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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일천만 동포와 생사를 같이 하겠소 (2021) - 민족의 영원한 스승, 고당 조만식 전기

동방박사님 2024. 7. 30.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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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2010년 古堂 순국 60주기를 맞아 발간된 조만식 선생의 전기. 고당은 오산학교 교사와 교장으로 민족교육에 앞장 섰고, ·1운동이 이 땅을 휩쓴 직후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1년간 옥살이를 했다.그 뒤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여 국산품 애용운동을 펼치는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다. 또한 〈조선일보〉 사장을 맡아 민족 언론의 기틀을 닦기도 했다. 이 책은 평생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둔 민족주의자로서, 조국 독립과 자유민주주의를 향한 일관된 삶을 살았던 고당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기회가 될 것이다.

목차

발간사

제1장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합니다.”

1, 역사의 격동기
2, 날파람 명수(名手)
3, 첫 결혼의 슬픔과 장사꾼의 길
4, “내일부터는 조만식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제2장 만학(晩學)에서 유학(留學)까지

1, 사랑을 실천하던 청년
2, 숭실학교의 아버지 중학생들
3, 현해탄을 건너다
4, ‘국치(國恥)의 날’에 치민 비분
5, 도쿄에 세운 조선인 장ㆍ감 연합교회
6, 열혈 구국(救國) 투쟁 삼총사
7, 2 ㆍ8 독립선언의 불씨

제3장 독립운동의 전초기지 오산학교

1, 33세의 젊은 교장 선생님
2, 잡역부 몫까지 몸소 떠맡다
3, 평생 기지개를 켜지 않는 목사님
4, “사람을 사랑하고 겨레를 사랑하라!”

제4장 만세의 함성이 강산을 뒤흔들다

1, 독립선언식이 된 고종황제 망곡식(望哭式)
2, 선교사 기자 마포삼열(馬布三悅)
3, 숨겨진 카드였던 고당
4, 모락장 폭동사건의 진실
5, 실패로 돌아간 중국 망명
6, “너희들의 은전(恩典)은 사양하겠다!”
7, 이색적인 일본인 변호사

제5장 민족교육은 진정한 애국이다

1, 조선교육령 파문
2, “고당은 벽창호야!”
3, 그 스승에 그 제자들
4, 고당의 꾀
5, 순수 민족교육기관, 숭인상업학교

제6장 ‘내 살림 내 것으로!’ 조선물산장려회

1, 조선의 간디
2, 말총모자의 사연
3, 고아가 세운 고아원
4, 백선행기념관과 인정도서관
5, YMCA운동
6, ‘변사(辯士) 주의!’가 ‘변사 중지!’로 바뀌다

제7장 민족 언론의 기틀을 닦다

1, 조선일보사 사장으로 취임
2, ‘濟濟多士’(제제다사)에 ‘其仁爲寶’(기인위보)
3, 신간회 운동의 좌절
4, 만보산사건의 이면

제8장 일제의 마지막 발악에 바위처럼 버티다

1, 도산의 장례위원장을 맡다
2, 콩가루 볶은 차가 커피?
3, 일제 기관지가 쓴 날조 기사
4, 선대(先代)의 고향에서 해방을 맞다

제9장 해방된 나라를 두 동강 낸 ‘붉은 군대’

1, 너무나 짧았던 감격의 열흘
2, 평남 건준(建準) 위원장에 오르다
3, 아무도 짐작 못한 남북 분단
4, 38선에 철의 장막 친 소련군

제10장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불쌍한 인간 군상

1, 소련군은 해방군인가? 점령군인가?
2, 사사건건 충돌한 민족진영과 공산진영
3, 표리부동한 소련군의 실체
4, ‘붉은 지폐’ 남발한 소련군사령부
5, 현준혁 암살사건

제11장 공산당과의 외로운 투쟁

1, 김일성의 속셈
2, 소련 훈장을 달고 나타난 청년 장교
3, 부모는 기독교 신자였다는데.......
4, 조선민주당에 환호한 북한주민들
5, 러시를 이룬 정당 창당
6, 김일성, 권력의 중심에 서다
7, 이승만, 고당에게 밀사를 파견하다
8, 모스크바에서 결정된 신탁통치
9, 죽음 각오한 고당의 반탁 의지
10,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다!”
11, 장남에게 건네준 세 통의 편지

제12장 영원히 지킨 북녘 땅, 북녘 동포

1, “북한 일천만 동포와 생사를 같이 하겠소!”
2, 남북 협상길 떠난 백범 김구
3,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4, 이름마저 감추고 산 가족들의 남한 생활
5, “고당이 있었으면.........”

부록
-각계 인사들의 추모 글모음
-연표

출판사 리뷰

소련군에 맞선 古堂

조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되자마자 북녘 땅으로 밀려 내려와 점령군 행세를 했던 소련군. 그들은 “신탁통치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조선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추대하겠다.”고 사탕발림을 했지만 古堂은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결정한다!”면서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설득을 포기한 소련군과 김일성 패거리는 古堂을 평양 고려호텔에 불법 감금하고 만다. 1946년 1월 5일의 일이었다.

이후 선생을 구해내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다. 남쪽에서 비밀리에 올라간 동지들에 의한 모험적인 구출작전이 계획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古堂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고 한다.“내 일신은 염려들 마라. 나는 죽으나 사나 평양을 떠날 수 없다. 나만 먼저 살겠다고 나를 믿고 있는 이북의 동포들을 버릴 수야 있겠느냐? 나는 서울로 올라가지 않겠다. 거기도 내 나라, 여기도 내 나라니까 거기나 여기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갖고 열심히 일해서 살아가도록 하라.”1947년 여름, 미소공동위원회 미국대표였던 브라운(Albert E. Brown) 소장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브라운이 남행 의사를 타진했지만 북한 동포와 함께 하겠다는 고당의 굳은 결의는 요지부동이었다.

뒤늦게야 밝혀진 古堂의 최후

나라의 큰 별, 민족의 영원한 스승 고당 조만식. 선생은 누구 하나 지켜보지 않는 암흑 속에서 1950년 10월 18일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났다. 나중에 와서야 밝혀진 사실이지만, 6·25전쟁을 일으킨 북한의 공산도배들이 평양으로 진격하는 국군과 유엔군에 쫓기면서 마지막 발악으로 선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타계하신 날짜가 10월 15일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북한에서 당·정 고위직을 지내다 숙청돼 소련 등 해외로 탈출·망명한 인사들의 증언이 나오면서 진상이 속속 드러났다. 가령 1959년 소련으로 망명한 박길용(朴吉龍)의 증언은 이랬다. 그는 동독 및 체코 주재 북한대사, 외무성 부상(副相) 등을 지낸 인물이다.

6·25전쟁이 나고 석 달이 조금 지난 50년 10월 초순쯤 나는 당시 조·소문화협회 부위원장을 맡으면서 김일성 수상의 소련어 통역을 거의 전담했었다.

〈노동신문〉 주필인 친구 기석복(奇石福, 56년 문화성 부상, 숙청되어 소련에서 사망)과 함께 전쟁 상황 등을 듣기 위해 ‘소련파’(=소련군정을 돕기 위해 입북했던 재소 고려인사들)의 총수였던 노동당 제1서기 허가이(許哥而, 51년 부수상, 53년 숙청되어 평양에서 사망)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그곳에는 민족보위상 최용건(72년 국가부주석, 76년 사망)과 노동당 중앙위 정치위원들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한 정치위원이 허에게 “불가피하게 평양을 비워놓고 후퇴할 경우 평양 형무소 등에 있는 조만식 등 수백 명의 반동분자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허는 즉석에서 “이미 지시가 내려졌는데 명령을 못 받았는가? 후퇴하면서 반동분자들을 끌고 갈 수 없어 그들의 목을 모두 따버리라는 지시가 내려갔다.”고 답변했다.

나는 전쟁 전 박헌영 계열로 남한에서 지하공작 책임자로 활동하다 검거된 남노당 중앙위원 김상룡과 이주하를 고당과 교환하는 문제가 남북한 간에 제기됐으나 타결되지 못한 채 전쟁이 터진 것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평북 강계로 후퇴한 후 지도부에서 들어보니 인민군이 평양을 후퇴하던 10월 18일 밤 평양형무소에서 5백여 명을 총살, 이들 중 조만식 등 일부 시신은 대동강변에 웅덩이를 파 가매장하고 나머지는 그대로 방치해둔 채 후퇴했다는 것이다.(1991년 7월 19일자 〈중앙일보〉)

순국 60주기 맞아 새로운 傳記 간행

금년 10월 18일이면 古堂 순국 60주기를 맞는다. 이를 계기로 민족사에 깊이 각인된 선생의 발자취를 다시 한 번 더듬어 보는 일대기를 간행한다. 선각자의 길을 걸으셨던 선생의 생애와 업적에 견주어 볼 때, 우리의 연구와 기록은 너무 빈약한 형편이었다. 전기만 해도 1966년 3월 평남민보사가 펴낸 『고당 조만식』이 고작이었다. 그 후 또 하나의 『고당 조만식』이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일하다가 월남한 한근조(韓根祖) 선생에 의해 태극출판사에서 나왔고, 그 밖에는 고당사상 연구가인 홍만춘(洪萬春) 목사의 저서 등 손꼽을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 지금은 이미 절판되어 일반인들이 구해보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이 같은 여러 사정을 감안하여 평남민보사 발간『고당 조만식』을 저본(底本)으로 삼고, 고당기념사업회가 펴낸 『고당 조만식 회상록』(1995, 10월)과 오산학교 역사자료를 비롯한 여타 관련 자료들, 그리고『조선일보 사람들, 일제시대 편』(조선일보사 사료연구실 지음, 랜덤하우스), 『북한의 역사』(金學俊 지음, 서울대출판부), 『6·25와 이승만』(프란체스카 도너 리 지음, 기파랑) 등 다른 저술을 참고하여 새로운 고당 전기를 엮어낸다.

강연록 『고당 정신과 나라의 앞날』동시 간행

고당 조만식선생 기념사업회에서는 매달 한차례씩 각계 저명인사 강연회를 개최하고 있다. 지난 1986년 12월에 처음으로 시작된 이 강연회의 이름이 ‘한나라 강좌’인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남북 분단의 현실을 극복하고 언젠가는 꼭 통일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염원을 이 강좌를 통해 새삼 가슴에 새기고 있다.

지난 9월로 ‘한나라 강좌’는 햇수로 24년, 모두 230회를 넘어섰다. 아마도 이것은 순수 민간단체가 주최하는 월례 강좌로는 달리 예를 찾기 힘든 진기록이라 하겠다. 이번 강연록에는 그 동안 행해진 '한나라 강좌'에서 17편, 고당 추모식에서의 추도사 2편 등 19편을 모았다. 시기적으로는 1995년 10월로부터 2008년 10월 사이에 행해졌음을 덧붙여둔다.

각계 명사들이 회고하는 古堂

고당 선생은 민족의 사표(師表)였다. 사표라는 말 자체가 교육자임을 연상하게 하는 바 진실로 조 선생은 민족을 교육한 어른이었다. - 김병연(초대 평안남도 지사)

일제 말기는 참으로 암울한 상황이었다. 선생은 “높이 봐라, 그리고 멀리 봐라. 지금 당장은 일본의 천지가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럴수록 크게 봐라, 멀리 봐라.”라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희망을 주셨다. - 박재창(전 고당 기념사업회 부이사장)

조 선생이 ‘예’하면 북한의 정권이 온통 손 안에 들어올 수도 있었다. 그런데 조 선생은 홀로 ‘아니’했다. 이보다 더 무서운 영웅이 어디 있나? 때로는 역사가 한 사람의 한 마디에 달린다. 우리는 한 사람의 값을 알았다. - 함석헌(사상가)

집안이 어지러우면 어진 아내를 그리워하게 되고, 나라가 어지러우면 훌륭한 지도자를 그리워하게 마련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조만식 선생을 그토록 그리워하는 까닭은 나라가 하도 어지럽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 김동길(전 연세대 교수)

고당은 북한에 떨어진 한 알의 밀알이다. 북한 땅에 떨어진 고당을 비롯한 많은 애국 동지들의 밀알들은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 많은 열매를 맺을 때가 반드시 올 것이다. - 한경직(목사)

민족운동의 투사로서, 신앙의 의인(義人)으로서, 교육자의 사표로서, 수양인의 거울로서 고당은 위대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는 한국의 간디였다. 그는 무실역행(務實力行)의 실천자로서, 자력갱생의 기수였다. - 안병욱(전 숭실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