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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한국 현대사의 현장을 드러내는 ‘감수성의 고고학’
작가 16인의 소설 110여 편으로 포착해낸 ‘서울 신드롬’
서울은 ‘공룡’이자 블랙홀이다. 정치 경제 문화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지방에 비해 압도적 비중을 과시하는 공룡이자 대한민국의 인구, 자본, 정보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다. 서울은 눈부시다. 불과 20여 년 만에 휘황찬란하게 변한 강남의 변화가 대표적이다. 3년만 외국에 갔다 와도 살던 동네를 못 찾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한편 서울은 눈물겹다. 하늘을 찌를 듯한 고층 빌딩의 그림자 뒤에는 쪽방촌이 함께하고, 세입자들의 고된 분투가 존재한다.
지은이는 현재 서울의 도시 경관, 시민들의 삶과 욕망이 1960~70년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보았다. 1966년 이후 경제성장과 도시개발이 본격화되면서 과거와의 ‘단절’과 ‘망각’, 이를 바탕으로 한 빠르고 항상적인 변화가 어지럽게 진행되었다는 설명이다. 강북의 도심 재개발, 판자촌 철거, 신개척지 강남의 개발 등이 그렇게 이루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은 자기성찰 없이 근대화에 매진해온 한국 현대사의 현장이자, 주택, 교육, 청년, 취업, 여성의 권리 등 현재의 첨예한 문제가 집약된 축도縮圖라 할 수 있다. 지은이는 서울이 현대도시로 탄생하는 역사적 과정을, 문학이라는 탐침探針을 이용해 촘촘하게 파헤쳤다. 그렇게 현대성을 향한 지향, 발전주의 이데올로기, 일상과 문화의 아메리카니즘, 그리고 공적 폭력이 뒤얽힌 서울의 ‘변신’에 대한 흥미롭고도 생생한 풍경화가 우리 앞에 펼쳐진다. 진지한 독자라면 거의 모든 페이지에서 밑줄 긋는 구절이 생길 만큼.
작가 16인의 소설 110여 편으로 포착해낸 ‘서울 신드롬’
서울은 ‘공룡’이자 블랙홀이다. 정치 경제 문화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지방에 비해 압도적 비중을 과시하는 공룡이자 대한민국의 인구, 자본, 정보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다. 서울은 눈부시다. 불과 20여 년 만에 휘황찬란하게 변한 강남의 변화가 대표적이다. 3년만 외국에 갔다 와도 살던 동네를 못 찾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한편 서울은 눈물겹다. 하늘을 찌를 듯한 고층 빌딩의 그림자 뒤에는 쪽방촌이 함께하고, 세입자들의 고된 분투가 존재한다.
지은이는 현재 서울의 도시 경관, 시민들의 삶과 욕망이 1960~70년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보았다. 1966년 이후 경제성장과 도시개발이 본격화되면서 과거와의 ‘단절’과 ‘망각’, 이를 바탕으로 한 빠르고 항상적인 변화가 어지럽게 진행되었다는 설명이다. 강북의 도심 재개발, 판자촌 철거, 신개척지 강남의 개발 등이 그렇게 이루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은 자기성찰 없이 근대화에 매진해온 한국 현대사의 현장이자, 주택, 교육, 청년, 취업, 여성의 권리 등 현재의 첨예한 문제가 집약된 축도縮圖라 할 수 있다. 지은이는 서울이 현대도시로 탄생하는 역사적 과정을, 문학이라는 탐침探針을 이용해 촘촘하게 파헤쳤다. 그렇게 현대성을 향한 지향, 발전주의 이데올로기, 일상과 문화의 아메리카니즘, 그리고 공적 폭력이 뒤얽힌 서울의 ‘변신’에 대한 흥미롭고도 생생한 풍경화가 우리 앞에 펼쳐진다. 진지한 독자라면 거의 모든 페이지에서 밑줄 긋는 구절이 생길 만큼.
목차
책을 내며
프롤로그
1부 서울, 욕망의 집결지가 되다(1961~1966)
01장_서울, 메트로폴리스의 물적 기틀을 마련하다
서울 행정구역의 확대와 법령의 정비|서울의 상상적 경계: 도심과 ‘문안’|식민지의 기억 또는 경성 일본인 거주지의 흔적|점이적 도시: 주거지와 상공업 지역의 혼재
02장_서울이라는 새로운 고향
서울의 인구 증가, 이촌향도의 흐름|전도된 노스탤지어, 서울을 향한 향수병|“서울에 가고 싶어요, 단지 그거뿐예요”|서울 사람의 표식, 서울말|‘60년대식 서울내기’의 실망스러운 정체|적자생존의 혼란과 탐욕의 소용돌이|이주민을 위한, 이주민에 의한, 이주민의 도시
03장_서울 환상곡, 자유와 해방을 꿈꾸다
서울에 가고 싶은 이유|남성들의 판타지, ‘종삼’의 위안|엄숙주의로부터의 해방, 남성들만의 자유|문화적 갈증, 고전음악다방|도시여성에 대한 선망과 판타지|가난한 서울, 부서지는 환상들
04장_도시 난민, 판자촌과 골방에서 절망하다
공영주택과 집단주택의 전성기|집 없는 사람들, 거듭된 이사|서울 하늘 아래 “지상의 방 한칸”|판자촌 만들기와 허물기|빈민촌과 판잣집 쪽방의 신음|서울 안의 고향, 빈민촌과 서민동네
05장_서울의 변화를 예감하고 애착을 느끼기 시작하다
서울 밤거리의 산책자|뜨겁고 역동적인 도시 서울의 발견|서울은 아무리 더러운 서울이라도 좋다|개발의 예감과 서울의 민낯
2부 서울, 개발의 시대를 맞이하다(1966~1972)
01장_도로와 교통체계가 개편되다
자본의 성장으로 들썩이는 서울|불도저 시장의 등장과 도시 공간의 변화|기억 속으로 사라진 전차|버스와 자동차 중심 도시의 탄생
02장_중심과 주변부가 위계화되다
광화문 전성시대|도심의 고층화|서울에서 사라진 것과 없는 것에 대한 구보 씨의 단상|십 년의 변화, “어질머리”에 적응하기|이국적 경관의 무장소성과 혼종성|서양식 양옥집이라는 황무지
03장_도시 공간이 분화되고 위계화되다
서울 변두리의 팽창과 광역화|한옥 주택가의 안정감|불안한 전세방과 계급의식의 발아|배제의 공포, 탈락의 위기감|환영받지 못한 자의 절망감|도시개발에서 밀려나는 사람들
04장_개발의 불도저, 파국을 맞이하다
그래도 지속되는 변두리의 삶|철거민 집단이주와 판잣집 양성화|시민아파트 건설이라는 속임수|아파트 거주자의 성찰|와우아파트 붕괴와 정인숙 피살사건|철거민들의 집단 난민촌|광주대단지사건의 발생|광주대단지 빈민들의 고통|죽어야 말할 수 있는 사람들|살아남은 자의 죄책감
05장_야간 통행금지, 도시의 시간을 규율하다
야간 통행금지와 도시 공간의 특권화|밤이 사라진 한국소설의 비애|우리를 슬프게 하는 야간 통행금지
3부 서울, 강남 개발과 중산층의 시대가 도래하다(1972~1978)
01장_신개척지 강남이 부상하기 시작하다
강남 개발을 위한 초석들|강남 가서 땅을 사면 돈을 번다, 소문과 예감|내가 만약 그때 강남에 땅을 샀더라면|개발의 광기, 폭력의 예감, 에틴저 마을
02장_강남, 서울의 지형도를 바꾸다
부동산 투기의 대중화|황무지에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경제적 공간 감각의 확산|복부인, 똑똑한 여성들의 슬픈 초상|교육과 명문학교, 8학군의 기원|‘위생’의 지리적 분할선, 한강
03장_아파트와 중산층의 시대가 열리다
도시 중산층의 등장|중산층 아파트와 서민층 아파트|젊은 세대가 선호하는 아파트와 현대적 생활|아파트의 삶, 유행과 모방|아파트, 소외와 획일성의 불모지|강남의 새로운 도시 경관|강남의 이질감과 차별화
04장_안과 밖의 위계화, 계급 갈등이 대두하다
공간의 다층적·적대적 위계화와 철거민|철거민 ‘난장이’가족이 목격한 서울|증오가 가른 도시, 계급투쟁의 장|구 동네와 새동네, 빈민과 중산층의 분리|위성도시의 원주민, 철거민, 이주민의 위계화|가난과 종속의 도시에 사는 부끄러움
05장_서울 사람, 완전히 도시인이 되다
과거가 지워지는 도시, 왕십리의 추억|발전도 퇴보도 아닌 변화: 익숙한 곳에서 길을 잃다|환상이 되어버린 고향|“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에필로그
참고문헌
주석
찾아보기
프롤로그
1부 서울, 욕망의 집결지가 되다(1961~1966)
01장_서울, 메트로폴리스의 물적 기틀을 마련하다
서울 행정구역의 확대와 법령의 정비|서울의 상상적 경계: 도심과 ‘문안’|식민지의 기억 또는 경성 일본인 거주지의 흔적|점이적 도시: 주거지와 상공업 지역의 혼재
02장_서울이라는 새로운 고향
서울의 인구 증가, 이촌향도의 흐름|전도된 노스탤지어, 서울을 향한 향수병|“서울에 가고 싶어요, 단지 그거뿐예요”|서울 사람의 표식, 서울말|‘60년대식 서울내기’의 실망스러운 정체|적자생존의 혼란과 탐욕의 소용돌이|이주민을 위한, 이주민에 의한, 이주민의 도시
03장_서울 환상곡, 자유와 해방을 꿈꾸다
서울에 가고 싶은 이유|남성들의 판타지, ‘종삼’의 위안|엄숙주의로부터의 해방, 남성들만의 자유|문화적 갈증, 고전음악다방|도시여성에 대한 선망과 판타지|가난한 서울, 부서지는 환상들
04장_도시 난민, 판자촌과 골방에서 절망하다
공영주택과 집단주택의 전성기|집 없는 사람들, 거듭된 이사|서울 하늘 아래 “지상의 방 한칸”|판자촌 만들기와 허물기|빈민촌과 판잣집 쪽방의 신음|서울 안의 고향, 빈민촌과 서민동네
05장_서울의 변화를 예감하고 애착을 느끼기 시작하다
서울 밤거리의 산책자|뜨겁고 역동적인 도시 서울의 발견|서울은 아무리 더러운 서울이라도 좋다|개발의 예감과 서울의 민낯
2부 서울, 개발의 시대를 맞이하다(1966~1972)
01장_도로와 교통체계가 개편되다
자본의 성장으로 들썩이는 서울|불도저 시장의 등장과 도시 공간의 변화|기억 속으로 사라진 전차|버스와 자동차 중심 도시의 탄생
02장_중심과 주변부가 위계화되다
광화문 전성시대|도심의 고층화|서울에서 사라진 것과 없는 것에 대한 구보 씨의 단상|십 년의 변화, “어질머리”에 적응하기|이국적 경관의 무장소성과 혼종성|서양식 양옥집이라는 황무지
03장_도시 공간이 분화되고 위계화되다
서울 변두리의 팽창과 광역화|한옥 주택가의 안정감|불안한 전세방과 계급의식의 발아|배제의 공포, 탈락의 위기감|환영받지 못한 자의 절망감|도시개발에서 밀려나는 사람들
04장_개발의 불도저, 파국을 맞이하다
그래도 지속되는 변두리의 삶|철거민 집단이주와 판잣집 양성화|시민아파트 건설이라는 속임수|아파트 거주자의 성찰|와우아파트 붕괴와 정인숙 피살사건|철거민들의 집단 난민촌|광주대단지사건의 발생|광주대단지 빈민들의 고통|죽어야 말할 수 있는 사람들|살아남은 자의 죄책감
05장_야간 통행금지, 도시의 시간을 규율하다
야간 통행금지와 도시 공간의 특권화|밤이 사라진 한국소설의 비애|우리를 슬프게 하는 야간 통행금지
3부 서울, 강남 개발과 중산층의 시대가 도래하다(1972~1978)
01장_신개척지 강남이 부상하기 시작하다
강남 개발을 위한 초석들|강남 가서 땅을 사면 돈을 번다, 소문과 예감|내가 만약 그때 강남에 땅을 샀더라면|개발의 광기, 폭력의 예감, 에틴저 마을
02장_강남, 서울의 지형도를 바꾸다
부동산 투기의 대중화|황무지에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경제적 공간 감각의 확산|복부인, 똑똑한 여성들의 슬픈 초상|교육과 명문학교, 8학군의 기원|‘위생’의 지리적 분할선, 한강
03장_아파트와 중산층의 시대가 열리다
도시 중산층의 등장|중산층 아파트와 서민층 아파트|젊은 세대가 선호하는 아파트와 현대적 생활|아파트의 삶, 유행과 모방|아파트, 소외와 획일성의 불모지|강남의 새로운 도시 경관|강남의 이질감과 차별화
04장_안과 밖의 위계화, 계급 갈등이 대두하다
공간의 다층적·적대적 위계화와 철거민|철거민 ‘난장이’가족이 목격한 서울|증오가 가른 도시, 계급투쟁의 장|구 동네와 새동네, 빈민과 중산층의 분리|위성도시의 원주민, 철거민, 이주민의 위계화|가난과 종속의 도시에 사는 부끄러움
05장_서울 사람, 완전히 도시인이 되다
과거가 지워지는 도시, 왕십리의 추억|발전도 퇴보도 아닌 변화: 익숙한 곳에서 길을 잃다|환상이 되어버린 고향|“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에필로그
참고문헌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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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책 속으로
1960년대는 오늘날과 같은 현대도시 서울을 형성한 법적·행정적 토대가 마련된 시기였다. 그중 1962년 1월 20일 시행된 도시계획법과 건축법은 현대적 의미의 도시계획을 실행해갈 최초의 토대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 p.32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 1』과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는 일제 말기에 어머니가 개성에 살던 딸을 서울로 데려가면서 반드시 ‘문안’에 살아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는 장면이 나온다. 어머니는 서대문 바로 밖에 정착하면서도, 현저동은 “서울에서도 문밖이란다. 서울이랄 것도 없지”라고 무시한다. 모친의 고집은 ‘문안’만 진짜 서울로 인정할 수 있다는 심리를 보여주는데, 이러한 감각은 1960년대 중반까지도 사라지지 않았다. --- p.37
1964년 2월 서울시장이 향후 서울로 이동할 사람은 도지사와 서울시장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여 파문이 일었던 것은 이러한 사정 때문이다. 이 제안은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서울의 인구 문제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1964년 9월 최초로 서울의 인구 집중 방지책이 마련되는 데 일조했다. --- p.54
현재 서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사실상 이주민 2세대, 3세대이지만, 이제 이 기억을 완전히 잊고 자신들이 원래부터 ‘서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산다. 그러나 서울에 살고 있는 사람의 거의 95퍼센트는 사실상 이주민들의 자손이며, 1세대 이주민들의 삶이 난민의 삶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 p.86
1966년 구상되어 1968년까지 해방 이후의 중요한 메가스트럭처 세운상가가 지어질 수 있었던 것은, 종로3가 남쪽부터 퇴계로 3가까지 남북으로 곧게 뻗은 도로가 일제의 소개지, 전후 무허가 판자촌, 사창가 밀집지대인 탓에 손쉽게 ‘불량주택 개량사업지구’로 지정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p.97
김현옥의 도시개발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한강 개발·여의도 개발·강남 개발을 처음 시작한 이도 그였다. 4백 동의 시민아파트를 지었고 광주대단지도 그가 만들었으며, 봉천동·신림동·상계동 등지에 거대한 불량지구 마을도 그가 만들었다.” 그는 세운상가도 만들었고, 서울 외곽의 변두리 지역으로 강제 이주를 실시해서 결과적으로 사대문 안에 머물러 있던 서울의 실질적 경계를 확장시켜 현재 서울 전체의 모습이 형성되는 데 지대한 역할을 담당했다. --- p.185
김현옥 시장은 취임 직후인 1966년 4월부터 서울의 교통난 해소를 위해 전차 폐지를 공언했다. 그리고 약 2년 반이 지난 1968년 11월 말 70여 년간 서울 시민들의 주요 교통수단이었던 서울의 전차는 완전히 사라졌다. --- p.189
1966년 당시 서울에는 1966년 6~9층 건물이 111개, 10층 이상 건물이 18개밖에 없었던 데 반해, 1970년에 6~9층 건물이 487개, 10층 이상 건물이 122개로 늘어났다. 1966~71년 사이 서울의 고층화를 상징하는 건물들은, 22층 높이의 정부종합청사와 1970년에 완공된 18층높이의 조선호텔, 1969~70년 청계천로에 김중업의 설계로 세워진 유리 마천루의 31층짜리 삼일빌딩 등이다. --- p.212
그는 거침없이 서울이 “위대한 황무지”라고 진단한다. 거대한 지역이 전쟁의 폐허에서 벗어나 사람들이 몰려들고 새로운 건물들이 치솟으며 양옥집이 속속 들어서지만, 이것은 새로운 전통을 축적하는 건설이 아니다. 지어진 지 2년 만에 곧 무너질 것처럼 쇠락해버린 양옥집에서 보듯, 곧 부서지고 사라질 건물들이 들어서는 서울은 폐허위에 지어진 새로운 폐허나 다름없다. --- p.237
“셋방의 기본 계약 기간이 꼭 6개월씩이었다. 복덕방장이들의 농간으로 1년도 좋고 2년도 좋던 것이 6개월로 줄어버린 것이다. 6개월이 지나도 집을 옮겨가야 한다는 법은 없었지만, 그때가 되면 대개는 계약 조건이 달라지게 마련이었다. 복덕방장이들이 와서 더 비싼 세로 방을 들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노라고 주인을 충동질해대기 때문이었다. --- p.251
1966년 미국 존슨 대통령의 방한은 전 세계에 서울의 가난한 실상을 알림으로써 서울의 불량 지역들을 개발하게 만든 계기였다. 손정목에 따르면, 이 방한 일정이 서울 도심 재개발의 계기가 된 것은,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존슨 대통령의 환영식 때문이다. 존슨 대통령의 연설을 생중계하던 미국 측 TV 촬영기사가 환영식을 보도한 후 서울 시청 주변에도 카메라를 돌렸기 때문이다. --- p.260
판잣집 양성화 정책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강제이주 및 강제철거라는 본심을 숨기고 나온 선거용 정책이었다. 따라서 이 정책은 시작부터 오락가락할 수밖에 없었다. 선거 직전인 4월 말에는 모든 판잣집을 양성화하겠다고 약속하고, 5월에는 여러 판자촌에 양성화를 인정한다는 통지서나 표찰까지 남발하더니, 총선이 끝난 지 이틀 후인 6월 10일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양동과 도동 일대의 판잣집을 모두 철거하겠다”는 공언이 나오기도 했고, “판잣집 양성화 속에 철거 소식이 붙어 판잣집 주민들은 어리둥절해지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 p.283
그는 1969년 400동에 달하는 시민아파트를 주로 높은 산 위에 지었는데, 그중 맨 처음 착공한 것이 서대문구 현저동의 금화아파트 19개 동으로 1968년 6월 18일에 기공식을 올렸다. 그는 아파트를 너무 높은 데 지으면 위험하고 주민들이 불편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에, 높은 곳에 지어야 청와대에서 잘 보일 것 아니냐고 대답했다고 한다. --- p.288
광주대단지사건을 다룬 신상웅의 소설 〈만가挽歌일 뿐이외다〉는 이곳을 “인간쓰레기장”이라고 불렀다. 박기정 기자가 만난 주민들은 “쓰레기를 내다버리듯 차에 실어다 황무지에 버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p.313
1971년 8월 광주대단지 소요사건은 1970년 4월 시민아파트 붕괴에 이어 서울의 폭력적이고 안이한 도시개발 계획이 맞이한 두 번째 파국이었다. 도시계획을 거의 방치하다시피 한 서울시의 안이하고 무책임한 태도는 투기를 조장하는 정책과 맞물려 거대한 파국을 불렀다. --- p.315
삼륜차 한 대가 어쩌다 길을 잘못 들어가지고는 그만 소용돌이 속에 파묻힌 거예요. 데몰 피해서 빠져나갈 방도를 찾느라고 요리조리 함부로 대가리를 디밀다가 그만 뒤집혀서 벌렁 나자빠져버렸어요. 누렇게 익은 참외가 와그르르 쏟아지더니 길바닥으로 구릅디다. 경찰을 상대하던 군중들이 돌멩이질을 딱 멈추더니 참외 쪽으로 벌떼처럼 달라붙습디다. 한 차분이나 되는 참외가 눈 깜짝할 새 동이 나버립디다. 진흙탕에 떨어진 것까지 줏어서는 어적어적 깨물어먹는 거예요. --- p.329
한국전쟁 때 월남한 피란민 구보 씨에게 통행금지제도는 일상 속에서 ‘전쟁’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통행금지가 가까워지면 모든 사람이 조급해진다. 어디론가 떠나려는 사람들, 빨리 집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이 서로 교통의 순서를 다툰다. 택시는 금방 난폭해진다. 모든 서비스가 거칠어진다. 피란민들이 마지막 열차에 매달리는 풍경이다.”. --- p.344
포화 상태에 이른 강북인구를 분산시킬 신시가지가 필요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전쟁이 나면 또다시 한강을 건너지 못하는 시민들이 생길까 걱정했던 대통령의 충정 때문일 수도 있으며, 부동산 투기를 통해 개발자금과 정치자금 등을 마련해야 했던 권력층의 은밀한 요청 때문일 수도 있다. --- p.352
1972년 4월 서울시가 강남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강북을 특정시설 제한구역으로 설정한 것은 강압적이지만 효과적인 조치였다. 서울시는 도심부 인구 분산계획의 일환으로 종로구 및 중구 전역, 용산구와 마포구의 기존 시가지 전역, 성북구와 성동구의 강북 지역에 백화점, 도매시장, 공장 등의 신규 시설을 불허했다. 1973년 한 가지 조치가 뒤따랐다. 종로구, 중구 등의 도심 지역이 재개발지구로 지정되면서 이 지역 일대 건물의 신축, 개축, 증축이 금지된 것이다. 또한 1972년에는1978년 12월 31일까지 6년간 유효했던 ‘특정지구 개발촉진에 관한 임시조치법’이 제정되어, 1973년 강남 지역이 개발촉진지구로 선정되었다. 그래서 수많은 상업시설이 아무런 규제도 없고 특별법에 의해 취득세, 재산세 등이 면제되는 강남으로 옮겨졌다. --- p.357
1981년 처음으로 신규 주택 중에서 아파트 수가 단독주택 수를 추월하면서 아파트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86~88년 ‘3저 호황’이 도래할 때까지 지속되었던 강남 개발, 아파트 증가, 중산층 확대는 사실상 1972~78년 사이에 만들어졌던 성장 동력이 다시 본격화한 것이었다. 1980년대에 이르러 1970년대 초중반과 같은 강남 기피, 단독주택 선호 같은 현상은 사라졌으며, 본격적으로 중산층이 주도하는 대중소비사회가 도래했다. --- p.359
1970년대 중반부터 한국 사회에 정착한 중산층은 부동산 투기를 순식간에 대중화시켰다. 목돈을 마련할 수 있는 중산층이 성장하고, 자영업자나 일용직 노동자의 수보다 매달 월급이 들어오는 고용 노동자의 수가 증가하자, 은행에서 대출자금을 빌릴 여력이 생기기 시작했다. 부동산이 가장 좋은 투자처라는 사실은 점점 대중의 상식이 되었다. --- p.381
강남의 지가가 강북을 추월하는 것은 1980년대의 일이며, 1979년 당시까지만 해도 신당동의 지가가 압구정동보다 여전히 높았다. 그러나 1963년의 가격을 기준으로 상승률을 살펴보면, 신당동은 250배가 뛰었고, 압구정동은 875배가 뛰었다. 그러니 실제 지가가 아닌 투자의 측면에서 강북은 강남의 비교 대상이 될 수가 없었다. --- p.382
박완서의 「낙토의 아이들」에서 말하듯, “무릉동이야말로 낙토였다. 이곳의 땅은 시시하게 벼 포기나 감자 알맹이 따위를 번식시키진 않았다. 직접 황금을 번식시켰다. 그 황금은 그 땅을 땀 흘려 파는掘 사람의 것이 아니라 파는賣 사람의 것이었다.”. --- p.388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서 당시 흔하지 않은 고등교육을 받았고 유복한 집안으로 시집간 이 여성들은 왜 복부인이 되었을까. …… 가부장적 남성들이 살림의 책임을 회피한 상황에서 전업주부가 재산 증식이라는 주부의 역할과 사회활동 참여에 대한 욕망 충족이 부정적인 방식으로 나타난 것이 복부인인 셈이었다. --- p.398
1980년 2월 거주지 중심의 완전학군제가 실시되고 그 첫 세대가 대학에 진학한 1984년이 되자 강남 지역 고등학교들의 높은 명문 대학교 진학률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강남에 자리 잡은 고학력 인텔리들과 부자들이 학력자본과 경제자본을 대를 넘어 재생산하기 위해 노력한 덕분에, 강남으로 이사 간 전통의 명문학교뿐만 아니라 8학군에 신설된 학교들까지 저절로 신흥 명문학교로 부상했다. 교육이 계층 이동의 수단처럼 간주되는 이 사회에서, 뛰어난 학력수준을 만들어내는 중·고등학교의 교육체제는 강남의 ‘경제적 자본’을 세습하고 ‘학력자본’과 ‘사회자본’을 집중적으로 형성할 수 있는 차별적 수단으로 등장했다. --- p.405
1971년 12월 나란히 준공된 여의도 시범아파트와 논현동 공무원아파트도 빼놓을 수 없다. 논현동 공무원아파트가 강남 지역 아파트의 시초였다면, 김현옥 시장이 만든 한강 매립지 위에 지어진 여의도 시범아파트의 성공은 아직 매력적이지 못했던 아파트 단지가 매력적인 투자처임을 기업과 대중에게 알린 첫 사례였다.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한국 최초로 10층 이상으로 건축된 고층 아파트 단지로서, 기름 보일러식 중앙난방 시설, 야외 수영장, 엘리베이터 등을 갖춘 호화로운 단지로 성공을 거두었다. --- p.420
급히 조작해낸 극빈자가 바로 가장 평수가 적을 뿐더러 그 이름도 겸손한 평민아파트의 주민들이었다. 당시만 해도 평민아파트 입주자들은 맨션아파트 입주자들보다 일률적으로 가난하기보다는 식구가 단출해서 작은 평수를 택한, 이를테면 식구와 집의 크기와의 관계를 몸과 옷의 크기와의 관계와 같이 생각한 순진 소박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들의 자녀가 구시가에서 극빈자의 자녀나 받는 교과서 무상분배 대상이 되었으니 노발대발 안 할 리가 없었다. 그들 역시 자존심 높은 무릉동 주민임에는 틀림이 없었으니까. --- p.423
1970년대 아파트의 소비문화 심리를 가장 잘 그리고 있는 텍스트는 박완서의 소설 『닮은 방들』이다.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18평 아파트로 이사 간 ‘나’는 다른 주부들과 모든 것을 공유하고 닮아가기 시작한다. 앞집 여자의 집을 구경하고 나니 “나는 꼭 그 여자네 방처럼 꾸미고 싶었다.”. --- p.431
1973년 3월 제정되어 1981년 12월까지 유효했던 '주택개량촉진에 관한 임시조치법'은 이 시기 도시빈민들에게 중요한 법적 조치였다. 서울시는 이 법에 따라 재개발지구를 지정하고 주민들의 자발적인 주택개량을 장려했으며, 재개발을 위해 국공유지를 무상 양여하는 방식을 통해 무허가 불량주택의 합법화를 일부 추진했다. --- p.455
난장이 가족들이 사는 가상의 동네에는 “낙원구 행복동”이라는 반어법적 이름이 붙어 있다. 허구적으로 만들어진 이 동네는, 작가 조세희가 당시 현저동에 속했던 현재의 무악동과 면목동 철거 현장을 취재한 후 만든 가상의 공간이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작은 무허가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풍경은 현저동에서 가져온 것이고, 개천과 방죽, 굴뚝이 있는 풍경은 면목동에서 빌려와 조합한 것이다. --- p.460
1983년 시행된 ‘합동재개발법’은 토지 소유권을 가진 사람들이 재개발조합을 결성하고 건설업체와 협력하는 방식으로 불량주택 재개발의 방법을 변화시켰다. 재개발조합과 건설업체의 알력 속에서 행정적 책임이 있던 국가와 공무원들은 뒤로 빠지고 소위 “용역”으로 불리는 깡패들이 철거 현장에 투입되게 된 계기였다. 국가와 경찰과 공무원이 깡패들의 불법적 폭력행위를 용인해주는, 민주주의국가에 어울리지 않는 기이한 철거방식은 1983년 이후부터 지금까지 서울 곳곳의 재개발 현장을 뒤흔들고 있다. --- p.463
그들이 떠나온 시골은 도시의 착취 때문에 낙후되고 촌스러워진 시골도 아니고, 새마을운동이라는 국책사업이 홍보하듯 잘 사는 시골의 모습은 더더욱 아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더 이상 자신과 무관한 공간으로 신비화해 만든 환상은 현실에서 동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오래전에 시골을 떠나온 자신을 우월한 위치에 놓으려는 서울 사람의 태도다. 서울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한 이러한 자신감과 환상은, 서울과 시골이라는 중심과 주변의 간극을 더욱 크게 만드는 폭력에 불과하다.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 1』과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는 일제 말기에 어머니가 개성에 살던 딸을 서울로 데려가면서 반드시 ‘문안’에 살아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는 장면이 나온다. 어머니는 서대문 바로 밖에 정착하면서도, 현저동은 “서울에서도 문밖이란다. 서울이랄 것도 없지”라고 무시한다. 모친의 고집은 ‘문안’만 진짜 서울로 인정할 수 있다는 심리를 보여주는데, 이러한 감각은 1960년대 중반까지도 사라지지 않았다. --- p.37
1964년 2월 서울시장이 향후 서울로 이동할 사람은 도지사와 서울시장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여 파문이 일었던 것은 이러한 사정 때문이다. 이 제안은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서울의 인구 문제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1964년 9월 최초로 서울의 인구 집중 방지책이 마련되는 데 일조했다. --- p.54
현재 서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사실상 이주민 2세대, 3세대이지만, 이제 이 기억을 완전히 잊고 자신들이 원래부터 ‘서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산다. 그러나 서울에 살고 있는 사람의 거의 95퍼센트는 사실상 이주민들의 자손이며, 1세대 이주민들의 삶이 난민의 삶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 p.86
1966년 구상되어 1968년까지 해방 이후의 중요한 메가스트럭처 세운상가가 지어질 수 있었던 것은, 종로3가 남쪽부터 퇴계로 3가까지 남북으로 곧게 뻗은 도로가 일제의 소개지, 전후 무허가 판자촌, 사창가 밀집지대인 탓에 손쉽게 ‘불량주택 개량사업지구’로 지정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p.97
김현옥의 도시개발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한강 개발·여의도 개발·강남 개발을 처음 시작한 이도 그였다. 4백 동의 시민아파트를 지었고 광주대단지도 그가 만들었으며, 봉천동·신림동·상계동 등지에 거대한 불량지구 마을도 그가 만들었다.” 그는 세운상가도 만들었고, 서울 외곽의 변두리 지역으로 강제 이주를 실시해서 결과적으로 사대문 안에 머물러 있던 서울의 실질적 경계를 확장시켜 현재 서울 전체의 모습이 형성되는 데 지대한 역할을 담당했다. --- p.185
김현옥 시장은 취임 직후인 1966년 4월부터 서울의 교통난 해소를 위해 전차 폐지를 공언했다. 그리고 약 2년 반이 지난 1968년 11월 말 70여 년간 서울 시민들의 주요 교통수단이었던 서울의 전차는 완전히 사라졌다. --- p.189
1966년 당시 서울에는 1966년 6~9층 건물이 111개, 10층 이상 건물이 18개밖에 없었던 데 반해, 1970년에 6~9층 건물이 487개, 10층 이상 건물이 122개로 늘어났다. 1966~71년 사이 서울의 고층화를 상징하는 건물들은, 22층 높이의 정부종합청사와 1970년에 완공된 18층높이의 조선호텔, 1969~70년 청계천로에 김중업의 설계로 세워진 유리 마천루의 31층짜리 삼일빌딩 등이다. --- p.212
그는 거침없이 서울이 “위대한 황무지”라고 진단한다. 거대한 지역이 전쟁의 폐허에서 벗어나 사람들이 몰려들고 새로운 건물들이 치솟으며 양옥집이 속속 들어서지만, 이것은 새로운 전통을 축적하는 건설이 아니다. 지어진 지 2년 만에 곧 무너질 것처럼 쇠락해버린 양옥집에서 보듯, 곧 부서지고 사라질 건물들이 들어서는 서울은 폐허위에 지어진 새로운 폐허나 다름없다. --- p.237
“셋방의 기본 계약 기간이 꼭 6개월씩이었다. 복덕방장이들의 농간으로 1년도 좋고 2년도 좋던 것이 6개월로 줄어버린 것이다. 6개월이 지나도 집을 옮겨가야 한다는 법은 없었지만, 그때가 되면 대개는 계약 조건이 달라지게 마련이었다. 복덕방장이들이 와서 더 비싼 세로 방을 들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노라고 주인을 충동질해대기 때문이었다. --- p.251
1966년 미국 존슨 대통령의 방한은 전 세계에 서울의 가난한 실상을 알림으로써 서울의 불량 지역들을 개발하게 만든 계기였다. 손정목에 따르면, 이 방한 일정이 서울 도심 재개발의 계기가 된 것은,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존슨 대통령의 환영식 때문이다. 존슨 대통령의 연설을 생중계하던 미국 측 TV 촬영기사가 환영식을 보도한 후 서울 시청 주변에도 카메라를 돌렸기 때문이다. --- p.260
판잣집 양성화 정책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강제이주 및 강제철거라는 본심을 숨기고 나온 선거용 정책이었다. 따라서 이 정책은 시작부터 오락가락할 수밖에 없었다. 선거 직전인 4월 말에는 모든 판잣집을 양성화하겠다고 약속하고, 5월에는 여러 판자촌에 양성화를 인정한다는 통지서나 표찰까지 남발하더니, 총선이 끝난 지 이틀 후인 6월 10일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양동과 도동 일대의 판잣집을 모두 철거하겠다”는 공언이 나오기도 했고, “판잣집 양성화 속에 철거 소식이 붙어 판잣집 주민들은 어리둥절해지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 p.283
그는 1969년 400동에 달하는 시민아파트를 주로 높은 산 위에 지었는데, 그중 맨 처음 착공한 것이 서대문구 현저동의 금화아파트 19개 동으로 1968년 6월 18일에 기공식을 올렸다. 그는 아파트를 너무 높은 데 지으면 위험하고 주민들이 불편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에, 높은 곳에 지어야 청와대에서 잘 보일 것 아니냐고 대답했다고 한다. --- p.288
광주대단지사건을 다룬 신상웅의 소설 〈만가挽歌일 뿐이외다〉는 이곳을 “인간쓰레기장”이라고 불렀다. 박기정 기자가 만난 주민들은 “쓰레기를 내다버리듯 차에 실어다 황무지에 버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p.313
1971년 8월 광주대단지 소요사건은 1970년 4월 시민아파트 붕괴에 이어 서울의 폭력적이고 안이한 도시개발 계획이 맞이한 두 번째 파국이었다. 도시계획을 거의 방치하다시피 한 서울시의 안이하고 무책임한 태도는 투기를 조장하는 정책과 맞물려 거대한 파국을 불렀다. --- p.315
삼륜차 한 대가 어쩌다 길을 잘못 들어가지고는 그만 소용돌이 속에 파묻힌 거예요. 데몰 피해서 빠져나갈 방도를 찾느라고 요리조리 함부로 대가리를 디밀다가 그만 뒤집혀서 벌렁 나자빠져버렸어요. 누렇게 익은 참외가 와그르르 쏟아지더니 길바닥으로 구릅디다. 경찰을 상대하던 군중들이 돌멩이질을 딱 멈추더니 참외 쪽으로 벌떼처럼 달라붙습디다. 한 차분이나 되는 참외가 눈 깜짝할 새 동이 나버립디다. 진흙탕에 떨어진 것까지 줏어서는 어적어적 깨물어먹는 거예요. --- p.329
한국전쟁 때 월남한 피란민 구보 씨에게 통행금지제도는 일상 속에서 ‘전쟁’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통행금지가 가까워지면 모든 사람이 조급해진다. 어디론가 떠나려는 사람들, 빨리 집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이 서로 교통의 순서를 다툰다. 택시는 금방 난폭해진다. 모든 서비스가 거칠어진다. 피란민들이 마지막 열차에 매달리는 풍경이다.”. --- p.344
포화 상태에 이른 강북인구를 분산시킬 신시가지가 필요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전쟁이 나면 또다시 한강을 건너지 못하는 시민들이 생길까 걱정했던 대통령의 충정 때문일 수도 있으며, 부동산 투기를 통해 개발자금과 정치자금 등을 마련해야 했던 권력층의 은밀한 요청 때문일 수도 있다. --- p.352
1972년 4월 서울시가 강남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강북을 특정시설 제한구역으로 설정한 것은 강압적이지만 효과적인 조치였다. 서울시는 도심부 인구 분산계획의 일환으로 종로구 및 중구 전역, 용산구와 마포구의 기존 시가지 전역, 성북구와 성동구의 강북 지역에 백화점, 도매시장, 공장 등의 신규 시설을 불허했다. 1973년 한 가지 조치가 뒤따랐다. 종로구, 중구 등의 도심 지역이 재개발지구로 지정되면서 이 지역 일대 건물의 신축, 개축, 증축이 금지된 것이다. 또한 1972년에는1978년 12월 31일까지 6년간 유효했던 ‘특정지구 개발촉진에 관한 임시조치법’이 제정되어, 1973년 강남 지역이 개발촉진지구로 선정되었다. 그래서 수많은 상업시설이 아무런 규제도 없고 특별법에 의해 취득세, 재산세 등이 면제되는 강남으로 옮겨졌다. --- p.357
1981년 처음으로 신규 주택 중에서 아파트 수가 단독주택 수를 추월하면서 아파트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86~88년 ‘3저 호황’이 도래할 때까지 지속되었던 강남 개발, 아파트 증가, 중산층 확대는 사실상 1972~78년 사이에 만들어졌던 성장 동력이 다시 본격화한 것이었다. 1980년대에 이르러 1970년대 초중반과 같은 강남 기피, 단독주택 선호 같은 현상은 사라졌으며, 본격적으로 중산층이 주도하는 대중소비사회가 도래했다. --- p.359
1970년대 중반부터 한국 사회에 정착한 중산층은 부동산 투기를 순식간에 대중화시켰다. 목돈을 마련할 수 있는 중산층이 성장하고, 자영업자나 일용직 노동자의 수보다 매달 월급이 들어오는 고용 노동자의 수가 증가하자, 은행에서 대출자금을 빌릴 여력이 생기기 시작했다. 부동산이 가장 좋은 투자처라는 사실은 점점 대중의 상식이 되었다. --- p.381
강남의 지가가 강북을 추월하는 것은 1980년대의 일이며, 1979년 당시까지만 해도 신당동의 지가가 압구정동보다 여전히 높았다. 그러나 1963년의 가격을 기준으로 상승률을 살펴보면, 신당동은 250배가 뛰었고, 압구정동은 875배가 뛰었다. 그러니 실제 지가가 아닌 투자의 측면에서 강북은 강남의 비교 대상이 될 수가 없었다. --- p.382
박완서의 「낙토의 아이들」에서 말하듯, “무릉동이야말로 낙토였다. 이곳의 땅은 시시하게 벼 포기나 감자 알맹이 따위를 번식시키진 않았다. 직접 황금을 번식시켰다. 그 황금은 그 땅을 땀 흘려 파는掘 사람의 것이 아니라 파는賣 사람의 것이었다.”. --- p.388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서 당시 흔하지 않은 고등교육을 받았고 유복한 집안으로 시집간 이 여성들은 왜 복부인이 되었을까. …… 가부장적 남성들이 살림의 책임을 회피한 상황에서 전업주부가 재산 증식이라는 주부의 역할과 사회활동 참여에 대한 욕망 충족이 부정적인 방식으로 나타난 것이 복부인인 셈이었다. --- p.398
1980년 2월 거주지 중심의 완전학군제가 실시되고 그 첫 세대가 대학에 진학한 1984년이 되자 강남 지역 고등학교들의 높은 명문 대학교 진학률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강남에 자리 잡은 고학력 인텔리들과 부자들이 학력자본과 경제자본을 대를 넘어 재생산하기 위해 노력한 덕분에, 강남으로 이사 간 전통의 명문학교뿐만 아니라 8학군에 신설된 학교들까지 저절로 신흥 명문학교로 부상했다. 교육이 계층 이동의 수단처럼 간주되는 이 사회에서, 뛰어난 학력수준을 만들어내는 중·고등학교의 교육체제는 강남의 ‘경제적 자본’을 세습하고 ‘학력자본’과 ‘사회자본’을 집중적으로 형성할 수 있는 차별적 수단으로 등장했다. --- p.405
1971년 12월 나란히 준공된 여의도 시범아파트와 논현동 공무원아파트도 빼놓을 수 없다. 논현동 공무원아파트가 강남 지역 아파트의 시초였다면, 김현옥 시장이 만든 한강 매립지 위에 지어진 여의도 시범아파트의 성공은 아직 매력적이지 못했던 아파트 단지가 매력적인 투자처임을 기업과 대중에게 알린 첫 사례였다.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한국 최초로 10층 이상으로 건축된 고층 아파트 단지로서, 기름 보일러식 중앙난방 시설, 야외 수영장, 엘리베이터 등을 갖춘 호화로운 단지로 성공을 거두었다. --- p.420
급히 조작해낸 극빈자가 바로 가장 평수가 적을 뿐더러 그 이름도 겸손한 평민아파트의 주민들이었다. 당시만 해도 평민아파트 입주자들은 맨션아파트 입주자들보다 일률적으로 가난하기보다는 식구가 단출해서 작은 평수를 택한, 이를테면 식구와 집의 크기와의 관계를 몸과 옷의 크기와의 관계와 같이 생각한 순진 소박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들의 자녀가 구시가에서 극빈자의 자녀나 받는 교과서 무상분배 대상이 되었으니 노발대발 안 할 리가 없었다. 그들 역시 자존심 높은 무릉동 주민임에는 틀림이 없었으니까. --- p.423
1970년대 아파트의 소비문화 심리를 가장 잘 그리고 있는 텍스트는 박완서의 소설 『닮은 방들』이다.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18평 아파트로 이사 간 ‘나’는 다른 주부들과 모든 것을 공유하고 닮아가기 시작한다. 앞집 여자의 집을 구경하고 나니 “나는 꼭 그 여자네 방처럼 꾸미고 싶었다.”. --- p.431
1973년 3월 제정되어 1981년 12월까지 유효했던 '주택개량촉진에 관한 임시조치법'은 이 시기 도시빈민들에게 중요한 법적 조치였다. 서울시는 이 법에 따라 재개발지구를 지정하고 주민들의 자발적인 주택개량을 장려했으며, 재개발을 위해 국공유지를 무상 양여하는 방식을 통해 무허가 불량주택의 합법화를 일부 추진했다. --- p.455
난장이 가족들이 사는 가상의 동네에는 “낙원구 행복동”이라는 반어법적 이름이 붙어 있다. 허구적으로 만들어진 이 동네는, 작가 조세희가 당시 현저동에 속했던 현재의 무악동과 면목동 철거 현장을 취재한 후 만든 가상의 공간이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작은 무허가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풍경은 현저동에서 가져온 것이고, 개천과 방죽, 굴뚝이 있는 풍경은 면목동에서 빌려와 조합한 것이다. --- p.460
1983년 시행된 ‘합동재개발법’은 토지 소유권을 가진 사람들이 재개발조합을 결성하고 건설업체와 협력하는 방식으로 불량주택 재개발의 방법을 변화시켰다. 재개발조합과 건설업체의 알력 속에서 행정적 책임이 있던 국가와 공무원들은 뒤로 빠지고 소위 “용역”으로 불리는 깡패들이 철거 현장에 투입되게 된 계기였다. 국가와 경찰과 공무원이 깡패들의 불법적 폭력행위를 용인해주는, 민주주의국가에 어울리지 않는 기이한 철거방식은 1983년 이후부터 지금까지 서울 곳곳의 재개발 현장을 뒤흔들고 있다. --- p.463
그들이 떠나온 시골은 도시의 착취 때문에 낙후되고 촌스러워진 시골도 아니고, 새마을운동이라는 국책사업이 홍보하듯 잘 사는 시골의 모습은 더더욱 아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더 이상 자신과 무관한 공간으로 신비화해 만든 환상은 현실에서 동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오래전에 시골을 떠나온 자신을 우월한 위치에 놓으려는 서울 사람의 태도다. 서울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한 이러한 자신감과 환상은, 서울과 시골이라는 중심과 주변의 간극을 더욱 크게 만드는 폭력에 불과하다.
--- p.503
출판사 리뷰
역사보다 촘촘하다
1960~70년대 서울의 표상을 그려낸 작가 16인의 소설 110여 편은 어쩌면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어엿한 사료史料로 기능한다. 수년간에 걸친 지은이의 노력 덕분에 소설만으로도 아파트 붐, 와우아파트 붕괴, 광주대단지사건 등 굵직한 사건을 좇아갈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기록’의 틈을 채우고 기억의 결을 메우는 데 성공한 대목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호철의 《서울은 만원이다》는 손정목 선생이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비판했을 만큼 사창이 존재하지도 않는 서린동을 왜 여주인공인 창녀가 사는 동네로 설정했을까. “대중들은 일제하의 서린동과 그 근방에 기생촌이 있었던 사실을 자연스럽게 상기하면서, 기생에서 사창으로 약간의 자유연상에 따른 논리적 비약을 거쳐 이 지역에 사창이 있다는 허구적 설정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51쪽)
광화문 세종로 뒤편에 있던 예총회관과 수송동 기마경찰대에 대한 기억을 복원하거나(213~217쪽), 1966년 미국 존슨 대통령의 방한 당시 평범한 사람들이 느꼈던 비애와 고통의 감정을 되새기는 장면(262~265쪽) 등도 그 사례에 해당할 것이다.
“지식인을 포함하여 수많은 관료, 직장인, 대학생들이 술을 마시고 함께 종삼을 방문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 심지어 시인 고은은 《1950년대》라는 책에서 실명을 거론한 단 8명을 제외하고는 “기성작가·신인·문학 지망생을 통틀어서 그곳에 가지 않는 자는 없는 것이다”라고 단언했다”(94쪽)란 구절은 또 어떤가.
도시의 잊힌 주름들을 파고들다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의 역사에는 기억 속에 접혀서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안의 주름들 같은 틈새들이 있다. 이 책은 우리가 잠시 잊고 있었던, 그러나 현재의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 변화의 계기들을 포착한다.
“무엇보다도 한국전쟁 때 월남한 피란민 구보 씨에게 통행금지 제도는 일상 속에서 ‘전쟁’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통행금지가 가까워지면 모든 사람이 조급해진다. 어디론가 떠나려는 사람들. 빨리 집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이 서로 교통의 순서를 다툰다. 택시는 금방 난폭해진다. 모든 서비스가 거칠어진다. 피난민들이 마지막 열차에 매달리는 풍경이다. ‘막차’ 그렇다. 이리하여 6·25의 얼굴은 밤마다 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낸다. 전쟁의 기억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웃음이 나온다. 하도 전쟁 속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전쟁을 평범한 것으로 알게끔 취해버린 것뿐이 아닌가”(최인훈의 소설 인용문). 이 논리에 따르자면, 무엇이든 ‘빨리빨리’ 해야 하는 한국 사회의 습성은 통행금지 제도에서 비롯된 것이며, 더 깊게 파고들면 그 기원은 전쟁에 있다.”(344쪽)
오늘날 서울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시골에 대한 오해와 환상이 이미 1970년대 중반에 형성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장면은 어떠한가. “그들이 떠나온 시골은 도시의 착취 때문에 낙후되고 촌스러워진 시골도 아니고, 새마을운동이라는 국책사업이 홍보하듯 잘 사는 시골의 모습은 더더욱 아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더이상 자신과 무관한 공간으로 신비화해 만든 환상은 현실에서 동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오래전에 시골을 떠나온 자신을 우월한 위치에 놓으려는 서울 사람의 태도다. 서울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한 이러한 자신감과 환상은, 서울과 시골이라는 중심과 주변의 간극을 더욱 크게 만드는 폭력에 불과하다.”(503쪽)
드라마보다 드라마틱하다
소설이란 사료를 캐내고, 먼지를 털고, 해석을 했으니 ‘이야기’로서의 재미 또한 이 책의 미덕이다.
“서울에 가고 싶어요, 단지 그거뿐예요.”(64쪽)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에서 주인공 윤희중이 틀어박혀 있던 바닷가의 집에서 하인숙과 사랑을 나눈 후, 하인숙이 처음 꺼낸 말이다. 지은이는 “이는 일반적인 연인들이 정사 후에 할 만한 말은 결코 아니다”라면서 맹목적인 서울에 대한 맹목적 동경 혹은 서울중심주의를 보여준다고 부연한다.
미아리고개 위에 지은 처남의 판잣집을 소재로 한 하근찬의 〈삼각의 집〉에서 ‘나’와 아들이 그 집을 보자마자 ‘국제 명작 사진첩’에 실려 있던 미국의 개집 사진을 동시에 떠올리는 장면은 어떠한가. 이는 서울의 도시빈민은 지구상의 계급으로 보면 미국에 사는 개 정도의 위치라는 자각을 불러일으키는 장치인데 우리가 잊고 있던, 그러나 절절한 기억이 되살아나지 않는지.
“신촌역에 기차가 정거했을 때는, 그곳이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 같은 느낌이 들어서 바로 눈앞에 보이는 이화여대가 마치 서울에서부터 기차 꽁무니에 붙어 왔다가 기차가 서니까 슬쩍 내려서 시치미 떼고 거기에 서 있는 것처럼 괴기하게 눈에 비쳤다.”(274쪽) 1966년 쓰인 김승옥의 소설 〈다산성〉에 나오는 이 구절은 또 어떤가.
문학 텍스트를 새롭게 읽다
기본적으로 문학연구자가 쓴 역사서이다. 이 책은 문학과 역사가 만난 지점에서 소설과 역사를 비교하고 조율하고 있다. 그래서 ‘사료’로 삼은 적절한 텍스트를 찾고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지은이의 문학적 내공이 어우러져 있다.
최인훈의 연작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는 1968년 서울에서 전차가 사라지고 “좌석버스란 이름의 입석버스”가 등장한 모습이 나오는데(197쪽) 구보 씨는 버스를 못마땅해 한다. 느릿느릿한 전차에 비해, 빠른 출근길 버스는 전투적 삶의 대열에 재빠르게 올라타는 경쟁을 권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소설의 후반부에 “고등학교 학생 하나가 구보 씨의 옆구리를 팔굽으로 내어지르면서 버스에 올라가고 문은 닫히고” 버스가 떠나버려 구보 씨가 결국 버스를 놓치는 장면을 집어내는 솜씨는 탁월하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의 권 씨는 저항의식 덕분에 비로소 고귀함을 가지게 되는 전형적인 민중상을 벗어나 전혀 불필요해 보이는 아홉 켤레의 구두로 ‘인간의 품격’을 가지게 되는 인물로 그려졌다. 광주대단지사건의 철거민들과 적극적으로 연대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가진 지식인의 손길에 의해 사후적으로 가공된 한계 때문이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그 때문에 전형적인 민중의 형상에 갇히지 않은 인물이 탄생한 것이다”(332쪽)란 분석 역시 지은이의 소설 읽기 수준을 보여준다.
통찰은 깊고 분석은 날카롭다
사실의 모자이크만으로는 제대로 된 역사서라 할 수 없다. 때문에 소설을 사료로 동원한 이 책 역시 곳곳에서 지은이의 통찰과 해석이 드러나는데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 적지 않다.
“2000년대 이후 서울시장들의 주요 정책은 ‘김현옥 지우기’와 ‘김현옥 따라 하기’를 동시에 하는 것이었다. 이미 뚫은 터널과 도로를 없앨 수는 없지만, 그가 세운 고가도로들을 부정하거나 잘못된 결과들을 되돌리는 것 자체가 공이 되기 때문이었다.”(187쪽) 김현옥 전 시장이 현대도시 서울의 탄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제시한 뒤 하는 지은이의 지적이다.
“사실 강남 개발의 숨은 역군은 황량한 황무지에서 아파트를 건설한 노동자들이 아니라 부동산 중개업자와 투기꾼들일 것이다. 정부와 서울시는 숨은 공로자가 아니라 그것을 노골적으로 조장한 사람들이었다.”(387쪽) 현재 강남에 살고 있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이든, 강남 부동산의 신화를 부러워하는 사람이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영 설득력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1970년대 후반 강남 개발이 활성화되며 ‘북부인’이 등장하면서 전업주부일지라도 “훌륭한 ‘재테크’ 능력”이 현모양처의 요건 중 하나로 꼽히기 시작했다(395쪽)는 통찰이나, 서울 시민들이 더 살기 좋은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도시개발이 추진된 것이 아니라, 국가 권력층과 유학생 엘리트들이 수도 서울이 외국에 그럴듯하게 보이기를 원해서 도시 재개발이 시작되었다는 설명(261쪽) 역시 흘려들을 수 없다.
1960~70년대 서울의 표상을 그려낸 작가 16인의 소설 110여 편은 어쩌면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어엿한 사료史料로 기능한다. 수년간에 걸친 지은이의 노력 덕분에 소설만으로도 아파트 붐, 와우아파트 붕괴, 광주대단지사건 등 굵직한 사건을 좇아갈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기록’의 틈을 채우고 기억의 결을 메우는 데 성공한 대목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호철의 《서울은 만원이다》는 손정목 선생이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비판했을 만큼 사창이 존재하지도 않는 서린동을 왜 여주인공인 창녀가 사는 동네로 설정했을까. “대중들은 일제하의 서린동과 그 근방에 기생촌이 있었던 사실을 자연스럽게 상기하면서, 기생에서 사창으로 약간의 자유연상에 따른 논리적 비약을 거쳐 이 지역에 사창이 있다는 허구적 설정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51쪽)
광화문 세종로 뒤편에 있던 예총회관과 수송동 기마경찰대에 대한 기억을 복원하거나(213~217쪽), 1966년 미국 존슨 대통령의 방한 당시 평범한 사람들이 느꼈던 비애와 고통의 감정을 되새기는 장면(262~265쪽) 등도 그 사례에 해당할 것이다.
“지식인을 포함하여 수많은 관료, 직장인, 대학생들이 술을 마시고 함께 종삼을 방문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 심지어 시인 고은은 《1950년대》라는 책에서 실명을 거론한 단 8명을 제외하고는 “기성작가·신인·문학 지망생을 통틀어서 그곳에 가지 않는 자는 없는 것이다”라고 단언했다”(94쪽)란 구절은 또 어떤가.
도시의 잊힌 주름들을 파고들다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의 역사에는 기억 속에 접혀서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안의 주름들 같은 틈새들이 있다. 이 책은 우리가 잠시 잊고 있었던, 그러나 현재의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 변화의 계기들을 포착한다.
“무엇보다도 한국전쟁 때 월남한 피란민 구보 씨에게 통행금지 제도는 일상 속에서 ‘전쟁’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통행금지가 가까워지면 모든 사람이 조급해진다. 어디론가 떠나려는 사람들. 빨리 집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이 서로 교통의 순서를 다툰다. 택시는 금방 난폭해진다. 모든 서비스가 거칠어진다. 피난민들이 마지막 열차에 매달리는 풍경이다. ‘막차’ 그렇다. 이리하여 6·25의 얼굴은 밤마다 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낸다. 전쟁의 기억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웃음이 나온다. 하도 전쟁 속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전쟁을 평범한 것으로 알게끔 취해버린 것뿐이 아닌가”(최인훈의 소설 인용문). 이 논리에 따르자면, 무엇이든 ‘빨리빨리’ 해야 하는 한국 사회의 습성은 통행금지 제도에서 비롯된 것이며, 더 깊게 파고들면 그 기원은 전쟁에 있다.”(344쪽)
오늘날 서울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시골에 대한 오해와 환상이 이미 1970년대 중반에 형성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장면은 어떠한가. “그들이 떠나온 시골은 도시의 착취 때문에 낙후되고 촌스러워진 시골도 아니고, 새마을운동이라는 국책사업이 홍보하듯 잘 사는 시골의 모습은 더더욱 아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더이상 자신과 무관한 공간으로 신비화해 만든 환상은 현실에서 동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오래전에 시골을 떠나온 자신을 우월한 위치에 놓으려는 서울 사람의 태도다. 서울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한 이러한 자신감과 환상은, 서울과 시골이라는 중심과 주변의 간극을 더욱 크게 만드는 폭력에 불과하다.”(503쪽)
드라마보다 드라마틱하다
소설이란 사료를 캐내고, 먼지를 털고, 해석을 했으니 ‘이야기’로서의 재미 또한 이 책의 미덕이다.
“서울에 가고 싶어요, 단지 그거뿐예요.”(64쪽)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에서 주인공 윤희중이 틀어박혀 있던 바닷가의 집에서 하인숙과 사랑을 나눈 후, 하인숙이 처음 꺼낸 말이다. 지은이는 “이는 일반적인 연인들이 정사 후에 할 만한 말은 결코 아니다”라면서 맹목적인 서울에 대한 맹목적 동경 혹은 서울중심주의를 보여준다고 부연한다.
미아리고개 위에 지은 처남의 판잣집을 소재로 한 하근찬의 〈삼각의 집〉에서 ‘나’와 아들이 그 집을 보자마자 ‘국제 명작 사진첩’에 실려 있던 미국의 개집 사진을 동시에 떠올리는 장면은 어떠한가. 이는 서울의 도시빈민은 지구상의 계급으로 보면 미국에 사는 개 정도의 위치라는 자각을 불러일으키는 장치인데 우리가 잊고 있던, 그러나 절절한 기억이 되살아나지 않는지.
“신촌역에 기차가 정거했을 때는, 그곳이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 같은 느낌이 들어서 바로 눈앞에 보이는 이화여대가 마치 서울에서부터 기차 꽁무니에 붙어 왔다가 기차가 서니까 슬쩍 내려서 시치미 떼고 거기에 서 있는 것처럼 괴기하게 눈에 비쳤다.”(274쪽) 1966년 쓰인 김승옥의 소설 〈다산성〉에 나오는 이 구절은 또 어떤가.
문학 텍스트를 새롭게 읽다
기본적으로 문학연구자가 쓴 역사서이다. 이 책은 문학과 역사가 만난 지점에서 소설과 역사를 비교하고 조율하고 있다. 그래서 ‘사료’로 삼은 적절한 텍스트를 찾고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지은이의 문학적 내공이 어우러져 있다.
최인훈의 연작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는 1968년 서울에서 전차가 사라지고 “좌석버스란 이름의 입석버스”가 등장한 모습이 나오는데(197쪽) 구보 씨는 버스를 못마땅해 한다. 느릿느릿한 전차에 비해, 빠른 출근길 버스는 전투적 삶의 대열에 재빠르게 올라타는 경쟁을 권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소설의 후반부에 “고등학교 학생 하나가 구보 씨의 옆구리를 팔굽으로 내어지르면서 버스에 올라가고 문은 닫히고” 버스가 떠나버려 구보 씨가 결국 버스를 놓치는 장면을 집어내는 솜씨는 탁월하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의 권 씨는 저항의식 덕분에 비로소 고귀함을 가지게 되는 전형적인 민중상을 벗어나 전혀 불필요해 보이는 아홉 켤레의 구두로 ‘인간의 품격’을 가지게 되는 인물로 그려졌다. 광주대단지사건의 철거민들과 적극적으로 연대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가진 지식인의 손길에 의해 사후적으로 가공된 한계 때문이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그 때문에 전형적인 민중의 형상에 갇히지 않은 인물이 탄생한 것이다”(332쪽)란 분석 역시 지은이의 소설 읽기 수준을 보여준다.
통찰은 깊고 분석은 날카롭다
사실의 모자이크만으로는 제대로 된 역사서라 할 수 없다. 때문에 소설을 사료로 동원한 이 책 역시 곳곳에서 지은이의 통찰과 해석이 드러나는데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 적지 않다.
“2000년대 이후 서울시장들의 주요 정책은 ‘김현옥 지우기’와 ‘김현옥 따라 하기’를 동시에 하는 것이었다. 이미 뚫은 터널과 도로를 없앨 수는 없지만, 그가 세운 고가도로들을 부정하거나 잘못된 결과들을 되돌리는 것 자체가 공이 되기 때문이었다.”(187쪽) 김현옥 전 시장이 현대도시 서울의 탄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제시한 뒤 하는 지은이의 지적이다.
“사실 강남 개발의 숨은 역군은 황량한 황무지에서 아파트를 건설한 노동자들이 아니라 부동산 중개업자와 투기꾼들일 것이다. 정부와 서울시는 숨은 공로자가 아니라 그것을 노골적으로 조장한 사람들이었다.”(387쪽) 현재 강남에 살고 있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이든, 강남 부동산의 신화를 부러워하는 사람이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영 설득력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1970년대 후반 강남 개발이 활성화되며 ‘북부인’이 등장하면서 전업주부일지라도 “훌륭한 ‘재테크’ 능력”이 현모양처의 요건 중 하나로 꼽히기 시작했다(395쪽)는 통찰이나, 서울 시민들이 더 살기 좋은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도시개발이 추진된 것이 아니라, 국가 권력층과 유학생 엘리트들이 수도 서울이 외국에 그럴듯하게 보이기를 원해서 도시 재개발이 시작되었다는 설명(261쪽) 역시 흘려들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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