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기독교-개신교 (책소개)/1.기독교의 역사

십자군 이야기2

동방박사님 2021. 12. 14. 09:12
728x90

책소개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 이 한 마디의 힘은 엄청났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이 한 마디에 먼 이국땅 오리엔트로 원정을 떠난 유럽 각국의 빈민들과 제후, 그리고 성직자들. 그리고 그들 1차 십자군은 그리스도교도의 성도 예루살렘을 되찾고 에데사 백작령, 안티오키아 공작령, 트리폴리 백작령, 예루살렘 왕령으로 구성된 십자군 국가를 세운다. 하지만 이슬람 세력에 포위된 채 절대적인 병력부족에 시달리는 십자군 국가의 운명은 위태롭기만 하다. 이에 시토파 수도사인 베르나르두스의 주창에 의해 프랑스 왕과 독일 황제 등으로 구성된 2차 십자군이 출정하지만 원정은 실패하고 만다.

십자군 국가는 템플 기사단과 성 요한 기사단의 양대 종교기사단과 이들이 팔레스티나 전역에 축조한 성채들, 그리고 피사, 제노바,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경제력과 해군력의 지원으로 2차 십자군 원정 실패의 후폭풍을 감당해나가지만, 곧 이슬람측의 영웅 살라딘의 등장으로 위기를 맞는다. 지하드(성전)를 기치로 내세우고 분열되었던 이슬람 세력을 통합하는 데 성공한 살라딘이 전면에 나선 것이다. 나병에 걸린 젊은 예루살렘 왕 보두앵 4세는 템플 기사단과 성 요한 기사단의 힘을 결집해 총력으로 살라딘과 맞선다. 이제 십자군 국가와 살라딘의 이슬람 세력은 역사에 길이 기록될 위대한 하틴 전투에서 운명적인 대결을 펼친다.

시오노 나나미의 압도적인 필력은 『십자군 이야기』1권을 이어 2권에서 더 빛을 발한다. 인간의 욕망과 의지가 만들어낸 장대한 드라마, 그 빛과 어둠 속에서 명멸하는 인간 군상의 스토리는 여전히 매혹적이다. 또한 특유의 역사와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과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박진감, 그리고 핵심을 곧바로 파고드는 직관적인 문장은 독자들을 사로잡아 새로운 차원의 지적 쾌락을 선사할 것이다. 『십자군 이야기』 2권에서 더욱 심화된, 역사의 흐름과 인간의 운명에 대한 시오노 나나미의 도저하고도 냉철한 시선은 독자들을 전율하게 만들 것이다.


목차

제1장 | 수호의 시대
십자군의 제2세대
템플 기사단의 탄생
성 요한 기사단의 변모
보두앵 2세
십자군의 여자들
프랑스에서 온 예루살렘 왕
성채

제2장 | 이슬람의 반격이 시작되다
에데사 함락
수도사 베르나르두스
제2차 십자군
성지로 가는 길
다마스쿠스로
철수
심각한 영향
누레딘의 등장
십자군 국가의 실태
대지진
비잔틴식 외교
해군력=제해권
십자군과 십자군 사이의 시기
종교 기사단
‘템플 기사단’
‘병원 기사단’
십자군 시대의 성채
중세의 경제인들
해군력
거류지
상관
온건한 이슬람교도

제3장 | 살라딘의 등장
수니파와 시아파
파티마 왕조의 멸망
새로운 십자군의 계획과 좌절
젊은 살라딘
문둥이 왕 보두앵
이슬람 세계 통일로 가는 긴 도정
젊은 문둥이 왕의 끝없는 싸움
‘해시시를 피우는 남자들’
‘고삐 풀린 개’

제4장 | 성전(지하드)의 해
‘하틴 전투’
승자와 패자
발리앙 이벨린
예루살렘 공방
남자의 대결
예루살렘, 다시 이슬람의 손으로

도판 출처
 

저자 소개

저 : 시오노 나나미 (Nanami Shiono,しおの ななみ,鹽野 七生)
 
1937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1963년 가쿠슈인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한 뒤, 1964년 이탈리아로 건너가서 1968년까지 공식 교육기관에 적을 두지 않고 혼자서 르네상스와 로마 역사를 공부했다. 1968년에 집필 활동을 시작하여 『르네상스의 여인들』을 잡지 《주오코론(中央公論)》에 연재하면서 작가로 데뷔했다. 1970년부터 이탈리아에 정착하여 40여 년 동안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에 천착해왔으며, 기존의 관념...

감수 : 차용구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파사우대학교에서 서양 중세사 연구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중앙대학교 인문대학 역사학과 교수로 재임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로마제국 사라지고 마르탱 게르 귀향하다』『중세 유럽 여성의 발견』이, 옮긴 책으로 『중세의 빛과 그림자』가 있고 「중세 문화 속의 그리스 신화」「필립 아리에스의 죽음관에 대한 연구」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책 속으로

십자군의 여자들

(…)
널리 인간세계에 눈을 돌리면 인재가 마치 분수처럼 한 시대에 한꺼번에 배출되는 현상이 종종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역시 분수처럼 많은 물을 기세 좋게 뿜어올리고는 소리 없이 떨어지며 인재 고갈의 시대로 접어든다.
이런 현상이 끼치는 영향이 국내에만 한정된다면 문제해결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이전 시대에 축적해놓은 것을 갉아먹으며 차분히 앉아 다음 분수가 뿜어져오르기를 기다리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인간세계에서는 한 나라의 인재 배출과 인재 고갈의 순환이 다른 나라에서도 같은 시기에 일어나지는 않는다. 한쪽은 인재 고갈 시대에 접어들었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인재 배출의 시대를 맞이하는 일이 상당한 비율로 일어나는 것이 인간세계이다.

유럽을 떠난 1096년부터 1099년 예루살렘 정복을 거쳐 보두앵 1세가 죽은 1118년까지의 22년은, 십자군측에서 인재가 배출된 시대였다.

연구자들은 제1차 십자군의 성공요인으로 두 가지를 든다.
하나는, 허를 찔린 이슬람측에 방어준비가 불충분했다는 것.
또 하나는, 각 영지의 태수와 영주 사이의 불화와, 그에 따른 이슬람측의 분열.

둘 다 옳다. 십자군의 공격을 받은 이슬람측은 그들을 단순한 침략자로 생각했으므로 평소 사이가 나쁜 인근 도시의 영주가 공격받는 것을 손놓고 지켜보기만 했고, 자신이 공격을 받아 맞서 싸우게 되면 이번에는 다른 영주들이 가만히 지켜보는 식이었다. 이렇듯 그들에게 통일된 방어전 같은 것은 꿈같은 이야기였는데, 이는 제1차 십자군이 성공할 수 있었던 한 요인이었다.
그러나 그에 앞서 말할 게 있다. 뛰어난 인재에게 요구되는 조건이 일관된 의지와 자신이 지닌 힘을 충분히 활용할 줄 아는 능력이라면, 제1차 십자군 시대의 이슬람측에는 그런 인재가 없었다. 이슬람측에 유능한 지도자가 없었다는 것이 십자군측에 성공을 가져다준 것이다.

인재가 많았던 제1차 십자군 시대가 끝난 후 공식무대에 등장한 것이 3대 예루살렘 왕이 된 보두앵 2세다. 하지만 이 사람은 1096년에 로렌 공작 고드프루아를 따라 오리엔트로 온 십자군 기사 중 하나였으므로, 엄밀히 말하자면 제1차 십자군 세대 중 아직 남아 있는 사람에 속한다. 또한 조슬랭 드 쿠르트네라는 맹우가 목숨을 구해주기도 했다. 이 보두앵 2세의 시대에는, 그 높이와 기세는 뚝 떨어졌을지언정 분수가 아직 물을 내뿜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십자군이 유럽을 떠나던 해에 겨우 다섯 살이었고, 그후 30년 넘게 프랑스 왕가의 일원으로 지낸 사람이 예루살렘 왕이 되었을 때, 분수는 물을 내뿜기를 멈추었다. 그런데 이슬람측에서는 이 시기부터 물을 높이 뿜어올리게 된다. 역사의 불가사의, 하지만 이것은 인간세계의 부조리이기도 하다. --- pp.46~48

수도사 베르나르두스

중근동의 십자군 국가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에데사 백작령, 안티오키아 공작령, 트리폴리 백작령, 예루살렘 왕령 네 국가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중 하나를 적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을 맞닥뜨린 그리스도교도들은 신앙심이 깊은 사람일수록 더 강하게, 이제 신은 우리를 지켜주지 않는 것인가, 하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런 공포는 한 나라의 왕이든 일개 서민이든 다르지 않았다.

이러한 유럽의 그리스도교 세계에 수도사 베르나르두스의 목소리가 한층 높이 울려퍼졌다. 제1차 십자군은 클뤼니 수도원 관계자들의 호소로 시작되었는데, 제2차 십자군은 클뤼니파의 그리스도교 세계 개혁안을 미온적이라 비판하며 설립된, 프랑스의 수도회에서도 보다 급진적인 성향을 띤 시토파 수도원 관계자들에 의해 일어나게 된다.
후에 가톨릭교회의 성인 반열에 올라 ‘성 베르나르두스’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은 이 사람은 1090년 프랑스 북동부 샹파뉴 지방에서 태어났다. 이 지역에서도 제1차 십자군에 참가한 사람이 많았는데, 베르나르두스는 오리엔트를 향해 떠나는 그리스도 전사들의 긴 행렬을 여섯 살 무렵에 본 셈이다.
(…)
중세 유럽은 ‘수도원의 시대’라고도 불린다. 수도원이 세속 사람들에게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기 때문인데, 그중에서도 성 베네딕투스가 이탈리아 남부의 몬테 카시노에 창설한 이래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간 베네딕토파 수도원의 힘은 절대적이었다. 클뤼니 수도원도 베네딕토파에 속하므로, 창시자인 성 베네딕투스가 정한 수도원의 기본원칙, 청빈과 복종과 정결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제1차 십자군 성공의 공로를 대접받게 된 후 클뤼니 수도원에 모여든 것은 사람들의 신앙심만이 아니었다. 이들의 기부도 급증한 것이다. 이 시기 프랑스 남부를 휩쓸던 북아프리카 해적이 로마를 향해 여행중이던 클뤼니 수도원 원장 일행을 습격하여 엄청난 수확을 거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클뤼니 수도원 고위 사제들의 사치스러움은 로마 교황을 능가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 한 가지만 가지고 클뤼니 수도원을 비난했다면 베르나르두스는 고지식한 원리주의자에 머물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원리주의자 중에서도 과격한 원리주의자였다. 자기 혼자만 원리원칙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인다는 의미에서.

베네딕토파 수도원에는 앞서 말한 3대 원칙 외에 라틴어로 ‘스타빌리타스(정주)’라 불리는 규칙도 있었다. 베르나르두스는 청빈 같은 것보다 특히 이 규칙을 싫어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베네딕토가 생각한 ‘정주’는 세상의 잡사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며, 신에게 가까이 가는 노력을 게을리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는데, 수도사 베르나르두스는 성직자가 세상의 잡사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는 한 그리스도교 세계를 성서의 뜻대로 다스릴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
인간세계에서는 소리 높여 주장하면 할수록 대중의 이목을 끌기 쉽다. 베르나르두스에게 심취한 사람이 늘고 베르나르두스파 수도원에 들어오는 기부도 늘어만 갔다. 유럽은 클뤼니파 대신 베르나르두스가 이끄는 시토파가 지배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리고 1144년 말에 일어난 에데사 함락 소식이 아직 유럽에 전해지지 않았던 1145년 2월 초, 베르나르두스에게 심취했던 사람 중 하나가 에우게니우스 3세라는 이름으로 로마 교황에 취임한다.

제자의 교황 취임을 축하하며 보낸 편지에서, 성직계의 최하위층에 속하는 이 수도사는 최상위에 있는 로마 교황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무슨 문제든 나와 상담해주시오.”
이것이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가 가지고 있던 ‘힘’이었다. 제1차 십자군의 원동력은 로마 교황 우르바누스 2세였지만, 베르나르두스는 교황이 아니다. 대주교도 주교도 아니었다. 세상에서는 한낱 수도사에 지나지 않던 이 사람이 제2차 십자군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
당시 기록에서는 이런 베르나르두스를 홀쭉하게 여윈 몸을 허름한 수도복으로 감싸고 지팡이에 의지해 휘청휘청 걸어다녔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빈약하고 허약한 외모는, 영양이 충분한 몸에 옷을 몇 겹씩 껴입은 황제나 왕과 대면하는 순간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당시의 권력자들은 베르나르두스의 이런 외모에 압도당했을 것이다. 호화로운 옷을 껴입은 몸을 부끄럽게 여길 것까진 없더라도 왠지 모를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리고 뒤이어 그리스도교도라면 누구에게나 마땅한 정론이 날카롭게 설파된다. 이래서야 설득당하는 것도 당연했을 것이다. --- pp.77~84

종교 기사단

(…) 신에게 평생을 바친 수도사이자 신을 위해 싸우는 기사이기도 한 남자들을 결집한 종교 기사단은 십자군 시대의 특산물이다.
이들의 대표격을 꼽는다면 당시의 그리스도교도들이 ‘성지’라고 부르던 중근동을 본거지로 하고 이 성지를 지키기 위해 창설된 템플 기사단과 성 요한 기사단을 들 수 있다.
(…)
중근동의 십자군 국가에서 생겨난 양대 종교 기사단인 템플 기사단과 성 요한 기사단 역시 세속의 삶을 버리고 수도사가 된 남자들의 집단이다. 유럽에 있는 동종의 수도회와 다른 점은 오직 한 가지, 이슬람 교도를 상대로 싸운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이 양대 종교 기사단은 본부를 예루살렘에 두었음에도 예루살렘의 대주교가 내리는 명령도, 예루살렘 왕의 명령도 따를 필요가 없었다. 사실상 완전히 독립된 집단이었다. 이와 관련해 누레딘이 이끄는 다마스쿠스군이 접근해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그들이 어떻게 움직였을지 상상해보자.

예루살렘 왕과 공동으로 싸워야 할지 말지 로마 교황에게 지시를 받고 싶어도 그 전에 당장 행동을 개시하지 않으면 모두 죽임을 당하고 만다. 이것이 그들이 처한 상황이었다. 자주적으로 판단하고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독립성 덕분에 종교 기사단은 수세로 돌아선 십자군 국가의 ‘칼’이 될 수 있었다. 평화로운 시대에는 칼을 빼지 않고 차고 있는 것만으로도 억지력이 된다. 하지만 난세에는 유사시에 주저 없이 칼을 빼지 않으면 곧장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십자군 국가의 두 자루 ‘칼’인 템플 기사단과 성 요한 기사단이 전투 집단으로 창설된 시기는 1118년이다. 1118년은 제1차 십자군 세대의 마지막 인물인 예루살렘 왕 보두앵 1세가 죽은 해이고, 그때까지 20년 동안 확립한 십자군 국가들이 수세로 돌아서는 경계가 된 해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실이 보여주는 것처럼, 종교 기사단은 수세로 돌아선 시대의 중근동 십자군 세력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 pp.153~155

젊은 문둥이 왕의 끝없는 싸움

예루살렘의 왕 보두앵 4세는 죽기 전까지 11년간의 치세 기간 내내 병 때문에 왕궁에 틀어박혀 있었던 것은 전혀 아니었다.
(…)
전장에서는 항상 말을 타? 최전선에 섰고, 적이 공격해와도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병이 악화되었을 때는 안장에 자기 몸을 묶어서라도 지휘를 했다. 말이 쓰러지면 사람도 운명을 함께하게 되니 위험하다며 만류하는 측근의 충고도 보두앵 4세의 마음을 바꾸지 못했다.

젊은 문둥이 왕의 이런 기백에 항상 출격에 동행하던 장병들이 감동받은 것은 당연했다. 또한 직접적으로 왕의 지휘를 받지 않는 ‘템플 기사단’과 ‘병원 기사단’의 기사들도 자신들보다 훨씬 어린 왕의 말에 순수하고 진지한 태도로 귀를 기울였다. 왕의 병이 이 사람들에게 불안을 안겨준 일은 없었다. 모두가 보두앵의 병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감염이 두려워 왕에게 다가가기를 꺼리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1177년, 보두앵 4세가 열여섯 살 때의 일이다.
살라딘이 2만 6천 명이나 되는 병사를 이끌고서 카이로를 떠나 북상하기 시작했다. 바다를 왼편에 두고 가자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예루살렘 시내는 공포에 휩싸였다. 이대로라면 곧 적군이 예루살렘에 다다르게 된다.

이때 보두앵은 아스칼론에 있었다. 살라딘이 카이로에서 출발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의 목적이 이집트가 호시탐탐 노리던 항구도시 아스칼론일 거라 생각하고는, 아스칼론의 방어를 위한 1천4백 명의 병사를 이끌고 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살라딘은 바다 쪽을 동시에 공격하지 않고서는 항구도시 공략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살라딘의 의도는 예루살렘을 노리는 척하면서 아스칼론에서 예루살렘군을 끌어내, 도망갈 곳 없는 평원에서 큰 전투를 벌여 괴멸시키려는 것이었다. 예루살렘 내의 방어 병력이 얼마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생각해낸 계책이었다.

열여섯 살의 보두앵은 이 계책에 속아넘어갔다. 하지만 기병만으로 공격하겠다는 결정은 칭찬받아도 좋은 전술이었다. 그리고 살라딘은 이때도 역시나 어린 문둥이 왕을 가볍게 보고 있었다.
그는 2만 6천 명이나 되는 병사의 절반을 주변 지대에서 공포작전을 펼치는 데 내보냈다. 약탈과 화공을 저지르면 예루살렘과 아스칼론의 주민들이 공포에 질려 스스로 성문을 열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절반이라고 해도 1만 3천 명이나 된다. 그리고 살라딘이 직접 지휘하는 이 1만 3천 명의 병사를 쫓는 형국이 된 보두앵의 병력은, 예루살렘 국왕의 기병 5백 명과 ‘템플 기사단’ 기병 80명에 지나지 않았다.

적군이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왕을 선두로 한 580명의 기병이 한꺼번에 살라딘의 군대를 향해 돌진했다. 작전이고 뭐고 없었다. 기력만 가지고서 닥치는 대로 쳐들어간 것이다. 그 지나친 만용에 살라딘의 친위대인 쿠르드 기병대까지 도망치기 시작했고, 용맹하기로 소문난 살라딘군도 도망쳐, 하마터면 술탄이 포로가 될 뻔한 참상을 남기고서 이 몽기사르 전투는 끝이 났다.
군대를 물린 일은 있어도 도망친 적은 없었던 살라딘이 서른아홉 살에 처음으로 맛본 패전이었다.
--- pp.268~270
 

출판사 리뷰

그 순간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듯 박진감 넘치는 묘사,
인간과 권력에 대한 통찰,
서슴없이 핵심을 파고드는 시오노 나나미 특유의 문장.

그 어떤 누구도 중세를, 십자군을, 십자군 전쟁을
이처럼 생동감 있게, 박력 있게, 매력적으로 그려내지 못했다.


2011년 여름 대한민국 독자들을 흥분시켰던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시리즈의 2막이 올랐다.

인류 역사상 200년이라는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치러진 전쟁이자 세계 2대 종교가 격돌한 인류 역사의 대사건으로,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가장 문제적인 사건 중 하나인 십자군 전쟁. 또한 십자군 전쟁과 십자군 이야기는 현대의 다양한 문화산업에서 변형되어 재생산되는 상상력의 원천이기도 하다.
하지만 십자군 전쟁에 대한 기존의 연구서들은 서구 중심 혹은 이슬람 중심이라는 시각의 틀 내지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인 시각의 틀에 갇혀, 그 진면목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그 전쟁을 실제로 일으키고 그 역사 속에서 살아 숨쉬고 움직였던, 그리하여 그들 각자의 독특하고도 다른 개성으로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또다른 국면을 만들고 서로의 관계 속에서 상황을 변화시키는 변수로 작용했던 인물들을 전면에 내세워, 그들의 이상과 욕망, 성공과 좌절의 명암을 통해 십자군 전쟁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십자군 전쟁을 새롭게 조명해낸다. 십자군 이야기가 900여 년이라는 시간을 건너뛰어 현대적 이야기로 부활한 것이다.

1권에서는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라는 위력적인 한 마디로 촉발된 유럽의 봉건제후와 주교, 수도사와 기사, 그리고 빈민들로 구성된 제1차 십자군의 결성과 그들에 의해 십자군 국가가 성립하는 20여 년의 과정을 다뤘다.
이제 2권에서는 십자군의 제1세대가 모두 역사에서 퇴장한 뒤, 보두앵 2세가 예루살렘 왕으로 등극하는 1118년부터 시토파의 수도사인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의 제창에 의한 제2차 십자군의 결성과 퇴각(1146~1148),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정복함으로써 예루살렘을 십자군 시대 이전으로 되돌리는 1187년까지, 이슬람의 대반격이 시작되는 제2차 십자군 전후의 70여 년의 기간을 다루고 있다.

시오노 나나미는 도저한 역사의 흐름에 대한 냉철한 일갈로 『십자군 이야기』 2권을 시작한다.

어째서인지 인재는 어느 시기에 한쪽에서만 집중적으로 배출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현상도 시간이 좀 지나면 잦아들고, 이번에는 다른 쪽에서 인재가 집중적으로 배출된다.
이제부터 시작하는 2권에서는, 그리스도교측에서 배출되는 남자들을 그린 1권에 이어 이슬람측에서 배출된 남자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왜 양쪽 모두 같은 시기에 인재가 배출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에 명쾌하게 답해준 철학자도 역사가도 없다. 인간은 인간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는 신들의 배려인가, 아니면 이것이야말로 역사의 부조리인 것일까……(9쪽)

시오노 나나미의 이런 냉철함은 1권에서와 마찬가지로 2권에서도 적재적소에 등장하여 독자들을 매료시킨다. 더 나아가 제2차 십자군이 이슬람측과 전투를 시작한 지 나흘 만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은 채 퇴각을 결정하는 바로 1148년 십자군 국가에 살고 있던 그리스도교도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실제로 그들이 느꼈던 실망감과 절망을 고스란히 전달함으로써, 십자군 전쟁이라는 먼 과거 역사적 사실의 화석화된 껍질을 부수고 현재적인 것으로 생생하게 되살아오게 한다.

제2차 십자군의 실패는 무엇보다 중근동 현지에서 생활하는 그리스도교도에게 엄청난 실망을 안겨주었다. 이 사람들은 유럽의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프랑스 왕의 지위가 얼마나 높은지 알고 있었다. 그 양대 유력자가 병사들을 이끌고 와서, 실제로 적과 싸운 것은 나흘에 불과한, 짧다는 말조차 할 수 없는 전투를 하고는 군대를 물려 돌아가버린 것이다.
(…)
이슬람측에서 본 제2차 십자군을 다시 일본 중세사의 용어로 치환해보면 다음과 같지 않을까.

제1차 십자군 때 공격해온 그리스도교측이 ‘다이묘’라면, 이슬람측에서 맞서 싸운 이들 역시 아타베그나 아미르 등 호칭은 다르지만 모두 ‘다이묘’인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측이 이겼다.

제2차 십자군에서는 ‘쇼군’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공격해왔다. 그것도 두 명의 ‘쇼군’이. 그럼에도 ‘다이묘’ 한 명이 지키는 다마스쿠스를 공격하는 데 애를 먹었고, 또 한 명의 ‘다이묘’가 알레포에서 접근해온다는 말만 듣고 진을 물리고 말았다. 그것도 고작 나흘간 전투를 치르고 말이다. 바그다드와 카이로에 있는 이슬람 세계의 ‘쇼군’은 둘 다 움직이지 않았다. 즉 그리스도교 세계의 두 쇼군은 이슬람측의 지방 다이묘에게 퇴각당한 것이다.
이러한 이슬람측의 감상을 뒤집어보면, 그것은 바로 중근동에 사는 그리스도교도의 뚸음이기도 했다.

이것이 제2차 십자군이 남긴 최악의 선물이었다. 차라리 애당초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왜냐하면 이 제2차 십자군은 이슬람측의 지방 다이묘 한 사람의 이름을 높여준 것에만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118~120쪽)

시오노 나나미는 인재 배출의 분수가 더이상 십자군 국가 쪽이 아니라 이슬람 쪽에서 뿜어져나오기 시작하고 인재 고갈에 시달리게 된 십자군 국가가 오로지 중근동의 십자군 세력만으로 방어해야 했던, 서방으로부터의 십자군 원정과 그다음 원정 사이의 기간이 의외로 길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제2차 십자군에서 제3차 십자군 사이만 해도 40여 년이다. 그사이 유능한 지도자가 잇따라 배출되었던 이슬람측의 끊임없는 공세에 이들은 그 적은 병력으로 어떻게 방어할 수 있었을까, 이것이 내가 가진 의문이었다. (152쪽)

이 의문에 대한 답으로 시오노 나나미는 ‘템플 기사단’과 ‘성 요한 기사단’ 양대 종교 기사단과 그들이 시리아와 팔레스티나 도처에 세운 성채들의 힘만이 아니라 기존의 다른 연구자들은 ‘십자가에 서약한’ 십자군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시했던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등 이탈리아의 해양 도시국가가 담당한 경제교류와 해군력을 통한 제해권 확보의 힘을 전면에 내세운다.

최근의 연구자들은 이탈리아 해양 도시국가가 지중해 동쪽 해역의 제해권을 견지한 것이 십자군 국가의 존속에 크게 공헌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살라딘이 시리아와 이집트를 통합한 후에도 시리아와 팔레스티나의 바다에 이집트 해군이 한 척도 얼씬거리지 못했을 정도이니, 베네치아와 제노바, 피사의 해군이 제해권을 견지한 공헌은 숨기려야 숨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남자들이 교역을 통한 경제활동으로 공헌한 점에 대해서는 여전히 언급하는 일이 거의 없다.

왜냐하면 이 남자들의 ‘공헌’은 그리스도교에 대한 신앙 때문이 아니라 돈을 벌려고 한 일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나는 서구인이 저술한 십자군의 역사는 어떤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모순은 그리스도교 십자군 원정의 진정한 원인을 십자가에 서약한 신앙심에서만 찾고자 한 탓에 생긴 것이 아닐까 싶다.

서구의 많은 연구자들은 아직도, 십자군에 참가해 건투한 전사들 중 성도 예루살렘을 ‘해방’한 후 신에게 서약한 바를 이루었다며 귀국해버린 사람들을 영토욕이 없는 사람들이라며 상찬한다. 한편 신에게 서약한 바를 이룬 후에도 중근동에 남아 영토 획득과 유지에 집착한 십자군 제후들은 세속적인 욕망에 사로잡혔다며 비난한다.

그러나 십자가에 서약한 바를 이룬 것에 만족하며 귀국한 ‘십자군 전사’가 단연 많았다는 사실은, ‘신에 대한 서약이 이루어진 후의 성지’에 만성적인 병력 부족을 초래했다. 그 결과 에데사 백작령을 빼앗기고 안티오키아 공작령의 방어를 비잔틴제국 황제에게 맡기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예루살렘조차 빼앗기게 된 것이다.
(…)
역사가라면 이 점을 지적해야 할 테지만, 이걸 지적하면 그들이 지녔던 세속적인 영토욕이나 부의 축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는 호령으로 시작된 십자군의 역사를 쓰는 그리스도교도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석연치 않았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신에 대한 서약보다 사욕이 더 지속성이 강했다는 이야기가 되니까, 아무리 그것이 인간성의 현실이라 할지라도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역사 전문가가 아니다. 또한 이슬람교도도 아니고, 그리스도교도도 아니다. 그래서 애초의 동기는 돈을 벌기 위한 것이었다 해도 결과적으로 ‘신이 바라시는’ 것의 존속에 공헌한 이탈리아 경제인에게 페이지를 할애하는 것에 조금도 주저함이 없다. (204~207쪽)

이렇듯 시오노 나나미는 신앙심뿐 아니라 영토욕과 경제적 이득을 탐하는 인간적 욕망까지도 십자군 전쟁의 원동력 중 하나로 그려냄으로써, 십자군 이야기를 보편적인 인간의 이야기로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서 빛과 어둠의 그림자로 스러져간 다양한 인간 군상은 1권에 이어 더욱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이제 그리스도교측에서는 나병에 걸린 젊은 왕 보두앵 4세와 발리앙 이벨린이, 이슬람측에서는 장기와 누레딘 그리고 ‘지하드(성전)’를 외치며 이슬람의 통합에 성공한 영웅 살라딘이 운명을 건 대결을 펼치며 역사에 기록된 저 위대한 하틴 전투에서 결전을 벌이게 된다.
저자의 전작 『로마인 이야기』가 단순히 로마시대와 로마인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물들을 중심에 놓은 새로운 역사서로 읽히면서 큰 공감과 반향을 일으켰던 것 못지않게 『십자군 이야기』 역시 중세와 십자군 전쟁에 대한 뛰어난 역사서임에 틀림없다. 아니, 그 이상이다. 『십자군 이야기』 1권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듯이 그 누구도 저자만큼 십자군 이야기를 이렇게 매력적으로, 박진감 넘치게, 생생하게 쓰지 못할 것이다. 독자들은 중세와 십자군의 역사, 더 나아가 인간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게 됨은 물론이고, 중세와 십자군 이야기의 매력에 다시금 빠져들게 될 것이다.
 

추천평

시대가 공유하는 신념이 역사 위에 펼쳐놓는 광기는 장관이다.
그 광기를 들추어내는 시오노 나나미의 문장은 서늘하다.
김훈(소설가)
1권은 호기심을 갖고 집어들었다면 2권은 믿음을 갖고 읽기 시작했다.
『십자군 이야기』는 역사책이 아니다. 때문에 단순히 과거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현재이자 미래를 이야기하는 책, 나도 모르게 그 과거와 현재, 미래에 들어와 있음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김주하(앵커)

'43.기독교-개신교 (책소개) > 1.기독교의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의 이름으로 : 종교 폭력의 진화적 기원  (0) 2021.12.28
십자군 이야기3  (0) 2021.12.14
십자군 이야기 1  (0) 2021.12.14
출애굽기 신학  (0) 2021.11.30
이스라엘  (0) 2021.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