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 과거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자들은 과거의 일을 반복하고야 만다.
『미군 점령 4년사: 친일파는 어떻게 기득권이 되었나』는 은폐되고 잘못된 역사를 제대로 조명해야 한다는 저자의 간절함에서 비롯되었다. 이 책의 근간은 1989년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UCLA) 사회학박사 학위 논문으로, 이를 수정하고 현재와 관련한 내용을 추가해서 출간했다. 논문 제목은 「The Impact of U.S. Military Occupation on the Social Development of Decolonized South Korea, 1945~1949」로, 미군 점령 기간에 미군이 한국에 미친 영향을 연구했다. 그 영향은 바로 분단과 친일파 존속이다. 해방 이후 반공이라는 이름에 가려서 우리 역사는 은폐되었고, 진실과 거짓이 뒤바뀌었다. 그것은 독립운동하고 해방 후 사회를 개혁하려는 세력이 거의 좌파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파는 좋고 좌파는 나쁘다는 허상이 바로 미군 점령 시기에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 정권과 친일파가 이것을 이용해 권력을 차지하고 자기 뱃속을 채웠다. 저자 송광성은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온갖 무도한 행위가 결국엔 자기 개인의 영달과 그것을 비호해줄 정권을 위한 충성이라는 것을 말한다. 또 해방하고 미군 점령 시기를 거쳐 이승만 정권에서 청산하지 못한 친일파 세력이 대한민국 판세를 통째로 바꾸었고, 그들이 사회 전 분야에서 기득권층이 되어, 지금까지 나라를 쥐락펴락하고 있다고 전한다.
· 미군정은 3년이고 미군 점령은 4년이다.
미군정은 이승만이 정권을 수립하면서 3년 통치 기간을 끝냈다. 그런데도 미국은 미군을 잔류시켜 1949년 6월 말까지 점령을 이어가면서 형식적으로 독립한 한국 정부를 정치·경제·군사 면에서 사실상 지배했다. 그래서 미군정은 3년이고 미군 점령은 4년이다.
목차
프롤로그
서론
이 글을 쓴 목적
해방 직후사 연구의 반성
이 책의 내용 소개
1장. 조선 민중투쟁과 미국 조선정책의 역사(1876~1945)
1. 조선 민중의 계급투쟁과 민족운동
(1) 동학농민혁명
(2) 민중의 3·1운동
(3) 상해 임시정부와 만주 무장투쟁
(4) 노동자와 농민의 투쟁
2. 미국의 조선정책
(1) 조미 통상조약 이후
(2)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이후
3. 결론
2장 민족자주화운동을 파괴
1. 짧은 해방기간-건준과 인공의 활약
(1) 건국준비위원회
(2) 조선인민공화국
2. 조선총독부에서 미군정 지배로
(1) 정복자들의 군사통치
(2) 억압적 국가기구들
1) 사법제도
2) 남조선국립경찰.
3) 남조선국방경비대
3. 친일파를 친미파로 재조직
(1) 한민당 조직
(2) 한민당 이용
(3) 임정 지도자 귀국
(4) 임정 지도자 이용
4. 혁명적 민족주의자 탄압
(1) 조선인민공화국 부정
(2) 반탁운동 왜곡
(3) 민주주의민족전선 탄압
5. 형식적인 독립: 이승만 정권을 수립
(1) 미군정 법률 계승
(2) 미군정 정책 계승
(3) 계속해서 미국에 종속
6. 결론
3장 사회민주화운동 파괴
1. 미완성 혁명
(1) 노동자자주관리운동
(2) 인민위원회 조직
2. 반혁명적 미군 점령 정책
(1) 노동정책
(2) 토지정책
(3) 쌀정책
(4) 인민위원회 탄압
3. 조선 민중의 항쟁
(1) 9월 총파업
(2) 10월 민중항쟁
(3) 제주 4·3 민중항쟁
4. 반혁명적 이승만 정권과 민중항쟁의 계속
(1) 이승만 정권의 노동 정책과 토지 정책
(2) 여·순 항쟁
5. 결론
4장 조선을 분단
1. 분단의 기원과 직접 효과
(1) 38선은 미국 작품
(2) 조선의 민족통일 파괴
2. 남북통일에 대한 미국 정책
(1) 미소공동위원회
(2) 유엔임시위원단.
3. 조선 민족의 통일 노력
(1) 좌우합작운동
(2) 남북회담
4. 남북에 두 개의 정부를 수립
(1) 대한민국
1) 미국의 남쪽 단독정부 수립 정책
2) 5·10선거와 이승만 정권 수립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소련의 북조선 점령정책
2) 김일성정권의 수립과정
5. 이승만 정권이 분단을 강화
(1) 반공이데올로기
(2) 군사력 증강
6. 결론
결론: 혁명 파괴
1. 자주·민주·통일은 하나의 과제
2. 미군 점령 4년의 유산
에필로그
주요사건 연표(1945-1949)
참고문헌
한글 문헌
영어 문헌
저자 소개
저 : 송광성
함경도에서 태어나 흥남 철수 때 아버지와 거제도로 피난 온 소년이었다. 고향에 어머니와 여동생을 두고 왔기에, 통일은 평생의 염원이었고, 통일을 실현하려는 바람으로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했으며,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1972년 ‘유신헌법’이 공표되어 좌절한 청년은 미국으로 갔다. 당시 미국엔 군에서 근무한 사람이 대학에 가면 장학금을 주는 제도가 있었다. 이에 미국 육군이 되어, 한국 평택과 켄터키 주에서 군...
책 속으로
요즈음 청년 세대에게 ‘미군 점령’이라는 말은 생소할지 모른다. 그러나 1945년 해방 이후 미군이 진주하면서 식민지 조선총독부 건물에는 일장기가 내려지고 성조기가 올랐다. 한반도를 분단하고 남한을 점령한 미군은 지배의 편의를 위해 친일파를 보호하고 이용했다. 이에 따라 해방 후 가장 큰 민족적 과제였던 친일파 청산은 실패했고, 이승만을 앞세운 친일파들은 반공을 앞세워 한국의 지배 세력이 되었다.
--- p.13
미국 군사정부(미군정)는 이승만 정권이 수립되면서 3년의 직접 통치 기간을 끝냈다. 그런데도 미군은 미군사고문단을 남겨 1949년 6월 말까지 한국을 점령하여 형식적으로 독립한 한국 정부를 정치·경제·군사 면에서 사실상 지배했다. 그래서 미군정은 3년이고 미군 점령은 4년이다.
--- p.14
미군이 9월 8일 인천에 상륙하자마자, 곧바로 남조선 전체를 장악해 통치했다고 볼 수 없다. 당시 남조선은 힘의 공백 상태가 아니었고, 민족적 혁명 세력이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러니 미군이 남조선 전체를 점령하려면 이 세력을 파괴해야만 했고, 거기에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 p.23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항복하고 미국 점령군이 9월 8일에 인천에 상륙해서 남조선 전체를 사실상 장악하는 1946년 말까지 우리는 해방 민족으로 민주 사회와 자주 국가를 건설하고자 피나는 노력을 했다. 민중의 소원인 토지개혁과 친일파 숙청을 부분적으로 실천하면서, 혁명적 민족주의 세력이 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활동한 해방의 기간이었다. 8월 15일,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를 조직함으로써 새로운 민족국가 수립을 시작했고, 9월 6일, 건준을 재조직해 조선인민공화국(이하 인공)을 세웠다. 그러므로 미점령군이 남조선에 도착했을 때 우리 민족은 무정부 상태가 아니었다. 인공은 치안대를 이끌어 사회질서를 유지하면서 사실상의 정부 기능을 수행하고, 전국 각 도·시·군·리 별로 조직한 인민위원회 활동을 지휘하며 사회혁명을 진행했다.(Meade, 1951, p8; Sarafan, 1946, p350)
--- p.107
사실 부유한 지주이자 사업가인 자문위원회 의장 김성수는 조선총독부 고문으로 활동한 적이 있고, 전국에서 미움과 불신을 받았다. 한민당의 당수인 송진우는 동경 헌병사령관의 첩자였다. 이용설은 내선일체 운동에 적극적이었고, 전용순은 조선인에게 몰핀을, 일본 군대에 의료기를 팔아 부자가 되었고, 김동원은 일본 통치 아래에서 평양 상공회의소 회장을 지냈다.(Roth, 1946, p221; 길진현, 1984, p235)
그래서 미군정의 ‘자문위원회’는 유명한 친일파들로 구성된 일제의 중앙자문위원회와 유사했다.(Scher, 1973, p18)
이런 부류 사람들 자문을 받는 미군정은 부유한 친일파와 한민당 지도자들이라는 정선된 집단에 에워싸였다. 1945년 가을, 이전 조선총독부 관리였던 사람들은 한민당과 미군정이 동맹자라는 걸 확인했고, 한민당 지도자들은 미군정 관료 조직의 핵심을 통제하게 되었다. 즉, 조병옥이 경무부장, 장택상이 수도경찰청장, 김용무가 대법원장, 이인이 검찰총장이 되었다. 이 4명은 이 직위를 1948년까지 유지했고, 남조선에서 혁명적 민족주의자들을 탄압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 p.159
미군정은 한민당 창당을 돕고 한민당 지도자를 미군정 관료로 두루두루 고용한 뒤에도 몹시 불안했다. 미군정의 동맹자인 보수 국내 우익들이 과거에 친일했다는 경력 탓에,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해 활력 있는 정치 조직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군정 당국자들은 겉으로는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띠면서 속으로는 미군정을 도울 인물을 찾으려고 애썼다 이런 사람이 있다면 거대한 관료 조직의 제일 높은 자리에 앉히고 싶었다.
사실 미군정은 이승만 정권에 권력을 인계할 때까지 미국이 만든 관료 조직에 정당성을 부여할 믿을 만한 조선인 지도자를 샅샅이 찾았다. 이런 상황에서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 지도자들이 미군정의 지지를 얻었다.
--- p.160~161
하지는 미군정을 위해 김구가 얼마나 소중한지는 “고깃국에 필요한 소금 같다.”(Journal, 1945년 11월 2일; Cumings, 1981, p192에서 재인용)라고 표현할 정도였으니, 김구에게도 특별한 지위와 특권을 주었다. 김구가 서울에 온 다음날, 군정장관은 사령관실에 서울의 신문 기자들을 모아놓고 김구를 소개했다.(Robinson, 1947, p60)
미군정은 덕수궁에 임시정부 본부를 마련해주고, 미군 헌병이 경비를 섰다. 또 교통수단을 제공하고 미군정이 다른 단체에는 무기반납을 명령하고는 김구 개인 수행원이 무기를 지니는 것은 허용했다.(Scher, 1973, p19; Robinson, 1947, p66)
--- p.165
미군정이 인공을 조선 정부로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인공의 활동을 불법화한 것은 혁명적 민족주의 세력 탄압의 서곡이었다. 미점령군은 모든 기회를 이용해 혁명적 민족주의자는 탄압하고 반혁명적 사대주의자는 지원했다. 조선을 신탁통치한다는 강대국들의 계획은 미군정이 민족주의적 반탁운동을 왜곡해 그것을 반공주의 운동으로 변질시키면서 민족주의 세력을 탄압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신탁을 둘러싼 혁명적 민족주의자와 반동적 친미파 사이의 투쟁은 남조선 정치에서 민족주의자 우세에서 친미파의 지배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신탁 문제를 둘러싼 투쟁은 1945년 12월 28일에 모스크바선언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미국, 영국, 소련 외상이 서명한 이 선언에 앞으로 5년 동안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이 조선을 신탁통치한다는 구절 때문이다.
--- p.176~177
출판사 리뷰
해방 80년, 친일파는 왜 다시 발호하는가?
친일파는 왜 아직도 거대한 기득권으로 존재하는가?
일제 통치의 기득권은 누구였고, 해방 후 기득권은 누가 차지했고,
2024년 현재의 기득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그리고 그 기득권은 누구에게서 어떻게 왔는가?
기득권(旣得權)은 ‘이미 얻은 권리’이다. 이 세상 누구일지라도 과거 현재를 불문하고 자신이 이미 얻은 권리를 순순히 뺏기지는 않는다.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기득권일지라도 강경하게 저항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물며 아주 사소한 것도 그러한데, 그것이 권력(勸力)이고 자본(資本)이고 부(富)라면 목숨을 걸고서도 강력하게 저항할 것이다. 보통의 생각보다 훨씬 더 강고하게! 수단을 가리지 않고!
· 이 책의 출간 의도
이 책의 출간 목적은 미군 점령 4년을 제대로 조명함으로써 은폐하고 왜곡한 역사적 사실을 살피고, 역사적으로 기득권은 어떻게 변했고, 누가 어떻게 유지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 정복자인가? 해방자인가?
1945년 9월 9일 중앙청 하늘에 일장기가 내려가고 태극기가 아닌 성조기가 올라갔다. 여기서부터 한국 근대사가 휘청거린다. 태극기가 아니고 성조기로 뒤바뀐 이날의 장면은 미국이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란 것을 의미하는 역사적 상징이다. 미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의 말처럼 미국이 오로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목적으로 남조선을 점령했다면 일본이 항복하고 몇 주가 지나서 미국은 마땅히 철수해야 했다. 당시 소련은 미국에 한반도 동시 철수를 제안했지만, 끝내 미국은 조선을 분단하고 남조선을 반공 기지로 만들어, 지금까지도 한국을 반공 이데올로기에 묶어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 소련에 맞서는 반공 기지로써만 한국을 인식하는 미국
미군은 1945년 9월 8일 인천에 상륙하자마자, 곧바로 남조선 전체를 장악해 통치할 수 없었다. 당시 남조선은 힘의 공백 상태가 아니었고, 민족적 혁명 세력 건국준비위원회는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러니 미군이 남조선 전체를 점령하려면 이 세력을 파괴해야 했는데, 그들은 한민당을 이용하기로 한다. 한민당은 미군의 총칼이 되어, 민족주의자들의 심장을 겨누었다.
· 미군정의 얼굴마담, 이승만
해방 당시에는 세계적인 추세에 따라 조선의 애국지사는 거의 사회주의자였다. 그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사회주의는 매우 팽배했었다. 이에 겁먹은 미군은 혁명적 좌파에 맞설 얼굴마담을 물색하던 중 이승만을 선택한다. 이승만은 이 호의에 보답하여 조선 민중이 그에게 준 민족의 지도자라는 신임을 미군정 정당화에 힘썼다.
· 해방 80년, 친일파가 아직껏 발호하는 이유는
정치·경제·법조·언론·학계·군·경 등 사회 전 분야에 뿌리내린 친일 기득권이 여전히 면면히 이어져 왔고 아직도 강고하게 건재하기 때문이다. 저들은 자신의 더럽고 추악한 친일 부역 행위를 은폐하기 위해서 ‘민주주의자’라는 탈을 쓰고, ‘반공’이라는 거짓 무기로 무장했다. 그리고 기꺼이 ‘자유 국가를 위하여’라고 ‘자유민주주의’를 외친다.
* 출처 : 예스24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37109458>
'37.대한민국 현대사 (독서>책소개) > 1.해방전후.미군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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