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책소개
“신에 얽매일 것인가, 과학으로 자유로워질 것인가?”
현대 무신론의 수호자 ‘네 기사’들이 펼치는
과학과 종교에 관한 위대한 지적 탐구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부터 대니얼 데닛 『주문을 깨다』, 샘 해리스 『종교의 종말』, 크리스토퍼 히친스 『신은 위대하지 않다』까지, 과학과 종교계 최대 문제작들의 사상적 토대가 된 바로 그 대화!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상가들이 어쩌다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을까? 가슴을 뜨겁게 하고, 영혼을 간질이며, 신경을 자극하는 열띤 논쟁을 마주하라! 정말로 우주를 만든 초자연적 창조자가 있는가? 『성경』『코란』이 모든 것을 아는 자의 산물이란 증거는 무엇인가? 종교와 과학은 겸손과 오만의 관점에서 어떻게 다른가? 무언가를 타당한 이유로 믿는 것과 황당한 이유로 믿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전투적 무신론자 도킨스, 전략적 무신론자 데닛, 직설적 무신론자 해리스, 성역파괴 무신론자 히친스가 펼치는 지적 탐구의 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현대 무신론의 수호자 ‘네 기사’들이 펼치는
과학과 종교에 관한 위대한 지적 탐구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부터 대니얼 데닛 『주문을 깨다』, 샘 해리스 『종교의 종말』, 크리스토퍼 히친스 『신은 위대하지 않다』까지, 과학과 종교계 최대 문제작들의 사상적 토대가 된 바로 그 대화!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상가들이 어쩌다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을까? 가슴을 뜨겁게 하고, 영혼을 간질이며, 신경을 자극하는 열띤 논쟁을 마주하라! 정말로 우주를 만든 초자연적 창조자가 있는가? 『성경』『코란』이 모든 것을 아는 자의 산물이란 증거는 무엇인가? 종교와 과학은 겸손과 오만의 관점에서 어떻게 다른가? 무언가를 타당한 이유로 믿는 것과 황당한 이유로 믿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전투적 무신론자 도킨스, 전략적 무신론자 데닛, 직설적 무신론자 해리스, 성역파괴 무신론자 히친스가 펼치는 지적 탐구의 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목차
이 책을 읽기 전에_ 무신론 혁명을 촉발한 ‘네 기사’의 등장
머리말_ 하나는 모두를 위해, 모두는 하나를 위해!
1. 종교의 오만, 과학의 겸손, 무신론의 지적·도덕적 용기
_리처드 도킨스
2. 이웃에 ‘커밍아웃’하라, 수가 많으면 강해진다
_대니얼 데닛
3. 독단은 지식의 성장을 방해하고 인류를 갈라놓는다
_샘 해리스
4. 네 기사의 토론
_리처드 도킨스, 대니얼 데닛, 샘 해리스, 크리스토퍼 히친스
머리말_ 하나는 모두를 위해, 모두는 하나를 위해!
1. 종교의 오만, 과학의 겸손, 무신론의 지적·도덕적 용기
_리처드 도킨스
2. 이웃에 ‘커밍아웃’하라, 수가 많으면 강해진다
_대니얼 데닛
3. 독단은 지식의 성장을 방해하고 인류를 갈라놓는다
_샘 해리스
4. 네 기사의 토론
_리처드 도킨스, 대니얼 데닛, 샘 해리스, 크리스토퍼 히친스
책 속으로
그런데 만일 함께 모인 무신론자들이 지구를 대표함직한 지성인들이라면 어떨까? 만일 도킨스, 데닛, 해리스, 히친스가 의기투합해서 뭉쳤다면? 정말 이런 조합이라면 유신론의 도전으로부터 무신론을 지키려는 한 편의 [어벤져스] 영화이리라. 전투적 무신론자 도킨스, 전략적 무신론자 데닛, 직설적 무신론자 해리스, 성역파괴 무신론자 히친스는 각각 혼자만으로도 충분한 존재감을 발산하는 엄청난 저자들이다. 촌철살인의 저널리스트 히친스만 빼고 모두 과학에 깊숙이 발을 담그고 있는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네 기사’가 무신론을 떠받들기 위해 한곳에 모였고, 그들의 놀라운 대화를 녹취하고 후기를 달아 묶은 것이 이 책이다. --- p.7~8
네 기사가 영어를 사용하는 권역에서 어떻게 새 지평을 열었는지 상기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그들은 세계 곳곳에 토론의 장을 열었고, 새로운 세대를 위해 인본주의와 세속주의에 힘을 실어주었으며, 신앙 치료라는 속임수부터 잔인한 순교에 이르는 종교가 지닌 최악의 측면들이 종교 자체의 본질과 분리될 수 없다는, 항상 잠재해 있었지만 점점 고개를 드는 의심을 말로 표현했다. 그들은 이를 위해 매우 영향력 있는 저서들을 출판했다. 해리스의 『종교의 종말』,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데닛의 『주문을 깨다』,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가 그것이다. 이 책들은 2000년대 초 미국에서는 복음주의적 근본주의 기독교가 성장하고, 이슬람 세계에서는 잔인한 지하디즘(Jihadism)이 세를 불리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등장했다. 그 임금님은 약 400년 동안 행진해왔는데, 이제 누군가가 나서서 임금님을 가리키며 벌거벗었음을 상기시킬 때였다. --- p.24
연옥 항목에서 ‘증명(proofs)’이라 부르는 세부 항목은 흥미로운데, 그것이 일종의 논리를 사용한다고 표명하기 때문이다. 그 논리라는 게 어떤 식인지 보자. 만일 죽은 사람이 하늘나라로 곧장 간다면 우리가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도 소용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그는 하늘나라로 곧장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연옥이 존재하는 것이 틀림없다. 이상으로 증명 끝. 신학 교수들이 정말 이런 일을 하고 월급을 받는다고? 이 정도로 하고, 다시 과학으로 가보자. 과학자들은 답을 모르면 모른다고 말한다. 하지만 답을 알면 안다고 말하고, 그것을 선언하는 데 쭈뼛거리지 않는다. 증거가 확실할 때 알려진 사실을 말하는 것은 오만이 아니다. 물론 과학철학자들은 사실이라는 것은 언젠가는 오류로 판명될 수 있으나 지금까지는 반증하려는 끈질긴 시도를 견뎌낸 가설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 p.46
히친스: 제가 받은 인상으로는 자기 자신을 신자, 또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이들 중 대다수는 항상 그렇게 합니다. 조현병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무례한 거죠.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내용이 믿기 어려운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병원에 가거나 여행할 때, 또는 다른 일을 할 때는 신앙에 따라 행동하지 않습니다. 한편으로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신앙 없이는 안 됩니다. 그러면서도 의심을 억누르지 않습니다. 실제로 가능할 때마다 의심하려고 시도하고 의심을 쌓아나가죠.
도킨스: 흥미로운 말씀이군요. 그들이 겉보기에는 확신에 차서 「사도신경」을 암송하는데, 그것은 의심을 극복하기 위한 일종의 주문이다 이거죠. “저는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요. 실제로는 믿지 않으니까. --- p.98
도킨스: 학계의 신학자, 주교, 교구 사제들은 우리가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혹은 그렇게 하는 사람들을 비난한다고 공격합니다. 그러면서 “당연히 우리는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믿지 않는다!”고 말하죠. 하지만 그들은 아담과 이브가 한 일에 대해 설교할 때 마치 아담과 이브가 실존했던 것처럼 말합니다. 그렇게 말해도 되는 면허라도 받은 것처럼요. 하지만 그것이 허구임을 그들은 알고, 학식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알아요. 그런데도 신자들, 그들의 ‘양들’에게는 아담과 이브가 마치 실존했던 것처럼,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말합니다. 그래서 엄청나게 많은 신도들이 아담과 이브가 실존했다고 생각합니다.
데닛: 이 설교자들 중 누군가가 그런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이것은 이론적 가설이다. 사실이 아니라 매우 멋진 은유다”라고 말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 p.110
도킨스: 미켈란젤로가 과학박물관 천장화를 의뢰받았다면, 그만큼 훌륭한 작품을 만들지 못했을 거라는 말씀인가요?
히친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내키지는 않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도킨스: 정말로요? 저는 틀림없이 좋은 작품을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히친스: 그 점이 우리 둘의 차이일 수 있겠군요. 저는 회화나 건축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성베드로대성당 같은 종교 건축물을 좋아하지 않아요. 면죄부를 특별 판매해 지었다는 사실도 도움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이죠. 하지만 존 던이나 조지 허버트가 쓴 종교시를 보면, 그것이 꾸며낸 것이라거나 후원자를 위해 썼다고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 p.169~170
히친스: 우리는 시아파의 회교 사원도 폭파하지 않습니다. 바미얀 석불을 폭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성을 모독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안티고네』에서 소포클레스가 제시한 이유로, 불경함과 신성모독에 대한 자연적 저항감이 있죠. 교회를 파괴하고, 유대교 예배당을 불태우고, 서로의 회교 사원을 폭파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신자들입니다. 우리는 그 점을 지적하는 데 좀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처음부터 지적한 것이지만, 우리가 음악의 메아리, 시와 신비가 사라진 텅 빈 세계를 바랄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할까 봐. 우리 중 누구도 그렇지 않기 때문에…….
네 기사가 영어를 사용하는 권역에서 어떻게 새 지평을 열었는지 상기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그들은 세계 곳곳에 토론의 장을 열었고, 새로운 세대를 위해 인본주의와 세속주의에 힘을 실어주었으며, 신앙 치료라는 속임수부터 잔인한 순교에 이르는 종교가 지닌 최악의 측면들이 종교 자체의 본질과 분리될 수 없다는, 항상 잠재해 있었지만 점점 고개를 드는 의심을 말로 표현했다. 그들은 이를 위해 매우 영향력 있는 저서들을 출판했다. 해리스의 『종교의 종말』,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데닛의 『주문을 깨다』,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가 그것이다. 이 책들은 2000년대 초 미국에서는 복음주의적 근본주의 기독교가 성장하고, 이슬람 세계에서는 잔인한 지하디즘(Jihadism)이 세를 불리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등장했다. 그 임금님은 약 400년 동안 행진해왔는데, 이제 누군가가 나서서 임금님을 가리키며 벌거벗었음을 상기시킬 때였다. --- p.24
연옥 항목에서 ‘증명(proofs)’이라 부르는 세부 항목은 흥미로운데, 그것이 일종의 논리를 사용한다고 표명하기 때문이다. 그 논리라는 게 어떤 식인지 보자. 만일 죽은 사람이 하늘나라로 곧장 간다면 우리가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도 소용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그는 하늘나라로 곧장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연옥이 존재하는 것이 틀림없다. 이상으로 증명 끝. 신학 교수들이 정말 이런 일을 하고 월급을 받는다고? 이 정도로 하고, 다시 과학으로 가보자. 과학자들은 답을 모르면 모른다고 말한다. 하지만 답을 알면 안다고 말하고, 그것을 선언하는 데 쭈뼛거리지 않는다. 증거가 확실할 때 알려진 사실을 말하는 것은 오만이 아니다. 물론 과학철학자들은 사실이라는 것은 언젠가는 오류로 판명될 수 있으나 지금까지는 반증하려는 끈질긴 시도를 견뎌낸 가설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 p.46
히친스: 제가 받은 인상으로는 자기 자신을 신자, 또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이들 중 대다수는 항상 그렇게 합니다. 조현병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무례한 거죠.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내용이 믿기 어려운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병원에 가거나 여행할 때, 또는 다른 일을 할 때는 신앙에 따라 행동하지 않습니다. 한편으로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신앙 없이는 안 됩니다. 그러면서도 의심을 억누르지 않습니다. 실제로 가능할 때마다 의심하려고 시도하고 의심을 쌓아나가죠.
도킨스: 흥미로운 말씀이군요. 그들이 겉보기에는 확신에 차서 「사도신경」을 암송하는데, 그것은 의심을 극복하기 위한 일종의 주문이다 이거죠. “저는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요. 실제로는 믿지 않으니까. --- p.98
도킨스: 학계의 신학자, 주교, 교구 사제들은 우리가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혹은 그렇게 하는 사람들을 비난한다고 공격합니다. 그러면서 “당연히 우리는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믿지 않는다!”고 말하죠. 하지만 그들은 아담과 이브가 한 일에 대해 설교할 때 마치 아담과 이브가 실존했던 것처럼 말합니다. 그렇게 말해도 되는 면허라도 받은 것처럼요. 하지만 그것이 허구임을 그들은 알고, 학식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알아요. 그런데도 신자들, 그들의 ‘양들’에게는 아담과 이브가 마치 실존했던 것처럼,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말합니다. 그래서 엄청나게 많은 신도들이 아담과 이브가 실존했다고 생각합니다.
데닛: 이 설교자들 중 누군가가 그런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이것은 이론적 가설이다. 사실이 아니라 매우 멋진 은유다”라고 말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 p.110
도킨스: 미켈란젤로가 과학박물관 천장화를 의뢰받았다면, 그만큼 훌륭한 작품을 만들지 못했을 거라는 말씀인가요?
히친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내키지는 않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도킨스: 정말로요? 저는 틀림없이 좋은 작품을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히친스: 그 점이 우리 둘의 차이일 수 있겠군요. 저는 회화나 건축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성베드로대성당 같은 종교 건축물을 좋아하지 않아요. 면죄부를 특별 판매해 지었다는 사실도 도움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이죠. 하지만 존 던이나 조지 허버트가 쓴 종교시를 보면, 그것이 꾸며낸 것이라거나 후원자를 위해 썼다고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 p.169~170
히친스: 우리는 시아파의 회교 사원도 폭파하지 않습니다. 바미얀 석불을 폭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성을 모독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안티고네』에서 소포클레스가 제시한 이유로, 불경함과 신성모독에 대한 자연적 저항감이 있죠. 교회를 파괴하고, 유대교 예배당을 불태우고, 서로의 회교 사원을 폭파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신자들입니다. 우리는 그 점을 지적하는 데 좀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처음부터 지적한 것이지만, 우리가 음악의 메아리, 시와 신비가 사라진 텅 빈 세계를 바랄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할까 봐. 우리 중 누구도 그렇지 않기 때문에…….
--- p.179
출판사 리뷰
“신에 얽매일 것인가, 과학으로 자유로워질 것인가?”
현대 무신론의 수호자 ‘네 기사’들이 펼치는
과학과 종교에 관한 위대한 지적 탐구
2007년 미국의 심장부 워싱턴D.C.에서 역사적인 대담이 열렸다. 리처드 도킨스, 대니얼 데닛, 샘 해리스,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한자리에 모여 현대 무신론의 시동을 건 획기적인 대화를 나눈 것이다. 종교의 봉인이 풀릴 때 나타날 기사라는 뜻에서 ‘네 기사(Four Horsemen)’라 불리는 이들은, 지적 탐구가 보여줄 수 있는 최상의 모습으로 현대 무신론을 이루는 가닥들이 얼마나 다채로운지를 낱낱이 보여주었다. 『신 없음의 과학』은 그날의 대화와 이후 그들의 진화된 사고를 담은 새로운 에세이를 한데 묶은 것이다. 한국판에서는 진화학자 장대익 서울대 교수의 해제를 더했다. 현대 무신론 운동의 태동부터 ‘네 기사’라는 과학적 무신론 동맹의 형성 등 풍부한 지식적 배경으로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이 기념비적인 대담의 매력은 사회자도, 사전 계획도, 미리 약속한 의제도 없이 자유분방하게 흘러간다는 데 있다. 사중주의 악기들이 각기 독특한 음색으로 곡에 매력을 더하듯이, 네 기사는 공통의 깃발을 치켜들면서도 미묘한 차이를 드러내며 대화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정말로 우주를 만든 초자연적 창조자가 있는가? 『성경』『코란』이 모든 것을 아는 자의 산물이란 증거는 무엇인가? 종교와 과학은 겸손과 오만의 관점에서 어떻게 다른가? 무언가를 타당한 이유로 믿는 것과 황당한 이유로 믿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등 과학과 종교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들과 정면으로 대결하면서 신과 믿음, 종교적 가르침 영역 밖에서의 도덕과 영성에 대한 문제,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의 논쟁, 진정으로 윤리적인 삶을 구성하는 요소 등 다양한 주제로 흥미진진한 대화를 이어나간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바는 명확하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모든 현상은 무조건적인 믿음이 아니라, 인간의 논리와 이성으로 충분히 납득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네 명의 사상가들은 그동안 상식이라 불리던 사고방식에 문제제기를 함으로써 개인의 성찰을 자극한다. 전투적 무신론자 도킨스, 전략적 무신론자 데닛, 직설적 무신론자 해리스, 성역파괴 무신론자 히친스.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인들을 오롯이 만날 수 있는 지적 탐구의 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과학과 종교계를 뒤흔든 최대 문제작들의 사상적 토대가 된 바로 그 대화
가슴을 뜨겁게 하고, 영혼을 간질이며, 신경을 자극하는 지적 향연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상가들이 어쩌다 한곳에 모이게 되었을까? 때는 2001년 이슬람 테러조직 알카에다가 자행한 911 테러 이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지식인 중에는 이러한 테러가 미국의 반이슬람 그리스도교 근본주의 때문에 일어났다고 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고삐 풀린 종교 때문에 세계가 큰 위험에 빠졌다고 외치는 지식인들이 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네 기사의 저서들, 샘 해리스의 『종교의 종말』(2004),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2006), 대니얼 데닛의 『주문을 깨다』(2007),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2008)는 과학적 관점으로 ‘신앙이라는 금기’를 건드림으로써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네 기사들의 대담은 그 열기 속에서 성사되었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안타깝게도 2011년 암으로 사망하면서 이 역사적 대화는 네 사람이 함께 모인 처음이자 마지막 자리가 되었다.)
그들의 대화는 그동안 논쟁해온 신과 종교에 관한 사상적 토대의 핵심을 명확히 보여준다. 가장 강경한 노선의 도킨스는 교회가 텅 비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 그는 웅대하고 아름답고 경이로운 우주에서 초자연적 창조자를 믿는 것은 “좀스럽고 편협하고 시시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신중한 노선의 데닛은 교회가 사회에서 맡을 수 있는 몇 가지 역할을 인정하지만 교회의 관행과 믿음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신비주의 노선의 해리스는 이 세상에는 영성과 신비를 위한 영역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대단한 입담으로 카리스마를 뽐내는 히친스는 논쟁 상대로서의 종교가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으며 이 대화가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란다.
이 책은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신과 믿음에 대한 논쟁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근본 주제에서 파생되어 끊임없이 이어지는 흥미로운 주제들이 우리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한다. 가령 과학자들은 자신의 이론을 반박당하면 기분 나빠하지 않는데 왜 종교인들은 같은 상황에 처하면 상처를 받았다고 말할까? 우리가 때때로 겪는 신비로운 경험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 누구도 교회에 가지 않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가? 모든 종교는 똑같이 해로운가? 미켈란젤로가 과학박물관 천장화를 의뢰받았다면 그만큼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었을까? 등이다. 대화가 무르익어 네 기사의 미묘한 의견 차이가 드러나는 대목에 이르면 혹시 딴청을 부리던 독자도 의자를 바싹 당겨 앉게 될 것이다.
겸손과 오만의 관점에서 종교와 과학은 어떻게 다른가?
그들이 다룬 핵심 주제 중 하나는 바로 겸손과 오만의 관점에서 종교와 과학이 어떻게 다른가이다. 도킨스는 이에 대해 “과학자들은 답을 모르면 모른다고 말하며, 증거가 확실할 때 알려진 사실을 말하는 것은 오만이 아니다”(46쪽)라고 주장한다.
팽창하는 우주, 물리법칙, 미세 조정된 물리상수, 화학법칙, 느린 속도로 진행되는 진화. 이 모든 것의 결과로 140억 년이라는 오랜 시간에 걸쳐 우리가 존재하게 되었다. 우리가 원죄를 지니고 태어난 비참한 죄인이라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주장도 사실 뒤집어보면 일종의 오만이다. 우리의 도덕적 행위에 어떤 우주적 의미가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대단한 자만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우주의 창조주는 벌점을 매기고 가산점을 더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하지 않는 것처럼 들린다. 우주의 신경이 온통 내게 쏠려 있다니, 이거야말로 이해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오만이 아닌가? _pp.36~37
히친스는 “종교인들이 항상 그들 스스로 믿음을 시험받고 있다고 말한다”고 설명한다. “저는 믿습니다. 주여, 저의 불신을 도와주소서”라는 실제 기도 내용을 인용하면서 “많은 사람이 이중장부를 작성하는 방법으로 살아간다”(97쪽)고 믿음의 비이성적 행태를 꼬집는다.
그 누구도 교회에 가지 않는 세상을 바라는가?
실제로 히친스는 한 TV 프로그램에서 이 질문을 받는다. 그는 “나는 거짓 위안이 없으면 사람들이 훨씬 더 잘 살 거라고 생각하고,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으로 내게 고통을 주지 않기를 바란다”(157쪽)고 했다. 세상에 영성과 신비를 위한 영역이 존재한다고 보는 해리스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피력한다.
제가 바라는 것은 다른 종류의 교회입니다. 다른 종류의 사상에서 우러나오는 다른 종류의 의식. 저는 우리 삶에는 신성함을 위한 자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허튼소리를 전제로 하지 않아야겠죠. 저는 심오한 뭔가를 추구하는 것이 쓸모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_p.173
도킨스는 교회는 불필요하지만, 역사적 이유로 『성경』에 대한 이해는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교회가 텅 비는 것을 보고 싶다. 하지만 『성경』에 대한 무지는 보고 싶지 않다. 『성경』을 모르고는 문학을 이해할 수 없고 미술, 음악, 그 밖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역사적 이유는 없애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174~175쪽)라는 것이다. 데닛은 무신론자들이 흔히 빠지는 오류에 대해 지적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하찮고 끔찍한 것에 정신이 팔려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의미 있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과 늘 딴 데 정신이 팔려 있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예로부터 그 차이를 분명하게 지적한 것은 종교밖에 없었다. 그것이 우리의 실패라고 생각한다.”(174쪽)
모든 종교가 똑같이 해로운가?
히친스는 대화 말미에 “종교를 비판할 때 모든 종교에 공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예를 들면, 기독교ㆍ이슬람교ㆍ아미시파ㆍ자이나교 등을 모두 같은 선상에 놓고 봐야 하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데닛과 해리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데닛은 “물론 우리는 차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지만, 항상 균형 잡힌 태도를 유지할 필요는 없다”(188쪽)는 입장이다. 해리스는 믿음에 대한 모든 주장이 어떤 의미에서 똑같다고 말하는 것은 언론의 전술이라며, “우리가 세부에 초점을 맞추면 지원 세력을 얻을 수 있지만, 무신론의 방벽 위에 올라서서 모든 종교가 거짓이라고 말하면 90퍼센트의 이웃을 잃게 된다”(190쪽)고 설명한다. 히친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모든 종교가 똑같이 거짓이라는 주장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종교는 이성보다 믿음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똑같이 위험합니다. 정신 능력을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독보적 영장류로 만들어주는,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결사적으로 버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언제나 치명적이죠. _pp.190~191
도킨스는 “나는 모든 종교에 공평할 준비가 되어 있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는 모두 그런 식의 똑같은 주장을 하고 있으니까”(190쪽)라고 설명한다.
과학과 종교를 둘러싼 열띤 탐구, 인간과 사회에 대한 예리한 통찰!
그들의 대화가 현재의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 대담이 빛나는 것은 사중주의 연주자들이 제각기 종교와 무신론, 과학과 이성에 대해 말하는 모든 의견이 현시대의 현안에도 똑같이 긴급하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신을 믿어?”로 시작해 “사랑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어”로 끝나는 설전은 오늘도 어딘가에서 계속되고 있고, ‘종교적 믿음’은 신을 믿든 믿지 않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아직 역사적 사실이 아닌 직시해야 할 현실이다.
서문에서 스티븐 프라이는 “신념과 이념에 대한 이야기는 종교 논쟁의 부분집합”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 대화의 많은 부분이 ‘믿음’과 ‘신앙’을 ‘신념’과 ‘이념’으로 바꾸어 읽어도 이상하지 않다. 이 또한 10년이 훨씬 지난 현재에도 이 대화가 여전히 유효한 이유가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네 기사의 매력적이고 빛나는 말, 자유롭고 품위 있게 교환되는 자유사상의 용기와 가치에서 깊은 영감을 받기를 바란다.
현대 무신론의 수호자 ‘네 기사’들이 펼치는
과학과 종교에 관한 위대한 지적 탐구
2007년 미국의 심장부 워싱턴D.C.에서 역사적인 대담이 열렸다. 리처드 도킨스, 대니얼 데닛, 샘 해리스,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한자리에 모여 현대 무신론의 시동을 건 획기적인 대화를 나눈 것이다. 종교의 봉인이 풀릴 때 나타날 기사라는 뜻에서 ‘네 기사(Four Horsemen)’라 불리는 이들은, 지적 탐구가 보여줄 수 있는 최상의 모습으로 현대 무신론을 이루는 가닥들이 얼마나 다채로운지를 낱낱이 보여주었다. 『신 없음의 과학』은 그날의 대화와 이후 그들의 진화된 사고를 담은 새로운 에세이를 한데 묶은 것이다. 한국판에서는 진화학자 장대익 서울대 교수의 해제를 더했다. 현대 무신론 운동의 태동부터 ‘네 기사’라는 과학적 무신론 동맹의 형성 등 풍부한 지식적 배경으로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이 기념비적인 대담의 매력은 사회자도, 사전 계획도, 미리 약속한 의제도 없이 자유분방하게 흘러간다는 데 있다. 사중주의 악기들이 각기 독특한 음색으로 곡에 매력을 더하듯이, 네 기사는 공통의 깃발을 치켜들면서도 미묘한 차이를 드러내며 대화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정말로 우주를 만든 초자연적 창조자가 있는가? 『성경』『코란』이 모든 것을 아는 자의 산물이란 증거는 무엇인가? 종교와 과학은 겸손과 오만의 관점에서 어떻게 다른가? 무언가를 타당한 이유로 믿는 것과 황당한 이유로 믿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등 과학과 종교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들과 정면으로 대결하면서 신과 믿음, 종교적 가르침 영역 밖에서의 도덕과 영성에 대한 문제,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의 논쟁, 진정으로 윤리적인 삶을 구성하는 요소 등 다양한 주제로 흥미진진한 대화를 이어나간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바는 명확하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모든 현상은 무조건적인 믿음이 아니라, 인간의 논리와 이성으로 충분히 납득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네 명의 사상가들은 그동안 상식이라 불리던 사고방식에 문제제기를 함으로써 개인의 성찰을 자극한다. 전투적 무신론자 도킨스, 전략적 무신론자 데닛, 직설적 무신론자 해리스, 성역파괴 무신론자 히친스.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인들을 오롯이 만날 수 있는 지적 탐구의 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과학과 종교계를 뒤흔든 최대 문제작들의 사상적 토대가 된 바로 그 대화
가슴을 뜨겁게 하고, 영혼을 간질이며, 신경을 자극하는 지적 향연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상가들이 어쩌다 한곳에 모이게 되었을까? 때는 2001년 이슬람 테러조직 알카에다가 자행한 911 테러 이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지식인 중에는 이러한 테러가 미국의 반이슬람 그리스도교 근본주의 때문에 일어났다고 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고삐 풀린 종교 때문에 세계가 큰 위험에 빠졌다고 외치는 지식인들이 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네 기사의 저서들, 샘 해리스의 『종교의 종말』(2004),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2006), 대니얼 데닛의 『주문을 깨다』(2007),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2008)는 과학적 관점으로 ‘신앙이라는 금기’를 건드림으로써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네 기사들의 대담은 그 열기 속에서 성사되었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안타깝게도 2011년 암으로 사망하면서 이 역사적 대화는 네 사람이 함께 모인 처음이자 마지막 자리가 되었다.)
그들의 대화는 그동안 논쟁해온 신과 종교에 관한 사상적 토대의 핵심을 명확히 보여준다. 가장 강경한 노선의 도킨스는 교회가 텅 비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 그는 웅대하고 아름답고 경이로운 우주에서 초자연적 창조자를 믿는 것은 “좀스럽고 편협하고 시시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신중한 노선의 데닛은 교회가 사회에서 맡을 수 있는 몇 가지 역할을 인정하지만 교회의 관행과 믿음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신비주의 노선의 해리스는 이 세상에는 영성과 신비를 위한 영역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대단한 입담으로 카리스마를 뽐내는 히친스는 논쟁 상대로서의 종교가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으며 이 대화가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란다.
이 책은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신과 믿음에 대한 논쟁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근본 주제에서 파생되어 끊임없이 이어지는 흥미로운 주제들이 우리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한다. 가령 과학자들은 자신의 이론을 반박당하면 기분 나빠하지 않는데 왜 종교인들은 같은 상황에 처하면 상처를 받았다고 말할까? 우리가 때때로 겪는 신비로운 경험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 누구도 교회에 가지 않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가? 모든 종교는 똑같이 해로운가? 미켈란젤로가 과학박물관 천장화를 의뢰받았다면 그만큼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었을까? 등이다. 대화가 무르익어 네 기사의 미묘한 의견 차이가 드러나는 대목에 이르면 혹시 딴청을 부리던 독자도 의자를 바싹 당겨 앉게 될 것이다.
겸손과 오만의 관점에서 종교와 과학은 어떻게 다른가?
그들이 다룬 핵심 주제 중 하나는 바로 겸손과 오만의 관점에서 종교와 과학이 어떻게 다른가이다. 도킨스는 이에 대해 “과학자들은 답을 모르면 모른다고 말하며, 증거가 확실할 때 알려진 사실을 말하는 것은 오만이 아니다”(46쪽)라고 주장한다.
팽창하는 우주, 물리법칙, 미세 조정된 물리상수, 화학법칙, 느린 속도로 진행되는 진화. 이 모든 것의 결과로 140억 년이라는 오랜 시간에 걸쳐 우리가 존재하게 되었다. 우리가 원죄를 지니고 태어난 비참한 죄인이라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주장도 사실 뒤집어보면 일종의 오만이다. 우리의 도덕적 행위에 어떤 우주적 의미가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대단한 자만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우주의 창조주는 벌점을 매기고 가산점을 더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하지 않는 것처럼 들린다. 우주의 신경이 온통 내게 쏠려 있다니, 이거야말로 이해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오만이 아닌가? _pp.36~37
히친스는 “종교인들이 항상 그들 스스로 믿음을 시험받고 있다고 말한다”고 설명한다. “저는 믿습니다. 주여, 저의 불신을 도와주소서”라는 실제 기도 내용을 인용하면서 “많은 사람이 이중장부를 작성하는 방법으로 살아간다”(97쪽)고 믿음의 비이성적 행태를 꼬집는다.
그 누구도 교회에 가지 않는 세상을 바라는가?
실제로 히친스는 한 TV 프로그램에서 이 질문을 받는다. 그는 “나는 거짓 위안이 없으면 사람들이 훨씬 더 잘 살 거라고 생각하고,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으로 내게 고통을 주지 않기를 바란다”(157쪽)고 했다. 세상에 영성과 신비를 위한 영역이 존재한다고 보는 해리스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피력한다.
제가 바라는 것은 다른 종류의 교회입니다. 다른 종류의 사상에서 우러나오는 다른 종류의 의식. 저는 우리 삶에는 신성함을 위한 자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허튼소리를 전제로 하지 않아야겠죠. 저는 심오한 뭔가를 추구하는 것이 쓸모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_p.173
도킨스는 교회는 불필요하지만, 역사적 이유로 『성경』에 대한 이해는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교회가 텅 비는 것을 보고 싶다. 하지만 『성경』에 대한 무지는 보고 싶지 않다. 『성경』을 모르고는 문학을 이해할 수 없고 미술, 음악, 그 밖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역사적 이유는 없애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174~175쪽)라는 것이다. 데닛은 무신론자들이 흔히 빠지는 오류에 대해 지적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하찮고 끔찍한 것에 정신이 팔려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의미 있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과 늘 딴 데 정신이 팔려 있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예로부터 그 차이를 분명하게 지적한 것은 종교밖에 없었다. 그것이 우리의 실패라고 생각한다.”(174쪽)
모든 종교가 똑같이 해로운가?
히친스는 대화 말미에 “종교를 비판할 때 모든 종교에 공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예를 들면, 기독교ㆍ이슬람교ㆍ아미시파ㆍ자이나교 등을 모두 같은 선상에 놓고 봐야 하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데닛과 해리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데닛은 “물론 우리는 차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지만, 항상 균형 잡힌 태도를 유지할 필요는 없다”(188쪽)는 입장이다. 해리스는 믿음에 대한 모든 주장이 어떤 의미에서 똑같다고 말하는 것은 언론의 전술이라며, “우리가 세부에 초점을 맞추면 지원 세력을 얻을 수 있지만, 무신론의 방벽 위에 올라서서 모든 종교가 거짓이라고 말하면 90퍼센트의 이웃을 잃게 된다”(190쪽)고 설명한다. 히친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모든 종교가 똑같이 거짓이라는 주장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종교는 이성보다 믿음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똑같이 위험합니다. 정신 능력을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독보적 영장류로 만들어주는,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결사적으로 버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언제나 치명적이죠. _pp.190~191
도킨스는 “나는 모든 종교에 공평할 준비가 되어 있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는 모두 그런 식의 똑같은 주장을 하고 있으니까”(190쪽)라고 설명한다.
과학과 종교를 둘러싼 열띤 탐구, 인간과 사회에 대한 예리한 통찰!
그들의 대화가 현재의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 대담이 빛나는 것은 사중주의 연주자들이 제각기 종교와 무신론, 과학과 이성에 대해 말하는 모든 의견이 현시대의 현안에도 똑같이 긴급하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신을 믿어?”로 시작해 “사랑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어”로 끝나는 설전은 오늘도 어딘가에서 계속되고 있고, ‘종교적 믿음’은 신을 믿든 믿지 않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아직 역사적 사실이 아닌 직시해야 할 현실이다.
서문에서 스티븐 프라이는 “신념과 이념에 대한 이야기는 종교 논쟁의 부분집합”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 대화의 많은 부분이 ‘믿음’과 ‘신앙’을 ‘신념’과 ‘이념’으로 바꾸어 읽어도 이상하지 않다. 이 또한 10년이 훨씬 지난 현재에도 이 대화가 여전히 유효한 이유가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네 기사의 매력적이고 빛나는 말, 자유롭고 품위 있게 교환되는 자유사상의 용기와 가치에서 깊은 영감을 받기를 바란다.
추천평
꼼짝없이 빨려들었다. 이 박식한 대화를 읽는 내내, 과학의 겸손과 솔직함이 종교의 오만, 위선, 아무렇지 않게 ‘지어내는’ 뻔뻔함과 대비되어 빛을 발했다. 속이 시원하다.
- 수전 블랙모어 (심리학자, 『문화를 창조하는 새로운 복제자 밈』 저자)
- 수전 블랙모어 (심리학자, 『문화를 창조하는 새로운 복제자 밈』 저자)
‘네 기사’들의 말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이들은 볼테르의 후예들이다.
- 매트 리들리 (과학저술가, 『붉은 여왕』 저자)
- 매트 리들리 (과학저술가, 『붉은 여왕』 저자)
생각하기가 스포츠 종목이라면, 네 사람은 슈퍼스타다. 이 책을 읽는 것은 올스타 경기를 맨 앞자리에 앉아 구경하는 것과 같다. 무신론과 종교에 관한 모든 책을 뛰어넘는다. 어느 인간 사회에나 존재하는 망상과 오해의 뿌연 안갯속을 헤쳐나가기 위한 우리의 지적 능력의 사용법을 가르쳐준다.
- 팀 어번 (작가, 테드 강연자)
- 팀 어번 (작가, 테드 강연자)
네 기사는 세상에 없는 종류의 사상가들이다.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대화를 듣는 누구에게나 깊은 도량을 보여준다. 이 책의 모든 말을 음미하기 위해 무신론자가 될 필요는 없다. 그저 진정한 지적 탐구와 열린 논쟁에 굶주려 있기만 하면 된다.
- 메건 다움 (작가, 칼럼니스트)
- 메건 다움 (작가, 칼럼니스트)
신성 모독적이고, 박식하고, 굉장히 진실하고, 은근히 웃기는… 이 책을 읽는 것은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인들과 깊은 식견을 나누며 오후 한때를 보내는 것과 같다.
- 줄리아 스위니 (배우, 작가)
- 줄리아 스위니 (배우, 작가)
초자연적 설명을 믿지 않는 행복한 형제자매들에게 이 책은 영리하고 재미있는 도발적 입문서다.
- 커트 앤더슨 (라디오 진행자, 『판타지랜드』 저자)
- 커트 앤더슨 (라디오 진행자, 『판타지랜드』 저자)
무신론 혁명의 시작을 알리기에 더 없이 좋은 대화다.
- 펜 질레트 (『신은 안 돼!』 저자)
- 펜 질레트 (『신은 안 돼!』 저자)
'50.종교의 이해 (독서>책소개) > 4.무신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리처드 도킨스의 진화론 강의 (20190 - 생명의 역사, 그 모든 의문에 답하다 (0) | 2023.07.01 |
---|---|
신이 절대로 답할 수 없는 몇 가지 (2013) - 악의 시대, 도덕을 말하다 (0) | 2023.07.01 |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과학과 종교 (2023) (0) | 2023.06.25 |
창조론 대화가 필요해 (0) | 2022.09.24 |
인간화 된 신 (레자 아슬란) (0) | 2022.09.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