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불교의 이해 (책소개)/5.불교교리철학

조선불교유신론 (2015)

동방박사님 2024. 6. 30.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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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조선불교유신론'(1913년 불교서관)은 만해 한용운의 저작으로, 당시 조선 불교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개혁방안을 체계적으로 제시하여 조선불교의 근대화를 추진했던 책이다.

Ⅰ장은 '조선불교유신론'의 해제이다. 역자는 저자 한용운의 생애와 저술 당시의 시대적 상항에 대해 자세히 고찰했다. 또 『조선불교유신론』의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만해 사상의 근간이 된 량치차오(梁啓超)와 사회진화론에 대해서도 살폈다.

Ⅱ장은 '조선불교유신론' 을 번역한 부분인데, 한용운은 조선불교 개혁을 토로하고, 불교는 미신이 아니라 고금동서의 모든 철학을 종합·포섭하고 있는 위대한 사상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불교의 이상(理想)은 평등주의 내지는 구세주의(救世主義)에 있는 것으로 이는 서양의 자유주의와도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다고 역설했다.

인류 문명이 발전해 갈수록 불교가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불교의 근대화를 위해서는 미신적인 요소가 있는 탱화와 번잡한 의식들을 버려야 하고, 승려도 체계적 교육을 받아야 하며, 결혼 생활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사원의 주지 선출 문제, 교단 조직과 체계를 정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Ⅲ장은 ['조선불교유신론' 의 번역과 그 연구(부제: 만해학(萬海學)의 ‘빛과 그림자’)]이다. 여기서 역자는 '조선불교유신론' 의 새번역의 필요성과 이 책에 대한 평가를 비롯해 만해의 일본행이 만해 사상에 끼친 영향력을 분석했다. 부록에는 '조선불교유신론' 의 영인본이 실렸다.

목차

Ⅰ장. 『조선불교유신론』 해제

1. 저자 한용운(韓龍雲)에 대하여…………………………………………… 9
2. 저술의 시대 상황적 배경: 전통과 근대의 갈림길……………………… 12
3. 『조선불교유신론』의 내용…………………………………………………… 14
4. 만해의 사상적 배경: 량치차오(梁啓超)와 사회진화론……………… 17

Ⅱ장.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역주(譯註)

1. 서(序)… …………………………………………………………………………… 21
2. 서론(緖論)……………………………………………………………………………… 23
3. 불교의 성질을 논함(論佛敎之性質)……………………………………… 29
4. 불교의 주의(主義)를 논함(論佛敎之主義)……………………………… 55
5. 불교의 유신(維新)은 먼저 파괴부터 해야 함을 논함
(論佛敎之維新宜先破壞)…………………………………………………… 64
6. 승려의 교육을 논함(論僧侶之敎育)……………………………………… 68
7. 참선을 논함(論參禪)…………………………………………………………… 84
8. 염불당 폐지를 논함(論廢念佛堂)………………………………………… 95
9. 포교를 논함(論布敎)… ……………………………………………………… 106
10. 사원의 위치를 논함(論寺院位置)… …………………………………… 120
11. 불가(佛家)에서 숭배하는 소회(塑繪)를 논함(論佛家崇拜之塑繪)…… 143
12. 불가(佛家)의 각종 의식을 논함(論佛家之各種儀式)………………… 161
13. 승려의 인권회복은 반드시 생산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임을 논함
(論僧侶之克復人權必自生利始)… ……………………………………… 169
14. 불교의 앞날이 승니(僧尼)의 결혼여부와 관련됨을 논함
(論佛敎之前途가 關於僧尼嫁娶與否者)……………………………………… 182
15. 사원 주직(住職)의 선거법을 논함(論寺院住職選擧法)………… 206
16. 승려의 단결을 논함(論僧侶之團體)… ………………………………… 212
17. 사원의 통할을 논함(論寺院統轄)… …………………………………… 232
18. 결론(結論)… ……………………………………………………………… 238

Ⅲ장. 『조선불교유신론』의 번역과 그 연구
- 만해학(萬海學)의 ‘빛과 그림자’ -

1. 『조선불교유신론』 새 번역의 필요성… ………………………………… 245
2. 『조선불교유신론』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 248
3. 만해의 일본행과 『조선불교유신론』의 관계…………………………… 251
4. 본 번역본에 대하여…………………………………………………………… 259

『조선불교유신론』 영인본 / 별면

저자 소개

저 : 한용운 (韓龍雲, 만해, 한유천)
승려·시인·독립운동가.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에서 몰락한 양반 출신의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정옥(貞玉), 아명은 유천이며, 용운은 법명, 호적상이름이자 본명은 한정옥이다. 6세 향리의 사숙에서 한문을 배웠고, 9세 『서상기西廂記』를 독파하고, 『통감』『서경』 등을 통달하여 총명한 어린이라는 말을 들었다. 당시 풍습이 그러함에 따라 14세 향리에서 천안 전씨全氏 전정숙과 일찍 혼인하였으...

출판사 리뷰

『조선불교유신론』(1913년 불교서관)은 만해 한용운의 저작으로, 당시 조선 불교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개혁방안을 체계적으로 제시하여 조선불교의 근대화를 추진했던 책이다. 이번에 최경순씨가 새롭게 번역한 이 책은 기존의 번역들을 월등히 뛰어넘는 책이다.

Ⅰ장은 『조선불교유신론』의 해제이다. 역자는 저자 한용운의 생애와 저술 당시의 시대적 상항에 대해 자세히 고찰했다. 또 『조선불교유신론』의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만해 사상의 근간이 된 량치차오(梁啓超)와 사회진화론에 대해서도 살폈다.

Ⅱ장은 '조선불교유신론' 을 번역한 부분인데, 한용운은 조선불교 개혁을 토로하고, 불교는 미신이 아니라 고금동서의 모든 철학을 종합·포섭하고 있는 위대한 사상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불교의 이상(理想)은 평등주의 내지는 구세주의(救世主義)에 있는 것으로 이는 서양의 자유주의와도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다고 역설했다. 인류 문명이 발전해 갈수록 불교가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불교의 근대화를 위해서는 미신적인 요소가 있는 탱화와 번잡한 의식들을 버려야 하고, 승려도 체계적 교육을 받아야 하며, 결혼 생활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사원의 주지 선출 문제, 교단 조직과 체계를 정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Ⅲ장은 ['조선불교유신론' 의 번역과 그 연구(부제: 만해학(萬海學)의 ‘빛과 그림자’)]이다. 여기서 역자는 '조선불교유신론' 의 새번역의 필요성과 이 책에 대한 평가를 비롯해 만해의 일본행이 만해 사상에 끼친 영향력을 분석했다.
부록에는 '조선불교유신론' 의 영인본이 실렸다.

조선의 승려, 조선 불교의 근대화를 꿈꾸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한국인들의 애송시 [님의 침묵]의 첫 구절이다. 만해 한용운은 조선이 식민지 하에 있던 1926년 당시, 민족 독립에 대한 희망을 ‘님의 침묵’이라는 시로 형상화했다. 이 시는 그 후 지금까지 수많은 이들에게 낭송되고 있다.

한용운은 1896년, 18세의 나이로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입산해 승려가 되었다. 오세암에서 그는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고 선(禪)을 닦았다. 이후 세상사에 대한 관심으로 블라디보스토크 등 시베리아와 만주 지역을 여행하기도 했다.

그 후 1905년에 재입산하여 설악산 백담사(百潭寺)에서 연곡(連谷)을 은사로 정식으로 득도(得度)했다. 1908년에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서 공부하다 마침 금강산에 방문한 일본 불교 조동종(曹洞宗) 관계자들의 후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5월부터 약 6개월간 조동종대학(曹洞宗大?, 현재의 고마자와대학[駒澤大?])에 입학하여 불교와 서양철학 등을 배우며 새로운 문물을 익혔고, 조선인 일본유학생들과도 교류했다.

만해가 이 책을 저술하게 된 동기는 약 6개월간 일본 불교계를 견문했던 경험에 있다. 이 시기에 일본 불교는 이미 매우 발전해 있었다. 당시 일본에는 불교대학, 불교유치원, 포교당, 복지시설, 출판사 등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마련된 다양한 시설들이 있었다. 만해는 이런 발전상을 보면서 조선의 열악한 불교 현실을 떠올렸던 것으로 보인다. 또 일본에서는 각종 현안에 대하여 근대화의 주장이 풍미하고 있었다. 만해는 일본 불교계의 이런 분위기에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이란 ‘우물’을 벗어나 세계를 여행하고 근대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일본에서의 경험을 통해 그는 조선이란 나라와 조선 불교를 좀 더 큰 틀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역자 인터뷰

1. 조선불교유신론에 대한 번역은 몇 가지가 있는데, 왜 다시 번역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기존의 번역본과 비교해서 선생님 번역본이 갖는 장점은 무엇인가요?

《조선불교유신론》의 한글번역은 1972년 서경수 편역이 나온 이래, 1983년 이원섭 번역(2007년 개정판), 1991년 정해렴 편역, 2014년 조명제 번역 등이 간행되었습니다. 기존 번역본에서 문제점을 느끼고 새번역을 시도하면서 가장 의식했던 것은 불교학자이자 시인으로 저명한 이원섭(1925~2007) 선생의 번역본입니다. 여러 번역본 가운데 굳이 이원섭 번역본을 거론하는 이유는 《조선불교유신론》 번역의 기본 틀을 제시한 작업으로 그 이후 번역본들에서 나타나는 장점과 단점을 모두 지닌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원섭 번역본은 불교학자이자 시인이라는 저자의 이력에 걸맞게 불교 관련 부분이나 만해가 인용하고 있는 고전의 한시(漢詩) 번역에 뛰어납니다. 하지만 그러한 장점이 무색하리만큼 만해가 사용한 불교용어나 인용하고 있는 고전 혹은 근대 중국과 일본 서적 등의 출처를 밝히지 않거나, 밝힌 것 가운데서도 종종 오류가 보입니다. 기존 번역본 가운데 가장 훌륭한 편이라 할 만큼, 그에 비례해 아쉬운 부분이 두드러지는 셈입니다. 제가 단점을 지적하기는 했지만, 이원섭 번역본이 없었다면 아마도 《조선불교유신론》은 여전히 암호문과 다를 바 없이 읽히지 않는 책으로 방치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조선불교유신론》의 번역사에서 이원섭 번역본의 성과와 한계를 정확하게 평가하는 것이야말로 이원섭 선생의 노고에 대한 가장 여법한 회향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 번역본의 장점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번역투의 일관성 : 《조선불교유신론》의 원문은 한글 토나 조사만 한글이고, 그 한글의 문투도 ‘~하니라’, ‘~하랴’, ‘~하나니’ 등 옛 말투로 되어 있습니다. 이원섭 번역본은 원문의 한자 부분을 비교적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한 반면, 한글의 문투는 현대어법과 원문의 옛 말투를 살린 대목이 섞여 있어 일관성이 부족합니다.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말처럼 번역에서 직역과 의역의 선택은 늘 고민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번역을 잘 한다 해도 원문의 의미를 고스란히 전달하기 힘든 부분이 어김없이 나타나 번역자를 괴롭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번역본에서는 원문의 의미를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옛 말투를 현대의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한글 문장으로 옮겼습니다.

둘째, 원문의 인명과 지명 확인 : 이원섭 번역본은 《조선불교유신론》의 원문에 자주 등장하는 서양철학자의 인명이나 지명 등을 명확히 밝히지 않은 채 애매한 부분은 두루뭉술하게 넘어간 대목이 많습니다. 근현대 중국에서는 외국어를 표기할 때 그 외국어의 발음과 비슷한 소리가 나는 한자를 빌어 표기했습니다. 이런 방식을 음차(音借)라고 하는데, 예를 들면 독일의 철학자 칸트(Kant)는 ‘康德’, 프랑스의 정치가 나폴레옹(Napoleon)은 ‘拿破侖’ 등으로 적는 것입니다. 이 한자 이름에서 원래 서양인명을 역추적하는 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1910년대 당시의 표기와 현대 중국어의 표기가 달라진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만해가 본문에서 언급한 서양인의 인명이나 지명은 대개 중국 근현대 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의 글에서 인용한 것인데, 인용과정에서 누락된 것인지 량치차오의 문장과 다르게 표기되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조선불교유신론》 원문에 사용된 한자식 서양인명과 지명의 원어표기를 찾아내는 작업은 먼저 량치차오의 문장을 비롯해 중국에서 나온 각종 외국인명사전과 지명사전 등 각종 공구서를 세밀하게 조사해 대조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제 번역본에서는 그와 같은 작업을 통해 《조선불교유신론》 본문에 사용된 서양인명과 지명의 원어를 밝히는 한편, 이원섭 번역본에서 잘못 설명하고 있는 부분을 바로잡았습니다.

셋째, 원문의 출처에 대한 확인 : 이원섭 번역본의 큰 문제점 중 또 하나는 《조선불교유신론》 본문 가운데서 만해가 인용하고 있는 문장의 출처를 제대로 밝히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만해의 문장은 문체나 서술 스타일, 용어 등 상당수가 량치차오의 글에서 인용한 대목이 많습니다. 앞에서 지적한 서양인명과 지명의 문제도 이와 연관이 있는 셈으로, 《조선불교유신론》 본문에서 서양철학자를 언급하고 있는 부분은 거의 량치차오의 문장에서 가져온 사실만 보더라도 만해 문장의 주요 출처가 량치차오의 글이라는 점은 명백합니다.

그런데도 이원섭 번역본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제 번역본은 기존 번역본과 달리 《조선불교유신론》 본문의 단순한 해석을 넘어, 만해가 본문에서 인용하고 있는 문장의 출처를 가능한 찾아 밝히고, 인용문과 원문 간의 변형 등에 대한 텍스트 비판에 역점을 두었습니다.

2. 만해의 《조선불교유신론》을 번역하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선생님 공부의 궤적 속에서 만해 사상과 그가 쓴 《조선불교유신론》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1] 번역의 계기

저는 연세대학교 철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에서 일본 근현대 불교사상사 특히 일본불교계의 조선 유입과 그에 대응한 조선불교계/조선총독부의 동향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2013년 1학기 대학원에 개설된 [불교철학특강] 수업에서 조선시대 불교철학사의 흐름을 다루는 가운데, 만해의 《조선불교유신론》 원문 일부를 강독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이 수업을 통해 처음으로 만해의 《조선불교유신론》 원문을 비록 일부나마 정밀하게 읽어본 셈인데, 국한문혼용체의 문장을 수월하게 이해하기란 결코 만만치가 않았기 때문에, 기존에 나온 번역본을 많이 참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기존 번역본을 보면서 수업 내내 마음 한 구석에 찜찜한 느낌이 남았고, 수업이 끝난 후에도 그 느낌을 떨쳐내기 힘들어 한동안 고민에 빠졌습니다. 저를 괴롭힌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선사(禪師), 독립운동가, 불교개혁가, 시인, 작가 등 다양한 면모를 지닌 만해인지라, 그에 대한 연구는 약간의 과장을 보태면 이미 한우충동(汗牛充棟)이란 말이 무색할 만큼 많은 성과가 축적되어 있었고, 만해의 《조선불교유신론》에 관한 연구만 해도 논문과 단행본 합쳐 약 200여건에 이른다. 만해를 논하는 이들은 어김없이 《조선불교유신론》을 인용하는데, 이처럼 빈번하게 인용된 《조선불교유신론》은 과연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이었을까?

만해학의 근간을 이루는 기본텍스트인 《조선불교유신론》은 1910년 집필, 1913년 간행되어 이미 ‘출판 100주년’을 넘겼다. '조선불교유신론'은 국한문혼용체로 한글 토나 조사를 빼면 순한문체나 다름없고, 이미 전통한문이 원활한 의사소통수단의 기능을 상실한 시대에 국한문혼용체 문장을 읽자면 외국어로 된 문장을 독해할 때와 같은 긴장감이 따른다. 긴장감의 정도는 연구자든 일반 독자든 그다지 차이가 없기에 누구나 쉽고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한글번역본이 필요하다.

《조선불교유신론》의 한글번역은 1972년 서경수 편역이 나온 이래, 1983년 이원섭 번역(2007년 개정판), 1991년 정해렴 편역 등이 간행되었다(2013년 현재). 그 밖에도 만해의 시나 문장을 묶어 편집한 형태로 발간된 것까지 포함하면 번역본이 적지 않다고 하겠지만, 출판 100주년을 지난 현재까지 시중에서 구해볼 수 있는 몇몇 《조선불교유신론》 번역본은 ‘편역’이란 이름으로 이원섭 역본을 그대로 옮겨 싣거나, 이원섭 역본의 오류마저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007년에 나온 이원섭 개정판도 여전히 기존 번역본(1983)의 불명확한 대목이나 오류를 반복한 채 세로쓰기를 가로쓰기로 바꾼 정도에 그쳤다.

이처럼 《조선불교유신론》의 믿을만한 한글번역본이 제대로 없는 상황에서 만해를 운운하고 《조선불교유신론》을 운운하는 것은 만해에게 죄송할뿐더러 만해학 연구의 허약한 토대를 여실하게 드러내는 사례가 아닐까?”

근현대 한국불교를 공부하는 이들 가운데 누군가 제대로 된 번역본을 다시 냈으면 좋겠단 생각만 하다가, ‘기왕 손을 댄 김에 그간 소홀했던 한국불교사, 나아가 만해를 다시 만나보자’는 심정으로 설익은 공부를 무릅쓰고 《조선불교유신론》의 새번역에 착수했습니다.

2] 저의 공부와 만해 사상의 의미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일본 근현대 불교사상사 특히 일본불교계의 조선 유입과 그에 대응한 조선불교계/조선총독부의 동향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조선불교유신론》의 번역을 위해 기존 연구사를 검토하다보니, 만해는 승려인 동시에 독립운동가로서의 이미지가 강한 나머지, 그와 일본의 관계는 오로지 ‘항일’로만 일관된 것처럼 서사구조가 고착된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만해를 둘러싼 시대적 상황, 사상적 영향은 물론, 《조선불교유신론》의 저술 배경과도 직결되는 일본 불교계와의 관계는 결코 ‘항일’이라는 키워드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만해는 1908년 4월 금강산 유점사에서 공부하다 마침 일본 불교의 종파인 조동종(曹洞宗)의 불교사절이 금강산에 방문한 것을 계기로 일본에 건너가게 됩니다. 이때의 사정은 만해의 회고인 '나는 왜 승(僧)이 되었나'에 나타나 있는데, 만해가 일본행에서 관심을 가졌던 것은 문명의 중심처로서의 일본의 현실이었습니다. 일본에 건너간 그는 조동종의 간부 승려의 후원을 받아 조동종대학(曹洞宗大?, 훗날의 고마자와대학[駒澤大?])에 입학했고, 불교와 서양철학 등을 배우며 일본의 각처를 순방하고, 조선인 일본유학생과도 교류했습니다. 만해가 일본에 건너간 시기, 일본 불교계에서는 기존 전통불교 종단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한편 불교계의 각종 현안에서 근대화의 주장이 풍미하고 있었으니, 이 시기 그가 일본에서 보고 느낀 것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아마도 불교의 대중화일 것입니다. 불교대학, 유치원, 포교당, 복지시설, 출판사 등 불교의 대중화를 위한 다양한 시설을 보면서 만해는 조선의 열악한 불교 현실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따라서 그가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 후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하면서 불교근대화의 모델로 일본불교를 상정했으리라는 추정은 무리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고려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당시 일본불교계의 중심교단이 시행했던 근대화 조치 가운데 내재된 구조적 모순이 엄존하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일본 불교의 근대화를 전향적으로 평가하거나, 정토진종과 같은 중심교단 내에서 자행되던 부락사원에 대한 차별 구조적 행태나 재정적 타락상 등 빈번한 추문사건 등의 사회문제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해의 눈에 비친 일본 불교가 근대화의 모델이었다면, 근대화의 이면에서 사회문제로 잔존했던 일본 불교계의 모순적 상황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의 시야를 벗어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상의 문제들을 고려해 볼 때, 만해와 그의 《조선불교유신론》은 제 연구 주제의 일부라 할 근현대 일본불교가 조선불교에 끼친 긍정적 혹은 부정적 영향을 설명하기 위한 사례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3. 《조선불교유신론》을 읽다보면 조선불교를 개혁하고자 한 만해의 마음이 매우 절박해 보입니다. 序에서는 당시 상황에 대한 만해의 절망적 인식도 엿보입니다. 번역하시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구절이나 주장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학술의 유신을 외치는 이가 있고, 정치의 유신을 외치는 이가 있고, 종교의 유신을 외치는 이가 있고, 그 밖에도 유신, 유신 외치는 소리가 온 세상에 가득해 이미 유신을 했거나 지금 유신을 하고 있거나 앞으로 유신을 하려는 이들이 셀 수 없이 잇따르고 있는데... 조선 불교만은 고요히 아무 소리가 없으니, 모를 일이다. 이것은 과연 무슨 징조일까. 조선 불교는 정말 유신할 것이 없어서인가, 아니면 유신할 만한 것이 못 되는 것인가.” ('서론(序論)' 중에서)

“마음이 육체의 지배를 받는 노예는 물질의 노예요 학리(學理)의 노예는 정신적 노예니, 물질의 노예는 일시적 노예지만 정신적 노예는 영원한 노예다. 사람이 무슨 마음으로 영원한 노예가 되기를 즐거워하겠는가. 배우는 사람은 책을 대할 때 글의 깊고 얕음(深淺)과 아름답고 추함(美惡)을 논하지 않고, 마땅히 내 지혜로 하나하나 검토해, 내 마음에 맞지 않으면 그것이 위대한 성인이나 큰 철인(哲人)의 이론이라 해도 헌신짝처럼 버려야 하고, 내 마음에 맞으면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이나 매우 보잘 것 없는 사람의 말이라도 진기한 꽃을 보듯 감상하며, 자주 달리 연구하여 진리에 합치하도록 힘써, 만일 그것이 진리에 합치하면 철칙(鐵則)을 만들어 천고(千古)의 진리라도 뒤집어 자립하며, 일세(一世)를 거슬러도 마음에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상의 자유는 사람의 생명이며 학문의 중요한 기틀이다.“ ('승려의 교육을 논함(論僧侶之敎育)' 중에서)

만해를 ‘신격화’ 하거나 ‘항일투사’의 이미지를 덧씌우지 않고, 《조선불교유신론》 내용을 오늘날의 학문적 연구방법론으로 분석해 그 정당한 평가를 정립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작업입니다. 만해가 외친 ‘조선불교유신’이 19세기 서구 유럽사상을 수용한 메이지 사상계의 ‘문명론’, 그 사상의 영향을 받은 량치차오의 《음빙실문집》, 그리고 일본불교계의 근대화 추진노선 등을 수용하는 가운데 드러난 시대적 한계 역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입니다.

그러나 만해의 문제의식 가운데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하는 대목이 적지 않습니다. 또 100여 년 전 만해가 바라보았던 조선불교계의 현실과 오늘날 한국불교계의 현실이 묘하게 겹치는 부분도 여러 대목 눈에 띕니다. 일일이 거론할 수는 없지만, 우선 위에서 예로 든 대목만 하더라도 만해가 단순한 승려가 아니라 시대의 변화를 뛰어넘어, 또 불교라는 울타리를 뛰어넘어, 사상가로서 충분히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 인물임을 확인할 수 있는 구절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