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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청 제국에 무엇이었나 (2024) - 1616-1911 한중 관계와 조선 모델

동방박사님 2024. 7. 31.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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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한국은 청 제국 시기 ‘정치-문화적 중화제국’의 일부였는가?
왕위안충이 던지는 새로운 질문에 대해 깊이 읽고, 토론하며
한중 관계와 한반도의 미래를 성찰하자

1894년 청일전쟁은 동아시아 세계의 오랜 중국적 질서의 와해와 근대 국가를 향한 갈림길이었다. 이듬해 청일 사이에 체결된「시모노세키」조약 1조는 “중국은 조선국의 완전무결한 독립과 자주를 확실히 인정한다.”라고 명시했다. 조선이 그동안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것인가? 비록 생존을 위해 중국에‘사대’를 했을지는 몰라도,‘중국의 일부’였다는 조약의 첫 문구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역사적으로 중국에게 한국은 무엇이었고, 한국에게 중국은 무엇이었을까?

『조선은 청 제국에 무엇이었나_1616~1911 한중 관계와 조선 모델』(원제: Remaking the Chinese Empire: Manchu-Korea Relations, 1616~1911)은 17세기 초에서 20세기 초까지 정치와 외교사를 들여다보며 청이 중화제국을 다시 만드는데 조선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핵심 개념으로‘조공’이란 용어를 대신하여 다소 생소한 ‘종번’과 그 체제를 있게 한‘조선 모델’을 제기하며, 양국이 종번이라는 밀접한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어떤 중대한 변화를 어떻게 겪었는지 밝힌다. 청과 조선의 관계사라는 미시사를 토대로 3세기 동안 이루어진 중화제국의 부상과 붕괴, 대외관계 시스템과 서양의 충돌, 동아시아에서 근대 주권 국가의 탄생 등 중국과 동아시아의 전환에 대한 거시사를 들려준다. 김종학 교수(서울대 외교학과)는 “이 책의 핵심개념인 ‘종번주의’는 한국사 내러티브에 익숙한 독자에겐 다소 불편한 것이지만, 그동안 미처 인식하지 못한 조청 관계의 중요한 일면을 깊이 생각하게 한다.”고 평가했다.

이전의 한중 관계를 다룬 논저들이 하나같이 양국 관계에 중점을 둔 것과 달리, 이 책은 양국 관계를 중요하게 다루면서도 수 세기 동안 중국과 세계의 변화와 그로 인한 주변 국가와 지역에 미친 영향을 입체적으로 다룬다는 점이 특징이다. 계승범 교수(서강대 사학과)가 “제국 질서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여유가 있고, 토론 거리가 넘치는 책”이라 평한 이유이다.

왕위안충(미국 델라웨어대 역사학과 교수)은 쑹녠선(중국 칭화대 역사학과 교수) 등과 함께 서구에서 글로벌 히스토리 방법론을 흡수하고 동아시아 역사담론의 세련된 수사를 구사하며 떠오른 역사학자이다. 이 책은 한중 관계에 관한 미국학계의 주목할 만한 최신 연구로 꼽힌다. 왕위안충이 던지는 새로운 질문‘한국은 중국에 무엇인가?’는 ‘중국은 한국에 무엇인가?’에 매몰된 우리에게 그 이면을 생각해보고 한중 관계와 한반도의 미래를 성찰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목차

한국어판 서문
들어가며

1부 위대한 황제에게 고두하기

1장 조선을 정복하다: 1616∼1643년 ‘중국’으로서 만주 정권
오랑캐, 반란, 전쟁
후금 중심의 준종번체제 구축: 후금의 새로운 위상
형에서 아버지로: 제2차 만주족 침공[병자호란]
소국을 소중히 여기기: 중국으로서 정체성을 구축한 청

2장 조선을 오랑캐로 만들다: 조선 모델과 중화제국, 1644∼1761
이중 정체성의 확립: 중국과 천조로서 청
중화제국 다시 만들기: 조선 모델의 부상
중화로 문명화하기: 조선 모델의 실천
관계 기념하기: 종번체제에서 청 황제의 역할
주변의 오랑캐화: 청나라의 제도적 종번 담론

3장 중화로 정당화하다: 청과 조선·안남·영국의 교류, 1762∼1861
중화의 역사적 기억: 조선의 반만 사고방식
북학: 청을 향한 조선인 방문객의 새로운 어조
천조의 도: 청과 1790년, 1793년 조공 사신
1840년대 반항적인 서양 오랑캐와 충성스러운 동쪽 오랑캐
공사와 사신: 1860년과 1861년 북경에 온 영국과 조선의 사절단

2부 조선 구하기

4장 조선을 정의하다: 조선의 지위에 대한 청의 묘사, 1862∼1876
중국의 속국으로서 조선: 1866년 중국과 프랑스의 갈등
자주와 독립 사이의 속국: 조선의 지위에 대한 미국의 관점, 1866~1871
중국의 정통성과 국제법 사이의 속국: 중국과 일본의 첫 논쟁
조선의 ‘주권’ 탄생: 제2차 중일 논쟁과 「강화도조약」

5장 조선을 권도하다: 조선에서 청 중국의 가부장적 역할, 1877∼1884
서양에 조선을 개방하다: 중국과 조선-미국 협상
가장으로서 조선을 보호하다: 1882년 중국의 군사 개입
조약으로 조선 정의하기: 청과 조선의 장정과 그 결과
조선의 대외 네트워크 합류: 중국 위원과 중국인 거류지

6장 조선을 상실하다: 중국 근대국가의 부상, 1885~1911
종번 관례의 발동: 조선 주재 대청 흠명 주차관
종번질서의 대이행: 조선에 파견된 중국의 마지막 칙사
‘우리 조선’ 구하기: 청일전쟁에 대한 중국 지식인들의 대응
조선과 중국 관계의 재정립: 1899년 대청국·대한국통상조약과 그 여파

결론
 

저자 소개 

저 : 왕위안충 (Yuanchong Wang)
중국 산둥성 옌타이 출생. 산둥대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베이징대 역사학과에서 중한관계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2007년 미국 코넬대 역사학과 박사과정에 진학하여, 2014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미국 델라웨어대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베이징대에서 시작한 중한관계사 연구를 20여 년째 하고 있다. 2022년 중문으로 된 청대 중한관계사 ‘상권’을 탈고하였고, 지금은‘하권’을 집필 중이다.
 
역 : 손성욱
단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베이징대학 대학원에서 중국근현대사를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국 산둥대학 역사문화학원 부교수를 지냈고, 현재 창원대 사학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17세기 이래 한중관계사와 중국의 역사 담론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주요 논저로는 『사신을 따라 청나라를 가다』 (푸른역사, 2020), 『百年回看五四運動』 (공저, 社會科學文獻出版社, 2020), 『중국 시진핑시대 교과서 국....

책 속으로

산해관을 지키는 오 장군의 군대에도 조선 출신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조선의 젊은 관원 최효일(崔孝一)이었다. 그는 만주족이 처음 조선을 침략한 1627년[정묘호란] 이후에 오 장군의 반만주 전투에 가담했다. 그는 오래 살지 못했지만 만주족 정복자들의 손에 죽지는 않았다. 1644년 6월 6일, 만주족은 단 한 차례의 전투도 없이 북경을 점령했다. 도르곤은 반란군에게 불탄 자금성의 잔해가 쌓여 있는 황궁에서 조선 왕세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명나라 관원들의 항복을 받았다. 그러나 최효일은 오랑캐라 여긴 만주족 황자 앞에 엎드리기를 거부했다. 그 대신에 그는 명나라 형식의 의복을 입고 문명국인 ‘중국(MiddleKingdom)’ 혹은 중국어로 중국(中國)이라 불린 명을 추도하려고 숭정제의 묘로 갔다. 최효일은 일주일간 단식한 끝에 묘 근처에서 죽었다. 오 장군은 그의 시신을 안장하고 비가(悲歌)를 지어 추모했다.
--- p.19

이러한 준종번 담론의 구축은 주로 후금 국경 안에서 이루어졌지만, 후금은 조선을 담론의 변혁을 뒷받침할 수 있는 최고의 외부 자원으로 여겼다. 양국 관계에서 후금은 최고 권력의 역할을 맡았고, 조선을 동생에서 속국 또는 외번으로 전환했다. 한중관계 연구자들은 만주족이 조선에 명확한 종번 조건을 부과한 1637년 제2차 만주족 침공[병자호란] 이후 위계 담론을 채택했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실제 그 과정은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다. 1630년대, 후금 학자들은 후금의 중화성을 확립하려고 중국 역사에서 화이지변을 조작할 수 있는 사상적 자원을 발굴하였다
--- p.61

1637년 첫 칙사 잉굴다이부터 1890년 마지막 칙사 속창(續昌, 1838∼1892)에 이르기까지 조선에 파견된 모든 칙사는 만주인 관원이었다. 몽골과 한족 팔기가 일부 포함되었지만, 팔기가 아닌 한족이 포함된 적은 없었다. 반면 안남과 유구에 파견된 칙사는 주로 만주족도, 팔기도 아닌 한족이었다. 적어도 1760년대까지 한족 문인들은 이러한 민족적 차이를 충분히 인식했지만, 그들이 상대하는 일부 조선 문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한족이 조선 칙행에 참여할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러한 배제는 화이지변의 암묵적 요구와 1644년 이전 만주-조선 관계를 뛰어넘으려는 청의 필요성, 즉 만주 조정이 천명의 인간적·제도적 대리인으로서 그 정당성을 입증·유지하고 공고히 하여 위계 관계를 바탕으로 문명화된 중심성과 중화성에 관한 주장을 강화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뿌리를 두었을 것이다.
--- p.100~101

사실 1858년 11월과 1861년 5월 사이에 중국이 전쟁 중임에도 조선은 북경에 다섯 차례나 사신을 보냈다. 1790년대 초 조선과 영국의 사절단은 청의 눈에 오랑캐 나라였던 두 외번을 대표해 열하와 북경에 모였다. 그러나 영국 사절단이 1860년대 초 대포를 앞세워 북경에 입성하여 중화 세계에서 자신의 지위를 격변시켰다면, 조선 사신은 표문과 공물로 제국의 수도에 다가갔다. 비록 조선 사신은 중국의 상황을 조선 조정이 파악하도록 정보를 수집하는 비밀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지만, 북경에 자주 머물면서 청이 전통적 의례 규범, 정치-문화적 위계질서, 제국 규범을 유지하도록 자원을 꾸준히 제공했다. 그러나 조선 사신은 8월 열하에서 사망한 함풍제를 다시는 보지 못했고, 함풍제는 서양 오랑캐가 고두하지 않고 자신 앞에 서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 p.175~176

일문판의 첫 문장은 “朝鮮國ハ 自主ノ邦ニシテ日本國ト平等ノ權ヲ保有セリ”(문자 그대로, 조선국은 자주권을 가진 국가로서 일본과 동등한 권리를 보유한다)로 이 문장의 한문판은 “朝鮮國自主之邦, 保有與日本國平等之權”으로 같은 의미이다. 외무성이 의도적으로 자주를 ‘독립’으로, 자주지방을 ‘독립국’으로 번역한 것이 분명하다. 더 중요한 점은 영어 번역이 한자 ‘권(權)’을 단순히 권리가 아닌 ‘주권’으로 번역했다는 사실이다. 문자 그대로 조선이 “일본과 동등한 권리를 보유한다”라고 기술된 문장의 뒷부분을 조선이 “일본과 동일한 주권을 가진다”로 주장한 것이다. 이 조항 뒷부분에서 외무성은 문자 그대로 ‘동등한 의례’ 또는 ‘동등한 예의’라는 뜻의 ‘동등지례(同等之禮)’를 ‘평등과 예의’로 번역했다. 외무성은 ‘동등’이라는 용어를 형용사에서 명사로 바꿔 첫 문장의 번역에 내포된 주장을 강화했다.
--- p.210

1880년대 격동의 시기에 중국이 신강을 중국의 성으로 바꾸면서 북서쪽 국경 정책을 극적으로 전환했을 때 북동부 국경 역시 청에 큰 도전이 되었다. 지난 30년 동안 영국에 미얀마를, 일본에 유구를, 프랑스에 베트남을 잃은 청은 이후 가장 모범적 외번인 조선을 잃지 않으려고 한 발 물러나 고위 관료를 파견하여 조선을 권도하고 보호하는 간접적 방식을 택할지, 아니면 조선을 청의 군현으로 중국 영토에 편입하는 것이 더 나을지 결정해야 하는 역사적 갈림길에 서 있었다. 두 가지 방식 모두 한과 원에 선례가 있었으므로 정당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두 가지 모두 1910년 일본의 한국 병합과 다를 바 없는 식민지 접근법이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청은 극복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졌다.
--- p.267

조약문은 한문, 일문, 영문으로 작성되었다. 일본이 작성한 초안의 제1조는 “중국은 조선국의 완전무결한 독립과 자주(完全無缺之獨立自主)를 확실히 인정한다. 따라서 이러한 독립과 자주를 훼손하는 중국에 대한 조선의 조공, 의례 등은 완전히 중단한다”라고 명시했다. 한문과 일문만으로 작성된 1876년 「강화도조약」과 달리 영문판 「시모노세키조약」은 조선의 “완전무결한 독립과 자치”를 명시적으로 규정하여 한문판이나 일문판에서 조선의 지위에 대한 모호함을 제거했다. 또한 조약 용어는 지난 2세기 동안 청의 변화를 반영했다. 조약에서 ‘대청’은 ‘China’와 ‘중국(中國)’과 온전히 동일하지만, 일문판과 중문판의 서문 말미에는 청을 ‘대일본제국에’ 대응하는 한자인 ‘대청제국’으로 표기했다. 일문판에서는 청을 ‘청국(淸國)’이라고 불렀지만, 중문판에서는 ‘중국(中國)’으로, 영문판에서는 ‘China’로 칭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조약으로 종결된 것은 1637년부터 이어져 온 청-조선 조공관계뿐만 아니라 기자(箕子)에서 시작된 일반적인 중한 종번관계도 종언한 것이다.
--- p.294~295

출판사 리뷰

핵심개념 ‘종번 체제’와 ‘조선 모델’을 제기하다

이 책은 정치와 외교의 시각에서 청대 중국사에서 조선왕조의 중요한 역할을 분석한다. 책의 전반부는 입관 전 청이 조선과 종번 관계를 맺어 자국의 ‘중국’인식을 구축하는 과정과 입관 이후 ‘조선 모델’을 광범위하게 운용하여 다원적 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을 고찰했다. 후반부는 19세기 후반, 청대 중국이 조선왕조와 관계를 조정하여 점차 서구 국제법의 정의에 따라 명확한 영토 경계를 갖춘 주권국가로 전환하는 과정을 살펴본다.

일반적으로 명청 교체는 1644년 만주족이 북경을 점령한 때를 기준으로 삼는다. 그러나 왕위안충은 1637년 청-조선 종번 관계의 수립을 청 제국사에서 전환점이 된 중대한 사건으로 본다. 1627년(정묘호란)과 1636년(병자호란)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공한 청은, 1637년 초, 명의 가부장적 지위를 대신하여 조선과 종번 관계를 맺었다. 조선에 무력행사를 한 뒤 북경에 들어가기까지 10년이 향후 청이 중화제국을 다시 만드는데 가장 결정적 순간이었다며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개념인 ‘종번 체제’와 ‘조선 모델’을 제기한다.

종번 체제는 동아시아에서 ‘천하’라는 아주 오래된 세계질서를 뜻하는 것으로, 전근대 시기 한중 관계의 근간을 이뤘으며, 조공과 책봉의 수단과 ‘사대’와 ‘자소’의 언설로 구축되었다. 한반도의 왕조는 중원왕조와 유교적 세계관에 기반하여 독특한 문화적 동질성을 형성해 왔는데, 이 종번 관계는 명대에 임진왜란을 겪으며 더욱 강화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저자가 만주족의 청이 명-조선 관계를 답습한 것이 아니라 주동적으로 활용했다고 보는 것이다.

조선의 변방에서 흥기한 오랑캐 청은 ‘화이지변’이라는 정치-문화적 환경 속에서 정통성을 입증해야 하는 전례 없는 도전에 직면했다. 청의 만주 정권은 입관 전 10년 동안 종번 구조에 내재된 정치-문화적 담론을 활용하여 ‘중국’의 지위를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1637년 5월 13일, 조선이 성경에 첫 사행단을 보낸 것을 시작으로 1643년까지 조선은 56차례, 청은 12차례 사신을 보냈다. 이 집중적인 사신 왕래는 청의 지위 변화를 일으키며 양자 간 새로운 정치 제도를 강화하고, 또 새로 정복하거나 예속된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를 관리할 성숙한 모델 개발로 이어졌다. 왕위안충은 이를 ‘조선 모델’로 정의한다. 이 모델은 다른 국가나 정치체가 조선을 따라 청으로부터 책봉을 받고, 청의 연호와 역법을 채택하며, 청에 정기적으로 사신을 파견해 조공하면서 청 중심의 종번체제 안으로 들어오도록 만들었다. 이 모델의 이면에는 조선을 통해 청이 문명국인 ‘중국’이자 천하의 중심인 ‘천조’라는 정체성을 공고히 하려는 의도였다.

청의 중화제국은 ‘영토적 제국’이 아닌
조선 모델을 통해 새로이 구축된 ‘정치-문화적 제국’

1644년 이후 서쪽으로 진격한 청은 18세기까지 몽골, 티베트, 신장 위구르를 내번화하고, 외지의 안남, 유구, 남장, 섬라, 소록, 면전을 외번화 하는 등 유라시아 제국 내외부에 새로운 제국 질서를 구축했다. 저자는 이 대외 관계의 모델을 청과 조선과의 관계, ‘조선 모델’이라고 칭한다.

‘조선 모델’은 의례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공물은 정치적 종속의 상징에 불과했다. 실제 1730년대 말 조선의 공물은 1630년대 말의 10분의 1도 되지 않았다. 청은 원의 공격적인 식민 정책 대신 명의 종번 기제를 배워 정교하고 뚜렷한 유교적 조선 모델을 활용해 국경의 안정을 유지하고 국경을 넘어 새로운 중화제국을 건설했다.

조선이 청에 사신을 파견한 빈도는 다른 어느 국가보다 높았다. 1637년부터 1894년까지 조선은 26가지 다른 목적을 위해 698회 사신단을 보냈다. 이는 연평균 2.71회로, 격년(유구), 3년(섬라), 4년(안남), 5년(소록), 10년(남장, 면전)에 1회 파견한 다른 조공국에 비교가 안 되는 수치였다. 연회에서 최고 수준의 ‘고두’는 세세하게 규정되고 엄격하게 실시되었고, 모든 의례는 정치체제를 유지하고 정체성을 강화하는데 일조했다. 1675년 2월 9일 원소절 때 조선 사신이 러시아, 칼카, 오이라트 사신보다 앞서 강희제에게 하례를 올린 것처럼 황제에게 올리는 의식 거행에서 조선은 외번의 대표였다. 전형으로서 조선의 역할은 18세기 후반 건륭 연간에 두드러졌는데 이때 제작된 『황청직동도』에서 조선은 다시 한번 다른 이들의 모범이 되어 조선 관원 그림이 첫 번째 실렸다.

18세기 말, 주변국과 만주, 몽골초원에서 투르키스탄과 히말라야에 이르는 청의 팽창을 제국주의로 보는 서구 학계의 ‘신청사’ 연구를 반박하며 왕위안충은 청은‘영토적 제국’이 아니라 조선 모델을 통해 새로이 구축된‘정치-문화적 제국’이라 주장한다. 다시 말해 청의 행위는 제국주의가 아닌 종번주의에 의한 것이라며 청 초에 형성된 청-조선 관계의 지속성을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 책의 중요한 개념인 ‘종번주의’란 배타적인 문화 중심인 정치체와 덜 문명화되었거나 야만의 상태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주변이 정치, 외교 교섭 및 교류를 하는 중국적 시스템으로 종은 번에 대해 절대적인 가부장적 권위를 지니며, 그 권위의 행사는 양자가 공유하는 정치-문화적 규범에 의해 정당성을 갖는다. 현대 외교에서 이해하듯이 군사력이나 지정학적 중요성 혹은 종주권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19세기 국제법을 앞세운 서양 열강의 등장은 종번체제를 흔들며 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이 책의 후반부가 보여주듯이 중국과 ‘외번’으로 연결된 정치-문화적 중화제국은 청일전쟁에서 패할 때까지 변함는 체제를 유지했다. 국제법은 청제국과 내외번 양측에 필요한 정치적 정통성을 부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령 1883년 베트남에서 프랑스와 벌인 청프전쟁, 1894 조선에서 일본과 벌인 청일전쟁에 중국이 끌어들인 것은 ‘영토적 제국’이 아닌 ‘정치-문화적 중화제국’이란 정통성 때문으로 저자는 설명한다.

‘조선의 지위’를 둘러싼 청과 일본, 그리고 서구 사이의 격렬했던 논쟁

18세기 말부터 슬그머니 찾아들기 시작한 영국은 1842년부터 1860년까지 두 차례의 아편전쟁을 일으켰고 청은 영국을 비롯한 서양 열강들과 국제법에 따른 조약을 체결했다. 청 제국은 외부로부터 강요된 조약항 네트워크와 오랜 전통인 종번제도가 공존하는 이중 체제를 형성했다. 이 책은 ‘이중 체제’에 따른 19세기 후반의 복잡성을 방대한 문헌에 기초한 치밀한 서술로 드러낸다. 난제는 ‘조선의 지위’를 둘러싼 것이었다. 청과 조선 양국은 모두 조선을 자주의 권리가 있는 중국의 속국, 또는 속방이라고 한목소리를 냈지만, 서양 국가들은 조선을 중국과 단순한 의례적 관계를 유지하는 독립적 주권 국가로 다뤘다. 특히 서구화 개혁을 단행한 일본이 동아시아 사회 내부자의 위치에서 한중 관계 사이를 파고들면서 중국의 정통성과 국제법 사이에서 ‘조선의 지위’를 둘러싼 청과 일본, 그리고 서구의 격렬했던 논쟁은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1780년 8월에 건륭제가 조선 사신에게 티베트의 라마를 만나볼 것을 권했을 때 “라마는 서역 사람인데 어떻게 우리 사신이 감히 그를 예방할 수 있겠습니까? 신하는 외교를 할 수 없습니다(人臣無外交)”(박지원의 열하일기 중)는 조선이 중국의 번이자 속국으로 충성심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1830년대에서 1870년대까지 조선은 공고한 종번 원칙에 따라‘번신무외교(藩臣無外交, 신하 된 자인 번은 ‘외교’를 할 수 없다)’를 이유로 서양과 교섭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서양 제국과 일본이 침투해올수록 조선은 그 어디에도 은신처가 없었고 그럴수록 더 청에 밀착해갔다.

1870년대 말과 1880년대 초 조선은 청의 적극적인 권고로 국내 개혁을 실시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청은 그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조선을 ‘국제사회’에 소개했다. 일본과 서구 국가가 볼 때 청의 개입은 명목적 관계에서 실질적 지배로의 변화를 의미했고, 한반도에서 다양한 세력 간 격렬한 정치적, 외교적 갈등을 촉발했다. 이러한 새로운 도전에 대응하려고 청과 조선은 상호 관계를 유지하고 조정하는 여러 상업 협정을 체결했다. 19세기 후반 청이 실시한 대조선 정책이 서구 제국주의와 유사한 제국주의 지배라는‘청 후기 제국주의론’에 대해 왕위안충은 제국주의가 아닌 종번주의에 의한 것이라 주장한다. 박민희 한겨레신문 선임기자는 한국 학자들의 연구에 대한 반론으로 읽힌다며 “중국이 새로운 국제질서를 만들려 하는 지금, 한중 역사에 대한 해석은 민감하고 뜨거운 쟁점일 수밖에 없다. 한국의 관점에서 깊이 일고, 논쟁해야 할 필독서”라 했다.

종번관계의 종식과 근대 국민국가의 부상

조선의 국제적 지위에 대한 정치적, 외교적 난제는 청과 조선을 법적으로 곤경에 빠뜨렸다. 1880년대 혼란스럽던 10년 동안 양측 관계는 다양하게 조정되었으나, 종번의 근간은 그대로 유지되었던 바, 양측 모두 유교 세계의 높은 정치 수준에서 상호구성적 정통성으로 야기된 이념적 딜레마를 극복할 수 없었다. 19세기 후반에 청은 영국에 미얀마를, 일본에 유구를, 프랑스에 베트남을 잃었다. 이런 상황에서 스스로 중화제국이 되는 데 정통성과 기제를 제공해 주었고 만주, 몽골, 신강, 티베트, 대만과의 연결고리인 조선을 잃는다는 것은 정치-문화적 제국의 와해를 의미했다. 하여 청은 서세동점의 위기에도 전통적인 청-조선 관계를 중심으로 한 조선 담론을 강화했다. 바로 그 이유에서 1894년 청일전쟁의 결과는 동아시아에서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중화제국 질서의 핵심 국가인 조선을 일본으로부터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은 중화제국의 존재 의의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고, 중국, 한국, 일본, 서양 국가들 사이에 한국의 지위를 둘러싼 격렬했던 논쟁은 1895년 한중 종번관계의 종식으로 마무리되었다. 전쟁 후 중국과 한국은 대등한 국가 대 국가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새로운 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조선왕조와 청조는 각각 1910년과 1911년에 멸망했다. 이 책은 이런 다양한 관계의 궤적을 설명하고 근대 중국과 한국, 그리도 동아시아의 발전에서 그 관계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이 책은 한국이 청 제국 시기에 정치-문화적 의미에서 중화제국의 일부를 형성했으며, 1895년 이후 그 관계가 급격히 약화되고 끝내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었음을 논증한다. 이후 청 제국이 무너지고 근대국가 체제가 새롭게 등장했지만, 여전히 중국의 관념에서 한국은 중국이 지켜주어야 할 가부장적 책임감의 대상이었다. 이는 조선 독립운동을 향한 지원과 한국전쟁에 개입한 결정적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중국은 제2차 세계대전, 특히 1950년 한국전쟁 이후 한국의 절대적 독립과 주권을 인정한 후에야 비로소 근대 국민국가가 되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지금의 동아시아 정세를 전망하는 예리한 미래서”

한국이 청 제국 시기에 정치-문화적 의미에서 중화제국의 일부였다는 왕위안충의 주장은 기존 연구와 차별되는 지점이 분명하지만 논쟁적이다. 짧았던 대한제국 이후 식민지와 분단을 거치며 가까스로 얻어낸 ‘자주, 독립’이기에 이 세계관 안에서 살아온 우리가 제국 옆에서 생존을 도모해온 역사적 사실을 직시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 중국과 관련된 문제는 ‘사대주의’ 그림자를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나 한국과 중국의 관계는 단순히 국제정치학에서 말하는 단순한 국가 대 국가 관계는 과거에는 더욱 아니다. 옮긴이 손성욱(창원대 사학과) 교수는 후기에서 이 책의 관점과 논쟁점을 짚어주었다. 옥창준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는 17세기 초에서 20세기까지 왕위안충이 관찰하며 일국사를 넘어서 쓴 이 책이 “‘중화’를 중국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공동유산으로 재해석하기 위해서는 고금을 넘나드는 역사적 시야가 필수적”이라며 “과거를 다루는 치밀한 역사서인 동시에 지금의 동아시아 정세를 전망하는 예리한 미래서”라 평했다.

지은이의 말

종번주의는 전근대와 근대 중국 역사 사이에 고착된 간극을 초월한다.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1839∼1842년 아편전쟁을 전근대 중국의 황혼과 근대 중국의 여명으로 규정해 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청에 대한 주류 서사는 전근대 중국의 대외관계 시스템과 결국 이를 대체한 근대적 조약체제는 양립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 패러다임의 주요 문제점은 유럽 중심주의 (실제로 ‘근대’는 유럽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저한 변화 없이 전근대에서 근대로 이어진 중국의 대외정책에서 지속된 요소를 간과한 데 있다. 다시 말해, 역사가들이 널리 밝힌 산업화한 서양을 만나기 이전 중국의 ‘정체’ 요인들이야말로 후기 중화제국을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열쇠다. 중화제국은 수입된 것이 아니라 고유의 규범으로 유지됐다.

옮긴이의 말

「들어가며」에서 저자가 제시한 지향점은 명확하다. 종번 개념의 재활성화(revitalizing), 중국 근대국가 형성의 재해석(reinterpreting), 청대 중화제국 재론(revisiting), 청 제국주의 재고(renegoating), 즉 네 가지 ‘다시(re)’를 제시한다. 기존의 청 제국과 청-조선 관계를 보는 시각에 새로운 해석을 내놓겠다는 야심 찬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추천평

한중 관계와 중한 관계는 다르다. 시선의 주체가 다르고, 시야의 차이도 현저하다. 전자가 ‘한’을 중심으로 제국의 단면을 본다면, 후자는 x 변수인 제국 질서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여유가 있다. 국내 조선시대 전공자들의 시각과는 사뭇 다르다. 그래서 오히려 좋다. 학문이란 열린 토론이 생명이기에, 토론 거리가 넘치는 이 책이 값지다.
- 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조선과 청나라의 오랜 관계를 통시적으로 검토한 역작이다. 조선의 역사적 위상과 의미를 중화제국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왕위안충의 시각이 한국 독자들에게 낯설고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이 책은 한국에서 널리 읽히고 토론되어야 한다. 왕 교수의 저서가 한중관계사에 대한 관심과 시각을 새롭게 확장시키리라 기대한다.
- 김선민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
한중관계사에 관한 미국학계의 주목할 만한 최신 연구 중 하나로, 청 제국의 성립·유지·붕괴 과정에서 조선이 가졌던 독특한 위상을 분석한 역작이다. 이 책의 핵심개념인 ‘종번주의’는 한국사 내러티브에 익숙한 독자에겐 다소 불편한 것이지만, 풍부한 역사적 사례와 방대한 문헌에 기초한 치밀한 서술은 그동안 미처 인식하지 못한 조청 관계의 중요한 일면을 깊이 생각하게 한다.
- 김종학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
청의 만주족 정체성을 강조하는 ‘신청사’에 대한 반론이자, 19세기 말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고 있던 청이 조선에 대해서는 제국주의적 지배를 시도했다는 한국 학자들의 연구에 대한 반론으로도 읽힌다. 중국이 새로운 국제질서를 만들려 하는 지금, 한중 역사에 대한 해석은 민감하고 뜨거운 쟁점일 수밖에 없다. 한국의 관점에서 깊이 읽고, 논쟁해야 할 필독서다.
- 박민희 (한겨레신문 선임기자)
지금 중국은 대국굴기를 거치면서 제국형 국가와 개방형 제국의 갈림길 위에 서 있다. 만주족의 청이 그리고 조선이 그러했듯이 ‘중화’를 중국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공동유산으로 재해석하기 위해서는 고금을 종횡무진 넘나드는 역사적 시야가 필수적이다. 이 책은 과거를 다루는 치밀한 역사서인 동시에 지금의 동아시아 정세를 전망하는 예리한 미래서이기도 하다.
- 옥창준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