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대한민국 현대사 (책소개)/1.해방전후사.미군정

해방일기 6권

동방박사님 2021. 11. 28.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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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조선을 냉전의 길로 몰아넣은 이승만의 승리”

김기협의 『해방일기』는 해방공간의 한국 정치 지형을 ‘좌우 대립’이 아니라 중간파와 좌우 양극단의 갈등으로 파악하자는 ‘중극 대립’의 시각으로, 학계 안팎의 지식인과 시민사회에서 갈수록 반향을 얻고 있다. 해방공간 전반기를 돌아 1947년 1월에서 4월까지 시공간을 다룬 『해방일기 6권 - 냉전에 파묻힌 조선 해방』이 출간되었다.

1946년 12월 초순 이승만은 미국으로 떠났다. 이때까지 이승만의 위상은 김구, 김규식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4개월간의 미국 체류에서 돌아온 이승만은 경쟁자들을 확연히 따돌리고 분단 건국을 통한 권력 장악을 향해 치달려가게 된다. 1947년 이승만의 득세는 무엇을 발판으로 한 것이었던가?

안재홍의 민정장관 기용은 1946년 여름 이래 계속되어온 미군정의 좌우합작 지원의 흐름 속에 이뤄진 일이었다. 미군정의 중도파 등용에 이승만은 하지를 용공 ‘빨갱이’로 매도하면서 격렬히 부딪친다. 이승만의 미국 체류 중에 나온 트루먼독트린은 남조선의 분단 건국과 이승만의 권력 장악을 향한 길을 뚜렷하게 만들어준다.

목차

머리말 조선을 냉전의 길로 몰아넣은 이승만의 승리

1 반탁운동 재개와 건국 노선 갈등
1947년 1월 2 ~ 30일


1947. 1. 2. 김구와 한독당, 노선이 보이지 않는다
1947. 1. 4. 입법의원을 둘러싼 동상이몽(同床異夢)
1947. 1. 9. 미군 전용 열차 강간 사건, 당한 것은 그들뿐이 아니었다
1947. 1. 11. 하지의 ‘변절’에 분노한 반탁 세력
1947. 1. 13. 모리배와 탐관오리, 빙산의 일각을 본다
1947. 1. 16. 미군정 ‘조선인화’는 어떤 조선인에게로?
1947. 1. 18. “이승만·김구·하지의 동상이몽”
1947. 1. 20. 우익에게 ‘공공의 적’이 된 김규식과 합작위원회
1947. 1. 23. 맛만 보고 도로 빼앗긴 ‘설날’
1947. 1. 27. “뼛속까지 친미파?” 이승만 앞에 부끄러워하라
1947. 1. 30. ‘반역 집단’으로 몰리는 좌우합작위원회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분단만은 안 돼!” 백범께서 나서주셨으면

2 김구·이승만의 동상이몽
1947년 2월 1 ~ 29일


1947. 2. 1. 천도교청우당이 “조선노동당의 외곽 단체?”
1947. 2. 3. 김구, 어디까지 애국자였고 어디서부터 정치인이었나?
1947. 2. 8. 행정권을 맡기며 경제권을 안 주는 ‘조선인화(Koreanization)'
1947. 2. 10. 김구가 반탁운동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
1947. 2. 12. “반탁 세력, 너희들 속셈은 밝혀졌다”
1947. 2. 15. 하지의 ‘소환’에 어떤 의미가 있었나?
1947. 2. 17. 존 하지, 다른 데서 필요치 않아 조선에 보내진 인물
1947. 2. 20. ‘고문(拷問)권 수호’를 위한 경찰서장들의 ‘데모’
1947. 2. 22. 장개석 눈에 이승만이 어떻게 보였을까?
1947. 2. 24. 남조선 해방 정국의 축도(縮圖) ‘국대안 파동’
1947. 2. 29. “가짜 김일성” 설은 박헌영이 시작?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민정장관, 자신 있어요?

3 외세에 따른 분단 건국 vs. 통일 건국
1947년 3월 1 ~ 28일


1947. 3. 1. ‘도둑적으로 완벽’했던 장택상
1947. 3. 2. 남쪽의 선거와 북쪽의 선거, 어떻게 달랐나?
1947. 3. 7. ‘군대’를 ‘군대’라 부르지 못하고......
1947. 3. 9. 김구, “이승만 없는 사이에......”
1947. 3. 12. ‘해방군’의 허실을 보여준 그리스 내전
1947. 3. 14. 전 세계 공산주의 운동을 배신한 스탈린
1947. 3. 16. 마카오에서 온 ‘보물선’
1947. 3. 19. 한반도로 밀려온 트루먼독트린의 쓰나미
1947. 3. 21. 장택상, 어떤 사람이었나?
1947. 3. 21. 절제된 파업, 절제 없는 검거
1947. 3. 23. 여운형이 뉴델리에 갔더라면!
1947. 3. 26. 친일파 문제를 묵살하는 미군정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외세에 대한 태도로 갈라지는 정치 노선

4 미군정, 친일파에게 친미파의 길을 열어주다
1947년 4월 2 ~ 30일


1947. 4. 2. 중국의 국공내전에 북조선 군대가 참전?
1947. 4. 4. 테러범, 경찰, 동아일보 합작의 블랙코미디
1947. 4. 9. 미군정의 ‘엿장수 군정 재판’
1947. 4. 11. 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미소공위 재개!
1947. 4. 16. 미군정의 친일파 ‘재활용’ 정책
1947. 4. 18. 친일파의 나라, 잔짜 책임은 미(美)에 있다
1947. 4. 20. ‘민족주의 진영’의 허와 실
1947. 4. 23. “외교에는 귀신?” 이승만 방미 외교의 실체
1947. 4. 25. 이승만, 임정을 등지다
1947. 4. 27. 서재필이 오면 이승만을 누를 수 있을까?
1947. 4. 30. 서울시 학무국 마틴 고문, 어글리하지 않은 미국인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사악함’보다 ‘우둔함’이 더 문제
 

저자 소개 

저 : 김기협
 
195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이공계 수석으로 물리학과에 입학한 뒤, 사학과로 전과한 보기 드문 배경의 역사학자다. 문명사의 거시적인 관점에서 우리 역사와 동아시아 역사를 바라보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으며, ‘역사에세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통해 독자들과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경북대학교에서 중국 고대 천문학 연구로 석사학위를, 연세대학교에서 마테오 리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
 

책 속으로

1945년 말 반탁운동의 초점은 ‘임정 봉대’에 있었다. 모든 우익이 이에 참여했고 경찰과 군정청 직원들도 집단적으로 이에 동조했다. 김구 등 임정 세력은 1년이 지나 반탁운동을 다시 일으키면서 ‘임정 봉대’를 또 그 초점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런데 사정은 1년 전과 크게 달랐다. 임정 자체가 비주류의 이탈로 위신이 손상되었을 뿐 아니라 반탁 세력 안에서도 임정 봉대 아닌 다른 목표가 떠올라 있었다. 한민당·이승만 세력의 단독정부 추진이었다. 임정 봉대는 미·소 점령군의 권위를 아울러 부정하며 남북을 아울러 대표하는 ‘민족정부’를 표방한 것인데, 단독정부 추진은 소련을 배척하며 미국에 의지하자는 것이었다.
서중석은 반탁운동의 구호 자체보다 실질적 의미를 분석할 필요를 지적한다. 민족 자주 국가의 ‘즉시 독립’ 요구가 그 구호인데, 그를 위한 구체적 방법과 수단이 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구호와 별개의 정치적 의도가 그 뒤에 깔려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서로 다른 정치적 의도를 가진 세력들이 하나의 구호로 뭉쳐져 있었기 때문에 반탁운동은 동상이몽의 침대였을 수 있다고 한다(『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527쪽).
1945년 말 시점은 ‘단독정부’란 말을 아무도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할 때였다. 식민지 시대 기득권을 지키고 싶거나 친일파 처단을 면하고 싶은 세력이 3상회의 결정 수행을 어렵게 만드는 반탁운동에 열심히 참여하면서 내놓을 수 있는 명분이 ‘임정 봉대’뿐이었다. 그런데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위 정회 후 임정 봉대보다 훨씬 더 그들 입맛에 맞는 방안을 이승만이 제시했다. ‘단독정부’였다.
---1947. 3. 9. 일기

출판사 리뷰

반탁운동 재개와 건국 노선 갈등, “뼛속까지 친미파? 이승만 앞에 부끄러워하라”

1947년 초, 사람들의 이목은 미소공위 재개 여부와 반탁 문제에 쏠려 있었다. 당시 이남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인 이승만·김구·김규식의 세력 다툼은 긴장을 높여간다. 김구는 신탁통치를 이유로 3상회의 결정을 반대하고 군정에 협조하지 않는 노선을 견지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반탁운동을 업고 조선 문제를 연합국의 손에서 빼내 유엔에 가져감으로써 분단 건국을 꾀하고 있었다. 김규식은 조선 건국이 연합국의 합의에 따라 이뤄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김구와 이승만의 영도력을 하늘같이 받들던 안재홍이 이제 그들을 떠나 김규식의 노선을 따라 나서고 있었다.
반탁운동은 김구와 이승만이 협력하는 기본 틀이었지만 서로 다른 의미가 있었다. 김구는 미·소의 영향력을 모두 물리칠 것을 주장하며 “즉시 독립”을 외친 것이므로 그의 반탁은 액면 그대로의 반탁이었다. 반면 이승만의 반탁은 모스크바 협정에 따른 연합국 공조를 파괴함으로써 조선을 미국의 영향 아래 밀어 넣기 위한 계략이었다. 미국과의 관계를 이용하는 데 자신이 있었던 이승만은 조선을 미국의 영향 하에 두는 것이 자기가 권력을 쥘 수 있는 길로 보았다. 이 차이가 통일 건국의 길과 분단 건국의 길로 갈라진다. 1946년 초의 제1차 반탁운동 때는 이승만의 분단 건국 노선이 아직 명확하지 않았다. 그러나 1946년 6월 ‘정읍 발언’ 이후 이승만은 분단 건국 노선을 명백히 드러내고 추진해왔는데 1946년 12월부터 1947년 3월까지의 미국 체류가 거의 결정적이었다.
이승만은 미국에 있는 동안 미군정의 좌우합작 지원을 용공정책으로 매도하며 공화당 극우파의 환심을 산다. 민주당 지지자인 하지 사령관을 빨갱이로 몰아붙이다시피 했다. 격분한 하지는 이 무렵의 한 편지에서 이승만을 ‘개새끼’ 수준의 욕으로(son of bitch) 지칭하기까지 했다. 마침 미국의 대공산주의 대결 정책인 1947년 3월 12일 트루먼독트린이 발표된다. 그리스와 터키의 공산화를 막기 위한 막대한 원조를 의회에 요청하는 연설이었다. 조선에도 그리스, 터키와 비슷한 대규모 원조를 제공할 가능성이 바로 떠오른 것이다. 트루먼독트린은 이남의 분단 건국과 이승만의 권력 장악을 향한 길을 뚜렷하게 만들어주었다.
1947년 4월 21일 이승만은 개선장군의 모습으로 귀국했다. 좌우합작을 지원한다고 하지 사령관을 용공 분자로 몰 때는 미친 사람처럼 보였으나 미국이 대 공산주의 대결 정책을 국가 기본 정책으로 내건 이제 그의 분단 건국 주장이 선지자의 예언처럼 보이게 되었다.


분단 건국 대 통일 건국 “김구, 어디까지 애국자였고 어디서부터 정치인이었나?”

김구와 이승만은 해방 두어 달 후 귀국한 이래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다. 한 살 아래인 김구가(1876년생) 이승만을 ‘형님’으로 모시는 모양새였다. 김구가 이승만과 완전히 결별하는 것은 1948년 1월 중도파의 남북협상론에 가담할 때의 일이다. 많은 연구자들이 의아해하는 문제는 이 결별이 왜 그렇게 늦었냐는 것이다. 1947년 4월 이승만이 귀국할 때까지도 이승만의 분단 건국 노선이 되돌릴 수 없는 길이 되어버린 사실을 김구가 깨닫지 못하고 있을 수 있었을까?
저자는 이 책에서 1946년 12월 이승만이 미국으로 떠날 무렵의 상황을 서술한 정병준 교수의 『우남 이승만 연구』627~635쪽을 인용하며 당시 김구와 이승만이 합의한 내용으로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을 위해 노력할 것”이란 사실에 주목한다. 김구는 민족주의 상징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인물이며 분단 건국을 지지한 일이 없는 사람이다. 오히려 “38선을 베고 죽겠다”는 처절한 외침을 남긴 민족주의자다. 그런 그가 이승만과 함께 단독정부 수립 노력에 합의할 수 있었을까?
김구는 신탁통치만이 아니라 군정까지도 부정한다는 점에서 이승만과 달랐다. ‘외세 거부’라는 점에서 민족주의자로서 순수성을 떠올리게 하기도 하지만, 저자는 이에 대해 “백범은 미국과 소련보다 중국의 영향력을 원했던 것”이며 “김구의 중국 국민당 정부에 대한 의존 자세에는 민족주의의 기준을 벗어나는 점이 없지 않았다”고 해석하면서 자신이 주도권을 쥘 수만 있다면 분단 건국도 감수할 용의가 있었으리라 추론한다. 김구가 역사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김구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동정한다. 그러나 저자는 1946년에서 1947년에 걸쳐 민족 지도자로서 그가 맡은 역할에 대해 냉철하게 살펴보기를 권한다.

『해방일기』 시리즈 소개

역사학자 김기협의 해방일기,
65년 전의 ‘오늘’에서 민족의 미래를 찾는다


몇해 전부터 왕성한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는 김기협은 특이한 배경의 역사학자다. 1968년 서울대 이공계열 수석으로 물리학과에 입학했다가 1년 후 사학과로 전과해서 중국사 전공을 시작한 뒤 석사과정은 경북대에서, 박사과정은 연세대에서 수학했다. 1990년 대학교수를 그만둔 이후 칼럼니스트와 번역가로 활동하다가 근년 들어 본격 저술활동을 시작했다.
그런 그가 환갑을 맞은 2011년 8월 1일 『해방일기』를 쓰기 시작했다.(?프레시안? 연재) 목표는 2013년 8월 31일까지 37개월간. 1945년 8월 1일 해방 전야부터 1948년 8월 31일 대한민국 건국 무렵까지의 기간 동안 ‘65년 전의 오늘’을 되살리는 작업이다.
8월 1일자 첫 회에서 김기협은 선친의 전쟁일기를 언급했다. 『역사 앞에서』의 저자 김성칠 교수가 그의 선친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60년 전 세상을 떠난 선친을 스스로 들먹인 데서 새 작업에 대한 만만찮은 각오를 느낄 수 있다.

(…)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독자께서는 바로 제 아버님을 떠올리시겠죠. 그렇습니다. 이 작업에는 아버님의 전쟁일기를 흉내 내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전쟁이란 상황에 마주쳤을 때 한 역사학도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힘껏 모색하신 것이 그 일기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 역시 통상적인 서술 방법으로 한계를 느끼는 주제 앞에서 제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으로 『해방일기』에 착수합니다.
(…) 이 막막한 작업에 구상이 떠오른 지 불과 한 달 만에 착수하고 있다는 사실부터 어리둥절합니다. 가만 생각하면 바로 이런 성격의 작업을 위해 지금까지의 제 인생이 배치되어 온 것이 아닌가, 운명적인 생각까지 듭니다. (…)

그 후 3년 넘는 동안 매주 100여 매씩 글을 올렸다. 생각해 보면 황당한 일이다. 지금 1주일 동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을 누군가가 150매 분량으로 정리해준다면 재미있게 읽을 독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하물며 65년 후의 어느 필자가 그런 일을 할 때 그것을 참을성 있게 읽어줄 65년 후의 독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럼에도 이런 서술을 꾸준히 읽어주는 독자가 날로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 어쩌면 놀라운 일이다. 그 방대한 서술에 독자들이 질리지 않게 해주는 것이 무엇일까?

(1) 『해방일기』에는 현장감이 있다. 저자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 사이의 ‘대화’보다 ‘씨름’으로 보고, ‘대화록’을 정리해주기보다 ‘생중계’를 펼치겠다고 나선다. 65년 전 상황의 ‘생중계’라니! 말이 안 되는 소리 같지만, 그 대상이 ‘해방공간’이라서 그 필요가 성립된다. 한국현대사의 결정적 기로였던 그 시기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아직도 차단과 굴절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생중계’가 반가운 것이다.
“나는” 하고 거침없이 나서는 주관성이 현장감을 북돋워준다. 저자는 전문가로서의 책임감보다 동시대인으로서, 이웃으로서 독자들과의 연대감을 앞세운다. 주어진 자료와 연구결과를 놓고 독자들과 같은 입장에 서서 최선의 해석을 추구하는 것이다. 객관성을 최대한 확보하려 애쓰지만 그 한계에 이를 때는 한계를 서슴없이 인정함으로써 독자의 주체적 판단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준다.

(2) 『해방일기』는 정치적 시각을 넓혀준다. 저자는 이 사회에서 ‘진보적’ 인사로 흔히 간주되는 사람인데도 스스로 ‘보수주의자’를 자처해 왔다. 그는 이 작업에서 “원칙과 상식을 중시하는 중도의 힘을 키우기 바라는 마음”을 밝힘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분명히 했다. 그가 내세우는 ‘원론적 보수주의’는 역사만이 아니라 지금의 한국 정치상황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준다.
해방공간의 정치 상황은 지금까지 ‘좌우 대립’을 위주로 풀이되어 왔다. 저자는 ‘적대적 공생관계’로 맺어진 극좌와 극우가 함께 중도파를 억압하고 침식하고 봉쇄하던 상황을 그려 보인다. 원칙과 상식에 따르려는 중도파와 이해관계에 얽매인 극단파 사이의 ‘중극(中極) 대립’의 새 그림을 내놓는다. 원칙과 상식을 따르는 다수가 강력한 동기를 가진 소수 집단의 집요한 도발에 굴복한 해방공간의 상황이 65년 후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저자는 본다.

(3) 『해방일기』는 풍부한 관점을 제공해준다. 저자는 한국현대사 연구자가 아닐 뿐더러 학술논문 위주의 표준적 학술활동에서 벗어나 자기 식으로 오랫동안 공부해 온 사람이어서 일반 역사학자와 다른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다. 그중에는 문명사가의 관점도 있고 저널리스트의 관점도 있다.
원자폭탄의 등장은 우리 해방공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 폴란드, 노르웨이, 오스트리아, 일본, 중국 등지에서 펼쳐진 상황에 비추어 우리 ‘해방’의 의미를 다시 음미해 볼 점은 없는가? 미국과 소련은 당시에 어떤 변화를 겪고 있었고, 그 변화가 우리의 해방공간에 어떻게 투영되었는가? 근대적 변화가 억압체제를 통해 민족사회에 작용한 구조는 어떠한 것이었는가? 등등 해방공간의 실질적 이해에 도움이 되는 관점들이 이 작업에서 새로 제시된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20여 년 전 해방공간을 향해 이 사회의 시야를 열어주었다. 수십 년 동안 해방공간을 철저히 가로막아 온 반공체제의 장벽에 구멍을 뚫어 사람들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었다. 이제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벽을 치워버리고 통째로 바라볼 때가 되었다. 만져보고, 쓸어보고, 현미경도 들이대보고, 성분조사도 해볼 때가 되었다.
20년 전 젊은 세대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가진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으로 그 내용을 씹어 삼켰다. 상식이 철저히 봉쇄된 상황에서 벽에 뚫린 구멍을 통해 상식의 편린에라도 접하는 것이 너무 황홀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식과의 모처럼의 만남이 일으키던 황홀함은 빛이 바랬다. 충격적인 황홀함보다 차분한 이해를 늘리기 위해 ‘인식’을 더 심화시킨 ‘재인식’이 나올 때가 되었다. 그런데 연전에 나온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은 인식의 심화가 아니라 인식의 전복을 위해 나온 것이었다.
저자가 한국근현대사 서술에 나선 계기가 3년 전의 『뉴라이트 비판』 작업이었다. ‘대한민국 체제’를 절대적으로 옹호하기 위해 역사를 자의적으로 왜곡하는 뉴라이트 진영의 입론 방식을 그는 그 작업에서 비판했다. 이제 그는 『해방일기』를 통해 뉴라이트 진영의 입론 내용을 반박하고 있다. ‘대한민국 체제’의 구조적 문제점을 밝히는 것이 이 작업의 기본목적의 하나다.
저자는 『해방일기』가 특정 진영에 대한 반박을 넘어 『해방전후사의 인식』의 보완이 되기 바란다. 벽 틈의 구멍으로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래는 단계를 넘어 독자들이 해방공간의 역사를 품에 끌어안고 마음껏 어루만질 수 있게 해주고 싶은 것이다. 65년 전에는 우리 민족사회의 건강한 정신이 아직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그 이후 억눌려 온 그 정신을 지금이라도 되살리는 것이 민족사회의 장래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독자들과 함께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해방일기 상편
해방일기 1권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1945. 8 ~ 10, 일본의 항복)
해방일기 2권 해방을 주는 자와 해방을 얻는 자(1945. 11 ~ 1946. 1, 신탁통치안)
해방일기 3권 소련군의 해방과 미군의 해방(1946. 2 ~ 4, 미소공위 개막)
해방일기 4권 반공의 포로가 된 이남의 해방(1946. 5 ~ 8, 좌익 탄압)
해방일기 5권 길 잃은 해방이 가져온 비극(1946. 9 ~ 12, ‘대구폭동’)

해방일기 하편
해방일기 6권 냉전에 파묻힌 조선 해방(1947. 1 ~ 4, 이승만의 승리)
해방일기 7권 깨어진 해방의 약속(1947. 5 ~ 8, 미소공위 결렬)
해방일기 8권 의미를 잃어버린 해방(1947. 9 ~ 12, 김구의 몰락)
해방일기 9권 해방된 자, 누구였던가(1948. 1 ~ 4, 친일파의 득세)
해방일기10권 해방을 끝장낸 분단 건국(1948. 5 ~ 8, 대한민국 탄생)

추천평

『해방일기』를 읽으면서 통쾌하면서 낄낄댔던 부분이 바로 대담한 해석과 과감한 추측입니다. 그리고 가장 돋보이는 대목은 ‘한 일’이 아니라 ‘안 한 일’에 주목한 것입니다.
한홍구(성공회대 교수,『대한민국사』저자)
저자가 해방 정국을 통해 찾아낸 것은 오늘의 비이성적인 정치의 기원이었습니다.
박태균(서울대 교수,『한국전쟁』저자)
김기협의 『해방일기』에는 『해방전후사의 인식』 이후 근 20년 동안 축적된 한국 현대사 연구의 성과가 망라되어 있습니다.
장정일(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