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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운동회는 전통의 재확인을 통한 근대국가의 규율 창출에 이바지한 대표적인 장치였다. 메이지 국가의 지배 권력층들이 이데올로기의 재창출 장치로서 전략적으로 이용한 것이 바로 '운동회'의 공간이었다. 메이지 시대 영국 해군으로부터 처음 수용된 근대 운동회가 어떠한 양상으로 시대에 따라 발전해왔는지 사회학·비교문화·교육사·스포츠문화론·체육방법학 교수 6명이 분석한 책이 바로 『운동회』이다.
근대 이데올로기로 무장된 ‘건강한 정신’과 근대 규격으로 재단된 ‘건강한 몸’은 근대 메이지정부가 추진하였던 강력한 민족국가의 초석이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운동회’는 규격화된 몸을 재생산하는 장만이 아니라 축제의 장으로도 큰 역할을 하였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시대와 함께 변화하며 그 양상을 달리할 것이라고 작가는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은 일본 근대 사회상을 해독하고 나아가서 식민지 조선사회를 복원하기 위해 기획된 『일본 근대 스펙트럼 시리즈』의 제 5번째 권이다.
근대 이데올로기로 무장된 ‘건강한 정신’과 근대 규격으로 재단된 ‘건강한 몸’은 근대 메이지정부가 추진하였던 강력한 민족국가의 초석이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운동회’는 규격화된 몸을 재생산하는 장만이 아니라 축제의 장으로도 큰 역할을 하였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시대와 함께 변화하며 그 양상을 달리할 것이라고 작가는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은 일본 근대 사회상을 해독하고 나아가서 식민지 조선사회를 복원하기 위해 기획된 『일본 근대 스펙트럼 시리즈』의 제 5번째 권이다.
목차
들어가며
옮긴이의 말
1장 국민의례로서의 운동회-요시미 슌야(吉見俊哉)
1. ‘꽃놀이’와 ‘연습’
2. 국민의 신체를 조련한다
3. 경쟁하는 개인, 동조하는 집단
4. 제례, 구경거리화하는 운동회
5. 맺음말을 대신하여
장 후쿠자와 유키치(福?諭吉)의 운동회: 근대스포츠와 일본인의 신체관
-시라하타 요자부로(白幡洋三?)
1. ‘우선 짐승같은 몸을 만든 후에 사람의 마음을 길러라’-후쿠자와 유키치의 심신론
2. ‘소년의 건강도살장’ 도쿄테코쿠대학
3. ‘운동섭생’에서 ‘섭생’으로 - 후쿠자와 유키치의 신체섭생법
4. 스포츠인가 신체 운동인가 - 후쿠자와 유키치의 스포츠관
5. 즐거움과 운동의 공존 - 운동회와 소풍
3장 우리나라 운동회의 역사 - 히라타 무네후미(平田宗史)
1. 우리나라 최초의 운동회
2. 메이지(明治) 시대의 운동회
3. 다이쇼(大正) 시대의 운동회
4. 쇼와(昭和) 전기(前期)의 운동회
4장 메이지(明治) 정부의 운동회 정책: 장려와 억압의 이면성 - 기무라 기치지(木村吉次)
1. 경투유희회(競?遊??)의 계보
2. 체조연습회의 계보
3. 운동회의 장려
4. 운동회의 억압
5. 마치며
5장 근대 천황제와 메이지신궁(明治神宮) 경기대회 - 이리에 가츠미(入江克己)
1. 국민체육대회의 창설과 상징천황제
2. 절대천황제와 신궁대회의 창시
3. 대중스포츠 문화산업의 성립
4. 메이지신궁과 외원경기장의 조영(造?)
5. 신궁대회와 봉납(奉納)주의의 침투
6. 만주사변의 발발과 대회의 군사화
7. 중일전쟁과 국민정신 총동원운동의 강화
6장 유치원에 ‘운동회’는 필요없다 - 가미스키 마사코(紙透雅子)
1. 운동놀이의 중요성과 운동회에 대한 기대
2. 유치원의 운동회 사정
3. 유치원 교육과 운동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
옮긴이의 말
1장 국민의례로서의 운동회-요시미 슌야(吉見俊哉)
1. ‘꽃놀이’와 ‘연습’
2. 국민의 신체를 조련한다
3. 경쟁하는 개인, 동조하는 집단
4. 제례, 구경거리화하는 운동회
5. 맺음말을 대신하여
장 후쿠자와 유키치(福?諭吉)의 운동회: 근대스포츠와 일본인의 신체관
-시라하타 요자부로(白幡洋三?)
1. ‘우선 짐승같은 몸을 만든 후에 사람의 마음을 길러라’-후쿠자와 유키치의 심신론
2. ‘소년의 건강도살장’ 도쿄테코쿠대학
3. ‘운동섭생’에서 ‘섭생’으로 - 후쿠자와 유키치의 신체섭생법
4. 스포츠인가 신체 운동인가 - 후쿠자와 유키치의 스포츠관
5. 즐거움과 운동의 공존 - 운동회와 소풍
3장 우리나라 운동회의 역사 - 히라타 무네후미(平田宗史)
1. 우리나라 최초의 운동회
2. 메이지(明治) 시대의 운동회
3. 다이쇼(大正) 시대의 운동회
4. 쇼와(昭和) 전기(前期)의 운동회
4장 메이지(明治) 정부의 운동회 정책: 장려와 억압의 이면성 - 기무라 기치지(木村吉次)
1. 경투유희회(競?遊??)의 계보
2. 체조연습회의 계보
3. 운동회의 장려
4. 운동회의 억압
5. 마치며
5장 근대 천황제와 메이지신궁(明治神宮) 경기대회 - 이리에 가츠미(入江克己)
1. 국민체육대회의 창설과 상징천황제
2. 절대천황제와 신궁대회의 창시
3. 대중스포츠 문화산업의 성립
4. 메이지신궁과 외원경기장의 조영(造?)
5. 신궁대회와 봉납(奉納)주의의 침투
6. 만주사변의 발발과 대회의 군사화
7. 중일전쟁과 국민정신 총동원운동의 강화
6장 유치원에 ‘운동회’는 필요없다 - 가미스키 마사코(紙透雅子)
1. 운동놀이의 중요성과 운동회에 대한 기대
2. 유치원의 운동회 사정
3. 유치원 교육과 운동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
책 속으로
이는 일종의 ‘상연’이며, 이 ‘상연’에는 각지에서 증식하고, 반복되었던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운동회들이 참으로 갖가지 차이를 지니면서도 틀을 잡아나갔다. 그리고 거기에는 모리 아리노리(森有?)가 정확하게 인식하였던 근대의 국민신체를 둘러싼 전략과, ‘운동’이라는 말 자체의 애매함이 확산되는 것을 이용해 각지의 사람들이 빚어낸 온갖 퍼포먼스가 대치하기보다도 오히려 세부적으로는 모순을 내포하면서도 중층적으로 엮어지고 조정되었다.
즉, 이 ‘상연’에서는 결코 이른바 근대극처럼 ‘대본’이 ‘상연’을, ‘연출’이 ‘연기’를 일방적으로 규정해 가는 관계는 성립되지 않은 채, 텍스트와 퍼포먼스, 수많은 행위 주체와 그 전략은 서로 상대방을 이용하면서 전체로서 하나의, 아니 오히려 정확하게 말하자면 몇몇 드라마를 펼쳐나갔던 것이다.(본문 중에서)
초기 운동회의 급속한 확산과 그 정치적인 함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오키나와(沖?)의 경우이다. 마에시로 쓰토무가 발표한 오키나와 운동회에 관한 뛰어난 연구에 따르면, 오키나와에서 처음으로 운동회가 개최된 것은 1888년, 문부대신 모리 아리노리가 오키나와에 건너가, 나하(那覇)의 초중학교나 사범학교를 시찰했을 때였다. 같은 해 사키시마(先島)의 미야코군(宮古郡)에서는 시모지(下地), 히라라(平良), 니시베, 이라부(伊良部) 소재의 각 소학교가 연합해 운동회를 열었으며, 오키나와 본 섬에서는 89년부터 나하(那覇), 시마지리군(島尻郡), 구니가미군(?頭郡) 연합운동회가 지속적으로 개최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후에는 그 개선(凱旋)을 축하하는 대규모 운동회가 열려 병식체조와 군대식 행진이 화려하게 연출되었다. 마에시로는 이처럼 오키나와에서도 일찍부터 발달한 운동회가 “단순히 학교 행사로서 자리 잡았던 것이 아니라, 행사장의 장식에 천막과 국기, 그리고 만국기가 필수품이었으며, 칙어봉독(勅語奉?) 및 기미가요(君が代) 취주(吹奏)합창은 장엄한 의식으로서 거행되는 등 국가행사로서의 색채가 짙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말하자면 이 오키나와 운동회 탄생의 경위에서도 보이듯이 앞으로 살필 모리아리노리가 지금까지의 유교적 덕육주의(?育主義)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학교-장치관을 갖고서 문부성 대신에 취임해 일본의 교육시스템 근간을 만들어가는 과정과 표리를 이루며 운동회는 전국의 초중학교로 보급되어 갔던 것이다.
즉, 이 ‘상연’에서는 결코 이른바 근대극처럼 ‘대본’이 ‘상연’을, ‘연출’이 ‘연기’를 일방적으로 규정해 가는 관계는 성립되지 않은 채, 텍스트와 퍼포먼스, 수많은 행위 주체와 그 전략은 서로 상대방을 이용하면서 전체로서 하나의, 아니 오히려 정확하게 말하자면 몇몇 드라마를 펼쳐나갔던 것이다.(본문 중에서)
초기 운동회의 급속한 확산과 그 정치적인 함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오키나와(沖?)의 경우이다. 마에시로 쓰토무가 발표한 오키나와 운동회에 관한 뛰어난 연구에 따르면, 오키나와에서 처음으로 운동회가 개최된 것은 1888년, 문부대신 모리 아리노리가 오키나와에 건너가, 나하(那覇)의 초중학교나 사범학교를 시찰했을 때였다. 같은 해 사키시마(先島)의 미야코군(宮古郡)에서는 시모지(下地), 히라라(平良), 니시베, 이라부(伊良部) 소재의 각 소학교가 연합해 운동회를 열었으며, 오키나와 본 섬에서는 89년부터 나하(那覇), 시마지리군(島尻郡), 구니가미군(?頭郡) 연합운동회가 지속적으로 개최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후에는 그 개선(凱旋)을 축하하는 대규모 운동회가 열려 병식체조와 군대식 행진이 화려하게 연출되었다. 마에시로는 이처럼 오키나와에서도 일찍부터 발달한 운동회가 “단순히 학교 행사로서 자리 잡았던 것이 아니라, 행사장의 장식에 천막과 국기, 그리고 만국기가 필수품이었으며, 칙어봉독(勅語奉?) 및 기미가요(君が代) 취주(吹奏)합창은 장엄한 의식으로서 거행되는 등 국가행사로서의 색채가 짙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말하자면 이 오키나와 운동회 탄생의 경위에서도 보이듯이 앞으로 살필 모리아리노리가 지금까지의 유교적 덕육주의(?育主義)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학교-장치관을 갖고서 문부성 대신에 취임해 일본의 교육시스템 근간을 만들어가는 과정과 표리를 이루며 운동회는 전국의 초중학교로 보급되어 갔던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정적이며 관념적이었던 중세와의 결별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개인의 자각과 일상의 발견, 그리고 대량생산과 소비를 향한 산업구조의 지각 변동은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았다.
근대를 짧은 시간에 일상의 삶으로 자리 잡게 만든 산업혁명과 시민혁명 등과 마찬가지로 근대는 매력적인 모습으로 포장되어 중세와의 차별화를 시도하는 동시에 중세와의 은밀한 의사소통을 이어가야만 했다. 시민권 부여과 인권보장, 철도부설과 시간통제 등 근대의 규격화가 더욱 강화될수록 중세의 ‘풀림’은 향수병처럼 그리운 연인으로 근대인의 기억세포를 자극했다. 한 마디로 근대인이면서 중세를 그리워하는, 중세인이면서 근대를 꿈꾸는 ‘혼돈’과 ‘혼재’가 일반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운동회’는 바로 신체의 규격화를 통해 근대 민족국가가 요구하는 국민을 만들어내는 축제의 장이자, 교육의 도구였다. 그것이 전쟁 수행을 위한 용감한 전사이든, 대량생산을 위한 튼튼한 노동자이든, 아니면 근대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해내는 소수의 엘리트 지식인이든 ‘건강한 몸’이 요구됐다.
근대 이데올로기로 무장된 ‘건강한 정신’과 근대 규격으로 재단된 ‘건강한 몸’은 근대 메이지정부가 추진하였던 강력한 민족국가의 초석이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운동회’는 규격화된 몸을 재생산하는 장만이 아니라 축제의 장으로도 큰 역할을 하였고, 그 결과 ‘일탈’을 꿈꾸는 근대인과 ‘풀림’을 그리워하는 중세인이 자연스럽게 녹아들면서 뜻하지 않은 부산물을 낳기에 이른다. 근대 일본의 ‘운동회’는 바로 이런 특성 속에 점차 국민의 일상 속에, 연중행사의 하나로 자리 잡아 갔으며, 이는 전시체제, 고도성장시기, 장기적 불황 등 변화하는 시대와 호흡하며 다양한 형태로 끊임없이 ‘변신’해 왔으며, 앞으로도 일본인의 ‘마쓰리’로 살아 움직일 것이다.
운동회란 메이지 국가가 일본열도의 사람들 신체와 축제의 기억을 재편성해 가려고 했을 때, 그 접합점에서 출현했다. 일종의 매개적이라고도 조정적이라도 할 수 있는 현상이었다.
근대를 짧은 시간에 일상의 삶으로 자리 잡게 만든 산업혁명과 시민혁명 등과 마찬가지로 근대는 매력적인 모습으로 포장되어 중세와의 차별화를 시도하는 동시에 중세와의 은밀한 의사소통을 이어가야만 했다. 시민권 부여과 인권보장, 철도부설과 시간통제 등 근대의 규격화가 더욱 강화될수록 중세의 ‘풀림’은 향수병처럼 그리운 연인으로 근대인의 기억세포를 자극했다. 한 마디로 근대인이면서 중세를 그리워하는, 중세인이면서 근대를 꿈꾸는 ‘혼돈’과 ‘혼재’가 일반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운동회’는 바로 신체의 규격화를 통해 근대 민족국가가 요구하는 국민을 만들어내는 축제의 장이자, 교육의 도구였다. 그것이 전쟁 수행을 위한 용감한 전사이든, 대량생산을 위한 튼튼한 노동자이든, 아니면 근대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해내는 소수의 엘리트 지식인이든 ‘건강한 몸’이 요구됐다.
근대 이데올로기로 무장된 ‘건강한 정신’과 근대 규격으로 재단된 ‘건강한 몸’은 근대 메이지정부가 추진하였던 강력한 민족국가의 초석이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운동회’는 규격화된 몸을 재생산하는 장만이 아니라 축제의 장으로도 큰 역할을 하였고, 그 결과 ‘일탈’을 꿈꾸는 근대인과 ‘풀림’을 그리워하는 중세인이 자연스럽게 녹아들면서 뜻하지 않은 부산물을 낳기에 이른다. 근대 일본의 ‘운동회’는 바로 이런 특성 속에 점차 국민의 일상 속에, 연중행사의 하나로 자리 잡아 갔으며, 이는 전시체제, 고도성장시기, 장기적 불황 등 변화하는 시대와 호흡하며 다양한 형태로 끊임없이 ‘변신’해 왔으며, 앞으로도 일본인의 ‘마쓰리’로 살아 움직일 것이다.
운동회란 메이지 국가가 일본열도의 사람들 신체와 축제의 기억을 재편성해 가려고 했을 때, 그 접합점에서 출현했다. 일종의 매개적이라고도 조정적이라도 할 수 있는 현상이었다.
'36.한국근대사 연구 (독서>책소개) > 1.한국근대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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