는 즉위 직후부터 패륜에 가까운 악행을 저질렀는데, 가령 성종의 초빈初殯 때부터 부왕이 기르던 사슴을 쏘아 죽여 구워먹고 부왕의 영정을 걷어 손으로 때렸으며, 나중에는 그것을 표적으로 삼아 활을 쏘기도 했다. 성종이 세운 옛 법률을 모두 폐지하고 성종을 위해 제사를 올리는 사람들을 처벌했으며, 부왕의 기일에 사냥을 하거나 선릉宣陵에서 연회를 베풀기도 했다. 가장 극단적인 행동은 대취하자 선릉을 파오라고 지시한 사례일 것이다.
조선왕조는 연산군 시기의 가혹한 시련을 극복하면서 삼사의 기능과 정치적 정립 구도는 더욱 견고하게 확립되었고, 이제 조선에서 어떤 의미 있는 정치적 변화는 그런 구조를 유지한 상태에서만 이뤄질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여러 변화와 발전이 형성되는 중앙 정치의 운영 원리가 현실에 더욱 견고하게 뿌리내리게 되었다는 측면에서 이 시기의 시련과 극복은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사료에 근거해 촘촘하게 복원하다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구도로 조선 정치사를 이해해온 관행은 수정되어야 한다.”
“갑자사화의 원인 중 하나는 신하들의 재산을 압류하는 것이었다.”
“연산군이라는 시련 이후 조선의 정치제도는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 책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극렬한 갈등과 대립, 살육의 파노라마를 그렸던 연산군 시대를 제대로 조명해보려는 작업이다. 조선 중기의 정치사를 꾸준히 천착해온 김범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원은 연산군에 관련된 1·2차 사료를 빠짐없이 검토한 뒤, 기존의 연산군 시대 이해에서 부족한 점을 지적하고 그 시대의 역사상을 최대한 현실적으로 그려내 객관적 의미망을 일궈냈다. 책의 중심 주제는 정치사이지만, 당시의 경제·사회·문화 등 여러 양상을 포괄하려 했고 미시적 주제(예컨대 연산군 개인의 성격이나 병력)들도 주의 깊게 살펴보면서 그것이 거시적 사안들과 관련된 측면을 검토했다. 주관적 평가나 추정보다는 구체적인 자료에 의거해 연산군이란 인물을 생생히 되살려내려 시도한 평전적 연구이다.
■ 연산군 시대에 더 이상 남겨진 것은 없다
전근대 사회인 조선을 들여다보는 핵심 프리즘은 왕정체제를 중심으로 한 신분제이다. 특히 신분을 상승시키려는 욕망과 그것을 저지하려는 의지가 거세게 충돌할 경우 견고한 제도에 균열을 만들어냈다. 충돌의 강도와 빈도가 증폭되면 결국 기존 사회는 해체되어 새로운 체제로 이행한다. 이 책의 주제인 조선 제10대 국왕 연산군(재위 1495~1506)이 통치한 시대는 그 두 세력의 갈등과 충돌이 가장 격렬하게 표출된 기간이었다. 이 책은 그런 과정을 실증적으로 추적하면서 그 원인과 결과, 의미를 포괄적으로 살펴본다.
광폭했던 정치사와 비극적 요소가 뒤섞였던 까닭에 그간 연산군은 적잖이 조명되어왔다. 그런 가운데 이 책이 차별성을 갖는 지점은, 철저하게 사료를 바탕으로 그 시대의 내면을 세밀하게 살펴보며 구체적인 실상들을 낱낱이 밝혔다는 데 있다. 연산군은 극도의 혼란스러운 정치를 펼치다 반정으로 12년 만에 치세를 종결당했고, 3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과정이 격동적이며 이례적이었던 만큼 그것을 복원하고 분석하는 데는 더욱 침착한 시각과 서술이 필요하다는 것이 저자의 문제의식이다.
■ 비밀스럽고 돌발적이었던 최초의 사화 -무오사화
이 책은 성종이 남긴 정치적 유산으로서, 훈구대신들을 제어하고 견제하는 세력으로 키웠던 삼사의 기능과 역할을 짚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성종은 25년의 치세 중 물리적 억압이나 숙청을 행하지 않고 유교정치의 기반을 마련한 성군으로 평가되었다. 그런 그가 역설적이게도 왕비의 폐출과 사사를 집행했는데, 이것은 연산군의 정치가 거대한 폭정으로 귀결되는 가장 큰 원인이 된다.
『연산군일기』는 왕이 폐위되고 그런 행위를 ‘반정’이라 칭한 세력이 스스로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입장을 역사 서술에도 투영했을 가능성이 크기에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 실제로 『연산군일기』의 편찬과정은 순조롭지 못했는데, 연산군의 편집증적인 추적과 소급 처벌을 겪은 관원들이 중종 치세에도 편수에 참여하길 꺼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점을 고려해도 저자는 『연산군일기』의 자료적 가치는 훼손되지 않는다고 본다. 무엇보다 『연산군일기』를 다른 왕대의 실록과 비교해 체재와 편찬 방식이 똑같은 점 등을 상세한 표를 통해 제시하는데, 저자는 그간 학계에서 자료의 의도적인 변개나 위조, 왜곡된 서술 등을 자행했으리라고 판단한 것에 대해서는 조목조목 비판하며 『연산군일기』의 사료적 가치를 규명한다.
그런 다음 저자는 연산군의 어린 시절부터 짚어나간다. 세자 때 그의 학습능력은 다른 왕에 비해 뒤처지지 않았지만, 문제는 그가 당시 학문적 본류인 경·사보다는 여기餘技로 취급되던 문학에 더 큰 관심과 재능을 보였다는 점이다. 즉, 연산군은 이성보다 감성이 풍부했고, 어쩌면 왕으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일 수 있는 이해력과 관련해서는 실록 도처에서 부정적인 평가가 발견된다. 핵심적인 문제점은 문리文理의 불통이었다. “금년에 벌써 17세인데도 아직 문리를 해득하지 못하셨습니다”라는 우승지 권경희의 지적 등 다양한 근거를 통해 저자는 연산군이 역사적 문제의 인과관계나 맥락을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했다고 주장한다. 사안을 혼동하고 우선순위를 뒤바꾸는 그의 판단 착오가 세자 시절의 학습에서 단초를 보인다.
이 책은 또한 ‘능상凌上’이라는 연산군의 표현에 주목했다. 치세 초반 무오사화가 일어나기까지는 국왕과 대신이 한편에 서고 그 대척점에 삼사가 포진하는 구도였다. 왕에 대한 간쟁과 탄핵이 본 임무였던 삼사는 연산군대에 폭발한 두 차례의 사화에서 핵심적인 반대 세력으로 떠오른다. 삼사는 왕이 행한 외척의 임용과 포상, 내관의 전횡, 봉보부인에 대한 우대 등에 대해 거침없이 비판하고 관련 대신들을 국문하라며 끈질기게 요청했다. 삼사의 탄핵은 짧게는 두 달부터 길게는 1년까지 끈질기게 제기됐다. 폐비의 추숭과 외친의 우대라는 두 가지 사안은 연산군이 가장 집중적으로 노력한 문제였다. 반면 삼사는 이 문제에서 항상 즉각 반대 입장을 나타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연산군은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이를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 파악했다.
이런 과정의 첫 귀결이 바로 연산군 4년에 벌어진 무오사화였다. 대신과 삼사는 본원적인 기능상 서로 긴장·비판하는 관계였지만, 연산군 초반 둘의 대립은 감정적으로 치달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첨예하게 대립한 이가 영의정 노사신이었다. 정언 조순은 “노사신의 고기를 먹고 싶다”는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다. 유교 의례가 아니라며 왕실에서 지내오던 수륙재 시행을 반대했던 삼사는 이를 찬성한 노사신을 두고 중국의 간신인 조고 등과 견주면서 나라를 망칠 간웅奸雄이라고 지목했다. 결국 노사신이 물러나면서 정치 구도에서 삼사의 힘은 더욱 팽창했다.
■ 훈구-사림의 틀은 유효한가?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는 비밀스럽고 돌발적으로 시작되었다. 그것은 전면적인 숙청이 아니었고, 소수의 핵심 인물들을 처벌함으로써 그 배후의 전체에게 경고하려는 상징적이며 심층적인 의도를 지닌 정치적 사건이었다고 저자는 규명한다. 그간 학계에서는 무오사화를 ‘훈구와 사림 세력의 충돌’로 해석해왔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정치사는 ‘훈구-사림’의 틀에 의거해 설명·해석되곤 했다. 이러한 분석틀은 식민사학(특히 당파성론과 정체성론)을 학문적 차원에서 극복한 데 의의가 있는 등 큰 지지를 얻어왔다. 그러나 저자 김범은 이런 통설이 몇 가지 측면에서 수정·보완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즉 도식적으로 분석되었던 양 세력 때문에 복잡하고 강고하게 짜인 조선 지배세력의 혈연 및 친족관계가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으며, 전체적으로 도덕적 포폄에 입각한 관점에서 접근했다는 점이다.
특히 연산군대 무오사화와 관련해 저자는 김종직 일파와 삼사를 사림으로 분류해 훈구세력과 대척점에 두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본다. 가문적 유대와 혈연의식이 지배했던 조선에서 아무리 사림세력이라 할지라도 훈구대신을 조상으로 두었을 경우 훈구대신에 전적으로 반대되는 사상을 갖기란 어렵다는 게 이유의 하나다. 특히 사림세력의 종장인 김종직의 정치적 행보와 경제적 상황, 사상적 지향 등은 훈구세력과 더 많은 유사성을 지니고 있음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그 외 훈구세력의 한 명인 이극균이 대표적 사림세력인 김굉필을 천거한 사실 등에서 이분법적 구도의 왜곡은 여실히 드러난다. 저자는 무오사화는 김종직 일파와 삼사라는 두 집단을 동시에 처벌하고 경고한 복합적 사건이라고 판단하면서, 삼사의 과도한 언론활동을 교정한다는 목표로 국왕과 대신들이 일차적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본다.
■ 왕권의 일탈과 갑자사화의 발단
무오사화 이후 연산군의 치세가 정치제도나 개혁과 관계없이 사치, 사냥, 음행 같은 욕망을 무제한으로 실현하고자 전제적 왕권 행사로 나아가자, 국왕에 동조해온 대신들도 왕의 자의적 권력 행사를 비판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즉 후반의 정치구도는 대신과 삼사가 가까워지고 국왕은 고립되는 추세로 되어갔다. 제한적이며 상징적인 공격이었던 무오사화와 달리 갑자사화가 대신과 삼사를 아우른 신하 대부분에 대한 국왕의 무차별적인 숙청으로 귀결된 까닭은 이런 정치 지형의 재편에서 비롯되었다.
연산군은 중국에 가는 사신에게 물건을 많이 사오라고 지시하고 북경 사행 가는 능라장에게는 각종 색깔의 염색과 직조기술을 익혀오게 했으며, 일본 사신이 입고 있는 의관에 관심을 보이고, 무분별한 포상과 내수사·궁궐의 비용 등을 늘려갔다. 그러나 더 심각한 건 정사의 태만에 빠져든 것이다. 이것은 바로 본질과 비본질을 혼동한 연산군의 결정적 과오였다.
연산군의 유흥의 대표적인 것으로 사냥과 관련된 기관인 창덕궁 안의 내응방의 확대를 들 수 있다. 응방은 사냥에서 사용할 매를 주로 길렀고, 또 왕의 기호나 용도에 따라 갖은 짐승을 사육했다. 이 기관이 연산군 재위 5년 100명이었다가 재위 10년에는 1000명으로 확대된다. 그런데 궁궐에서 짐승을 대량으로 기르다보니 궐 안에 사냥개가 떼지어 짖고 피투성이가 된 돼지가 홍문관 책방 안으로 뛰어드는 황당한 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 재위 9년 11월 20일에 왕은 직접 북 치고 노래하고 춤추면서 신하들의 사모를 벗기고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희롱하기까지 했다. 연산군의 음행도 서슴지 않고 이뤄졌다. 그 시작은 암·수말이 교접하는 장면을 구경하는 엽기적컀 관음이었다. 이후 음행은 본격화돼 정업원의 여승들을 겁탈하고 나중에는 사대부의 아내들을 겁탈하기까지에 이른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그가 온갖 유희를 은밀하고 단독으로 즐기는 데 대단히 집착했다는 사실이다. 격리에 대한 연산군의 집착은 과도했다. 경복궁과 창덕궁의 담장을 높이 쌓는 것뿐 아니라 궁궐 주변의 사가들을 철폐시키기까지 해 백성들은 굶주리거나 거처할 곳이 없어 고통을 겪는 극한의 상황에까지 치닫는다. 연산군은 이런 데 만족하지 않고 발언 자체를 통제하려는 비상직적인 선까지 나아간다. 연산군은 지근 부서인 승정원부터 단속했다. 왕의 전교를 절대 누설하지 못하게 금했으며, 국왕의 동선을 누출한 혐의로 질책받기도 했다.
하지만 무오사화 이후 일시적으로 위축되었던 삼사는 곧 그 위상을 회복했다. 특히 사치나 유희 같은 일탈 행위는 삼사의 발언을 촉발시켰다. 즉 삼사의 언론활동이 활발히 재개될 핵심적 발판은 연산군 자신이 제공한 것이었다. 삼사의 간쟁에 연산군은 “술이나 마시고 가라” 등의 조롱조로 대응했고, 홍문관도 압박했다. 연산군의 폐단은 재위 8년 삼정승 한치형, 서준, 이극균이 올린 시폐 10조로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은 이 상소의 주청자와 내용을 가장 증오했는데, 삼정승이 지목한 문제점들은 ① 경연과 시사視事를 폐지한 것 ② 대군과 공주에게 시장柴場을 너무 많이 하사한 것 ③ 후원에서 신하들을 접견하지 말아야 하는 것 ④ 공사公事가 많이 지체되는 것 ⑤ 내시가 신하들의 계청을 더디게 출납하는 것 등 10가지였다. 왕은 자신이 고립되어가는 데 대한 원인을 성찰하지 않았고 능상의 폐단이 대신들에게까지 만연된 것이라고 분석해, 조선 역사에서 가장 거대한 정치적 비극인 갑자사화로 귀결시킨다.
■ 조선 정치사 최대의 비극 - 갑자사화
주목할 만한 것은 첫째, 갑자사화에서 가해자는 국왕 한 사람이었으며 피해자는 대부분의 신하였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그 사건은 ‘사림의 피화’라는 의미의 ‘사화’로 묶이는 무오·기묘·을사사화와 크게 달랐다. 이런 측면은 그 사건들을 매개로 한국사의 중요한 통설의 하나로 자리잡은 ‘훈구-사림 세력’이라는 개념을 재고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워준다.
갑자사화는 그 원인과 전개 과정 또한 독특했다. 이는 능상의 척결과 폐모 사건의 보복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발발했고, 기괴할 정도로 소급 처벌이 적용되었다. 더욱이 갑자사화는 연산군이 반정으로 폐위될 때까지 유례없이 ‘장기적인 숙청’이 되었다. 피해의 규모와 양상도 그만큼 끔찍했다. 피화 대상에는 살아 있는 신하들뿐만 아니라 이미 사망한 대신들도 다수 있었고 성종의 후궁과 궁궐의 나인·내관 등도 포함되었으며, 그 방식도 드물게 참혹했다. 이 책은 갑자사화의 피화 규모를 최대한 자세하게 밝히는 작업을 하는데, 이로써 연산군과 그의 통치에 대한 평가의 근거로 삼는다.
갑자사화의 직접적인 발단은 이세좌·홍귀달 사건이었다. 널리 알려졌듯이 전자는 잔치에서 어의에 술을 엎지른 실수였고, 후자는 손녀를 입궐시키라는 왕명을 즉시 이행하지 않은 사안이었다. 특히 이세좌는 폐비에게 사약을 전달했던 좌승지였다는 우연이 겹치면서 능상의 처벌과 폐모 사건의 복수라는 갑자사화의 도화선을 형성했다.
재위 10년 3월 20일 연산군은 성종의 후궁 정씨의 아들 안양군 이항과 봉안군 이봉을 창덕궁으로 압송해 폭행했다. 맹렬한 복수심에 불탄 국왕의 광기 어린 행동은 『연산군일기』에 생생히 묘사되었다. 그 기록에 따르면 연산군은 모후의 사사에 관련된 핵심 인물을 귀인 엄씨·정씨와 소혜·정현왕후로 판단해 “내수사를 시켜 엄씨·정씨의 시신을 찢어 젓을 담가 산과 들에 흩어버렸”고, 신하들에게 선왕의 오판을 바로잡지 못한 죄를 돌렸는데, 거기에 공교롭게 이세좌와 홍귀달이 포함돼 있었다.
갑자사화의 규모와 방식은 거대하고 참혹했다. 부관참시, 쇄골표풍, 파가저택처럼 극한적인 형벌이 적용되었다. 저자는 갑자사화 피화인 명단을 조사해 표로 제시하는데, 총 239명으로 정리된다. 이를 보면, 대신보다는 삼사의 피해가 훨씬 커 삼사를 제압하려던 연산군의 목적을 보여주지만, 질적인 부분에서는 오히려 대신의 피해가 더욱 치명적이었다고 저자는 판단한다. 특히 ‘훈구-사림’의 개념과 관련해 이 부분에서 음미할 것이 있다. 저자는 대신과 삼사의 고유한 임무는 해당 관원의 개인적인 성향보다 우선적인 규정력을 가졌고, 상하의 관직 체계는 긴밀한 인적 연속성을 갖고 끊임없이 이동했음을 고려한다면 훈구-사림 역시 별개의 실체가 아닌 서로 연결되는 유동적인 집단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 연산군은 왜 ‘추쇄도감’을 설치했는가
갑자사화와 관련해 신하들의 재산을 몰수한 사실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신의 사치에 따라 재정 문제가 심각해지자 연산군은 신하들의 재산몰수를 추쇄도감을 따로 설치할 만큼 철저하게 진행시켰다. 윤필상의 재산을 보면 국가 1년 예산의 4.5퍼센트에 해당할 만큼 거대한 부를 쥐고 있었다. 저자는 사치에 따른 재정 고갈은 갑자사화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는데, 특히 연산군은 자신의 소비를 제지해온 부자 신하들에게 매우 깊은 분노를 품고 있었다고 보았다.
폭정은 일상화되었다. 왕은 신하들의 교류를 단속해 서로 혼인한 집안끼리라도 방문을 허하지 않았다. 신하들에 대한 예우도 격하되었다. 재상에게 존칭을 못 쓰게 했고, 어명을 받든다 하여 승지를 영의정 윗자리에 앉혔다. 모욕은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왕의 거둥이나 환궁 때 신하들은 비가 와 진흙탕일지라도 자리를 깔 수 없었고, 대신과 유생은 도로와 담장 건축에, 대간과 승지는 사냥의 진행 상황을 규찰하는 데 투입되었다. 완전히 제압된 신하들의 모습은 재위 11년 후반부터 사용한 허한패許閑牌에서 볼 수 있다. “한가롭게 쉬는 것을 허락한다”는 이 패를 받지 못하면 신하들은 왕이 사냥이나 유흥으로 늦게 환궁할 땐 한밤이라도 귀가하지 못했다. 반면 충성은 더욱 강요되었다. 모든 신하는 임금을 섬기는 도리를 판자에 새겨 벽에 걸어놓고 봐야 했다. 관원들의 사모 앞뒤에 각각 ‘충忠·성誠’이라는 글자를 새기게까지 했다. 이런 이유로 당시 관직은 기피 대상이 되었고, 부모들은 벼슬할까 두려워 자식들에게 학문을 배우지 못하게 했다. 연산군의 독존의식은 학문과 종교의 절대적인 존재였던 공자에게도 적용되었다. 연산군은 공자가 성인이더라도 신하의 신분이니 사배 대신 재배만 하게 했고, 공자의 위패는 성균관이 철거되면서 문묘를 떠나 태평관-의정부-종학-장악원-서학을 전전했다.
연산군은 주요 제도를 변개하거나 완전히 혁파하기 시작했다. 먼저 가장 번거롭고 거추장스러웠던 경연과 삼사가 대상이 되었다. 연산군은 경연관을 진독관으로 고쳤다가 그것마저 곧 폐지했으며 홍문관과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대간의 서경도 없앴다. 유교 국가의 상징이었던 성균관과 문묘는 원각사와 도성 남쪽으로 쫓겨갔으며, 사간원과 대제학을 폐지한 것은 가장 핵심적인 조처였다. 발언권은 완전히 봉쇄됐다. 가령 잔칫상을 배설한 사람의 이름을 상 아래 쓰게 해 음식이 잘못되었을 경우 책임을 그 사람에게 물은 것은 편집증의 한 예를 보여준다. 기록도 통제됐다. 김일손과 그 사초에서 비롯된 무오사화를 들면서 아예 가장사초를 작성하지 못하게 했는데, 이는 사실상 실록 편찬을 금하는 조처였다. 또한 승명패를 제작해 궐문과 승정원 등에 걸게 했는데, 거기에 “입은 화의 문이고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감추면 몸이 편안하고 어디서나 굳건할 것이다”라고 기록해 신하들의 입을 아예 통제했다.
■ 수천 명의 기녀들 예우에 세금의 절반 탕진
유흥과 함께 여색에의 탐닉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연산군은 우선 기녀의 숫자를 대폭 늘렸는데, 장악원의 정원은 두 배인 300명으로 확대되었다. 장악원은 곧 원각사로 옮겨져 가흥청 200명, 운평 1000명, 광희 1000명을 상주시키고 총률摠律 40명에게 날마다 가무를 가르치게 했다. 기녀를 선발할 때 딸을 숨기다가 적발되면 아버지를 처벌했는데, 140명이 여기에 연루됐다. 15~25세의 나이 제한도 풀었다. 연산군의 엽색행각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흥청·운평·광희로 대표되는 기녀들과 관련된 사항일 것이다. 이들에 들어간 비용은 엄청났으며, 운평은 후에 1000명을 더 선발하기도 했다. 이런 여성들에 관해서는 『장화록藏花錄』이라는 책자를 만들어 기록했다. 또 이들을 예우하고자 호화고라는 창고를 따로 설치했는데, 전국의 전세田稅 절반이 이곳으로 들어갔다.
궁인들은 국왕 한 사람에게만 봉사해야 했기에 결혼이 금지됐으며, 기혼자는 강제로 별거해야 했다. 이를 어겼던 한 사례를 들여다볼 만한데, 연산군은 몰래 만나 부부의 정을 나눈 운평 소진주와 남편 하옥정을 능지형에 처한 뒤 시신을 두루 보게 하고 일족도 장 100대를 때린 뒤 전가사변 시켰으며 그녀가 살던 고을도 혁파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자 연산군은 그녀와 이름이 같거나 이름 중에 소笑·진眞·주珠 자가 들어 있는 사람은 모두 고치게 했다. 연산군의 음행은 ‘거사擧舍’라는 시설로도 살펴볼 수 있다. 가마 같은 기구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연산군은 들고 다닐 수 있는 작은 방을 만들어 행차 중에도 성욕이 발동하면 그것을 설치하고 흥청과 음행을 했다. 또한 경회루 연못 옆과 동궁 월랑에 작은 집을 짓고 음행을 즐겼는데, 각각 ‘음궁淫宮’과 ‘음실’로 불렸다. 여성 편력과 관련해 특기할 만한 사항은 신하나 종친의 부인과도 적지 않은 추문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중 월산대군 부인 박씨와 관련해서 논란이 가장 분분한데, 이 책에서는 연산군이 박씨에게 베푼 물품의 종류와 수량을 근얰로 연산군보다 22세 연상인 그녀와의 관계에 심증을 두고 있다.
이처럼 연산군의 채울 수 없는 욕망의 극한은 정무의 태만으로 이어졌다. 갑자사화 이후 죄수들은 죄상이 밝혀지지 않아 수감소는 죄인들이 눕지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재위 11년부터는 모후의 기일에도 유흥을 즐겼고, 폐위 직전에는 모후의 국기를 거행하지 않겠다고 공식적으로 전교했다. 그의 속마음은 “어머님 나이야 길든 짧든 운수라고 단념하지만 나만은 타고난 그대로 살리라”라는 연산군의 시에 가장 잘 담겨 있는 듯하다. 재위 말기 삼엄한 경비를 더욱 확대해나갔음에도 폭군의 불안은 더욱 커졌고 재위 마지막 해에는 거의 체념하는 심리를 보이기도 했다. 재위 열흘도 남기지 않은 시점에 잔치를 열던 연산군은 스스로 피리를 연주하더니 “인생은 풀에 맺힌 이슬 같아서 만날 때가 많지 않은 것”이라는 처량한 시를 읊으며 눈물을 흘렸다.
■ 부왕에 대한 증오 … 시련은 역사적 교훈으로
연산군은 자신의 불행했던 개인사 때문에 부왕과 대비에게 커다란 증오를 드러내며, 부왕이 세운 정치적 정립구도에도 큰 불만을 품었다. 그는 즉위 직후부터 패륜에 가까운 악행을 저질렀는데, 가령 성종의 초빈初殯 때부터 부왕이 기르던 사슴을 쏘아 죽여 구워먹고 부왕의 영정을 걷어 손으로 때렸으며, 나중에는 그것을 표적으로 삼아 활을 쏘기도 했다. 성종이 세운 옛 법률을 모두 폐지하고 성종을 위해 제사를 올리는 사람들을 처벌했으며, 부왕의 기일에 사냥을 하거나 선릉宣陵에서 연회를 베풀기도 했다. 가장 극단적인 행동은 대취하자 선릉을 파오라고 지시한 사례일 것이다.
조선왕조는 연산군 시기의 가혹한 시련을 극복하면서 삼사의 기능과 정치적 정립 구도는 더욱 견고하게 확립되었고, 이제 조선에서 어떤 의미 있는 정치적 변화는 그런 구조를 유지한 상태에서만 이뤄질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여러 변화와 발전이 형성되는 중앙 정치의 운영 원리가 현실에 더욱 견고하게 뿌리내리게 되었다는 측면에서 이 시기의 시련과 극복은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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