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폭력연구 (독서)/7.나치히틀러

히틀러 연설의 진실 (2015)

동방박사님 2023. 7. 9. 18:39
728x90

책소개

히틀러가 세상을 뜬 지 70년. 아직도 사람들은 궁금해한다. 어떻게 히틀러라는 독재자가 탄생했을까? 도대체 어떤 맥락에서 홀로코스터라는 지옥을 만들어낸 악마가 나왔을까? 히틀러는 어떻게 사람들을 선동하여 그 자리에 오르게 되었을까?
답을 찾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다양한 답을 내놓았다. 누구는 역사적인 근거를 들어 히틀러 현상의 원인을 분석하고, 또 누구는 히틀러 현상을 우연한 정치적 사건들의 총합이라 규정짓기도 한다. 누구는 군중심리에서 그 원인을 찾으려 하고, 또 다른 누구는 히틀러의 개인 성향과 정신 분석에서 이유를 찾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도, 그 명쾌한 답을 찾지는 못했다.
이 책 역시 그 답을 찾아가는 노력 중 하나다. 이번엔 히틀러의 ‘말’이다. 저자는 1919년 10월 히틀러가 뮌헨의 맥주홀에서 100명의 청중을 앞에 두고 한 첫 번째 연설에서부터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지하 방공호에서 녹음한 최후의 라디오 연설까지, 25년간의 연설 전문, 약 150만 단어 전체를 분석하여 특정 시기 가장 많이 쓰인 말을 찾고 수사법을 연구했다. 그리고 그 말이 어떤 음조와 목소리의 질로, 또 어떤 속도로 발화되는지를 조사하고, 그때 히틀러가 어떤 몸짓으로 어떤 표정을 지으며 말했는지 등 언어적인 면의 모든 것을 분석한다. 그리고 그 말이 어떤 맥락에서 어떤 효과를 지녔는지를 정치적·역사적인 맥락에서 살핀다.

목차

프롤로그
히틀러 및 나치당 관련 간략 연표(1918~1945)

서장 뒤늦은 국가 통일

제1장 맥주홀에 울리는 연설 : 1919~1924
1. 말재주를 발견하다
2. ‘지도자’로서 말하기
3. ‘폭동’을 청산하는 연설

제2장 목소리를 잃어버린 연설 : 1925~1928
1. 금지된 연설
2. 연설의 이론
3. 연설문의 ‘완성’

제3장 표를 모으는 연설 : 1928~1932
1. 확대되는 목소리
2. 하늘을 나는 히틀러

제4장 국민을 관리하는 연설 : 1933~1934
1. 라디오와 은막에 흐르는 연설
2. 총통 연설의 무대

제5장 외교로서의 연설 : 1935~1939
1. 영토 확대를 위한 연설
2. 전시 태세에 대비하는 연설

제6장 청중을 잃어버린 연설 : 1939~1945
1. 동의를 얻지 못하는 연설
2. 기능이 정지된 연설

에필로그
후기
옮긴이의 말
히틀러 연설의 독일어 원문
참고문헌
찾아보기
 

저자 소개

역 : 심정명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 비교문학 협동과정에서 석사학위를, 오사카대학교 문학연구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조선대학교 인문학연구원에서 HK교수로 재직 중이다. 도미야마 이치로의 『유착의 사상』을 번역했으며 그 외에도 『스트리트의 사상』 『처음 만난 오키나와』 등을 번역했다. 저서로 『탈 전후 일본의 사상과 감성』(공저) 『민주주의 증언 인문학』(공저) 등이 있다.
 
저자 : 다카다 히로유키
가쿠슈인 대학교 문학부 교수. 근현대사 독일어사 전공. 1977년 오사카 외국어대학교 독일어학과를 졸업하고, 1979년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오사카 외국어대학교 교수, 간사이 대학교 문학부 교수를 거쳐, 2004년 가쿠슈인 대학교 문학부 교수가 되었다. 1988년 독일문학진흥회 장려상을 받았고, 2011년 일본독문학회상을 받았다. 훔볼트 재단 초빙연구원이기도 하다. 지은 책으로 《역사사회언어학 입...

책 속으로

히틀러는 뮌헨의 맥주홀이나 서커스 극장 등의 무대에서 여러 차례 공개 연설을 했다. 1921년 7월에는 나치당의 독재적인 지도권을 획득했고 점차 ‘지도자’ 이미지를 만들어나갔다. 1923년 11월에 정치적 혼란을 틈타 히틀러가 시도한 쿠데타(‘뮌헨 폭동’)는 실패로 끝났지만, 이를 재판하는 법정에서 히틀러는 능수능란한 연설 실력으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여 재판관에게서 관대한 판결을 끌어냈다. 이 재판으로 그의 이름이 전국에 알려졌다. 단, 히틀러는 이 시기에는 아직 정치가로서 단계를 밟아가는 존재로 보이지 않았다. --- p.21

강의를 끝낸 뮐러 교수는 방을 나가려다 어떤 한 남자가 몇 사람에게 둘러싸여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 남자는 “기묘하게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계속 주위 사람들에게 무언가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흥분하고 있었던 것은 이 남자 때문이었는데, 사람들이 흥분하면 할수록 그에 맞추어 남자의 목소리는 점점 더 높아져서 나는 기묘한 인상을 받았다.” 뮐러 교수는 다음 날 즉시 마이어 대위에게 말했다. “자네 부대에 말재주를 휘두르는 천부적인 테너가 있다는 걸 알고 있나? 일단 활기를 띠면 말이 끊이지 않는 듯하더군.” 그 사람이 히틀러였다. 뮐러 교수의 기억에 따르면 이때 히틀러의 풍모는 “창백하고 여윈 얼굴에 머리를 한 다발 늘어뜨리고 있어서 군인 같아 보이지가 않고 콧수염은 짧았으며 이상스럽게 큼직한 물빛 눈동자는 심상찮은 차가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 p.30

히틀러가 민중의 불안과 바람을 잘 감지하여 능수능란하게 연설을 했다고 한들, 남독일의 뮌헨이라는 도시가 지니고 있는 독특한 풍토가 없었다면 나치당은 대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히틀러의 연극적인 자기 연출 스타일은 과장된 것을 좋아하는 이 도시의 기질에 맞았다. 나치당이 풍기는 투박함도 뮌헨에서는 인기로 이어졌다. 같은 대도시라도 북독일의 베를린에서는 이 나치당과 히틀러의 스타일이 이 정도로 공감을 모으지는 않았으리라 여겨진다. 이 뮌헨이라는 도시에서도 연설회가 개최된 맥주홀이라는 장소가 과장스러운 태도가 가장 잘 통용되는 장소였다. 정치에 흥미가 있어서 연설을 들으러 왔다기보다는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있으니까 맥주홀에 가서 즐기고 오겠다는 감각으로 사람들은 연설회장에 모였다. 히틀러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맥주잔 소리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 pp.44-45

교도소에 수감된 이후 몇 년간은 히틀러가 프로파간다와 연설에 관해 이론적으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제1부1925년, 제2부 1926년)에서 글로 쓴 문장이 아니라 입으로 하는 말을 통해 논점을 좁히고 흑백을 명확히 하여 슬로건처럼 되풀이하면 청중에게 비참한 생활을 천국이라 믿게 하는 것조차 가능하다고 말했다. 1925년 12월 12일 나치당 집회에서 한 연설을 분석해보면, 변론술이나 수사학의 관점에서도 능수능란할 뿐 아니라 이미 ‘완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히틀러 연설은 이 시기에 이론 면에서나 실천 면에서나 충분히 만들어졌으므로, 이제 남은 일은 무언가를 계기로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을 시기를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셈이었다. --- p.59

1928년 말 이후 연설회장에서 마이크와 스피커를 쓰면서 히틀러의 목소리는 거대한 회장 맨 뒷자리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1930년 4월에 나치당의 제국선전책으로 취임한 괴벨스는 온 국민이 세계대공황으로 인한 불안에 떨고 있을 때 철저히 계산된 프로파간다 전략을 전개하며 선거전에 나섰다. 그 결과 나치당은 1930년 9월 국회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제2당으로 올라섰다. 히틀러는 이 무렵부터 연설에서 유대인 공격을 피하거나 ‘헌법’ ‘정치’ ‘경제’ 같은 말을 자주 사용하면서 온화한 노선으로 나아가는 동시에, 외국 미디어에 적극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며 자신의 이미지를 드높이기 위해 애썼다. --- p.107

히틀러의 제스처 중 아마도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손가락질일 것이다. 손가락질을 하는 곳을 자세히 살펴보면 손가락질이 ‘이’ ‘이것’ 같은 지시대명사와 함께 나타나고 있는 부분을 확인할 수 있다. 가령 “이 분리 상태를 극복한다.” “일곱 명이 이 1200만 명으로”가 그러하다. 단, 손가락질은 그 이상으로도 쓴다. 히틀러 입장에서 적대자인 ‘그들’을 규탄할 때도 쓰는 것이다. “그들은 지난 14년간 독일을 어디로 데려갔는가?” “(1918년) 11월의 인물들이 모든 일을 저질렀다.” “그들이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14년간) 저지른 소행” 같은 부분이 그렇다. --- p.162

이 국민 투표의 경과와 관련해 망명사회민주당의 《독일 통신》은 라디오 프로파간다 방법에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독일 통신》에 실린 작센에서 온 보고는 다음과 같다. “이번 선거 프로파간다의 중점은 집회가 아니라 유례없는 규모의 조직적인 라디오 프로파간다에 있다. 이 때문에 집회에 가는 사람들은 매우 적었다. 모든 주민이 히틀러의 연설을 라디오로 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처럼 강제로 청취시키는 일이 성공을 거둔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히틀러 연설은 1년 반 전부터 줄곧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라, 실제로 사람들은 연설을 거의 듣지 않거나 혹은 연설에 등장하는 모순에 신랄한 촌평을 가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이 보고를 보면 애당초 연설 내용에 국민이 싫증을 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강제적으로 연설을 들어야만 한다는 데 대한 반발심도 있었다. --- p.180

소련과의 동부전선이 고착 상태에 빠진 1941년 가을 이후, 히틀러는 연설할 의욕을 상실하고 연설 횟수를 부쩍 줄였다. 각 전선에서 방어전을 펼 수밖에 없게 된 가운데 진실이 담기지 않은 히틀러의 연설에 국민은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던 외국 방송을 청취하여 실제 전황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43년 2월에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이 역사적으로 대패한 후로는 청중이 없는 방에서 녹음한 후에 연설을 라디오로 방송으로 내보냈다. 이는 10년 전에 정권을 장악한 직후에 히틀러가 실패했다고 느꼈던 라디오 방송과 다를 바 없이 청자와 이어지지 않는 연설이었다. 1945년 1월 30일에 틀러의 마지막 연설이 라디오에서 방송되었다. 지하 방공호에서 녹음한 연설이었다. 이 지하 방공호에서 최후를 맞은 히틀러에게는 국민에게 이야기할 단 하나의 슬로건도 남아 있지 않았다. --- p.229

애초에 히틀러의 연설에 힘이 있었던 이유는 청중의 신뢰, 청중과의 일체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라디오를 통해 히틀러 연설을 듣는 국민에게는 이제 신뢰라고는 전혀 없었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변론술은 아무리 능수능란하고 수준이 높다고 한들 쓸모없었고, 국민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연설 내용과 현실이 극단적으로 괴리되어 있어 변론술은 고작 한순간밖에 현실을 감출 수 없었다. “여러분, 이 싸움에서 사느냐 죽느냐가 결정된다는 것을 부디 생각하십시오.” 연설 마지막에 한 이런 대비법을 통한 수사적 표현이나, “과거의 독일은 11시 45분에 무기를 내려놓았다. 내가 일을 멈추는 것은 기본적으로 언제나 12시 5분이 되고 나서다.”(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은 빨리 항복했지만, 이번엔 절대로 항복하지 않겠다는 의미. 12시라는 시각은 어찌할 도리가 없어진 순간을 가리킨다.)라는 비유도 극단적으로 엄혹한 현실이 가로막고 서 있을 때는 국민의 가슴을 울리지 않았다. --- p.255

말은 때때로 큰 힘이 있다. 말만으로 사회를 바꾸거나 역사를 움직일 수는 없지만, 때때로 말은 선언과 같은 형태로 굳건한 현실에 작은 균열을 내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몸짓과 어조도 포함된다. 이러한 말은 히틀러의 무기이기도 했지만, 사실 우리 모두에게 있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물론 히틀러 자신이 직면해야 했던 “말은 재앙을 없애지 못한다.”라는 비판처럼, 말이 지니는 한계도 포함해서 말이다. 히틀러의 말에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테고, 역사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이러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말과 글을 남기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 p.281~282
 

출판사 리뷰

12석 제9당을 4년 만에 230석 제1당으로 만들기까지
2.6% 지지율을 8년 만에 98.8%로 끌어올리기까지
그리고 가장 높은 곳에서 바닥으로 추락하기까지

히틀러 연설 전문에서 찾아낸
그 열광의 진실


히틀러가 세상을 뜬 지 70년. 아직도 사람들은 궁금해한다. 어떻게 히틀러라는 독재자가 탄생했을까? 도대체 어떤 맥락에서 홀로코스터라는 지옥을 만들어낸 악마가 나왔을까? 히틀러는 어떻게 사람들을 선동하여 그 자리에 오르게 되었을까?
답을 찾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다양한 답을 내놓았다. 누구는 역사적인 근거를 들어 히틀러 현상의 원인을 분석하고, 또 누구는 히틀러 현상을 우연한 정치적 사건들의 총합이라 규정짓기도 한다. 누구는 군중심리에서 그 원인을 찾으려 하고, 또 다른 누구는 히틀러의 개인 성향과 정신 분석에서 이유를 찾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도, 그 명쾌한 답을 찾지는 못했다.
이 책 역시 그 답을 찾아가는 노력 중 하나다. 이번엔 히틀러의 ‘말’이다. 저자는 1919년 10월 히틀러가 뮌헨의 맥주홀에서 100명의 청중을 앞에 두고 한 첫 번째 연설에서부터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지하 방공호에서 녹음한 최후의 라디오 연설까지, 25년간의 연설 전문, 약 150만 단어 전체를 분석하여 특정 시기 가장 많이 쓰인 말을 찾고 수사법을 연구했다. 그리고 그 말이 어떤 음조와 목소리의 질로, 또 어떤 속도로 발화되는지를 조사하고, 그때 히틀러가 어떤 몸짓으로 어떤 표정을 지으며 말했는지 등 언어적인 면의 모든 것을 분석한다. 그리고 그 말이 어떤 맥락에서 어떤 효과를 지녔는지를 정치적·역사적인 맥락에서 살핀다.
히틀러의 연설이 청중을 열광시켰다면, 그 비밀은 어디에 있을까? 연설문 표현의 어디에 어떤 언어적인 장치가 있었으며, 어떠한 음조로 말하고, 어느 부분에서 어떠한 제스처를 보였기 때문일까? 정권을 잡기까지 히틀러가 한 연설은 정말로 청중을 열광시켰고, 정권에 있을 때 히틀러가 한 연설은 정말로 독일 국민의 사기를 드높였을까? 연설하는 히틀러에게 설득력과 카리스마를 새겨 넣기 위해 사용된 도구는 시대와 함께 어떻게 ‘진화’했을까?
저자 다카다 히로유키는 말한다. “시간 축을 더듬어가다 보면 히틀러 자신도 깨닫지 못했던 연설의 역할이나 기능의 변모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언급되는 일은 많아도 분석되는 일은 적었던 히틀러 연설의 진실을 드러내 보이고 싶다.” 한편, 이 책은 일본 화제의 신간에 주는 상인 2014 신서대상 베스트 10에 꼽혔다.

연설을 통해 어떻게 표를 모을 수 있을까
정치인 히틀러가 터득한 연설의 법칙


히틀러는 정치가로서 전설적인 기록을 남긴 인물이다. 1928년 2.6%를 득표해 12석 제9당이었던 나치당을 1932년에 230석 제1당으로 만들었고, 1936년 투표에서는 98.8%로 끌어올렸다. 각각 4년과 8년이 걸려 권력을 완벽하게 장악한 셈이다. 나치당이 이렇게 힘을 얻고, 히틀러가 독일 최고의 지위에 오르게 되는 데까지 히틀러의 연설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는 도대체 어떻게 군중의 마음을 휘어잡았을까?
히틀러는 자서전 《나의 투쟁》에서 프로파간다의 목적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념이란 “대중의 힘없이는” 실현할 수 없는 것이므로, 지식인이 아닌 “대중만을 영구히 목표로 해야” 한다고. 따라서 “그 지적 수준은 프로파간다가 대상으로 하는 사람 중에서 가장 머리가 나쁜 사람의 이해력에 맞추어야” 하며, “민중은 냉정한 숙고보다는 감정적인 지각으로 자신의 사고와 행동을 결정”하므로 논리를 따지기보다는 감정에 호소하는 편이 낫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대중의 수용능력은 매우 한정적이며 이해력은 낮”으므로 천천히 자기 생각을 구성”해나갈 수 있도록 하여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도 말했다.
히틀러는 효율적으로 프로파간다를 펼치면 천국을 지옥이라 믿게 만들고, 반대로 지옥을 천국이라 만들 수도 있다고 믿었다. 실제로 나치당에서는 ‘기업가’를 ‘종업원의 지도자’로, ‘독재’를 ‘더 높은 차원의 민주주의’로, ‘전쟁 준비’를 ‘평화 확보’로 바꿔 부르는 전략을 구사하기도 했다.
다카다 히로유키는 1925년 신생 나치당 집회가 열렸을 당시, 히틀러 연설이 이론 면에서나 실천 면에서 완성의 경지에 다다랐다고 말한다. 1924년 뮌헨 폭동으로 9개월간 교도소 안에 있으면서 연설에 대한 이론적인 완성도를 높인 이후 1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의 일이었다. 그는 천부적으로 타고난 말재주에 더해, 청중 앞에서의 경험을 통해 노하우를 축적해가며 빠르게 권력을 장악해나갔다.

“말은 재앙을 없애지 못한다”
히틀러 연설의 한계


히틀러 연설은 이렇듯 이른 시기에 완성되었지만, 청중에 미치는 큰 영향력과 깊은 침투력을 획득하기에는 몇 가지 도구가 아직 결정적으로 빠져 있었다. 먼저 마이크와 스피커다. 히틀러가 연설회장에서 마이크를 처음 사용한 것은 1928년 11월 베를린의 스포츠 궁전에서였다. 2년간의 공개 연설 금지령 때문에 공적인 자리에서 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히틀러가 금지령이 풀린 지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아 특대홀 맨 마지막 줄에 있는 청중도 열광시키게 된 것이다.
1933년 정권을 장악하고 얼마 뒤에 히틀러는 라디오와 영화라는 재생과 복제가 가능한 장치를 수중에 넣었다. 이제 연설회장에서 히틀러가 이야기하는 목소리는 라디오 전파를 타고 작은 시골 마을에까지 일제히 전파되었다. 또한 필름에 생생한 표정과 동작을 새기며 히틀러의 카리스마는 더 많은 사람에게 전파되었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히틀러 연설에 대한 이미지와 가장 크게 어긋나는 점이 생긴다. 정권을 획득한 지 1년 반이 지나 사람들이 히틀러 연설에 싫증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히틀러의 연설을 국민에게 의무적으로 청취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1936년 라인란트에 진주할지 말지를 묻는 국민 투표에서 98.8%의 지지를 얻었지만, 그만큼의 사람들이 히틀러의 정책을 지지하거나 관심을 둔 것은 아니었다.
연설의 구성과 표현법에 아무리 듣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는 잠재력이 있다 해도, 또 그 목소리와 제스처를 많은 청자에게 전파할 수 있는 미디어가 있다 해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듣고 싶다는 마음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 잠재력은 발현하지 못하며 듣는 이를 뜨겁게 만들지도 못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후, 히틀러 연설은 전쟁이 언제 끝날지를 연설 행간에서 읽고 싶다는 점에서 최소한의 관심만을 받았다. 전쟁의 상황이 나빠짐에 따라 히틀러는 국민에게 목소리를 드러내고, 모습을 보이는 일을 극히 피하기 시작했다. 히틀러가 국민에게 말을 건네는 기회 자체가 급격히 줄었고, 그 목소리는 설득력을 잃었다.

“국민을 고무할 수 없는 히틀러 연설, 국민이 이의를 제기하는 히틀러 연설, 그리고 히틀러 자신이 의욕을 잃은 히틀러 연설. 이 같은 히틀러 연설의 진실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히틀러 연설에 대한 이미지와 모순된다면, 이는 80년 이상이 지난 지금도 우리가 히틀러를 카리스마로서 그리는 나치 독일의 프로파간다에 좌지우지되고 있다는 증거이리라.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정치가의 연설을 보고 들을 때는 부풀린 ‘빵의 꿈’에 놀아나서 열광하고 있지는 않은지, 역사에서 배우고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하겠다.” ―275쪽, 에필로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