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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 책은 신진 종교사회학자 김선필 박사의 첫 책으로, 조선 후기부터 지금까지 240여 년 이어져 온 한국 천주교회사를 “기쁨과 희망의 여정”이라는 일관된 테마 속에서 한 권으로 정리한 책이다. 저자는 무조건적인 호교론 또는 비판론을 지양하고, 한국 천주교회가 고난과 위기를 극복하고 참다운 신앙 공동체로 나아가는 과정과 한국 사회의 한 주역으로 서기까지의 과정을 참신하고 독특한 관점과 방법론으로 저술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사 이해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목차
추천사 | 김희중 대주교 ·7
추천사 | 문창우 주교 ·11
들어가며 ·13
1부 이 책을 보는 방법
1. 한국 천주교회를 바라보는 방법
가. 맹인모상과 황사영 백서 ·25
나. 시간과 주체: 한국 천주교회를 바라보는 두 가지 기준 ·31
다. 사랑이 전제되지 않은 정의는 폭력입니다 ·37
※ 교회사 엿보기: 정난주 마리아(1773~1838)의 생애 ·41
2. 천주교회의 세계관
가. 교회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법 ·45
1) 가르치는 교회와 배우는 교회: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1965) ·45
2) 함께 하는 교회: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1965~) ·49
나. 교회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 ·52
1)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1965) ·52
2) 세상 속 교회를 선언하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1965~) ·55
※ 사회교리 좀 더 엿보기 ·61
2부 빛과 어둠의 순간들, 한국 천주교회가 걸어온 길
3. 어둠 속에 빛을(1784~1886)
가. 신앙의 자발적 수용, 이 땅에 “기쁨과 희망”을 ·67
나. 파리외방전교회의 조선 선교 ·77
1) 18세기 전후 아시아 선교를 둘러싼 쟁점들 ·77
(1) 직접 선교방식과 문명화의 사명 ·77
(2) 적응주의 선교와 조상 제사 금지령 ·80
(3) 보호권 제도와 파리외방전교회 ·83
2)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의 입국과 적응 ·86
(1) 선교사의 조선 입국 ·86
(2) 선교사의 적응 ·90
① 선교사의 조선 인식 ·90
② 선교방식으로써 양반문화의 수용 ·95
다. 조상 제사 금지와 박해 ·99
라. 박해의 양상과 한국 천주교회의 대응 ·103
마.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준 한국 천주교회 ·113
4. 한국 사회의 일원이 된다는 것(1886~1907)
가. 한불조약 이후 달라진 한국 천주교회의 위상 ·118
나. 지역 사회와의 충돌과 적응 ·126
1) 교안의 발생: 신축교안을 중심으로 ·126
2) 신축교안 이후 한국 천주교회와 지역 사회 ·133
다. 자선사업과 수도자,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한 한국 천주교회 ·136
5. 교회와 민족 사이에서(1907~1945)
가. 정교분리, 교회 보호를 위한 선택 ·144
나. 교민주의 선교방식 ·154
다. 신사참배, 제2의 중국 의례 논쟁? ·159
라. 일제의 직접 통치 전략에 대응한 신의 한 수, 노기남 대주교 ·163
6. 혼란 속에서 길을 찾아(1945~1965)
가. 하느님의 섭리, 광복 사건 ·171
나. 공산주의와 천주교회 ·173
다. 한국 천주교회와 공산주의 정권의 충돌 ·176
라.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그리고 한국전쟁 ·179
마. 분단국가에서 종교란? ·183
바. 민족사와 한국 천주교회, 타자와 주체의 경계에서 ·186
사. 4·19혁명과 한국 천주교회: 외래종교의 장벽을 깨다 ·190
아. 민주주의와 반공주의 사이에서 진동하는 한국 천주교회 ·196
7. 쇄신과 도전의 시간(1965~현재)
가. 한국 천주교회의 제2차 바티칸공의회 수용 ·204
나. 한국 천주교회, 세상 속으로 뛰어들다 ·209
1) 심도직물 사건 ·209
2) 지학순 주교 구속 사건 ·213
3) 김수환 추기경과 한국 민주주의 ·218
4) 5·18민주화운동과 한국 천주교회의 역할 ·223
5) 세상을 위로하는 교회 ·229
다. 하느님 백성의 발견, 공동합의적 교회 쇄신을 향한 한국 천주교회의 여정 ·235
1)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 공동합의적 교회 쇄신을 위한 모범 사례 ·238
2) 공동합의적 교회 쇄신을 위한 한국 천주교회의 진통 ·241
3) 하느님 백성과 함께 걷는 한국 천주교회 ·246
3부 기쁨과 희망의 교회를 향하여
8. 21세기 한국 천주교회의 도전
가. 교회의 성장과 위기, 희망 ·253
1) 순교자의 피로 성장한 한국 천주교회 ·253
2) 교세 침체 현상 ·258
3) 교회 시설 운영과 공공성 ·262
4) 코로나19와 한국 천주교회, 명동밥집 ·268
나. 평신도와 함께 하는 한국 천주교회 ·273
다. 교회가 과거와 화해하는 방법 ·280
1) 천주교회의 과거사 반성 ·280
2) 제주교구 사례: 도민의 아픔을 자기 것으로 ·285
라. 한국 천주교회의 민족화해 활동 ·290
1) 북한교회의 재발견 ·290
2) 인식의 전환, 적대적 관계에서 민족화해의 대상으로 ·292
9. 맺음말: 기쁨과 희망, 지금 이 자리에 ·298
감사의 글 ·304
참고문헌 ·307
부록 | 한국 천주교회사 연표 ·317
색인 ·321
추천사 | 문창우 주교 ·11
들어가며 ·13
1부 이 책을 보는 방법
1. 한국 천주교회를 바라보는 방법
가. 맹인모상과 황사영 백서 ·25
나. 시간과 주체: 한국 천주교회를 바라보는 두 가지 기준 ·31
다. 사랑이 전제되지 않은 정의는 폭력입니다 ·37
※ 교회사 엿보기: 정난주 마리아(1773~1838)의 생애 ·41
2. 천주교회의 세계관
가. 교회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법 ·45
1) 가르치는 교회와 배우는 교회: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1965) ·45
2) 함께 하는 교회: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1965~) ·49
나. 교회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 ·52
1)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1965) ·52
2) 세상 속 교회를 선언하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1965~) ·55
※ 사회교리 좀 더 엿보기 ·61
2부 빛과 어둠의 순간들, 한국 천주교회가 걸어온 길
3. 어둠 속에 빛을(1784~1886)
가. 신앙의 자발적 수용, 이 땅에 “기쁨과 희망”을 ·67
나. 파리외방전교회의 조선 선교 ·77
1) 18세기 전후 아시아 선교를 둘러싼 쟁점들 ·77
(1) 직접 선교방식과 문명화의 사명 ·77
(2) 적응주의 선교와 조상 제사 금지령 ·80
(3) 보호권 제도와 파리외방전교회 ·83
2)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의 입국과 적응 ·86
(1) 선교사의 조선 입국 ·86
(2) 선교사의 적응 ·90
① 선교사의 조선 인식 ·90
② 선교방식으로써 양반문화의 수용 ·95
다. 조상 제사 금지와 박해 ·99
라. 박해의 양상과 한국 천주교회의 대응 ·103
마.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준 한국 천주교회 ·113
4. 한국 사회의 일원이 된다는 것(1886~1907)
가. 한불조약 이후 달라진 한국 천주교회의 위상 ·118
나. 지역 사회와의 충돌과 적응 ·126
1) 교안의 발생: 신축교안을 중심으로 ·126
2) 신축교안 이후 한국 천주교회와 지역 사회 ·133
다. 자선사업과 수도자,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한 한국 천주교회 ·136
5. 교회와 민족 사이에서(1907~1945)
가. 정교분리, 교회 보호를 위한 선택 ·144
나. 교민주의 선교방식 ·154
다. 신사참배, 제2의 중국 의례 논쟁? ·159
라. 일제의 직접 통치 전략에 대응한 신의 한 수, 노기남 대주교 ·163
6. 혼란 속에서 길을 찾아(1945~1965)
가. 하느님의 섭리, 광복 사건 ·171
나. 공산주의와 천주교회 ·173
다. 한국 천주교회와 공산주의 정권의 충돌 ·176
라.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그리고 한국전쟁 ·179
마. 분단국가에서 종교란? ·183
바. 민족사와 한국 천주교회, 타자와 주체의 경계에서 ·186
사. 4·19혁명과 한국 천주교회: 외래종교의 장벽을 깨다 ·190
아. 민주주의와 반공주의 사이에서 진동하는 한국 천주교회 ·196
7. 쇄신과 도전의 시간(1965~현재)
가. 한국 천주교회의 제2차 바티칸공의회 수용 ·204
나. 한국 천주교회, 세상 속으로 뛰어들다 ·209
1) 심도직물 사건 ·209
2) 지학순 주교 구속 사건 ·213
3) 김수환 추기경과 한국 민주주의 ·218
4) 5·18민주화운동과 한국 천주교회의 역할 ·223
5) 세상을 위로하는 교회 ·229
다. 하느님 백성의 발견, 공동합의적 교회 쇄신을 향한 한국 천주교회의 여정 ·235
1)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 공동합의적 교회 쇄신을 위한 모범 사례 ·238
2) 공동합의적 교회 쇄신을 위한 한국 천주교회의 진통 ·241
3) 하느님 백성과 함께 걷는 한국 천주교회 ·246
3부 기쁨과 희망의 교회를 향하여
8. 21세기 한국 천주교회의 도전
가. 교회의 성장과 위기, 희망 ·253
1) 순교자의 피로 성장한 한국 천주교회 ·253
2) 교세 침체 현상 ·258
3) 교회 시설 운영과 공공성 ·262
4) 코로나19와 한국 천주교회, 명동밥집 ·268
나. 평신도와 함께 하는 한국 천주교회 ·273
다. 교회가 과거와 화해하는 방법 ·280
1) 천주교회의 과거사 반성 ·280
2) 제주교구 사례: 도민의 아픔을 자기 것으로 ·285
라. 한국 천주교회의 민족화해 활동 ·290
1) 북한교회의 재발견 ·290
2) 인식의 전환, 적대적 관계에서 민족화해의 대상으로 ·292
9. 맺음말: 기쁨과 희망, 지금 이 자리에 ·298
감사의 글 ·304
참고문헌 ·307
부록 | 한국 천주교회사 연표 ·317
색인 ·321
책 속으로
약 240년 전, 이 땅에도 “기쁨과 희망”의 여정에 동참하길 바라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암담한 현실 앞에 서 있던 그들은 “인류의 빛(Lumen Gentium)”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을 발견했고, 그 빛을 따라 자발적으로 하느님을 믿었습니다. 그렇게 형성된 공동체가 한국 천주교회(이하 한국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여정에는 “슬픔과 고뇌”가 함께 했습니다. 천주교인이라는 이유로 거의 백여 년간 박해를 받아야 했고, 불안한 정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써야만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기쁨과 희망”을 향한 여정을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세상 속 빛이 되어 혼란스러웠던 한국 사회를 밝게 비추었습니다.
--- p.14
시간이 흘러 교회의 시선을 통해 한국 교회를 바라보니, 납득할 수 없었던 모습들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차츰 두 시선을 교차하여 한국 교회를 살펴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한국 교회에 대한 극단적인 태도, 즉 무조건적인 비판과 호교론적인 태도를 지양하는 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 p.17
황사영은 교회의 입장에 충실했던 신앙인이자, 순교자였습니다. 또한 자신과 동료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신앙의 자유를 찾고자 노력했던 인권운동가였습니다. 반면 나라를 중요시하는 시각에서 보면 황사영은 개인의 이익을 나라보다 우선시한 배신자일 수 있습니다. 황사영이라는 다면적인 인물을 한쪽으로 바라보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황사영의 공과(功過)를 함께 이야기할 수 있을 때, 그가 처했던 상황과 고뇌, 그리고 당시 교회와 한국 사회의 관계를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 p.36
우리가 한국 교회사를 돌아보는 이유는 어둠의 시간만을 끄집어내 교회를 비난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교회가 이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었던 순간들을 바라보면서, 아낌없는 칭찬을 해주어야 합니다. 반면 잘못한 점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그것이 한국 교회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프고 불편하지만, 그것을 통해 한국 교회가 더 성장할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 p.40
21세기에 들어 소득 양극화가 전 세계적으로 심화되자, 베네딕토 16세 교황(PP. Benedictus XVI, 재위 2005~2013)은 2009년 회칙 『진리 안의 사랑(Caritas in Veritate)』을 반포하고 세계적인 부의 불평등 및 빈곤문제를 해소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2014년경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를 반포하면서 인간을 도구로 삼는 자본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했으며, 2015년에는 인류가 직면한 환경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으로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를 반포하고, 2020년에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신음하는 인류에게 형제애와 사회적 우애를 강조하기 위해 회칙 『모든 형제들』을 반포했습니다.
--- p.60
한국 교회는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과정을 거쳐 탄생했습니다. 다른 지역은 외부에서 들어온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이 선포되고, 그곳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다른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국인들이 먼저, 그것도 스스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 p.67
강완숙과 정하상으로 대표되는 평신도들은 자발적으로, 국가의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한국 교회의 기틀을 세워나갔습니다. 그것은 복음이 알려준 하느님 나라의 “기쁨과 희망”, 즉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신앙의 자유를 누리며 성장해올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흘린 피와 땀 덕분이었습니다.
--- p.76
19세기에 조선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은 조선 사람들의 민족성과 도덕성, 생활 습관, 식습관, 사고방식 등 다수의 분야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내놓고 있었습니다. 문명화 사명과 이교도 개종이라는 이중의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그들에게 조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p.93
선교사들이 선교활동을 펼치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이때 양반 신자들은 선교사들의 결점을 보완해주기에 적합한 협조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선교사들의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박해로 파괴된 교회를 재건할 수 있는 사회적 권위와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많은 양반 신자들이 공소 회장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한국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고, 또 그렇게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양반들이 많았다는 점을 알려줍니다.
--- p.96
신축교안 직후 제주에 남아 있던 선교사들은 군인 없이는 선교 활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배상금 지급 지연으로 발생한 이자를 제주도민들에게 돌려주는 파격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도민을 적으로 보지 않고, 사랑을 실천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당시 조선 정부는 배상금과 그 이자의 지불 의무를 도민들에게 떠넘긴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선택을 계기로 선교사들과 천주교회는 도민들에게 인심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교육 사업에 진력하여, 비신자까지 자기 자녀를 천주교 학교에 보내고자 할 정도로 신망을 얻게 되었습니다.
--- p.133
뒤늦게 제주에 파견된 타케 신부(Emile Joseph Taquet, 1873~1952) 역시 제주도의 고유한 가치를 발견해 나갔습니다. 그는 특히 제주도에서만 자라는 자생 식물을 수집하여 학계에 알리는데 공을 들였습니다. 예를 들어 현재 왕벚꽃 나무 자생지가 제주도라고 인정받게 된 것 은 모두 타케 신부 덕분입니다.
--- p.135
교회는 지역 주민들과 함께 하는 법을 깨우쳐나가게 됩니다. 주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주민들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는지, 그 지역의 특성은 무엇인지 탐구하고 이해해 나가면서, 천주교회는 점차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 거듭나기 시작했습니다.
--- p.142
이승만 정권은 자신에게 반발하는 한국 교회를 다양한 방식으로 괴롭혔습니다. 정치 깡패를 동원하여 대구대목구가 운영하던 대구매일신문사를 피습하는가 하면(1955), 노기남 대주교를 탄핵하고자 교황청에 압력을 넣기도 했습니다(1958~1959). 또한 서울대목구가 운영하던 『경향신문』을 폐간시켰습니다(1959). 뿐만 아니라 이승만 정권은 공무원 신자들에게 인사 상 차별을 주었는데, 예를 들어 1958년 9월에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조교수로 내정되었던 박양운 바오로 신부(1923~2002)를 교수직에 임명하지 않았습니다.
--- p.192~193
당시 가톨릭노동청년회 총재는 마산교구장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당시 주교, 1969년 추기경 서임, 1922~2009)이었습니다. 그는 강화도 본당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노동자들을 위로했습니다. 사태를 파악한 김수환 추기경은 한국 교회의 주교들을 설득하여, 1968년 2월 9일 “사회 정의와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한다”는 제목의 성명서를 주교단 명의로 발표하였습니다.
--- p.212
한국 교회 차원의 엄호 속에서 지학순 주교는 사회 정의와 관련된 활동을 연이어 펼쳐나갔습니다. 그는 1971년 성탄대축일에 맞춰 발표한 『성탄교서』에서 “우리 가톨릭의 기본정신은 정의이다. 사회정의와 공동선을 구현하는 것은 가톨릭의 기본 목표이다”라고 선언하는가 하면, 평협 및 정의평화위원회 총재주교(1972), 국제 앰네스티 한국위원회 명예 회장(1972) 및 제2대 이사장(1973), 한국 노동교육협의회 회장(1973) 등을 역임하며 활동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 p.215
교회는 복음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공동체라는 점에서 시민단체와 근본적으로 다른 조직입니다. 만약 교회가 사회운동 자체를 목적으로 삼게 된다면, 짠맛을 잃은 소금처럼 밖에 내버려져(마태 5,13 참조) 존재 가치를 잃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 속 문제에 개입할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해야 할 때, 그리고 만약 개입하기 시작했다면 그 과정에서 자신이 그리스도 제자들의 공동체라는 점을 자각하고 드러낼 필요가 있습니다.
--- p.234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세상과 담을 쌓고 고립을 선택했던 과거와는 달리, 교회가 세상 속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선언이었기에, 그 정신을 받아들인 한국 교회는 독재 정권과 맞서 싸우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로해주는 데 자기 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한국 교회가 한국 사회의 일원이 되는 것을 넘어 한국 사회를 품으로 껴안을 정도로 성숙해졌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교회가 자신들의 고통에 눈감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교회로 모여들었습니다. 교회는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의 위로처요, 안식이 필요한 사람들의 안식처로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 p.248
천주교회는 과거사를 되돌아보면서 교회 구성원들이 저지른 역사적 과오를 구체적으로 반성했습니다. 그 결과물로 발표된 문헌이 『기억과 화해: 교회와 과거의 잘못들』(2000.03.06.)이었습니다. 그리고 2000년 3월 12일에는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참회의 날’ 미사가 봉헌되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집전한 이 미사에서, 천주교회는 자신이 잘못한 일들을 공개적으로 고백했습니다. 대표적인 잘못으로는 십자군 전쟁, 종교재판, 나치 학살에 침묵했던 점들이 있었습니다.
--- p.282
제주교구가 보여준 일련의 모습은 아직까지 화해하지 못한 과거사들에 대해 한국 교회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제주교구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교회의 입장만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주교구는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면서 인정할 것은 솔직하게 인정하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러한 결단이 화해의 물꼬를 트게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실천으로 이어진 화해의 노력은 교회와 제주 사회 사이에 굳게 닫혀있던 화해의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제주교구의 사례는 역지사지의 마음, 소통하려는 자세, 말보다는 행동, 바로 이것들이 한국 교회가 과거와 화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p.14
시간이 흘러 교회의 시선을 통해 한국 교회를 바라보니, 납득할 수 없었던 모습들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차츰 두 시선을 교차하여 한국 교회를 살펴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한국 교회에 대한 극단적인 태도, 즉 무조건적인 비판과 호교론적인 태도를 지양하는 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 p.17
황사영은 교회의 입장에 충실했던 신앙인이자, 순교자였습니다. 또한 자신과 동료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신앙의 자유를 찾고자 노력했던 인권운동가였습니다. 반면 나라를 중요시하는 시각에서 보면 황사영은 개인의 이익을 나라보다 우선시한 배신자일 수 있습니다. 황사영이라는 다면적인 인물을 한쪽으로 바라보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황사영의 공과(功過)를 함께 이야기할 수 있을 때, 그가 처했던 상황과 고뇌, 그리고 당시 교회와 한국 사회의 관계를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 p.36
우리가 한국 교회사를 돌아보는 이유는 어둠의 시간만을 끄집어내 교회를 비난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교회가 이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었던 순간들을 바라보면서, 아낌없는 칭찬을 해주어야 합니다. 반면 잘못한 점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그것이 한국 교회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프고 불편하지만, 그것을 통해 한국 교회가 더 성장할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 p.40
21세기에 들어 소득 양극화가 전 세계적으로 심화되자, 베네딕토 16세 교황(PP. Benedictus XVI, 재위 2005~2013)은 2009년 회칙 『진리 안의 사랑(Caritas in Veritate)』을 반포하고 세계적인 부의 불평등 및 빈곤문제를 해소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2014년경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를 반포하면서 인간을 도구로 삼는 자본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했으며, 2015년에는 인류가 직면한 환경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으로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를 반포하고, 2020년에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신음하는 인류에게 형제애와 사회적 우애를 강조하기 위해 회칙 『모든 형제들』을 반포했습니다.
--- p.60
한국 교회는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과정을 거쳐 탄생했습니다. 다른 지역은 외부에서 들어온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이 선포되고, 그곳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다른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국인들이 먼저, 그것도 스스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 p.67
강완숙과 정하상으로 대표되는 평신도들은 자발적으로, 국가의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한국 교회의 기틀을 세워나갔습니다. 그것은 복음이 알려준 하느님 나라의 “기쁨과 희망”, 즉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신앙의 자유를 누리며 성장해올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흘린 피와 땀 덕분이었습니다.
--- p.76
19세기에 조선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은 조선 사람들의 민족성과 도덕성, 생활 습관, 식습관, 사고방식 등 다수의 분야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내놓고 있었습니다. 문명화 사명과 이교도 개종이라는 이중의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그들에게 조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p.93
선교사들이 선교활동을 펼치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이때 양반 신자들은 선교사들의 결점을 보완해주기에 적합한 협조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선교사들의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박해로 파괴된 교회를 재건할 수 있는 사회적 권위와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많은 양반 신자들이 공소 회장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한국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고, 또 그렇게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양반들이 많았다는 점을 알려줍니다.
--- p.96
신축교안 직후 제주에 남아 있던 선교사들은 군인 없이는 선교 활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배상금 지급 지연으로 발생한 이자를 제주도민들에게 돌려주는 파격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도민을 적으로 보지 않고, 사랑을 실천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당시 조선 정부는 배상금과 그 이자의 지불 의무를 도민들에게 떠넘긴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선택을 계기로 선교사들과 천주교회는 도민들에게 인심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교육 사업에 진력하여, 비신자까지 자기 자녀를 천주교 학교에 보내고자 할 정도로 신망을 얻게 되었습니다.
--- p.133
뒤늦게 제주에 파견된 타케 신부(Emile Joseph Taquet, 1873~1952) 역시 제주도의 고유한 가치를 발견해 나갔습니다. 그는 특히 제주도에서만 자라는 자생 식물을 수집하여 학계에 알리는데 공을 들였습니다. 예를 들어 현재 왕벚꽃 나무 자생지가 제주도라고 인정받게 된 것 은 모두 타케 신부 덕분입니다.
--- p.135
교회는 지역 주민들과 함께 하는 법을 깨우쳐나가게 됩니다. 주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주민들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는지, 그 지역의 특성은 무엇인지 탐구하고 이해해 나가면서, 천주교회는 점차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 거듭나기 시작했습니다.
--- p.142
이승만 정권은 자신에게 반발하는 한국 교회를 다양한 방식으로 괴롭혔습니다. 정치 깡패를 동원하여 대구대목구가 운영하던 대구매일신문사를 피습하는가 하면(1955), 노기남 대주교를 탄핵하고자 교황청에 압력을 넣기도 했습니다(1958~1959). 또한 서울대목구가 운영하던 『경향신문』을 폐간시켰습니다(1959). 뿐만 아니라 이승만 정권은 공무원 신자들에게 인사 상 차별을 주었는데, 예를 들어 1958년 9월에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조교수로 내정되었던 박양운 바오로 신부(1923~2002)를 교수직에 임명하지 않았습니다.
--- p.192~193
당시 가톨릭노동청년회 총재는 마산교구장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당시 주교, 1969년 추기경 서임, 1922~2009)이었습니다. 그는 강화도 본당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노동자들을 위로했습니다. 사태를 파악한 김수환 추기경은 한국 교회의 주교들을 설득하여, 1968년 2월 9일 “사회 정의와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한다”는 제목의 성명서를 주교단 명의로 발표하였습니다.
--- p.212
한국 교회 차원의 엄호 속에서 지학순 주교는 사회 정의와 관련된 활동을 연이어 펼쳐나갔습니다. 그는 1971년 성탄대축일에 맞춰 발표한 『성탄교서』에서 “우리 가톨릭의 기본정신은 정의이다. 사회정의와 공동선을 구현하는 것은 가톨릭의 기본 목표이다”라고 선언하는가 하면, 평협 및 정의평화위원회 총재주교(1972), 국제 앰네스티 한국위원회 명예 회장(1972) 및 제2대 이사장(1973), 한국 노동교육협의회 회장(1973) 등을 역임하며 활동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 p.215
교회는 복음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공동체라는 점에서 시민단체와 근본적으로 다른 조직입니다. 만약 교회가 사회운동 자체를 목적으로 삼게 된다면, 짠맛을 잃은 소금처럼 밖에 내버려져(마태 5,13 참조) 존재 가치를 잃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 속 문제에 개입할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해야 할 때, 그리고 만약 개입하기 시작했다면 그 과정에서 자신이 그리스도 제자들의 공동체라는 점을 자각하고 드러낼 필요가 있습니다.
--- p.234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세상과 담을 쌓고 고립을 선택했던 과거와는 달리, 교회가 세상 속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선언이었기에, 그 정신을 받아들인 한국 교회는 독재 정권과 맞서 싸우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로해주는 데 자기 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한국 교회가 한국 사회의 일원이 되는 것을 넘어 한국 사회를 품으로 껴안을 정도로 성숙해졌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교회가 자신들의 고통에 눈감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교회로 모여들었습니다. 교회는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의 위로처요, 안식이 필요한 사람들의 안식처로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 p.248
천주교회는 과거사를 되돌아보면서 교회 구성원들이 저지른 역사적 과오를 구체적으로 반성했습니다. 그 결과물로 발표된 문헌이 『기억과 화해: 교회와 과거의 잘못들』(2000.03.06.)이었습니다. 그리고 2000년 3월 12일에는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참회의 날’ 미사가 봉헌되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집전한 이 미사에서, 천주교회는 자신이 잘못한 일들을 공개적으로 고백했습니다. 대표적인 잘못으로는 십자군 전쟁, 종교재판, 나치 학살에 침묵했던 점들이 있었습니다.
--- p.282
제주교구가 보여준 일련의 모습은 아직까지 화해하지 못한 과거사들에 대해 한국 교회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제주교구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교회의 입장만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주교구는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면서 인정할 것은 솔직하게 인정하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러한 결단이 화해의 물꼬를 트게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실천으로 이어진 화해의 노력은 교회와 제주 사회 사이에 굳게 닫혀있던 화해의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제주교구의 사례는 역지사지의 마음, 소통하려는 자세, 말보다는 행동, 바로 이것들이 한국 교회가 과거와 화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p.289~290
출판사 리뷰
한국 천주교회사를 편견과 오해에서 벗어나 새롭게 이해하는 한 방식
주지하다시피 세계사를 통틀어 한국 천주교회만큼 독특한 역사를 가진 신앙 공동체는 찾아보기 힘들다. 외부의 선교 활동 없이 자발적으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과 10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행된 가혹한 박해를 이겨내고 신앙을 이어온 것만 보더라도 세계사적으로 거의 유일무이한 신앙 공동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또한 한국 천주교회는 조선 후기부터 일제 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근현대 한국사를 관통하는 굵직한 사건들의 중심에 있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더해지고 있다. 따라서 천주교회와 교회사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극복하고 새롭게 해석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한국 천주교회는 억압과 차별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조선 후기의 종교운동으로 비쳐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문화와 전통을 무시하고 외세를 끌어들이는 “매국노”로 비쳐지기도 했으며, 일본 제국주의와 독재 권력의 편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독립 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중심에 있기도 했다.
저자는 한국 천주교회사를 이해하려면 “시간”이란 조건을 고려하여 현재 우리의 관점을 벗어나 당시의 관점을 이해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역설한다. 대표적인 예가 “황사영 백서 사건”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민족사적 관점으로는 외세를 끌어들여 민족을 패망의 위기에 빠뜨리려는 “배신자”나 “매국노”로 이해될 수밖에 없지만, 당시 천주교도의 입장에서는 극심한 박해 속에서 자신의 생명은 물론이고 교회를 건지려는 자구책으로 이해될 수 있는 사건인 것이다. 흡사 지금 군부 쿠데타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미얀마 민중이 외국의 연대 세력예 호소하는 것과 같은 상황인 것이다.
한편 저자는 교회라는 내재적 관점과 논리로 한국 천주교회사를 볼 것을 제안한다. 한국 천주교회는 노기남 대주교를 위시하여 일제 제국주의에 협조적이었으며, 해방 이후 독재 정권의 편에 섰다는 비난을 들었다. 그러나 가혹한 박해와 탄압으로 언제든지 교회가 무너질 수 있다는 경험과 교회를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보호해야 한다는 자구책이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이 없이는 조선 후기의 차별이 없고 평등한 신앙 공동체를 이해할 수 없고, 안중근을 비롯한 독립 운동을 이해할 수 없고, 친일파라 비난 받았던 노기남 대주교가 안중근 서거 37주년 연미사를 거행한 것이나 이승만에 대한 반독재 운동을 한 것을 이해할 수 없으며, 그 이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교회가 박정희와 전두환 독재 정권에 저항한 사실을 이해할 수 없고, 탄압 받던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 들과 연대해온 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
또한 이 책은 한국 천주교회사를 한 시간의 단면이나 한 사건으로만 파악할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기쁨과 희망”을 위해 길고 긴 발걸음을 내딛는 과정으로 이해하자고 제안한다.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회가 세상으로 들어가기를 원했듯이, 한국 천주교회 또한 정교분리의 원칙을 벗어나 좀 더 세상 속으로 들어가 사회의 고민을 품고 약자를 보호하고 연대하며 한국의 역사를 이끄는 한 축으로 정립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지난 날의 십자군전쟁, 종교재판, 나치 학살의 잘못을 고백한 것처럼, 한국 교회 또한 그동안의 과오를 고백하고 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1901년에 벌어진 제주도의 “신축교안”이다. 제주교구와 제주도민은 백여 년 전에 일어난 비극을 잊지 않고 지금까지 화해하고 치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사를 통해서 재구성되는 한국 근현대 일상사
이 책이 가지는 뜻밖의 재미는 한국 천주교회사를 통해서 조선 후기부터 지금까지 일반 민중들의 일상사를 엿볼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이를테면 조선 후기의 다블뤼 주교는 양반 행세를 하는 등 양반 문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정부의 검문을 피해 다녔는데, 그가 작성한 편지를 보면 주막을 이용할 때에 사람들을 쫓아내고 방을 독차지해도 아무도 항의하지 못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를 보면 조선 후기의 양반들이 일반 서민들을 어떻게 대하며 살았는지 여실히 드러난다(97~99쪽 참조). 다블뤼 주교는 선교활동 초기에 조선 민중들을 악덕과 결점을 지니고 아이들을 지나치게 때리는 사람들로 그리지만 15년이 지나고 나선 가족을 소중히 하고 솔직하며 순종적이며 자기 문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로 그린다. 이 또한 조선 민중의 일상을 재구성할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이승만 독재에 저항한 노기남 대주교의 차량에 환호성을 지른 시민들의 이야기는 당시 서울 시내의 한 풍경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1960년대 후반 “심도직물 사건”은 당시 정부와 경찰의 노동자 탄압과 여론 조작, 그리고 가톨릭노동청년회의 활약상을 그리고 있는데, 이를 통해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실감할 수 있다. 이렇듯 교회사 또한 한국 근현대사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으며, 교회사를 이해하기 위해선 한국 근현대사라는 조건을 빠뜨릴 수 없다는 점을 암시한다.
이 책은 기쁨과 희망의 여정 속의 한국 천주교회를 그리면서도, 고난과 아픔, 슬픔과 고뇌 속의 교회를 그리는 데에 인색하지 않는다. 한국 천주교회가 교회 보존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며 정교분리의 원칙을 고수하다 한국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한국 사회의 일원이 되어 역사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유감없이 그려냄으로써 한국 천주교회와 한국 사회의 지평을 확대하고 교회가 나아갈 길을 합리적이고 효과적으로 모색한다. 그렇기 때문에 천주교인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에게도 필독서로 자리매김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세계사를 통틀어 한국 천주교회만큼 독특한 역사를 가진 신앙 공동체는 찾아보기 힘들다. 외부의 선교 활동 없이 자발적으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과 10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행된 가혹한 박해를 이겨내고 신앙을 이어온 것만 보더라도 세계사적으로 거의 유일무이한 신앙 공동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또한 한국 천주교회는 조선 후기부터 일제 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근현대 한국사를 관통하는 굵직한 사건들의 중심에 있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더해지고 있다. 따라서 천주교회와 교회사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극복하고 새롭게 해석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한국 천주교회는 억압과 차별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조선 후기의 종교운동으로 비쳐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문화와 전통을 무시하고 외세를 끌어들이는 “매국노”로 비쳐지기도 했으며, 일본 제국주의와 독재 권력의 편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독립 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중심에 있기도 했다.
저자는 한국 천주교회사를 이해하려면 “시간”이란 조건을 고려하여 현재 우리의 관점을 벗어나 당시의 관점을 이해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역설한다. 대표적인 예가 “황사영 백서 사건”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민족사적 관점으로는 외세를 끌어들여 민족을 패망의 위기에 빠뜨리려는 “배신자”나 “매국노”로 이해될 수밖에 없지만, 당시 천주교도의 입장에서는 극심한 박해 속에서 자신의 생명은 물론이고 교회를 건지려는 자구책으로 이해될 수 있는 사건인 것이다. 흡사 지금 군부 쿠데타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미얀마 민중이 외국의 연대 세력예 호소하는 것과 같은 상황인 것이다.
한편 저자는 교회라는 내재적 관점과 논리로 한국 천주교회사를 볼 것을 제안한다. 한국 천주교회는 노기남 대주교를 위시하여 일제 제국주의에 협조적이었으며, 해방 이후 독재 정권의 편에 섰다는 비난을 들었다. 그러나 가혹한 박해와 탄압으로 언제든지 교회가 무너질 수 있다는 경험과 교회를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보호해야 한다는 자구책이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이 없이는 조선 후기의 차별이 없고 평등한 신앙 공동체를 이해할 수 없고, 안중근을 비롯한 독립 운동을 이해할 수 없고, 친일파라 비난 받았던 노기남 대주교가 안중근 서거 37주년 연미사를 거행한 것이나 이승만에 대한 반독재 운동을 한 것을 이해할 수 없으며, 그 이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교회가 박정희와 전두환 독재 정권에 저항한 사실을 이해할 수 없고, 탄압 받던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 들과 연대해온 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
또한 이 책은 한국 천주교회사를 한 시간의 단면이나 한 사건으로만 파악할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기쁨과 희망”을 위해 길고 긴 발걸음을 내딛는 과정으로 이해하자고 제안한다.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회가 세상으로 들어가기를 원했듯이, 한국 천주교회 또한 정교분리의 원칙을 벗어나 좀 더 세상 속으로 들어가 사회의 고민을 품고 약자를 보호하고 연대하며 한국의 역사를 이끄는 한 축으로 정립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지난 날의 십자군전쟁, 종교재판, 나치 학살의 잘못을 고백한 것처럼, 한국 교회 또한 그동안의 과오를 고백하고 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1901년에 벌어진 제주도의 “신축교안”이다. 제주교구와 제주도민은 백여 년 전에 일어난 비극을 잊지 않고 지금까지 화해하고 치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사를 통해서 재구성되는 한국 근현대 일상사
이 책이 가지는 뜻밖의 재미는 한국 천주교회사를 통해서 조선 후기부터 지금까지 일반 민중들의 일상사를 엿볼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이를테면 조선 후기의 다블뤼 주교는 양반 행세를 하는 등 양반 문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정부의 검문을 피해 다녔는데, 그가 작성한 편지를 보면 주막을 이용할 때에 사람들을 쫓아내고 방을 독차지해도 아무도 항의하지 못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를 보면 조선 후기의 양반들이 일반 서민들을 어떻게 대하며 살았는지 여실히 드러난다(97~99쪽 참조). 다블뤼 주교는 선교활동 초기에 조선 민중들을 악덕과 결점을 지니고 아이들을 지나치게 때리는 사람들로 그리지만 15년이 지나고 나선 가족을 소중히 하고 솔직하며 순종적이며 자기 문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로 그린다. 이 또한 조선 민중의 일상을 재구성할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이승만 독재에 저항한 노기남 대주교의 차량에 환호성을 지른 시민들의 이야기는 당시 서울 시내의 한 풍경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1960년대 후반 “심도직물 사건”은 당시 정부와 경찰의 노동자 탄압과 여론 조작, 그리고 가톨릭노동청년회의 활약상을 그리고 있는데, 이를 통해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실감할 수 있다. 이렇듯 교회사 또한 한국 근현대사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으며, 교회사를 이해하기 위해선 한국 근현대사라는 조건을 빠뜨릴 수 없다는 점을 암시한다.
이 책은 기쁨과 희망의 여정 속의 한국 천주교회를 그리면서도, 고난과 아픔, 슬픔과 고뇌 속의 교회를 그리는 데에 인색하지 않는다. 한국 천주교회가 교회 보존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며 정교분리의 원칙을 고수하다 한국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한국 사회의 일원이 되어 역사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유감없이 그려냄으로써 한국 천주교회와 한국 사회의 지평을 확대하고 교회가 나아갈 길을 합리적이고 효과적으로 모색한다. 그렇기 때문에 천주교인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에게도 필독서로 자리매김될 것이다.
'48.카톨릭-천주교 (독서>책소개) > 4.한국천주교회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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