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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망국 조선,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우리 한국인은 태어났다.
해방 한국, 한국인은 그 무엇과도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오월의 사회과학』을 통해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을 확고부동한 학적 언어로 정립했던 최정운 교수가 연구의 지평을 확장하여 근현대 한국과 한국인을 주제로 진행해온 오랜 연구를 15년 만에 일단락 지었다. 20세기 초에 최초로 근대 한국인의 모습이 나타난 이래 일제 식민지 시기를 거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일제 시대는 일부에서 말하듯 우리 민족과 수많은 지식인이 일제에 협력하고 굴욕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던 그런 시대가 아니었다. 그들은 일제 시대 내내 한시도 쉬지 않고 우리를 찾아 헤매고, 우리의 새로운 모습을 모색하며 그려가고 있었다. 특히 3.1운동 이후는 우리 민족의 본질을 찾아서 강한 조선인을 찾는 과업이 제시되었다. 1920년대에는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1930년대에 이르면 우리의 지식인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재정의하며 새로운 전선에서 창조적 예술이 지적 투쟁을 전개시켜 갔고 드디어 1930년대에는 강한 한국인의 모델을 발명하였다. 춘원은 우파의 입장에서, 벽초는 좌파의 입장에서 유사하면서도 상이한 두 인 물을 창시하였고 이 두 전사, 영웅의 모델은 현대 한국인에게도 중대한 의미를 갖고 있다.
해방 한국, 한국인은 그 무엇과도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오월의 사회과학』을 통해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을 확고부동한 학적 언어로 정립했던 최정운 교수가 연구의 지평을 확장하여 근현대 한국과 한국인을 주제로 진행해온 오랜 연구를 15년 만에 일단락 지었다. 20세기 초에 최초로 근대 한국인의 모습이 나타난 이래 일제 식민지 시기를 거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일제 시대는 일부에서 말하듯 우리 민족과 수많은 지식인이 일제에 협력하고 굴욕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던 그런 시대가 아니었다. 그들은 일제 시대 내내 한시도 쉬지 않고 우리를 찾아 헤매고, 우리의 새로운 모습을 모색하며 그려가고 있었다. 특히 3.1운동 이후는 우리 민족의 본질을 찾아서 강한 조선인을 찾는 과업이 제시되었다. 1920년대에는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1930년대에 이르면 우리의 지식인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재정의하며 새로운 전선에서 창조적 예술이 지적 투쟁을 전개시켜 갔고 드디어 1930년대에는 강한 한국인의 모델을 발명하였다. 춘원은 우파의 입장에서, 벽초는 좌파의 입장에서 유사하면서도 상이한 두 인 물을 창시하였고 이 두 전사, 영웅의 모델은 현대 한국인에게도 중대한 의미를 갖고 있다.
목차
제1장 한국인의 정체에 접근하는 문제
제2장 홍길동과 성춘향
홍길동의 정체
천상의 영웅 홍길동 | 홍길동의 탄생 | 홍길동 신화
성춘향의 정체
사랑과 현실 | 시련 | 춘향의 출현의 의미
근대 이전의 두 인물
제3장 신소설의 인물들과 그들의 세상
신소설에 드러나는 현실
주인공 김옥련 | 신소설의 이야깃거리 | 공간의 문제 | 저항의 흔적 | 현실의 뿌리 | 주인공 김수정 | 구한말 현실과 신소설
자연상태에서의 삶과 죽음
홉스적 자연상태 | 전대미문의 상태 | 생존의 문제 | 진화 | 계속되는 삶
자연상태와 정치
강한 국가권력 신화 | 안과 밖 | 활로 | 반역 집단 일진회 | 국가가 없는 우리 | 민족주의의 탄생과 분기 | 자연상태와 정치
신소설과 그 현실의 역사적 의미
제4장 초기 민족주의자의 두 초상
두 민족주의자의 내면
두 민족주의자와 그들의 분신 | 이성과 욕망 | 속 사람 | 지평의 확대 | 사랑의 민족주의 | 한놈과 그의 세상 | 단재의 구상
두 민족주의자의 사회적 위치
새로운 존재와 그 세상 | 전략과 투쟁 | 개화민족주의자의 새로운 출발점 | 미완의 끝, 저항민족주의의 시작
두 민족주의자의 역사적 의미
제5장 만세 후에 찾은 인물들
김동인과 민족적 과제
김동인의 문체와 인물 | 약한 자 | 마음이 옅은 자 | 강함에 관한 단서
순수문학의 시도와 강한 인간의 재발견
『배따라기』를 부르는 사람 | 성과 애정의 문제 | 야성의 예술 | 지식인 바깥의 인물 | 삵과 삼룡이 | 망가진 작품
한국 근대 소설문학의 출발
제6장 대도시 지식인의 출현
기이한 생태의 대도시 지식인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 대도시 문명과 지식인
부활을 꿈꾸는 대도시 지식인
박제가 된 천재 | 부활의 신화
대도시 지식인이라는 종자
제7장 새로운 전사들의 창조
욕망과 이성
두 번의 죽음
주인공 최석 | 첫 번째 죽음 | 결핍 | 순례자 | 첫 번째 유혹 | 두 번째 유혹 | 두 번째 죽음 | 식민지 조선과 구원
부활의 전사, 강한 조선인 만들기
제8장 민중 영웅의 창조
민중 영웅 임꺽정
천상의 영웅 임꺽정 | 벽초 식 사실주의와 ‘조선의 정조’| 임꺽정과 서림 | 임꺽정과 그의 공동체 | 민중 영웅 임꺽정
근대인 임꺽정
변신 | 유혹 | 돌아온 임꺽정 | 약동하는 심장
민중의 정체
민중의 연원 | 민중의 탄생 | 우리의 민중
반지성주의의 성격
지식인과 민중 | 저주의 안개 | 민중의 내면 | 이후의 이야기
근대적 민중 영웅
제9장 결론
제2장 홍길동과 성춘향
홍길동의 정체
천상의 영웅 홍길동 | 홍길동의 탄생 | 홍길동 신화
성춘향의 정체
사랑과 현실 | 시련 | 춘향의 출현의 의미
근대 이전의 두 인물
제3장 신소설의 인물들과 그들의 세상
신소설에 드러나는 현실
주인공 김옥련 | 신소설의 이야깃거리 | 공간의 문제 | 저항의 흔적 | 현실의 뿌리 | 주인공 김수정 | 구한말 현실과 신소설
자연상태에서의 삶과 죽음
홉스적 자연상태 | 전대미문의 상태 | 생존의 문제 | 진화 | 계속되는 삶
자연상태와 정치
강한 국가권력 신화 | 안과 밖 | 활로 | 반역 집단 일진회 | 국가가 없는 우리 | 민족주의의 탄생과 분기 | 자연상태와 정치
신소설과 그 현실의 역사적 의미
제4장 초기 민족주의자의 두 초상
두 민족주의자의 내면
두 민족주의자와 그들의 분신 | 이성과 욕망 | 속 사람 | 지평의 확대 | 사랑의 민족주의 | 한놈과 그의 세상 | 단재의 구상
두 민족주의자의 사회적 위치
새로운 존재와 그 세상 | 전략과 투쟁 | 개화민족주의자의 새로운 출발점 | 미완의 끝, 저항민족주의의 시작
두 민족주의자의 역사적 의미
제5장 만세 후에 찾은 인물들
김동인과 민족적 과제
김동인의 문체와 인물 | 약한 자 | 마음이 옅은 자 | 강함에 관한 단서
순수문학의 시도와 강한 인간의 재발견
『배따라기』를 부르는 사람 | 성과 애정의 문제 | 야성의 예술 | 지식인 바깥의 인물 | 삵과 삼룡이 | 망가진 작품
한국 근대 소설문학의 출발
제6장 대도시 지식인의 출현
기이한 생태의 대도시 지식인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 대도시 문명과 지식인
부활을 꿈꾸는 대도시 지식인
박제가 된 천재 | 부활의 신화
대도시 지식인이라는 종자
제7장 새로운 전사들의 창조
욕망과 이성
두 번의 죽음
주인공 최석 | 첫 번째 죽음 | 결핍 | 순례자 | 첫 번째 유혹 | 두 번째 유혹 | 두 번째 죽음 | 식민지 조선과 구원
부활의 전사, 강한 조선인 만들기
제8장 민중 영웅의 창조
민중 영웅 임꺽정
천상의 영웅 임꺽정 | 벽초 식 사실주의와 ‘조선의 정조’| 임꺽정과 서림 | 임꺽정과 그의 공동체 | 민중 영웅 임꺽정
근대인 임꺽정
변신 | 유혹 | 돌아온 임꺽정 | 약동하는 심장
민중의 정체
민중의 연원 | 민중의 탄생 | 우리의 민중
반지성주의의 성격
지식인과 민중 | 저주의 안개 | 민중의 내면 | 이후의 이야기
근대적 민중 영웅
제9장 결론
책 속으로
결국 이인직과 이해조의 신소설에 나타난 당시 조선 사회의 모습은 이른바 ‘홉스적 자연상태(the Hobbesian State of Nature)’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17세기 영국의 정치사상가 토머스 홉스가 그의 저서 『리바이어던』에서 제시하는 국가 이전의 상황 즉 국가를 필히 만들어야 할 ‘자연상태(the State of Nature)’와 유사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인직과 이해조의 소설이 보여주고 있는 당시의 현실, 즉 사회는 붕괴되고 개인으로 흩어져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모습이야말로 신소설이라는 새로운 이야기의 형태가 우리 역사에서 나타난 원인이었다. 루카치에 따르면 근대 소설은 “세계가 신에게 버림받았다.”는 관념에서 출발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신소설도 죄악으로 가득 찬 사회, 망한 나라, 타락한 세상이라는 판단에서 출발하였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전무후무한 ‘신소설’이라는 문학의 장르가 나타난 것이었다.
--- p.101~102
1933년 이광수의 『유정』이 발표되자 강한 조선인을 만드는 비결(秘訣)이 드디어 공표되었다.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랑으로 욕망과 이성의 갈등이 시작되고 두 힘 사이에 상승 작용이 일어난다. 그리고 두 힘을 최대한으로 확대시켜 그 사람을 죽게 한다. 그러면 그 죽은 이의 영혼은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과 주변 사람들을 강하게 만들 것이고, 그들은 끝까지 싸우는 불멸의 전사가 된다. 이것이 바로 그 비결이었다. 이는 결코 복잡한 과정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심훈은 최초로 이를 간파한 천재였고 『상록수』에서 멋지게 활용하여 불멸의 전사들을 민족 운동의 전선에 바로 배치하였다. (……) 사랑은 고통스럽지만 보람 있고 생산적인 일이었다. 소설에서 사랑은 점점 더 가혹한 시련의 과정으로 변해갔고 그 시련을 이겨나가는 과정과 마음가짐은 종교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다. 그 극단적인 예가 이광수의 『사랑』일 것이다. 사랑은 고행 그 자체로 연결되었고 작품은 더욱 더 엽기적으로, 자학적으로 변해 갔다. 1930년대 중반 조선인들은 시련과 고문에 지친 모습이었다. 한편으로는 수도승 같은 애정과 긍정의 마음이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독이 바짝 오른 모습들이었다.
--- p.426~427
일본과 중국에서와 달리 한국에서는 ‘민중’이라는 말이 지워지지 않고, 되살아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한국에서는 『임꺽정』이라는 문학 작품을 통해 ‘민중’이 말뿐이 아니라 피와 살로 이루어진, 그리고 생명력이 요동치는 존재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동북아 삼국에서 쓰여 온 ‘민중’이라는 단어는 서양 철학에서 말하는 ‘개념(槪念)’이라 볼 수는 없다. 지칭하는 대상을 고정시킬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어떤 범주의 사람들을 피동적으로 지배당하거나 피동적으로 혁명에 참여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스스로 능동적으로 혁명과 저항에 참여하는 사람들로 말하는 이상, 그 대상은 애매하며 논리적으로 말할 수 있는 ‘개념’이 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을 현재 상태로 말하는 이상, ‘민중’은 개념이 되기에는 너무나 직관적인 감각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말이며 따라서 그 말의 타당성은 논리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
--- p.101~102
1933년 이광수의 『유정』이 발표되자 강한 조선인을 만드는 비결(秘訣)이 드디어 공표되었다.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랑으로 욕망과 이성의 갈등이 시작되고 두 힘 사이에 상승 작용이 일어난다. 그리고 두 힘을 최대한으로 확대시켜 그 사람을 죽게 한다. 그러면 그 죽은 이의 영혼은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과 주변 사람들을 강하게 만들 것이고, 그들은 끝까지 싸우는 불멸의 전사가 된다. 이것이 바로 그 비결이었다. 이는 결코 복잡한 과정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심훈은 최초로 이를 간파한 천재였고 『상록수』에서 멋지게 활용하여 불멸의 전사들을 민족 운동의 전선에 바로 배치하였다. (……) 사랑은 고통스럽지만 보람 있고 생산적인 일이었다. 소설에서 사랑은 점점 더 가혹한 시련의 과정으로 변해갔고 그 시련을 이겨나가는 과정과 마음가짐은 종교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다. 그 극단적인 예가 이광수의 『사랑』일 것이다. 사랑은 고행 그 자체로 연결되었고 작품은 더욱 더 엽기적으로, 자학적으로 변해 갔다. 1930년대 중반 조선인들은 시련과 고문에 지친 모습이었다. 한편으로는 수도승 같은 애정과 긍정의 마음이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독이 바짝 오른 모습들이었다.
--- p.426~427
일본과 중국에서와 달리 한국에서는 ‘민중’이라는 말이 지워지지 않고, 되살아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한국에서는 『임꺽정』이라는 문학 작품을 통해 ‘민중’이 말뿐이 아니라 피와 살로 이루어진, 그리고 생명력이 요동치는 존재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동북아 삼국에서 쓰여 온 ‘민중’이라는 단어는 서양 철학에서 말하는 ‘개념(槪念)’이라 볼 수는 없다. 지칭하는 대상을 고정시킬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어떤 범주의 사람들을 피동적으로 지배당하거나 피동적으로 혁명에 참여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스스로 능동적으로 혁명과 저항에 참여하는 사람들로 말하는 이상, 그 대상은 애매하며 논리적으로 말할 수 있는 ‘개념’이 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을 현재 상태로 말하는 이상, ‘민중’은 개념이 되기에는 너무나 직관적인 감각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말이며 따라서 그 말의 타당성은 논리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
--- p.495
출판사 리뷰
우리는 누구인가? 한국인은 누구인가?
이 책은 사회과학서이자 역사서이며 문학 비평서이며, 특히 고전적 의미에서 하나의 문학(文學)이다. 저자는 한국인을 주인공으로, 그리고 그를 둘러싼 세상을 무대로 파악하며, 시대와 대결한 근현대 한국인이라는 인식틀을 관철하여 거대한 서사를 완성했다. 그는 한국인과 그 역사를 궁구하기 위해 사회과학이란 틀을 넘어서야 했다고 말한다. 망국과 국권 상실, 그리고 전쟁의 참화로 점철된 혼돈의 시대를 거치며, 전대의 수많은 한국인(조선인)은 생존에 몰두해야 하는 시대, 자신이 사는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알기 어려운 시기를 살았고, 후대의 우리로 하여금 그 시대를 음미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자료를 거의 남기지 못했다. 후대의 우리 또한 혼돈의 시대를 거치며 전통과 단절되었고, 그 시대를 이해할 관점을 상실해버렸다.
수많은 연구를 섭렵하면 할수록 오히려 좌절을 느끼던 저자가 그 시대를 더듬으며 마침내 찾아낸 유력한 접근 경로는 바로 근대 소설문학이었다. 아직 지식인과 정치 지도자와 예술가가 덜 분화된 시대가 있었다. 우리의 지식인, 지도자들은 소설문학을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삼았다. 우리는 끊임없이 시대와 갈등하고 대결하며 시대를 극복할 새로운 한국인상을 모색했다. 그 가운데 소설문학은 시대가 우리에게 허락한 최고의 실험실이었다. 현실의 축소판인 작중 세계에서 인물들은 진화를 거듭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우리의 문학가이자 사상가들, 즉 이인직, 이해조, 신채호, 이광수, 김동인, 나도향, 박태원, 이상, 홍명희 등이 그들의 세상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그리고 그에 맞서 어떤 인물을 창조했는지 면밀하게 보게 될 것이다.
구한말은 “홉스적 자연상태”였다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근대적 소설이 나타난 것은 일본보다 약 20년 후였다. 고종 즉위 시점을 기준으로 하면 무려 40년이나 지난 후였다. 그나마도 최초의 근대식 소설인 신소설은 국문학에서 제대로 된 근대 소설로 인정받지 못한 장르다. 근대 소설 혹은 근대식 소설이 이렇게 뒤늦게 도입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구한말이 되어서야 이전의 문학 형식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대두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근대 서구의 문학 형식에 담아야 할 새로운 종류의 이야기들, 구한말 특유의 문제적인 이야깃거리들이 나타났을 때에야 비로소 최초의 근대 소설, 신소설이 쓰였다고 말한다.
이 책은 신소설 작품들에 묘사된 인물들과 시대상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통해, 신소설이 묘사한 현실은 황당무계한 허구라든가 친일파 성향의 작가에 의해 날조된 조국에 대한 음해가 아니라 철저하게 ‘사실주의’적인 현실이었음을 드러낸다. 그 시대는 이른바 “홉스적 자연상태”였다. 조선(대한제국)이 망하던 시기, 조선은 실로 지옥이었다. 만인이 만인에 대해 전쟁을 벌이는 곳이었다. 국가의 권력이 조정 바깥에 거의 미치지 못했고, 백성들은 숨죽이고 제 한 몸 건사를 도모하는 삶을 살았다. 국가가 없는 세상, 국가가 구실을 못하는 세상, 모두가 국가를 원망하는 시대가 있었다. 그것이 우리 20세기의 시작, 구한말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국가권력이 형해화되고, 공동체(사회)가 분해되어 사람들은 개인으로 세상에 던져졌다. 생존의 문제 앞에서 도덕과 윤리도 소멸했다. 오로지 모든 개인에게 평등하게 허용된 생존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시작됐다. 신소설의 세계와 인물 군상은 그런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신소설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의 모습은 피해자들, 특히 여성 피해자들이었다. 그들을 보호해줄 모든 기제가 허물어진 세상에서 그들은 너무나 무력하고 왜소했다. 이들이 신소설의 주인공인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했다. 이들은 살던 시대가 바로 구한말 조선이었고, 이들이 바로 당시 한국인이었다. 정글 같은 외부 환경에 압도당해 내면을 새길 공간조차 없이 속이 텅 빈 인형처럼, 그저 국면의 전환마다 최선을 다하지만 항상 피해자가 되고 마는 그런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한일병합 직전쯤의 시기에 오면 새로운 종류의 한국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홉스적 자연상태에서 싸우다 보니 영악하고 강인한 생존의 대가들이 나타났다.
국가가 없는 우리 - 민족의 탄생
“홉스적 자연상태”에 맞서 사람들은 피해자의 모습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일진회는 그 가운데 태어난 신종 한국인들이었다. 일진회는 ‘홉스적 사회계약’을 모색한 집단이었다. 동학 농민군을 잔혹하게 진압하고 인민의 삶을 파탄나도록 만든 앙시앙 레짐, 즉 대한제국이 그 계약의 대상이 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이웃나라 일본의 천황의 주권을 들여와서, 또는 일본의 정복을 초대해서 도탄에 빠져 허우적대는 조선 백성을 구해야 한다는 이성에 근거한 사회계약적 발상에 기초한 집단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처음부터 반역 음모 집단이었다. 전국에 회비를 납부하는 정식 회원만 14만 명에, 일진회를 성원하며 추종하는 사람들의 수는 1백만 명에 달했다. 이들은 복수심으로 무장한 동학 잔당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반역 단체였다.
그러나 일진회 운동의 전국적인 확산과 정치 사회적 갈등은 사람들 사이에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의 문제를 자극했다. 이 정체성의 문제는 을사조약을 기폭제로 하여 ‘매국노’, ‘오적신(五賊臣)’ 즉 나라를 팔아먹은 반역자들에 대한 전국적인 분노로 이어졌다. 전통의 ‘의(義)’에 기반한 의병이 일어나 일진회를 숙청하기 시작했다. 일진회의 성립과 ‘반역’, 그리고 그에 자극받은 의병의 출현과 대결 와중에 조선 사람들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질문을 겪기 시작했다. ‘우리가 도대체 누구냐?’ 하는 문제는 마치 새로운 질문처럼 폐부를 찔렀다. ‘국민’이라는 말이 그동안 쓰여 왔지만 우선은 국민은 일본인이 만든 말이었고 국가를 매개로 한 집단을 지칭했는데, 당시의 우리 국가인 대한제국은 국민들에게는 혐오의 대상이었고 의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국가를 매개로 하지 않고 사람들만을 지칭하는 말이 필요했다. 이 지점에서 ‘민족(民族)’이라는 말이 이미 1903년경에 중국의 양계초(梁啓超)에 의해 도입된 말로 비로소 쓰임새가 생기게 되었다. 나라가 없어도 민족이 가능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처럼 우리의 민족주의는 20세기 초반 이러한 홉스적 자연상태의 대혼란과 일본의 침략 와중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 정체는 아직 틀에 불과했다. 그 내용은 이제부터 채워나가야 했고 민족의 본질(本質)을 얻기 위한 기갈이 시작되었다.
민족주의의 분기 - 개화민족주의와 저항민족주의
‘민족’이란 말이 실체 있는 말로 탄생하던 즈음, ‘민족주의자’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민족주의자’로 지칭된 사람들은 1880년대부터 조선 사회의 붕괴와 혼란에 대해 위기감을 느끼며 백성들을 교육하는 것만이 장기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수단이라고 생각하던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국민 교육으로써 ‘자연 상태’를 해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표적으로 윤치호는 “새로운 교육과, 새로운 정부와, 새로운 종교로 피나 인종(the blood or the race)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붕괴되기 이전의 조선 사회로 돌아가는 것은 결코 원치 않았다. 오히려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은 새로운 세상, 서구와 같은 사회로 발전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춘원 이광수가 3·1운동 직전 1917년 발표한 『무정』은 초기 개화민족주의자의 정체성 투쟁에 관한 작품이었다. 춘원이 설정한 이형식이란 인물은 춘원의 분신으로 그 출발에서부터 이미 서구에서 수입한 ‘근대인’이었다. 그는 서구에서 도입한 ‘내면’을 갖고 있었고, 그 ‘내면’의 내용도 서구의 것으로 채워가는, 욕망과 이성을 장착한 일본 유학을 거친 학교 영어 선생이었다. 춘원은 서구에서 수입한 ‘사랑’을 가지고 이형식을 성장시킨다. 그는 자기 자신의 이성(異性)에 대한 욕망을 억제하고 사랑의 가능성을 탐색해가면서 점차 모든 민족을 사랑하는 새로운 민족주의자로 성장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는 기존의 지배 계급인 김 장로의 ‘사위’가 되는 낯 뜨거운 방법을 선택해야 했다. 이는 그에게는 스스로 뿌리박은 기반이 부재했기 때문이었는데, 이야기상에서 춘원이 이를 보완하기 위해 이형식으로 하여금 모든 익명의 조선 민족을 ‘환호’를 받는 작위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의식의 발견은 백성들의 ‘환호’에 대한 착각에 기반한 것이었고, 그 정당성은 확신할 수 없는 것이었다. 개화민족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욕망의 주체로 성립하고, 새로운 지도자 계급이 되길 열망했지만, 그들에게는 치명적인 정체성상의 부재(不在)가 존재했다.
단재 신채호를 중심으로 형성된 ‘저항민족주의’ 또한 비슷한 시기에 형성되었다. 저항민족주의는 물론 개화민족주의를 저변에 깔고 형성된 것이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개화민족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한 형태로 나타났다. 저항민족주의의 직접적인 계기는 당시에 일진회를 중심으로 등장한 대규모의 친일 세력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이었다. 저항민족주의는 침략자 일본에 대한 적개심뿐만 아니라 ‘친일파’들, 즉 민족을 팔아먹는 반역자들에 대한 분노가 일차적인 계기였다고 할 수 있다. 개화민족주의자들이 당시 조선의 자연상태의 해결을 최대의 과제로 삼고 있었다면, 저항민족주의자들은 그 해결책으로 일본에게 주권을 양도하는 안을 제시한 친일적 사회계약주의자들 그리고 일본에 대한 투쟁을 민족주의의 근본적인 노선으로 주장한 사람들이었다. 3·1운동 이후 두 민족주의 노선이 갈등하기 시작했을 때 그 차이는 바로 이 시대에 이렇게 비롯된 것이었다.
『꿈하늘』을 통해 단재가 제시한 민족주의자는 고독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 상태의 개인으로 신(神)의 명령에 따라 끝없이 싸워나가는 인물이었다. 단재의 ‘한놈’은 춘원의 ‘이형식’과는 달리 아예 그의 정체성에 무엇을 채워넣을 것인지 그 기회조차 박탈당한 인물이었다. 그의 ‘님 나라’는 오로지 승리자가 되라 하며 그를 훈육할 뿐이고, 그 이유도 그 내용도 말해주지 않는다. 이형식의 내면에는 욕망과 이성이 들어가 상호작용하기 시작했다면, 그는 반대로 점차 내면을 폐쇄당하고 오로지 투쟁 본능만을 남기고 갈고 닦아가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한놈’은 아무런 사심이 없는 이상 어떤 과정을 거치든 간에 결국은 조국과 민족을 위해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되리라 기대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내면을 폐쇄당한 그에게는 역사를 추동할 동력이 없었다.
3·1운동 - 민족의 강림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만세운동(3·1운동)은 우리 근대사에서 엄청난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그야말로 우리 민족 전체가 일어나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다. 그토록 잔인한 일제의 폭력적 탄압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길거리로 뛰쳐나와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다는 점에서 사건의 물리적인 규모도 놀라운 바이지만, 무엇보다 의미심장한 것은 그것을 목도한 이들이 받은 내적인 경험과 충격이었다. 민족주의자들이 민족의 내용을 구축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 만들어낸 담론 속의 ‘민족’이 하나의 실체이자 힘이 되어 강림하던 순간이었다.
이는 비단 지식인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1910년 한일병합이 이루어지고 일본의 모독적 무단통치(武斷統治)를 겪으며, 우리 민족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간 살아왔던 이야기가 주마등처럼 지나갔을 것이다. 우리 민족이 나라를 잃는 과정은 처참했다. 일본의 대군을 이미 갑오년에 불러들였고 그 이후 ‘경장(更張)’을 그들의 후원을 받아 진행하면서 우리의 전통적 제도와 문물을 파괴했다. 조선인들은 일본의 침략 야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파악한 후에도 저항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했다. 그간에 조선인들은 일부 동포가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병탄을 재촉하는 망동을 서슴지 않는 것을 보았다. 구한말 동학 잔당을 중심으로 1백만 가까운 조선인들이 일진회(一進會)에 가담하여 조선과 일본의 합방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합방 후 조선총독부는 일진회를 해산시켜 버렸고, 그들은 허탈감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천도교(天道敎)에 합류하였다. 그러다 마침내 이들은 3·1운동에 참가하며 비로소 피눈물로 참회(懺悔)할 기회를 얻었을 것이다. 조선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한때 너무나 힘든 삶 때문에 조선을 원망하여 다른 임금을 모시려 했던 반역(叛逆)이 또 다시 일제에 의해 배신당한 상황에서, 자신들의 뿌리와 조상에 대한 참회의 기회가 주어지자 북받쳐오는 감회를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참가자 숫자와 운동의 기간 같은 그 규모에 관한 서술로는 3·1운동의 의미를 다 표현할 수 없다. 그 심층에서 우리 민족의 대다수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우리 ‘민족’임을 ‘만세’로 고백하고, 피눈물로 회개하고, ‘한 민족’됨을 뼛속깊이 느꼈다. 그들은 민족이라는 거대한 본류에 합류하였고 다시 태어났다. 그날이 1919년 3월 1일이었다.
3.1운동 이후 - 강한 한국인 모델 찾기
3·1운동의 의미는 무엇보다도 ‘민족’이라는 실체가 어마어마한 규모로 우리 눈앞에 한때 강림했다는 사실에 있었다. 반면 뒤이은 1920년대는 이제 그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는 상실감의 시대였다. 당대의 ‘3·1운동은 실패했다.’는 평가는 이러한 허탈감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민족주의는 이제 진짜 ‘운동’을 현실적으로 시작해야 하는 단계가 되었다. 1920년대 국문학, 근대 단편 소설문학의 과제는 우선 우리 민족이 다다라야 할 기준을 제시하고, 그리고 민족의 현재 그리고 앞으로의 만들어가야 할 바람직한 상을 그려내는 것이었다. 그 선두에는 김동인이 있었다. 초기 조선 지식인들 전체는 대체로 김동인의 주도에 따라 각 개인의 차원에서 힘을 기르는 강한 조선인이 돼야 한다는 방향으로 합의에 이르게 된 것 같다. 김동인은 ‘강함’과 ‘약함’의 문제에 천착했다. 그의 1921년까지의 초기 작품들 『약한 자의 슬픔』, 『마음이 옅은 자여』, 『목숨』은 그 ‘강함’과 ‘약함’을 구별하고 파헤치는 일련의 작업이었다.
이후 1920년대를 통해 김동인은 우리 문학사에서 기념비적인, 순수문학의 금자탑이라 할 단편 소설들을 집필한다. 소설들의 소재는 주로 남녀 간의 문제와 그로 인해 타락하는 사람들이었다. 『붉은 산』의 삵, 『광염 소나타』의 백성수의 음악, 『배따라기』의 사공, 『감자』의 복녀 등 제시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광기에 휩싸여 비참한 결말을 맞는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이 문학계의 ‘연애의 시대’는 ‘사랑’을 발견한 시대이기도 했다. 비록 타락했지만, 그들은 정열을 생산하는, 심지어 광기로 치닫는 동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김동인은 강한 조선인의 모델을 모색하며 다양한 인물을 찾아 헤맸지만, 그가 새롭게 시도했던 내면을 가진 근대 서구인의 모델로서는 적어도 1920년대에는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했다. 김동인의 작품 속에서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근대인들은 항상 약했다. 간혹 김동인 등이 발견한 강한 조선인은,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은 분명했지만, 주로 내면을 알 수 없는 인물, 근대인의 모델과는 거리가 먼 인물들이었다.
대도시 지식인의 추락과 부활
1930년대가 되면 대도시 서울이 대두한다. 대도시 서울은 우리 민족이 처음 경험하는 생태 공간이었다. 예전의 공동체적 사회는 온데간데없고 자본주의적 물질문명이 목전에 당도한 시대였다.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흔히 소설가로서의 삶, 도시에서의 삶에 관한 소설로 이해하지만, 저자는 사뭇 다른 관점으로 접근한다. 단적으로 구보씨는 이전 시기 이광수의 『무정』에서 영어 선생이었던 이형식이 1930년대 도착했을 때의 모습이었다. 그는 더 이상 선생이 아니라 ‘무직자’다. 가족과 친구들은 그의 생활을 걱정하고 구보씨는 정신적인 수고를 덜 겸 또 오락 삼아 흔하디흔한 월급쟁이로 위장하고 대도시를 거닌다. 이러한 구보씨가 대표하는 한 세대의 조선 지식인의 생활양식은 전대미문의 것으로 그는 이전에 없던 전혀 새로운 ‘종자’였다. 구보씨는 본질적으로 시대에 ‘두통’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서울을 벗어나지도 못하는 인물이었다. 구보씨는 사회적으로 실업자는 아닌, ‘무직자’였다. 즉 아직 일을, 사명을 찾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 민족의 내용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 문학예술가의 길을 택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대도시를 배회하는 동안 좀처럼 해답을 얻지 못하고, 현실과 이상의 간극 속에서 길을 잃은 그런 인물이었다.
이런 고민스런 상황에서 나타난 과감하고, 기괴하고, 천재적인 타개책이 바로 이상의 『날개』였다. 문학예술가가 대도시에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신지식인이라면 농촌은 맞지 않다. 도시여야 하지만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 예술가로서의 삶을 꿋꿋하게 유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대도시에서 오래 살다보면 삶은 서서히 무너질 수밖에 없고 다시 신선하게 예술가의 삶으로 다시 태어나는 길은 쉽지 않다. 이상은 이러한 상황에서 지식인 천재를 재생(再生), 재탄생시키는 길을 정교하게 고안해 보였다. 대도시 지식인이 껍질을 깨고 새로 진화하는 순간을 펼쳐보였던 것이다.
강한 근대 한국인의 창조 - 이광수의 업적
과연 1930년대에 들어서면 새로운 지적 업적들이 산출되기 시작했다. 춘원은 다시 소설 창작에 몰두하였고 『유정』을 통해 당시 조선 지식인의 공통적인 숙제였던 ‘강한 조선인’ 만들기에 드디어 성공했고 드디어 그 비결(秘訣)이 공표되었다. 인물의 내면에 존재하는 욕망과 이성의 내용을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랑의 욕망과 이성으로 구성하고서, 양자 간의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갈등이 시작되고 두 힘 사이에 상승 작용이 일어난다. 두 힘, 즉 사랑과 이성은 팽팽히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제압하지 못한 채 계속 커진다. 그렇게 두 힘을 최대한으로 확대시켜 사랑과 이성의 힘이 정점인 채로 인물을 죽게 한다. 그러면 그 죽은 이의 영혼은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과 주변 사람들을 강하게 만들 것이고, 그들은 끝까지 싸우는 불멸의 전사가 된다. 이것이 바로 그 비결이었다.
이광수가 『무정』의 이형식을 통해 해결하지 못한 치명적인 부분 중 하나는 그가 조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의 진실성과 또 백성이 그에 진심으로 화답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유정』의 주인공 최석 또한 비슷한 문제를 안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평소에 조선인들 사이에서 시기와 증오의 대상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양녀를 사랑하는 불륜을 저질렀다는 선고를 받고 사회적 살해를 당한다. 최석은 그러나 항변하지 않고 묵묵히 양녀 정임에 대한 순수한 ‘사랑’에 최선을 다하는 한편, 조선 백성에게 쫓겨난 채로 그의 조선에 대한 진심을 확인하기 위한 순례 길에 오른다. 어느 하나를 포기하면 언제든 이야기가 끝날 테지만, 그는 끝까지 어느 하나도 포기하지 않았다. 정임이라는 ‘그녀’에 대한 사랑은 그가 지켜내야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선택함으로써 조선 사람들이 그에게 씌운 혐의를 실체로 만들어 그들과 영원히 찢어지는 선택을 할 수도 없었다. 결국 최석은 애욕과 이성 사이에서 둘 모두를 지켜내고 죽는다.
문학적 상징을 유추함으로써 우리는 최석의 정임에 대한 사랑이 결코 조선 백성의 증오와 짝을 이루는 것이 아님을, 어쩌면 ‘그녀’에 대한 사랑을 지켜내는 것이 조선에 대한 사랑을 지켜내는 임무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개화민족주의자로서 이광수의 업적이었다. 최석이 죽고 난 후 그를 증오했던 조선 사람들은 최석의 내면을 이해하고 최석도 조선도 구원받는 대단원으로 이어진다. 최석은 이광수가 개발한 근대 한국인의 최신 모델이었고, 이 모델은 오늘날 한국인에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심훈은 춘원의 이러한 작업에서 영감을 얻어 『상록수』에서 순교자의 영혼으로 불멸의 투사를 만드는 과정을 완성하였다. 춘원은 이제 순교자 양산 체제를 구상했고, 1930년대 중반부터 조선에서의 사랑은 달콤한 삶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기 위한 죽음의 시련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민중 영웅의 창조 - 지식인을 배제한 직접혁명의 주체
같은 시대에 벽초 홍명희는 대하소설로 임꺽정이라는 새로운 영웅의 모습을 정교한 솜씨로 창조하였다. 이것은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을 소재로 하여 홍길동전의 신화적인 이야기를 하층민으로 초점을 바꾸어 사실주의적 근대 소설로 다시 쓰는 작업으로 실로 정교하고 섬세한 창작 과정이었다. 벽초는 영웅에게 내적인 에너지를 주입하기 위하여 ‘파우스트’ 모델을 활용하여 내면을 설정하였다. 그러나 파우스트의 그것과는 꼭 같지는 않았다. 이성과 비이성이 들어 있는 서구 근대인 심장을 빌려온 벽초는, 이성의 자리에 저항 정신을 심었다. 그 저항 정신은 그러나 이성적인 저항 정신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원한과 증오에 기반한 순수한 저항 정신이었다. 거기에 더해 벽초는 그 저항 정신에 반지성주의의 외피를 입혔다. 반지성주의는 벽초의 시대 그가 경험했던 수많은 지식인들의 타락을 임꺽정에게서만은 막아내기 위한 장치였다. 한편 비이성의 자리에는 본능을 부여했다. 그러나 이 역시 서구의 그것과는 다르게 ‘서림’과 ‘노밤’이라는 메피스토를 통해 깨어난 포악하고 음탕한 본능이었다.
임꺽정은 그 시대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언급되던 비(非)볼셰비키적 혁명의 주체로서의 ‘민중’을 형상화하였다. 단재 신채호가 전개한 아나키스트(anarchist)적 ‘민중’과 ‘민중의 직접혁명’의 논리와 언어에 벽초는 뼈와 살을 입히고 피를 돌게 하여 살아 있는 영혼으로 창조하여 우리에게 보냈다. 한때 동북아시아 지역 전체에서 쓰이던 ‘민중’이라는 말은 우리를 제외한 다른 모든 나라에서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임꺽정이라는 생명력 넘치는 인물을 창조한 우리 민족에게는 이 ‘민중’이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숨 쉬며 싸우고 있다. 그러나 임꺽정은 1970년대를 거치며, 부의 약탈과 재분배에 관한 의적주의적 인물인 장길산으로 이어졌고, 민중은 저항의 시대에 정점에 도달했다가 이윽고 물질적 욕망의 주체로 재정립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전열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저주의 안개 - 반지성주의와 교육만능주의
일제 시대에 여러 전선에서 싸워나가고 스스로 힘을 기르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에 만연하기 시작한 것은 반지성주의였다. 처음부터 근대의 신지식인은 일본과 서구에서 지식을 수입함으로써 민족의 선생, 지도자가 되겠다고 주장하였고 주변에서 보기에 그들은 지식의 수입상이지 원래 우리가 알던 ‘선비’의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대중은 그들 지식인 가운데 많은 이가 민족을 배신하는 것을 보았고, 또 많은 이가 『무정』의 ‘배 학감’처럼 ‘장사꾼’ 같은 사람임을 경험했다. 지식인들 스스로도 민족에 대한 의무를 다하려 했겠지만 자신들의 이율배반을 끊임없이 확인해야만 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들이 모여 주로 1930년대부터 반지성주의가 나타났고, 오늘날에도 저주의 안개처럼 우리 사회에 스며 있다.
나아가서 강한 조선인을 찾아 온 지식인들의 노력은 다른 대가도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민족의 본질을 ‘강한 인간’에서 찾는 선택의 핵심은 1920년대 춘원이 제안했던 도덕성 회복을 통한 ‘민족 개조’ 계획을 기각한 것이었다. 물론 이 선택을 우리가 비난할 수는 없겠지만 당시 ‘홉스적 자연상태’의 상처가 생생한 상황에서 도덕성의 문제를 제쳐놓고 강한 조선인을 추구한다는 것은 사회적 조건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결코 비켜갈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의 도덕성의 문제는 한국인이 ‘해방’되었을 때 한국인의 첫 번째 특징으로 조우하게 될 문제였다. 해방된 한국인들은 너무나 거칠었고 ‘힘’에 대한 박탈감에서 ‘힘’의 추구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도덕성이 소외된 힘의 추구야말로 1930년대 춘원을 위시한 조선 지식인들이 이룩한 ‘강한 조선인’ 추구의 대가였다.
이 책은 사회과학서이자 역사서이며 문학 비평서이며, 특히 고전적 의미에서 하나의 문학(文學)이다. 저자는 한국인을 주인공으로, 그리고 그를 둘러싼 세상을 무대로 파악하며, 시대와 대결한 근현대 한국인이라는 인식틀을 관철하여 거대한 서사를 완성했다. 그는 한국인과 그 역사를 궁구하기 위해 사회과학이란 틀을 넘어서야 했다고 말한다. 망국과 국권 상실, 그리고 전쟁의 참화로 점철된 혼돈의 시대를 거치며, 전대의 수많은 한국인(조선인)은 생존에 몰두해야 하는 시대, 자신이 사는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알기 어려운 시기를 살았고, 후대의 우리로 하여금 그 시대를 음미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자료를 거의 남기지 못했다. 후대의 우리 또한 혼돈의 시대를 거치며 전통과 단절되었고, 그 시대를 이해할 관점을 상실해버렸다.
수많은 연구를 섭렵하면 할수록 오히려 좌절을 느끼던 저자가 그 시대를 더듬으며 마침내 찾아낸 유력한 접근 경로는 바로 근대 소설문학이었다. 아직 지식인과 정치 지도자와 예술가가 덜 분화된 시대가 있었다. 우리의 지식인, 지도자들은 소설문학을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삼았다. 우리는 끊임없이 시대와 갈등하고 대결하며 시대를 극복할 새로운 한국인상을 모색했다. 그 가운데 소설문학은 시대가 우리에게 허락한 최고의 실험실이었다. 현실의 축소판인 작중 세계에서 인물들은 진화를 거듭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우리의 문학가이자 사상가들, 즉 이인직, 이해조, 신채호, 이광수, 김동인, 나도향, 박태원, 이상, 홍명희 등이 그들의 세상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그리고 그에 맞서 어떤 인물을 창조했는지 면밀하게 보게 될 것이다.
구한말은 “홉스적 자연상태”였다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근대적 소설이 나타난 것은 일본보다 약 20년 후였다. 고종 즉위 시점을 기준으로 하면 무려 40년이나 지난 후였다. 그나마도 최초의 근대식 소설인 신소설은 국문학에서 제대로 된 근대 소설로 인정받지 못한 장르다. 근대 소설 혹은 근대식 소설이 이렇게 뒤늦게 도입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구한말이 되어서야 이전의 문학 형식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대두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근대 서구의 문학 형식에 담아야 할 새로운 종류의 이야기들, 구한말 특유의 문제적인 이야깃거리들이 나타났을 때에야 비로소 최초의 근대 소설, 신소설이 쓰였다고 말한다.
이 책은 신소설 작품들에 묘사된 인물들과 시대상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통해, 신소설이 묘사한 현실은 황당무계한 허구라든가 친일파 성향의 작가에 의해 날조된 조국에 대한 음해가 아니라 철저하게 ‘사실주의’적인 현실이었음을 드러낸다. 그 시대는 이른바 “홉스적 자연상태”였다. 조선(대한제국)이 망하던 시기, 조선은 실로 지옥이었다. 만인이 만인에 대해 전쟁을 벌이는 곳이었다. 국가의 권력이 조정 바깥에 거의 미치지 못했고, 백성들은 숨죽이고 제 한 몸 건사를 도모하는 삶을 살았다. 국가가 없는 세상, 국가가 구실을 못하는 세상, 모두가 국가를 원망하는 시대가 있었다. 그것이 우리 20세기의 시작, 구한말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국가권력이 형해화되고, 공동체(사회)가 분해되어 사람들은 개인으로 세상에 던져졌다. 생존의 문제 앞에서 도덕과 윤리도 소멸했다. 오로지 모든 개인에게 평등하게 허용된 생존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시작됐다. 신소설의 세계와 인물 군상은 그런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신소설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의 모습은 피해자들, 특히 여성 피해자들이었다. 그들을 보호해줄 모든 기제가 허물어진 세상에서 그들은 너무나 무력하고 왜소했다. 이들이 신소설의 주인공인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했다. 이들은 살던 시대가 바로 구한말 조선이었고, 이들이 바로 당시 한국인이었다. 정글 같은 외부 환경에 압도당해 내면을 새길 공간조차 없이 속이 텅 빈 인형처럼, 그저 국면의 전환마다 최선을 다하지만 항상 피해자가 되고 마는 그런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한일병합 직전쯤의 시기에 오면 새로운 종류의 한국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홉스적 자연상태에서 싸우다 보니 영악하고 강인한 생존의 대가들이 나타났다.
국가가 없는 우리 - 민족의 탄생
“홉스적 자연상태”에 맞서 사람들은 피해자의 모습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일진회는 그 가운데 태어난 신종 한국인들이었다. 일진회는 ‘홉스적 사회계약’을 모색한 집단이었다. 동학 농민군을 잔혹하게 진압하고 인민의 삶을 파탄나도록 만든 앙시앙 레짐, 즉 대한제국이 그 계약의 대상이 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이웃나라 일본의 천황의 주권을 들여와서, 또는 일본의 정복을 초대해서 도탄에 빠져 허우적대는 조선 백성을 구해야 한다는 이성에 근거한 사회계약적 발상에 기초한 집단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처음부터 반역 음모 집단이었다. 전국에 회비를 납부하는 정식 회원만 14만 명에, 일진회를 성원하며 추종하는 사람들의 수는 1백만 명에 달했다. 이들은 복수심으로 무장한 동학 잔당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반역 단체였다.
그러나 일진회 운동의 전국적인 확산과 정치 사회적 갈등은 사람들 사이에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의 문제를 자극했다. 이 정체성의 문제는 을사조약을 기폭제로 하여 ‘매국노’, ‘오적신(五賊臣)’ 즉 나라를 팔아먹은 반역자들에 대한 전국적인 분노로 이어졌다. 전통의 ‘의(義)’에 기반한 의병이 일어나 일진회를 숙청하기 시작했다. 일진회의 성립과 ‘반역’, 그리고 그에 자극받은 의병의 출현과 대결 와중에 조선 사람들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질문을 겪기 시작했다. ‘우리가 도대체 누구냐?’ 하는 문제는 마치 새로운 질문처럼 폐부를 찔렀다. ‘국민’이라는 말이 그동안 쓰여 왔지만 우선은 국민은 일본인이 만든 말이었고 국가를 매개로 한 집단을 지칭했는데, 당시의 우리 국가인 대한제국은 국민들에게는 혐오의 대상이었고 의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국가를 매개로 하지 않고 사람들만을 지칭하는 말이 필요했다. 이 지점에서 ‘민족(民族)’이라는 말이 이미 1903년경에 중국의 양계초(梁啓超)에 의해 도입된 말로 비로소 쓰임새가 생기게 되었다. 나라가 없어도 민족이 가능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처럼 우리의 민족주의는 20세기 초반 이러한 홉스적 자연상태의 대혼란과 일본의 침략 와중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 정체는 아직 틀에 불과했다. 그 내용은 이제부터 채워나가야 했고 민족의 본질(本質)을 얻기 위한 기갈이 시작되었다.
민족주의의 분기 - 개화민족주의와 저항민족주의
‘민족’이란 말이 실체 있는 말로 탄생하던 즈음, ‘민족주의자’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민족주의자’로 지칭된 사람들은 1880년대부터 조선 사회의 붕괴와 혼란에 대해 위기감을 느끼며 백성들을 교육하는 것만이 장기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수단이라고 생각하던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국민 교육으로써 ‘자연 상태’를 해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표적으로 윤치호는 “새로운 교육과, 새로운 정부와, 새로운 종교로 피나 인종(the blood or the race)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붕괴되기 이전의 조선 사회로 돌아가는 것은 결코 원치 않았다. 오히려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은 새로운 세상, 서구와 같은 사회로 발전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춘원 이광수가 3·1운동 직전 1917년 발표한 『무정』은 초기 개화민족주의자의 정체성 투쟁에 관한 작품이었다. 춘원이 설정한 이형식이란 인물은 춘원의 분신으로 그 출발에서부터 이미 서구에서 수입한 ‘근대인’이었다. 그는 서구에서 도입한 ‘내면’을 갖고 있었고, 그 ‘내면’의 내용도 서구의 것으로 채워가는, 욕망과 이성을 장착한 일본 유학을 거친 학교 영어 선생이었다. 춘원은 서구에서 수입한 ‘사랑’을 가지고 이형식을 성장시킨다. 그는 자기 자신의 이성(異性)에 대한 욕망을 억제하고 사랑의 가능성을 탐색해가면서 점차 모든 민족을 사랑하는 새로운 민족주의자로 성장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는 기존의 지배 계급인 김 장로의 ‘사위’가 되는 낯 뜨거운 방법을 선택해야 했다. 이는 그에게는 스스로 뿌리박은 기반이 부재했기 때문이었는데, 이야기상에서 춘원이 이를 보완하기 위해 이형식으로 하여금 모든 익명의 조선 민족을 ‘환호’를 받는 작위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의식의 발견은 백성들의 ‘환호’에 대한 착각에 기반한 것이었고, 그 정당성은 확신할 수 없는 것이었다. 개화민족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욕망의 주체로 성립하고, 새로운 지도자 계급이 되길 열망했지만, 그들에게는 치명적인 정체성상의 부재(不在)가 존재했다.
단재 신채호를 중심으로 형성된 ‘저항민족주의’ 또한 비슷한 시기에 형성되었다. 저항민족주의는 물론 개화민족주의를 저변에 깔고 형성된 것이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개화민족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한 형태로 나타났다. 저항민족주의의 직접적인 계기는 당시에 일진회를 중심으로 등장한 대규모의 친일 세력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이었다. 저항민족주의는 침략자 일본에 대한 적개심뿐만 아니라 ‘친일파’들, 즉 민족을 팔아먹는 반역자들에 대한 분노가 일차적인 계기였다고 할 수 있다. 개화민족주의자들이 당시 조선의 자연상태의 해결을 최대의 과제로 삼고 있었다면, 저항민족주의자들은 그 해결책으로 일본에게 주권을 양도하는 안을 제시한 친일적 사회계약주의자들 그리고 일본에 대한 투쟁을 민족주의의 근본적인 노선으로 주장한 사람들이었다. 3·1운동 이후 두 민족주의 노선이 갈등하기 시작했을 때 그 차이는 바로 이 시대에 이렇게 비롯된 것이었다.
『꿈하늘』을 통해 단재가 제시한 민족주의자는 고독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 상태의 개인으로 신(神)의 명령에 따라 끝없이 싸워나가는 인물이었다. 단재의 ‘한놈’은 춘원의 ‘이형식’과는 달리 아예 그의 정체성에 무엇을 채워넣을 것인지 그 기회조차 박탈당한 인물이었다. 그의 ‘님 나라’는 오로지 승리자가 되라 하며 그를 훈육할 뿐이고, 그 이유도 그 내용도 말해주지 않는다. 이형식의 내면에는 욕망과 이성이 들어가 상호작용하기 시작했다면, 그는 반대로 점차 내면을 폐쇄당하고 오로지 투쟁 본능만을 남기고 갈고 닦아가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한놈’은 아무런 사심이 없는 이상 어떤 과정을 거치든 간에 결국은 조국과 민족을 위해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되리라 기대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내면을 폐쇄당한 그에게는 역사를 추동할 동력이 없었다.
3·1운동 - 민족의 강림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만세운동(3·1운동)은 우리 근대사에서 엄청난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그야말로 우리 민족 전체가 일어나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다. 그토록 잔인한 일제의 폭력적 탄압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길거리로 뛰쳐나와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다는 점에서 사건의 물리적인 규모도 놀라운 바이지만, 무엇보다 의미심장한 것은 그것을 목도한 이들이 받은 내적인 경험과 충격이었다. 민족주의자들이 민족의 내용을 구축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 만들어낸 담론 속의 ‘민족’이 하나의 실체이자 힘이 되어 강림하던 순간이었다.
이는 비단 지식인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1910년 한일병합이 이루어지고 일본의 모독적 무단통치(武斷統治)를 겪으며, 우리 민족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간 살아왔던 이야기가 주마등처럼 지나갔을 것이다. 우리 민족이 나라를 잃는 과정은 처참했다. 일본의 대군을 이미 갑오년에 불러들였고 그 이후 ‘경장(更張)’을 그들의 후원을 받아 진행하면서 우리의 전통적 제도와 문물을 파괴했다. 조선인들은 일본의 침략 야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파악한 후에도 저항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했다. 그간에 조선인들은 일부 동포가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병탄을 재촉하는 망동을 서슴지 않는 것을 보았다. 구한말 동학 잔당을 중심으로 1백만 가까운 조선인들이 일진회(一進會)에 가담하여 조선과 일본의 합방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합방 후 조선총독부는 일진회를 해산시켜 버렸고, 그들은 허탈감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천도교(天道敎)에 합류하였다. 그러다 마침내 이들은 3·1운동에 참가하며 비로소 피눈물로 참회(懺悔)할 기회를 얻었을 것이다. 조선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한때 너무나 힘든 삶 때문에 조선을 원망하여 다른 임금을 모시려 했던 반역(叛逆)이 또 다시 일제에 의해 배신당한 상황에서, 자신들의 뿌리와 조상에 대한 참회의 기회가 주어지자 북받쳐오는 감회를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참가자 숫자와 운동의 기간 같은 그 규모에 관한 서술로는 3·1운동의 의미를 다 표현할 수 없다. 그 심층에서 우리 민족의 대다수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우리 ‘민족’임을 ‘만세’로 고백하고, 피눈물로 회개하고, ‘한 민족’됨을 뼛속깊이 느꼈다. 그들은 민족이라는 거대한 본류에 합류하였고 다시 태어났다. 그날이 1919년 3월 1일이었다.
3.1운동 이후 - 강한 한국인 모델 찾기
3·1운동의 의미는 무엇보다도 ‘민족’이라는 실체가 어마어마한 규모로 우리 눈앞에 한때 강림했다는 사실에 있었다. 반면 뒤이은 1920년대는 이제 그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는 상실감의 시대였다. 당대의 ‘3·1운동은 실패했다.’는 평가는 이러한 허탈감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민족주의는 이제 진짜 ‘운동’을 현실적으로 시작해야 하는 단계가 되었다. 1920년대 국문학, 근대 단편 소설문학의 과제는 우선 우리 민족이 다다라야 할 기준을 제시하고, 그리고 민족의 현재 그리고 앞으로의 만들어가야 할 바람직한 상을 그려내는 것이었다. 그 선두에는 김동인이 있었다. 초기 조선 지식인들 전체는 대체로 김동인의 주도에 따라 각 개인의 차원에서 힘을 기르는 강한 조선인이 돼야 한다는 방향으로 합의에 이르게 된 것 같다. 김동인은 ‘강함’과 ‘약함’의 문제에 천착했다. 그의 1921년까지의 초기 작품들 『약한 자의 슬픔』, 『마음이 옅은 자여』, 『목숨』은 그 ‘강함’과 ‘약함’을 구별하고 파헤치는 일련의 작업이었다.
이후 1920년대를 통해 김동인은 우리 문학사에서 기념비적인, 순수문학의 금자탑이라 할 단편 소설들을 집필한다. 소설들의 소재는 주로 남녀 간의 문제와 그로 인해 타락하는 사람들이었다. 『붉은 산』의 삵, 『광염 소나타』의 백성수의 음악, 『배따라기』의 사공, 『감자』의 복녀 등 제시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광기에 휩싸여 비참한 결말을 맞는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이 문학계의 ‘연애의 시대’는 ‘사랑’을 발견한 시대이기도 했다. 비록 타락했지만, 그들은 정열을 생산하는, 심지어 광기로 치닫는 동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김동인은 강한 조선인의 모델을 모색하며 다양한 인물을 찾아 헤맸지만, 그가 새롭게 시도했던 내면을 가진 근대 서구인의 모델로서는 적어도 1920년대에는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했다. 김동인의 작품 속에서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근대인들은 항상 약했다. 간혹 김동인 등이 발견한 강한 조선인은,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은 분명했지만, 주로 내면을 알 수 없는 인물, 근대인의 모델과는 거리가 먼 인물들이었다.
대도시 지식인의 추락과 부활
1930년대가 되면 대도시 서울이 대두한다. 대도시 서울은 우리 민족이 처음 경험하는 생태 공간이었다. 예전의 공동체적 사회는 온데간데없고 자본주의적 물질문명이 목전에 당도한 시대였다.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흔히 소설가로서의 삶, 도시에서의 삶에 관한 소설로 이해하지만, 저자는 사뭇 다른 관점으로 접근한다. 단적으로 구보씨는 이전 시기 이광수의 『무정』에서 영어 선생이었던 이형식이 1930년대 도착했을 때의 모습이었다. 그는 더 이상 선생이 아니라 ‘무직자’다. 가족과 친구들은 그의 생활을 걱정하고 구보씨는 정신적인 수고를 덜 겸 또 오락 삼아 흔하디흔한 월급쟁이로 위장하고 대도시를 거닌다. 이러한 구보씨가 대표하는 한 세대의 조선 지식인의 생활양식은 전대미문의 것으로 그는 이전에 없던 전혀 새로운 ‘종자’였다. 구보씨는 본질적으로 시대에 ‘두통’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서울을 벗어나지도 못하는 인물이었다. 구보씨는 사회적으로 실업자는 아닌, ‘무직자’였다. 즉 아직 일을, 사명을 찾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 민족의 내용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 문학예술가의 길을 택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대도시를 배회하는 동안 좀처럼 해답을 얻지 못하고, 현실과 이상의 간극 속에서 길을 잃은 그런 인물이었다.
이런 고민스런 상황에서 나타난 과감하고, 기괴하고, 천재적인 타개책이 바로 이상의 『날개』였다. 문학예술가가 대도시에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신지식인이라면 농촌은 맞지 않다. 도시여야 하지만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 예술가로서의 삶을 꿋꿋하게 유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대도시에서 오래 살다보면 삶은 서서히 무너질 수밖에 없고 다시 신선하게 예술가의 삶으로 다시 태어나는 길은 쉽지 않다. 이상은 이러한 상황에서 지식인 천재를 재생(再生), 재탄생시키는 길을 정교하게 고안해 보였다. 대도시 지식인이 껍질을 깨고 새로 진화하는 순간을 펼쳐보였던 것이다.
강한 근대 한국인의 창조 - 이광수의 업적
과연 1930년대에 들어서면 새로운 지적 업적들이 산출되기 시작했다. 춘원은 다시 소설 창작에 몰두하였고 『유정』을 통해 당시 조선 지식인의 공통적인 숙제였던 ‘강한 조선인’ 만들기에 드디어 성공했고 드디어 그 비결(秘訣)이 공표되었다. 인물의 내면에 존재하는 욕망과 이성의 내용을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랑의 욕망과 이성으로 구성하고서, 양자 간의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갈등이 시작되고 두 힘 사이에 상승 작용이 일어난다. 두 힘, 즉 사랑과 이성은 팽팽히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제압하지 못한 채 계속 커진다. 그렇게 두 힘을 최대한으로 확대시켜 사랑과 이성의 힘이 정점인 채로 인물을 죽게 한다. 그러면 그 죽은 이의 영혼은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과 주변 사람들을 강하게 만들 것이고, 그들은 끝까지 싸우는 불멸의 전사가 된다. 이것이 바로 그 비결이었다.
이광수가 『무정』의 이형식을 통해 해결하지 못한 치명적인 부분 중 하나는 그가 조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의 진실성과 또 백성이 그에 진심으로 화답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유정』의 주인공 최석 또한 비슷한 문제를 안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평소에 조선인들 사이에서 시기와 증오의 대상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양녀를 사랑하는 불륜을 저질렀다는 선고를 받고 사회적 살해를 당한다. 최석은 그러나 항변하지 않고 묵묵히 양녀 정임에 대한 순수한 ‘사랑’에 최선을 다하는 한편, 조선 백성에게 쫓겨난 채로 그의 조선에 대한 진심을 확인하기 위한 순례 길에 오른다. 어느 하나를 포기하면 언제든 이야기가 끝날 테지만, 그는 끝까지 어느 하나도 포기하지 않았다. 정임이라는 ‘그녀’에 대한 사랑은 그가 지켜내야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선택함으로써 조선 사람들이 그에게 씌운 혐의를 실체로 만들어 그들과 영원히 찢어지는 선택을 할 수도 없었다. 결국 최석은 애욕과 이성 사이에서 둘 모두를 지켜내고 죽는다.
문학적 상징을 유추함으로써 우리는 최석의 정임에 대한 사랑이 결코 조선 백성의 증오와 짝을 이루는 것이 아님을, 어쩌면 ‘그녀’에 대한 사랑을 지켜내는 것이 조선에 대한 사랑을 지켜내는 임무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개화민족주의자로서 이광수의 업적이었다. 최석이 죽고 난 후 그를 증오했던 조선 사람들은 최석의 내면을 이해하고 최석도 조선도 구원받는 대단원으로 이어진다. 최석은 이광수가 개발한 근대 한국인의 최신 모델이었고, 이 모델은 오늘날 한국인에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심훈은 춘원의 이러한 작업에서 영감을 얻어 『상록수』에서 순교자의 영혼으로 불멸의 투사를 만드는 과정을 완성하였다. 춘원은 이제 순교자 양산 체제를 구상했고, 1930년대 중반부터 조선에서의 사랑은 달콤한 삶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기 위한 죽음의 시련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민중 영웅의 창조 - 지식인을 배제한 직접혁명의 주체
같은 시대에 벽초 홍명희는 대하소설로 임꺽정이라는 새로운 영웅의 모습을 정교한 솜씨로 창조하였다. 이것은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을 소재로 하여 홍길동전의 신화적인 이야기를 하층민으로 초점을 바꾸어 사실주의적 근대 소설로 다시 쓰는 작업으로 실로 정교하고 섬세한 창작 과정이었다. 벽초는 영웅에게 내적인 에너지를 주입하기 위하여 ‘파우스트’ 모델을 활용하여 내면을 설정하였다. 그러나 파우스트의 그것과는 꼭 같지는 않았다. 이성과 비이성이 들어 있는 서구 근대인 심장을 빌려온 벽초는, 이성의 자리에 저항 정신을 심었다. 그 저항 정신은 그러나 이성적인 저항 정신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원한과 증오에 기반한 순수한 저항 정신이었다. 거기에 더해 벽초는 그 저항 정신에 반지성주의의 외피를 입혔다. 반지성주의는 벽초의 시대 그가 경험했던 수많은 지식인들의 타락을 임꺽정에게서만은 막아내기 위한 장치였다. 한편 비이성의 자리에는 본능을 부여했다. 그러나 이 역시 서구의 그것과는 다르게 ‘서림’과 ‘노밤’이라는 메피스토를 통해 깨어난 포악하고 음탕한 본능이었다.
임꺽정은 그 시대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언급되던 비(非)볼셰비키적 혁명의 주체로서의 ‘민중’을 형상화하였다. 단재 신채호가 전개한 아나키스트(anarchist)적 ‘민중’과 ‘민중의 직접혁명’의 논리와 언어에 벽초는 뼈와 살을 입히고 피를 돌게 하여 살아 있는 영혼으로 창조하여 우리에게 보냈다. 한때 동북아시아 지역 전체에서 쓰이던 ‘민중’이라는 말은 우리를 제외한 다른 모든 나라에서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임꺽정이라는 생명력 넘치는 인물을 창조한 우리 민족에게는 이 ‘민중’이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숨 쉬며 싸우고 있다. 그러나 임꺽정은 1970년대를 거치며, 부의 약탈과 재분배에 관한 의적주의적 인물인 장길산으로 이어졌고, 민중은 저항의 시대에 정점에 도달했다가 이윽고 물질적 욕망의 주체로 재정립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전열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저주의 안개 - 반지성주의와 교육만능주의
일제 시대에 여러 전선에서 싸워나가고 스스로 힘을 기르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에 만연하기 시작한 것은 반지성주의였다. 처음부터 근대의 신지식인은 일본과 서구에서 지식을 수입함으로써 민족의 선생, 지도자가 되겠다고 주장하였고 주변에서 보기에 그들은 지식의 수입상이지 원래 우리가 알던 ‘선비’의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대중은 그들 지식인 가운데 많은 이가 민족을 배신하는 것을 보았고, 또 많은 이가 『무정』의 ‘배 학감’처럼 ‘장사꾼’ 같은 사람임을 경험했다. 지식인들 스스로도 민족에 대한 의무를 다하려 했겠지만 자신들의 이율배반을 끊임없이 확인해야만 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들이 모여 주로 1930년대부터 반지성주의가 나타났고, 오늘날에도 저주의 안개처럼 우리 사회에 스며 있다.
나아가서 강한 조선인을 찾아 온 지식인들의 노력은 다른 대가도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민족의 본질을 ‘강한 인간’에서 찾는 선택의 핵심은 1920년대 춘원이 제안했던 도덕성 회복을 통한 ‘민족 개조’ 계획을 기각한 것이었다. 물론 이 선택을 우리가 비난할 수는 없겠지만 당시 ‘홉스적 자연상태’의 상처가 생생한 상황에서 도덕성의 문제를 제쳐놓고 강한 조선인을 추구한다는 것은 사회적 조건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결코 비켜갈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의 도덕성의 문제는 한국인이 ‘해방’되었을 때 한국인의 첫 번째 특징으로 조우하게 될 문제였다. 해방된 한국인들은 너무나 거칠었고 ‘힘’에 대한 박탈감에서 ‘힘’의 추구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도덕성이 소외된 힘의 추구야말로 1930년대 춘원을 위시한 조선 지식인들이 이룩한 ‘강한 조선인’ 추구의 대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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