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대한민국 현대사 (책소개)/1.해방전후사.미군정

해방일기 7권

동방박사님 2021. 11. 28.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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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해방공간’의 역사적 의미를 되살리는 역사학자 김기협의 대장정, 그 일곱 번째 책『해방일기 7권 - 깨어진 해방의 약속』은 1947년 5월에서 8월까지 해방 2주년을 맞는 넉 달간을 다룬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되고 쌍방 대표단이 열심히 회담에 임하면서, 순조로운 건국에 대한 희망이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나 회담 재개 후 두 달이 지난 7월 중순에는 회담의 성공을 바라기 어려운 분위기로 돌아서고 있었다. 한민당과 이승만·김구 세력은 반탁을 핑계로 미소공위에 돌을 던졌고, 박헌영이 이끌던 조선의 공산주의 세력은 좌익 내의 헤게모니에 집착했다.

김기협 선생은 미소공위가 좌초된 가장 큰 이유를 7월 중순 미국이 느닷없이 미소공위를 버린 것에 있다고 본다. 6월 말 마셜플랜에 대한 소련의 거부 방침이 확인되면서 소련과의 전면적 대결정책으로 휩쓸리게 된 것이 배경이라는 것이다. 미소공위 파탄의 징후가 분명하게 나타난 것은 미국 측 브라운 수석대표의 7월 16일 성명에서였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좌우합작·남북합작을 추진해왔던 여운형의 암살은 민족주의자, 민주주의자들의 희망을 꺾은 결정적 사건이었다.

65년 전의 ‘오늘’에서 민족의 미래를 찾는 김기협의 『해방일기』. 1945~48년 해방공간으로 ‘타임 슬립’한 역사학자 김기협의 『해방일기』는 원고지 매수로 1만6380매의 대장정으로, 『해방일기』시리즈는 편집 작업을 거쳐 2014년 12월에 모두 10권으로 완간될 예정이다.

목차

머리말 냉전의 시작과 미소공동위원회의 파탄

1. “이 박사 지령 앞에 무서울 것이 없다”
1947년 5월 2~29일

1947. 5. 2. 대한민청과 조선민청 해산 명령은 ‘상호주의’?
1947. 5. 4. 미국의 ‘원조’는 냉전의 ‘무기’
1947. 5. 9. 고리짝 속에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1947. 5. 11. 동아일보와 장택상의 합작 ‘빨대질’
1947. 5. 14. 만 25세 선거권? 너무했다!
1947. 5. 16. “무서울 게 어디 있어? 이 박사 지령인데”
1947. 5. 18. 10년 신탁통치를 기꺼이 받은 오스트리아
1947. 5. 21. 뜻이 있는 자에게는 돈이 없었다
1947. 5. 23. 미소공위 재개 앞에서 딴짓하는 이승만
1947. 5. 25. 김기, 지지 기반이 무너진다
1947. 5. 29. 대형 사기사건 배경에는 언제나 군정청이······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조선 독립을 더 어렵게 만든 미군정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7년 5월

2. 미소공위, 성공의 희망이 보인다
1947년 6월 1~29일

1947. 6. 1. 대한민국 국회의 ‘숫자로 밀어붙이기’ 전통
1947. 6. 4. 미소공위 재개에 임한 중간파의 움직임
1947. 6. 8. 여운형이 자식들을 평양으로 보낸 이유
1947. 6. 11. 미소공위, 드디어 ‘건국 백서’를 내놓다
1947. 6. 13. 감나무 밑에 입 벌리고 누워 있는 남로당
1947. 6. 15. 나쁜 놈. 약은 놈, 멍청한 놈
1947. 6. 18. 마셜 미 국무장관은 미소공위 성공을 원했다
1947. 6. 20. 중간파도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1947. 6. 22. 시위대 대표 노릇을 한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1947. 6. 25. 민정장관 안재홍의 고군분투
1947. 6. 27. 하지의 직격탄, “이승만 씨, 테러를 그만두시오”
1947. 6. 29. 도지사 바꾸기도 벅찬 ‘허수아비 민정장관’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김구 선생님, 왜 우리 마음을 버리십니까?”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7년 6월

3. 여운형의 죽음에서 조선의 현실을 본다
1947년 7월 2~30일

1947. 7. 2. 조만식도 ‘반탁’에서 물러섰는데······
1947. 7. 4. 정판사사건의 김홍섭 검사와 곽노현 사건의 김형두 판사
1947. 7. 6. 극좌와 극우는 정치세력이 아니라 정치파괴세력
1947. 7. 11. 느닷없이 “배 째라!”로 돌아선 미국 대표단
1947. 7. 13. 마셜의 태도가 바뀌는 조짐이 보인다
1947. 7. 16. 경찰을 범죄조직으로 만들어낸 조병옥과 장택상
1947. 7. 17. 밫은 작고 그림자는 컸던 박정희의 쿠데타
1947. 7. 20. 여운형 선생 65주기를 맞아
1947. 7. 23. 음미할 여지가 있는 후버 전 대통령의 ‘망언’
1947. 7. 25. 전략가 여운형과 전술가 박헌영
1947. 7. 30. “브라운 소장, 당신마저!”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여운형은 누가 죽였는가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7년 7월

4. 미국은 미소공위를 버리고 어디로 가는가?
1947년 8월 1~31일

1947. 8. 1. 3년차로 접어들며, “역사의식의 결함” 박근혜만의 것인가?
1947. 8. 6. ‘주인 없는 들개’가 된 ‘권력의 주구’ 경찰
1947. 8. 8.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한국전쟁의 기원』
1947. 8. 13. “커밍스가 상식 이하?” 전상인, 너무 웃긴다
1947. 8. 15. 해방 2년, 되살아난 경찰의 위세
1947. 8. 17. 러치 군정장관, ‘이승만의 사람’이었나?
1947. 8. 20. 마셜 국무장관, 미소공위 폐기 선언 직전!
1947. 8. 22. 소련, “회담을 하자는 거야, 말자는 거야?”
1947. 8. 24. 미국의 승부수, 총선거
1947. 8. 26. 이승만과 김구의 ‘정책이념 차이“
1947. 8. 29. “독도는 우리 땅!” 힘 있게 외치려면
1947. 8. 31. 미소공위를 버리는 미국의 수순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조병옥과 장택상의 “진짜 야비한 이간질”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7년 8월
 

저자 소개

저 : 김기협
 
195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이공계 수석으로 물리학과에 입학한 뒤, 사학과로 전과한 보기 드문 배경의 역사학자다. 문명사의 거시적인 관점에서 우리 역사와 동아시아 역사를 바라보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으며, ‘역사에세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통해 독자들과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경북대학교에서 중국 고대 천문학 연구로 석사학위를, 연세대학교에서 마테오 리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
 

책 속으로

1947년 5월 20일 이승만은 미소공위 참여의 조건 두 가지를 내걸었다. 1) 신탁통치 조항 삭제 2) 어떤 식의 민주주의인지 밝힐 것. 쉽게 말해서 미소공위를 무시하고 그 결렬을 바란다는 것이다. 1)은 모스크바결정을 뒤집어야 한다는 것인데, 모스크바결정의 실행기구인 미소공위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2)는 ‘미국식’ 민주주의와 ‘소련식’ 민주주의를 대비함으로써 미·소간의 대립을 부추기는 것이다. 엊그제 일기에서 밝힌 것처럼 이승만과 미국 정부 사이의 ‘밀약설’이 떠돌고 있었다. 누가 퍼뜨린 소문인지는 빤한 일이다. 밀약설의 내용인즉, 미국 정부가 남한 단독정부를 세워 이승만에게 맡기기로 했다는 것이다. 하지 사령관보다 ‘윗선’에서 남한에 괴뢰국가를 만들기로 이승만과 약속을 했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1946년 12월 미국으로 떠나면서부터 하지와 완전히 결별했다. 미국에서는 하지가 용공주의자라고(심지어 공산주의자라고까지) 인신공격을 했고, 조선에서는 하지 같은 ‘아랫것’들이 모르는 밀약을 미국 정보와 맺었다는 소문을 냈다. 그 허위선전의 도가 심했기 때문에 하지가 이승만의 주장을 모아 국무성에 보내 진위를 밝혀줄 것을 요청했고, 그 결과 이승만의 주장을 반박하는 국무성 발표가 5월 23일에 나온 것이다. 이승만은 이처럼 하지를 묵살하고 분단건국의 길로 일로매진하는 입장이었으니 미소공위도 무시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반탁진영에서도 김구 세력과 한민당의 입장은 이승만과 차이가 있었다.
김구 세력은 이승만처럼 분단건국을 지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미소공위를 반대하는 입장은 이승만과 통했다. 미소공위의 가장 큰 목적이 새로운 임시정부를 만드는 것인데, 김구 세력에서는 중경에서 돌아온 임정이 임시정부 역할을 맡기 바랐다. 한민당은 이념을 가진 정당이라기보다 눈치를 봐서 자기네 이익을 늘리고 손해를 줄이기에 급급한 이익집단이었다. 어떤 건국 방향에라도 참여해서 자기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작용하고 싶어했다. 그러니 미소공위에도 일단 참여해놓고 보자는 입장이었다.
-1947. 5. 25. 일기 중에서

1947년 8월 중순 민정장관 안재홍의 명령에 따라 과도정부 독도조사단이 만들어졌다. 역사학자인 국사관 관장 신석호, 외무처 일본과장 추인봉, 문교부 편수사 이봉수, 수산국 기술사 한기준의 네 명으로 구성된 조촐한 조사단이었다. 그런데 네 명의 조사단이 8월 16일 대구에 도착한 후 일행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경상북도 직원 두 명과 경찰 한 명이 합류해 조사단 자체가 7명으로 늘어난 것은 고사하고, 조선산악회의 ‘울릉도조사대’ 63명이 나타난 것이다. 조선산악회는 단순한 등산클럽이 아니었다. 국토조사와 탐험을 중요한 목적으로 활동한 조선산악회는 진단학회와 함께 당시 조선의 대표적 국학 연구단체였다. 과도정부의 후원으로 조선산악회가 조직한 울릉도조사대는 본부 인원 15명과 8개 반 48명의 학술반으로 구성되고 당대의 일류 학자들이 대거 참여한 특급 학술조사단이었다. 정부의 독도자사단은 간판일 뿐이고 이 울릉도조사대가 이번 탐사활동의 실체였던 셈이다. (중략) 다오위다오에 대한 중국 입장에 비해 독도에 대한 우리 입장이 훨씬 유리한 것이 1947년의 조사활동 덕분이다. 우리는 주권국가를 아직 세우기 전부터 독도 영유권을 주장했고, 그것도 입으로만 떠든 것이 아니라 당시 상황에서 쉽지 않은 대규모 조사활동까지 벌였던 것이다. 반면 중국은 타이완을 돌려받은 1945년 이후에도 댜오위다오 영유권을 거론하지 않고 있다가(국민당 정권도, 공산당 정권도) 1971년에야 들고나왔다. 샌프란시스코회담 때 이승만 정부의 무성의와 무책임으로 우리 입장에 약간의 약점이 생기기는 했지만(『독도 1947』, 748~798쪽) 1947년의 조사활동은 그런 정도로 무너지지 않을 근거를 남겼다. 독도 문제와 다오위다오 문제를 놓고 왜 우리 정부가 중국과 적극적 공조정책을 취하지 않는지 이상하다.
- 1947. 8. 29. 일기 중에서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여운형의 죽음에서 조선의 현실을 본다”


‘해방공간’의 역사적 의미를 되살리는 역사학자 김기협의 대장정, 그 일곱 번째 책『해방일기 7권 - 깨어진 해방의 약속』은 1947년 5월에서 8월까지 해방 2주년을 맞는 넉 달간을 다룬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되고 쌍방 대표단이 열심히 회담에 임하면서, 순조로운 건국에 대한 희망이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나 회담 재개 후 두 달이 지난 7월 중순에는 회담의 성공을 바라기 어려운 분위기로 돌아서고 있었다. 한민당과 이승만·김구 세력은 반탁을 핑계로 미소공위에 돌을 던졌고, 박헌영이 이끌던 조선의 공산주의 세력은 좌익 내의 헤게모니에 집착했다.
김기협 선생은 미소공위가 좌초된 가장 큰 이유를 7월 중순 미국이 느닷없이 미소공위를 버린 것에 있다고 본다. 6월 말 마셜플랜에 대한 소련의 거부 방침이 확인되면서 소련과의 전면적 대결정책으로 휩쓸리게 된 것이 배경이라는 것이다. 미소공위 파탄의 징후가 분명하게 나타난 것은 미국 측 브라운 수석대표의 7월 16일 성명에서였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좌우합작·남북합작을 추진해왔던 여운형의 암살은 민족주의자, 민주주의자들의 희망을 꺾은 결정적 사건이었다.
65년 전의 ‘오늘’에서 민족의 미래를 찾는 김기협의 『해방일기』. 1945~48년 해방공간으로 ‘타임 슬립’한 역사학자 김기협의 『해방일기』는 원고지 매수로 1만6380매의 대장정으로, 『해방일기』시리즈는 편집 작업을 거쳐 2014년 12월에 모두 10권으로 완간될 예정이다.


여운형은 누가 죽였는가

몽양 여운형(1886~1947)이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로터리에서 피격 절명했다. 1945년 8월 18일의 몽둥이찜질에서 1946년 10월 7일의 납치까지 9회의 테러를 당했고, 같은 해 5월 12일 당한 테러가 열한 번째, 이로부터 두 달 남짓 후 열두 번째 테러로 목숨을 잃었다. 마지막 두 번의 테러는 방법뿐 아니라 장소까지 똑같았다. 같은 범인들의 소행이었던 것이다. 여운형만큼 생전에 들은 욕설과 사후에 들은 칭송 사이의 엄청난 차이를 보인 분이 있을까. 해방 조선의 비극을 가장 절실하게 대표한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여운형의 암살은 조선인의 소행이었다. 그런데 저자는 그 책임을 미국에 둔다. 미군정이 암살 세력을 키워주었기 때문이다. 하수인들은 범행에 미군정 경찰의 도움을 받았고, 그 범행으로부터 처벌보다 보상이 더 클 것을 믿었다. 지난 2년간 여운형이 겪었던 숱한 테러 위협에 대한 미군정의 반응을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여운형의 암살 세력은 넓은 의미의 ‘친미’가 아니라 미국 극우파에 호응하는 세력으로서, 미국의 공식 정책이 냉전 노선으로 확정되기 전부터 미·소 대결의 격화를 위해 매진해온 세력이었다. 남조선에는 이 세력을 키울 수 있는 큰 자원이 있었다. 친일파였다. 통일건국이 되어 민족국가다운 민족국가가 세워질 때 기득권을 잃을 것은 물론 처단 대상이 될 수 있는 그들에게 분단건국은 기득권을 지키는 것은 물론이고 더 큰 권력과 이득을 바라볼 수 있는 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승만을 중심으로 뭉쳐 좌우 대립과 미·소 대결을 부채질하는 일에 나섰다. 미국의 온건파에게 대안을 제시하는 중간파가 그들의 첫 번째 공격 대상이었고, 여운형 암살은 그 공격의 일환이었다.
65년 전 해방공간에서 여운형, 안재홍, 김규식 등 중간파는 돈의 힘과 주먹의 힘에 굴하지 않고 민심을 받들기 위해 좌우합작에 매진했다. 민족사회의 장래를 걱정하며 현실을 직시하던 그분들의 지혜와 용기가 오늘날 한국사회를 사는 사람들에게서도 더 많이 나타나기를 기원하며 “중간파는 어디 있는가?”를 저자는 묻는다.

“냉전의 압력에 기대어 민심을 억누르던 독재체제가 20여 년 전 끝난 뒤, 이번에는 신자유주의의 압력에 기대어 민심을 휘두르는 엘리트연합 체제가 이 땅에 자리 잡았습니다. 이제 총칼이 아니라 돈의 힘이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65년 전에 비하면 외부 압력은 줄어들고 내부 역량은 늘어났는데도 이 사회가 질곡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꼴을 몽양 선생이 보신다면 뭐라고 하실까요?”


냉전의 시작과 미소공위의 파탄, 미국은 미소공위를 버리고 어디로 가는가?

1947년 5월 21일 재개된 미소공위가 6월 중순까지는 성공을 위한 진지한 노력이 미국 측에서도 있었다고 저자는 본다. 대표단을 이끈 브라운 소장이 미군정 내에서 김규식·안재홍 등 중간파의 대변인을 자처해온 것도 미소공위 성공을 바라는 뜻이었다고 해석한다. 6월 11~12일에 공동결의와 공동성명으로 나온 성과를 얻기까지 미소공위의 강행군은 회담 성공을 위한 양측 대표단의 진지한 성의가 어울린 결과였다. 이 협조 분위가 깨진 외견상의 계기는 6월 23일 반탁시위였다. 소련 대표단은 투석을 당했다고 주장하는데 미군정 경무부는 투석 사실을 부정했다. 이 시위에 책임이 있는 반탁투위의 가입단체를 제외해야 한다는 소련 측 요구를 미국 대표단은 거부했다. 미소공위를 반대하는 반탁운동을 미국 대표단이 어느 정도 옹호한 셈인데, 그때까지 회담 성공을 위해 성실하게 노력해온 태도에서 벗어난 것이었으며 반탁운동 경력이 있는 단체를 원천적으로 거부하던 1년 전 자세에서 크게 물러선 것이었다.
8월로 접어들며 브라운 미 측 대표는 마치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음을 확인하는 듯한 행보를 보이는데, 미소공위를 버리는 미국의 수순에서 승부수는 총선거였다. 원래 미소공위를 통한 건국방안은 연합국이 민의를 파악하여 임시정부를 만들고, 이 임시정부가 총선거 준비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 제안은 바로 총선거로 가자는 것이었다. 이 총선거가 ‘가능지역 선거’로 낙착되면서 분단건국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6월 중순까지도 회담 성공을 위해 열심히 일하던 미국 대표단의 태도가 돌변한 까닭은 무엇일까? 바야흐로 냉전의 시작이었다. 저자는 이 무렵 유럽에서 진행된 마셜플랜의 전개 과정을 배경으로 실마리를 풀어낸다.

“유럽국이 협의를 거쳐 부흥계획을 세우면 미국이 그 계획에 동의할 경우 지원하다는 것이 마셜플랜의 형태였다. 소련도 초청 대상이었지만 미국의 의도는 동구 공산국을 원조로 유혹해 소련의 영향력을 교란하려는 것이었다. 동구권 국가들은 대거 반응을 보였다.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가 참여 의사를 밝혔고, 헝가리도 공식 표명은 하지 않았지만 큰 관심을 보였다. 소련은 이 나라들의 마셜플랜 참여를 막기 위해 강한 압력을 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47년 6월에서 7월에 걸쳐 일어난 일이었다. 6월 중순까지 미소공위 재개에 유별난 성의를 보인 것은 마셜플랜으로 공산권을 유혹하던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7월 들어 미국이 미소공위에서 강경한 입장으로 돌아선 것은 공산권의 보이콧이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조만식도 ‘반탁’에서 물러섰는데... 극우파 반탁을 핑계로 미소공위에 돌을 던지다

김기협의 『해방일기』는 종래 ‘좌우대립’을 축으로 통상 보아온 해방 공간의 정치현상을 ‘중극 대립’의 축으로 보자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중극대립이란 중간파와 극단파의 대립을 말하는 것이다. 좌우대립의 구도에서는 극좌와 극우가 가장 첨예한 대결 상대로 나타나지만, 사실에 있어서 두 극단파 사이에는 ‘적대적 공생관계’가 있었고 극좌와 극우는 서로 존재 이유가 되면서 힘을 합쳐 인민의 염원을 억눌렀다고 본다.
극좌와 극우가 명분으로 이용한 대표적 이슈가 ‘토지개혁’과 ‘반탁’이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미소공위가 좌초된 적어도 계기가 된 것도 ‘반탁 시위’였다. 애초에 반탁운동이 거족적으로 일어난 것은 동아일보의 조작된 ‘오보’ 때문이었다. 미국이 즉시 독립을 주장하는데 소련의 고집으로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고 하는 이 기사를 접한 조선인들은 소련만 잘 설득하면 신탁통치를 거칠 필요가 없겠다는 환상에 빠졌던 것이다. 몇 주일 후 모스크바회담의 실상이 밝혀지자 양심적 민족주의자들은 반탁을 하더라도 과도임시정부 수립 후에 할 일이라며 반탁운동에서 발을 빼고 미소공위를 지지했다. 대중의 반탁 열기도 가라앉았다. 그러나 한민당과 이승만·김구 세력은 조직을 동원한 반탁운동으로 미소공위의 걸림돌을 만들었다.

“조선이 카이로선언에서 독립의 약속을 받았다 하지만, 추축국의 일부를 독립시키면서 신탁통치를 거치게 하는 것이 일반적인 연합국 방침이었다는 사실은 오스트리아의 경우에서도 확인되는 것입니다. 오스트리아인들은 엄혹한 현실을 직시하고 좌우 연립정부를 세워 10년간의 신탁통치를 거쳐 완전한 독립을 얻었습니다. 조선에서도 그처럼 현실을 직시하고 인민의 염원을 실현하기 위해 애쓴 분들이 있었습니다. 좌우합작에 매진한 중간파입니다. 그분들이 같은 시대 오스트리아 정치인들보다 못한 것이 아닙니다. 외세의 작용이 오스트리아보다 심중했고, 그에 따라 정상배의 발호가 극성스러웠을 뿐입니다. 목숨을 내걸고 통일건국을 위해 매진했던 몽양 선생의 노력도 그 앞에서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해방일기』 시리즈 소개

역사학자 김기협의 해방일기,
65년 전의 ‘오늘’에서 민족의 미래를 찾는다


몇 해 전부터 왕성한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는 김기협은 특이한 배경의 역사학자다. 1968년 서울대 이공계열 수석으로 물리학과에 입학했다가 1년 후 사학과로 전과해서 중국사 전공을 시작한 뒤 석사과정은 경북대에서, 박사과정은 연세대에서 수학했다. 1990년 대학교수를 그만둔 이후 칼럼니스트와 번역가로 활동하다가 근년 들어 본격 저술활동을 시작했다.
그런 그가 환갑을 맞은 2011년 8월 1일 『해방일기』를 쓰기 시작했다.(?프레시안? 연재) 목표는 2013년 8월 31일까지 37개월간. 1945년 8월 1일 해방 전야부터 1948년 8월 31일 대한민국 건국 무렵까지의 기간 동안 ‘65년 전의 오늘’을 되살리는 작업이다.
8월 1일자 첫 회에서 김기협은 선친의 전쟁일기를 언급했다. 『역사 앞에서』의 저자 김성칠 교수가 그의 선친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60년 전 세상을 떠난 선친을 스스로 들먹인 데서 새 작업에 대한 만만찮은 각오를 느낄 수 있다.

(…)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독자께서는 바로 제 아버님을 떠올리시겠죠. 그렇습니다. 이 작업에는 아버님의 전쟁일기를 흉내 내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전쟁이란 상황에 마주쳤을 때 한 역사학도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힘껏 모색하신 것이 그 일기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 역시 통상적인 서술 방법으로 한계를 느끼는 주제 앞에서 제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으로 『해방일기』에 착수합니다.
(…) 이 막막한 작업에 구상이 떠오른 지 불과 한 달 만에 착수하고 있다는 사실부터 어리둥절합니다. 가만 생각하면 바로 이런 성격의 작업을 위해 지금까지의 제 인생이 배치되어 온 것이 아닌가, 운명적인 생각까지 듭니다. (…)

그 후 3년 넘는 동안 매주 100여 매씩 글을 올렸다. 생각해 보면 황당한 일이다. 지금 1주일 동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을 누군가가 150매 분량으로 정리해준다면 재미있게 읽을 독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하물며 65년 후의 어느 필자가 그런 일을 할 때 그것을 참을성 있게 읽어줄 65년 후의 독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럼에도 이런 서술을 꾸준히 읽어주는 독자가 날로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 어쩌면 놀라운 일이다. 그 방대한 서술에 독자들이 질리지 않게 해주는 것이 무엇일까?

(1) 『해방일기』에는 현장감이 있다. 저자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 사이의 ‘대화’보다 ‘씨름’으로 보고, ‘대화록’을 정리해주기보다 ‘생중계’를 펼치겠다고 나선다. 65년 전 상황의 ‘생중계’라니! 말이 안 되는 소리 같지만, 그 대상이 ‘해방공간’이라서 그 필요가 성립된다. 한국현대사의 결정적 기로였던 그 시기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아직도 차단과 굴절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생중계’가 반가운 것이다.
“나는” 하고 거침없이 나서는 주관성이 현장감을 북돋워준다. 저자는 전문가로서의 책임감보다 동시대인으로서, 이웃으로서 독자들과의 연대감을 앞세운다. 주어진 자료와 연구결과를 놓고 독자들과 같은 입장에 서서 최선의 해석을 추구하는 것이다. 객관성을 최대한 확보하려 애쓰지만 그 한계에 이를 때는 한계를 서슴없이 인정함으로써 독자의 주체적 판단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준다.

(2) 『해방일기』는 정치적 시각을 넓혀준다. 저자는 이 사회에서 ‘진보적’ 인사로 흔히 간주되는 사람인데도 스스로 ‘보수주의자’를 자처해 왔다. 그는 이 작업에서 “원칙과 상식을 중시하는 중도의 힘을 키우기 바라는 마음”을 밝힘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분명히 했다. 그가 내세우는 ‘원론적 보수주의’는 역사만이 아니라 지금의 한국 정치상황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준다.
해방공간의 정치 상황은 지금까지 ‘좌우 대립’을 위주로 풀이되어 왔다. 저자는 ‘적대적 공생관계’로 맺어진 극좌와 극우가 함께 중도파를 억압하고 침식하고 봉쇄하던 상황을 그려 보인다. 원칙과 상식에 따르려는 중도파와 이해관계에 얽매인 극단파 사이의 ‘중극(中極) 대립’의 새 그림을 내놓는다. 원칙과 상식을 따르는 다수가 강력한 동기를 가진 소수 집단의 집요한 도발에 굴복한 해방공간의 상황이 65년 후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저자는 본다.

(3) 『해방일기』는 풍부한 관점을 제공해준다. 저자는 한국현대사 연구자가 아닐 뿐더러 학술논문 위주의 표준적 학술활동에서 벗어나 자기 식으로 오랫동안 공부해 온 사람이어서 일반 역사학자와 다른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다. 그중에는 문명사가의 관점도 있고 저널리스트의 관점도 있다.
원자폭탄의 등장은 우리 해방공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 폴란드, 노르웨이, 오스트리아, 일본, 중국 등지에서 펼쳐진 상황에 비추어 우리 ‘해방’의 의미를 다시 음미해 볼 점은 없는가? 미국과 소련은 당시에 어떤 변화를 겪고 있었고, 그 변화가 우리의 해방공간에 어떻게 투영되었는가? 근대적 변화가 억압체제를 통해 민족사회에 작용한 구조는 어떠한 것이었는가? 등등 해방공간의 실질적 이해에 도움이 되는 관점들이 이 작업에서 새로 제시된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20여 년 전 해방공간을 향해 이 사회의 시야를 열어주었다. 수십 년 동안 해방공간을 철저히 가로막아 온 반공체제의 장벽에 구멍을 뚫어 사람들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었다. 이제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벽을 치워버리고 통째로 바라볼 때가 되었다. 만져보고, 쓸어보고, 현미경도 들이대보고, 성분조사도 해볼 때가 되었다.
20년 전 젊은 세대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가진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으로 그 내용을 씹어 삼켰다. 상식이 철저히 봉쇄된 상황에서 벽에 뚫린 구멍을 통해 상식의 편린에라도 접하는 것이 너무 황홀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식과의 모처럼의 만남이 일으키던 황홀함은 빛이 바랬다. 충격적인 황홀함보다 차분한 이해를 늘리기 위해 ‘인식’을 더 심화시킨 ‘재인식’이 나올 때가 되었다. 그런데 연전에 나온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은 인식의 심화가 아니라 인식의 전복을 위해 나온 것이었다.
저자가 한국근현대사 서술에 나선 계기가 3년 전의 『뉴라이트 비판』 작업이었다. ‘대한민국 체제’를 절대적으로 옹호하기 위해 역사를 자의적으로 왜곡하는 뉴라이트 진영의 입론 방식을 그는 그 작업에서 비판했다. 이제 그는 『해방일기』를 통해 뉴라이트 진영의 입론 내용을 반박하고 있다. ‘대한민국 체제’의 구조적 문제점을 밝히는 것이 이 작업의 기본목적의 하나다.
저자는 『해방일기』가 특정 진영에 대한 반박을 넘어 『해방전후사의 인식』의 보완이 되기 바란다. 벽 틈의 구멍으로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래는 단계를 넘어 독자들이 해방공간의 역사를 품에 끌어안고 마음껏 어루만질 수 있게 해주고 싶은 것이다. 65년 전에는 우리 민족사회의 건강한 정신이 아직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그 이후 억눌려 온 그 정신을 지금이라도 되살리는 것이 민족사회의 장래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독자들과 함께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해방일기 1권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1945. 8 ~ 10, 일본의 항복)
해방일기 2권 해방을 주는 자와 해방을 얻는 자(1945. 11 ~ 1946. 1, 신탁통치안)
해방일기 3권 소련군의 해방과 미군의 해방(1946. 2 ~ 4, 미소공위 개막)
해방일기 4권 반공의 포로가 된 이남의 해방(1946. 5 ~ 8, 좌익 탄압)
해방일기 5권 길 잃은 해방이 가져온 비극(1946. 9 ~ 12, ‘대구폭동’)
해방일기 6권 냉전에 파묻힌 조선 해방(1947. 1 ~ 4, 이승만의 승리)
해방일기 7권 깨어진 해방의 약속(1947. 5 ~ 8, 미소공위 결렬)
해방일기 8권 의미를 잃어버린 해방(1947. 9 ~ 12, 김구의 몰락)
해방일기 9권 해방된 자, 누구였던가(1948. 1 ~ 4, 친일파의 득세)
해방일기10권 해방을 끝장낸 분단 건국(1948. 5 ~ 8, 대한민국 탄생)

추천평

『해방일기』를 읽으면서 통쾌하면서 낄낄댔던 부분이 바로 대담한 해석과 과감한 추측입니다. 그리고 가장 돋보이는 대목은 ‘한 일’이 아니라 ‘안 한 일’에 주목한 것입니다.
- 한홍구 / 성공회대 교수·『대한민국사』저자

저자가 해방 정국을 통해 찾아낸 것은 오늘의 비이성적인 정치의 기원이었습니다.
- 박태균 / 서울대 교수·『한국전쟁』저자

김기협의 『해방일기』에는 『해방전후사의 인식』 이후 근 20년 동안 축적된 한국 현대사 연구의 성과가 망라되어 있습니다.
- 장정일 /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