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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 연대기 (2024) - 조선을 뒤흔든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사건 80

동방박사님 2024. 2. 5.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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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참을 수 없이 궁금하고, 그 어떤 드라마보다 생생한
500년 조선의 기록을 한 권으로 만나다!”

- 2천 권이 넘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엄선한 핵심 사건 80
- 실록 속 문장을 담아 더욱 생생한 조선사 읽기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롭게 세워진 나라 조선. 왕권 강화를 위해 1대 왕 태조가 ‘왕씨’ 성을 사용하는 것도 금지했지만, 2대에 이르기도 전에 ‘왕자의 난’이 벌어지며 핏빛 역사를 쓰게 됐다. 1910년 한일강제합병으로 일본에 나라를 뺏기기까지 조선에는 어떤 숙명적 사건들이 있었을까?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부터 조선의 마지막 왕 순조에 이르기까지, 500년 조선 역사에 불어닥쳤던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사건 80개를 담은 《조선 왕 연대기》는 나라의 흥망을 좌우했던 왕 27인의 연대기를 중심으로 우리가 지금껏 몰랐던 조선의 숨은 이야기를 실록 속 실제 문장과 함께 생생히 들려준다. 여자 노비뿐 아니라 남자 노비에게도 육아 휴직을 주는 놀라운 정책을 폈던 세종부터 대장경과 맞바꿀 만큼 후추 씨를 구하는 데 진심이었던 성종, 한낱 도적인 홍길동에게 절절맸던 연산군,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갈 수밖에 없었던 영조의 스토리까지. 왕이 선택하고 주도했던 능동적인 조선사에 귀 기울일 시간이다.

책에는 왕뿐만 아니라 관료들과 사관의 전언까지 입말 그대로 담아 마치 대본집을 읽듯, 한 편의 역사 드라마를 보듯 흥미진진하게 역사의 명장면을 감상할 수 있게 했다. 또한 27대 왕의 생애와 업적을 챕터마다 일목요연하게 정리했고, 전기·중기·후기로 나눈 조선 연표를 수록했다. 에피소드와 함께 조선 역사의 흐름을 자연스레 익히고 싶은 사람, 500년 조선사를 단 한 권으로 시작하고 싶은 독자에게 이 책을 권한다.

목차

시작하며

조선 전기

1392년 7월 17일 (태조 1년) 수창궁에서 이성계 왕위에 오르다
1394년 4월 26일 (태조 3년) 왕씨 성을 쓰지 못하게 하다
1394년 10월 25일 (태조 3년)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다
1398년 8월 9일 (태조 7년) 정도전이 요동 공략에 대해 조준을 설득하려다가 실패하다
1399년 3월 9일 (정종 1년) 중들이 간음하는 일이 많으니 민가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다
1400년 11월 11일 (정종 2년) 임금이 왕세자에게 선위하다
1401년 11월 16일 (태종 1년) 백성의 소리를 듣는 신문고를 설치하다
1404년 10월 6일 (태종 4년) 돈점을 쳐서 도읍을 한양으로 결정하다
1413년 9월 1일 (태종 13년) 의정부 제안대로 호패법을 정하다
1413년 10월 15일 (태종 13년) 지방 행정 구역의 명칭을 바꾸다
1423년 10월 8일 (세종 5년) 재인과 화척의 명칭을 백정으로 바꾸게 하다
1426년 4월 17일 (세종 8년) 계집종이 아이를 낳으면 100일 동안 휴가를 주어라
1433년 6월 11일 (세종 15년) 《향약집성방》이 완성되다
1443년 7월 6일 (세종 25년) 《칠정산》으로 우리 시간과 날짜를 계산하다
1443년 12월 30일 (세종 25년) 훈민정음을 창제하다
1451년 2월 13일 (문종 1년) 화차를 만들어 서울, 평양, 안주 등에서 사용하게 하다
1453년 10월 11일 (단종 1년) 총통위 방패 각 20명으로 수양대군을 주야로 호위하게 하다
1456년 7월 1일 (세조 2년) 단군 신주를 조선 시조 단군지위로 하다
1461년 12월 2일 (세조 7년) 유구국의 중산왕이 사자를 보내어 토물을 바치다
1466년 8월 25일 (세조 12년) 과전을 혁파하고 직전을 설치하다
1468년 10월 28일 (예종 즉위년) 남이 역모에 관련된 자들의 형벌을 정하다
1472년 2월 3일 (성종 3년) 병조에서 강원도에 있는 삼봉도를 찾기 위한 조항을 기록하다
1480년 10월 18일 (성종 11년) 어을우동을 교형에 처하다
1485년 3월 26일 (성종 16년) 후추 씨를 구하도록 전교하다
1491년 2월 18일 (성종 22년) 가난하여 시집 못 간 처녀들은 관에서 도와주어라
1500년 10월 22일 (연산 6년) 홍길동을 잡았으니 나머지 무리도 소탕하라
1504년 5월 11일 (연산 10년) 한명회의 시체를 저자에 매달게 하다

조선 중기

1506년 9월 2일 (중종 1년) 중종반정을 일으키다
1518년 3월 11일 (중종 13년) 조광조 인재 등용을 위해 현량과를 추천하다
1545년 7월 1일 (인종 1년) 청연루 아래 소침에서 훙서하다
1552년 4월 12일 (명종 7년) 양응태 · 이언경에게 선종 21인과 교종 12인을 뽑게 하다
1556년 6월 20일 (명종 11년) 양인과 천인의 혼인을 허용하는 법령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1562년 1월 8일 (명종 17년) 임꺽정을 잡은 남치근을 포상하다
1575년 3월 17일 (선조 8년) 대마도주가 일본군이 쳐들어갈 수도 있음을 알려 오다
1588년 5월 2일 (선조 21년) 유홍이 개정된 《대명회전》을 가져오다
1593년 2월 1일 (선조 26년) 전라도 순찰사 권율이 행주에서 승리하다
1598년 11월 1일 (선조 31년) 통제사 이순신 전사하다
1605년 4월 1일 (선조 38년) 유정(사명대사)이 일본에서 우리나라 남녀 3천여 명을 쇄환하다
1608년 2월 8일 (광해 즉위년) 선조의 묘호를 조라고 일컫는 것이 옳다고 아뢰다
1620년 3월 28일 (광해 12년) 비변사가 강홍립의 입국을 반대하나 따르지 않다
1620년 11월 3일 (광해 12년) 경덕궁과 인경궁 공사의 일을 적절히 분담시킬 것을 명하다
1623년 3월 12일 (광해 15년) 대궐이 불에 타다
1633년 10월 15일 (인조 11년) 호조에서 화폐 유통에 대해 아뢰다
1637년 1월 30일 (인조 15년)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를 행하다
1638년 6월 9일 (인조 16년) 성익이 소를 구하기 위해 몽골에 가다
1645년 4월 26일 (인조 23년) 소현세자 졸기
1649년 11월 5일 (효종 즉위년) 김육이 대동법 시행을 건의하다
1654년 2월 2일 (효종 5년) 나선 정벌에 참여하라는 명령을 받다
1669년 1월 4일 (현종 10년) 동성혼을 금지할 것을 아뢰다
1671년 3월 4일 (현종 12년) 경상도에서 9만여 명이 굶주리다
1674년 7월 1일 (현종 15년) 윤휴가 북벌을 추진하자고 말하다

조선 후기

1691년 12월 6일 (숙종 17년) 사육신을 복작하고, 관원을 보내 치제하게 하다
1694년 8월 14일 (숙종 20년) 울릉도 문제를 왜와 교신하다
1701년 9월 25일 (숙종 27년) 장희빈을 자진하게 하라는 비망기를 내리다
1712년 5월 23일 (숙종 38년) 접반사 박권이 백두산 정계의 일에 대해 치계하다
1722년 3월 27일 (경종 2년) 목호룡이 상변하여 정인중 등의 역모를 고하다
1733년 4월 15일 (영조 9년) 남원에서 괘서가 나타나다
1762년 윤5월 21일 (영조 38년) 사도세자가 죽다
1773년 5월 29일 (영조 49년) 청계천 준설의 물력을 마련할 방안을 아뢰다
1780년 2월 26일 (정조 4년) 이조판서 김종수가 홍국영을 귀양 보낼 것을 청하다
1781년 8월 26일 (정조 5년) 어진 1본을 규장각에 봉안하기 위해 김홍도에게 모사를 명하다
1786년 9월 14일 (정조 10년) 의빈 성씨의 졸기
1790년 2월 19일 (정조 14년) 지평 유경이 가체를 얹지 못하는 금령의 엄격한 시행을 청하다
1790년 7월 1일 (정조 14년) 한강을 건너기에 편한 배다리에 관한 어제 《주교지남》
1791년 11월 3일 (정조 15년) 평택 현감 이승훈과 양근 사람 권일신을 잡아다 문초하다
1811년 12월 22일 (순조 11년) 평안병사가 정주 목사가 달아난 사실을 아뢰다
1832년 4월 3일 (순조 32년) 김조순의 졸기
1840년 9월 4일 (헌종 6년) 윤상도와 연루된 김정희를 대정현에 위리안치하도록 하다
1849년 6월 9일 (철종 즉위년) 대왕대비가 임금의 학업 증진에 대해 의논하다
1862년 4월 4일 (철종 13년) 박규수가 진주 민란의 원인이 백낙신의 탐욕이었음을 보고하다
1865년 4월 2일 (고종 2년) 대왕대비가 경복궁 중건을 명하다
1882년 8월 5일 (고종 19년) 서울과 지방에 세운 척양비를 모두 뽑아 버리라고 명하다
1883년 1월 27일 (고종 20년) 국기를 제정하였으므로 8도와 4도에 사용하도록 하다
1885년 2월 29일 (고종 22년) 광혜원을 설치하도록 하다
1897년 10월 12일 (고종 34년)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왕후 민씨를 황후로 책봉하다
1907년 7월 4일 (고종 44년) 이완용 등이 민종식을 처벌한 데 대하여 아뢰다
1907년 7월 20일 (순종 즉위년) 헤이그 밀사 이상설, 이위종, 이준 등을 처벌하다
1909년 10월 28일 (순종 2년)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으로 사흘 동안 음악과 노래를 중지시키다
1909년 11월 1일 (순종 2년)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립하다
1910년 8월 29일 (순종 3년) 일본국 황제에게 한국 통치권을 양도하다
 

저자 소개 

저 : 유정호
 
중·고등학교 역사 교사. 인하대학교에서 교육학과 사학을 전공했고, 한국방송통신대학원에서 평생교육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딱딱하고 어려운 용어로 가득한 역사가 아닌, 실생활에서 활용할 수 있는 역사를 가르치고자 노력한다. 역사는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해주며, 대한민국 국민으로 자랑스럽게 살아가는 데 매우 필요한 학문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활발한 집필과 강연, SNS 활동을 통해 우리 역사를 알리려 힘쓰고 있다. ...

책 속으로

우리나라는 과거 우리 선조의 기록을 전산화 작업을 통해 데이터로 보관하여 세계인들의 부러움을 받는 나라입니다. 그중 하나가 《조선왕조실록》입니다. 인터넷 주소 “sillok.history.go.kr”을 입력하거나, 포털사이트에서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하면 누구나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을 읽다 보면 종종 어렵게 느껴지면서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조선왕조실록》이 담고 있는 내용의 양과 범위가 너무나 방대하며,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용어와 개념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또 날짜순으로 기록한 편년체이기 때문에 조선의 배경지식이 없다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사건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수많은 내용 중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실과 흥미로운 주제를 선별하여 풀이하는 책을 써 보면 어떨까 말입니다. 조선과 관련된 배경지식을 전달하는 한편, 독자분들이 《조선왕조실록》을 직접 읽어 보고 싶게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궁금해하는 질문의 정답을 찾아가는 즐거움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으니까요. 이 책 《조선 왕 연대기》를 통해 《조선왕조실록》을 직접 읽으며 조선의 역사에 한층 더 가까워지고 우리 역사를 사랑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 봅니다.
---「시작하며」중에서

두 차례의 왕자의 난으로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은 한양으로 되돌아가자는 아버지 태상왕 이성계의 말에 고민에 빠졌어요. 이성계가 자신의 권위를 되찾는 동시에 그리워하는 신덕왕후 강씨의 능을 보고 싶어 한양으로 가고자 하는 마음을 너무도 잘 알았거든요. 아직 많은 사람이 태조를 따르고 있는 상황에서 아버지의 말을 무시하기 어렵고, 그렇다고 태조의 말에 끌려가는 모습을 보이면 왕으로서의 권위가 떨어질까 걱정됐어요. 무엇보다 조선이 건국하고 얼마 되지 않는 기간 수도를 여러 번 옮기는 것이 백성에게 부정적인 모습으로 인식될까 두려웠어요. 힘을 통해 왕으로 즉위한 만큼, 백성의 민심을 늘 살피던 태종으로서는 수도를 옮겼을 때 어떤 여파가 다가올지 심히 걱정되었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하던 태종은 천도를 둘러싼 여러 이견과 잡음을 한 번에 해결할 기가 막힌 생각을 떠올리게 돼요. 아버지보다 더 높은 조상이 조선의 수도를 결정한다면, 태조를 비롯한 어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명분을 가질 수 있다고 판단했어요. 효를 강조하는 성리학을 국가 운영의 기조로 삼은 조선인 만큼, 아버지 태조도 하늘과 조상이 선택한 수도에 더는 간섭하지 못하리라 본 거죠.
---「돈점을 쳐서 도읍을 한양으로 결정하다(태종 4년)」중에서

지금으로부터 600년 전인 조선 세종 때 여자 노비에게 출산 휴가를 준 놀라운 일이 기록되어 있어요. 노비는 매매·상속·증여가 가능한 재산으로 여겨졌는데 말이에요. 물론 조선이 인구를 늘리고자 하는 목적 아래 진행된 정책이구나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러나 곰곰이 되짚어 생각해 보면 양인이 아닌 노비에게 출산 휴가를 줬다는 것에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해요. (…) 군역을 비롯한 여러 세금을 내지 않는 노비의 수를 증가시키기 위해 여자 노비에게 100일의 출산 휴가를 준다는 것이 선뜻 이해되지 않습니다. 세종 1430년에는 더욱 놀라운 법이 발표돼요. (…) 임산부가 건강하게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출산 한 달 전부터 일하지 않고 쉴 수 있는 조치를 한 거예요. 그런데 이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산모의 남편도 한 달 동안 복무를 면제하여, 아내와 갓 태어난 아이를 돌볼 수 있도록 했어요. 아마도 이것은 남편에게 출산 휴가를 준 세계 최초의 출산 장려 정책이 아닐까 생각돼요. 그렇다면 세종의 출산 정책은 비단 인구 증가만이 목적이 아닌 천민도 백성으로 여기며 아껴 주려는 애민 정신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계집종이 아이를 낳으면 100일 동안 휴가를 주어라(세종 8년)」중에서

부국강병을 꿈꿨던 성종은 후추가 국제 사회에서 매우 높은 가격으로 거래된다는 점을 눈여겨봤어요. 인구가 많고, 산이 많은 지형의 조선으로서는 농업에만 의존할 경우 경제적으로 곤궁을 면하기 어려웠거든요. 재정 부족 없이 안정적으로 나라를 경영하기 위해서는 고려 때처럼 다른 나라와의 교역이 필요하다고 성종은 생각했어요. 하지만 명나라의 쇄국 정책으로 다른 국가들과 교역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다양한 물품을 교역할 수는 없었어요. 그렇다면 높은 수익을 낼 수 있는 후추를 재배하여 판매하면 교역이 제한된 상황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조선에 후추를 생산할 씨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어요. 성종은 1482년 조선을 방문한 일본 사신에게 얼마를 줘도 상관없으니 후추의 씨를 구해 오라고 명령을 내렸어요. (…) 성종이 후추 씨를 구하고자 하는 열정이 오래도록 지속되자, 이를 비판하는 관료들이 등장했어요. (…) 이 모든 것은 성종이 나라의 부강을 위해 후추 씨를 구하려는 이유를 알겠지만, 오랜 세월 아무 성과가 없는 만큼 포기하라는 신하들의 조언이었습니다. 또한 일본을 비롯한 주변국들이 조선에서 후추를 아주 비싼 가격으로 팔 수 있다는 점을 악용한 결과, 국가 경제에 부담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성종에게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결국에는 성종도 후추 씨를 구하는 것을 포기합니다. 하지만 성종이 부국강병을 이루어 백성을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 이익을 좇는 것을 소인배라고 생각하던 성리학에서 벗어나 실리를 추구한 점, 농업만 강조하던 사회 분위기를 뛰어넘어 후추라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은 점, 신하들의 간청에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포기했다는 점에서 훗날 조선시대 성종은 세종만큼이나 훌륭한 성군이었다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후추 씨를 구하도록 전교하다(성종 16년)」중에서

출판사 리뷰

“왕들의 역사가 곧 나라의 역사다!”
조선 왕 27인의 연대기로 500년 조선사 단숨에 몰아보기


조선사의 맥락을 꿰뚫어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대순으로 역사의 흐름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기계처럼 “태정태세문단세~”만 반복해 외우는 것만으로는 종합적인 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 왕조 국가에서 왕의 역사는 곧 나라의 역사인 만큼, 왕들의 연대기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왕위를 둘러싼 찬탈과 반정, 외척 정치와 당파 싸움이 불러온 비극, 전쟁과 외교를 대하는 왕의 자세, 자식을 죽음으로 내몰 수밖에 없었던 왕의 비화까지, 선대왕과 그다음 왕 사이의 연결 고리를 알면 조선 역사가 더 쉽고 재미있어진다!

《조선 왕 연대기》는 2천 권이 넘는 방대한 실록에서 나라의 운명을 좌우했던 핵심 사건 80개를 엄선해 소개하는 책으로, 2시간만 투자하면 500년 조선사를 단숨에 몰아볼 수 있어 ‘조선왕조실록 입문판’이라 할 만하다. 나라를 세운 태조부터 비운의 마지막 왕 순종까지, 조선 왕 27인의 연대기와 함께 나라의 흥망을 살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재위 9개월에 그친 인종이나 시골 나무꾼으로 살다 갑작스럽게 왕이 된 철종까지 빠짐없이 담았다. 왕들의 생애와 업적을 챕터마다 일목요연하게 정리했고, 전기·중기·후기로 나눈 연표를 수록해 조선 역사의 흐름을 자연스레 익힐 수 있게 했다.

왕의 주변 인물들에 관한 에피소드도 드라마 같은 몰입도를 가져오는 데 한몫한다. 소현세자와 사도세자는 아버지와 아들 간에도 왕위 선양이 순탄치 않음을 보여 주고, 장희빈, 조광조 등 힘의 논리에 따라 이용되거나 버려졌던 인물이나 정도전과 한명회, 홍국영 등 왕의 곁에 있었던 책사, 그리고 권율과 이순신, 사명대사처럼 위기의 순간 나라를 구해 냈던 위인까지 다양한 인물상을 소개한다. 나라의 운명이 왕과 주변 인물들에 의해 좌우됐음을 또 한 번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왕은 왜 하필 그날, 그런 선택을 했을까?”
나라와 왕의 운명을 뒤바꾼 실록 속 흥미로운 사건들!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1910년 일본에 국권을 침탈당하기까지, 조선에는 어떤 피할 수 없는 사건들이 있었을까? 그리고 그 역사의 중심에 선 왕은 어떤 선택으로 나라의 운명을 뒤흔들어 왔을까?

이 책의 저자는 왕이 선택하고 주도했던 능동적인 조선사에 주목한다. 냉철했던 태종은 미신에 가까운 돈점으로 도읍을 정했는데, 이는 아버지인 태조의 말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자신의 권위도 지키기 위한 훌륭한 계책이었다. 또 여자 노비뿐 아니라 남자 노비에게도 육아 휴직을 주는 놀라운 정책을 폈던 세종이나, 대장경과 맞바꿀 결심을 할 만큼 후추 씨를 구하는 데 진심이었던 성종의 이야기는 백성을 위한 어진 정책을 고민했던 참된 군주의 모습과, 그리하여 태평성대를 이루었던 조선을 살펴보게 한다.

한편 어떤 선택으로 말미암아 역사적 ‘전환점’이 된 사건들도 엿볼 수 있다. 단종은 친위대에게 삼촌인 수양대군을 지키라 명했고 이는 곧 군사권을 넘겨주는 일이 되어 버린다. 연산군은 폭정을 저지르다 결국 왕의 자리에서 쫓겨났고, 영조는 자식인 사도세자를 죽게 했지만 손자인 정조를 무사히 왕위에 올렸다. 조선 역사의 명장면들을 인물의 선택과 연결해 읽다 보면, 멀게만 느껴지던 이야기가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정책을 향한 쓴소리부터
백성을 살피는 애민 군주의 모습까지
왕과 신하, 사관의 전언이 입말 그대로 담긴 가장 진솔한 역사담!


“사신은 논한다. (…) 교종과 선종을 다시 세우고 또 중을 선발하는 옛 제도를 회복시켰기 때문에 중의 무리가 날로 번성하고 부처를 섬기는 것이 더욱 정성스러웠다. 이는 모두 요승 보우가 고혹시킨 소치인 것이니, 재해가 겹치고 국사가 날로 잘못되어 가는 것이 괴이한 것도 없다. 참으로 통탄스러운 일이다.” - 《명종실록》 13권 (1552년 4월 12일 명종 7년)

《조선왕조실록》은 왕조차도 살아서는 절대 볼 수 없었던 공식 국가 기록이다. 하지만 기록의 마지막에는 “사신은 논한다”로 시작하는 사관의 평가가 담겼던, 그야말로 500년 조선 역사의 보고다. 임꺽정을 두고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 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 곤궁한 백성은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 도적이 되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다”고 평가했을 만큼, 사관은 관리들의 부패를 꼬집고 민심을 다정히 살폈다. 또 국제 정세와 왕의 업적을 냉철하게 분석해 당대엔 읽을 수 없는 비밀 기록으로 남겼다. 현대 사회에 적용해도 손색없을 어질고 현명한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실록 속 문장을 입말 그대로 수록해 왕과 신하들의 정치 견해 차이를 더욱 생생히 떠올려 볼 수 있는 것도 이 책의 또 다른 묘미다. 한 예로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과 이를 반대한 최만리 등 신료들의 논쟁에서 우리는 역사 드라마를 볼 때보다 더 큰 감동을 느끼게 된다. 백성의 편리를 최우선으로 삼았던 세종의 진솔한 속마음을 직접 읽어 볼 수 있었기 때문 아닐까. 마치 대본집을 읽듯, 한 편의 영화를 보듯 흥미진진하게 역사의 명장면을 감상할 수 있는 이 책 《조선 왕 연대기》와 함께 우리 선조들의 가슴 벅찬 이야기에 다시 귀 기울일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