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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전쟁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폭넓고
깊이 있는 연구서
이 책은 근현대 전쟁을 낳고 수행하며 그로부터 영향을 받는 사회를 통해 근현대의 전쟁을 바라보고 있다. 즉, 전쟁이 어떻게 근현대 사회를 형성해왔으며 근현대 사회는 어떻게 전쟁을 형성해왔는지를 치밀하게 추적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근현대 전쟁이라는 구성물을 기술, 개인과 사회의 전투경험, 해전, 항공전, 여성, 반전운동 등과 같은 구성요소의 관점에서 다양하게 관찰함으로써 근현대 전쟁의 실체를 더 심도 있게 이해하도록 돕고 있다.
10개 장으로 구성된 제1부에서는 역사적·시대적 맥락 아래 근현대 전쟁의 형성, 근대 군사 혁명기~19세기의 군사적 변화와 전쟁, 20세기의 총력전, 냉전, 인민전쟁을 다루며, 8개의 장으로 구성된 제2부에서는 기술, 전투경험, 해전, 항공전, 총력전의 사회적 영향, 전쟁과 여성, 반전운동을 다룬다. 또한 최근 전 세계적으로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테러리즘과 그보다 넓은 개념인 현대 ‘비정규전’, 또는 ‘4세대 전쟁’을 이해하는 데도 유용하다.
깊이 있는 연구서
이 책은 근현대 전쟁을 낳고 수행하며 그로부터 영향을 받는 사회를 통해 근현대의 전쟁을 바라보고 있다. 즉, 전쟁이 어떻게 근현대 사회를 형성해왔으며 근현대 사회는 어떻게 전쟁을 형성해왔는지를 치밀하게 추적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근현대 전쟁이라는 구성물을 기술, 개인과 사회의 전투경험, 해전, 항공전, 여성, 반전운동 등과 같은 구성요소의 관점에서 다양하게 관찰함으로써 근현대 전쟁의 실체를 더 심도 있게 이해하도록 돕고 있다.
10개 장으로 구성된 제1부에서는 역사적·시대적 맥락 아래 근현대 전쟁의 형성, 근대 군사 혁명기~19세기의 군사적 변화와 전쟁, 20세기의 총력전, 냉전, 인민전쟁을 다루며, 8개의 장으로 구성된 제2부에서는 기술, 전투경험, 해전, 항공전, 총력전의 사회적 영향, 전쟁과 여성, 반전운동을 다룬다. 또한 최근 전 세계적으로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테러리즘과 그보다 넓은 개념인 현대 ‘비정규전’, 또는 ‘4세대 전쟁’을 이해하는 데도 유용하다.
목차
제1부 현대 전쟁의 진화
제1장 서문: 현대 전쟁의 형성
제2장 군사혁명 I: 현대 전쟁으로의 이행
제3장 군사혁명 II: 18세기의 전쟁
제4장 국민의 무장 I: 프랑스의 전쟁들
제5장 국민의 무장 II: 19세기
제6장 제국주의 전쟁: 7년 전쟁에서 제1차 세계대전까지
제7장 총력전 I: 제1차 세계대전
제8장 총력전 II: 제2차 세계대전
제9장 냉전
제10장 인민전쟁
제2부 현대 전쟁의 요소들
제11장 기술과 전쟁 I: 1945년까지
제12장 전투: 현대 전투의 경험
제13장 해전
제14장 항공전
제15장 전쟁과 대중: 총력전의 사회적 영향
제16장 여성과 전쟁
제17장 반전(反戰)
제18장 기술과 전쟁 II: 핵 교착상태로부터 테러리즘까지
제1장 서문: 현대 전쟁의 형성
제2장 군사혁명 I: 현대 전쟁으로의 이행
제3장 군사혁명 II: 18세기의 전쟁
제4장 국민의 무장 I: 프랑스의 전쟁들
제5장 국민의 무장 II: 19세기
제6장 제국주의 전쟁: 7년 전쟁에서 제1차 세계대전까지
제7장 총력전 I: 제1차 세계대전
제8장 총력전 II: 제2차 세계대전
제9장 냉전
제10장 인민전쟁
제2부 현대 전쟁의 요소들
제11장 기술과 전쟁 I: 1945년까지
제12장 전투: 현대 전투의 경험
제13장 해전
제14장 항공전
제15장 전쟁과 대중: 총력전의 사회적 영향
제16장 여성과 전쟁
제17장 반전(反戰)
제18장 기술과 전쟁 II: 핵 교착상태로부터 테러리즘까지
책 속으로
1914년 전쟁의 발발은 몇 년 이전에는 거의 불가능하게 보였을 국민적 단합의식을 낳았다. 공통의 숙명에 대한 믿음이 가장자리에서 주류로 이동되었다. ‘전쟁 노력(war effort)’이 모든 종류의 통상적인 일상활동을 흡수하게 되었다. 다른 어떤 것만큼이나 이러한 평범한 차원도 전쟁에 뚜렷한 특징을 제공했으며, 그것을 최초의 ‘총력전’으로 변모시켰다.
20세기 총력전은 그 정신이 아니라 규모 면에서 프랑스의 혁명전쟁과 달랐다. 변화된 것은 전체 인민을 동원하려는 국가의 의지가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있는 그들의 조직적 능력이었다.
--- p.29
1648년의 베스트팔렌 평화조약 제118조에 의해 신성 로마(Holy Roman) 제국의 모든 군주들은 ‘자신의 안보에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만큼의 병력을 자신의 영토에 유지할 수 있게’ 허용되었다. 결국 군사적인 변화가 16세기 초에 개시되었던 국가행정의 발전을 재촉했다. 자신의 국가를 중앙집권화하고 통일하려는 유럽 통치자들의 투쟁은 개별 귀족이나 사업가는 더 이상 전투의 장에서 군주에게 도전할 수 없음―프랑스 종교전쟁, 프롱드의 난(Frondes), 영국 내전은 귀족이 행한 최후의 진중한 발악이었다―을 의미했던 전쟁비용의 증가에 의해 도움을 받았으며, ‘폭력의 독점’은 왕에게로 넘어갔다. 17세기 중반과 후반 몇십 년 동안 프랑스, 덴마크, 스웨덴, 러시아, 이탈리아와 독일의 국가들1)은 국가를 통치하는 강력한 권력을 가진 개인화된 군주정의 부상을 목도했다. 중앙집권적 권력의 증가와 관료제에 직면해 지방의 특권과 독점권은 꾸준히 감소했다. 이러한 과정의 주요단계 중 하나는 상비군의 등장이었다.
--- p.49~50
해상에서 18세기의 전쟁은 유럽 열강에 의해 지배되었지만, 지상에서는 그들이 여러 중요한 군사국가 중 하나의 집단에 지나지 않았다. 기술적·조직적 맥락에서 보았을 때는 지상이나 해상에서의 전쟁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사회적 맥락에서 가장 심대한 발전은 1775~1783년의 미국 독립전쟁이었는데, 이는 잠재적으로 주요한 신생국가의 탄생을 가져온 성공적인 대중투쟁이었다. 주도적인 열강은 해상에서는 영국, 지상에서는 중국과 러시아였다.
--- p.60
프랑스 혁명 이전에 군역은 소수 프랑스 남성의 쓰라린 운명이었다. 그러나 1794년 이후 그것은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신체 건강한 모든 남성 시민의 의무가 되었다. 혁명은 시민의 시민권과 그들의 군사적 책임 간의 분명한 연관성을 확립했다. 시민은 국가가 그들에게 보장하는 정치적 권리와 자유에 대한 답례로서 조국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필요하다면 죽어야 할 의무를 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군에서 복무하는 것이 모든 시민의 의무라면, 각 개인은 사병이라는 천한 계급에서 장군이라는 탁월한 지위로 상승할 수 있는 기회도 갖게 된 것이었다. 여태까지는 대개 귀족과 젠트리의 전유물이었던 장교단 입단의 기회가 유능하고 용기 있는 평민에게도 개방되었다. 그 결과는 1794년과 1812년 간 프랑스 군대가 달성했던 믿기 힘든 일련의 승리였다.
--- p.100
유럽 전역에 산업화가 확산된 덕택에 무기들은 1914년 이전 반세기 동안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발전했으며, 그런 과정에서 이것들은 전장을 변형시켰다. 무연화약을 사용하며 수동식 노리쇠를 갖춘 연발총, 속사포, 기관총은 1815년의 전술과, 더 나아가서는 군복이 100년 뒤에는 자살행위와 같은 것이 될 것임을 의미했다. 19세기 전반기의 밝은 색상 군복은 회색과 갈색의 칙칙한 위장복으로 대체되었지만, 무기들의 사거리와 증대되는 치사성은 전술가들을 풀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문제에 직면하게 했다. 밀집대형을 갖춰 진격하는 보병은 전멸당할 것이었다. (중간 생략) 장병들의 사기가 충분하면 보병은 성공적인 착검돌격(bayonet charge)으로 절정에 도달할 수 있었다. 유럽 군대 대부분이 도출했던 교훈은 승리는 병사들이 죽음을 경멸하기까지 극기심에 충만한 측에 돌아갈 것이라는 점이었다. 1905년 영국의 한 군사 저술가는 “전적으로 승리의 기회는 나머지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기회를 획득하기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이들의 자기 희생이 충만한 진영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썼다. --- p.121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치러진 제1차 세계대전을 경험하고 난 뒤 대중정치와 대량생산 시대에 전쟁은 병사나 민간인이나 할 것 없이 전체 주민 간에 수행되는 것이라는 일반적인 가정이 존재했다. 대립하는 군사력 간의 짧은 전역으로 치러지는 재래식 전쟁에 대한 개념은 ‘총력전’의 개념으로 대체되었다. 이 용어는 1918년에 독일의 제1병참감(First Generalquartiermeister)1)인 루덴도르프(Erich Ludendorff)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머지않아 국제적으로 통용되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 총력전은 전쟁에 대한 전통적 이론으로부터의 혁명적인 이탈이었다. 총력전을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을 확보하기 위해 국가는 국민의 모든 물질적·지적·정신적 에너지를 동원해야 했다. 암암리에 적의 공동체 전체―과학자, 노동자, 농민―가 합법적인 전쟁의 대상이 되었다.
--- p.176
역설적이게도 1939년에서 1945년까지 총력전 수행을 위한 노력은 총력전이 군사력에 의해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싸우는 전쟁의 전통으로 회귀할 수 있는 상황을 조성했다. 종전기에 개발된 새로운 세대의 무기는 너무나 고비용적이고 기술적으로 정교해 기존의 민간산업으로는 신속하게 대량생산할 수 없었다. 도시의 민간 주민들을 표적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핵무기는 국가자원을 동원하기에는 너무 짧은 72시간 내에 분쟁이 끝나버릴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과 같은 대규모적인 참가로 달성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이는 대규모 시민군, 효과적인 전쟁 수행을 위해 국내의 민간자원에 의존하는 것, 재래식 전쟁에서 행해진 민간인 공격을 싫어했던 군부의 많은 이들이 환영하는 결론이었다. 1945년 이후 군사기술의 성격, 전쟁 수행에 대한 국제적 규칙을 강화하려는 노력, 전쟁의 경제적 토대를 제공하기 위한 ‘군산 복합체’의 창설은 하나같이 1918년 이후 한 세대 동안 전략적 사고를 지배했던 총력전 개념을 손상시키는 데 기여했다.
--- p.196~197
1945년 이후 많은 선진국가들의 국방부는 기술 혁신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으며, 그들은 비단 군사적 장치뿐 아니라 이른바 ‘파급(spin-off)’효과1)를 통해 민간기술을 만들어내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특히 1970년 이후에는 세계 도처의 점점 더 많은 소규모 개발 도상국이 강대국을 모방하고자 했으며, 독자적으로 군사 연구개발 프로그램을 개시했다. 하지만 그것은 늘 매우 막대한 경제적 비용을 소비했던 데 반해 가시적인 ‘국방’상의 유익을 만들어내는 데는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옳고 그름을 떠나 인식이란 그 자체가 강력한 사회적 힘이 된다.
20세기 총력전은 그 정신이 아니라 규모 면에서 프랑스의 혁명전쟁과 달랐다. 변화된 것은 전체 인민을 동원하려는 국가의 의지가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있는 그들의 조직적 능력이었다.
--- p.29
1648년의 베스트팔렌 평화조약 제118조에 의해 신성 로마(Holy Roman) 제국의 모든 군주들은 ‘자신의 안보에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만큼의 병력을 자신의 영토에 유지할 수 있게’ 허용되었다. 결국 군사적인 변화가 16세기 초에 개시되었던 국가행정의 발전을 재촉했다. 자신의 국가를 중앙집권화하고 통일하려는 유럽 통치자들의 투쟁은 개별 귀족이나 사업가는 더 이상 전투의 장에서 군주에게 도전할 수 없음―프랑스 종교전쟁, 프롱드의 난(Frondes), 영국 내전은 귀족이 행한 최후의 진중한 발악이었다―을 의미했던 전쟁비용의 증가에 의해 도움을 받았으며, ‘폭력의 독점’은 왕에게로 넘어갔다. 17세기 중반과 후반 몇십 년 동안 프랑스, 덴마크, 스웨덴, 러시아, 이탈리아와 독일의 국가들1)은 국가를 통치하는 강력한 권력을 가진 개인화된 군주정의 부상을 목도했다. 중앙집권적 권력의 증가와 관료제에 직면해 지방의 특권과 독점권은 꾸준히 감소했다. 이러한 과정의 주요단계 중 하나는 상비군의 등장이었다.
--- p.49~50
해상에서 18세기의 전쟁은 유럽 열강에 의해 지배되었지만, 지상에서는 그들이 여러 중요한 군사국가 중 하나의 집단에 지나지 않았다. 기술적·조직적 맥락에서 보았을 때는 지상이나 해상에서의 전쟁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사회적 맥락에서 가장 심대한 발전은 1775~1783년의 미국 독립전쟁이었는데, 이는 잠재적으로 주요한 신생국가의 탄생을 가져온 성공적인 대중투쟁이었다. 주도적인 열강은 해상에서는 영국, 지상에서는 중국과 러시아였다.
--- p.60
프랑스 혁명 이전에 군역은 소수 프랑스 남성의 쓰라린 운명이었다. 그러나 1794년 이후 그것은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신체 건강한 모든 남성 시민의 의무가 되었다. 혁명은 시민의 시민권과 그들의 군사적 책임 간의 분명한 연관성을 확립했다. 시민은 국가가 그들에게 보장하는 정치적 권리와 자유에 대한 답례로서 조국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필요하다면 죽어야 할 의무를 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군에서 복무하는 것이 모든 시민의 의무라면, 각 개인은 사병이라는 천한 계급에서 장군이라는 탁월한 지위로 상승할 수 있는 기회도 갖게 된 것이었다. 여태까지는 대개 귀족과 젠트리의 전유물이었던 장교단 입단의 기회가 유능하고 용기 있는 평민에게도 개방되었다. 그 결과는 1794년과 1812년 간 프랑스 군대가 달성했던 믿기 힘든 일련의 승리였다.
--- p.100
유럽 전역에 산업화가 확산된 덕택에 무기들은 1914년 이전 반세기 동안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발전했으며, 그런 과정에서 이것들은 전장을 변형시켰다. 무연화약을 사용하며 수동식 노리쇠를 갖춘 연발총, 속사포, 기관총은 1815년의 전술과, 더 나아가서는 군복이 100년 뒤에는 자살행위와 같은 것이 될 것임을 의미했다. 19세기 전반기의 밝은 색상 군복은 회색과 갈색의 칙칙한 위장복으로 대체되었지만, 무기들의 사거리와 증대되는 치사성은 전술가들을 풀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문제에 직면하게 했다. 밀집대형을 갖춰 진격하는 보병은 전멸당할 것이었다. (중간 생략) 장병들의 사기가 충분하면 보병은 성공적인 착검돌격(bayonet charge)으로 절정에 도달할 수 있었다. 유럽 군대 대부분이 도출했던 교훈은 승리는 병사들이 죽음을 경멸하기까지 극기심에 충만한 측에 돌아갈 것이라는 점이었다. 1905년 영국의 한 군사 저술가는 “전적으로 승리의 기회는 나머지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기회를 획득하기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이들의 자기 희생이 충만한 진영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썼다. --- p.121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치러진 제1차 세계대전을 경험하고 난 뒤 대중정치와 대량생산 시대에 전쟁은 병사나 민간인이나 할 것 없이 전체 주민 간에 수행되는 것이라는 일반적인 가정이 존재했다. 대립하는 군사력 간의 짧은 전역으로 치러지는 재래식 전쟁에 대한 개념은 ‘총력전’의 개념으로 대체되었다. 이 용어는 1918년에 독일의 제1병참감(First Generalquartiermeister)1)인 루덴도르프(Erich Ludendorff)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머지않아 국제적으로 통용되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 총력전은 전쟁에 대한 전통적 이론으로부터의 혁명적인 이탈이었다. 총력전을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을 확보하기 위해 국가는 국민의 모든 물질적·지적·정신적 에너지를 동원해야 했다. 암암리에 적의 공동체 전체―과학자, 노동자, 농민―가 합법적인 전쟁의 대상이 되었다.
--- p.176
역설적이게도 1939년에서 1945년까지 총력전 수행을 위한 노력은 총력전이 군사력에 의해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싸우는 전쟁의 전통으로 회귀할 수 있는 상황을 조성했다. 종전기에 개발된 새로운 세대의 무기는 너무나 고비용적이고 기술적으로 정교해 기존의 민간산업으로는 신속하게 대량생산할 수 없었다. 도시의 민간 주민들을 표적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핵무기는 국가자원을 동원하기에는 너무 짧은 72시간 내에 분쟁이 끝나버릴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과 같은 대규모적인 참가로 달성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이는 대규모 시민군, 효과적인 전쟁 수행을 위해 국내의 민간자원에 의존하는 것, 재래식 전쟁에서 행해진 민간인 공격을 싫어했던 군부의 많은 이들이 환영하는 결론이었다. 1945년 이후 군사기술의 성격, 전쟁 수행에 대한 국제적 규칙을 강화하려는 노력, 전쟁의 경제적 토대를 제공하기 위한 ‘군산 복합체’의 창설은 하나같이 1918년 이후 한 세대 동안 전략적 사고를 지배했던 총력전 개념을 손상시키는 데 기여했다.
--- p.196~197
1945년 이후 많은 선진국가들의 국방부는 기술 혁신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으며, 그들은 비단 군사적 장치뿐 아니라 이른바 ‘파급(spin-off)’효과1)를 통해 민간기술을 만들어내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특히 1970년 이후에는 세계 도처의 점점 더 많은 소규모 개발 도상국이 강대국을 모방하고자 했으며, 독자적으로 군사 연구개발 프로그램을 개시했다. 하지만 그것은 늘 매우 막대한 경제적 비용을 소비했던 데 반해 가시적인 ‘국방’상의 유익을 만들어내는 데는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옳고 그름을 떠나 인식이란 그 자체가 강력한 사회적 힘이 된다.
--- p.254
출판사 리뷰
이 책은 군사사(軍事史)에 뿌리를 두지만 전쟁사 이상의 것이다. 인류만큼이나 폭력적 분쟁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현대* 전쟁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현대 전쟁은 16~18세기에 발생하여 군사력의 변형을 가져왔던 ‘군사혁명(military revolution)’**에서 유래된다.
* 이 책(의 원서)에서 지은이들이 ‘모던(modern)’이라는 표현을 통해 지칭하는 시기는 중세와 현대 간에 위치하는 ‘근대’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근대’와 ‘현대’를 통칭하는 의미에서 이 표현을 쓰고 있다. (_11쪽)
** 중세 말의 기술 발전은 1450~1700년에 일어난 전쟁의 모든 측면을 점진적으로 고쳐나간 새로운 무기(머스킷, 야포)의 등장을 가져왔다. 군사력의 규모가 그에 동반해 증가하면서 종국에는 국가의 성격과 정부에도 심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로버츠(Michael Roberts)는 그러한 발전이 주로 1550~1650년―그는 이 기간을 ‘군사 혁명기’라 칭했다―에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파커(Geoffrey Parker)는 로버츠의 테제를 1500년부터 1800년까지의 3세기를 포괄할 수 있게 확장시켰다. (_36쪽)
영국의 장군 풀러(J. F. C. Fuller)는 “머스킷은 보병을 만들었고, 보병은 민주주의자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전쟁과 사회가 공생적으로 연계되어 있음을 이보다 더 함축성 있게 드러낸 표현이 있을까. 현대 전쟁의 결정적인 요소들이 한데로 수렴되는 시점을 정확히 지적하기란 쉽지 않지만, 군사 혁명기에 들어 표준화되고 경제적인 보병(보통 사람들)이 개별적이고 고비용적인 기사(騎士, 사회적 엘리트들)에 대해 거둔 승리는 전쟁의 현대화에 있어 결정적 전기였다. 보병에 의해 봉건기사가 격파된 것은 군대의 극적인 대규모화와 그들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행정적·재정적 구조의 병행적인 성장을 가져왔으며 그 과정에서 국가기관이 확연히 근대화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전쟁의 마지막 변형이 추진된 지점이다. 독일의 군사 평론가 클라우제비츠(Karl Clausewitz)에 따르면 18세기의 국가들은 전쟁에 신중을 기했다. 그들은 전투를 반드시 회피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추구하지도 않았다. 전투 없이 전략의 우세만으로도 족했던 것이다. 18세기에는 어떤 전투도 패배한 군대가 파괴되지 않았다. 지방을 점령하고 요새를 장악하는 것이 작전의 진정한 목표였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프랑스의 혁명군대는 무서운 결판을 동반하는 전투를 추구했다.
혁명전쟁은 본질적으로 18세기의 전통적인 군주 간 분쟁과는 달랐다. 어느 한 측이 승리를 거둘 경우, 이제 그 적의 제도를 파괴하려 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인들은 오스트리아인들과 프로이센인들에게 자유주의적 헌정을 부과하고, 그들은 반대로 프랑스 왕좌에 부르봉 왕가를 복위시킬 것이었다. 전쟁에 임한 것은 프랑스 인민 전체였으며, 이는 자신의 자유와 가치가 공격받게 되었을 때 그것을 지키기 위해 국민이 무장한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혁명은 협소하게는 민족주의적인 것이 되었으며, 사는 곳을 막론하고 모든 자유로운 사람을 대변한다던 보편적인 주장은 방기되고, 자유는 프랑스인들의 특권이라고 주장되었다. 이는 뒤부아-크랑세(Dubois-Crance?)와 같은 혁명 지도자의 관점이다. 그는 이제 모든 시민이 군인이며, 모든 군인은 시민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19세기에 클라우제비츠(Karl von Clausewitz)는 “전쟁은 다시 한 번 인민의 일이 되었다. 그것은 3000만을 헤아리는 인민의 일이 되었다. 그들 각자는 자신을 국가의 시민으로 간주했다”고 설파한 바 있다. (_83~84쪽)
이후 장차 모든 전쟁은 동일한 기본적 특성―즉, 대중 동원, 이데올로기적 동기 부여, 가차 없는 수행―을 보이게 된다. 전쟁은 점점 더 군사적·경제적 힘에 대해서뿐 아니라 좀 더 근본적으로는 국가의 활력과 국민의 힘에 대한 신랄한 시험으로 변한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장은 한 세기에 걸친 경제적·사회적·정치적 변화의 산물이었다. 1914년 유럽은 그 전의 어느 시기보다 많은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고, 부유하고 일관되게 조직화되어 있었다. 민족주의의 대두는 국가에 전례가 없는 정당성과 권위를 제공했다. 그것은 국가가 자국민에게 더 큰 희생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농업의 개선은 토지에서 일해야 할 인력을 줄여주었으며, 병역연령의 남성이 남아돌게 해주었다. 그것은 또한 한 번에 몇 년 동안이고 야전에서 전에 없이 큰 규모의 군대를 먹이고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전보, 전화, 타자기에 의해 행정적 관행에 변화가 발생했으며, 철도의 성장은 그러한 군대가 신속하게 모이고 전개될 수 있게 해주었다. 산업기술은 전례가 없을 정도의 파괴력을 가진 새로운 무기들을 제공했다. 속사 강선포, 후장식 소총, 기관총은 군사적인 화력의 사거리, 속도, 정확성, 치명성을 변혁시켰다. 이것들은 또한 장차 있을 모든 전쟁에서 과학자, 공학자, 기술자가 병사만큼이나 중요해지게 만들었다. (_166~167쪽)
현대 전쟁은 비단 군사적 기량이나 군사기술만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모든 측면을 동원하게 되었다. 오늘날 그러한 경향은 더 분명해졌다. 군사력을 이용해 대학살이나 다른 재앙적 형태의 정치적 파국에 대항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식을 찾고자 하는 국제 공동체의 시도는 ‘인도주의적 전쟁’과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을 제기했다. 2001년 9/11 공격이 가장 극명하게 시사해주었던 테러리즘의 성장에 대해 효과적인 군사 대응책을 찾고자 하는 시도가 그 예일 것이다. 또한 2003년 미국의 이라크 공습은 군사기술의 효과성에 대해 일부 군사 사상가들이 가졌던 자신감에 물음을 던졌다.
엄밀히 말하자면 현대 전쟁의 영향이 이토록 심대해지게 만든 것은 전쟁의 사회적 복잡성이다. 군사력의 한계에 대한 이해는 우리의 미래에 지극히 중요하며, 그것은 신중한 역사적 분석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이 제공하고자 하는 바이다.
* 이 책(의 원서)에서 지은이들이 ‘모던(modern)’이라는 표현을 통해 지칭하는 시기는 중세와 현대 간에 위치하는 ‘근대’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근대’와 ‘현대’를 통칭하는 의미에서 이 표현을 쓰고 있다. (_11쪽)
** 중세 말의 기술 발전은 1450~1700년에 일어난 전쟁의 모든 측면을 점진적으로 고쳐나간 새로운 무기(머스킷, 야포)의 등장을 가져왔다. 군사력의 규모가 그에 동반해 증가하면서 종국에는 국가의 성격과 정부에도 심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로버츠(Michael Roberts)는 그러한 발전이 주로 1550~1650년―그는 이 기간을 ‘군사 혁명기’라 칭했다―에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파커(Geoffrey Parker)는 로버츠의 테제를 1500년부터 1800년까지의 3세기를 포괄할 수 있게 확장시켰다. (_36쪽)
영국의 장군 풀러(J. F. C. Fuller)는 “머스킷은 보병을 만들었고, 보병은 민주주의자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전쟁과 사회가 공생적으로 연계되어 있음을 이보다 더 함축성 있게 드러낸 표현이 있을까. 현대 전쟁의 결정적인 요소들이 한데로 수렴되는 시점을 정확히 지적하기란 쉽지 않지만, 군사 혁명기에 들어 표준화되고 경제적인 보병(보통 사람들)이 개별적이고 고비용적인 기사(騎士, 사회적 엘리트들)에 대해 거둔 승리는 전쟁의 현대화에 있어 결정적 전기였다. 보병에 의해 봉건기사가 격파된 것은 군대의 극적인 대규모화와 그들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행정적·재정적 구조의 병행적인 성장을 가져왔으며 그 과정에서 국가기관이 확연히 근대화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전쟁의 마지막 변형이 추진된 지점이다. 독일의 군사 평론가 클라우제비츠(Karl Clausewitz)에 따르면 18세기의 국가들은 전쟁에 신중을 기했다. 그들은 전투를 반드시 회피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추구하지도 않았다. 전투 없이 전략의 우세만으로도 족했던 것이다. 18세기에는 어떤 전투도 패배한 군대가 파괴되지 않았다. 지방을 점령하고 요새를 장악하는 것이 작전의 진정한 목표였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프랑스의 혁명군대는 무서운 결판을 동반하는 전투를 추구했다.
혁명전쟁은 본질적으로 18세기의 전통적인 군주 간 분쟁과는 달랐다. 어느 한 측이 승리를 거둘 경우, 이제 그 적의 제도를 파괴하려 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인들은 오스트리아인들과 프로이센인들에게 자유주의적 헌정을 부과하고, 그들은 반대로 프랑스 왕좌에 부르봉 왕가를 복위시킬 것이었다. 전쟁에 임한 것은 프랑스 인민 전체였으며, 이는 자신의 자유와 가치가 공격받게 되었을 때 그것을 지키기 위해 국민이 무장한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혁명은 협소하게는 민족주의적인 것이 되었으며, 사는 곳을 막론하고 모든 자유로운 사람을 대변한다던 보편적인 주장은 방기되고, 자유는 프랑스인들의 특권이라고 주장되었다. 이는 뒤부아-크랑세(Dubois-Crance?)와 같은 혁명 지도자의 관점이다. 그는 이제 모든 시민이 군인이며, 모든 군인은 시민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19세기에 클라우제비츠(Karl von Clausewitz)는 “전쟁은 다시 한 번 인민의 일이 되었다. 그것은 3000만을 헤아리는 인민의 일이 되었다. 그들 각자는 자신을 국가의 시민으로 간주했다”고 설파한 바 있다. (_83~84쪽)
이후 장차 모든 전쟁은 동일한 기본적 특성―즉, 대중 동원, 이데올로기적 동기 부여, 가차 없는 수행―을 보이게 된다. 전쟁은 점점 더 군사적·경제적 힘에 대해서뿐 아니라 좀 더 근본적으로는 국가의 활력과 국민의 힘에 대한 신랄한 시험으로 변한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장은 한 세기에 걸친 경제적·사회적·정치적 변화의 산물이었다. 1914년 유럽은 그 전의 어느 시기보다 많은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고, 부유하고 일관되게 조직화되어 있었다. 민족주의의 대두는 국가에 전례가 없는 정당성과 권위를 제공했다. 그것은 국가가 자국민에게 더 큰 희생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농업의 개선은 토지에서 일해야 할 인력을 줄여주었으며, 병역연령의 남성이 남아돌게 해주었다. 그것은 또한 한 번에 몇 년 동안이고 야전에서 전에 없이 큰 규모의 군대를 먹이고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전보, 전화, 타자기에 의해 행정적 관행에 변화가 발생했으며, 철도의 성장은 그러한 군대가 신속하게 모이고 전개될 수 있게 해주었다. 산업기술은 전례가 없을 정도의 파괴력을 가진 새로운 무기들을 제공했다. 속사 강선포, 후장식 소총, 기관총은 군사적인 화력의 사거리, 속도, 정확성, 치명성을 변혁시켰다. 이것들은 또한 장차 있을 모든 전쟁에서 과학자, 공학자, 기술자가 병사만큼이나 중요해지게 만들었다. (_166~167쪽)
현대 전쟁은 비단 군사적 기량이나 군사기술만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모든 측면을 동원하게 되었다. 오늘날 그러한 경향은 더 분명해졌다. 군사력을 이용해 대학살이나 다른 재앙적 형태의 정치적 파국에 대항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식을 찾고자 하는 국제 공동체의 시도는 ‘인도주의적 전쟁’과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을 제기했다. 2001년 9/11 공격이 가장 극명하게 시사해주었던 테러리즘의 성장에 대해 효과적인 군사 대응책을 찾고자 하는 시도가 그 예일 것이다. 또한 2003년 미국의 이라크 공습은 군사기술의 효과성에 대해 일부 군사 사상가들이 가졌던 자신감에 물음을 던졌다.
엄밀히 말하자면 현대 전쟁의 영향이 이토록 심대해지게 만든 것은 전쟁의 사회적 복잡성이다. 군사력의 한계에 대한 이해는 우리의 미래에 지극히 중요하며, 그것은 신중한 역사적 분석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이 제공하고자 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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