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기독교-개신교 (독학>책소개)/1.세계기독교역사

십자군 이야기3

동방박사님 2021. 12. 14.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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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 vs “알라는 위대하시다!”

3차 십자군에서 새롭게 등장한 튜턴 기사단과 여전히 십자군 전력의 주축을 담당한 템플 기사단과 병원 기사단은 십자군 전쟁의 후반 한 세기에 주역으로 활동하게 된다. 십자군 전쟁 기간 내내 출신과 스타일의 차이와 라이벌 의식 때문에 협동해 싸운 적이 한 번도 없던 템플 기사단과 병원 기사단이지만, 1291년 팔레스티나에 마지막으로 남은 그리스도교의 도시 아코에서 벌어진 공방전 그 최후의 날에 두 기사단의 단장은 마치 등을 맞대고 싸우듯 함께 분투하다 최후를 맞이한다. 이후 명맥을 유지하는 튜턴 기사단이나 병원 기사단과는 달리 템플 기사단은 교황과 프랑스 왕에 의해 조직 자체가 완전히 와해되고 만다.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는 말 한 마디에 고무되어 고국을 떠나 먼 팔레스티나에 와서 다른 어느 기사단보다 맹목적이고 광신적으로 이슬람교도를 공격하는 일에 앞장섰던 템플 기사단의 마지막 단장이 이단 재판을 받고 화형에 처해짐으로써 템플 기사단은 역사의 무대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만다.

십자군에 맞선 이슬람의 지도자 알 아딜과 알 카밀은 살라딘의 냉철함과 합리성 그리고 관용 정신을 이어받아 이슬람 내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사자심왕 리처드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의 협상을 통해 성도 예루살렘을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가 공생할 수 있는 도시로 만들고, 이 협상을 신뢰의 약속으로 계속 유지시켜나가도록 한다. 그러나 이슬람 세계를 엄청난 속도와 파괴력으로 집어삼킨 몽골제국은 이슬람의 빛나는 수도 바그다드와 다마스쿠스마저 폐허로 만들고, 이 몽골의 서진을 노예 출신의 장수 바이바르스가 막아내 새로운 술탄의 자리에 오른다. 그 포악함으로 서유럽 세계를 떨게 했던 술탄 바이바르스는 “그리스도교도의 마지막 한 사람까지 지중해에 처넣어주겠다”고 선언하고, 마침내 시리아와 팔레스티나 전역에서 그리스도교도를 일소한다.

시오노 나나미의 압도적인 필력은 『십자군 이야기』3권에서 최고의 클라이맥스를 만들어낸다. 인간의 욕망과 의지가 만들어 낸 장대한 드라마, 그 빛과 어둠 속에서 명멸하는 인간 군상의 스토리는 여전히 매혹적이다.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박진감, 그리고 핵심을 곧바로 파고드는 특유의 직관적인 문장은 독자들을 사로잡아 새로운 차원의 지적 쾌락을 선사한다. 이 압도적인 이야기와 서늘한 문장의 장관 속에서 날카롭게 빛나는 시오노 나나미의 역사의 흐름과 인간의 운명에 대한 통찰은 독자들을 전율하게 만들 것이다.


목차

제1장 | 사자심왕 리처드와 제3차 십자군
‘성도’를 잃다
영국
프랑스
리처드와 필리프
황제 ‘붉은 수염’
티루스 공방
몬페라토 후작 코라도
아코 탈환전
살라딘, 전장으로
전방의 적과 후방의 적
‘붉은 수염’의 최후
두 명의 젊은 왕
키프로스 섬
전장에 들어서다
탈환하다
프랑스 왕의 귀국
‘튜턴 기사단’의 탄생
리처드 대 살라딘
대결 제 1전 ‘아르수프’
싸움이 끝나고
야파 수복
‘성도’로 가는 길
불리한 현실
그래도 앞으로
모국에서 온 나쁜 소식
오른손에는 칼, 왼손에는……
대결 제2전 ‘야파’
강화를 향하여
살라딘의 리처드 평
그후의 리처드

제2장 | 베네치아 공화국과 제4차 십자군
수재 교황의 등장
도제 단돌로
술탄 알 아딜
프랑스의 젊은 제후들
‘바다의 도시’
베네치아의 참전
프랑스에서는
집결지 베네치아에서
출진
자라 공략
비잔틴제국 황자
행선지 변경
콘스탄티노플 공략
‘라틴제국’
‘지중해의 여왕’

제3장 | 로마 교황청과 제5차 십자군
‘성지’의 상황
‘소년 십자군’
왕들은 움직이지 않고
‘교황 대리’ 펠라조
다미에타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강화 제안 (1)
강화 제안 (2)
제5차 십자군의 최후

제4장 | 황제 프리드리히와 제6차 십자군
남쪽 섬 시칠리아
황제 즉위
원정은 언제?
사라센 거류지
나폴리 대학
살레르노 의학교
예루살렘 왕으로
적과의 접촉
교황 그레고리우스
첫 번째 ‘파문’
두 번째 ‘파문’
출발
아코 도착
접촉 재개
텔아비브와 사자 사이에서
강화 체결
반대의 소용돌이에서
‘성도’ 방문
교회와 모스크
‘그리스도의 적’
귀국
‘평화의 키스’

제5장 | 프랑스 왕 루이와 제7차 십자군
이상적인 군주
화려한 출진
이집트 상륙
강경한 진군
만수라의 참극
철수
미증유의 패배
제7차 십자군의 ‘성과’

제6장 | 최후의 반세기
몽골의 위협
몰골 대 맘루크
성왕 루이와 제8차 십자군
항구도시 아코
‘그리스도교도는 마지막 한 사람까지 지중해에 처넣어주겠다’
표적은 좁혀졌다
아코 공방전
최후의 날

제7장 | 십자군 후유증
‘로도스 기사단’에서 ‘몰타 기사단’으로
템플 기사단의 최후
‘아비뇽 유수’
이탈리아의 경제인들
성지순례
맺음말

연표
참고문헌
도판 출처

저자 소개

저 : 시오노 나나미 (Nanami Shiono,しおの ななみ,鹽野 七生)
 
1937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1963년 가쿠슈인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한 뒤, 1964년 이탈리아로 건너가서 1968년까지 공식 교육기관에 적을 두지 않고 혼자서 르네상스와 로마 역사를 공부했다. 1968년에 집필 활동을 시작하여 『르네상스의 여인들』을 잡지 《주오코론(中央公論)》에 연재하면서 작가로 데뷔했다. 1970년부터 이탈리아에 정착하여 40여 년 동안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에 천착해왔으며, 기존의 관념...

역 : 송태욱

 
연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졸업 후 도쿄외국어대학교 연구원을 지냈다. 현재 연세대학교에서 강의하며 번역 작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르네상스인 김승옥』(공저)이 있고, 옮긴 책으로 『케첩맨』,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천천히 읽기를 권함』, 『번역과 번역가들』, 『십자군 이야기』, 『깜깜한 밤이 오면』, 너머학교 「생각 그림책」 시리즈, 『환상의 빛』, 『눈의 황홀』,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

감수 : 차용구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파사우대학교에서 서양 중세사 연구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중앙대학교 인문대학 역사학과 교수로 재임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로마제국 사라지고 마르탱 게르 귀향하다』『중세 유럽 여성의 발견』이, 옮긴 책으로 『중세의 빛과 그림자』가 있고 「중세 문화 속의 그리스 신화」「필립 아리에스의 죽음관에 대한 연구」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책 속으로

쉰세 살이 된 살라딘은 이튿날인 9월 7일을 결전의 날로 정했다. 리처드도 적군의 움직임을 보고 이를 예상하고 있었다. 살라딘이 결전을 청한다면 바로 다음 날일 것이 분명했다.
서른네 살의 리처드는 이를 염두에 두고 전략을 세워, 그날 밤 장수 전원을 모아놓고 명했다.

하나, 적이 공격해와도 격퇴하면서 행군을 속행한다.
둘, 단 내일은 임전태세를 갖추고 행군한다.

(…)
그날 행군 진형의 특징은 대대 규모의 부대로 나눈 뒤 이를 어느 한 사람이 이끄는 형태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대신 리처드는 1백 명 전후의 기사로 구성된 다수의 중대를 만들었다. 전투가 벌어졌을 경우 행동의 자유를 더 중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적을 격퇴하면서 행군을 속행한다고 했지만, 전투를 염두에 둔 이 진형은 방어보다 공격 진형에 가까웠다.
게다가 이들 중대는 리처드 자신처럼 이름 있는 무장들이 이끌었다. 평소라면 적어도 대대 지휘를 맡을 만한 이들에게 중대 지휘를 맡긴 것이다. 몇 배는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되는 적의 대군에 맞서려면, 1천 명 전후의 병사로 구성된 대대보다, 병력은 10분의 1밖에 안 되어도 더 많은 수의 중대로 각기 전력을 다해 싸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반대로 살라딘은 1천 명 정도가 아니라 1만 명 규모의 군대를, 그것도 여럿 투입했다. 그 살라딘군은 숲속을 지나 리처드의 군대를 향해 서서히 접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희한하게도 살라딘은 원래 숲의 초입에 두었던 본진의 위치를 숲이 끝나는 반대쪽 지점으로 옮겼다. 아코 공방전 때도 살라딘은 전선에서 훨씬 떨어진 후방에 본진을 두었으니, 전선 근처에 본진을 둔 것은 ‘하틴 전투’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살라딘이 염두에 두었던 것은, 육지 쪽 세 방향을 포위하고 그 포위망을 좁혀가며 적을 괴멸시키는 작전이었을 것이다. 나머지 한 방향은 바다이므로 세 방향에서 동시에 몰아붙이면 도망칠 수 없다.
살라딘이 이때 투입한 병력은 4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한편 리처드의 군대는 2만 명도 채 안 되었다. 그런데 실제로 살라딘군은 병력의 절반밖에 쓰지 못했다.
실제 전장에서 이슬람군은 살라딘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처음에는 그렇게 움직였지만 어느 단계에서부터 불가능해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리처드가 살라딘이 예상한 대로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191년 9월 7일, ‘아르수프 전투’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은 이 전투는, 해가 중천에 뜬 오전 9시에 이슬람측에서 울리는 북소리로 시작되었다.

먼저 살라딘이 늘 쓰는 전법대로 궁병들이 일제히 빗발처럼 화살을 쏘아댔다.
튼튼한 갑옷과 투구, 방패로 무장한 그리스도교측 장병들에게 이를 막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날 이슬람의 궁병들은 전진하면서 화살 비를 퍼붓기를 집요하게 반복했다. 이어서 보병부대의 뒤에서 천천히 다가온 기병부대가 숲을 빠져나오자마자 일제히 말에 채찍을 가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보병부대를 통과하고는 둘로 갈라져, 행군하는 리처드군의 전위와 후위를 공격했다.

이때 두 이슬람 기병부대의 속도는, 살라딘의 의도였는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나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리스도교군의 후위를 공격하러 간 쪽이 더 빨랐다.
그 결과 그리스도교군 중 제일 먼저 적의 공격에 노출된 것은 가장 후미에서 행군하던 병원 기사단이었다. 게다가 전력질주에 따른 힘을 그대로 받았으므로 공격의 강도도 가장 강력했다.
(…)
이를 본 리처드는 곧바로 전술을 변경했다.
뛰어난 무장은 미리 생각한 전술대로 상황이 진행되지 않더라도, 적당한 파도가 다가오면 주저하지 않고 올라탈 줄 안다.
자기 중대를 이끌고 격전이 벌어지는 후위로 달려간 리처드는 선두에 서서 적진 깊숙이 쳐들어갔다. 그러자 리처드가 움직인 것을 안 다른 장수들도 각 중대를 이끌고 뒤를 따랐다. 이리하여 행군의 후위는 가장 심한 전투의 장이 되었다.

어디 출신이고 어느 부대 소속인지는 더이상 아무도 따지지 않았다. 하기로 마음먹었으면 그만이다. 이때 그들의 마음속에는 적을 쓰러뜨리겠다는 생각뿐. 이런 마음은 리처드든 일개 병졸이든 전혀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전투의 대세는 일찌감치 그날 이른 오후에 결정되었다.

먼저 도망치기 시작한 것은 살라딘군이었다. 전장을 가득 메운 단말마의 비명과, 순식간에 늘어가는 아군 사망자, 끊이지 않고 울리는 이슬람군의 북소리마저 고무보다 애도의 소리로 들렸다.
그때까지 용감하게 싸우던 이슬람군의 병사뿐만 아니라 그들을 이끌던 태수들까지 도망치기 시작했다. 특히 베두인 기병은 공격해오던 속도만큼이나 도망치는 것도 빨랐다. 기병 보병 할 것 없이 모두 숲속으로 도망쳤다. 숲만 빠져나가면 그 바깥에 전투에 투입되지 않은 1만 명의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추격으로 전환한 휘하 병사들이 숲속으로까지 쳐들어가려는 것을 본 리처드는, 절대 숲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우선 숲속에서의 전투는 기병에 불리한 접근전이 될 게 분명하고, 게다가 도주의 희망을 잃은 적병을 상대하면 쓸데없는 희생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리처드는 살라딘 정도 되는 무장이 전장에 전군을 투입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반드시 대기 병력이 있을 것이고, 만약 그렇다면 숲 건너편에 있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은 행군을 재개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되도록 빠른 시간 내에 안전한 숙영지에 들어가는 것이 기세를 몰아 추격하는 것보다 우선이었다.
이리하여 살라딘의 마지막 계획마저 허사로 돌아갔다.
---pp.128~135
역사에 대한 글을 쓰면서 통감하는 것 중 하나는, 정보란 그 중요성을 인식한 자에게만 올바로 전해진다는 사실이다. 십자군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이고, 이 점에 대해선 그리스도교도든 이슬람교도든 예외가 아니었다. 같은 그리스도교도 중에도 정보에 정통한 교황이나, 왕, 제후가 있었던 반면 그 방면에 어두웠던 교황이나 왕, 제후도 있었다. 같은 그리스도교도이자 이탈리아의 교역상인이면서도, 베네치아인은 정보를 중요시했던 반면 제노바인은 그렇지 않았다.
고대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렇게 말했다. “현실의 모든 것이 누구에게나 보이는 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현실만 본다.”
보고 싶지 않은 현실도 직시해야만 정보를 활용할 수 있다.

바그다드의 칼리프와 그 주변의 이맘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지배하는 술탄 알 아슈라프도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십자군을 이끌고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한 교황에게 파문을 당한 황제가 조만간 유럽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황제가 마음만 먹는다면 카이로를 직격할 수 있는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게다가 이듬해 봄에는 몰타 출신의 해군장수가 이끄는 20척의 배도 팔레스티나로 돌아올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하고 있던 이는 알 카밀뿐이었다.

나블루스로 찾아온 사자의 요청에 응해, 술탄과 황제의 교섭이 재개된 것은 1228년 가을이었다. 첫 교섭은 아코 교외에 있는 황제의 막사에서 이루어졌다. 현실 정치에 투철해야 할 외교 교섭이지만, 알 카밀이 보낸 젊은 태수 파라딘과 프리드리히는 동년배일뿐더러 둘 사이에는 통역도 필요하지 않았다. 시종 친밀한 분위기가 감도는 가운데, 체스판을 사이에 둔 ‘교섭’이 진행되었다.
(…)
9월에 시작된 교섭은 11월에 접어들자 장소를 옮겼다.
동생 알 아슈라프와의 문제가 타결되어 더는 나블루스에 있을 필요가 없어진 알 카밀이 카이로로 돌아가는 길에 가자에 들렀기 때문이다. 가자에는 술탄의 별궁이 있었다.

이 사실을 안 프리드리히는, ‘성지’에 있는 그리스도교 세력의 수도격이며, 따라서 어엿한 왕궁도 있던 아코를 떠난다. 야파로 이동한 것이다. 진정한 교섭 상대와의 거리를 절반 이상 단축한 셈이다.

야파, 즉 텔아비브는 현재 이스라엘의 수도 기능이 집중되어 있는 이스라엘 제일의 도시다. 한편 지금도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가자는 팔레스티나 사람들의 자치지구이자, 파타하보다 과격한 하마스가 지배하는 ‘가자 지구’의 중심적인 곳이다. 가자 역시 정치 기능이 집중된 도시라 할 수 있다.
텔아비브에서 가자까지의 거리는 불과 17킬로미터 안팎이다. 21세기인 지금, 이스라엘과 팔레스티나는 이 거리를 사이에 두고 한쪽은 미사일을 쏘아대고 다른 한쪽은 공중폭격으로 대응하며 대치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장소에서, 지금으로부터 8백 년쯤 전인 1228년에서 1229년 사이는,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고 공생을 실현하기 위한 교섭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것도 그리스도교 세계 속계의 일인자인 황제와 이슬람 세계 속계의 일인자인 술탄, 즉 정상 중의 정상들이.
(…)
어쨌거나 알 카밀이 시간 벌기로 시작한 교섭은 이렇게 조금씩 진지하게 이교도간의 공생관계 수립을 지향하는 교섭으로 변해갔다. 그러나 그사이에도 프리드리히는 중근동 그리스도교 세력의 안전을 보장할 수단을 강화해가고 있었다.

이때부터 팔레스티나 지방에 튜턴 기사단이 관할하는 성채가 세워지기 시작한다. 그전까지 이 지방에 있던 성채들은 대부분 병원 기사단이나 템플 기사단이 세운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튜턴 기사단이 건설한 성채도 추가된 것이다. 프리드리히의 적극적인 원조가 없었다면, 창설된 지 10년 남짓한 튜턴 기사단이 도저히 실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프리드리히가 튜턴 기사단만 특별 취급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기사단이 소유한 성채라도 전략상 중요하다고 판단되면 보강공사를 원조했다. 또한 병원 기사단 단장과 자주 의견을 나누었는데, 항구도시 방어의 핵심에 속하는 성채 역시 전략상 중요하다고 판단되면 성채 운영에 오랜 경험을 가진 병원 기사단에 일임했다.

평화를 위한 교섭을 계속하는 한편 방어력의 강화를 잊지 않은 것인데, 이런 공사는 이끌고 온 병사들을 활용하는 동시에, 중근동의 그리스도교도 사이에 뿌리 깊게 남아 있던 강경파의 시선을 교섭에서 다른 곳으로 돌리는 효과도 있었다. 강경파의 눈에는,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왔으면서도 교섭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부정적으로 비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
야파와 가자에서 양측이 강화를 위한 교섭을 시작한 것은 1228년 11월이었다.

그로부터 3개월쳀 지난 1229년 2월, 드디어 교섭이 타결되었다. 그동안 끈기 있게 교섭을 진행해온 프리드리히가 이긴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내용이었다.
2월 18일 아침, 먼저 야파에서 프리드리히가 조약서에 서명하고 날인했고, 그날 밤 가자에서 알 카밀이 서명과 날인을 마쳤다. 두 사람은 실제로는 한 번도 만나지 않고서 강화를 성립시킨 것이다.
---pp.380~387
예상대로 이슬람군은 아코를 둘러싼 성벽 중 가장 수비가 탄탄했던 템플 기사단과 병원 기사단의 담당구역을 피하고, 비교적 수비가 약한 ‘성 안토니오 탑’에서 ‘저주받은 탑’을 거쳐 ‘대주교 탑’에 이르는 동쪽 성벽으로 대거 침입했다.
이 적군의 침입로에 해당한 튜턴 기사단 본부는 순식간에 적의 물결에 휩쓸리고 말았다. 그러나 튜턴 기사단 기사들이 필사적으로 버틴 덕에, 황제 프리드리히에게서 하사받은 광대한 본부 건물만은 지킬 수 있었다.
(…)
템플 기사단의 단장 기욤 드 보죄도 중상을 입어 꼼짝 못하게 된 이들 중 하나였다. ‘티루스의 템플 기사단 기사’는 그에 대해 이렇게 썼다.
“적이 던진 창 하나가 우리 단장을 관통했다. 왼팔을 들어올리는 참에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창에 찔린 것이다. 단장은 그날 방패를 들고 있지 않았다. 칼은 너무 많은 적병을 베어 무뎌지고 부러져 더는 쓸 수가 없어 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그에게는 오른손에 든 지휘봉이 전부였다. 적병이 던진 창은 겨드랑이 아래 흉갑과 팔을 보호하는 무구의 틈새를 직격해서, 반대쪽으로 손바닥 길이가 넘게 꿰뚫고 나왔다.
그가 평소에 창이나 화살을 간단히 관통할 만한 무구를 착용했던 건 아니었다. ‘저주받은 탑’이 위태롭다는 말을 듣고 서두르는 바람에 주변에 있던 가벼운 갑옷과 투구만 걸치고 달려나왔던 것이다.”

심각한 부상이라는 건 누가 봐도 분명했다. 중상을 입은 템플 기사단 단장 기욤 드 보죄는 피가 철철 흐르는 와중에도 정신은 또렷했으나 목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그런 그를, 옆에서 함께 싸워온 병원 기사단의 부단장 마티외 드 클레르몽이 주위에 있던 템플 기사단 기사들의 도움을 받아 아코 성내에 있는 건물로 옮겼다.
그러나 그의 상태는 절망적이었다. 기욤 드 보죄는 마티외 드 클레르몽에게 안긴 채 숨을 거두었다. 마흔한 살에 맞이한 죽음이었다.
전우의 시신을 조용히 땅에 눕힌 마티외 드 클레르몽은, 그의 동료인 병원 기사단 기사들이 도피해 있는 기사단 본부로 향하지 않았다. 대신 이미 항구 근처까지 밀어닥친 적진으로 뛰어들어갔다.

템플 기사단과 병원 기사단이 이슬람을 상대하는 전투집단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1118년부터 이 아코 공방전까지 173년 동안, 두 기사단은 함께 협력해 싸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두 기사단 모두 성지 수호를 기치로 내세운 십자군의 상설 군사력이었다. 단원 수는 적어도 개개인의 전투능력이 뛰어난 특수부대라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그만큼 라이벌 의식도 강했다.
또한 당시 유럽에 많았던 ‘떠돌이’ 기사, 즉 주군이 없는 자도 가입할 수 있었던 템플 기사단과, 왕이나 봉건영주의 가계와 연관이 있는 이른바 귀족 출신만 단원으로 받아들였던 병원 기사단은, 단원의 일상생활부터 조직의 구조,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전투방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달랐다.
게다가 템플 기사단의 단원이 대부분 프랑스 태생인 데 비해, 병원 기사단의 단원은 유럽 각지에서 모였다는 차이점도 있었다.

십자군의 역사를 통틀어 주역을 맡아온 이 두 종교 기사단의 기사들이 소속의 경계를 넘어 함께 싸운 것은 이 아코 공방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템플 기사단 단장과 병원 기사단 부단장이 마치 등을 맞대고 싸우듯 함께 분투한다.
중상을 입고 쓰러진 템플 기사단 단장을 병원 기사단 부단장이, 아직 적이 침입하지 않은 건물로 옮긴다.
그리고 병원 기사단 부단장의 품에 안긴 채, 템플 기사단의 단장이 숨을 거둔다.
전우의 죽음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병원 기사단 부단장은 자신의 위치를 내버리는 행동을 한다. 그가 속한 기사단의 단장이 중상을 입고 키프로스로 탈출했으므로, 이제 아코에 남은 단원들을 이끄는 임무는 그에게 있었다. 그런데도 동료들이 피해 있는 본부로 향하지 않고, 밀려드는 적들 속으로 뛰어들어가 장렬한 죽음을 맞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런 그의 뒷모습이, 지금까지 현장을 증언한 템플 기사단의 젊은 기사에 의해 후세에 전해진다.
이러한 일은 173년 동안 단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다. 이때 아코에서가 처음이었다.
---pp.520~524
 

출판사 리뷰

인류 역사의 흐름을 바꾼 그 마지막 장면
진정한 승자는 누구인가?

압도적인 이야기의 힘과 서늘한 문장의 장관,
그 속에서 빛나는 날카로운 통찰

인류사의 가장 문제적인 사건 십자군 전쟁에서
궁극의 외교론과 공생론을 배운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로마인 이야기』의 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필생의 역작이자 2011년 한 해 동안 대한민국 독자들을 흥분시켰던 장대한 시리즈가 완간되었다.

인류 역사상 2백 년이라는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치러진 전쟁이자 세계 2대 종교가 격돌한 인류 역사의 대사건, 십자군 전쟁.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십자군 전쟁. 현대의 다양한 문화산업에서 변형되어 재생산되는, 상상력의 원천인 십자군 전쟁. 하지만 십자군 전쟁에 대한 기존의 연구서들은 서구 중심 혹은 이슬람 중심의 시각틀 내지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인 시각틀에 갇혀 그 진면목을 보여주지 못했다. 시오노 나나미는 그 전쟁을 실제로 일으키고 그 역사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움직였던, 그리하여 그들 각자의 독특하고도 다른 개성으로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또다른 국면을 만들고 서로의 관계 속에서 상황을 변화시키는 변수로 작용했던 인물들을 전면에 내세워, 그들의 이상과 욕망, 성공과 좌절의 명암을 통해 십자군 전쟁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십자군 전쟁을 새롭게 조명해낸다. 시오노 나나미에 의해 십자군 이야기가 9백 년이라는 시간을 건너뛰어 현대적 이야기로 부활한 것이다.

1권에서는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라는 위력적인 한 마디로 촉발된 유럽의 봉건제후와 주교, 수도사와 기사, 그리고 빈민들로 구성된 제1차 십자군의 결성과 그들에 의해 십자군 국가가 성립하는 20여 년의 과정을 다뤘다.

2권에서는 십자군의 제1세대가 모두 역사에서 퇴장한 뒤, 보두앵 2세가 예루살렘 왕으로 등극하는 1118년부터 시토파의 수도사인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의 제창에 의한 제2차 십자군의 결성과 퇴각(1146~1148),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정복함으로써 예루살렘을 십자군 시대 이전으로 되돌리는 1187년까지, 이슬람의 대반격이 시작되는 제2차 십자군 전후의 70여 년의 기간을 다뤘다. 이제 완결편인 3권에서는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과 격돌한 하틴 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뒤 십자군 국가가 성도 예루살렘을 비롯한 대부분의 영토를 잃은 채 안티오키아와 트리폴리, 티루스 일대로 축소되자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해 유럽에서 속속 일어났던 3차에서 8차까지의 십자군 원정과 십자군 국가에 남겨진 최후의 도시 아코에서 벌어진 공방전 그리고 십자군 전쟁이 끝난 뒤 남겨진 기사단의 운명까지 1백여 년 동안의 기간을 다루고 있다.

시오노 나나미의 압도적인 필력은 『십자군 이야기』3권에서 최고의 클라이맥스를 만들어낸다. 그 순간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듯 박진감이 넘치는 묘사와 서슴없이 핵심을 파고드는 시오노 나나미 특유의 문장 속에서 십자군 전쟁의 영웅들이 피와 살을 가진 인간으로 살아나 우리 앞으로 걸어나온다.

병원 기사단의 기사들은 리처드의 명령대로 방어에만 전념하려 했다. 하지만 이날은 적의 기병부대의 맹공을 버텨내는 사이에 앞서 기병에 추월당했던 적의 보병부대까지 전투에 가세했다. 이슬람 보병은 접근전이 되자 우선 화살을 쏘는 각도를 바꾸었다. 위를 형해 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측 기병의 말을 겨냥한 것이다. 그리고 말을 잃고 보병이 된 기병을 향해, 활과 화살을 등뒤로 메고 이번에는 못 박힌 곤봉을 휘두르며 돌격해왔다. 이 곤봉의 위력은 원시적인 형태만 봐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강력했다. 힘껏 휘두르면 강철 갑옷이나 투구도 찌부러졌다. 뿐만 아니라 부서진 갑옷의 파편이 몸에 파고들기도 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희생자가 속출하는 것을 본 병원 기사단의 단장은 부하 한 명을 리처드에게 보냈다. 반격을 허락받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리처드는 허락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끝까지 방어로 일관하며 행군을 계속했지만, 병원 기사단 기사들에게 퍼붓는 살라딘군의 공격은 갈수록 심해져 마치 도망치는 양의 엉덩이 살을 뒤에서 물어뜯는 늑대 떼와 흡사했다. 이번에는 단장이 직접 말을 달려 리처드를 찾아가 반격을 허락해달라고 청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리처드는 허락하지 않았다. 자기 부대로 돌아온 기사단장이 목격한 것은, 이대로 계속 당하기만 한다면 명예가 더럽혀진다고 외치는, 피투성이가 된 동지들의 모습이었다. 이런 그들에게 두 번에 걸친 리처드의 거절은 잔혹함 그 이상으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결국 기사단장 가르니에는 리처드의 명령을 거스르더라도 반격에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단장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내내 참아온 기사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병원 기사단 전원이 한 덩어리가 되어 반격을 시작했다. 이를 본 리처드는 곧바로 전술을 변경했다. 뛰어난 무장은 미리 생각한 전술대로 상황이 진행되지 않더라도, 적당한 파도가 다가오면 주저하지 않고 올라탈 줄 안다. 자기 중대를 이끌고 격전이 벌어지는 후위로 달려간 리처즈는 선두에 서서 적진 깊숙이 쳐들어갔다. 그러자 리처드가 움직인 것을 안 다른 장수들도 각 중대를 이끌고 뒤를 따랐다. 이리하여 행군의 후위는 가장 심한 전투의 장이 되었다. (132~136쪽)

그 어떤 누구도 십자군 전쟁과 그 주인공들을 이처럼 생동감 있게, 박력 있게, 매력적으로 그려낸 적이 없었다. 3차부터 8차 십자군, 그리고 십자군 전쟁이 종결된 이후 새로운 존재 이유를 찾아나서는 기사단의 후일담과 템플 기사단의 비극적 최후까지 1백 년 동안 숨 가쁘게 진행되는 이야기 속에서 시오노 나나미가 그려내는 주인공들의 운명은 시대를 초월하여 현재의 우리에게 육박해 들어온다. 과연 십자군 전쟁의 진정한 승자는 누구인가?

제3차 십자군
이슬람교도가 붙여준 별명 ‘사자심왕 리처드’로 유명한 영국 왕 리처드 1세. 그는 하틴 전투로 십자군 국가를 궤멸 직전의 상황으로 몰고 간 살라딘에 맞서 뛰어난 전략과 타고난 용맹성으로 아코에서 아스칼론에 이르는 항구도시를 되찾는다. 성도 예루살렘을 코앞에 두고 살라딘과 협상을 시작하여 예루살렘을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가 공존하는 도시로 만든다.

제4차 십자군
이슬람과의 전쟁이 아니라 같은 그리스도교도와의 전쟁으로의 방향 전환을 주도하고 황위 자리가 빈 비잔틴제국을 대신하여 라틴제국을 세운 베네치아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 세계사 교과서에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것으로 기록된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에 의해 조정된 프랑스 제후들의 원정 참여로 시작되었으나 술탄 알 아딜과의 불가침협정을 맺은 베네치아의 참전으로 행선지가 변경되어 10개월에 이르는 공방전을 통해 천 년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라틴제국이 건설된다.

제5차 십자군
‘불신앙의 무리’와의 타협이 아니라 그리스도교도의 피로 성도 예루살렘이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이슬람측에 대한 유리한 협상 시점을 놓쳐 버리고 결국 원정을 실패로 이끈 교황 대리 펠라조. 십자군 전쟁의 주도권을 되찾아오기 위해 교황 호노리우스 3세는 ‘교황 대리’ 펠라조를 십자군 원정에 참여시킨다. 이슬람측의 사각지대였던 나일강 삼각주 지역의 항구도시 다미에타를 공략하는데 성공하지만 불리한 상황에 있던 이슬람측의 강화 제안을 거부함으로써 성도 예루살렘을 피를 흘리지 않고 해방시킬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만다.

제6차 십자군
심리전을 방불케 하는 교묘한 외교 전술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성지 예루살렘을 수복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 자신이 지배하는 시칠리아에서 이슬람교도들의 무에진 소리가 울려퍼질 수 있도록 허락한, 중세 유럽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독특한 사고방식을 가진 이 인물은, 살라딘의 아우이자 술탄이 된 알 아딜과 그를 이은 알 카밀과의 협상을 통해 예루살렘에 그리스도교 순례자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한 강화조약이 지속되도록 하고 그리스도교도의 숙원인 예루살렘도 되찾는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으로부터 두 번이나 연거푸 파문을 받고, ‘불신앙의 무리’와의 교섭을 통해 예루살렘에 무혈입성했다는 이유로 그 공적을 인정받지 못한다. 성도 예루살렘은 그리스도교도의 피를 흘리며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교황에 의해 ‘그리스도의 적’으로까지 선언되었다.

제7차와 제8차 십자군
무참한 실패로 귀결되었으나 십자군 원정을 두 번이나 이끌어 교황청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된 프랑스 왕 루이 9세. 사자심왕 리처드와 프리드리히 2세와는 달리 이슬람의 중심인 이집트를 공략한 루이는 나일강의 삼각주 지대에 있는 도시 다미에타 공략에는 성공하지만 결국 몰살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고 십자군 전체가 포로가 되는 진풍경을 연출한다. 20년 뒤 다시 한 번 원정을 나서지만 튀니지아에 상륙하자마자 루이 자신이 역병에 걸려 죽음으로써 두번째의 원정도 실패하고 만다. 이교도로부터 성도를 되찾기 위해 십자군 원정을 두 번이나 치른, 그리고 참담한 패배자가 되어 ‘순직’한 이 왕은 아이러니하게도 십자군 원정에 참가한 그 어떤 왕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던 ‘성인’의 반열에 오른다.

3차 십자군에서 새롭게 등장한 튜턴 기사단과 여전히 십자군 전력의 주축을 담당한 템플 기사단과 병원 기사단은 십자군 전쟁의 후반 한 세기에 주역으로 활동하게 된다. 십자군 전쟁 기간 내내 출신과 스타일의 차이와 라이벌 의식 때문에 협동해 싸운 적이 한 번도 없던 템플 기사단과 병원 기사단이지만, 1291년 팔레스티나에 마지막으로 남은 그리스도교의 도시 아코에서 벌어진 공방전 그 최후의 날에 두 기사단의 단장은 마치 등을 맞대고 싸우듯 함께 분투하다 최후를 맞이한다. 이후 명맥을 유지하는 튜턴 기사단이나 병원 기사단과는 달리 템플 기사단은 교황과 프랑스 왕에 의해 조직 자체가 완전히 와해되고 만다.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는 말 한 마디에 고무되어 고국을 떠나 먼 팔레스티나에 와서 다른 어느 기사단보다 맹목적이고 광신적으로 이슬람교도를 공격하는 일에 앞장섰던 템플 기사단의 마지막 단장이 이단 재판을 받고 화형에 처해짐으로써 템플 기사단은 역사의 무대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만다.

십자군에 맞선 이슬람의 지도자 살라딘과 알 아딜, 알 카밀은 살라딘의 냉철함과 합리성 그리고 관용 정신을 이어가고 이슬람 내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사자심왕 리처드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의 협상을 통해 성도 예루살렘을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가 공생할 수 있는 도시로 만들고, 이 협상을 신뢰의 약속으로 계속 유지시켜나가도록 한다. 그러나 이슬람 세계를 엄청난 속도와 파괴력으로 집어삼킨 몽골제국은 이슬람의 빛나는 수도 바그다드와 다마스쿠스마저 폐허로 만들고, 이 몽골의 서진을 노예 출신의 장수 바이바르스가 막아내 새로운 술탄의 자리에 오른다. 그 포악함으로 서유럽 세계를 떨게 했던 술탄 바이바르스는 “그리스도교도의 마지막 한 사람까지 지중해에 처넣어주겠다”고 선언하고, 마침내 시리아와 팔레스티나 전역에서 그리스도교도를 일소한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 장대한 시리즈의 완결편에서 십자군 전쟁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인지, 역사의 진정한 승자는 누구인지, 이 시대에 필요한 궁극의 외교론과 공생론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강화로 끝난 이 제3차 십자군에 대해, 현대의 많은 연구자들은 상황이 그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평한다.
분명히 십자군측은 예루살렘을 수복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를 목표로 내세우고 원정을 시작했던 제3차 십자군은 군사적으로 실패한 셈이다.
그러나 리처드와 살라딘이 성립한 이 평화는 강화 조문에 명기된 3년 8개월이라는 기한을 훌쩍 넘어, 간혹 사고는 있었지만, 1218년까지 26년 동안 이어졌다.
26년이라는 세월이 짧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가령 지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26년간의 평화가 성립한다면 어떨지 생각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 시기 중근동의 십자군 세력을 생각하면, 이 26년이란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었던 것이다.
1218년은 알 아딜이 죽은 해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평화가 깨진 것은 그리스도교측이 제5차 십자군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206쪽)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전쟁은 인류 최대의 악업이다. 그런데도 인류는 도무지 이 악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전쟁이란 그 승패 여부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저지른 후 얼마나 오랫동안 평화가 이어졌느냐 하는 것으로 평가하는 게 좋지 않을까.
또한 인류가 전쟁이라는 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상 영원히 지속되는 평화란 있을 수 없으며, 그때그때 단기간의 평화를 쌓아가는 식으로 달성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현실적이지 않을까.
제3차 십자군은 그리스도교측과 이슬람측이 정면으로 충동해, ‘꽃의 제3차’로 불릴 정도로 매우 치열하게 싸웠던 십자군이었다. 그러나 전쟁 후 리처드와 살라딘이 체결한 강화는 그후로 사반세기나 이어진다. 그리고 제5차 십자군으로 인해 3년간 중단되었다가 다시 8년간 이어졌다. 모두 합치면 33년이다.
물론 이슬람측에 살라딘, 알 아딜, 알 카밀이라는 현명하고 현실적인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이 이어진 것의 이점이 컸다. (…)
만약 이 33년을 더 연장하고 싶다면, 그리스도교측에는 “불신앙의 무리와의 강화는 절대 안 된다”거나 “성도 예루살렘은 그리스도교도의 피를 흘려 탈환해야 한다”는 등의 과격한 발언에 영향받지 않을 지도자가 나와야 했다.(335~336쪽)

야파, 즉 텔아비브는 현재 이스라엘의 수도 기능이 집중되어 있는 이스라엘 제일의 도시다. 한편 지금도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가자는 팔레스티나 사람들의 자치지구이자, 파타하보다 과격한 하마스가 지배하는 ‘가자 지구’의 중심적인 곳이다. 가자 역시 정치 기능이 집중된 도시라 할 수 있다.
텔아비브에서 가자까지의 거리는 불과 17킬로미터 안팎이다. 21세기인 지금, 이스라엘과 팔레스티나는 이 거리를 사이에 두고 한쪽은 미사일을 쏘아대고 다른 한쪽은 공중폭격으로 대응하며 대치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장소에서, 지금으로부터 8백 년쯤 전인 1228년에서 1229년 사이는,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고 공생을 실현하기 위한 교섭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것도 그리스도교 세계 속계의 일인자인 황제와 이슬람 세계 속계의 일인자인 술탄, 즉 정상 중의 정상들이.(382~383쪽)

이 장대한 시리즈의 완결편은 다음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옳은 것만 말하는 신이 바란 일이니 옳은 전쟁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따라서 신의 존재가 후퇴한 뒤에도 ‘옳은 전쟁’만은 남았다. 아니, 적어도 이 정도는 남기? 싶다고 인간이 생각했기에 남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20세기에 맹위를 떨치고 21세기인 지금까지 계속 남아, 전쟁을 이끌어내는 측이나 이끌려나간 측 모두, 옳은가 옳지 않은가 하는 문제를 두고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다.(560쪽)

십자군 전쟁이 오늘의 우리에게 묻는다. ‘옳은 전쟁’이란 무엇이고 과연 그 ‘옳은 전쟁’이라는 것이 있는지를.
 

추천평

시대가 공유하는 신념이 역사 위에 펼쳐놓는 광기는 장관이다.
그 광기를 들추어내는 시오노 나나미의 문장은 서늘하다.
김훈(소설가)
『십자군 이야기』는 역사책이 아니다. 때문에 단순히 과거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현재이자 미래를 이야기하는 책, 나도 모르게 그 과거와 현재, 미래에 들어와 있음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김주하(앵커)
역사는 지속된다. 과거는 남는다. 과거는 돌아온다. 십자군 이야기의 종결편인 이 책에서 다루는 사건들은 20세기 후반 이후 이어진 중동 사태, 동유럽과 서유럽의 대립, 중국의 위협의 시발점들이다. 오늘의 세계 정세를 읽고 미래를 예견하는 작업은 십자군 역사의 과거에서 시작해야 한다.
윤혜준(연세대 영문학과 교수)
무거운 역사책과 어두운 박물관에서 잠자던 십자군과 이슬람 전사들을 세상에 끌어낸 이야기의 그물망은 마법이다. 8백 년 잠에서 깨어난 전사들이 다시 칼과 창을 들었다. 급박한 박자에 맞춰 얽히고설킨 전쟁의 곡선으로 전진하고 후퇴하는 장면을 숨 쉴 틈도 없이 따라가게 만드는 저 이야기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민경현(고려대 사학과 교수)
천 년 전의 전쟁에서 오늘을 본다. 『십자군 이야기』의 무대는 지금도 여전히 세계의 뇌관인 곳이다. 이 책은 이념 전쟁이라는 과거와 현재를 경험하고 있는 우리에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소중한 교훈을 제시한다.
박태균(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