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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우리가 상식처럼 알고 있는 근대 역사 속의 장소, 사람, 사건 등에 대한 오류들을 바로 잡고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들을 소개한다. 저자는 잘못된 잔재의 진정한 청산을 위해서 우리가 ‘일제잔재’라고 생각해 왔던 것들의 오류를 지적하고 몇 가지 사실들의 잘못된 연원을 밝히고 있다.
예를들어 종로 鐘路의 잘못된 표기인 鍾路는 일제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 때부터 잘못된 표현이 으레 사용되었으며, '그린피스'의 『은자의 나라 한국』에 ‘고려장’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을 이유로 고려장이라는 말이 일제 때 만들어졌다는 주장은 과장된 것임을 지적한다.
저자는 ‘뭔가를 기록하고 확인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실관계와 근거자료에 충실히 바탕을 두어 이뤄져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모든 페이지에 걸쳐 사진자료와 설명을 충실히 수록하여 오류를 바로잡고 진실을 알리고자 노력하고 있다.
예를들어 종로 鐘路의 잘못된 표기인 鍾路는 일제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 때부터 잘못된 표현이 으레 사용되었으며, '그린피스'의 『은자의 나라 한국』에 ‘고려장’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을 이유로 고려장이라는 말이 일제 때 만들어졌다는 주장은 과장된 것임을 지적한다.
저자는 ‘뭔가를 기록하고 확인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실관계와 근거자료에 충실히 바탕을 두어 이뤄져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모든 페이지에 걸쳐 사진자료와 설명을 충실히 수록하여 오류를 바로잡고 진실을 알리고자 노력하고 있다.
목차
다시 들어가기에 앞서
제1부 껄끄러운 사실들, 미덥잖은 상식 앞에 서다
1. '영친왕'이 일본식 호칭이란 건 오해
2. 미심쩍은 돈의문의 딴 이름, '서대문'
3. '대일본' 형상에 관한 속설의 진위
4. 덕수궁 대한문은 '큰 하늘 문'이라는 뜻
5.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눈흘긴다"
6. '고려장은 없었다'에 대한 약간 다른 생각
제2부 그들은 정말 조선을 사랑했을까?
7. 야스쿠니 신사의 조선인 합사는 언제부터 있었을까?
8. 경복궁 근정전이 조선의 야스쿠니 신사(?)
9. 사이토 총독, 그는 정말 조선을 사랑했을까?
10. 광제호는 과연 누구를 위한 배였을까?
11. 우이동에 세워진 '이왕가'의 원찰, 신원사
12. 세키노 교수, 석굴암에 지각하다
제3부 그 거리에 남겨진 근대 역사의 흔적
13. "인민의 집을 헐고 쓸데없는 공원을 만들려느뇨?"
14. '해시계 받침돌'은 왜 저기에 남아 있을까?
15. 500년 종묘사직, 근린공원으로 남다
16. 동묘에는 왜 똑같은 현판이 두 개나 달려 있을까?
17. 조선보병대, 그들만의 평화군대
18. 경성부민관, 독점기업의 마지못한 선물
제4부 우리에겐 참으로 고약했던 시절의 풍경
19. '행운의 편지', 그 질기고도 오랜 역사
20. 고무신이냐, 짚신이냐?
21. 천하진미 종어를 맛 본 사람, 누구 없소?
22. 위문품 주머니 모집은 언제부터 있었을까?
23.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전거 영웅, 엄복동
24. 화엄사의 거인은 왜 속세로 내려왔을까?
25. 위인들의 전성시대, 그 후 40년
제5부 헝클어진 문화재에 대한 해묵은 기억
26. 이건 정말 이순신 장군이 쓰던 칼이었을까?
27. 장충단공원에는 '제일강산태평세계비'가 있다
28. 마지막 특별전시회에서 '금동반가사유상' 나란히 앉다
29. 고달사쌍사자석등, 예식장 뜰로 옮겨지다
30. 이가 빠진 보물지정번호는 왜 그런가?
31. 하마터면 박물관으로 옮겨질 뻔했던 충주 중앙탑
제1부 껄끄러운 사실들, 미덥잖은 상식 앞에 서다
1. '영친왕'이 일본식 호칭이란 건 오해
2. 미심쩍은 돈의문의 딴 이름, '서대문'
3. '대일본' 형상에 관한 속설의 진위
4. 덕수궁 대한문은 '큰 하늘 문'이라는 뜻
5.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눈흘긴다"
6. '고려장은 없었다'에 대한 약간 다른 생각
제2부 그들은 정말 조선을 사랑했을까?
7. 야스쿠니 신사의 조선인 합사는 언제부터 있었을까?
8. 경복궁 근정전이 조선의 야스쿠니 신사(?)
9. 사이토 총독, 그는 정말 조선을 사랑했을까?
10. 광제호는 과연 누구를 위한 배였을까?
11. 우이동에 세워진 '이왕가'의 원찰, 신원사
12. 세키노 교수, 석굴암에 지각하다
제3부 그 거리에 남겨진 근대 역사의 흔적
13. "인민의 집을 헐고 쓸데없는 공원을 만들려느뇨?"
14. '해시계 받침돌'은 왜 저기에 남아 있을까?
15. 500년 종묘사직, 근린공원으로 남다
16. 동묘에는 왜 똑같은 현판이 두 개나 달려 있을까?
17. 조선보병대, 그들만의 평화군대
18. 경성부민관, 독점기업의 마지못한 선물
제4부 우리에겐 참으로 고약했던 시절의 풍경
19. '행운의 편지', 그 질기고도 오랜 역사
20. 고무신이냐, 짚신이냐?
21. 천하진미 종어를 맛 본 사람, 누구 없소?
22. 위문품 주머니 모집은 언제부터 있었을까?
23.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전거 영웅, 엄복동
24. 화엄사의 거인은 왜 속세로 내려왔을까?
25. 위인들의 전성시대, 그 후 40년
제5부 헝클어진 문화재에 대한 해묵은 기억
26. 이건 정말 이순신 장군이 쓰던 칼이었을까?
27. 장충단공원에는 '제일강산태평세계비'가 있다
28. 마지막 특별전시회에서 '금동반가사유상' 나란히 앉다
29. 고달사쌍사자석등, 예식장 뜰로 옮겨지다
30. 이가 빠진 보물지정번호는 왜 그런가?
31. 하마터면 박물관으로 옮겨질 뻔했던 충주 중앙탑
저자 소개
책 속으로
물론 여기에서주의할 부분은 이러한 이름이 통용되고 있었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고려장의 실체까지 확인해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늙고 병든 부모를 내다버리는 그러한 악습이 실제로 있었는지를 검증하는 것과 고려장이라는 이름이 예전에도 존재하고 있었는지를 입증하는 것은 반드시 동일한 결론에 이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국에 흩어진 숱한 고분들이 ‘고려장’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고 해서 그것이 정말로 ‘고려장’ 풍습에 의한 것인지는 전혀 알 수 없는 노릇이며, 그것이 단지 ‘옛무덤’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기에 하는 얘기다.
다만, 여기서는 고려장 설화 또는 고려장의 개념이 일제 때 만들어지고 유포되었다고 알려진 부분은 명백한 잘못이라는 사실 정도는 구분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전국에 흩어진 숱한 고분들이 ‘고려장’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고 해서 그것이 정말로 ‘고려장’ 풍습에 의한 것인지는 전혀 알 수 없는 노릇이며, 그것이 단지 ‘옛무덤’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기에 하는 얘기다.
다만, 여기서는 고려장 설화 또는 고려장의 개념이 일제 때 만들어지고 유포되었다고 알려진 부분은 명백한 잘못이라는 사실 정도는 구분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 p.63 <'고려장은 없었다'에 대한 약간 다른 생각> 중에서
출판사 리뷰
사료연구가 이순우의 새책 <그들은 정말 조선을 사랑했을까?>가 출간되었다.
<그들은 정말 조선을 사랑했을까?>는 우리가 상식처럼 알고 있는 근대 역사 속의 장소, 사람, 사건 등에 대한 오류들을 바로잡고,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들을 발굴해내 31장의 작은 주제들로 꾸민 새로운 역사이야기 책이다. 일그러진 근대 역사의 흔적 찾기 1편인 <테라우치 총독, 조선의 꽃이 되다>의 주제를 이어받되, 새책에서는 ‘일제잔재’에 대한 문제제기가 좀더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일제잔재’에 관한 몇 가지 오해를 밝히는 이유
<그들은 정말 조선을 사랑했을까?>는 이제까지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일제잔재’라고 생각해왔던 몇 가지 사실들의 잘못된 연원을 밝히고 있다. 물론 그것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야말로 잘못된 잔재의 진정한 청산을 위한 첫걸음이 되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우리 주위에는 아직도 제대로 정리되지 못하였거나 서둘러 바로 잡아야 할 근대 역사의 해묵은 흔적들이 여전히 널려 있다. 벌써 잊혀졌거나 잘못 알려졌던 관련 사실들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한번쯤 곰곰이 되새겨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이 책을 엮게 된 의미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서울의 중심거리 종로를 ‘鍾路’가 아니라 ‘鐘路’라고 표기해야 옳다는 설명은 맞는데, ‘鍾路’라는 명칭이 일제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 때부터 ‘鍾路’라는 잘못된(?) 표현이 으레 사용되고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고려장이란 말이 일제 때 만들어졌으며 우리 나라 고분을 도굴하려는 일본인들의 소행과 관련된 것이라는 설명도, 그리피스의 ≪은자의 나라 한국(Corea : The Hermit Nation)≫(1882년)에 ‘고려장(Ko-rai-chang)’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 등을 이유로 과장된 측면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대일본(大日本)’ 형상에 관한 속설에 대한 것도 그 중 하나이다.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 터를 파헤치고 들어선 조선총독부 청사가 일(日)자 모양이고, 그 앞으로 이어진 덕수궁 앞쪽에 세워진 경성부청(서울시청)이 본(本)자 모양이니, 여기에 다시 대(大)자의 형상인 북악산과 어우러져 ‘대일본(大日本)’이라는 글자를 만들어낸다. 이에 대해서는 일제가 조선의 민족정기를 압살하는 동시에 그네들의 영구통치를 획책하려는 저의를 담아 조선의 심장부에다 구태여 그러한 생김새의 건물을 배치한 것이라는 해석이 널리 통용되고 있다. 이건 누가 들어봐도 당연히 통탄하거나 분개하여 마지않을 일이다.
하지만 경성부청을 대한제국의 황제가 거처하던 덕수궁 앞에다, 그것도 덕수궁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을 만큼 압도적인 규모로 지으려고 했던 그네들의 저의는 지적할 수 있을지라도, 그것을 일컬어 조선총독부의 ‘일’자 건물과 짝이 되게 ‘본’자 형태로 배치하려 했다는 건 과장된 해석인 듯하다는 것이다. 조선총독부 청사가 ‘일(日)’자 모양의 건물인 것은 명백하지만, 이것은 ‘중정형(中庭型)’이라 하여 예전에는 비교적 흔했던 건축양식의 하나였다. 따라서 그것이 정말 일본의 ‘일’자를 뜻하는 것인지는 좀 더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 아닐까 싶다는 것이다(경성부청의 외형은 언뜻 ‘본(本)’자의 모양으로 보이지만, 일본인들의 기록으로는 이것이 ‘산(山)’이나 ‘궁(弓)’자의 형태라고 적어놓은 구절만을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
청산되어야 할 일제잔재, 그리고 뼈아픈 근대사의 흔적들
정작 없어져야 할 일제잔재에 관한 이야기들이 이 책의 주제이다.
서대문의 본디 이름이 돈의문(敦義門)이었고, 달리 신문(新門) 즉 ‘새문’으로 불렀다는 얘기는 잘 알려져 있다. 옛기록에는 우리가 익히 아는 동대문이니 남대문이니 동소문이니 서소문이니 하는 이름은 속속 등장하지만, 돈의문의 속칭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조선인은 ‘새문’, 일본인은 ‘서대문’이라 즐겨 불렀기에 그 명칭이 굳어졌던 것이다. 지하철 ‘서대문역’의 명칭을 ‘새문역’으로 바꾸는 정도의 시도는 지금이라도 충분히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누가 뭐래도 서대문이라는 이름은 이 땅에서 일본인들의 위세가 판을 치던 시절에 널리 퍼진 참으로 마뜩찮은 유산의 하나니까 말이다.
야스쿠니 신사의 조선인 합사(合祀)는 언제부터 있었을까?에 대한 기록도 흥미롭다. 최초의 사례는 1926년 4월의 배대영(裵大永)으로 추정되는데, 그는 1914년에서 1920년 사이에 벌어진 제1차 세계대전 및 시베리아출병에서 사망했다. 야스쿠니 신사라면 비단 ‘A급전범’에 대한 참배문제만 얽혀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2만 명이 넘는 조선인들의 위패가 그곳에 함께 있다는 것 역시 큰 문제다. 참고로, 1940년 가을 임시대제까지의 야스쿠니 신사 총합사주수는 193,811주였고, 그 후 시기부터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의 짧은 시기에 200만 명 이상의 추가 전사자를 냈던 것으로 보면 그 추세나마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경복궁 근정전의 용상이 ‘순직경찰관초혼제(殉職警察官招魂祭)’, 즉 ‘왜놈 순사’로 불러왔던 이들을 위한 제단(祭壇)으로 사용되어 하마터면 조선의 야스쿠니 신사가 될 뻔했다는 것도 우리 민족으로선 뼈아픈 이야기이다. 한편 “죽고 나면 자신의 뼈를 조선에 묻을 것이며 경성으로 호적을 옮겨오겠다”던 사이토 총독이 ‘관세음보살상’을 경성에 있는 조계사(曹谿寺)에다 기증했는데, 조선에도 유행하는 관음신앙을 활용하여 내선융합을 이루겠다는 것이 그의 발원이었다. 이러한 가히 전직 조선총독다운 발상과 함께 결국 한남동 약초관음당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묻고 간 총독의 뒷얘기가 씁쓸할 뿐이다.
1902년 겨우 62일간에 걸쳐 서울, 개성, 부산, 경주, 해인사 등지의 고건축과 고적유물들을 살펴보았고, 그 후 1년 반 가량의 정리작업을 거쳐 1904년 7월에 출간한 ≪한국건축조사보고≫로 조선고적조사의 효시라고 일컫어진 세키노 타다시(關野貞)의 심대한 오류와 편견에 대한 지적도 흥미롭다. 결과적으로 세키노는 자료의 정리를 마칠 때까지 석굴암의 존재를 전혀 인식하지 못했으며 몇 년 후 석굴암을 일컬어 “당대의 기술가가 중국의 것을 그대로 답습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다소간 독창적인 공부를 이끌어냈다”고 평가했다. 지금 생각하면 가소로운 일이지만, 그 시절에는 분명 석굴암을 중국인 석공의 작품이라고 굳게 믿는 일본인들이 많았으니, 그나마 그의 업적이라면 업적이랄까.
이밖에 행운의 편지의 유래, 짚신을 애용하고 고무신을 배척하자는 이야기, 위문품 주머니의 시작, 자전거 영웅 엄복동에 관한 일화 등 생활 속의 근대사 이야기도 독자들의 눈길을 끌 만하다.
한편, 거의 모든 페이지 걸쳐 등장하는 사진자료들과 설명만 보아도 알찬 책읽기가 될 만큼, 이 책의 자료는 풍부하고 정확하다.
<그들은 정말 조선을 사랑했을까?>는 우리가 상식처럼 알고 있는 근대 역사 속의 장소, 사람, 사건 등에 대한 오류들을 바로잡고,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들을 발굴해내 31장의 작은 주제들로 꾸민 새로운 역사이야기 책이다. 일그러진 근대 역사의 흔적 찾기 1편인 <테라우치 총독, 조선의 꽃이 되다>의 주제를 이어받되, 새책에서는 ‘일제잔재’에 대한 문제제기가 좀더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일제잔재’에 관한 몇 가지 오해를 밝히는 이유
<그들은 정말 조선을 사랑했을까?>는 이제까지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일제잔재’라고 생각해왔던 몇 가지 사실들의 잘못된 연원을 밝히고 있다. 물론 그것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야말로 잘못된 잔재의 진정한 청산을 위한 첫걸음이 되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우리 주위에는 아직도 제대로 정리되지 못하였거나 서둘러 바로 잡아야 할 근대 역사의 해묵은 흔적들이 여전히 널려 있다. 벌써 잊혀졌거나 잘못 알려졌던 관련 사실들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한번쯤 곰곰이 되새겨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이 책을 엮게 된 의미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서울의 중심거리 종로를 ‘鍾路’가 아니라 ‘鐘路’라고 표기해야 옳다는 설명은 맞는데, ‘鍾路’라는 명칭이 일제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 때부터 ‘鍾路’라는 잘못된(?) 표현이 으레 사용되고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고려장이란 말이 일제 때 만들어졌으며 우리 나라 고분을 도굴하려는 일본인들의 소행과 관련된 것이라는 설명도, 그리피스의 ≪은자의 나라 한국(Corea : The Hermit Nation)≫(1882년)에 ‘고려장(Ko-rai-chang)’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 등을 이유로 과장된 측면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대일본(大日本)’ 형상에 관한 속설에 대한 것도 그 중 하나이다.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 터를 파헤치고 들어선 조선총독부 청사가 일(日)자 모양이고, 그 앞으로 이어진 덕수궁 앞쪽에 세워진 경성부청(서울시청)이 본(本)자 모양이니, 여기에 다시 대(大)자의 형상인 북악산과 어우러져 ‘대일본(大日本)’이라는 글자를 만들어낸다. 이에 대해서는 일제가 조선의 민족정기를 압살하는 동시에 그네들의 영구통치를 획책하려는 저의를 담아 조선의 심장부에다 구태여 그러한 생김새의 건물을 배치한 것이라는 해석이 널리 통용되고 있다. 이건 누가 들어봐도 당연히 통탄하거나 분개하여 마지않을 일이다.
하지만 경성부청을 대한제국의 황제가 거처하던 덕수궁 앞에다, 그것도 덕수궁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을 만큼 압도적인 규모로 지으려고 했던 그네들의 저의는 지적할 수 있을지라도, 그것을 일컬어 조선총독부의 ‘일’자 건물과 짝이 되게 ‘본’자 형태로 배치하려 했다는 건 과장된 해석인 듯하다는 것이다. 조선총독부 청사가 ‘일(日)’자 모양의 건물인 것은 명백하지만, 이것은 ‘중정형(中庭型)’이라 하여 예전에는 비교적 흔했던 건축양식의 하나였다. 따라서 그것이 정말 일본의 ‘일’자를 뜻하는 것인지는 좀 더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 아닐까 싶다는 것이다(경성부청의 외형은 언뜻 ‘본(本)’자의 모양으로 보이지만, 일본인들의 기록으로는 이것이 ‘산(山)’이나 ‘궁(弓)’자의 형태라고 적어놓은 구절만을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
청산되어야 할 일제잔재, 그리고 뼈아픈 근대사의 흔적들
정작 없어져야 할 일제잔재에 관한 이야기들이 이 책의 주제이다.
서대문의 본디 이름이 돈의문(敦義門)이었고, 달리 신문(新門) 즉 ‘새문’으로 불렀다는 얘기는 잘 알려져 있다. 옛기록에는 우리가 익히 아는 동대문이니 남대문이니 동소문이니 서소문이니 하는 이름은 속속 등장하지만, 돈의문의 속칭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조선인은 ‘새문’, 일본인은 ‘서대문’이라 즐겨 불렀기에 그 명칭이 굳어졌던 것이다. 지하철 ‘서대문역’의 명칭을 ‘새문역’으로 바꾸는 정도의 시도는 지금이라도 충분히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누가 뭐래도 서대문이라는 이름은 이 땅에서 일본인들의 위세가 판을 치던 시절에 널리 퍼진 참으로 마뜩찮은 유산의 하나니까 말이다.
야스쿠니 신사의 조선인 합사(合祀)는 언제부터 있었을까?에 대한 기록도 흥미롭다. 최초의 사례는 1926년 4월의 배대영(裵大永)으로 추정되는데, 그는 1914년에서 1920년 사이에 벌어진 제1차 세계대전 및 시베리아출병에서 사망했다. 야스쿠니 신사라면 비단 ‘A급전범’에 대한 참배문제만 얽혀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2만 명이 넘는 조선인들의 위패가 그곳에 함께 있다는 것 역시 큰 문제다. 참고로, 1940년 가을 임시대제까지의 야스쿠니 신사 총합사주수는 193,811주였고, 그 후 시기부터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의 짧은 시기에 200만 명 이상의 추가 전사자를 냈던 것으로 보면 그 추세나마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경복궁 근정전의 용상이 ‘순직경찰관초혼제(殉職警察官招魂祭)’, 즉 ‘왜놈 순사’로 불러왔던 이들을 위한 제단(祭壇)으로 사용되어 하마터면 조선의 야스쿠니 신사가 될 뻔했다는 것도 우리 민족으로선 뼈아픈 이야기이다. 한편 “죽고 나면 자신의 뼈를 조선에 묻을 것이며 경성으로 호적을 옮겨오겠다”던 사이토 총독이 ‘관세음보살상’을 경성에 있는 조계사(曹谿寺)에다 기증했는데, 조선에도 유행하는 관음신앙을 활용하여 내선융합을 이루겠다는 것이 그의 발원이었다. 이러한 가히 전직 조선총독다운 발상과 함께 결국 한남동 약초관음당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묻고 간 총독의 뒷얘기가 씁쓸할 뿐이다.
1902년 겨우 62일간에 걸쳐 서울, 개성, 부산, 경주, 해인사 등지의 고건축과 고적유물들을 살펴보았고, 그 후 1년 반 가량의 정리작업을 거쳐 1904년 7월에 출간한 ≪한국건축조사보고≫로 조선고적조사의 효시라고 일컫어진 세키노 타다시(關野貞)의 심대한 오류와 편견에 대한 지적도 흥미롭다. 결과적으로 세키노는 자료의 정리를 마칠 때까지 석굴암의 존재를 전혀 인식하지 못했으며 몇 년 후 석굴암을 일컬어 “당대의 기술가가 중국의 것을 그대로 답습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다소간 독창적인 공부를 이끌어냈다”고 평가했다. 지금 생각하면 가소로운 일이지만, 그 시절에는 분명 석굴암을 중국인 석공의 작품이라고 굳게 믿는 일본인들이 많았으니, 그나마 그의 업적이라면 업적이랄까.
이밖에 행운의 편지의 유래, 짚신을 애용하고 고무신을 배척하자는 이야기, 위문품 주머니의 시작, 자전거 영웅 엄복동에 관한 일화 등 생활 속의 근대사 이야기도 독자들의 눈길을 끌 만하다.
한편, 거의 모든 페이지 걸쳐 등장하는 사진자료들과 설명만 보아도 알찬 책읽기가 될 만큼, 이 책의 자료는 풍부하고 정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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