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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사랑을 가져라! 사랑은 지치지 않는다.”
민주화 세대의 큰 선생 문익환 목사
시대의 복판을 살아온 그의 생애가 담긴 아름다운 평전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에 뛰어든 목사 문익환. 이후의 행보는 민주화 세대에게는 너무나 익숙하지만, 80년대 이후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그 이름조차 생소하다. 1989년 평양을 방문했다는 이유로 현재 그의 이름은 국가적인 행사나 방송에서 금기시되고 있다. 이런 때 문익환 목사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문익환 평전』을 새로운 디자인과 편집으로 다시 출간했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저자 김형수는 현 세대에게 잊혀가는 문익환의 생애를 치밀한 자료조사와 시적인 언어로 생생하게 되살린다. 1918년 북간도에서 태어난 순간부터 이데올로기 투쟁의 장이 된 명동촌에서 윤동주와 함께 보낸 학창 시절, 6·25전쟁 정전 협정 당시 판문점에서 통역관으로 있었던 일, 아내와의 추억과 젊은 시절의 고민 등 그의 젊은 날의 모습이 때론 동화처럼, 때론 시처럼 펼쳐진다.
한없이 여리기만 했던 그는 쉰아홉이라는 늦은 나이에 민주화운동에 뛰어든다. 신랄하게 군사독재정권을 비판하고 과검하게 김일성을 만나면서도 따뜻하게 민중을 감싸 안을 줄 알았던 문익환. 이런 그의 행보를 본 사람들은 “문익환이?”라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젊은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어 문제”라던 시절은 끝났다. 사회정치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냈던 지금의 세대들에게, ‘연약하게만 보였던’ 문익환 목사의 모습은 민주화 세대와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민주화 세대의 큰 선생 문익환 목사
시대의 복판을 살아온 그의 생애가 담긴 아름다운 평전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에 뛰어든 목사 문익환. 이후의 행보는 민주화 세대에게는 너무나 익숙하지만, 80년대 이후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그 이름조차 생소하다. 1989년 평양을 방문했다는 이유로 현재 그의 이름은 국가적인 행사나 방송에서 금기시되고 있다. 이런 때 문익환 목사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문익환 평전』을 새로운 디자인과 편집으로 다시 출간했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저자 김형수는 현 세대에게 잊혀가는 문익환의 생애를 치밀한 자료조사와 시적인 언어로 생생하게 되살린다. 1918년 북간도에서 태어난 순간부터 이데올로기 투쟁의 장이 된 명동촌에서 윤동주와 함께 보낸 학창 시절, 6·25전쟁 정전 협정 당시 판문점에서 통역관으로 있었던 일, 아내와의 추억과 젊은 시절의 고민 등 그의 젊은 날의 모습이 때론 동화처럼, 때론 시처럼 펼쳐진다.
한없이 여리기만 했던 그는 쉰아홉이라는 늦은 나이에 민주화운동에 뛰어든다. 신랄하게 군사독재정권을 비판하고 과검하게 김일성을 만나면서도 따뜻하게 민중을 감싸 안을 줄 알았던 문익환. 이런 그의 행보를 본 사람들은 “문익환이?”라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젊은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어 문제”라던 시절은 끝났다. 사회정치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냈던 지금의 세대들에게, ‘연약하게만 보였던’ 문익환 목사의 모습은 민주화 세대와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목차
『문익환 평전』을 다시 펴내며
프롤로그 : 20세기가 지나간 뒤에
원점
그의 기원을 찾아서
문익점에게서
19세기로부터의 망명자들
국경의 밤
북간도에 온 그리스도
거장들이 태어나던 때
최초의 기억들
어린 날
릴케처럼
좌절을 배우다
바람 속에 묻힌 삼촌
모진 바람에도 거세지 않은 용정 사투리
바람의 관측자
평양 시절
솥에서 뛰어나와 숯불에 내려앉다
신을 우롱한 대지
도쿄에서 발견한 존재의 비참성
연분홍 코스모스에게
짧은 희망 긴 절망
윤동주를 잃고
8월의 카오스
슬픈 남하南下
분단의 아침을 맞으면서
종교도 시대 위에서 집을 짓는다
침묵의 지대
미국행 여객선
그대들은 혼자가 아니다
1950년 여름, 서울
판문점으로 날아간 비둘기 두 마리
역사의 막다른 골목에서
세기의 방랑자
마지막 귀향
불치의 감탄사로 말하라
뼈아픈 후회
사월이 닫히는 소리
완전주의자의 꿈
한국인에서 히브리인으로
생의 반환점을 지나며
저잣거리로 나오다
새삼스런 하루
「히브리서 11장 1절」
야만의 시간, 1974
장준하 충격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57년 만의 만세운동
난형난제
신나는 법정
장미들의 반란
첫 번째 감옥, 22개월
불발이 된 ‘생의 피날레’
두 번째 감옥, 15개월
겨울이 긴 나라의 봄은 아름답다
하, 그림자가 없다
지옥의 한철
도봉산 1호
계엄령 속의 눈
세 번째 감옥, 31개월
오월의 양심
재야의 사령탑에 오르다
네 번째 감옥, 26개월
신랑이 신부의 방을 찾듯이
절정
때 묻은 십자가
잠꼬대 속의 시대정신
두 세기 사이의 아시아
일본에서
베이징에서 평양으로
파란과 신명의 축제
일파만파
발자국을 흐트러뜨리지 말자
다섯 번째 감옥, 19개월
통일의 르네상스
여섯 번째 감옥, 21개월
발바닥으로 외칠 거야
폐허의 숲을 헤치며
비둘기들의 장례식
울지 않는 기념비
에필로그 : 삶의 환희! 삶의 슬픔!
후일담 : 낡은 수첩
사진 자료
문익환 연보
참고 자료
그림 목록
프롤로그 : 20세기가 지나간 뒤에
원점
그의 기원을 찾아서
문익점에게서
19세기로부터의 망명자들
국경의 밤
북간도에 온 그리스도
거장들이 태어나던 때
최초의 기억들
어린 날
릴케처럼
좌절을 배우다
바람 속에 묻힌 삼촌
모진 바람에도 거세지 않은 용정 사투리
바람의 관측자
평양 시절
솥에서 뛰어나와 숯불에 내려앉다
신을 우롱한 대지
도쿄에서 발견한 존재의 비참성
연분홍 코스모스에게
짧은 희망 긴 절망
윤동주를 잃고
8월의 카오스
슬픈 남하南下
분단의 아침을 맞으면서
종교도 시대 위에서 집을 짓는다
침묵의 지대
미국행 여객선
그대들은 혼자가 아니다
1950년 여름, 서울
판문점으로 날아간 비둘기 두 마리
역사의 막다른 골목에서
세기의 방랑자
마지막 귀향
불치의 감탄사로 말하라
뼈아픈 후회
사월이 닫히는 소리
완전주의자의 꿈
한국인에서 히브리인으로
생의 반환점을 지나며
저잣거리로 나오다
새삼스런 하루
「히브리서 11장 1절」
야만의 시간, 1974
장준하 충격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57년 만의 만세운동
난형난제
신나는 법정
장미들의 반란
첫 번째 감옥, 22개월
불발이 된 ‘생의 피날레’
두 번째 감옥, 15개월
겨울이 긴 나라의 봄은 아름답다
하, 그림자가 없다
지옥의 한철
도봉산 1호
계엄령 속의 눈
세 번째 감옥, 31개월
오월의 양심
재야의 사령탑에 오르다
네 번째 감옥, 26개월
신랑이 신부의 방을 찾듯이
절정
때 묻은 십자가
잠꼬대 속의 시대정신
두 세기 사이의 아시아
일본에서
베이징에서 평양으로
파란과 신명의 축제
일파만파
발자국을 흐트러뜨리지 말자
다섯 번째 감옥, 19개월
통일의 르네상스
여섯 번째 감옥, 21개월
발바닥으로 외칠 거야
폐허의 숲을 헤치며
비둘기들의 장례식
울지 않는 기념비
에필로그 : 삶의 환희! 삶의 슬픔!
후일담 : 낡은 수첩
사진 자료
문익환 연보
참고 자료
그림 목록
책 속으로
문익환은 그러한 현실에 참담하게 좌절했다. 교회 측 은 갈수록 열세인데 윤동주랑 셋이서 삼총사처럼 어울리던 소꿉동무마저 공산당 편에 서버렸다. 겨우 열두 살에 소학교 5학년생인 송몽규가 서슴없이 어른들 앞에 나서서 연설을 하고 다녔다.
--- p.112
정치적으로는 미래를 꿰뚫어볼 혜안을 얻지 못하고, 경제적으로는 자립이 어려웠으며, 신학적으로는 아직 갈증이 많은, 그러면서 여성적인 감수성과 병약한 신체를 가진 서른 살의 문익환이 뛰어넘기에 세파의 물결은 너무도 높고 사나웠다.
--- p.225
늦봄. 그렇다, 늦봄! 그는 봄을 좋아했지만 “철도 없이 지레 나온/ 풀포기/ 두셋/ 길섶에서 오들오들”(「너무 이른 봄」에서) 떨거나, “그리 따뜻하지도 않은/ 봄볕에/ 허겁지겁 쫓겨 들어온/ 한기”(「이른 봄의 단상」에서)의 시간들을 포근해하지 않았다. 이른 봄에게 “어차피/ 너는/ 봄의 선구자다”라고 말할 때는 평소 삶의 태도가 그렇듯이 피안의 불을 보는 듯한 거리감도 느껴진다. 그래, 늦봄으로서 이제 세상에 갓 태어나기나 한 것처럼 노래하는 것이다.
--- p.333
재야의 선봉장이었던 박형규는 문익환이 등장하자 민주화투쟁이 신나고 즐거우며 함께하지 못하면 혼자만 소외되는 느낌이 들 만큼 웃음이 넘치게 되었다고 말한다.
--- p.387
그는 언제나 ‘낡은 우리’의 내부에 있는 ‘사적 인간성’을 몰아내기 위해서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모습으로 새로운 공동체, 즉 민중 앞에 서 있었다.
--- p.441
그는 목이 잠겨 음성이 제대로 터져 나오지 않는 소리로 첫 발언을 이렇게 했다.
“저는 민주는 민중의 부활이요 통일은 민족의 부활이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북측 사람들의 느낌이 전혀 달라져버리기 시작한 것은 아마 이 말을 듣고서부터였을 것이다.
--- p.112
정치적으로는 미래를 꿰뚫어볼 혜안을 얻지 못하고, 경제적으로는 자립이 어려웠으며, 신학적으로는 아직 갈증이 많은, 그러면서 여성적인 감수성과 병약한 신체를 가진 서른 살의 문익환이 뛰어넘기에 세파의 물결은 너무도 높고 사나웠다.
--- p.225
늦봄. 그렇다, 늦봄! 그는 봄을 좋아했지만 “철도 없이 지레 나온/ 풀포기/ 두셋/ 길섶에서 오들오들”(「너무 이른 봄」에서) 떨거나, “그리 따뜻하지도 않은/ 봄볕에/ 허겁지겁 쫓겨 들어온/ 한기”(「이른 봄의 단상」에서)의 시간들을 포근해하지 않았다. 이른 봄에게 “어차피/ 너는/ 봄의 선구자다”라고 말할 때는 평소 삶의 태도가 그렇듯이 피안의 불을 보는 듯한 거리감도 느껴진다. 그래, 늦봄으로서 이제 세상에 갓 태어나기나 한 것처럼 노래하는 것이다.
--- p.333
재야의 선봉장이었던 박형규는 문익환이 등장하자 민주화투쟁이 신나고 즐거우며 함께하지 못하면 혼자만 소외되는 느낌이 들 만큼 웃음이 넘치게 되었다고 말한다.
--- p.387
그는 언제나 ‘낡은 우리’의 내부에 있는 ‘사적 인간성’을 몰아내기 위해서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모습으로 새로운 공동체, 즉 민중 앞에 서 있었다.
--- p.441
그는 목이 잠겨 음성이 제대로 터져 나오지 않는 소리로 첫 발언을 이렇게 했다.
“저는 민주는 민중의 부활이요 통일은 민족의 부활이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북측 사람들의 느낌이 전혀 달라져버리기 시작한 것은 아마 이 말을 듣고서부터였을 것이다.
--- p.577
출판사 리뷰
“그래, 이렇게 20세기가 서울을 뜨는구나!” ……눈물이 흘러 더 이상 취재를 할 수 없었다
“1994년 1월 18일, 저녁뉴스 하나에 온 나라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문익환 목사의 별세 소식. “뉴스를 듣고 사람들은 곳곳에서 한일병원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수천 명씩 조문객들이 몰려왔다. “장례 기간 전국 각지에서 여기저기 자발적으로 빈소가 차려져 수많은 사람들이 참배했다. 그의 진실을 뒤늦게 신뢰한 사람도 많았다. 그리고 끝없이, 그가 생전에 거리에 뿌리고 다닌 숱한 아름다운 일화들이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다.” 문익환 목사의 상여가 대학로를 빠져나갈 때 누군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래, 이렇게 20세기가 서울을 뜨는구나!”
김형수 작가는 이 책을 쓰기 위해 “북간도며 요코하마며 평양을 취재하는 행운을 누렸다.” 작가는 1999년부터 자료를 수집했고 5년에 걸쳐 『문익환 평전』을 집필했다. 취재를 하면서 문익환 목사를 잃은 “내면의 공동화로 마음고생을 겪는 이들”이 남아 있음을 확인했다.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캠코더를 들고 녹화하는 사람도 눈물이 흘러 더 이상 취재를 할 수 없었다.” 김형수 작가는 1959년생이다. “우리 세대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가끔 세상이 너무 추울 때, 밖에는 펑펑 함박눈이 내리고, 삶이 무거운 형벌이다 싶을 때 ‘문 목사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된다.” 작가가 떠올리는 ‘문 목사님의 말씀’은 이것이다. “우리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 일도 못한다.” “사랑을 가져라! 사랑은 지치지 않는다.”
“우리들 마음속 영원한 청년인 늦봄 문익환 목사님,
그 너른 가슴이 환한 미소로 나를 반겨주고 있었다.” _어느 대학생의 글(본문에서)
쉰아홉, “그는 원로의 나이였지만 재야운동에서 단연 두각을 드러내어 일흔일곱에 별세하기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12년간의 옥살이를 하는 수난의 삶을 산다. 그 기념비의 하나로서 ‘방북’은 통일운동의 최고 업적”이 되었다. 1989년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회담을 한 문익환, 그의 방북은 남북 양측의 극적인 공감대로 사용되었다. 문익환은 늦은 나이에 민주화운동에 뛰어들면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탈바꿈한다. 이런 그의 모습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말은 문익환이 자기 스스로에게 붙인 호 ‘늦봄’이다. 아들 문성근은 아버지 문익환이 처음 옥살이를 하고 나왔을 때, 회고록을 써보라고 넌지시 권유한다.
“첫 출감하셨을 때, 아버지! 이제 회고록을 써보시는 게 어때요, 했더랬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처구니없는 주문이지요. 그 후 어떻게 사실 셈인지 그때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겠어요?”
아들 문성근의 말처럼 “어처구니없는 주문”이었다. 당시 문익환의 삶은 “아직 그 입구에도 닿아 있지 않았다. 그 후에 저질러진 일들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문익환 평전』은 그가 태어나기도 전인 20세기 전에 시작된다. 일제 식민지의 한파를 피해 북간도로 모여든, 한국도 아닌 조선 사람들. 왕도, 국가도, 마을도 없던 이곳을 이들은 사람 사는 곳으로 바꾸어낸다. 허허 벌판에 사람만 있는 이 땅에서 문익환은 태어났다. 그러나 문익환은 어린 시절을 아름다운 때라고 회상한다. 북간도 명동촌에서 학교를 다니며 사귄 친구들과 세상을 이야기하고 시를 노래한다. 그러나 세상일이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다.
일제의 탄압과 뒤이어 벌어진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그는 신학의 길로 들어선다. 목사 문익환은 그래서 어쩌면 연약하기만 한, 현실 도피자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학창 시절의 친구 윤동주의 죽음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늦봄’으로서 뒤늦게 피어난 그의 힘은 어쩌면 오랫동안 축적되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여리기만 한 젊은 날의 그에게 시대의 혼란함은 견디기 힘든 어려움이었다. 그는 프린스턴신학교로 유학을 떠나 목사가 되어 혼란스럽기만 한 한국 사회로 돌아온다. 6·25전쟁 정전 협정의 통역관으로서 시대적 사건을 눈앞에서 바라볼 수 있었지만 이 사건이 그를 시대의 복판으로 끌어들이지는 않았다. 그는 신학을 연구하며 목사로서의 삶을 오랫동안 살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시대의 복판에 등장한다.
“문익환은,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을 첫발로 삼고, 1994년 1월 18일 사면되지 못한 가석방 상태로 마석공원에 묻힐 때까지 햇수로 19년간, 달수로는 218개월, 날수로 6529일 동안에 달수는 102개월, 날수로는 3102일을 밖에서 우리와 함께 살았다. 한국인들이 알고 있는 문익환에 대한 모든 추억은 그 백여 개월 동안의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추억을 남기고 말았다.”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기어코 가고 말 거야, 이건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이건 진담이라고”
_문익환 「잠꼬대 아닌 잠꼬대」에서
2004년 출간된 책을 다시 펴내며 출판사에서 가장 주목한 것은 이 ‘연약한 힘’으로서의 ‘늦봄 문익환’이다. 그 연약한 역동성을 드러내기 위해 20세기 초기 추상화가였던 힐마 아프 클린트의 그림 열세 점과 글을 본문 중간 중간에 삽입했다. 인물의 삶을 연대기 순으로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인물의 핵심적인 ‘감성’을 전달하려고 하는 데 집중했다.
역사 속 인물을 다루는 평전에서 인물이 역사 속에 묻히는 것이 아니라 인물 그 자체를 살려낼 수 있는 데는 지은이의 치밀한 자료 조사 덕분이다. 작가는 “‘문익환 정보’를 사유화하지 않을 생각이다. 취재한 결과물(인터뷰 내용 및 사진 등)은 대부분 ‘통일맞이’ 자료함에 보관해두었으니 언제라도 열람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문익환의 가족과 지인에게 직접 들은 문익환에 대한 일화들을 비롯하여 문익환이 남긴 개인적인 메모, 서신, 산문 등을 통해 당시 문익환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이를 작가 특유의 시적 표현으로 아름답게 풀어냈다. 본문의 화보와 지은이 특유의 시적 표현을 통해 늦봄이라는 문익환의 연약한 힘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평전’으로 새롭게 나올 수 있었다. 『문익환 평전』은 문익환 삶의 결정판이다.
1999년 언론에서 한국의 20세기를 대표하는 인물을 선발한 적이 있다. 문익환은 당연히 여기에 포함이 되었지만, 문제는 그의 애매한 정체성이었다. 목사로서 종교 지도자, 시인으로서 문화 인사, 민주화 운동가로서 정치 인물, 그리고 통일에 힘쓴 통일할아버지. 그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어떻게 정의를 내리든 그는 언제나 ‘약한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한 언론사 취재원이 그를 너무 취재하기 어려운, 다가가기 힘든 인물이라고 했을 때,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농성장에서 전화 한 통화면 금방 달려오던 ‘문 목사님’을 기억하는 노동자들”은 여기에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는 “남한 사회가 신격화시켜버린 분단 이데올로기 때문에 발붙일 곳이라고는 없는 사상범이나 간첩단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사람들까지 가리지 않고 마구 껴안고 사랑했으며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지 않았던가.
이런 문익환을 민주화 세대의 ‘추억’ 속에만 남겨둬야 할까. 지금, 독재정권의 마지막 인물이 물러났고, 남북관계가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문익환이 그토록 강조했던 ‘사랑’이 이제야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바야흐로 ‘늦봄’의 시대다.
“벌써 5월도 반이 지났군요.
지금은 분명히 늦봄이라고 하겠소.
나의 철인 거죠.” _문익환(본문에서)
“1994년 1월 18일, 저녁뉴스 하나에 온 나라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문익환 목사의 별세 소식. “뉴스를 듣고 사람들은 곳곳에서 한일병원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수천 명씩 조문객들이 몰려왔다. “장례 기간 전국 각지에서 여기저기 자발적으로 빈소가 차려져 수많은 사람들이 참배했다. 그의 진실을 뒤늦게 신뢰한 사람도 많았다. 그리고 끝없이, 그가 생전에 거리에 뿌리고 다닌 숱한 아름다운 일화들이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다.” 문익환 목사의 상여가 대학로를 빠져나갈 때 누군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래, 이렇게 20세기가 서울을 뜨는구나!”
김형수 작가는 이 책을 쓰기 위해 “북간도며 요코하마며 평양을 취재하는 행운을 누렸다.” 작가는 1999년부터 자료를 수집했고 5년에 걸쳐 『문익환 평전』을 집필했다. 취재를 하면서 문익환 목사를 잃은 “내면의 공동화로 마음고생을 겪는 이들”이 남아 있음을 확인했다.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캠코더를 들고 녹화하는 사람도 눈물이 흘러 더 이상 취재를 할 수 없었다.” 김형수 작가는 1959년생이다. “우리 세대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가끔 세상이 너무 추울 때, 밖에는 펑펑 함박눈이 내리고, 삶이 무거운 형벌이다 싶을 때 ‘문 목사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된다.” 작가가 떠올리는 ‘문 목사님의 말씀’은 이것이다. “우리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 일도 못한다.” “사랑을 가져라! 사랑은 지치지 않는다.”
“우리들 마음속 영원한 청년인 늦봄 문익환 목사님,
그 너른 가슴이 환한 미소로 나를 반겨주고 있었다.” _어느 대학생의 글(본문에서)
쉰아홉, “그는 원로의 나이였지만 재야운동에서 단연 두각을 드러내어 일흔일곱에 별세하기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12년간의 옥살이를 하는 수난의 삶을 산다. 그 기념비의 하나로서 ‘방북’은 통일운동의 최고 업적”이 되었다. 1989년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회담을 한 문익환, 그의 방북은 남북 양측의 극적인 공감대로 사용되었다. 문익환은 늦은 나이에 민주화운동에 뛰어들면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탈바꿈한다. 이런 그의 모습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말은 문익환이 자기 스스로에게 붙인 호 ‘늦봄’이다. 아들 문성근은 아버지 문익환이 처음 옥살이를 하고 나왔을 때, 회고록을 써보라고 넌지시 권유한다.
“첫 출감하셨을 때, 아버지! 이제 회고록을 써보시는 게 어때요, 했더랬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처구니없는 주문이지요. 그 후 어떻게 사실 셈인지 그때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겠어요?”
아들 문성근의 말처럼 “어처구니없는 주문”이었다. 당시 문익환의 삶은 “아직 그 입구에도 닿아 있지 않았다. 그 후에 저질러진 일들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문익환 평전』은 그가 태어나기도 전인 20세기 전에 시작된다. 일제 식민지의 한파를 피해 북간도로 모여든, 한국도 아닌 조선 사람들. 왕도, 국가도, 마을도 없던 이곳을 이들은 사람 사는 곳으로 바꾸어낸다. 허허 벌판에 사람만 있는 이 땅에서 문익환은 태어났다. 그러나 문익환은 어린 시절을 아름다운 때라고 회상한다. 북간도 명동촌에서 학교를 다니며 사귄 친구들과 세상을 이야기하고 시를 노래한다. 그러나 세상일이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다.
일제의 탄압과 뒤이어 벌어진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그는 신학의 길로 들어선다. 목사 문익환은 그래서 어쩌면 연약하기만 한, 현실 도피자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학창 시절의 친구 윤동주의 죽음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늦봄’으로서 뒤늦게 피어난 그의 힘은 어쩌면 오랫동안 축적되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여리기만 한 젊은 날의 그에게 시대의 혼란함은 견디기 힘든 어려움이었다. 그는 프린스턴신학교로 유학을 떠나 목사가 되어 혼란스럽기만 한 한국 사회로 돌아온다. 6·25전쟁 정전 협정의 통역관으로서 시대적 사건을 눈앞에서 바라볼 수 있었지만 이 사건이 그를 시대의 복판으로 끌어들이지는 않았다. 그는 신학을 연구하며 목사로서의 삶을 오랫동안 살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시대의 복판에 등장한다.
“문익환은,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을 첫발로 삼고, 1994년 1월 18일 사면되지 못한 가석방 상태로 마석공원에 묻힐 때까지 햇수로 19년간, 달수로는 218개월, 날수로 6529일 동안에 달수는 102개월, 날수로는 3102일을 밖에서 우리와 함께 살았다. 한국인들이 알고 있는 문익환에 대한 모든 추억은 그 백여 개월 동안의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추억을 남기고 말았다.”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기어코 가고 말 거야, 이건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이건 진담이라고”
_문익환 「잠꼬대 아닌 잠꼬대」에서
2004년 출간된 책을 다시 펴내며 출판사에서 가장 주목한 것은 이 ‘연약한 힘’으로서의 ‘늦봄 문익환’이다. 그 연약한 역동성을 드러내기 위해 20세기 초기 추상화가였던 힐마 아프 클린트의 그림 열세 점과 글을 본문 중간 중간에 삽입했다. 인물의 삶을 연대기 순으로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인물의 핵심적인 ‘감성’을 전달하려고 하는 데 집중했다.
역사 속 인물을 다루는 평전에서 인물이 역사 속에 묻히는 것이 아니라 인물 그 자체를 살려낼 수 있는 데는 지은이의 치밀한 자료 조사 덕분이다. 작가는 “‘문익환 정보’를 사유화하지 않을 생각이다. 취재한 결과물(인터뷰 내용 및 사진 등)은 대부분 ‘통일맞이’ 자료함에 보관해두었으니 언제라도 열람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문익환의 가족과 지인에게 직접 들은 문익환에 대한 일화들을 비롯하여 문익환이 남긴 개인적인 메모, 서신, 산문 등을 통해 당시 문익환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이를 작가 특유의 시적 표현으로 아름답게 풀어냈다. 본문의 화보와 지은이 특유의 시적 표현을 통해 늦봄이라는 문익환의 연약한 힘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평전’으로 새롭게 나올 수 있었다. 『문익환 평전』은 문익환 삶의 결정판이다.
1999년 언론에서 한국의 20세기를 대표하는 인물을 선발한 적이 있다. 문익환은 당연히 여기에 포함이 되었지만, 문제는 그의 애매한 정체성이었다. 목사로서 종교 지도자, 시인으로서 문화 인사, 민주화 운동가로서 정치 인물, 그리고 통일에 힘쓴 통일할아버지. 그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어떻게 정의를 내리든 그는 언제나 ‘약한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한 언론사 취재원이 그를 너무 취재하기 어려운, 다가가기 힘든 인물이라고 했을 때,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농성장에서 전화 한 통화면 금방 달려오던 ‘문 목사님’을 기억하는 노동자들”은 여기에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는 “남한 사회가 신격화시켜버린 분단 이데올로기 때문에 발붙일 곳이라고는 없는 사상범이나 간첩단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사람들까지 가리지 않고 마구 껴안고 사랑했으며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지 않았던가.
이런 문익환을 민주화 세대의 ‘추억’ 속에만 남겨둬야 할까. 지금, 독재정권의 마지막 인물이 물러났고, 남북관계가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문익환이 그토록 강조했던 ‘사랑’이 이제야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바야흐로 ‘늦봄’의 시대다.
“벌써 5월도 반이 지났군요.
지금은 분명히 늦봄이라고 하겠소.
나의 철인 거죠.” _문익환(본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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