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한국근대사 연구 (책소개)/1.한국근대사

우아한 루저의 나라 (1897~1913) 독일인 3인이 대한제국을 답사하다

동방박사님 2022. 2. 15.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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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대한제국에 온 독일인,
지금의 대한민국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저자는 연구년을 독일 하이델베르그에서 보내면서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를 다룬 독일 기사를 찾았다. 몇 년 동안 자료 발굴을 통해 당시 독일인이 관찰한 대한제국은 많은 부분 호도되고 저평가된 것을 알았다. 이 책은 1898년 당현(당고개) 금광을 조사하고 돌아간 크노헨하우어의 1901년 강연문, 1913년 조선을 경험한 예쎈의 여행기, 1933년 라우텐자흐 교수가 백두산 밀림에서 만난 이름 모를 독립군 이야기를 바탕으로 독일 신문, 독일 대학에서 소장하는 한국관계자료집을 참조해 구성하였다. 대한제국을 답사한 3인의 독일인 기록을 통해 대한제국 역사를 바로 알리고자 엮었다.

목차

책을 펴내며: 하이델베르그대학 도서관에서 대한제국 찾기
머리말: 대한제국의 낯선 이방인

1. 대한제국은 동아시아의 황금사과인가?

세계 제국주의 열강 가운데 놓인 조선
개항 후 조선에 설립된 서양 무역회사
조선은 상업적 가치가 없다
금을 채취하면 가난한 나라가 될 것이다
크노헨하우어의 강연문 「Korea」(1901)
유럽인들이 잘못 알고 있는 한국 역사

2. 우아한 루저의 원형

풍전등화에 놓인 대한제국
헤이그 특사 파견은 과연 실패일까
독일의 동아시아 예술사 연구
예쎈의 여행기 「답사기: 조선의 일본인」(1913)
문화 차이에서 느끼는 루저

3. 백두산 가는 길

지배하는 제국, 저항하는 민족
일본이 꾸민 반중여론
독일의 동아시아 지리 연구
라우텐자흐의 「조선-만주 국경에 있는 백두산의 강도여행」(1933)
백두산 강도는 누구인가?

맺음말: 우아한 루저, 조선인의 자각
도판 목록

 

저 : 고혜련
 
1985년 이화여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박물관에서 재직하다가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독일 도상해석학의 연구방법론을 습득하기 위해 바르부르크가 교수로 재직했던 독일 함부르크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2002년 10월 하이델베르그대학에서 『미륵과 도솔천의 도상학』으로 박사논문을 제출, 2003년 2월 예술사학과 중국학 복수전공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 후 LMU뮌헨대학 중국학과 조교수로 임용되...
 

책 속으로

대한제국은 대청제국, 대일본제국, 더 나아가 러시아제국이나 대영제국과 대등한 독립국임을 천명한 것이다. 고종 황제는 광무개혁을 추진하며 서재필이 미국에서 가져온 근대적 토론 문화의 산실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를 아우르며 1899년 근대 헌법 대한제국 국제를 반포하였다. 그는 대한제국 황제가 주도하는 조선의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고자 하였으나,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불평등조약에 따른 개항, 제국주의 국가들의 이권 다툼의 틈바구니 속에서 균형을 잡기에는 취약한 재정구조, 근대화되지 못한 군사조직, 황제 자신을 스스로 지킬 힘도 부족한 외교 전략이었다.

19세기 조선 권력층의 갈등은 왕권과 척신세력 그리고 사대부가 속한 신진세력의 대립으로 지속되었으며, 결국 조선을 망국의 길로 이끌었다. 조선 군주의 힘은 대부분 신하의 힘보다 강력하지 못하였다. 권력을 가진 양반 세력이 농민들을 수탈하는 근본 구조를 타파하고자 하는 고종의 근대개혁 정책의 핵심은 허울 좋은 명목상 개혁 정책일 뿐이었다. 사회진화론이 팽배한 약육강식 시대에 고종의 노력은 역부족이었다. 형이상학적인 신유학의 왕도 정치는 조선을 갉아먹고, 대한제국을 루저의 나라로 만들었다.

이 시기 조선을 방문한 독일 여행자들은 일본보다 높은 수준의 고대 문화를 소유한 조선의 문화를 보고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실리를 따지는 중국인과 겉으로 함박웃음을 짓지만 속을 모르는 일본인 그리고 무뚝뚝해도 이방인에게 수줍은 미소를 머금을 줄 아는 순진한 조선인의 특성을 분명히 구별할 줄 알던 독일인들은 무기력한 루저 국가 대한제국의 몸부림을 안타까워했다. 한편 대한제국에 대한 열강의 요구는 채굴권, 어업권 등 이권 영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우아한 루저의 나라, 대한제국의 중립 선언」중에서

우리 일행은 마치 뱃멀미와 같은 울렁거림을 일으키는 끔찍한 가마에 의존하거나, 가마가 싫다면 조랑말에 앉아서 여행해야 했습니다. 나귀는 조선에서 가장 보편적인 교통수단이며 소량 화물을 운송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당나귀보다 체구가 작은 나귀들은 놀라운 일을 해냅니다. 80~90kg의 짐을 싣고 상당히 가파른 산을 오르고, 좁디좁은 길과 매끄러운 바위 위를 걸어 다니는 염소처럼 안전하게 다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걸어야 할 때에는 미리 준비한 유럽산 신발로는 앞으로 전진하기가 매우 어려운 환경조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제한적인 짐을 나귀 안장에 균형 있게 얹어야 하고, 마부의 안내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첫 탐사를 위해 텐트, 시굴용 기구를 위한 14마리의 나귀와 3마리의 승마용 말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가마를 들어야 하는 4명의 가마꾼, 1명의 중국인 요리사, 1명의 시중 그리고 통역사를 준비했습니다. 여행에 필요한 우리 일행은 모두 17마리의 말과 26명의 사람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동물을 사람보다 먼저 말하는 것을 용서해주길 바랍니다. 모든 기수는 말을 우선순위에 두고 그다음 차례에 기수를 말하니까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참 독특하게도 작은 조랑말은 매우 버릇없었으며, 우리는 다니는 동안 내내 말 그대로 따뜻한 식사를 만들어 바쳤습니다.
---「탐사 전 준비물은 17마리의 말과 26명의 사람」중에서

저녁 식사 후 우리 4명은 함께 도미노 게임을 했습니다. 통역사도 물론 참가하였습니다. 영리한 조선인은 곧 투우사 게임의 이치를 파악했으며, 게임이 끝날 때마다 어린아이처럼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습니다. 또한 이를 지켜보던 조선인들 모두가 소리를 지르며 즐거워했습니다.

유럽인들은 이러한 양면성을 가진 조선인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호감을 느낍니다. 모든 예를 갖춘 신중함, 비록 형식적이었으나 사랑스러운 친절함,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법의 경직된 모습에서 빠져나와 환호하는 천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느 곳에서나 그런 예의 바른 친절함을 경험할 수는 없었습니다. 고위 관리의 경우 단순한 의례적인 방문 및 보답 방문으로 제한되어 있지만 이 의례적인 방문 또한 특이하고 흥미로웠습니다.
---「영리한 조선인」중에서

무엇보다 황제 소유 인쇄소에는 한글 금속활자체가 들어 있는 오래된 식자(植字) 상자가 있었다. 금속활자는 이미 구텐베르크보다 앞서 1400년경에 사용되고 있었다. 중국인보다 수준이 높았던 조선인들은 25개의 모음과 19개의 자음으로 아름다운 한글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와 같이 수준 높은 인쇄 기술로 제작된 한글 인쇄물 한두 권을 집으로 가져오는 것은 내게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 한글 구성의 기본은 간단한 선과 원이다. 도서관 이외에도 아카이브가 설치되었으며, 황실이 소유하고 오래되어 귀중하지만 소홀히 대한 유물들을 구제하였다.
---「이왕가박물관에서 발견한 찬란한 문명」중에서

눈보라가 몰아치며 모든 비탈에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우리는 바로 베이스캠프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곳에서 다음 일본 경찰서(요새)까지 돌아가는데 우리는 빈번하게 강도들과 맞부딪쳤다. 첫 번째는 그들이 모닥불을 피우는 바람에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알 수 있었고 살그머니 다른 길로 돌아서 갔다. 그러나 우리는 두 번이나 고집스럽고 까칠한 사냥꾼에게 잡혔으며, 나는 중국인 통역사에게 적절하게 말해달라고 부탁하였다. 또 수많은 덫과 강도를 만났을 때 가르쳐준 해결 방법에 대하여 감사했다. 그에게 나는 생활용품과 기구를 주었으며, 나를 협박하여 상당한 몸값을 요구하지 않은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내 일기장, 수집물품, 사진기들은 일꾼 노인의 가방에 숨겼기 때문에 다행히 그들이 알아차리지 못했다.
---「백두산에서 만난 강도」중에서

1933년 라우텐자흐가 백두산 밀림 지역 강도숲에서 본 무장한 무리들과 벨기에산 권총을 들고 있던 백두산 사냥군들은 대한독립군의 활동무대가 백두산이란 것을 증명한다. 그들은 북로군정서의 일부이거나 홍범도가 이끌던 대한독립군 잔류 무리일 것이라 추측된다. 또한 백두산 지구는 1936년 중국공산당의 지도 아래 만주에서 활약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이 유격구를 건설했던 지역이었으며, 1937년 보천보사건(普天堡事件)이 발생하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백두산 강도는 누구인가?」중에서

대한제국 시기의 독일 언론을 접하면서 기존에 인지하고 있는 지식들이 꽤 많은 오류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무능하다고 고정화된 고종 황제의 이미지가 그 첫 번째이다. 독일 신문 기사를 통해 그가 얼마나 개화(문명화)를 원했는지 밝혀졌다.

죽음을 불사하고 헤이그 특사 3인을 보낼 때 그의 비장함은 이위종이 미국으로 루스벨트를 만나러 가기 직전 영국 로이터통신과 나눴던 인터뷰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또한 [알게마이네 짜이퉁] 1924년 5월 3일자 기사를 작성한 이탈리아 기자 치폴라의 눈에 비친 대한제국 순종 황제의 모습은 나라를 일본에게 주고 호위호식하는 이왕가의 왕족이 아니라, 50세의 황제를 80세 노인으로 착각할 정도로 피폐된 용모였다. 순종 황제가 거간꾼을 통해 여행객으로 조선에 온 기자와 접견한 것은 일본에 억류되어 있는 왕족의 안위를 걱정하는 행위였다.

1945년 해방 후, 대한독립을 외치던 독립투사들이 왜 공산권과 민주 진영으로 양분되어야만 했는가에 대한 정답은 독일 신문을 통해 여실히 증명되었다. 헤이그평화회의, 파리평화회의, 국제연맹 창설, 워싱턴군축회의 등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무던히 뛰어다녔던 독립투사들은 제국주의 강대국이 주도하는 평화회의의 닫힌 문을 얼마나 황망하게 쳐다봐야만 했을까.

이들은 1927년 벨기에 에그몽궁전에서 열린 식민지압제에 대항하는 회의, 세계피압박민족회의에 당당하게 참석하였다. 식민지 민족들은 깨어나기 시작했으며,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안건을 비난하던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에 대항하는 볼셰비키-아시아-아프리카 민족연맹이 결성된 것이다. 홍범도 장군이 소련에 입국하는 고려인 이주민 기록에 남긴 직업이 “의병”이고, 목적이 “고려독립”이라고 적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한제국 탄생과 대한인의 자각」중에서

이들은 서구문명화를 위해 내재된 유교전통문화를 깡그리 없애고 서양일본인이 되고자 몸부림친 이웃과 다르다. 이들은 자주적 조선 개화를 위해 몸부림쳤으며, 동학농민운동을 통해 유교사회 부조리에 항거했으며, 국권을 회복하고자 대한독립군이 되어 만주벌판과 백두산을 누볐으며, 때로는 무기력하고 보잘것없는 투쟁이었지만 끊임없이 일제에 항거하며 끝까지 대한인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죽음을 불사했다. 이들이 없었다면, 독립된 주권을 소유한 21세기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아한 루저의 원형 조선 선비는 누구인가?」중에서
 

출판사 리뷰

독일인 눈에 비친 대한제국,
과연 대한제국은 루저의 나라일까.


대한제국은 1897년 10월 12일부터 1910년 8월 29일까지, 조선의 국명이다. 그러나 제국이라는 이름을 가진 근대국가의 역사는 불행히도 너무 짧다. 그 시기 많은 유럽 제국이 동아시아와 무역을 하기 위해 현지 답사차 일본과 중국 그리고 대한제국을 찾았다. 또 그 기록을 본국으로 돌아가 강연, 신문 기사, 책을 통해 활발히 알렸다. 하지만 짧은 기간 동안의 방문으로 만들어진 기록에는 우리 역사에 대해 수많은 오류와 잘못된 인식이 수두룩하다.

독일에서 연구년을 보내면서 저자는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를 다룬 독일 기사를 찾았다. 그 과정에서 당시 대한제국을 방문한 독일인 자료를 발견, 자료를 통해 당시 독일인이 보는 대한제국의 진실이 많은 부분에서 호도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유럽에서 지금까지도 잘못 인식하고 있는 한국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독일인의 방문기를 번역, 꼼꼼히 묻고 수정했다. 하지만 오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아한 루저라는 말에는 찬란한 고대 문명을 가진 대한제국의 몰락과 영리하면서도 순박한 이 민족의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도 들어 있다. 이 기록을 통해 우리는 열강의 패권 싸움 한가운데에서 중립을 선언한 대한제국의 실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이 책은 1898년 당현(당고개) 금광을 조사하고 돌아간 크노헨하우어의 1901년 강연문, 1913년 조선을 경험한 예쎈의 여행기, 1933년 라우텐자흐 교수가 백두산 밀림에서 만난 이름 모를 독립군 이야기를 바탕으로 독일 신문, 독일 대학에서 소장하는 한국관계자료집을 참조해 구성하였다.

3인의 독일인은 말한다.

“여행자들의 표현대로 조선이 가난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라였다면, 조선 때문에 그토록 끊임없이 다툼이 일어나는 원인은 무엇일까요?”
- 크노헨하우어, 독일 산림청 관료

“크고 바른 당당한 체구와 잘생긴 모습의 사람들은 상의, 치마, 바지, 신발 모두 흰색으로 차려 입었으며, 머리는 뒤에서 흰 모자 안으로 감아올렸으며, 대나무 틀 위에 느슨하게 말총으로 직조한 높고 넓은 차양 모자를 쓰고 모자 끈을 턱 아래에 묶었다. 수많은 상점 앞에서 기다란 담뱃대로 끊임없이 흡연을 하거나 수다를 떠는 등 우아한 루저의 모습으로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 예쎈, 독일 예술사 연구자

“멀리 떨어진 경찰서에서 알려준 최근의 강도 습격 소식은 우리 일행을 매우 불안하게 만들었다. 며칠 전 30명의 강도떼가 호타이산[포태산] 북서쪽 5km 떨어진 중국 벌목인들 거주지를 통과하며 머물렀다고 한다. 만주 지역에서는 이들 강도떼와 군대가 전쟁을 치렀다. 체포된 두 명의 강도 머리는 공공장소에 내걸렸다.”
- 라우텐자흐, 그라이프스발트대학 지리학과 교수

19세기 제국주의 열강, 금광 채굴권 확보를 위해 대한제국을 답사하다

이 시기 조선을 방문한 독일 여행자들은 일본보다 높은 수준의 고대 문화를 소유한 조선의 문화를 보고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실리를 따지는 중국인과 겉으로 함박웃음을 짓지만 속을 모르는 일본인 그리고 무뚝뚝해도 이방인에게 수줍은 미소를 머금을 줄 아는 순진한 조선인의 특성을 분명히 구별할 줄 알던 독일인들은 무기력한 루저 국가 대한제국의 몸부림을 안타까워했다. 한편 대한제국에 대한 열강의 요구는 채굴권, 어업권 등 이권 영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1895년 미국의 운산 금광 채굴권 획득을 시작으로 일본, 프랑스, 독일 등의 채굴권, 어업권의 연이은 획득은 1910년 한일병합에 이르기까지 이권 다툼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준다.

고종이 광산 채굴권을 허락하는 대신 생산 이윤의 25%를 약속받은 이유는, 고종이 내탕금 명목으로 의병과 사절단의 국외활동을 지원할 자금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조용하고 과묵하지만 삶을 즐길 줄 아는 민족

당시 독일에서 광산은 곧 국가 자본이며 부의 척도였다. 지구의 동쪽 어딘가에 금이 많다는 소문은 1897년 4월 금융기관 연합체의 형태로 코리아-신디게이트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뒤셀도르프의 광산산업은행은 라인란드, 함부르크, 베를린의 투자자들의 펀드를 모아 투자하였다. 이것의 공식 명칭은 베를리너 디스콘토-게젤샤프트(Berliner Diskonto-Gesellschaft)이다.

크노헨하우어는 1897년 11월 독일을 떠나 1898년부터 1899년까지 약 1년 반 동안 대한제국에 머물면서 광물 지질 분포를 파악하기 위해 수차례 답사하였다. 크노헨하우어는 그의 일기에 이는 별로 내키지 않는 일이며, 금광을 찾는다는 것은 희망적이지 않다고 하였다. 그의 눈에 비친 조선은 지구상에서 제일 먼 동쪽에 숨듯이 위치한, 조용히 자연에 적응하면서 그저 평화롭게 살고자 하는 나라였다. 그가 본 조선인은 동아시아 3국 중에 제일 멋진 신체 조건을 갖추었으며, 외국인에게 친절한 중국인과 일본인과 달리 이방인 앞에서 수줍어했다. 성품이 순박한 조선인은 조용하고 과묵하지만 삶을 즐길 줄 아는 민족이었다.

독일인의 눈에 비친 우아한 루저

조선 관리와 권세가들의 횡포로 농민 계층은 착취를 당하고, 권세가 집안에서 소작농이지만 노예처럼 일하는 농민과 양반 사회의 병폐를 지적하며 양반이 조선 사회 루저의 원형이 됐다는 역설적 정의가 흥미롭다. 권세가들에게 착취당한 농민들이 정처 없이 떠도는 유민과 강도로 변하고, 이들은 외세에 저항하기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굶주림의 고통이 처절하였다. 이들에게 애국심은 차후 문제였다. 이러한 농민들이 오히려 외세 침입을 현실적 구원자로 여겼다는 논리는 당시 국제 정세에 어두운 순박한 백성들의 무지몽매함을 지적하며 조선의 외세 침입에 대한 당위성으로 연결하고 있다.

그들이 본 19세기 말 조선인의 특성은 수줍고 순박하며, 급변하는 세계의 흐름에 대응하기보다는 쇄국정책의 울타리 안에서 안주하는 것이 어울렸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에게 제국주의자들과 공존해야 한다는 개념은 곧 바깥세상의 야만인들과 접촉하는 것이며 이는 성리학적 세계관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조선 선비의 유교적 윤리관은 제국주의 약육강식의 논리에 처참하게 짓밟혔으며, 결과적으로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만다.

중립국 선언 전략을 선택한 대한제국

고종의 전략은 1907년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비밀리에 파견하는 것이었다. 특사 3인은 만주의 이상설, 러시아의 이위종, 이준이다. 이들은 대한제국이 중립국가라는 점과 일본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라는 고종의 특명을 안고 1907년 6월 29일 헤이그평화회의장에 도착하였다. 제2차 헤이그평화회의는 1907년 6월 15일에서 10월 18일까지 개최되었다.

그러나 헤이그 관계자들이 보여준 특사들에 대한 반응은 싸늘했다. 대한제국이라는 나라는 금시초문이고 이 나라가 대표사절단을 보낼 권리가 있는지 의견이 분분하였다. 유감스럽게도 초청된 독립국가의 목록에 대한제국은 없었다. [베를리너-폴크스 짜이퉁] 1907년 7월 27일자 기사의 제목은 ‘대한제국 사절단의 항변’이다. 고종 황제는 특사를 파견하면서 “나를 돌아보지 마라. 나는 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내 삶은 이 나라에 속한다. 너희들은 내가 보낸 특명을 중단하지 말고 500년보다 오래된 대한제국의 독립권을 다시 찾아라”라며 비장한 마음을 보였다.

세계 흐름과 공존해야 한다는 인식이 부족했던 우아한 루저

조선은 1876년 개항 이후 1897년 대한제국을 거치면서 1910년 한일병합까지 그저 제국주의 국가의 희생양 노릇만 했을까? 19세기 말 20세기 초 근대화를 향한 조선이 생각한 외교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들은 서구문명화를 위해 내재된 유교전통문화를 깡그리 없애고 서양일본인이 되고자 몸부림친 이웃과 다르다. 이들은 자주적 조선 개화를 위해 몸부림쳤으며, 동학농민운동을 통해 유교사회 부조리에 항거했으며, 국권을 회복하고자 대한독립군이 되어 만주벌판과 백두산을 누볐으며, 때로는 무기력하고 보잘것없는 투쟁이었지만 끊임없이 일제에 항거하며 끝까지 대한인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죽음을 불사했다. 이들이 없었다면, 독립된 주권을 소유한 21세기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