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역사이야기 (관심>책소개)/2.서울이야기

경성의 주택지 : 인구 폭증 시대 , 경성의 주택지 개발

동방박사님 2022. 8. 16. 10:28
728x90

책소개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개발 열풍이 불었을까. 주택과 주택지에 대한 열망과 좌절을 어떻게 봐야 할까. 『경성의 주택지: 인구 폭증 시대 경성의 주택지 개발』은 이런 호기심에서 출발한다. 저자는 집을 지으려는 사람과 지어주는 사람에 의해 주택 공급이 이루어지던 조선 시대와 달리 개발업자에 의한 주택지 개발이 이루어지게 된 원인을 ‘인구 폭증’ 때문으로 본다. 조선 시대 500여 년 내내 10만에서 20만 내외로 유지되던 한양의 인구가 불과 30여 년 만에 100만에 육박하게 되면서 일제강점기 경성은 엄청난 주택난에 시달리게 된다. 이때 개발자나 개발회사들이 앞다투어 대규모 필지를 사들이고 택지로 개발해 사람들에게 비싸게 분양했다.

이 책에서는 당시 우리 건축가들의 주택 개량에 대한 다양한 실험과 시도도 엿볼 수 있다. ‘건축왕’으로 알려진 정세권의 한옥 개량 실험, 조선 재래주택의 평면형식 개량, 주방과 온돌, 변소 등의 개량을 꾸준히 제시한 박길룡의 주택개량운동, 한일절충 또는 한양절충식 H자형 주택을 제시한 김종량의 하이브리드 주택 등 조선인 건축가들의 재래주택 개량 의지를 읽을 수 있다.

 

목차

책을 펴내며

우리나라의 대표 한옥단지, 가회동과 건축왕 정세권

우리나라의 대표 한옥단지, 가회동 | 건축왕이자 민족운동가, 정세권 | 정세권은 왜 한옥에 주목했나 | 정세권의 브랜드 주택, 건양주택 | 20세기 한옥박물관, 가회동 31번지와 33번지 | 중당식 주택과 중정식 주택의 결합 실험 | ㄷ자 표준형 주택 실험 | 다양한 형태의 주택 실험 | 가회동 사람들 | 가회동 한옥단지의 가치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북촌의 서양식 주택

북촌은 한옥마을이 아니다 | 조선인 상류층 우종관과 문화주택 | 서양식 이층집, 문화주택에 대한 환상과 열기 | 우종관이 지은 두 동의 서양식 주택 | 서양식 주택을 향하여 | 일본식 중복도형 평면 | 그래도 온돌은 못 버려 | 조선인 상류층의 ‘삼중생활’

서울의 중심, 인사동 일대의 변화와 박길룡의 조선 주택개량운동

서울의 중심, 인사동 일대 | 일제강점기 인사들의 주택 개량에 대한 고민 | 박길룡과 과학운동 | 조선 주택 조사와 문제점 인식 | 조선가옥건축연구회의 설치와 주택개량운동 | 문화주택 비판 | 중정식 배치냐, 집중형 배치냐 | 부엌의 개량 | 온돌의 개량 | 변소를 비롯한 기타 개량 | 박길룡 조선 주택 개량의 종합안 | 박길룡 조선 주택 개량안의 실제, 민병옥 가옥과 각심재

다이너마이트로 만든 삼청동 주택지와 김종량의 하이브리드 실험주택

신성하고도 수려한 동네, 삼청동 | 다이너마이트로 만든 주택지, 갈등과 대립 | 건축가이자 정치가, 언론인 김종량 | 초기 실험작, 혜화동 주택 | 김종량의 대표작, 삼청동의 하이브리드 주택

이상적 건강주택지, 후암동

조선인의 가회동 vs. 일본인의 후암동 | 건강한 주택지를 찾아서 | 조선인의 후암동에서 일본인의 삼판통으로 | 농사짓던 땅이 경성 최고가의 고급 주택지로 | 후암동 주택지 개발의 시작, 조선은행 사택지 | 경성의 3대 주택지, 학강 주택지 | 그외 주택지 개발 | 후암동의 문화주택 | 서양식 주택으로 보이도록 | 일본식 주택 계획의 관성 | 일본인의 온돌 수용 | 오카베집 또는 적산가옥의 변화

한양도성의 훼철과 고급 교외 주택지 개발, 장충동

조선의 수도 한양의 경계, 한양도성의 운명 | 조선시대의 미개발지, 남소동 | 국가 제사시설 장충단이 공원으로 | 요정과 유곽의 등장 | 교외 주택지 개발 | 주택지 개발의 동진을 알린 첫 주택지, 소화원 주택지 | 국유림 해제 및 불하와 함께 탄생한 주택지, 남산장전고대 주택지 | 국책회사에 의한 고급 주택지 조성, 장충단 주택지 | 최신 고급 주택의 각축장 | 해방 후 고급 주택지 장충동의 위상

그들의 전원주택지, 신당동

전원주택지의 탄생 | 전원, 전원도시, 전원주택의 개념 | 전원도시 개념의 유입 | 국책회사에 의한 전원주택지 개발 | 모델하우스 전시와 분양 팸플릿, 주택도집 발간 | 전원주택지 탄생의 명과 암 | 남산주회도로 부설과 한남동 개발

경성의 학교촌과 조선인의 문화촌, 동숭동과 혜화동

서울의 오래된 학교촌, 그리고 조선인의 문화촌 | 조선시대 최고의 국립 교육기관 성균관의 소재지 | 백동수도원으로부터 시작된 천주교 타운의 형성 | 경성제국대학의 건립과 그 영향 | 관립학교에서 개발한 관사지 | 경성제국대학 교수들의 문화주택지, 약수대 | 조선인들의 문화촌 형성과 실험적인 주택

한양도성 밖 첫 한옥 신도시, 돈암지구

의외의 한옥단지 | 조선시가지계획령의 공포와 경성의 토지구획정리사업 | 경성의 첫 토지구획정리지구, 돈암 | 한양도성 밖 첫 한옥 신도시의 탄생 | 돈암지구 한옥단지의 개발자들 | 돈암지구 내 주목할 만한 한옥: 2층 한옥, 연립한옥, 돈암장 | 돈암지구에 대한 기억

한강 너머의 이상향, 흑석동 그리고 토지 투기의 확산

노량진과 동작진의 사이, 흑석리 | 한강철교와 한강인도교, 한강신사의 건립 | 장수촌이자 별장 주택지를 지향한 명수대 주택지 | 계획의 변경, 학원도시의 조성 | 병참기지정책에 따라 서쪽으로 번지는 토지 투기 열풍

최신 주거문화의 전시장, 충정로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는, 한양도성의 서쪽 | 경성의 또 다른 3대 주택지, 금화장 | 서북쪽으로 퍼져나가는 주택지 개발 | 수직으로 적층된 새로운 주택, 아파트 | 일제강점기 경성의 아파트 | 최고(最古)의 철근콘크리트조 아파트, 충정아파트 | 철근콘크리트를 사용한 고급 주택, 죽첨장 또는 경교장

관에서 개발한 주택지, 관사단지와 영단주택지

관사와 관사단지 | 일본인들의 북진과 관사단지 조성 | 궁궐 내 관사단지 개발 | 관사의 건축적 특징 | 조선주택영단의 설립과 영단주택의 공급

찾아보기
참고문헌
 

저자 소개

저 : 이경아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특별시 한옥문화과 한옥정책연구팀장을 거쳐 현재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건축학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일제강점기 문화주택 개념의 수용과 전개」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한국의 근대건축 및 도시 변화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건축답사수첩』(2006, 동녘, 공저), 『한국건축개념사전』(2013, 동녘, 공...
 

출판사 리뷰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주택 공급은 짓고자 하는 사람과 지어주는 사람만 존재하는 일종의 주문생산 방식이었다. 그런데 100여 년 전, 일제강점기 경성에서부터 크게 변화하기 시작한다. 인구가 갑작스럽게 늘어나고 엄청난 주택난으로 몸살을 앓게 되면서 주택 공급 방식도 바뀌게 된 것이다.
_009쪽에서

100여 년 전에 시작된 우리나라의 주택지 개발 열풍

“…그 덕에 5년 전쯤 재건축 들어가는 대치동 아파트를 장만할 수 있었다. 내 이름으로 등기했다. 13억원인가 했는데, 재건축 끝난 지금은 23억~24억원대로 10억원가량 올랐다.”(“증여세 없는 증여? 다 방법이 있죠”, 《한겨레 21》 제1287호, 2019년 11월 18일)

최근 이슈화되고 있는 2030 주거문제에 관한 기사 중 일부이다.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가장 먼저 발표하는 정책 중 하나가 집값 안정화와 주거 공간 개선 방안이다. 지금 현재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나라 주택지 개발의 기원을 추적한 『경성의 주택지: 인구 폭증 시대 경성의 주택지 개발』에서도 여러 사례를 접할 수 있다.

“도쿠가와 요리사다는 장래 토지가격이 상승할 만한 곳을 찾았는데, 하세가와 군부 사령관에게 의뢰하여 찾은 땅이 바로 이 일대 토지와 부산의 토지였고 이것을 30만 원에 매입했다. 이 땅을 1926년 마스다 다이키치가 130만 원에 매입했다고 하니….”(306쪽)

현재 충정로 3가 3번지 일대인 당시 3대 주택지로 꼽히던 ‘금화장 주택지’ 이야기이다. 시세차익을 노린 모양새가 상당히 비슷하지 않은가.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이런 개발 열풍이 불었을까. 현재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주택과 주택지에 대한 열망과 좌절을 어떻게 봐야 할까. 『경성의 주택지: 인구 폭증 시대 경성의 주택지 개발』은 이런 호기심에서 출발한다.

저자는 집을 지으려는 사람과 지어주는 사람에 의해 주택 공급이 이루어지던 조선 시대와 달리 개발업자에 의한 주택지 개발이 이루어지게 된 원인을 ‘인구 폭증’ 때문으로 본다. 조선 시대 500여 년 내내 10만에서 20만 내외로 유지되던 한양의 인구가 불과 30여 년 만에 100만에 육박하게 되면서 일제강점기 경성은 엄청난 주택난에 시달리게 된다. 이때 개발자나 개발회사들이 앞다투어 대규모 필지를 사들이고 택지로 개발해 사람들에게 비싸게 분양했다.

경성의 3대 주택지 중 하나로 불리며 신문과 잡지에 평당 공시지가와 분양가가 계속 소개되었던 학강 주택지의 경우를 통해 후암동 일대의 지가 변동 양상을 살펴보면, 개발되기 전 해당 지역 토지의 지목이 전(田)임 1910년대 말 당시에는 평당 0.55원에서 2.6원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지목이 대(垈)로 바뀌면서 1.2원에서 6원까지 상승했고, 실제 분양될 때는 10원에서 36원까지 지가가 매겨졌다고 한다.
_130쪽에서

이와 같이 경성제국대학이 지어지기 시작한 1925년 당시 기존의 평당 5~6원 정도였던 지가가 5~6배 뛰어 평당 26~30원을 호가하게 되었는데, 각종 학교가 들어서게 됨에 따라 그 학교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문방구, 서점, 하숙, 여관 등의 상가가 들어서 더욱 번성하게 될 것으로 예견되었다.
_234쪽에서

이상적인 주택지

책의 표지 이미지를 보자. 1932년에서 1936년 사이에 개발된 신정대 주택지(현 후암동 358번지 일대)의 분양공고 전단지 그림이다. 아랫부분에 크게 표기되어있는 “이상적 건강지(理想的 健康地)” 글자가 먼저 눈에 보인다. 전체 그림의 가운데에는 곧게 뻗은 도로와 격자형으로 잘 구획된 땅이 있다. 도로에는 자동차도 있다. 자동차도 다닐 수 있는 넓고 곧게 잘 포장한 길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격자형으로 구획된 땅에는 학교와 같은 생활편의시설과 함께 다양한 모양의 집이 여기저기 놓여 있다. 집 사이에는 나무를 심어 전원생활의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다. 전원의 이미지는 배경에 넓게 표시되어있는 남산의 녹지로 연결된다. 등산로 입구에는 ‘신정대약수온천예정지’ 표기와 함께 온천 시설도 표시되어있다.

1920년대 무렵부터 경성에는 많은 주택지가 개발되었다. 다이너마아트로 돌산을 해체하고 주택지로 만든 삼청동, 이상적 건강 주택지로 인기 있었던 후임동, 한양도성을 훼철하고 만든 교외 주택지인 장충동, 당시 대표적 전원주택지였던 신당동, 경성의 학교촌으로 교수와 의사가 많이 거주했던 동숭동, 한강 너머 이상향으로 그려지던 흑석동, 아파트를 비롯한 최신 주택이 즐비했던 충정로 등. 대부분 먼 곳을 조망할 수 있고 공기가 맑은 높은 지대, 주변에 녹지가 있는 곳, 교육·의료·문화시설과 같은 생활편의시설을 갖추고 버스나 전차가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로 당시 경성에서 인기 있던 주택가가 있던 동네들이다. 개발자들은 주택지에 별도의 브랜드를 붙이고 신문이나 잡지에 광고하고 분양 팸플릿을 배포하는가 하면 기자 설명회도 열어 이상적인 주택지로 선전했고 사람들은 열광했다고 한다.

그중에서 경성의 3대 주택지로 꼽히던 곳이 있었는데, 1925년, 1927년, 1928년 3차례에 걸쳐 삼판통(현재 후암동 일대)에 개발된 학강 주택지, 1927년 장충동 일대에 개발된 소화원 주택지, 1928년, 1930년, 1934년 3차례에 걸쳐 죽첨정(현 충정로 일대)에 개발된 금화장 주택지이다. 주택지로 개발된 땅은 논, 밭, 산, 공동묘지나 빈민 주거지가 대부분으로 터를 일구고 살던 원주민들은 쫓겨날 수밖에 없었는데 그 과정에 대립과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모습은 지금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소화원 주택지가 각광 받은 이유는 생활편의시설보다는 조용하고 공기가 좋은 ‘교외’라는 이미지였다. 비록 한양도성 내 지역이긴 하지만 일제강점기 사람들의 인식 속에 장충단 인근이 교외라는 생각이 있었다.
_174쪽에서

금화장 주택지 올라가는 언덕 바로 앞에는 죽첨정이정목 전차역이 있었으며 인근에는 서대문소학교와 미동보통교, 죽첨보통교와 같은 교육시설, 적십자병원과 같은 의료시설, 동양극장과 같은 문화시설 등등 생활편의시설이 주택지 주변에 두루 구비되어 있었다. 이렇듯 시대의 유행을 타고 나타난 신규 주택지 금화장은 당시 사람들에게 최적의 주택지로 인식되면서 경성의 3대 주택지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_306쪽에서

조선인 건축가들의 주택 개량에 대한 다양한 실험

당시의 일반적인 한옥을 ‘중정식(中庭式)’이라 한다면, 정세권은 ‘중당식(中堂式)’이라는 평면형식을 만들었다. 중당식은 흩어져 있던 실을 가운데로 모으고 외부공간을 사방에 둬서 기존 한옥의 단점을 극복하고자 한 평면형식이다.
_23쪽에서

안방과 연결되는 부분에 벽장을 둔다거나 찬마루 밑을 저장고로 쓰는 것, 나쁜 공기를 빼낼 수 있는 흡기통과 식기나 식료품 세척을 위한 싱크대를 설치하는 등의 내용이다.
_93쪽에서

길가에 면한 부분에는 서양식으로 보이는 2층의 오카베 주택을 배치하고 안쪽에 1층의 한옥을 배치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실의 구성이나 외부공간을 분리하는 등 혜화동 주택의 H자형 주택과 유사한 점도 많지만 길가에 면한 날개채 하나를 오카베 주택으로 변화시켰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를 보인다.
_121쪽에서

이 책에서는 당시 우리 건축가들의 주택 개량에 대한 다양한 실험과 시도도 엿볼 수 있다. ‘건축왕’으로 알려진 정세권의 한옥 개량 실험, 조선 재래주택의 평면형식 개량, 주방과 온돌, 변소 등의 개량을 꾸준히 제시한 박길룡의 주택개량운동, 한일절충 또는 한양절충식 H자형 주택을 제시한 김종량의 하이브리드 주택 등 조선인 건축가들의 재래주택 개량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저자는 20세기 전반기 주택지는 우리나라의 건축·도시사에서 다양한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20세기 전반 우리 주거문화의 급격한 변화를 살필 수 있고, 주택지가 개발되면서 경성의 경계 또한 점점 확대되고 주택이 집단적으로 형성되면서 이전 한양의 모습과는 크게 다른 도시 경관이 만들어지고 있었음을 이야기한다. 이 책은 주택지 개발 주체의 개발 배경과 개발로 인한 원주민과 갈등,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해법을 모색했던 건축가들의 다양한 실험과 시공업체의 노력, 유행을 따라 실험적으로 자신의 집을 지어봤던 건축주들의 소감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임금이 기거하던 궁궐 일부나 왕족의 주택지가 관사지나 사택지로 개발되고, 양반들이 거주했던 대규모 주택지가 소규모 한옥 밀집 지역으로 바뀌는가 하면, 500여 년간 서울의 물리적 경계였던 도성이 허물어지고, 금산 정책으로 지켰던 국유지와 삼림이 훼손되며 문화주택지가 들어서는 등 조선 시대에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일들이 일어났다. 그야말로 이전 시대가 철저히 부정되면서, 도시의 성격과 모습이 완전히 바뀌게 된 것이다.
_10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