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역사이야기 (책소개)/2.서울이야기

경성의 건축가들

동방박사님 2022. 9. 20. 13:48
728x90

책소개

경성을 사랑한 건축가들, 그들이 남긴 또다른 이야기
대한민국 건축 1세대들의 자취를 따라서


암살, 밀정, 경성 스캔들, 모던보이 같은 일제강점기를 다룬 시대극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배경이 있다. 바로 근대건축이다. 일본은 죽도록 싫어하면서도 미쓰코시백화점 앞에서는 입이 딱 벌어졌던 사람들, 암울한 현실을 비관하면서도 경성역에서 들려오는 문명의 소리에 들떴던 사람들, 카페와 살롱에서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서구를 동경했던 민족주의자들…. 이들에게 식민지의 근대건축은 이상과 현실, 이성과 감성의 불협화음이 요동치던 장소였다.

『경성의 건축가들』은 일제가 세운 학교에서 건축을 배우고 건축가로 성장했던 일제강점기 조선인 건축가들과 비주류 외국인 건축가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수탈을 위해 만들어지는 건축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현실과 개인적 이상 사이에서 이들은 어떤 길을 택했을까? 이 책을 통해 대한민국 건축 1세대들의 삶과 그들이 남긴 유산을 오롯이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이들은 그나마 자료가 있어 이야깃거리를 남긴 사람들이다. 자료가 없어서 아예 잊힌 사람도 많다. 지은이 김소연은 시대를 풍미했던 혹은 그러지 못하고 안타깝게 저물었던 이들의 삶과 그들이 남긴 건축물이라는 유산을 이제 한번쯤 되돌아볼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아울러 그들을 통해 그 시대의 또다른 이야기들을 알게 된다면, 개발에 대한 관점과 건물의 보존 방식 그리고 언젠가 역사가 될 이 시대 건축가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조금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갖는다.

 

목차

들어가는 말
1장 탄생과 성장, 경성고등공업학교와 조선총독부
2장 최초이자 최고 건축가의 이면, 박길룡
3장 불꽃 대신 선택한 건축, 박동진
4장 국립묘지의 애국지사, 강윤
5장 디아스포라의 섬, 박인준
6장 건축구조의 달인, 김세연
7장 장관직만 다섯 번, 김윤기
8장 만주국으로 간 수재, 이천승
9장 시인 이전에 건축가, 이상 혹은 김해경
10장 우리말 건축용어를 찾아서, 장기인
11장 동학 교주가 왜? 나카무라 요시헤이
12장 식민지 조선에서 인생 역전을, 다마타 기쓰지와 오스미 야지로
13장 한 알의 겨자씨, 윌리엄 보리스
14장 틈새시장 속으로, 전통건축 장인의 변신
15장 청년 건축가의 반격, 청와와 젊은 그들
나가는 말/주/사진 출처

저자 소개

저 : 김소연
 
김소연은 연세대학교에서 철학과 건축공학을 전공했다. 미국 텍사스A&M대학교(Texas A&M University)에서 건축학석사, 부산대학교에서 건축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과 미국 서배너, 뉴저지에서 건축설계와 리서치를 했고, 중국 칭다오이공대학 국제학부 건축학과 교수를 지냈다. 지금은 건축스토리텔링연구소 ‘아키멘터리’ 대표를 맡고 있다. 좋아하는 글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이다. “나는 아무것도 ...
 

책 속으로

[암살] [밀정] [경성 스캔들] [모던보이]. 일제강점기를 다룬 시대극에 빠질 수 없는 배경이 있다. 이중성과 역설의 공간, 바로 근대건축이다. 그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분명 살 떨리는 분노와 피 튀기는 저항인데, 그곳에 녹아 있는 감성은 낭만과 동경 그리고 콤플렉스까지 미묘하다.
일본은 죽도록 싫어하면서도 미쓰코시백화점 앞에서는 입이 딱 벌어졌던 사람들, 암울한 현실을 비관하면서도 경성역에서 들려오는 문명의 소리에 들떴던 사람들, 카페와 살롱에서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서구를 동경했던 민족주의자들….
그들에게 식민지의 근대건축은 이상과 현실, 이성과 감성의 불협화음이 요동치던 장소였다. 그런 건물을 만들었던 사람들, 그중에서도 조선인 건축가들, 그들의 삶이 궁금해진 적이 있었다. 그때 주변 반응은 썰렁했다.
--- p.5

승진에서도 차별을 받았다. 총독부 건축조직은 직위가 위로부터 사무관, 기사, 기수, 촉탁, 고원 순서였다. 사무관은 행정 관료로 동경제국대학 법과 출신이 많았다. 기술직에서 최고 책임자는 기사였는데 동경제국대학 건축과나 토목과 출신들이 차지했다. 기사는 건축 실무 전반을 맡았고, 기수는 각 프로젝트를 담당했다. 일본인과 달리 조선인은 고원에서 기수까지 올라가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승진도 조선인은 대개 기수까지였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차별받던 조선인 건축가에게 기회가 온 것은 1920년대 후반부터였다. 1920년 회사령이 철폐된 이후 성장한 자산가,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개업하기 시작한 의사, 실력양성운동을 벌이던 사립학교 인사들이 건축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마침 조선인 건축가들도 어느 정도 실무를 쌓은 상황이었다. 드디어 동족의 건축주를 만난 건축가들은 백화점, 사옥, 공장, 학교, 주택, 병원, 극장 같은 건물을 독자적으로 설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식으로 설계사무소를 연 사람은 박길룡과 박인준 그리고 일제 말기에 이르러 사무소를 개설한 강윤 정도였다. 다른 건축가들은 직장을 다니면서
부업으로 설계를 하곤 했다.
--- p.20

시골 노인들도 안다던 ‘장안의 명물’은 바로 화신백화점이었다. 설계를 한 사람은 늘 조선인 ‘최초’와 ‘유일’을 달고 다닌 건축가 박길룡이었다. 조선인 최초로 경성공업전문학교 건축과를 졸업했고, 조선인 최초로 조선총독부의 건축기수가 되었다. 또 조선인은 승진해봤자 기수까지가 한계였던 건축조직에서 조선인 최초로 최고기술자인 기사에 오른 인물이다.
일제강점기에 건축사무소를 최초로 개업한 조선인도 박길룡이었다. 그의 이름을 딴 ‘박길룡건축사무소’는 잘나갔다. 하루에 한 채씩 주택을 짓는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종로 앞길에서도 뒷길에서도 박길룡이 설계한 건물을 볼 수 있다고 할 정도로….
--- p.28

박동진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건축은 “전통과 인습에 얽매인 건축에 반항”하는 모더니즘 건축이었다. 박동진이 여러 글에서 소개했던 이상적인 건축가는 프랑스의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 오스트리아의 오토 바그너(Otto Wagner), 네덜란드의 헨드릭 베를라헤(Hendrick Petrus Berlage) 그리고 러시아 구성주의 건축가들이었다. 모두 각국을 대표하는 모더니즘 건축의 선구자였고, 구시대의 고전 양식에서 벗어난 신건축을 주창했다. 장식적인 요소를 부정하고 산업화?공업화?기계
화?국제화 시대를 반영한 기하학적 형태와 재료를 추구했다. 당연히 박동진도 그런 건물을 설계했을 것 같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의 대표작은 보성전문학교 본관(1934년, 지금의 고려대학교 본관)과 도서관(1937년)이다. 모두 고딕 양식으로 지은 석조건축이다. 모더니즘 건축이 비판했던 전근대적 형태와 재료다. 그렇다면 박동진의 글은 모더니즘 건축을‘지향’하고 설계는 모더니즘 건축을 ‘지양’한 것일까. 이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 p.52-53

경교장의 원래 이름은 죽첨장(竹添莊)이었다. 죽첨은 일본말로 다케조에(竹添)다. 갑신정변 때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 1842~1917)가 그 부근에 살았는데, 일제는 그를 기념하기 위해 그 일대를 다케조에마치(竹添町, 죽첨정)라 불렀다.
1938년 7월 죽첨정에 서양 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은 대저택이 준공되었다. 죽첨정 1정목 1번지에 들어선 저택은 죽첨장이라 불렸다.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저택은 정면이 3분할된 좌우 대칭형이었다. 정면 현관 포치의 크기만 봐도 일반 주택은 아니었다. 1층 좌우에 튀어나온 원형창과 2층 중앙에 들어간 아치창은 자칫 밋밋할 수 있는 입면에 요철의 깊이감을 줬다. 가운데 돌출된 지붕창도 단조로움을 덜어냈다. 내부 공간은 훨씬 호화로웠다. 샹들리에가 있는 응접실과 식당, 당구실과 전용 이발실, 썬룸에 냉난방 장치까지 보통 사람들은 듣도 보도 못한 시설이었다.
건축주 최창학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최대의 광업자였고 ‘광산왕’으로 통했다. 최창학은 백만장자도 아닌 천만장자답게 각종 친일 단체에 가담했으며 헌금 규모도 남달랐다. 죽첨장은 돈 냄새, 권력 냄새를 풍기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접대용 건물이었다. [조선과 건축]에는 설계 시공자가 일본 건설회사 오바야시구미(大林組)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설계한 사람은 조선인 건축가 김세연이었다.
--- p.100-101

이천승은 1950년대 서울시도시계획과 1960년대 남서울도시계획을 입안했다. 1950년에는 국회전문위원으로 위촉되어 건축법, 건축사법, 도시계획법 초안을 만들어 건설관련법의 기초를 마련했다. 1953년에는 경성고공 후배인 김정수와 ‘종합건축연구소’를 설립했다. ‘종합’이란 이름처럼 건축계획, 설계, 구조, 전기, 설비, 도시계획 분야를 종합적인 시스템으로 운영하는 대형 설계조직이었다. 이런 방식은 한국에서 처음이었고, 본격적인 설계사무소의 출발점이 되었다. ‘종합건축’은 탄탄한 인맥으로 구성되었는데, 이후 선후배 건축가들이 세대를 이어가며 경영했다.
종합건축의 주요 작품은 그 시대의 대표작이었다. 시민회관(1956년, 화재로 소실), 신신백화점(1956년, 철거), 국제극장(1957년, 철거), 명동성모병원(1958년), YMCA 본관(1960년), 장충체육관(1963년), 연세대 학생회관(1966년), 조흥은행 본관(1966년), 국회의사당(1969년), 한국과학원(1972년), 서울대 중앙도서관(1972년), 서울서부역사(1974년), 한국증권
거래소(1975년), 국회도서관(1981년), 국립중앙박물관(1982년), 한국조폐공사(1985년), 목동청소년회관(1986년) 같은 굵직한 프로젝트가 많다.
--- p.139

1933년 이상은 스물네 살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총독부 건축기수 자리에서 사직했다. 1926년 경성고공 입학에서부터 1933년 총독부에서 사직하기까지 7년 동안 이상의 삶을 뒷받침한 것은 건축이었다. 시와 그림을 갈구하던 그가 섭취하던 자양분도 건축이었다. [이상한 가역반응] [▽의 유희] [조감도] [삼차각설계도] [건축무한육면각체] 같은 시의 제목도, 기호와 숫자, 수학 수식을 사용한 시의 형식도, 상대성원리와 공간적 상상력을 다룬 시의 내용도 이상이 건축에 몸담고 있던 시절에서 기인했다. 문예지가 아닌 건축잡지에 실린 시들은 대단한 관심도 질타도 받지 않았지만 그의 생활은 안정적이었다. 마치 태풍 전야의 고요함처럼.
이상에게 건축과 문학의 공존은 딱 거기까지였다. 1933년 건축계를 떠나 1937년 도쿄에서 사망할 때까지 4년간의 삶은 일탈과 기행으로 파란만장했다. 건축잡지가 아닌 대중 신문에 드러난 그의 시들은 돌팔매를 맞았고, 그는 이단아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이상의 본격적인 문학 활동은 짧지만 강렬했다. 극과 극의 비평을 받는 가운데 그는 이상다운 이상이 되었다. 대신 건축적인 아이디어나 시어는 사라져갔다.
--- p.154
 

출판사 리뷰

일그러진 근대에서 ‘일그러진’ 건축가들을 만나다

암살, 밀정, 경성 스캔들, 모던보이 같은 일제강점기를 다룬 시대극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배경이 있다. 바로 근대건축이다. 일본은 죽도록 싫어하면서도 미쓰코시백화점 앞에서는 입이 딱 벌어졌던 사람들, 암울한 현실을 비관하면서도 경성역에서 들려오는 문명의 소리에 들떴던 사람들, 카페와 살롱에서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서구를 동경했던 민족주의자들…. 이들에게 식민지의 근대건축은 이상과 현실, 이성과 감성의 불협화음이 요동치던 장소였다.

경성의 근대건축은 한국전쟁과 개발 논리에 따라 대부분 사라졌지만, 서울 시내를 걷다 보면 고층건물 사이로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남아 있는 몇몇 건물은 아직 만날 수 있다. 경교장, 명동예술극장, 딜쿠샤, 중명전, 간송미술관, 덕수궁 현대미술관, 서울도서관 같은 건물이 대표적이다. 최근 몇 년간 ‘역사적 의미’가 깃든 근대건축에 대한 관심은 꾸준히 증가했다. 그 관심에 걸맞게 건물 보존에 관한 대중의 의식도 높아져 자칫 철거될 위기에 처했던 근대건축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역사 교육의 장으로 이용되는가 하면, 원래 형태를 일부 보존하는 형식으로 리모델링해 공공건물로 사용하는 사례도 많아졌다. 근대건축의 가치가 재평가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긍정적인 현상이다. 근대건축의 ‘역사성’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나는 건물의 ‘역할’이고, 다른 하나는 ‘건물’ 그 자체다. 이 책 『경성의 건축가들ㅊ은 우리가 재평가하고 기억해야 할 후자의 이야기, 곧 그 ‘건물’을 설계하거나 시공했던 건축가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중에서도 동경제국대학을 나와 총독부에서 근무한, 당시 건축계의 실세이자 주류였던 일본인 건축가들이 아닌, 조선인 건축가와 비주류 외국인 건축가들의 삶을 조명한다. 일제가 세운 학교에서 건축을 배웠던 조선인 건축가들, 또는 꿈을 좇아 조선으로 온 외국인 건축가들은 수많은 차별과 편견 속에서도 실력을 쌓아나갔다. 결국 일제강점기 후반 민족자본가의 등장으로 백화점, 공장, 학교, 주택, 병원, 극장 같은 건물을 자신만의 색깔로 설계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들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이라는 또다른 벽을 마주한다. 건축이라는 이상과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현실 사이의 간극을 이들은 어떻게 줄여나갔을까

친일 논란에서도 배제된 건축가들,
그들은 단지 ‘짝퉁’을 만드는 ‘B급’ 기술자들이었을까


일제가 세운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나온 조선인 건축가들이 취직한 곳은 대부분 총독부나 경성부청 같은 관청이었다. 그들이 그곳에서 했던 일은 일제의 지배와 수탈을 위한 건물을 짓는 것이었다. 부업으로 했던 설계도 건축주가 해방 직후 반민특위에 회부된 사람들의 것이 많았다. 이쯤 되면 친일 논란이 일어날 만하다. 그런데도 건축주만 논란의 대상이었을 뿐 건축가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건축가는 단지 기술자로 인식된 탓이다. 기술자는 가치중립적 존재라는 단순한 도식이 작용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편견일 뿐 그 시대 건축가들도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며 식민지라는 현실과 마주했다. 잠시 건축을 내려놓고 항일운동에 뛰어든 이들도 있었고, 민족과 조국의 이름으로 일본을 극복하기 위해 건축에 매진한 이들도 있었으며, 현실을 뒤로 하고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만주나 미국 혹은 일본으로 떠돈 이들도 있었다.

그들 작품의 색깔도 다양했다. 유행하던 모더니즘 건축만을 지향했던 사람, 옛것과 새것을 조화시키려 했던 사람, 전통의 정통성을 어떻게든 살려보고자 노력했던 사람…. 친일 혹은 저항이라는 이분법적 꼭짓점이 아닌 그 사이의 무수한 회색지대를 살았던 사람들처럼 그 시대 건축가들도 타협과 저항, 동경과 콤플렉스 사이에서 갈등하고 싸우고 변화하고 좌절했다. 일제가 급하게 모방했던 서구건축을 흉내만 내는 이른바 ‘짝퉁의 짝퉁’을 만든 ‘B급’ 기술자들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건축 1세대들의 자취를 따라서

조선인 최초로 총독부 건축기사가 되었고, 역시 조선인 최초로 종로구에 건축사무소를 연 박길룡, 3 1운동에 연루되어 만주를 떠돌다 돌아와 이후 고려대학교 여러 건물군을 남긴 박동진, 보리스건축사무소 경성출장소 일원으로 교회, 학교, 병원, YMCA, 복지시설 같은 선교 관련 건축을 주로 맡아 진행했던 강윤, 조선인 최초로 미국에서 정규 건축 교육을 받은 박인준, 최고의 구조계산 전문가로서 미쓰코시백화점, 화신백화점, 조지아백화점, 경성제국대학 본관 들을 구조계산한 것으로 알려진 김세연, 해방과 전쟁이라는 공백기에 후배 건축가들이 모일 수 있는 조직을 세우는 등 보다 큰 틀에서 역할을 수행한 김윤기, 만주의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 입사해 일본인과 함께 다롄역사, 신징역사, 투먼철도공장 들의 설계와 감독에 참여한 이천승, 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사로 근무하면서 문학에 눈을 뜬 이상, 우리말 건축용어 정리에 평생을 바친 장기인, 그리고 한국에서 새로운 삶을 연 나카무라 요시헤이, 다마타 기쓰지, 오스미 야지로, 개신교 건축선교사 윌리엄 보리스….

이 책에 등장하는 이들은 그나마 자료가 있어 이야깃거리를 남긴 사람들이다. 자료가 없어서 아예 잊힌 사람도 많다. 지은이 김소연은 시대를 풍미했던 혹은 그러지 못하고 안타깝게 저물었던 이들의 삶과 그들이 남긴 건축물이라는 유산을 이제 한번쯤 되돌아볼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아울러 그들을 통해 그 시대의 또다른 이야기들을 알게 된다면, 개발에 대한 관점과 건물의 보존 방식 그리고 언젠가 역사가 될 이 시대 건축가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조금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