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전쟁연구 (독서)/4.태평양전쟁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 : 남방의 포로감시원, 5년의 기록

동방박사님 2022. 8. 26.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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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밀리의 서재 X 브런치북 전자책 출판 프로젝트 수상작

광기의 시대에 던져진 스무 살 청년의 삶
10년의 추적 끝에 되살아난 할아버지의 육필 원고


1941년 말, 태평양 전쟁이 터지자 조선 반도에는 가족 가운데 젊은 청년 한 명 정도는 일본군으로 징집되거나 이들을 보조하는 노동에 징용되어야 한다는 불가항력적 시대의 고통이 있었다. 4남 3녀 집안에서 차남으로 태어난 최영우 역시 형제들의 짐을 질 수밖에 없었다.

포로감시원 채용에 지원한 그는 두 달간 졸속 훈련을 받은 후 남방으로 배치됐다. 2년 만기 근무 계약직에 50엔 정도의 봉급을 받는 ‘군속’이었지만, 실상은 일본군 이등병보다 못한 최말단 대우를 받았다.

조선인 포로감시원과 연합군 포로들, 참 생경한 만남이 이국의 땅에서 이뤄졌다. 동서의 낯선 문명과 말 한 마디 소통조차 원활치 못하게 한 언어의 장벽, 그리고 음습한 밀림과 적도의 이질적인 환경 속에서 이십 대의 청춘들은 부대끼며 생존을 이어갔다. 자의적인 판단, 의지와는 동떨어진 비참한 시간과 공간 속으로 내던져진 청춘들 속에 조선인 스무 살 청년 최영우도 있었다. 결국에 그는 심신이 쇠락하고 영혼마저 만신창이가 되어 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가 젊은 시절 희미하게나마 꾸었던 꿈과 이상은 산산조각났다.

최영우가 남방에 온 지 1년도 못 되어 전세가 반전되며 연합군이 승기를 잡아 나갔다. 포로감시원 신분은 포츠담 선언으로 패전국 일본에 귀책되어 180도 뒤집힌다. 그들은 어느새 연합군의 포로가 되어 전범 재판정에 서게 됐다. 그렇게 반강제적 분위기 속에서 ‘자발적 지원’이라는 선택지를 고른 이유로, 젊은 조선인 청년들은 B·C급 전범의 낙인이 찍혔다. 유죄 판결을 받은 이는 무려 148명, 이 중 23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 책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의 패망과 연합국의 승전 처리기인 1947년까지 만 5년 동안 스무 살 조선인 최영우가 남긴 육필 원고를 10여 년 동안 그의 손자가 직접 탐사하고 새롭게 발굴해 재구성한 르포르타주다. 미지의 땅인 ‘남방’으로 떠나기 전, 사냥개처럼 날래고 용감했던 젊은 청년의 기개가 시대의 파고에 꺾이고 뒤엉킨 기록이자, 스무 살 청년이 간직한 애틋한 감정과 로망도 흘긋흘긋 묻어나는 진솔한 기록이기도 하다.

스무 살 최영우,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창씨개명’과 ‘내선일체’의 시대 한가운데에서 무너질 것 같지 않던 제국주의에 반강제적으로 투사된 청춘이었다. 위안부와 강제 징용 등 큰 이슈에 묻혀 말 한 마디 못하고 숨조차 죽여야만 했던 시대의 아픈 손가락을 들춰 보며, 뒤늦게나마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목차

여는 글
평범했던 스무 살 청년 5

포로감시원 3년, 그리고 포로 신분 2년 12

이야기에 들어가며
스무 살의 젊은 청년 최영우 36
포로감시원의 정체 46

1장. 우리는 남방으로 간다

끝나지 않는 항해 53
육지를 밟다 61
말랑 제 5 분견소 69
화란인들이 살던 주택가와 휴양지 75
위안소 11호실 81
자카르타 총분견소로 이동하다 86

2장. 급박해지는 전선

수마트라행 포로 수송선의 침몰 95
일반인을 억류소로 몰아넣다 105
교통망 개척을 위한 포로들의 대이동 111
하푸카스 여인과의 만남 119
친구의 충격적인 증언 129
글로독 수용소로 전근하다 141
포로가 된 독일의 잠수함 승무원 146

3장. 일본의 항복 선언

천황의 축어를 읽다 155
조선인 민회 결성 163
인도네시아 독립군과 화란군 사이의 전투 168
갑작스러운 승선 명령 175
싱가포르 창이 전범 수용소 179
고통스러운 수용소 생활 186
치피낭 형무소 192
석방과 교수대 사이에서 197

이야기를 마치며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204
미완성의 일기 211

부록
포로감시원의 전범 재판에 관하여 218

참고 자료 224
도판 출처 227

 

저자 소개 

저 : 최영우
 
1923년 전북 남원 서도리에서 태어났다. 전주공업전수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스무 살이 되던 해에 포로감시원으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해 인도네시아 자바 섬의 여러 수용소에서 근무했다. 종전 후 전범 용의자가 되어 싱가포르 창이 형무소, 자카르타 치피낭 형무소에서 복역하고 1947년 9월 히로시마를 거쳐 한국으로 귀국했다. 생전에 틈틈이 포로감시원 시절을 기록으로 남겼다. 월드컵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던 2002...
 
저 : 최양현
 
첨단영상기술 기반의 실감콘텐츠와 영화를 제작하는 ‘파란오이’ 대표 겸 감독. 서울예대에서 영화 연출, 중앙대에서 국문학, KAIST 문화기술대학원에서 첨단영상기술을 공부했다. 영화 <조치원 해문이> <지하실> <엄마를 부탁해> 다큐멘터리 <우포늪의 사람들> TV 단막극 <독도평전> 등을 제작했다. 외조부가 남긴 글을 해제하고 보충, 재구성했다.
 
 

책 속으로

원고지 첫 장을 읽던 순간의 전율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가 남긴 글을 읽는다는 것. 일본 영화 [러브레터]에서 죽은 후지이 이츠키의 행적을 찾아 헤매는 히로코가 되었다고나 할까.
--- p.6

포로감시원이라는 직업을 선택했기에 역사의 파고 속에 몸을 담글 수밖에 없었고, 그 물결의 압도적인 위력 끝자락에 애처롭게 흔들리는 조각배 같았던 그의 내면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다.
--- p.11

군속은 군인이 아닌 군대 소속 공무원이다. 전쟁터에서 직접 총을 들고 싸우지 않기 때문에 안전하고, 월급도 많이 주니 좋은 기회다.
--- p.42

대양의 넓은 바다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이국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 그래, 우리는 총을 쏘며 적군을 죽이는 전쟁을 하러 가는 것이 아니야. 우리는 단지 공무원일 뿐이야. 포로감시원이지. 나는 주어진 임무만 잘 소화하면 돼. 2년이다. 2년이면 제법 돈이 모여 있겠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일 거야.
--- p.44

지난 일주일간의 항해는 정말 악몽이었다. 현해탄의 파도는 매우 거칠어서 항해를 처음 경험하는 우리들은 심한 뱃멀미를 하고 여러 끼니를 챙기지 못했으며 그나마 먹은 것도 죄다 게워냈다.
--- p.53

그래도 잊지 말자. 우리는 지금 새 출발을 하는 것이다. 일본인 군인이나 조선인 군속이나 다 같이 미지의 세계, 남방으로 간다. 목적지에 닿으면 서로 제 갈 길을 갈 것이고 그 임무와 활동에 따라 운명이 달라질 것이다.
--- p.57

이곳 말랑에 있는 수용소는 제 5 분견소라 불리고, 이곳에서 관리하는 포로는 약 오천 명이다. 수용소 주변에는 철조망과 암페라가 둘러쳐져 있어 외부 세계는 볼 수가 없다.
--- p.69

휴일을 이용해 조금 큰 거리로 나가 보았다. 멋진 야자나무 가로수가 줄지어 있는 고급 주택가 안 정원에 광택으로 번들거리는 승용차 두 대가 보인다. 천황의 친척이 전선을 시찰하러 와서 묵는 중이라고 한다.
--- p.76

젊은 화란인 학자 한 사람이 마중 나와 인사한다. 그의 신분이 포로이기에 우리는 지금 그를 감시하러 온 것이다. 그는 식물의 잎을 따서 가스 불에 말린 다음 표본을 작성하고 있다. 그 작업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꽤나 집중하는 모습이다.
--- p.79

전쟁터에서 인간 하나하나의 운명은 군 간부들 책상 위의 명부 안에 체크된 점의 형태로 결정된다. 우리도 이곳 말랑 수용소의 철수 작업을 단행한다.
--- p.87

어느 포로였던가, 이런 말을 한 것이 기억난다. “일본군은 어딜 가나 손쉽게 쌀을 구하고 밥통으로 금방 익혀 먹지. 하지만 우리들은 빵을 만들고 수프를 끓이는 사이에 시간을 다 빼앗겨 버렸어. 그래서 포로가 된 거야.”
--- p.90

정오쯤 되었을까. 천지가 떠나갈 듯 ‘꽝!’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진동과 함께 배가 온통 아수라장이 된다. 배는 뒤뚱거리며 조금 나아가다가 뱃머리부터 급히 기울기 시작한다. “바다로 뛰어라! 멀리 피해!”
--- p.96

평화가 올 날만을 기대하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었는데, 이제 설상가상으로 억류소에 갇힌 신세가 된 것이다. 그다음으로 무슨 격변이 몰아닥칠지는 누구도 예상하기 어렵다. 우리처럼 패잔 민족의 서러움이 뼈에 사무칠 것이다.
--- p.109

수용소 안에는 식용으로 기르는 염소들도 있다. 하루는 이들을 먹일 나뭇잎을 따기 위하여 리어카를 끌고 대여섯 명의 포로들과 주택가로 나갔다. 우리는 이 일을 ‘감빙 마가낭’이라고 부른다. 감빙 마가낭은 요즘 우리의 일과다.
--- p.121~122

우리가 군복을 입고 군속의 문에 들어선 지 벌써 만으로 두 해가 지났다. 약속된 기한이 지났는데도 우리와 교대할 부대는 오지 않는다. 하긴, 교대 인원을 수송할 배조차도 없을 텐데. 배가 있다면 군수 물자를 우선 수송해야 할 형편이다.
--- p.131

“그래, 이 전쟁은 빨리 끝나야지. 당신은 코리아 사람이지?” 나는 당황했다. 그들은 우리의 국적을 정말로 알고 물은 것일까. 그러나 나는 단호히 대답했다. “아니다. 나는 일본인이다, 일본인.”
--- p.133

며칠 후 나는 다른 수용소로 근무지가 바뀌었다. 너무 많은 곳을 돌아다녀서 이제는 전근 명령을 받아도 별 감흥이 없다. 이번에 배정받은 곳은 글로독에 있는 조그마한 수용소로, 전쟁 전에는 형무소로 쓰였던 곳이란다.
--- p.141

1945년 8월 14일, 라디오에서 내일 정오에 천황의 축어가 있을 것이라고 예고했다. 지금까지 그런 일은 없었기에 우리는 모두 15일 정오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정작 그 시간에는 아무 말이 없었고, 저녁이 되니 장교 회의가 소집되었다. 다음 날인 16일, 사병들에게도 항복의 발표문이 공시되었다.
--- p.156

그러나 그다음 조항이 꺼림칙하다. 우리가 관리한 포로들은 오랜 시간 고생을 했다. 억류자 수용소에서는 매일같이 노인과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죽어 나갔다. 이제 처지가 바뀌었으니 그들은 우리를 어떻게 취급할까?
--- p.161

8월 15일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우리는 일단 무기를 반납하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주택가의 가옥 몇 채를 점거한 후 조선인이 집결했다. 우리는 스스로를 ‘조선인 민회’라 명명했다.
--- p.163

우리에게는 건물 안을 구석구석 들여다볼 자유도, 권한도 없다. D 블록에 들어온 사람은 감방과 좁다란 뜰, 식당을 오르내릴 수 있을 뿐, 끝까지 D 세계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다른 블록에 가려면 달나라에 가는 것만큼 많은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 p.181

어느 날, 가는 나무에 걸쳐 놓은 천장 서까래 위 기왓장이 파손되어 비가 약간 샜다. 그것은 엊그제 인도네시아 독립군의 총탄이 뚫은 것이다. 하마터면 기와 파편에 크게 다칠 뻔했다. 감방 너머 어딘가에서 산발적으로 총성이 울린다.
--- p.196

나의 운명은 실로 풍전등화 격이다. 언제 교수대가 나를 부를지 모른다. 이 머나먼 이국땅에서 겪는 운명의 장난 치고는 너무 가혹하다. 다른 감방에 남아 있는 자들은 서로의 심정을 헤아릴까?
--- p.199

예전 생각이 난다. 우리가 포로들을 감시했을 때에 약간의 친절과 연민을 보였더라면, 저들도 지금 우리에게 두 배의 호의와 동정으로 갚으련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 p.200

어떤 이는 재판 끝에 사형을 언도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중형을 언도받은 이는 다른 감옥으로 이감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감옥 안 포로감시원의 숫자는 서서히 줄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어떠한 결과도 통보되지 않았다.
--- p.205

그의 행적을 쫓던 걸음을 멈추고 이제는 가만히 그의 내면을 되새겨 본다. 다시 하나의 가정을 해 본다. 그가 포로감시원으로 참전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 p.211

소수 위정자들의 결정으로 수행된 전쟁은 수많은 무명의 개인에게 큰 고통과 피해를 주었다. 무엇보다 전쟁의 최전선에 서야 했던 젊은이들이 희생양이 되었다. 지금이라면 서로 자유롭게 어울리며 친구가 되어 교류했을 전 세계의 청년들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어야만 했다.
--- p.213

스무 살의 청춘, 꿈 많고 패기 넘치던 청년 최영우. 이 젊은이의 꿈을 좌절시킨 그 난폭한 시대를 부질없이 원망해 본다.
--- p.214
 

출판사 리뷰

피 끓는 혈기로 꿈과 이상이 넘쳐났던 스무 살 청년 최영우. 이 젊은이를 나락으로 내밀고 폭풍 속에 허우적대도록 한 그 난폭한 시대를 부질없이 원망해 본다. 그 시기는 이 땅에서 다시는 재현되지 말아야 할, 아니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어둠의 시간이었다. 그는 빛도 보이지 않고 끝날 것 같지 않은 역사의 깊은 터널을 힘겹게 통과한 무명의 젊은이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를 함부로 폄훼하거나 나약하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그의 마음을 무 자르듯 단정 지어 헤아리고 서글퍼할 필요도 없다. 슬픔이란 단어는 이럴 때 흔히 쓰는 진부한 것이 아니다. 그는 그 나름대로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시대를 통과했고 운명처럼 주어진 결과를 감내했을 뿐이다. 엄혹한 세상이 제시한 선택지는 적었고, 그는 그 선택지 안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질풍 광기의 시대에 소수의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저질러진 전쟁은 수많은 무명의 개인에게 큰 고통과 피해를 주었다. 무엇보다 전쟁의 최전선에 서야 했던 젊은이들이 희생양이 되었다. 서로 자유롭게 어울리며 친구가 되어 교류했어야 할 전 세계의 청년들이 먹고 먹히는 살육의 현장에 있어야만 했다. 전쟁은 인성과 감성은커녕 이들에게 승리를 위해서는 인간이 지녀야 할 최소한의 인권과 존엄조차 짓밟아도 된다고 강요했고, 순수함과 열정이 가득했던 그들의 내면을 황폐화시켰다. 스무 살 조선인, 자신의 정체성조차 모호했던 그 역시 이 서글픈 비극의 역사에 반강제적으로 내던져진 젊은이들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