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폭력연구 (독서)/7.나치히틀러

히틀러 시대의 여행자들 (2021)

동방박사님 2023. 7. 9.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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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 『가디언』 2017 “독자의 선택” *
* 『데일리 텔레그래프』 2017 최고의 책 *
* 2018 『스펙테이터』 올해의 책 선정 *
* 2019 『LA타임즈』 역사 부문 최우수 도서상 *
찰스 린드버그, 사무엘 베케트,
자동차왕 헨리 포드와 시인 타고르
학생, 정치인, 예술인, 언론인, 종교인, 학자
그리고 일반 관광객까지…

“이들은 왜 눈앞의 진실을 보지 못했을까?”

여행자의 시선으로 그려낸
히틀러 시대 독일의 초상!


라인 강을 따라 유람하고, 햇볕이 드는 정원에서 맥주를 마시고, 어린아이들이 단체로 행복하게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산책하는 일은 고문, 탄압, 재무장 같은 이야기를 무척 쉽게 잊어버리게 했다. 심지어 1930년대 말에 들어서서도, 외국인 여행자가 독일에서 몇 주를 보내며 자동차에 펑크가 나는 일 이상으로 불쾌한 일을 겪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의 차이는 상당히 컸다. - 「저자의 말」 중에서

일 년 전만 해도 에센의 유스호스텔은 평화로운 여행 배낭을 짊어진 청년들로 북적거렸다. 이제는 가죽 부츠와 벨트를 자랑하는 젊은 나치 당원들이 넘쳐났다. 히틀러 청년단의 한 청년에게 도전적 질문을 던져보니 그 청년의 대답은 간단했다. “보세요, 우리가 이 세상을 볼셰비즘으로부터 구해내지 않았습니까?” 많은 외국인들도 그런 주장에 동조했다. 특히 영국 국회의원인 토머스 무어 중령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공산주의를 극단적으로 혐오했다. - 「여름휴가」 중에서

목차

§ 들어가는 글 9
§ 지도 22

1 드러난 상처 25
2 깊어지는 고통 47
3 섹스와 햇빛 71
4 “설설 끓는 역사의 스프” 101
5 올가미가 조여 오다 127
6 괴물인가 경이인가? 151
7 여름휴가 179
8 축제와 팡파르 203
9 하일 히틀러 229
10 노병 261
11 문인 “관광객들” 289
12 내리는 눈과 스와스티카 323
13 히틀러의 올림픽 347
14 황무지가 된 학계 377
15 미심쩍은 서곡 403
16 여행 앨범 431
17 오스트리아 합병 455
18 “수상한 평화”와 깨어진 유리 473
19 전쟁 초읽기 497
20 전쟁 521
21 여정의 끝 543

§ 후기 571
§ 감사의 글 579

참고문헌 585
기록 보관소 595
출처 및 허락 599
여행자들 소개 601
미주 621
옮긴이의 말 655
찾아보기 665

저자 소개 

저 : 줄리아 보이드 (JULIA BOYD )
 
영국 왕립박물관 중 하나인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에서 근무했고, 윈스턴 처칠 기념 재단의 이사를 역임했다. 외교관의 아내로서, 유럽과 동 아시아 곳곳을 떠돌아다닌 끝에 현재는 런던에 정 착했다. 노련한 조사연구자인 그녀는 책에 들어갈 오리지널 자료를 찾기 위해 전 세계의 문서 보관 소들을 섭렵해 왔다. 『용과의 춤: 베이징 외교 단 지라는 사라진 세계』, 『뛰어난 의사 블랙웰: 최초 의 여의사의 생애』, 『한...
 
역 : 이종인
 
1954년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 브리태니커 편집국장과 성균관대학교 전문 번역가 양성 과정 겸임 교수를 역임했다. 지금까지 250여권의 책을 번역했으며 주로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교양서와 문학 서적을 많이 번역했다. 정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지금까지 250여권의 책을 번역했으며 주로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교양서와 문학 서적을 많이 번역했다. 최근에는 E. M. 포스터, 존 파울즈, 폴...

책 속으로

“고대 그리스 이후 그 어떤 나라도 독일만큼 진정한 올림픽 정신을 담지 못했다.” 놀랍게도 이런 말을 한 사람은 선전 장관인 요제프 괴벨스가 아니라, 미국올림픽위원회 회장인 에이버리 브런디지였다. “히틀러 올림픽”을 보이콧하려는 무수한 시도에 맞서 싸워왔던 브런디지는 자기 앞에 펼쳐진 개회식(레니 리펜슈탈에 의해 무척 훌륭하게 촬영되었다)에 틀림없이 엄청난 안도감을 느꼈을 것이다.
--- 「히틀러의 올림픽」 중에서

외국인 방문자들은 툭 튀어나온 광대뼈, 창백한 안색, 헐렁한 옷 등으로 베를린 시민들을 첫눈에 알아보았다. … 식사 장면은 더 이상 연극 무대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런 장면이 나오면 가장 쾌활한 코미디도 갑자기 눈물바다의 멜로드라마가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대버넌 부인은 바이올렛 보넘 카터를 상대로도 독일의 진상에 대해서 솔직하게 말했다. “내 말을 믿으세요. 독일인들은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고통을 당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 엄청난 가난 같은 건 없어요. 95퍼센트는 풍요롭게 살고 있고 5퍼센트만 굶고 있어요.” 베를린의 가장 가난한 지역을 둘러본 후에 카터는 대사 부인의 말에 동의했다. “영국의 빈민가와는 ‘비교’가 안 되었다. 도로는 널찍하고, 집들도 크고, 대사관 창문만큼이나 큰 창문이 달려 있었다.”
--- 「깊어지는 고통」 중에서

그러나 베를린 아방가르드파의 성적 자유와 흥분에도 불구하고, “똑똑하고 젊은” 세대에 속하는 많은 영국인들이 그 도시와 전체 독일인들의 추악한 측면에 똑같이 충격을 받았다. 특히 독일인의 신체적 외양을 조롱하는 발언들은 아주 흔했다. 많은 외국인들이 독일인은 목에 살이 쪘고 눈이 툭 튀어나왔다고 비하하는 말을 했는데 그건 사실에 가까운 발언이었다.
--- 「섹스와 햇빛」 중에서

1929년 10월 24일, 이른바 검은 목요일에 월스트리트 증권 시장이 붕괴했고 그와 함께 독일에서 지속적 성장의 희망도 사라졌다. … “여기에 역사의 스프가 설설 끓고 있었다. 실제 요리가 요리책을 시험해 보듯이, 그것은 모든 정치적 이론을 시험해볼 국물이었다. 베를린의 국물에는 실업, 영양실조, 증권가 붕괴,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증오, 기타 강력한 구성 요소 등이 재료로 들어가 설설 끓고 있었다.” 나치는 국가 재건의 유일한 희망은 독재, 증오, 왜곡된 애국심 등이 재료로 들어간 히틀러의 스프뿐이라고 주장했다.
--- 「설설 끓는 역사의 스프」 중에서

수난극은 첫 시작부터 “그리스도의 살해자들”을 아주 노골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나치의 프로파간다 선물로는 아주 적절한 것이었다. 히틀러의 말에 의하면 “진흙과 오물인 유대인들”의 본모습을 보여주는 수 세기 된 농촌 드라마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1930년의 수난극을 관람한 오만 명의 미국인 중에는 반유대주의자 헨리 포드도 있었다. 『뉴욕 타임스』는 이런 보도를 냈다. “포드 씨는 자신의 감동과 기쁨을 표시하기 위해 안톤 랑에게 자동차를 한 대 선물하겠다며 뮌헨에 가서 그가 좋아하는 차를 하나 고르도록 했다.”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수난극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서 직접 영어로 「어린아이」라는 장시를 지었다.

언론들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목사들도 그 대회에 참석하면서 전혀 인종차별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런 목사들 중 한 사람으로 마이클 킹 시니어가 있었다. 그는 독일 방문에 깊은 감명을 받고서 ─ 특히 마르틴 루터의 개혁 운동에 감동되어서 ─ 애틀랜타로 귀국한 뒤 그 자신과 아들의 이름을 마르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으로 바꾸었다.
--- 「축제와 팡파르」 중에서

1933년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에서 총통에게 처음 매혹된 이래, 그녀는 기회만 나면 오른팔을 공중으로 들어 올리며 하일 히틀러를 외쳐댔다. 에릭 핍스 경 부부는 스트레스 받는 상류층 집안 딸들이 조금만 힘든 일이 생겨도 “저 끔찍한 SS 스타일”에 빠져들기 쉽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 부부조차도 유니티의 열광적 태도에는 학을 뗐다. … 몇 달 뒤, 제시카 미트포드는 여동생 유니티와 함께 지중해 크루즈 여행을 하면서 선실을 함께 썼다. 그녀는 여동생이 밤에 침대 위에 누워서 히틀러에게 기도를 올린 뒤에 공중에 오른팔을 내밀어 하일 히틀러를 외치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고 기록했다.

더멧의 걱정은 불필요한 것이었다. 독일 당국은 적어도 초창기에는 그들의 강제 노동 수용소를 외국인들에게 자랑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1930년대 중반에 이르러 다하우는 미국인과 영국인 관광객들(특히 정치가와 언론인)을 위한 관광 명소가 되었다. 그곳에서 부당한 학대나 고통을 발견하지 못했으므로 영국 국회의원 빅터 카잘렛은 그 수용소를 가리켜 “별로 흥미롭지는 않으나 잘 운영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부소장은 대부분의 재소자들이 공산주의자라고 말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내가 보기에 그들이 거기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도 별 문제가 없을 듯하다.”
--- 「하일 히틀러」 중에서

이 짧은 만남은 함순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듯하다. 그가 고향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이 받은 노벨상 메달을 괴벨스에게 보내는 놀라운 결정을 했기 때문이다. 메달을 동봉한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장관님, 해마다 장관님만큼 이상적으로 유럽과 인류를 위해 아낌없이 글을 쓰고 발언을 해온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제가 받은 메달을 보내는 것을 양해해 주십시오. 장관님께는 아무런 쓸모가 없겠지만, 저는 이것 말곤 드릴 것이 없습니다.”

결국 왈린은 넓적다리를 크게 다쳤다. 그의 전우들은 어떻게든 그를 임시 병원으로 데려갔고, 5월 1일 그의 전쟁은 마침내 러시아인의 베를린 입성으로 끝이 났다. 그들은 히틀러가 죽었다고 발표했다. “히틀러가 죽었어! 베를린이 무너졌어, 게르만 민족이 망했어.” 왈린 옆에 누운 한 독일 군인이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이어 누군가가 지하실 문을 덜커덕 열었다. 우리는 마치 돌로 변한 것처럼 미동도 않고 앉아 있었다.” 한 러시아 군인이 지하실로 들어와 털썩 앉고는 손가락에 붕대를 감았다. 그는 게르다에게 사탕을 주고는 엽서에다 메시지를 남겼는데, 나중에 비디가 번역한 바로는 이러했다. “이제 여러분은 안전하며, 민주주의를 누릴 것입니다. 이 작은 소녀는 러시아어를 배우게 될 겁니다.” 혼돈스러운 한 주가 이어졌고, 비디는 거리를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약탈하듯 구해왔다.
--- 「여정의 끝」 중에서
 

출판사 리뷰

흔히들 그렇게 생각한다.

치명적인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히틀러와 그의 제국은 자신들의 의도를 숨겼으며, 서구 열강을 비롯한 전 세계 국가와 국민들은 독일 국민 자신들이 그랬듯 나치의 치밀한 계획과 선동에 속아 넘어갔다고. 비록 1차 대전을 일으킨 전범국이지만, 독일은 공산주의자, 그리고 공산주의자와 결탁한 유대인과 싸우는 외로운 투사이며, 독일 국민은 패전으로 인한 극심한 경제적 불이익을 견디며 국가를 키우려는 선하고 강건한 국민들이라 생각했다고. 매혹적인 자연경관과 인상적인 전통 문화, 넘쳐나는 학문과 예술의 성취, 놀라운 새 과학 기술, 근면하지만 친절하며 그리고 강건한 사람들, 거기에 몸에 꽉 끼는 옷을 입은 순박한 소녀들과, 단정하게 차려 입은 소년들, 벗은 몸을 드러내는 걸 거리끼지 않아 자유롭고 개방적이지만, 결혼과 국가관은 지극히 보수적인 국민들이 꾸려가는 이 작지만 아름답고 강한 국가 독일이라는 이미지는 올림픽이라는 전 세계의 축전으로 그 정점에 달했고, 그 정점은 전쟁의 발발이라는 예측을 벗어난 사건과 함께 배신감으로 되돌아왔다고.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나치의 선전은 치밀하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았으며, 곳곳에서 그 허점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과거를 딛고 새로이 건설한다는 이들의 ‘평화 국가’ 간판을 조금만 벗기고 들어가도 그 안에는 군사 제국의 야망과 사상의 탄압, 그리고 인종 차별과 특정 국가에 대한 혐오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유대인-사회주의 커넥션의 음모라며 나치가 선전하는 내용은 많은 부분이 기초적인 사실에서부터 틀린 것들이었다. 때로는 역사적 사료조차 엉터리로 인용하기도 했다. 심지어, 나치는 영토에 대한 야욕과 전쟁에 대한 야망을 그다지 열성적으로 숨기지도 않았었고, 독일 밖의 언론은 공공연히 나치와 히틀러의 야욕을 경계하며 이들은 비판하는 기사를 연일 실어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사업가, 외교관, 정치인, 종교인부터 전현직 군인들과 일반 시민에 유학생까지 그 시기의 독일로 앞 다투어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여행을 가기 전에나 돌아온 뒤에나 이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부분 독일에 대한 호의를 접지 않았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역사의 경과와 세계대전의 결말을 고스란히 알고 있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이러한 현상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한 꺼풀만 벗겨놓고 생각해보면, 이러한 모순적인 일들이 지금 현실에서도 여전히 벌어지고 일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어느 시대이든 사람들은 실제보다는 믿고 싶은 것을 믿었다. 이를 부추기는 건 절반은 혐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기대 심리였다. 당시 사람들은 정도야 어쨌든 공산주의를 두려워했고, 적든 크든 유대인을 혐오했다. 퇴역 군인들은 전쟁의 재발을 경계하는 한편, 이를 실현해줄 강력한 지도자의 탄생을 바랐다. 종교인들은 타락한 시대를 사상적으로 보호할 선구자를 찾았으며, 몽상가들은 새로운 세계의 질서를 이끌 초인을 발굴하려 애썼다. 사업을 하는 이에게 독일은 기회의 땅이자 기술의 국가였고, 예술을 하는 이에게 독일의 도시는 바야흐로 아방가르드가 활짝 꽃을 피워내는 전통적 문화의 도시이기도 했다. 어떤 분야이든 이상주의자들에게 독일은 그 이상이 만개할 조짐을 보이는 유일한 장소였다. 그러는 한편, 패전으로 인한 하이퍼인플레이션 때문에 독일은 투자든 여흥이든 학업이든 돈이 들지 않는 국가였다. 독일의 숙소는 저렴했고, 식비는 헐값이었으며, 사람들은 친절했고, 풍경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소년과 소녀들은 매혹적이면서 헌신적이었다. 당시 사람들의 착각은 일정 부분은 선입견에 의해 편의대로 해석해버린 결과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극히 경제적이면서 사적인 욕망이 작용한 결과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보낼지도 모르는 비판적 시각으로부터 나치를 가려준 것은 한편으로는 선입견에 기대어 공공의 적으로 시선을 돌려주는 묵인이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오늘날에도 3류 에로 영화에서 종종 사용되는 제복과 군인의) 이미지에 기댄 에로티시즘이기도 했다. 이런 현실은 ‘새로운’ 국가 건설을 주창하며, ‘퇴폐와 에로’ 문화를 일소하겠다는 나치 자신의 주장과는 심각한 괴리를 불러일으켰다.

책은 학생, 정치인, 음악가, 외교관, 학생, 공산주의자, 학자, 운동선수, 시인, 언론인, 파시스트, 예술가, 관광객, 그리고 우리의 귀에도 익숙한 여러 저명인사들의 기록을 바탕으로 나치 시대의 모습을 우리 눈앞에 생생하게 재연한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이들 모두는 역사에 대한 ‘우연한’ 목격자다. 시대의 전체를 조망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주변만을 목격했고, 그다지 넓은 시야를 갖고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좁고 짧은 시야를 한데 모아 저자는 말 그대로 ‘히틀러 시대의 독일 전체’에 대한 그림을 우리 앞에 펼쳐놓았다. 그 작업은 마치 CCTV를 모아 하나의 도시를 그려내는 것처럼 지난하기도 했지만, 평범한 영화나 뉴스, 혹은 역사책이나 안내서에서는 결코 찾아낼 수 있는 통찰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 시대 사람들이 겪었을 혼란과 부조리, 감동과 비극, 사소함과 무거움이 치밀한 옴니버스 영화처럼 교차해가며 우리 앞에 드러나며, 저자는 이 모든 것을 마치 하나의 인과처럼 섬세하게 재조합해냈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이 책은, “황당하기도 하고, 어리석기도 하고, 아주 사소한가 하면, 아주 비극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출간한 그 해 『가디언』 지 “독자의 선택”에 선정되었으며 이듬해와 그다음 해에 걸쳐 『스펙테이터』와 『LA 타임즈』를 비롯 유수의 언론과 기관에서 그 해 최고의 역사 도서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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