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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전 세계는 왜 자살폭탄테러에 경악하는가?
인류학 석학이 던지는
테러와 전쟁, 인간과 문명에 대한 도발적인 질문
왜 사람들은 테러에 경악하는가? 무슬림의 자살폭탄테러가 미국이 전 세계에서 벌이는 전쟁과 다른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까닭은 무엇인가?
『자살폭탄테러: 테러·전쟁·죽음에 관한 인류학자의 질문』(원제: On Suicide Bombing)은 2001년 9·11 세계무역센터 폭파 사건 이후 계속된 오늘날 ‘테러’를 둘러싼 언론과 대중의 반응, 좌·우 지식인의 담론을 비판적으로 통찰하는 책이다. 흔히 테러 사건이 벌어지면 테러의 동기가 무엇인지에 관심이 모아진다. “문명 간 충돌”(버나드 루이스)이라는 테제에서 알 수 있듯이 무슬림이 자행한 자살테러는 이슬람 문명(혹은 반反문명), 이슬람 종교 자체에 테러를 추동하는 동기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종교를 동기로 삼는 테러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까? 종교적 이유로 죽이고자 하는 것은 그냥 죽이고자 하는 것과 다를까? 테러가 집단폭력이라면 다른 형태의 집단폭력과는 어떻게 다를까? 과연 테러는 전쟁 등 다른 잔학 행위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일까?
이 책은 테러와 전쟁으로 일상이 된 폭력의 공간을 돌아보는 한편, 윤리적으로 선한 살상과 악한 살상을 구별하는 행위에 질문을 던지며 우리 근대 주체의 취약성을 조명한다.
인류학 석학이 던지는
테러와 전쟁, 인간과 문명에 대한 도발적인 질문
왜 사람들은 테러에 경악하는가? 무슬림의 자살폭탄테러가 미국이 전 세계에서 벌이는 전쟁과 다른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까닭은 무엇인가?
『자살폭탄테러: 테러·전쟁·죽음에 관한 인류학자의 질문』(원제: On Suicide Bombing)은 2001년 9·11 세계무역센터 폭파 사건 이후 계속된 오늘날 ‘테러’를 둘러싼 언론과 대중의 반응, 좌·우 지식인의 담론을 비판적으로 통찰하는 책이다. 흔히 테러 사건이 벌어지면 테러의 동기가 무엇인지에 관심이 모아진다. “문명 간 충돌”(버나드 루이스)이라는 테제에서 알 수 있듯이 무슬림이 자행한 자살테러는 이슬람 문명(혹은 반反문명), 이슬람 종교 자체에 테러를 추동하는 동기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종교를 동기로 삼는 테러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까? 종교적 이유로 죽이고자 하는 것은 그냥 죽이고자 하는 것과 다를까? 테러가 집단폭력이라면 다른 형태의 집단폭력과는 어떻게 다를까? 과연 테러는 전쟁 등 다른 잔학 행위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일까?
이 책은 테러와 전쟁으로 일상이 된 폭력의 공간을 돌아보는 한편, 윤리적으로 선한 살상과 악한 살상을 구별하는 행위에 질문을 던지며 우리 근대 주체의 취약성을 조명한다.
목차
들어가며
1장 테러
2장 자살테러
3장 자살테러에 경악한다는 것
에필로그
주
부록 인간이라는 범주-탈랄 아사드 인터뷰
옮긴이의 말 성속(聖俗)을 넘어서
찾아보기
1장 테러
2장 자살테러
3장 자살테러에 경악한다는 것
에필로그
주
부록 인간이라는 범주-탈랄 아사드 인터뷰
옮긴이의 말 성속(聖俗)을 넘어서
찾아보기
출판사 리뷰
전 세계는 왜 자살폭탄테러에 경악하는가?
세계적인 인류학 석학이 ‘폭력의 공간’ 현대사회에 던지는 도발적인 질문
『자살폭탄테러: 테러·전쟁·죽음에 관한 인류학자의 질문』(원제: On Suicide Bombing)은 2001년 9·11 세계무역센터 폭파 사건 이후 계속된 오늘날 ‘테러’를 둘러싼 언론과 대중의 반응, 좌·우 지식인의 담론을 비판적으로 통찰하는 책이다. 흔히 테러 사건이 벌어지면 테러의 동기가 무엇인지에 관심이 모아진다. “문명 간 충돌”(버나드 루이스)이라는 테제에서 알 수 있듯이 무슬림이 자행한 자살테러는 이슬람 문명(혹은 ‘반反문명’), 이슬람 종교 자체에 테러를 추동하는 동기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종교를 동기로 삼는 테러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까? 종교적 이유로 죽이는 것은 그냥 죽이는 것과 다를까? 테러가 집단폭력이라면 다른 집단폭력과는 어떻게 다를까? 과연 테러는 전쟁 등 다른 잔학 행위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일까? 이 책은 테러와 전쟁으로 일상이 된 폭력의 공간을 돌아보는 한편, 윤리적으로 선한 살상과 악한 살상을 구별하는 행위에 질문을 던지며 우리 근대 주체의 취약성을 조명한다.
부록으로 실린 2015년 『월간 이슬람』과의 인터뷰에서는 IS와 샤를리 에브도 사건 등 최근 더욱 거세진 테러 위협과 이슬람혐오를 돌아보며 서방에서 내세우는 ‘인간’(humanity)이라는 가치/범주가 더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역설한다.
테러와 전쟁을 대하는 두 얼굴
이 책을 통해 국내 처음 소개되는 저자 탈랄 아사드(Talal Asad, 1932~)는 사우디아라비아 태생의 인류학계 거목으로 포스트콜로니얼리즘·기독교·이슬람 연구에 크게 기여했으며 모더니티의 필수요소로서 종교와 세속주의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2006년 캘리포니아대학에서의 강의를 토대로 한 이 책은 종교를 앞세운 진영논리가 전 세계를 재편하고 있는 지금, ‘문명 대 야만’ ‘기독교 대 이슬람’ 그리고 ‘정당한 전쟁 대 악마적인 테러’라는 서구정치의 이분법적 사고를 단숨에 무력화하는 통찰을 제공한다.
탈랄 아사드는 영국 에든버러와 옥스퍼드에서 인류학을 전공했지만, 그의 인류학은 원시부족을 타자화하며 영국을 비롯한 구 제국주의 국가의 통치형태를 정당화한 당시 주류 인류학과 선을 긋는다. 또 한편으로는 인류학을 식민통치의 수단이라거나 식민 이데올로기의 반영으로 단순화하는 시각과도 거리를 유지한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1978)에 앞서 ‘인류학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인류학과 식민적 조우』(Anthropology & the Colonial Encounter, 1973)의 책임편집을 맡기도 한 아사드는 책의 서론에서 “인류학은 자기가 어떤 세계에 속해 있는지를 이해해야 할 뿐 아니라 그 세계가 어떻게 그 이해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기가 속한 세계와의 상호 영향관계를 이해하려는 그의 문제의식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서구의 정신과 태도를 지배해온 ‘종교 대 세속’의 문제를 탐사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가장 최근 저작인 『자살폭탄테러』(원서는 2007년 출간) 역시 그 연장선에 있는 책으로, ‘무슬림이 자행한 자살폭탄테러’라는 언표와 마주해 오늘날의 테러, 자살테러, 그리고 현대의 일상공간을 둘러싼 더 광범위하고 역사적인 폭력과 죽음의 문제를 다룬다.
먼저 저자는 오늘날 일상어가 된 ‘테러’라는 말이 과연 언제, 어떤 상황에서 사용되는지 살펴본다. “오늘날 미국뿐 아니라 유럽과 이스라엘, 그밖의 지역에서까지 특정 유형의 무력 행사에 ‘테러’라는 용어가 주로 쓰이는 것은 왜인가?”(17면)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무엇을 테러라 하고, 무엇을 테러가 아닌 것 ― 이를테면 전쟁 ― 으로 구분하는가? 저자는 정치철학자, 국제법 전문가, 참전군인 등의 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그 구분 기준이 합법적이냐 아니냐, 국제법 내지 인도주의 원칙으로 받아들여지느냐 아니냐일 뿐, 언론이나 지식인들이 주장하는 사건 자체의 질적인 차이(무고한 사람을 살상하는지 여부, 잔혹함의 정도)란 사실상 실체가 없음을 밝히고 있다. 물론 이때 합법성을 판단할 권한은 서방 강국이 쥐고 있다. ‘2차대전 중 독일 민간인에 대한 공습은 테러가 아니지만 무슬림의 자살공격은 테러’라고 보는 근거가 여기 있다. 미국이나 이스라엘이 벌이는 전쟁의 민간인 살상에 대해서는 ‘불가피한 조치’ ‘비상시 윤리’라는 예외조항이 허용되고, ‘어쩔 수 없이’ 살상을 자행하며 생기는 ‘죄의식’을 통해 또 한번 면죄부가 주어진다. “여기서 특별히 흥미로운 것은 군대가 발휘하는 인간애가 아니라 비인륜적 조치를 인륜적 조치로 둔갑시키는 자유주의 담론의 교묘함이다. 만일 야만인 담론이라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자유주의 담론만큼 교묘함을 발휘하지는 못할 것이다.”(68면)
왜 자살테러에만 경악하는가
테러의 해악은 전쟁의 해악이기도 하다는 것이 저자의 논조다. 그렇다면 자살테러의 경우는 어떤가? 적을 죽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경우라면 뭔가 더 설명이 필요할 것만 같다. 무고한 사람을 살상하는 일은 전시에 흔하고, 자살은 평시에도 드물지 않지만, “무고한 사람을 살상하기 위해 자살”하는 일은 비일상적이기에 더 끔찍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자살테러 사건이 일어나면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테러범의 동기가 무엇이냐에 여론과 관심이 집중되곤 한다. 이때 자살테러범이 ‘무슬림’이라는 사실은 이슬람 문화 자체에 자살테러를 유발하는 동기가 내포되어 있다는 픽션을 완성하는 필요조건이 된다. 무슬림이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성전(지하드)을 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 전통에서 희생제의는 성스러워지려는 의도와 무관하고, 지하드는 십자군전쟁 같은 성전의 개념이 아닐뿐더러 지하드가 모든 무슬림의 의무도 아니다. 중세 전통이 아닌 근대 이후 이슬람 문화에서 자살테러의 인자를 찾아내려는 시도 역시 별 소득이 없다.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자국 방어에 핵무기를 사용할 권리가 있다는 것은 자멸적 전쟁이 합법적일 수 있다는 뜻이다(국제사회도 이 권리를 용인하는 분위기다). 그렇다면 자살테러자는 자유로운 정치공동체를 방어하기 위해 무기를 들고 투쟁에 나선다는 근대 서방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지는 않나 생각해보게 된다.”(110면) 요컨대 자살테러의 동기를 찾아내려는 모든 설명은 반박될 수 있는 것이다.
자살테러에서 동기를 규명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고 해도 여전히 질문은 남는다. 자살테러는 왜 끔찍한가? 저자는 자살테러가 불러일으키는 특별한 정서적 반응을 ‘경악’(horror)으로 규정하며, 무엇이 사람들을 경악하게 하는지, 과연 그 경악은 결백한지 되묻는다. 독재정권이나 민주국가 어디서든 인종차별·고문·전쟁 등 잔혹 행위는 자행되고 있지만 “서방 사람들은 왜 하필 자살테러의 언어적·시각적 재현물 앞에서 경악스럽다고 말하는가?”(113면) 아무런 예고 없이 일상에 침투하는 갑작스러움에서 그 원인을 찾기도 하지만, 비서구권에서 아동을 포함한 지뢰 사상자가 계속 발생하는 것은 그만큼의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우선 “경악이란 동기가 아니라 상태다. 공포나 분노나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복수심과 달리, 경악에는 대상이 없다. 경악이 동사라면 목적어가 없는 자동사다.”(119면) 저자는 예루살렘 피자가게에서 벌어진 자살테러 목격담 사례를 인용하며, 자살테러가 사람들의 자기동일성을 흔들어놓는 점에서 경악을 일으킨다고 본다. 자신이 경험한 것을 표현할 언어를 갖지 못한 상태가 바로 경악인데, 버려진 물건처럼 나뒹구는 자살테러범의 신체 일부는 이를 바라보는 사람에게도 자기동일성의 근간인 육체와 자아 사이에 갑작스런 단절을 가져온다. 그런데 서방 세계에서 ‘더 큰 경악’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무슬림의 자살테러, 즉 비유럽인이 유럽인을 대상으로 벌인 자살테러의 경우이고, 이는 그 세계 사람들의 자기동일성이 유럽인이라는 데 크게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자살테러는 누군가의 ‘자발적 죽음’이 ‘인류 구원’으로 이어진다는 기독교 십자가형 서사에도, 전쟁을 통해 악으로부터 ‘자유’와 ‘민주’를 지킨다는 자유주의 논리에도 부합하지도 않는다. 자살테러는 서방 세계를 수호해온 오랜 인본적 가치가 환상임을 폭력적으로 드러낸다.
문명 간 충돌은 없다. 선과 악의 대결도 없다. 다만 폭력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폭력에는 국가권력과 법 장치를 통해 인정받는 합법적 폭력인가, 아니면 인정받지 못하는 불법적 폭력인가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이슬람 세계의 테러를 규탄하는 것만큼이나 자국 바깥에서 갖은 폭력을 자행해온 서방 세계의 자기반성 또한 필요하다. 국제정치에 위선이 없었던 적은 없지만, 적어도 “미국이 착한 나라, ‘인간’과 인본을 수호하는 나라라고 우기지는 말자”는 것, 테러와의 전쟁을 내세우기에 앞서 최소한의 도덕을 지키자는 것이 이 책의 전언이다.
9·11 직후부터 자살테러에 대한 논의를 구상한 저자는 스스로도 그 일부인, 그래서 책임을 떠날 수 없는 세계질서로부터 오는 괴로움을 동력으로 삼아 이 책을 썼다. “인명이 죽음 시장에서 유통될 때 ‘문명화된’ 나라 사람이냐 ‘미개한’ 나라 사람이냐에 따라 교환가치가 달라진다는 감각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꽤 일반적인 감각”이다(165면). 그 감각에서 저자도 우리도 자유롭기 어렵다. 과연 저자의 바람처럼, 이 책이 테러, 전쟁, 자살테러에 대한 도덕적 대응을 한데 묶어 내보내는 무사안일한 여론을 멀리할 수 있도록 독자의 마음에 충분한 번민을 불러일으키길 기대한다.
리뷰
이 책은 저자가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법적 구분이라는 것이 오늘날 특히 취약하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런 법적 구분은 전 세계 수백만(혹은 수십억) 사람들이 피자가게에서 일어난 자살테러자의 공격과 결혼식장[이라크]에서 일어난 미국의 공격 사이에 대체 무슨 차이가 있다는 건지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사회학적으로 취약하다. 아사드의 이의 제기는 대중의 지지를 탈환하려는 정치인이라면 반드시 답해야 할 부분이다. 동시에 전쟁이 이라크처럼 번지수를 잘못 짚은 곳에서 일어난다면 “부수적 피해”라는 개념은 무너진다. 그 자체로 불필요한 전쟁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 민간인 피해란 무엇인지 누군가는 틀림없이 물을 것이기 때문이다.
- 서맨사 파워 [뉴욕 타임스]
세계적인 인류학 석학이 ‘폭력의 공간’ 현대사회에 던지는 도발적인 질문
『자살폭탄테러: 테러·전쟁·죽음에 관한 인류학자의 질문』(원제: On Suicide Bombing)은 2001년 9·11 세계무역센터 폭파 사건 이후 계속된 오늘날 ‘테러’를 둘러싼 언론과 대중의 반응, 좌·우 지식인의 담론을 비판적으로 통찰하는 책이다. 흔히 테러 사건이 벌어지면 테러의 동기가 무엇인지에 관심이 모아진다. “문명 간 충돌”(버나드 루이스)이라는 테제에서 알 수 있듯이 무슬림이 자행한 자살테러는 이슬람 문명(혹은 ‘반反문명’), 이슬람 종교 자체에 테러를 추동하는 동기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종교를 동기로 삼는 테러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까? 종교적 이유로 죽이는 것은 그냥 죽이는 것과 다를까? 테러가 집단폭력이라면 다른 집단폭력과는 어떻게 다를까? 과연 테러는 전쟁 등 다른 잔학 행위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일까? 이 책은 테러와 전쟁으로 일상이 된 폭력의 공간을 돌아보는 한편, 윤리적으로 선한 살상과 악한 살상을 구별하는 행위에 질문을 던지며 우리 근대 주체의 취약성을 조명한다.
부록으로 실린 2015년 『월간 이슬람』과의 인터뷰에서는 IS와 샤를리 에브도 사건 등 최근 더욱 거세진 테러 위협과 이슬람혐오를 돌아보며 서방에서 내세우는 ‘인간’(humanity)이라는 가치/범주가 더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역설한다.
테러와 전쟁을 대하는 두 얼굴
이 책을 통해 국내 처음 소개되는 저자 탈랄 아사드(Talal Asad, 1932~)는 사우디아라비아 태생의 인류학계 거목으로 포스트콜로니얼리즘·기독교·이슬람 연구에 크게 기여했으며 모더니티의 필수요소로서 종교와 세속주의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2006년 캘리포니아대학에서의 강의를 토대로 한 이 책은 종교를 앞세운 진영논리가 전 세계를 재편하고 있는 지금, ‘문명 대 야만’ ‘기독교 대 이슬람’ 그리고 ‘정당한 전쟁 대 악마적인 테러’라는 서구정치의 이분법적 사고를 단숨에 무력화하는 통찰을 제공한다.
탈랄 아사드는 영국 에든버러와 옥스퍼드에서 인류학을 전공했지만, 그의 인류학은 원시부족을 타자화하며 영국을 비롯한 구 제국주의 국가의 통치형태를 정당화한 당시 주류 인류학과 선을 긋는다. 또 한편으로는 인류학을 식민통치의 수단이라거나 식민 이데올로기의 반영으로 단순화하는 시각과도 거리를 유지한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1978)에 앞서 ‘인류학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인류학과 식민적 조우』(Anthropology & the Colonial Encounter, 1973)의 책임편집을 맡기도 한 아사드는 책의 서론에서 “인류학은 자기가 어떤 세계에 속해 있는지를 이해해야 할 뿐 아니라 그 세계가 어떻게 그 이해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기가 속한 세계와의 상호 영향관계를 이해하려는 그의 문제의식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서구의 정신과 태도를 지배해온 ‘종교 대 세속’의 문제를 탐사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가장 최근 저작인 『자살폭탄테러』(원서는 2007년 출간) 역시 그 연장선에 있는 책으로, ‘무슬림이 자행한 자살폭탄테러’라는 언표와 마주해 오늘날의 테러, 자살테러, 그리고 현대의 일상공간을 둘러싼 더 광범위하고 역사적인 폭력과 죽음의 문제를 다룬다.
먼저 저자는 오늘날 일상어가 된 ‘테러’라는 말이 과연 언제, 어떤 상황에서 사용되는지 살펴본다. “오늘날 미국뿐 아니라 유럽과 이스라엘, 그밖의 지역에서까지 특정 유형의 무력 행사에 ‘테러’라는 용어가 주로 쓰이는 것은 왜인가?”(17면)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무엇을 테러라 하고, 무엇을 테러가 아닌 것 ― 이를테면 전쟁 ― 으로 구분하는가? 저자는 정치철학자, 국제법 전문가, 참전군인 등의 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그 구분 기준이 합법적이냐 아니냐, 국제법 내지 인도주의 원칙으로 받아들여지느냐 아니냐일 뿐, 언론이나 지식인들이 주장하는 사건 자체의 질적인 차이(무고한 사람을 살상하는지 여부, 잔혹함의 정도)란 사실상 실체가 없음을 밝히고 있다. 물론 이때 합법성을 판단할 권한은 서방 강국이 쥐고 있다. ‘2차대전 중 독일 민간인에 대한 공습은 테러가 아니지만 무슬림의 자살공격은 테러’라고 보는 근거가 여기 있다. 미국이나 이스라엘이 벌이는 전쟁의 민간인 살상에 대해서는 ‘불가피한 조치’ ‘비상시 윤리’라는 예외조항이 허용되고, ‘어쩔 수 없이’ 살상을 자행하며 생기는 ‘죄의식’을 통해 또 한번 면죄부가 주어진다. “여기서 특별히 흥미로운 것은 군대가 발휘하는 인간애가 아니라 비인륜적 조치를 인륜적 조치로 둔갑시키는 자유주의 담론의 교묘함이다. 만일 야만인 담론이라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자유주의 담론만큼 교묘함을 발휘하지는 못할 것이다.”(68면)
왜 자살테러에만 경악하는가
테러의 해악은 전쟁의 해악이기도 하다는 것이 저자의 논조다. 그렇다면 자살테러의 경우는 어떤가? 적을 죽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경우라면 뭔가 더 설명이 필요할 것만 같다. 무고한 사람을 살상하는 일은 전시에 흔하고, 자살은 평시에도 드물지 않지만, “무고한 사람을 살상하기 위해 자살”하는 일은 비일상적이기에 더 끔찍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자살테러 사건이 일어나면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테러범의 동기가 무엇이냐에 여론과 관심이 집중되곤 한다. 이때 자살테러범이 ‘무슬림’이라는 사실은 이슬람 문화 자체에 자살테러를 유발하는 동기가 내포되어 있다는 픽션을 완성하는 필요조건이 된다. 무슬림이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성전(지하드)을 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 전통에서 희생제의는 성스러워지려는 의도와 무관하고, 지하드는 십자군전쟁 같은 성전의 개념이 아닐뿐더러 지하드가 모든 무슬림의 의무도 아니다. 중세 전통이 아닌 근대 이후 이슬람 문화에서 자살테러의 인자를 찾아내려는 시도 역시 별 소득이 없다.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자국 방어에 핵무기를 사용할 권리가 있다는 것은 자멸적 전쟁이 합법적일 수 있다는 뜻이다(국제사회도 이 권리를 용인하는 분위기다). 그렇다면 자살테러자는 자유로운 정치공동체를 방어하기 위해 무기를 들고 투쟁에 나선다는 근대 서방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지는 않나 생각해보게 된다.”(110면) 요컨대 자살테러의 동기를 찾아내려는 모든 설명은 반박될 수 있는 것이다.
자살테러에서 동기를 규명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고 해도 여전히 질문은 남는다. 자살테러는 왜 끔찍한가? 저자는 자살테러가 불러일으키는 특별한 정서적 반응을 ‘경악’(horror)으로 규정하며, 무엇이 사람들을 경악하게 하는지, 과연 그 경악은 결백한지 되묻는다. 독재정권이나 민주국가 어디서든 인종차별·고문·전쟁 등 잔혹 행위는 자행되고 있지만 “서방 사람들은 왜 하필 자살테러의 언어적·시각적 재현물 앞에서 경악스럽다고 말하는가?”(113면) 아무런 예고 없이 일상에 침투하는 갑작스러움에서 그 원인을 찾기도 하지만, 비서구권에서 아동을 포함한 지뢰 사상자가 계속 발생하는 것은 그만큼의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우선 “경악이란 동기가 아니라 상태다. 공포나 분노나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복수심과 달리, 경악에는 대상이 없다. 경악이 동사라면 목적어가 없는 자동사다.”(119면) 저자는 예루살렘 피자가게에서 벌어진 자살테러 목격담 사례를 인용하며, 자살테러가 사람들의 자기동일성을 흔들어놓는 점에서 경악을 일으킨다고 본다. 자신이 경험한 것을 표현할 언어를 갖지 못한 상태가 바로 경악인데, 버려진 물건처럼 나뒹구는 자살테러범의 신체 일부는 이를 바라보는 사람에게도 자기동일성의 근간인 육체와 자아 사이에 갑작스런 단절을 가져온다. 그런데 서방 세계에서 ‘더 큰 경악’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무슬림의 자살테러, 즉 비유럽인이 유럽인을 대상으로 벌인 자살테러의 경우이고, 이는 그 세계 사람들의 자기동일성이 유럽인이라는 데 크게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자살테러는 누군가의 ‘자발적 죽음’이 ‘인류 구원’으로 이어진다는 기독교 십자가형 서사에도, 전쟁을 통해 악으로부터 ‘자유’와 ‘민주’를 지킨다는 자유주의 논리에도 부합하지도 않는다. 자살테러는 서방 세계를 수호해온 오랜 인본적 가치가 환상임을 폭력적으로 드러낸다.
문명 간 충돌은 없다. 선과 악의 대결도 없다. 다만 폭력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폭력에는 국가권력과 법 장치를 통해 인정받는 합법적 폭력인가, 아니면 인정받지 못하는 불법적 폭력인가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이슬람 세계의 테러를 규탄하는 것만큼이나 자국 바깥에서 갖은 폭력을 자행해온 서방 세계의 자기반성 또한 필요하다. 국제정치에 위선이 없었던 적은 없지만, 적어도 “미국이 착한 나라, ‘인간’과 인본을 수호하는 나라라고 우기지는 말자”는 것, 테러와의 전쟁을 내세우기에 앞서 최소한의 도덕을 지키자는 것이 이 책의 전언이다.
9·11 직후부터 자살테러에 대한 논의를 구상한 저자는 스스로도 그 일부인, 그래서 책임을 떠날 수 없는 세계질서로부터 오는 괴로움을 동력으로 삼아 이 책을 썼다. “인명이 죽음 시장에서 유통될 때 ‘문명화된’ 나라 사람이냐 ‘미개한’ 나라 사람이냐에 따라 교환가치가 달라진다는 감각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꽤 일반적인 감각”이다(165면). 그 감각에서 저자도 우리도 자유롭기 어렵다. 과연 저자의 바람처럼, 이 책이 테러, 전쟁, 자살테러에 대한 도덕적 대응을 한데 묶어 내보내는 무사안일한 여론을 멀리할 수 있도록 독자의 마음에 충분한 번민을 불러일으키길 기대한다.
리뷰
이 책은 저자가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법적 구분이라는 것이 오늘날 특히 취약하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런 법적 구분은 전 세계 수백만(혹은 수십억) 사람들이 피자가게에서 일어난 자살테러자의 공격과 결혼식장[이라크]에서 일어난 미국의 공격 사이에 대체 무슨 차이가 있다는 건지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사회학적으로 취약하다. 아사드의 이의 제기는 대중의 지지를 탈환하려는 정치인이라면 반드시 답해야 할 부분이다. 동시에 전쟁이 이라크처럼 번지수를 잘못 짚은 곳에서 일어난다면 “부수적 피해”라는 개념은 무너진다. 그 자체로 불필요한 전쟁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 민간인 피해란 무엇인지 누군가는 틀림없이 물을 것이기 때문이다.
- 서맨사 파워 [뉴욕 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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