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역사기억여행 (2010~) <여행지>/4.역사공원묘지

서울 국립현충원을 가다 (2024-06-15)

동방박사님 2024. 6. 15. 22:26
728x90

국립서울현충원 

설립일 199661일 / 전신 국립묘지 /소재지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사당동) / 상급기관 대한민국 국방부 /국립서울현충원(國立-顯忠院, Seoul National Cemetery)은 대한민국 국방부의 소속기관이다

설립

대한민국 국군이 창설된 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대치로 전사한 장병들은 서울 장충단공원 내 장충사에 안치되었으나 전사자의 수가 많아져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육군묘지의 창설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한국 전쟁이 발발한 뒤 논의는 중단되었고 한국 전쟁의 전사자는 그 영령을 부산광역시에 위치한 범어사와 금정사에 순국 전몰장병 영안 안치소를 설치하여 봉안하였다.

한국 전쟁이 계속되면서 전사자 수가 늘어 다시 육군묘지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며 195256, 대한민국 국방부 국장급 회의에서 육군묘지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 이 회의에서는 육군묘지를 따로 설치하면 관리상의 문제나 영현 관리의 통일성이 제고되지 않는다며 국군 통합묘지의 설치를 추진하도록 하였고 그 명칭을 국군묘지로 할 것을 결의하였다

1952526일에 국군묘지 후보지 선정을 위해 국방부 주관으로 편성된 3군 합동 답사반은 195211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국군묘지 후보지 선정을 위해 10개 지역을 답사하였다. 그 결과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일대를 국군묘지 후보지로 선정하여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재가를 받았다.

195431일 착공하였으며, 1955715일에는 국군묘지관리소가 발족하고 1956413일 대통령령으로 군묘지령이 제정되어 안장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국가원수, 애국지사, 순국선열 등 국가의 발전을 위해 명예로운 일들을 한 사람들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장병들을 기리는 장소로 서울시 뿐만 아니라 국가적 차원으로 보전 필요성이 높기에 2013 서울 미래유산으로 등재됐다.

서울미래유산은 서울특별시가 2012 6월부터 추진하고 있는 서울 미래유산 보전사업의 일환으로 서울의 근ㆍ현대 유산 가운데 미래 세대에게 전달할 가치가 있는 유ㆍ무형의 유산에 대해 서울시가 현황 조사를 실시한 후 50여 명의 전문가로 구성된 미래유산보존위원회가 선정한다.

2024 7 24일 관리주체가 국방부에서 국가보훈부로 이관될 예정이다.

역사

1952 5 6: 국방부 국장급 회의에서 국립묘지 설치 결의.

1952 11 3: 군묘지설치위원회 구성.

1955 7 15: 국군묘지관리소 발족.

1956 1 16: 무명용사가 최초로 안장.

1957 4 2: 신분이 확인된 용사 최초로 안장.

1965 7 27: 대한민국 1~3대 대통령 이승만 묘 안장.

1967 9 30: 현충탑 건립.

1969 4 30: 현충문 건립.

1979 11 3: 대한민국 5~9대 대통령 박정희 묘 안장.

1980 6 22: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진압경찰 4명과 군인 22명 안장됨.

1980 12 31: 현충관 건립.

1996 6 1: 국립현충원으로 개편.

2009 5 19: 공작 활동 중 사망한 공작원 12명이 재일동포 북송국가 임무수행 순직자로서 전몰자로 인정받아 안장.

2009 8 23: 대한민국 15대 대통령 김대중 묘 안장.

2015 11 26: 대한민국 14대 대통령 김영삼 묘 안장.

2024 7 24: 관리주체가 국방부에서 국가보훈부로 이관

안장 대상

서울특별시 119특수구조단  장복수,  권용각 대원 3주기 추모식

국립서울현충원에는 다음의 사항에 따른 사람의 유골이나 시신을 안장한다.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4조에 따른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로사람

현역군인과 소집 중인 군인 및 군무원으로서 사망한 사람 또는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4조제1항제3호나목과 제5호나목에 해당하는 사람

상훈법 13조에 따른 무공훈장을 수여받은 사람으로서 사망한 사람

장성급(將星級) 장교 또는 20년 이상 군에 복무한 사람 중 전역·퇴역 또는 면역된 후 사망한 사람

전투에 참가하여 전사하였거나 임무 수행 중 순직한 예비군대원 또는 경찰관

군인·군무원 또는 경찰관으로 전투나 공무 수행 중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4조제1항제4, 6호 또는 제12호에 따른 상이(傷痍)를 입고 전역·퇴역·면역 또는 퇴직한 사람으로서 사망한 사람

화재 진압, 인명 구조, 재난·재해 구조, 구급 업무의 수행 또는 그 현장 상황을 가상한 실습훈련과 소방기본법 16조의21항제1호부터 제4호까지의 소방지원활동 및 제16조의31항의 생활안전활동 중 순직한 소방공무원과 상이를 입고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6조의4에 따른 상이등급을 받은 소방공무원으로서 사망한 사람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4조제1항제9호에 따른 6·25참전재일학도의용군인으로서 사망한 사람

의사상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2조제2호 및 제3호에 따른 의사자(義死者) 및 의상자(義傷者)로서 사망한 사람 중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요건을 갖춘 사람

산불진화·교정업무 등 위험한 직무를 수행하는 공무원으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요건에 해당하는 직무 수행 중 사망하여 관계 기관의 장이 순직공무원으로 안장을 요청한 사람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4조제1항제13호 및 제14호에 따른 순직공무원과 공상공무원으로서 카목의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요건의 직무에 준하는 위험한 직무수행 중 사망 또는 부상하였다고 인정하여 제10조에 따른 안장대상심의위원회가 안장 대상자로 결정한 사람

국가나 사회에 현저하게 공헌한 사람(외국인을 포함) 중 사망한 사람으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요건을 갖춘 사람

독도의용수비대 지원법 2조제1호에 따른 독도의용수비대의 대원으로서 사망한 사람

주요 묘역  / 국가원수묘역

이승만 대통령: 1965 7 19일 서거, 같은 해 7 27일 가족장 후 안장

프란체스카 도너 영부인: 1992 3 19일 서거, 같은 해 3 23일 가족장 후 안장

박정희 대통령: 1979 10 26일 서거, 같은 해 11 3일 국장 후 안장

육영수 영부인: 1974 8 15일 서거, 같은 해 8 19일 국민장 후 안장

김대중 대통령: 2009 8 18일 서거, 같은 해 8 23일 국장 후 안장

이희호 영부인 : 2019 6 10일 서거, 같은 해 6 14일 사회장 후 안장

김영삼 대통령: 2015 11 22일 서거, 같은 해 11 26일 국가장 후 안장

장군묘역

국립현충원 장군 묘역에 안장된 친일과 출신 장군들

'장군 제1묘역'의 채병덕, 김백일, 신응균

'장군 제2묘역'의 이응준, 임충식, 신태영

'장군 제3묘역'의 정일권과 이종찬

국가보훈처의 친일반민족행위자 국립묘지 안장자 현황에 따르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 가운데 63명이 서울현충원과 대전현충원에 묻혀 있다.

서울현충원에만 친일 인사 37명이 안장돼 있다. 이 가운데는 국가기관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된 인물도 7명이나 있다.

풍수 / 사육신이 깃든 곳

역사적으로 보면 이 지역은 조선시대 단종에게 충절을 바쳤던 사육신(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성삼문, 박팽년)의 제사를 모시던 육신사(六臣祠)가 있던 곳으로 전하여지며 보훈충의(報勳忠義)가 깃들인 곳이다. 지형적으로는, ()을 쓴 듯 봉우리가 솟았다 하여 관악산이며, 붓끝과 같이 뾰족한 형세라 하여 문필봉(文筆峰)이라 일컬어지는 산세로 감싸여 있다. 이들 산세 속의 펑퍼짐한 지형을 동작포란형(銅雀抱卵形)’이라 하여 동작이 알을 품고 있듯 상서로운 기맥(氣脈)이 흐른다 하였다. 또한, 전면을 흐르는 한강수가 용트림하듯 흐르고 있어 한층 미관을 더하고 있다.

선조와 고종의 왕기가 예언된 곳

동작동 국립묘지 안에 묘소의 창빈 안씨는 손자 선조가 왕위에 올라 영광을 얻었다. 조선 중기의 기인 격암 남사고가 왕기(王氣)가 있음을 예언한 것으로 유명한데, 여기서는 고종이 즉위함으로써 두번씩이나 왕을 배출한 셈이다.

1953년 묫자리를 결정할 때 따져보는 풍수지리는 당시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무엇보다 무덤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배수가 잘되는 지형이어야 했다.

사건·사고 및 논란  / 현충문 폭파 사건

1970 6 22일 북한 공작원들에 의한 현충원의 정문인 현충문이 폭파되는 사건이 일어났다.공작원들이 설치한 폭약은 주요 참배객들을 노리고 설치 되었으나 미리 폭파되는 바람에 다행이 인명피해는 없었다. 공비들은 이후 도주하였으나 추적조에 추격 당해 모두 사살 되었다.

북한 대표단 참배

2005 8 14, 김기남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등 북측대표단 일행이 현충원에 참배했다. 1985년 미국 레이건 대통령의 비트부르크 참배와 비슷한, 전면전 상대국 군인 국립묘지에 대한 참배였다.

이후 북한은 남측 인사들도 북한에 와서 혁명열사능이나 애국열사능을 참배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지만 한국은 국가보안법상 찬양죄라면서 거부했다.

전직 대통령 서울현충원 안장 특례 논란

포화된 서울현충원에 김대중, 김영삼 전직 대통령의 안장을 두고 특혜 논란이 일었다.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당시 유가족들의 요구에 따라 대전이 아닌 서울현충원에 안장되기로 결정됐다. 이는 유가족들이 "국민과 보다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곳에 모시고 싶다"고 청원한 것이 발단이다. 대전에 이미 부지를 확보해 둔 점과 다른 안장 대상자들과의 형평성 문제, 그리고 서울 현충원 안장시 부지 확보를 위해 추가적으로 공사 비용이 들어가는 점 등으로 인해 관계 당국이 난색을 표했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유가족 의사를 존중할 것을 지시해 성사되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 2015년 사망한 김영삼 전 대통령도 유가족들의 특례 요구가 인정되어 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이미 2004년부터 서울현충원의 포화 상태로 대전에 8위의 묘소를 위한 국가원수 묘역을 만들어 뒀고, 다른 안장 대상자들은 대전현충원에 안장되거나 서울 안장 희망시 봉분없이 현충원 내 납골당인 충혼당에 안치되는데, 국가원수가 모범을 보이기는커녕 특례를 남용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현재 대전 현충원에 안장된 대통령은 2006년 서거한 최규하 대통령이 유일하다.

기타

창빈 안씨의 묘소도 국립서울현충원 안에 있지만 이는 창빈 안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한 것이 아니라 창빈 안씨의 묘역에다 국립서울현충원을 건립한 것이다. 출처 위키백과.

채명신(蔡命新) 장군

출생일: 19261127/ 출생지;일제강점기 조선 황해도 곡산군 / 사망일: 20131125(86) / 사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본관:인천 /배우자:문정인 /종교: 개신교(순복음교회) /복무:대한민국 대한민국 육군 / 복무기간:1948~ 1972/ 근무:육군본부 육군 제2군사령부 /최종계급: 중장(中將) /지휘: 38보병사단.5보병사단.수도기계화보병사단.주월한국군사령부.2작전사령부 /주요 참전:송악산 전투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기타이력: 주스웨덴 대사 / 주 그리스 대사 / 주 브라질 대사 / 서훈:태극무공훈장.화랑무공훈장.충무무공훈장.을지무공훈장.보국훈장 국선장.방위포장.미국 공로훈장.베트남 공화국 최고훈장

채명신(蔡命新, 19261127~20131125)은 대한민국의 군인 출신 외교관·공무원·정치인·체육인·사회기관단체인으로 6.25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다.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 5기로 졸업하여 참위(소위)로 임관하여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백골병단을 지휘하였으며, 휴전 후에는 9사단에서 박정희 장군을 만난 이후 5·16 군사 쿠데타에 가담하였다. 5·16 군사 쿠데타 직후 혁명5인위원회와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참여했다가, 주월한국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개헌에 반대했다가 강제로 예편되었다. 퇴역 후에는 스웨덴, 그리스, 브라질 대사 등 외교관으로 활동하였다.

한국 전쟁 당시 국군의 주요 지휘관 중 한사람이었으며, 베트남 전쟁 당시 맹호부대장 겸 초대 주월한국군 사령부 사령관이었다. 대한태권도협회의 초대 회장이기도 했다. 대한태권도협회의 초대 회장으로 태권도 각 관과 파벌의 통합과 태권도협회 공통 규정을 제정하고 첫 전국승단심사를 조직하였다. 베트남 전쟁 당시 파월 한국군 사령관으로 재임 중 태권도 보급에 노력하였다.

학력

경성인문학원 졸업/평양사범학교 졸업/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5/대한민국 육군보병학교 졸업/대한민국 육군대학 졸업/미국 육군참모대학교 졸업/대한민국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16(1971)

경력

대한민국 육군 중장 예편/베트남 전쟁 참전전우회장/6·25 참전유공자회 회장/베트남 참전 유공전우회 총재/수도사단 제17대 사단장

생애 : 생애 초반 / 출생과 유년기

채명신은 19261127일 황해도 곡산군에서 출생했다. 항일운동가였던 아버지 채은국(蔡殷國)과 독실한 크리스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모태 신앙인으로 성장하였다. 아버지는 광복 직후 석방됐지만 고문의 후유증으로 194512월 초에 사망하였고, 어머니는 교회 권사로 활동하였다.

194419세 때 제2국민병으로 일본군의 동원훈련을 받게 되었다. 이때 그의 회고에 의하면 부대 식당은 장교와 부사관이 먹는 식당과 병사들이 먹는 식당 두군데로 나뉘어 있었다고 한다.

교사 발령과 월남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발령, 평안남도 용강 덕해소학교에 부임하였다. 그 뒤 진남포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소련군 주둔 이후 공산주의를 피해 1947년 월남하였다. 당시 교회 권사이던 어머니와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고 홀로 남하하여 서울에 도착하였다천신만고 끝에 서울에 당도한 그는 1948년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 5기 생도모집에 응시하여 합격한다.

군인 경력 / 육사 시절

채명신은 목사가 되겠다는 애초의 꿈 대신 19484월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지원한다. 강도 높은 훈련에 식량조차 제대로 배급되지 않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육군사관학교 재학 당시 상위권 성적이었던 그는 졸업 당시 동기 400명 중 26위였다. 육군사관학교 제5기로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되었다.

제주도 9연대와 국지도발전 참가

1948년 제주도 9연대로 발령되었다. 당시 정부 수립 반대 여론도 강한 곳이었고, 평소 동기들과 선배들 사이에서 제주도 보내버린다는 말이 반 협박처럼 쓰일 만큼 제주도는 그들 사이에서 기피의 대상이었다. 채명신은 1948년 동기 8명과 함께 낯선 섬 제주도로 발령되었다.4.3 사태 이후 부대 내에는 남로당이 세력을 장악하고 있었고, 사방이 적의로 가득 찬 눈길들이 그를 따라다녔으며 감시에 시달렸다. 그의 직속 상관인 중대장마저 호시탐탐 그의 목숨을 노렸다. 궁지에 몰린 채명신은 마음을 다해 소대원들을 대한다. 아픈 병사에게는 죽을 먹였으며 병사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결국 그의 노력은 이념을 넘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일촉즉발의 순간에서 그를 구해낸다. 제대로 목욕도 할 수 없는 열악한 환경으로 목욕을 하는 사이에도 총알이 날아들고 미인계까지 동원되어 그의 목숨을 위협하기도 했다.

4954일 개성 부근 송악산 전투에서 당시 보병중대장으로 포병중대장 노재현(盧載鉉)대위가 이끄는 포병 1개 중대와 함께 참전하였다.194911월 남파된 북괴 공산 게릴라들을 토벌하기 위해 태백산에 투입되었다. 당시 강원도와 경북 산악지대엔 남파된 괴뢰군과 지역 빨치산이 합세해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었다. 강원도에서 채명신은 1947년 월남 이후 2년 만에 어머니와 재회한다. 그러나 재회한 어머니와도 3주만에 이별하게 된다.

한국 전쟁

19506월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다. 25연대 1대대장을 하다가 영천에서 8사단 21연대 1대대장으로 북진 상륙에 참여하였다. 평안북도 희천까지 진격하였으나 중공군에 밀려 후퇴하였다. 12월 적지에 고립된 21연대장을 위해 채병신은 특공대를 이끌고 나섰다. 어렵게 그를 구했으나 오래 굶주린 연대장이 고기를 먹고 싶다 하여 민가에 들어갔다가 민가에 숨어있던 북 괴뢰군에 둘러쌓인 것이다. 한 사람을 위해 특공대 모두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으로 그는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지만 연대장은 포로가 되었다.(사망했을수도 있다) 그리고 며칠 후 다시 채명신은 부하 두 명과 함께 민가에서 괴뢰군에게 포위를 당했다. 빠져나갈 길이 없어 그는 자살을 결심했으나 운좋게 탈출에 성공한다.

그 뒤 '백골병단'이라고 불리는 유격부대를 이끌고 북 괴뢰군 점령지를 돌며 후방교란을 펼쳐 굉장한 전과들을 다수 올린다. 이때의 전공과 경험들은 오늘날 대한민국 국군 전사 연구나 실전 사례 교육에서 상당히 비중이 높게 다뤄지고 있다. 한국전쟁 후 소장까지 진급한다. 다만 당시 참전했던 '백골병단'은 민간인들로 구성되었는데 대한민국 군과 정부에 의해 어떠한 보상도 없었으며 심지어 군재입대까지 하게 된다. 채명신 장군의 책에서도 이들에 대해 사후 대책이 없어 해결해주고 싶었지만 그러하지 못해 안타깝다고 써놓았다.[출처 필요]

195111연대 편성에 참여하고 스스로 연대장을 자원하였다.

3개월의 백골병단활동이후 귀환한 뒤 대령으로 진급한 그는 제7사단 5연대장, 3사단 참모장(2개월 하다가 전투가 급한데 참모로 있기보단 지휘관이 되고자 했다. 3사단 22연대장으로 발령나서 1개월간 있었으나 전황이 급박한 동부전선 20사단 M1고지지역으로 옮겼다), 20사단 60연대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M1고지를 최종 점령한 이후 휴전되었다.

휴전 이후

20사단 연대장 시절 사단을 방문한 박정희와 함께

연대장으로 있을 무렵, 그는 문정인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된다. 문정인은 경북 영덕의 재력가 집안 출신으로 이화여자대학교를 졸업하였다. 문정인에게서 12녀가 태어났다.

1954년 제3군단 작전참모, 육본 작전기획과장을 거쳐 195510월 논산 제2훈련소 참모장으로 부임하였다. 논산 제2훈련소 참모장으로 있을 때는 훈련소의 고질적인 비리와 부패를 제거하였다. 당시 4만여 명의 훈련병을 거느리고 있는 논산훈련소는 온갖 부정과 비리가 판치는 복마전 같은 곳이었다. 그가 이 사실을 알고 부임을 거부하자 신임 육군훈련소장으로 부임한 양국진 중장은 당신이 적임자라고 지목했으나 그가 거절하자,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에게 건의해 명령을 내버렸다.

훈련소에 가보니 훈련병들이 입고 있는 옷은 하나같이 거지꼴이었고, 그나마 부유층이나 권력층 자제들은 서류만 와 있고 사람은 없었다. 이것부터 고쳐야겠다고 마음먹고 서류 상의 훈련병들에게 속달우편을 보내 언제까지 입소하라고 상류층 가정에 통지하여 입대를 명령했다.

그런데 경무대의 한 비서관이 달려와 아무개 훈련병은 경무대와 관련된 요원이니 휴가 처리해서 내보내 줘야 한다.”며 명령조로 말했다. 그러나 그가 논리적으로 끝까지 따지고 대들자 경무대 비서관은 꼬리를 내리고 물러갔다. 이를 본 육군훈련소장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950년 후반 백골병단을 이끌고 점령지였던 설악산 부근에서 북한 괴뢰군과 교전, 크고 작은 승전을 하였으나 설악산 능선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 뒤 강릉 9사단에 부임하였다. 당시 9사단의 참모장은 채명신의 육사 선배였던 박정희 대령으로, 박정희는 부임 직후의 지친 채명신을 불고기집으로 데려가 적군의 핏자국이 얼룩진 후배의 점퍼를 자신의 고급 점퍼와 바꾸며 다독였고, 그를 위로하였다. 이후 박정희는 그를 각별히 살갑게 대하였는데, 9사단에 있을 때부터 박정희와의 인연이 이어진다.

19588월 준장으로 승진, 1군사령부 작전참모로 부임하였다. 이후 제38보병사단장과 제5사단장을 역임했다. 채명신은 5사단장으로 있던 중 5·16 군사정변에 가담한다.

5·16 군사정변

1961 5.16 군사 정변에 휘하 야전사단을 이끌고 반란에 가담하여 군사 정권 수립에 영향을 끼쳤다. 1961 5 15일 저녁 채명신은 육사 후배 조창대 중령으로부터 은밀한 편지를 건네 받는다. 하루 앞으로 닥친 거사를 알리는 박정희의 밀서였다. 그러나 이미 미군 방첩대 CIC에 그들의 계획이 누설된 상태라 자칫하면 모두의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채명신은 서둘러 이한림 제1군사령관과 매그루더 주한미군 사령관을 만나 담판을 지었다.

5·16 군사 정변 직후 혁명 5인위원회 멤버로 선임되었다. 이후 5 20일 군사혁명위원회가 구성되자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 그해 7월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면서 그를 국가재건최고회의 감찰위원장으로 발탁했다. 그는 사양하며 야전에 있기를 희망했으나 박 의장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채 장군이 실병력을 지휘하고 있는 것이 내심 불안하게 생각하여 그를 붙잡아 두었다.

대한태수도협회 회장

1962년에는 김운용 등과 함께 대한태수도협회(대한태권도협회의 원래 이름) 창설에 참여하여 태권도협회 초대 회장(1962~1964)에 선출되었다.

그가 태권도 협회장에 추천된 것은 군가 유대관계가 있었던 엄운규의 역할이 컸다. '당시 군사혁명위원회 감찰위원장으로 막강한 권력과 덕망이 높은 채명신 장군이 태수도협회의 초대 회장으로서 적격이라고 생각하였다[3]'는 것이다. 또한 군내에서도 백준기 소령(대령으로 예편) 등도 그를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으로 추대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태수도 협회 초대 회장으로 있으면서 그는 각지에 분파된 태권도 체육관 관장들을 소집, 규합하고 태권도 공통 규정을 제정하였다.

대한태수도협회의 시급한 문제는 각 체육관 별로 시행되고 있는 '승단심사'를 통합하는 것이었다. 1962 11 11일 국민회당에서 열린 '1회 전국승단심사'를 개최 하게 된다. 대회에서 회장 채명신은 대회사를 통해 각 태권도 체육관과 단체들의 통일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태수도는 그동안 각 유파별로 자파(自派)만을 위한 발전을 꾀하고 서로 고집과 편견 등으로 통합을 못보았으나, 5·16 군사정변 이후 구악(舊惡)을 일신하고 단결과 호양의 무도인 본분의 자태로 돌아와 통합을 이루었다. ...(이하 중략)... 과거 자파도장에서 실력이 있든 없든 임의로 단증을 부여했지만, 협회명칭 아래 이제 공정하게 심사해서 실력 있는 공인단을 주게 되어 경사가 아닐 수 없다. 

그는 곧 승단심사 임원을 구성하여 최초로 전국 태권도 연합 승단 심사를 주관했다. 승단심사 임원은 대회장 채명신, 심사위원 이남석·이종우·엄운규· 박철희·이영섭·남태희, 경기위원장 현종명, 심판위원 홍정표·김순배·김수진·김선구·이병로·고재천·이교운·백준기 등 25명이었다. 심사 종목은 각 단별로 형, 시합, 논문(3단 이상)이었다.

이후 채명신(군사혁명위원회 감찰위원장)이 군 내부 문제로 회장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되자 협회의 실질적인 업무 진행은 부회장이었던 이종우와 엄운규가 처리했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차장을 지내다가 1963년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부장 승진과 동시에 육군 소장 진급, 1964년 미국 유학, 미국 육군지휘참모대학교를 수료하고 귀국한다. 귀국 후 육군 제3관구 사령관으로 부임하였다.

베트남 전쟁 참전

1965 4월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청와대로 소환을 명령 받게 되었다. 이때 월남전 전투부대 파병에 대한 의견을 묻기 위해서였다.자신이 주월한국군 사령관으로 내정되었다는 것을 생각하지도 않은 채명신은 조심스럽게, 하지만 단호하게 반대 의사를 피력했다.

당시 미국은 전 세계로부터 명분 없는 전쟁에 참가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었고, 미국 국내에서도 히피족 등의 자발적인 반대 반전 운동에 봉착했다. 또한 그는 이미 한국전쟁을 통해 게릴라전이 어렵다는 것과 월남전에 국군이 참여한다면 호지명이라는 걸출한 지도자와 울창한 밀림과 같은 천혜의 요새를 가진 베트콩을 상대로 험난한 싸움을 치를 것을 예견하였다.

그러나 월남전에 참전하지 않을 경우 주한미군의 2개 사단을 철수 하겠다는 미국 측 일부 정객들의 압력을 받은 박정희는 그에게 월남전 파병을 종용한다.

미국은 한국이 파병을 거부할 경우 한국에 주둔하던 제2보병사단, 7보병사단을 한국에서 철수시키려 했고, 여전히 북한과 비교해 군사적 열세였던 한국에게 미군 2개 사단의 이탈은 대한민국의 국방력에 부담을 주었다. 그 해 8월 채명신은 주월사령관을 맡아달라는 박정희의 간곡한 설득을 받고 월남에 파견된다.

이후 육군참모대학을 이수하였고, 1965년 대통령 박정희에 의해 주월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베트남 전쟁에 참전, 베트남에 다녀왔다. 베트남 전쟁 중 그는 지하와 군내외부에 침투한 베트콩 프락치들의 암살 위협과 무좀, 풍토병 등에 시달렸다.

1969 3월 미국 닉슨 대통령으로부터 공로훈장을 받았다. 1969 4월 헬리콥터로 이동 도중 베트콩의 피격을 받고 국군 9사단 28연대 주둔지역인 투이 호아에서 헬기가 추락, 부상을 당하기도 했으나 기적적으로 생명을 구하였다. 1969 5월 응우옌 반 티에우 남베트남 대통령으로부터 최고 훈장을 수여받았다.

월남에서의 태권도 보급과 전파

베트남에서의 태권도 보급에 각별히 관심을 갖고 지원하였다. 1965년 월남태권도협회가 창설되어 월남 태권도의 현황을 조직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되었고, 태권도의 저변을 한층 더 확대할 수 있었다.

대한태수도협회 초대 회장을 역임한 채명신은 태권도 교관단에 각별한 관심과 배려를 아끼지 않았고, 태권도를 군사 전술의 일환으로 삼는 등의 지략을 펼치기도 했다. 그는 맹호부대 군수참모인 우종림 중령에게도 태권도 시범단을 만들게 하여 맹호부대 주둔지역인 퀴논 지역의 월남군부대, 경찰, 학교, 민간인들에게 태권도 시범을 보여 대민심리전으로 활용했다. 그러나 그는 교관들이 시범을 할 때 격파는 되도록 삼가토록 지시했다고 한다. 월남 고위층 인사가 격파 장면을 보고 신체에 부상이나 위험을 줄 수 있는 격파는 공포감을 조성한다며 미덥지 않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후일 채명신 사령관은 "주월 한국군의 작전 중의 하나는 태권도의 보급이었다." "당시 태권도 교관들은 전쟁에 직접 참여한 장병들과 견주어 결코 뒤질게 없는 활약을 펼쳤다."며 교관들을 높이 평가했다.

주월한국군 사령관인 채명신 장군은 "태권도 보급은 작전이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태권도 보급을 위해 군, , 경과 학교 등에 보급하기 위해 체계를 확립하는 한편 정부와 군의 고위층 인사에게도 적극적인 태권도 홍보 활동을 계속하였다.

채명신은 태권도의 기술적인 보급 뿐만 아니라 태권도 정신을 알리는데도 중점을 두었다. 그는 월남에서 태권도 5개 수칙을 만들어 태권도 수련장에는 반드시 이 수칙을 크게 써서 붙이고 수련 전, 후로 암기하도록 강조하였으며 이를 어기는 자에게는 태권도를 배우지 못하게 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는데, 수칙을 제정한 배경에는 몇 개의 사건이 있었다.

1966년 퀴논에 있는 꽁테 고등학교에 교관을 배치하여 태권도를 교육하던 중 학교 측에서 태권도를 그만 가르쳐 달라는 교육중지 요청이 들어왔다. 이유는 학교 내의 불량 학생들이 태권도를 배운 뒤 교사들에게 덤벼들어 교사들이 학생들을 다루는 데 어려움이 많다는 것이었다.그는 바로 관련 학생들을 불러 훈육하였다.

그리하여 채명신 장군은 3개월의 시간을 주면 태권 도가 싸움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심신을 연마하고 예의를 존중하고 사회질서를 준수하는 모범시민의 기본적인 자질을 함양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실제로 그 후에는 오히려 태권도를 배운 학생들이 더 예의를 잘 지키고 박력있는 모범학생으로 변했다고 한다.

생애 후반 / 귀국과 예편

1969 5 3일 특별군용기편으로 김포공항에 귀국하였고, 그해 5 12일 육군 제2군사령부 사령관으로 부임하였다.

1972년 초 대통령 박정희의 호출을 받았다. 박정희는 그에게 집권연장의 뜻을 보이고 군부 내의 지지를 이끌어줄 것을 호소한다. 그러나 채명신은 신의가 정치인의 생명이라며 강하게 반대한다.

각하. 정권을 연장하시겠다는 건 결국 이중플레이 아닙니까?

정치라는 건 국민들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 이게 지도자의 생명인데 그렇게 나가시면 스스로 생명을 끊는 것 아닙니까? 

처음에는 민족중흥의 사명과 자주국방을 위한 단결을 역설하던 박정희는 그의 주장에 분노한다. 두 번의 독대가 더 있었으나 모두 반대했고, 분노에 찬 박정희 앞에서도 채명신은 소신을 되풀이하였고 결국 인사불이익을 받고 대장 진급에서 탈락하게 된다.

1972 6 1일 제2군사령관직에서 물러남과 동시에 전역하였다.

외교관 활동

외교관 경력으로는 1972년 주스웨덴 대한민국 대사로 파견되어 1973년 주그리스 대사관 대사, 77년 주브라질 대사관 대사 등을 역임하였다.

박정희의 장기 집권을 반대해 군복을 벗고 대사로 나간 그에게 어느 기자가 서운한 감정은 없느냐고 묻자 채명신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1972년말부터 1980년까지 줄곧 해외 근무를 했는데, 박 대통령이 나한테는 참 잘해 주었어요. 아이들 학비에 보태라며 봉투도 자주 보내 박동진 외무 장관이 '청와대에서 웬 봉투를 그리 많이 보내느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외교관으로 활동하는 동안 박정희 대통령에 관련된 질문이 여러번 쏟아졌으나 모두 묵묵부답하였다. 1977 4, 주 브라질 대사에 임명되었고, 1979 10 26일 주브라질 대사로 재직 중 박정희의 서거 소식을 접했고, 1981 5월 주브라질대사를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났다.

정계 은퇴와 사망

이후 베트남 전쟁 참전 단체와 한국 전쟁 참전 단체 활동과 강연 활동 등을 다니며 참전용사의 복지와 보상을 위해 애써오다 2013 11 25일 강남세브란스병원에서 지병인 담낭암으로 향년 88세에 별세했다. 유언으로 자신을 국립묘지 장군 묘역이 아닌 서울현충원에 있는 베트남전 참전 사병 묘역에 안장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대한민국 국방부가 이에 대해 난색을 표했으나, 청와대가 나서서 사병 묘역 안장을 추진하였고, 결국 대한민국 정부와 대한민국 국방부는 그의 요청을 받아들여 육군장으로 채명신 장군의 장례를 치룬 이후에 국립서울현충원의 2번 사병 묘역에 입구 쪽의 남은 공간을 활용하여 묘역을 만들어 안장하였고, 묘역의 형태가 채명신 장군이 파월 장병들의 묘역을 이끌고 지휘를 하며 나서는 모양새가 되었다. 이후 10년 뒤 부인 문정인 여사도 별세하여 채명신 장군 묘역에 함께 합장을 하였고, 문정인 여사는 파월 장병들의 어머니가 되었다.

저서

베트남전쟁과 나(채명신 회고록) (팔복원, 2006) /사선을 넘고 넘어: 채명신 회고록(매일경제신문사(매경출판주식회사, 1994)

상훈 경력

태극무공훈장/화랑무공훈장/충무무공훈장(3)/을지무공훈장(2)/보국훈장 국선장/방위포장

1969 3월 미국 공로 훈장 /1969 5월 베트남 최고 훈장 /2001년 자랑스러운 세종인상

2005년 고려대학교 제3회 정책인대상/2006년 자랑스러운 육사인상

가족 관계

부인: 문정인(文貞仁, 이화여자대학교 졸업). 문명기의 손녀.오빠가 문태준이다. 대한의사협회장, 보건복지부장관, 국회의원을 지냈다자녀는 아들 하나 딸 둘.

의붓동생으로 채 모씨가 있다. 채씨는 채명신이 60년 넘게 숨겨온 또 다른 미담의 주인공이다. 채씨는 당시 육군 중령이던 채 장군이 1951년 초 강원도에서 유격부대 백골병단을 이끌며 생포한 조선노동당 제2 서서 겸 북한군 대남유격부대 총사령관(중장) 길원팔이 아들처럼 데리고 다녔던 전쟁고아였다. 길원팔은 전향 권유를 거부하고 채명신이 준 권총으로 자결했다. 그러면서 전쟁 중 부모 잃은 소년을 아들처럼 키워왔다. 저기 밖에 있으니 그 소년을 남조선에 데려가 공부시켜달라고 부탁했다.

적장(敵將)이지만 길원팔의 인간됨에 끌린 채 장군은 그러겠다고 약속하고 그 소년을 동생으로 호적에 입적시켰다. 이름도 새로 지어주고 총각 처지에 그를 손수 돌봤다. 소년은 채명신의 보살핌에 힘입어 서울대에 들어가 서울대 대학원에서 이학 석사·박사 학위를 받은 뒤 서울 유명 대학에서 교수를 지냈다. 채 교수는 10여 년 전 은퇴했다. 두 사람은 채명신이 숨질 때까지 우애 깊은 형제로 지내왔다고 한다. 채명신의 자녀들은 그를 삼촌으로, 채 교수의 자녀들은 채명신을 큰아버지라고 부른다.

평가

태권도 보급에 지대한 기여를 하였다는 평가도 있다. 태권도인 서성원은 '태권도 보급이 활황을 누린 것은 채명신 사령관의 역할이 컸다'고 평하였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제5대 교관단장을 지낸 김봉식은 "채명신 장군은 한국군의 위력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하고 전투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태권도 보급에 열성을 보였다. 월남 각지를 순회하며 태권도 시범을 펼쳐 민사심리전으로 적극 활용했다."고 증언하였다.

초대 태권도협회 회장 임명 배경

백준기는 1950년대 중반 최홍희가 오도관을 창설해 전 육군에 태권도를 보급할 때, 중앙심사위원으로 활약하면서 채명신과 두터운 관계를 쌓아 올렸다. 5.16 정국에서도 그는 감찰위원장실을 출입해 독대를 할 정도로 채명신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후에 백준기는 당시 채명신 감찰위원장을 왜 회장으로 추대했는가를 밝히기도 했다.

대한태수도협회가 어렵게 구성됐지만 당시 임원들은 사회적 명성과 지위가 없는 30대 초, 중반의 인사가 대부분이었어요. 그래서 협회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마땅한 인사를 찾던 차에 채명신 장군을 회장으로 추대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대한체육회 회장은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위원장인 이주일 준장이 맡는 등 사회 분위기상 태권도계도 군세를 업은 인사가 필요했습니다. 당시 감찰위원장의 위세는 서슬퍼런 군사집권 시절에서 대단한 것이었지요.

백준기는 이종우, 엄운규의 부탁을 받고, 곧장 감찰위원장실로 찾아가 채 장군을 독대했다.

태권도계 전후 사정을 얘기하면서 회장을 맡아줄 것을 부탁하자 채 장군은 호방하게 웃으며 즉각 승낙하더군요. 채 장군의 회장 수락 사실을 저는 재빨리 부회장에게 알렸고, 협회에서 공표에 붙여 일사불란하게 채 장군을 회장으로 추대한 것입니다.

월남에서의 태권도 보급과 홍보

채명신은 월남 참전 중 베트남 현지인과 원주민 등에게 태권도를 전파하였다. 그의 태권도 전수는 태권도 전수 이외에도 작전적인 목적도 겸하고 있었다.

월남에서의 작전 중 하나는 태권도 보급이었으며 태권도 교관단을 민간사절로 활용하여 한국군에 대한 강한 이미지를 제고하는데 노력하였다. 또한 민사심리전의 일환으로도 태권도를 적극 활용하였다. 파월 국군 교관단에 의한 태권도 보급 활동은 태권도를 국제화하고 세계화의 초석을 다지는 시발점이 되었다.

월남군 총사령관인 가오반 비엔 대장의 아들이 태권도를 수련하고 있었는데 자신의 아들이 태권도를 배우면서 자신감을 갖고 점차 나아지고 있다는 말과 함께 자신의 아들이 품행이 바르지 못한 학교친구와 말다툼을 하던 중 그들을 때려눕혔다고 자랑하였다. 그러자 채명신 장군은 싸움을 하라고 태권도를 가르친 것이 아닌데 태권도 5대 수칙을 무시한 채 싸움을 했으므로 한국 교관을 철수시키겠다고 하였다. 이에 가오반 비엔 대장이 사과를 하며 계속 태권도를 가르쳐줄 것을 부탁하였고 이 소문을 들은 많은 고위층 인사들이 자신의 자식에게도 태권도를 가르쳐줄 것을 요청하였다고 한다.

월남태권도협회 창립 지원

국군체육부대장 백준기 단장과 남베트남 육군 대장 가오반 비엔 등을 중심으로 월남태권도협회의 창립이 착수되었다. 그는 이들의 월남태권도협회 창립 준비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백준기 단장은 월남 태권도의 체계적인 보급과 자체관리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하여 반 반 쿠 월남국군체육학교장에게 월남 태권도 협회를 발족할 것을 권유했다.쿠 중령은 이에 찬성의 뜻을 표하며 구엔 반 티우 대통령의 승인을 위해 백준기 단장에게 건의를 부탁하게 되고 백준기 단장은 티우 대통령의 승인을 받도록 다각도로 월남의 고위층과 접촉한 결과, 승인을 얻게 되어 월남 태권도협회가 창립되었다.

월남 태권도협회는 쿠 체육학교장을 초대 협회장으로 하고 민간인 도장 관장을 실무 이사진으로 구성하여 월남 태권도의 조직적인 관리와 발전을 위한 기구로서 출발함으로써 한국의 태권도가 월남 국민들의 의식 속에 깊이 뿌리내리기 시작하였다.

채명신 사령관은 사이공에 태권도 도장을 건설하여 태권도 유단자인 탄 반롱에게 민간 도장의 개설을 지원하여 주었다.그 때 도장의 이름을 무엇으로 하느냐에 한국식으로 하자는 등으로 의견이 분분하였는데, 월남인에게는 물론 베트공에게도 거부감을 주지 않는 월남 역사상 존경받는 인물이나 상징적인 이름으로 지어야 한다는 채명신 사령관의 제의에 따라 1428년 레 왕조를 건설, 월남을 명나라로부터 독립국가로 형성한 레 호이 왕의 이름을 따서 레 호이 도장으로 명명하고 개관식은 주월한국 태권도협회 창립행사와 동시에 레 호이 도장에서 치르게 되었으며, 월남군 고위 장성 및 웨스트 모릴렌드(West Moreland) 미군 사령관도 참석하여 성대한 개관식을 가졌다. *출처 위키백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五一八光州民主化運動)

5·18 광주 민주화 운동(五一八光州民主化運動) 혹은 5·18 민주화 운동(五一八民主化運動), 광주민중항쟁(光州民衆抗爭)1980518일부터 528일까지 광주시민과 전라남도민이 중심이 되어, 조속한 민주 정부 수립,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의 퇴진 및 계엄령 철폐 등을 요구하며 전개한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이다.

당시 광주 시민은 신군부 세력이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실행한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인해 발생한 헌정 파괴·민주화 역행에 항거했으며, 신군부는 사전에 시위 진압 훈련을 받은 공수부대를 투입해 이를 폭력적으로 진압하여 수많은 시민이 희생되었다. 이후 무장한 시민군과 계엄군 사이에 지속적인 교전이 벌어져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대한민국 내 언론 통제로 독일 제1공영방송 ARD의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그 참상을 세계에 처음으로 알렸다.

1995년 자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제정으로 희생자에게 하는 보상 및 희생자 묘역 성역화가 이뤄졌고, 1997년에 '5.18민주화운동'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해 1997년부터 대한민국 정부 주관 기념사가 열렸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도 본 사건을 "광주인민봉기(光州人民蜂起)"로 부르며 해마다 기념하고 있다.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진 대표적인 영화로 꽃잎, 화려한 휴가, 26, 택시운전사등이 있으며, 20115월에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정식으로 등재되었다.

 

대한 독립군 大韓 獨立軍

한국의 독립운동, 삼둔자 전투,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에 참전

대한독립군의 사령관 홍범도 / 대한독립군의 사령관 홍범도 /활동기간 1919~ 19216

이념:한국 민족주의 /지도자: 사령관 홍범도 /부사령관 주건 참모장 박경철 /활동지역 만주

병력:600 1400

참여한 전투: 삼둔자 전투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Korean Independence Army)1919년 홍범도(洪範圖)가 의병 출신을 중심으로 창설한 항일 독립군 부대로 간도국민회와 연합하여 활발한 국내진공작전을 펼쳤으며,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의 승리에 크게 기여하였다.

창설

3·1 운동 이후 홍범도(洪範圖)를 사령관으로 하여 부사령관 주건(朱建), 참모장 박경철(朴景哲)로 창설되었다.

홍범도 장군은 을미사변 이후 경기, 강원지방 등에서 일본군 10명을 사살하거나 의병부대를 조직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이후 1897년까지 의병활동을 이어나가다 1907년 북청군 안산사 노은리에 거주하며 생계를 이어나갔다. 간간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19193·1 운동이 일어나자 당시 참여하여 활동하고 있던 노령 대한국민의회의 군무부와 상의하여 그 해 8월 간도에서 독립군 병사들을 추가 모집하여 부대를 설립했다.

대한 독립군이란 명칭은 정식명칭은 아니나 19198월 초 연해주 지역을 출발할 때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대한 독립군은 19198월 말 동간도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병사와 무기·재원을 계속 보강하였고, 19199월 초에는 구춘선이 이끄는 간도대한국민회의 재정적·인적 지원을 받아 대한독립군을 편성한 뒤, 본격적으로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다. 초기 대한독립군은 3개 중대에 약 300여 명의 병력, 소총 200여 정과 권총 약 30정의 화력으로 시작했으나 이후 병사들을 계속 징집·모집하고 타 독립군부대들과 연합하며 부대 규모가 커지고 체제와 장비도 상당한 수준으로 정비되었다.

주요 활동 

삼둔자 전투

1920 6 4일 박승길(朴承吉)이 지휘한 대한신민단 소속의 독립군 부대가 함경북도 종성군(鐘城郡) 강양동(江陽洞)에 진입해 일본군 순찰소대를 기습하고 유인하자, 일본군 남양수비대가 출동하였다. 독립군은 삼둔자 서남쪽 야산 요지에 잠복하였다가 이들을 공격하여 섬멸시켜 버렸다. 크게 봉오동 전투와 하나로 보기도 한다.

봉오동 전투

1920 6 6일 부터 6 7일까지 벌어진 대한독립군과 최진동, 안무 등이 이끄는 독립군 부대의 연합군과 일본군 사이의 대규모 전투였다. 일본군은 아스카와 소좌가 이끄는 월강추격대를 편성하여 당시 독립군의 근거지였던 봉오동으로 진격했다. 대한 독립군을 중심으로한 독립군 연합 부대는봉오동 골짜기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기습을 통해 승리를 거두었다. 일본군측 피해는 전사 157, 부상 300명이고, 독립군측 피해는 전사 4, 부상 2명이었다. 이는 임정 군무부가 이 전투를 '독립전쟁의 제1회전'이라고 선언할 정도로 압도적인 승리였다. 일본군은 그동안 독립군을 언제든 진압할 수 있는 민병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참패를 계기로 독립군이 식민통치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라 판단, 독립군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후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독립군 공격에 나섰다. 이에 대한 독립군은 청산리로 옮겨 북로군정서와 연합하게된다.

7 11일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노두구에서 간도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여 일본 영사관 경찰대와 교전하여 다수의 부상자를 내고 승리하였다. 이는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이에 일제는 중국에 압력을 넣어 일방적으로 약2개월 동안 주둔하겠다고 통고하고는 1 5천여 명 규모의 일본군대를 두만강 너머에 배치했다. 나남주둔군, 용산주둔군, 시베리아주둔군을 묶어 편성한 부대였다.

청산리 대첩

청산리 부근으로 근거지를 옮긴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과 대한 독립군이 연합을 하여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한 전투이다. 북로군정서는 본래 길림성 왕청현 서대파구(西大波溝) 산간지대에 있었는데, 일제의 압력에 못 이긴 중국 관청에서 떠나라고 강요하자 청산리로 이동하게 되었다. 1920 10 21일부터 26일까지 약 1주일간 일본군과 백운평 전투, 완루구 전투, 갑산촌 전투 등 10여 차례의 접전 끝에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독립군 연합의 전력은 약 1,950명이고, 일본군의 전력은 2 9천에서 4만 명 정도 안팎이라고 알려져 있다. 10 16일경에 홍범도, 안무 연합부대는 다시 북상하여 어랑촌으로 행군, 그 곳에서 일본군과의 회전을 준비하면서 매일 군사훈련을 강화하고 있었다. 10 18일경 다수의 독립군 부대가 집결하였다. 김좌진부대는 계속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하면서 뒤로 물러서기를 주저했으며, 물러선다 하더라도 일본군의 추적을 따돌릴 수 없다고 보고, 일본군과 일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하였다. 1920 10 21일 오후, 일본군이 이도구에 있는 홍범도 부대를 포위해 들어왔다. 이에 독립군은 10 22일 새벽까지 완강한 항전을 벌였다. 홍범도부대는 한때 남북으로 협공하는 일본군의 포위 속에 빠졌으나 재빨리 빠져나왔다. 일본군들은 앞뒤를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자기네들끼리 총을 쏘아대기도 하면서 허둥댔다. 끝내 홍범도 부대는 일본군 4백여 명을 사살하고 또 한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중앙으로 진격한 일본군의 한 부대를 집중 공격, 결과적으로 일본군의 다른 부대와 함께 중앙의 일본군을 협공하는 데 성공하였다. 일본군측 피해는 전사 500, 부상 3,300명이고, 독립군측 피해는 전사 60, 부상 90명이었다.

청산리전투에서 크게 패하면서 일본군은 그 보복으로 한국인 사회·항일단체·학교·교회 등을 초토화하였는데 이를 간도참변(間島慘變), 또는 경신참변이라 한다. 이후, 700여 명의 독립군 통합부대는 일본군 간도토벌대와 격전을 치르면서 1921 1월 하순 우수리강을 건너 러시아령 이만을 거쳐 자유시(스보보드니, 러시아어: Свобо́дный)로 들어갔다. 이 시기 연해주 각지의 한인 무장부대와 간도 독립군은 자유시 일대로 집결하고 있었다. 각지에 흩어져 있던 한인 부대를 통합하고 볼셰비키 정부의 지원을 받음으로써 항일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결한 한인 부대의 통솔권을 둘러싸고 지도부간에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졌다.

6 28일 군정의회 지도부는 완강한 대치상태에 있던 대한의용군의 무장해제를 결정하였다. 장갑차 등 중화기까지 동원한 고려혁명군은 대한의용군이 주둔한 자유시 부근의 수라세프카 일대를 포위한 채 대규모 공격을 가하여 쌍방간의 대충돌이 발생하였다. 자유시 참변, 또는 자유시 사변으로 불린 이 같은 한인 무장세력 간의 분쟁으로 사상자가 속출하고, 대한의용군 부대는 사방으로 흩어짐에 따라 독립군의 투쟁역량이 크게 훼손되었다. 자유시사변 이후 한인무장세력은 러시아 공산당의 강력한 통제로 인하여 활동에 많은 제약이 가해졌고, 홍범도 장군이 1937 9월 스탈린에 의한 한인 강제 이주정책에 따라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하는 등 수뇌부가 대거 떠나게 되며 사실상 대한 독립군은 해체되게 되었다.

평가

대한독립군은 수적, 전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을 상대로 두차례나 큰 전투에서 승리하여 항일무장투쟁에 큰 원동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다. 봉오동 전투 승리를 계기로 만주 각지에서 독립군 부대가 일어났고, 독립군에 대한 금전적, 물질적인 지원도 대거 늘어났다.

대한독립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주요한 이유가 몇가지 있다. 첫째로 홍범도 장군의 산포수대의 경험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산포수는 잘 갖춘 조직을 통해 사냥을 한다. 대한독립군이 빠르게 군조직의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산포수대의 경험이 가장 큰 자산이었다. 특히 산을 무대로 활동했던 산포수이기 때문에 함경도 산악지대의 특성을 숙지하고 있어 일본군보다 지형을 이용한 전투에 능숙했다. 둘째, 지역민과의 소통이 가능한 부대였다. 대한독립군은 민중들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는 의병부대였다. 대한독립군 부대가 일본 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민중의 지지와 성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장

대한독립군은 자체적인 총기 제조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체코 등 외국에서 총기를 수입하거나일본군의 총기를 노획해 쓸 수밖에 없었다. 총기 1정 당 현재 가치로 대략 210만원에서 650만원 정도였다고 한다. 대한독립군은 1919년 겨울 간도의 대한국민회 산하로 들어가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 병사들을 증원해 병력이 600명이 되었으며, 1920년초 당시 병력 약 3백 명에 군총 약 2백 정, 권총 약 40, 탄약은 총 1정당 2백 발의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대한 독립군이 사용한 무기

소총 38식 보병총 일본 /소총 게베어 98 독일 /소총 모신나강 러시아 제국/소총 스프링필드 소총 미국/권총 남부 14년식 권총 일본/권총 마우저 리볼버 독일/권총 마우저 자동권총 독일/권총 엔필드 리볼버 영국/기관총 맥심 기관총 영국/기관총 루이스 기관총 영국/기관총 96/99식 경기관총/ *출처 위키백과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영어: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1919년 발표된 3·1 독립선언서 및 3·1 운동에 기초하여 일본 제국의 대한제국 침탈과 식민 통치를 부인하고 한반도 내외의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대한민국의 망명정부이다. 간략히 임정이라고 한다. 1919 4 11일 중화민국 상하이시에서 수립되었고, 1948 8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해산하였다.

1919 3.1 운동 직후 대한국민의회, 상해 임시정부, 한성정부 등 각지에 임시정부가 수립된 뒤, 같은 해 9 11일 한성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원칙하에 상하이를 거점으로 대한국민의회, 상해 임시정부, 한성정부 등 국내외 7개의 임시정부들이 개헌형식으로 통합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개편되었다. 이때 4 11일 제정된 대한민국 임시 헌장의 내용을 대폭 보강하여 9 11일 대한민국 임시 헌법을 제정하여 국호는 '대한민국', 정치 체제는 '민주공화국'으로 하고, 대통령제를 도입하고, 입법·행정·사법의 3권 분리 제도를 확립하였으며, 대한제국의 영토를 계승하고 구 황실을 우대한다고 명시하였다.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었고, 이후 김구, 이승만, 박은식 등이 임정의 수반을 거쳤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제강점기에는 윤봉길 의거 지휘, 한국 광복군 조직, 임정 승인을 위한 외교 등 다방면으로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전개·지원하였고, 중화민국, 소련, 프랑스, 영국, 미국 등으로부터 경제적·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광복 후 미군정기에는 김구를 중심으로 정 법통 운동을 주도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가리켜 상해 림시정부라 불렀다.

1948 7 17일 제정된 제헌 헌법에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라고 명시되었고,제헌 국회 의장 이승만은 국회개원식 축사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의 임정 계승을 확실히 밝혔다. 1948 8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해산하였다. 임정 초대 대통령이자 마지막 주석이었던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정병주(鄭柄宙) 장군

정병주(鄭柄宙, 1926 10 6일~1989 3 4일)는 대한민국의 군인 겸 정치인이다. 본관은 봉화(奉化)이고 경상북도 영주에서 출생하였으며, 육군 제11사단장·육군 특전사령관 등을 지낸 그는 한때 1974년에는 잠시 4개월 동안을 육군 소장 계급의 신분으로 잠시 대통령 경호실 차장을 역임했다. 그는 조선 왕조 민본주의 비주권 군주제 국가 건국의 일등공신이었던 삼봉 정도전(三峯 鄭道傳)의 방계 후손이다

신상정보

출생일 1926106/출생지:일제강점기 조선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면 /거주지:대한민국 경기도 양주군 남면 신산리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은평구 녹번동 /사망일 198934(62) /사망지:대한민국 경기도 의정부시 /학력: 육군포병학교 /경력:육군 제1연대 소대장.육군 제6사단 참모장.육군 제6군단 참모장.육군 특전사령부 제1공수특전여단장.육군 제12사단장.육군 제11사단장 /정당 무소속 /본관:봉화(奉化) /배우자: 강남희 /자녀:31/종교:천주교(세례명: 요아킴) /묘소:국립서울현충원 장군 묘역

군사 경력

복무:대한민국 육군 /복무기간:19503~1980120/근무:육군 특전사령부 /최종계급: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소장 /지휘:육군 특전사령부 사령관 /주요 참전: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생애 / 5·16 군사정변 시기 비협조

경상북도 영주군에서 출생하였다. 1949년에 육군사관학교 9기로 입학하여 19503, 졸업하였고 그 해 625,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육군 제1연대 소대장이라는 신분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 군인으로서 정도를 걸은 참다운 군인으로, 5·16 군사정변 당시에는 쿠데타 세력에게 비협조하다가 체포되어 서울 경복궁 경회루 기둥에 묶여 있다가 영창에 가기도 했다.

12·12 군사 반란의 특전사 진압군

그 훗날 1964312일부터 1965123일까지 19개월 동안 육군 제6사단 참모장 재직을 하였고 해당 육군 제6사단 참모장 재직 시절이던 1965422, 육군 준장으로 진급한 그는 훗날 1965123일부터 1966114일까지 한달 동안의 국방부 운영차관보를 지내다가 후일 1966114일부터 196788일까지 17개월 동안 육군 제6군단 참모장을 지냈었던 그는, 이후 196788일에 육군 제1공수여단장 보임을 시작으로 특전사와 인연을 맺었으며 그로부터 2년 후 1969818일에 육군 특전사령부(특전사)가 전격적으로 성립(개편)됨과 동시에 육군 특전사령부 예하 제1공수특전여단장 보임되었고 197148일까지 해당 여단장으로 재임을 한 이후 197148일을 기하여 육군 제12사단장 보임과 아울러 육군 소장 계급으로 승진과 동시에 1972412일까지 1년 동안을 육군 제12사단장 재임 후 1972412일부터 1974826일까지 24개월 동안 육군 제11사단장 재임하였으며 1974826일부터 19741210일까지 4개월여 남짓 동안 대통령 경호실 차장 직책으로 있다가 같은 해인 19741210일을 기하여 육군 특전사령부의 사령관으로 임명됐다. 1979년 전두환이 12·12 군사 반란을 일으키자 장태완 육군 수도경비사령관과 함께 같이 아울러 전두환의 군사반란을 막아보려 했지만, 정병주 사령관 그 자신이 준장 진급에 가급적으로 각기각기 각별히 도움을 준 여단장 최세창과 여단장 박희도한테 배신되었다. 정병주는 전두환의 군사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직속 부하들에 의해 총격을 받아 부상을 입었으며 사령관 정병주 장군 그를 보호하려던 육군 특전사령관 전속부관 출신의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도 쿠데타군의 흉탄에 맞아 숨졌다.

예편과 타살 의혹이 있는 자살

1980120, 정병주는 결국 현역부적합 처리되어 육군 소장으로 강제 예편되었다. 이후 정병주는 전두환이 일으킨 12·12 군사 반란에 대한 부당성을 주장하다가 1989년에 목매달아 숨진 채 변사체로 발견됐다. 군 당국에 의해 자살로 처리되었지만 정병주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는 점에서 자살이 아닌 타살이라는 의혹이 있다. 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도 정병주의 죽음에 대해 논란을 제기했다.

죽기 전에 남긴 당부

198934일 당시 경기도 의정부 인근 야산에서 백골의 사체[5] 등이 발견되는데, 그는 결국 생전의 마지막으로 장태완(전직 육군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및 예비역 육군 소장)과는 죽기 이틀 전에 만나서 함께 보양식(염소고깃탕국)을 같이 먹으며 장 장군, 우리 일행들은, 저놈들 차라리 끝장 가는 꼬락서니 보는 것을, 우리 같이 함께 보고 죽자라고 말했다고 한다.

학력

1945년 경상북도 안동농림학교 졸업

1950년 육군사관학교 9

1952년 육군보병학교 졸업

1956년 육군기갑학교 졸업

1957년 육군공병학교 졸업

1958년 육군포병학교 졸업

가계

배우자 : 강남희(姜南熙, 1934 ~ ) 출처 위키백과

김대중(金大中) 대통령

김대중(金大中, 192416~2009818)은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이다. 군부 정권의 위협으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김영삼과 함께 오랫동안 민주 진영의 지도자로 활동하며 군사 정권에 항거하였다. 이후 대통령에 당선되어 직선제 및 민간 정부 출범 이후 최초의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에서 태어났다. 5대 민의원을 거쳐 제6·7·8·13·14대 국회의원(6선 의원)을 지냈으며 15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대통령 재임중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김대중은 군부 정권으로부터 납치와 가택연금, 투옥 등의 여러 탄압을 받았다. 19876월 민주 항쟁 이후에는 통일민주당의 상임고문으로 활동하며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구성해 이른바 민주 진영을 구축하였다.인권 향상과 남북 관계의 진전에 기여한 공로로 2000년 임기 중에 한국인 역사상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2000년 노르웨이 라프토(Rafto) 인권상, 1998년 무궁화 대훈장, 1998년 국제인권연맹 인권상, 1999년 미국 필라델피아 자유의 메달 북미주 한국인권연합 인권상, 미국 조지 미니(George Meany) 인권상, 브루노 크라이스키(Bruno Kreisky) 인권상을 수상하였다.연설에 능하였으며,] 국회에서 가장 오래 연설한 기록으로 기네스북 증서를 받았다.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온갖 풍상(風霜)을 참고 이겨내는 인동초(忍冬草)로 비유되어 불리기도 하였다

이휘호(李姬鎬) 영부인

이희호(李姬鎬, 1922921~2019610)는 대한민국의 제15대 영부인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대한민국의 제15대 영부인 / 임기 1998 2 25~2003 2 24

신상정보

출생일 1922 9 21일 / 출생지 일제강점기 경기도 경성부 수송정 / 사망일 2019 6 10(96) / 사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세브란스 병원 / 학력 서울대학교 교육학 학사 /스카릿 대학교 대학원 사회학 석사 /소속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 /본관 전주 /부모 아버지 이용기, 어머니 이순이 /배우자 김대중 /자녀 김홍걸 /종교 개신교(감리교)

묘소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 국립서울현충원.

생애

1922 9 21일 경성부 수송정에서 아버지 이용기와 어머니 이순이의 딸로 태어났다. 이용기는 한국 의사 면허 4호 의사로 남원도립병원장, 포천도립병원장 등을 역임하였다어머니 이순이는 한의사 집안의 딸이었다. 오빠 세 명과 여동생 한 명, 남동생 세 명을 두었다

이화고등여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46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으나 2학년 때 교육학과로 전과하여 수학한 후 1950년 교육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해에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피난살이의 와중에도 이태영, 김정례 등 1세대 여성운동가들과 함께 대한여자청년단(1950), 여성문제연구원(1952) 등을 잇따라 창설해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1951년 부산 피난 시절 모임에서 이희호는 해운회사 사장 김대중을 처음 만났다. 미 공군에 근무하던 감리교 크로 목사의 주선으로 1954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이희호는 대한여자청년단 간부 김정례를 통해 김대중을 처음 만났는데, 김정례는 1·4 후퇴 때 서울의 피란민들을 배로 후송하려고 인천으로 데리고 갔고 거기서 피란민을 싣고 갈 배의 주인이 김대중이었다. 김정례는 김대중에게 피란민들을 부탁하고 부산에 오게 되면 한번 만나자고 했고 뒤에 부산으로 사업 거점을 옮긴 김대중은 김정례를 찾았는데, 김정례는 김대중과 만나는 자리에 대한여자청년단 간부들과 함께 나왔고 그 간부들 중에 이희호가 있었다.

서울의 대학생 모임이었던 '면학동지회' 1951년 피란지 부산에서 다시 모였는데 33명으로 시작한 면학동지회는 전쟁이 나는 바람에 후속 회원을 뽑지 못했고 대다수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었기 때문에 '면학동지회'는 이름을 '면우회'로 고치고 외부인도 받아들였다. 면우회는 한 달에 한번씩 모였고 김대중은 면우회가 외부인에게도 개방하면서 면우회에 들어올 수 있었다. 한 달에 한번씩 열린 그 모임에서 이희호와 김대중은 시국, 인생 등에 대해 토론하며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았다.

미국 램버스 대학교(1954~1956)에서 사회학 학사 학위를 취득한 후 스카릿 대학교 대학원(1956~1958)에서 사회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58년 미국에서 귀국 한 후 이화여자대학교 사회사업학과 강사가 되었고 여성문제연구원 간사, YWCA 총무,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이사 직 등을 역임하였다.

미국 유학을 다녀와 YWCA 총무로 일하며 여성계 지도자로 자리잡아가고 있던 시점인 1962 5 41세의 나이로 39세의 정치 낭인 김대중과 결혼(초혼)하였고 다음 해인 1963 11월에 아들 김홍걸을 낳았다. 이희호는 감리교인이었고 김대중은 천주교인이었지만 서로의 신앙을 존중하는 관계였다. 이희호는 김대중이 선거에서 여러 번 떨어지고 가산도 탕진한 인물이었지만 민주주의와 통일에 대한 신념을 높이 평가하여 배우자로 선택하였다.

이후 김대중의 정치 활동을 돕는 한편 공덕귀, 이우정 등과 함께 민주화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80년 김대중이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자 옥바라지를 하였고 그 때 주고받은 편지가 후에 책으로 출판되었다. *출처: 위키백과

좋은 학벌과 왕성한 사회 활동을 통해 형성된 이희호의 재야·여성계·학계·기독교계 인맥은 고졸 출신 김대중의 정치 활동에 큰 힘이 되었다. 유학 시절 쌓은 영어 실력과 영문 타자 솜씨, 서구식 매너 또한 정치 활동의 자산이었다. 이희호는 김대중이 곤경에 처할 때마다 세계 각지의 유력인사들에게 유려하고 호소력 짙은 편지를 보내 구명 운동을 펼쳤고 김대중의 미국 망명 생활에도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1997 12월에 김대중이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1998 2 25일부터 2003 2 24일까지 청와대에서 생활하였다. 김대중 정부에서 대한민국 최초로 행정부에 여성부가 설치되는 데 역할을 하였다.

2002 5월 유엔 의장국 대한민국의 대표로서 유엔 총회에 참석하였는데, 김대중을 대신해 참석한 이 총회에서 의장으로서 회의를 주재하고 기조연설을 한 최초의 여성이었다.

2009 11월에 자서전 동행을 발간하였다.

2019 6 10 23 37분에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세브란스 병원에서 향년 98세를 일기로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장례는 4일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6 14일에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남편 김대중 전 대통령 곁에 안장되었다.

이희호는 별세하기 전 유언을 통해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 국민을 위해,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밝혔다. 생전에 변호사가 입회한 가운데 세아들의 동의를 받아 유언장을 작성했다고 김대중 평화센터 김성재 상임이사가 6 11일 발표문을 통해 공개했다. 이어 "우리 국민들께서 남편 김대중 대통령과 저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다" "우리 국민들이 서로 사랑하고 화합해 행복한 삶을 사시기를 바란다"고 기원하며 "동교동 사저를 '대통령 사저 기념관'(가칭)으로 사용하도록 하고 노벨평화상 상금은 대통령 기념사업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하라"고 유언했다.

김오랑(金五郞) 중령

출생일 194445일 / 출생지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김해군 김해읍 /사망일 19791213(35) /사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강동구 /본관 김해(金海)/배우자 백영옥(1948~ 1991) /복무 대한민국 육군 /복무기간 1969~ 1979년 /근무 특수전사령부 /최종계급 중령(中領) /주요 참전:베트남 전쟁 /서훈:2014. 4. 보국훈장 삼일장 추서 /김오랑(金五郞, 194445~ 19791213)은 대한민국의 군인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12.12 군사 반란 중 순국하였다. 정부는 20141월 보국훈장 삼일장을 추서하였다.

생애

1944년 경상남도 김해군 김해읍에서 태어났다. 김해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5년 육군사관학교 25기로 입학, 1969년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하였다. 초임지는 제2보병사단 수색대 소대장이다. 이후, 맹호부대 소속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1974년 육군 특전사령부 제3공수특전여단 중대장을 시작으로 특전사 작전장교, 정보장교를 역임 후 육군대학에 입교하여 교육을 받고 졸업하였다. 졸업 후 특전사 제5공수특전여단 중대장에 보임되었으나, 1979년 육군 특전사령관 정병주 장군의 비서실장으로 발탁되었다.

197912.12 군사 반란 때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하기 위해 사령부에 들어온 신군부 측 군인들에 의해 사살되었다.

19802월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으며 1990년 부인 백영옥 여사의 노력으로 중령으로 특진 추서되었다.

김오랑 중령의 시각장애인 부인 백영옥 여사(1948.11.27~1991.06.28)는 생전 199012월 당시 대통령이었던 노태우를 비롯하여 전두환, 최세창, 박종규 등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진행하다가 1991628일 부산 영도의 자택 3층건물 난간에서 실족사하였다.

김오랑 중령의 군인 정신을 기리기 위해 17대 국회에서는 안영근 의원이, 18대 국회에서는 김 중령의 고향 김해 지역구 김정권 의원이 "김오랑 중령 무공훈장 추서 및 추모비 건립 건의안"을 발의하였으며, 2013년 민주당 민홍철(김해 갑)의원이 다시 발의하여 동년 422일 통과되었다

201466일 경상남도 김해시 삼정동 김해삼성초등학교와 삼정중학교 사이의 산책로 옆 잔디밭에 김오랑 중령의 흉상이 세워졌다.

학력

김해삼성국민학교 졸업 /김해중학교 졸업/김해농업고등학교 졸업/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25기 학사 졸업/대한민국 육군보병학교 졸업/대한민국 육군공병학교 졸업/대한민국 육군포병학교 졸업 /대한민국 육군대학 졸업

가족 관계

부인 : 백영옥(白榮玉, 19481127(음력 1027) ~ 1991628)

백수린이라는 가명으로 출간되어있는 자서전에는 1948년 음력 1027일 태어났다고 나와있으며 그날 친정 어머님이 생신이셔서 미역국을 끓이고 본인(백영옥)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출처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