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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을 따라 청나라에 가다 (2020) - 조선인들의 북경 체험

동방박사님 2024. 7. 31.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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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연행록’ 100여 종을 10년에 걸쳐 읽다
고르고 추린 19세기 조선 외교의 안과 밖

수많은 ‘연행록’의 알맹이를 추리다


조선에게 명나라는 나라를 있게 해준 ‘재조지은再造之恩’의 국가였다. 이어 들어선 청나라도 중화질서의 중심이었고, 조선 사대외교의 상국이었다. 외국과의 접촉이 금지되던 시대에 그 수도인 연경을 다녀온 사신단은 저마다 ‘연행록’을 남겼다. 흔히 김창업의 『노가재연행일기』, 홍대용의 『담헌연기』,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3대 연행록으로 꼽지만 19세기에 쓰인 것만 100종이 넘는다.

조청관계 연구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은 지은이는 오랜 기간에 걸쳐 이들 연행록을 섭렵했다. 그 결과 지은이는 19세기 들어 ‘볼 관觀’이나 ‘놀 유遊’ 자가 들어간 연행록이 많이 나왔지만 통찰력 있는 몇몇만의 유람 이야기도 아니라고 한다. 대신 이 책에서 ‘은둔의 나라’ 조선의 거의 유일한 숨구멍이었던 청나라 연경에서 조선 사신들은 무슨 일을 했고, 무엇을 보았는지 다양한 일화를 소개한다.

목차

책머리에

제1부 유람하다

북경의 첫인상 | 청나라 사행의 필독서 | 사라진 코끼리, 사라진 청나라 | 원명원, 청나라 성쇠의 극치 | 사찰을 유람하다 오르는 법장사 백탑 | 북경 공중목욕탕에 몸을 담근 조선 선비 | 큰 코 오랑캐가 사는 아라사관 | “이 무슨 술수인고!” 러시아인이 찍어 준 사진 | 사진, 위험한 만남의 흔적

제2부 교유하다

우정을 전하는 선물 | 조선 사신 숙소 옆에 인삼국 | 부유한 금석학자와 교유하다 | 북경에서 꿈을 펼친 역관 이상적 | 고염무 사당에서 제사를 올린 박규수 | 사행으로 오경석 컬렉션을 만들다 | 오경석 사진에 담긴 기묘한 희망

제3부 교섭하다

청나라가 유일하게 거절한 책봉 | 왕의 동생, 국본國本이 가당한가 | 전례에 어긋난 왕세자 책봉 | 조선 사신단의 북경 숙소 | 신하 된 자가‘ 외교’를 할 수 있는가 | 조선 최초의 외교 공관 | 전쟁통에 떠난 사행, 마지막이 되다

제4부 사행 이후

옛 황제의 수도에 세워진 공사관 | 북평잡감

저자 소개

저 : 손성욱
단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베이징대학 대학원에서 중국근현대사를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국 산둥대학 역사문화학원 부교수를 지냈고, 현재 창원대 사학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17세기 이래 한중관계사와 중국의 역사 담론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주요 논저로는 『사신을 따라 청나라를 가다』 (푸른역사, 2020), 『百年回看五四運動』 (공저, 社會科學文獻出版社, 2020), 『중국 시진핑시대 교과서 국...

책 속으로

조성한 정원을 빼면 나무가 별로 없다. 반면 북경 외곽의 서산에는 채굴이 쉬운 석탄이 넘쳐났다. 청나라 때 60~80만이 살던 북경에서 싸고 화력이 좋은 석탄이 주요 연료가 된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매캐한 냄새가 북경의 일상이 되었다.
--- p.15

조선은 주 연료로 나무를 쓰니 석탄 냄새는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1850년(철종 원년) 사행으로 북경에 간 권시형權時亨은 그 냄새가 구역질나게 만들며, 굴뚝으로 나온 연기로 북경은 온통 흙빛이라고 했다.
--- p.16

가장 많이 읽혔던 ‘연행록’이 바로 김창업의 『노가재연행일기』, 홍대용의 『담헌연기』, 박지원의 『열하일기』다.…이 책의 위상에 대해 1832년(순조 32) 청나라로 사행을 떠난 김경선金景善은 『연원직지燕轅直指』에서 “연경燕京에 갔던 사람들이 대부분 기행문을 남겼다. 그중 3가家가 가장 저명하니, 그는 곧 노가재 김창업, 담헌 홍대용, 연암 박지원이다”라고 평했다. 이들의 연행록을 조선시대 3대 연행록이라 한다.
--- p.23

명나라 때는 천조天朝를 방문한다고 하여 ‘조천록朝天錄’이라 많이 붙였다. 청나라가 중원을 장악한 이후에는 오랑캐가 주인이 되었으니 더는 ‘조천록’이라 부를 수 없었다. 보통 연경燕京에 다녀오는 기록이라 하여 ‘연행록燕行錄’으로 많이 불렀다. 그런데 19세기가 되면 서유진徐有鎭의 『종원유연록鍾園遊燕錄』, 이정수李鼎受의 『유연록遊燕錄』… 등 제목에 ‘볼 관觀’이나 ‘놀 유遊’ 자가 들어간 연행록이 많이 나왔다. 사행에 유람 의식이 강하게 투영된 것이다.
--- p.27

1887년(고종 24) 진하進賀 겸 사은사謝恩使의 정사로 북경에 도착한 이승오李承五는 상방을 찾아 이들 코끼리를 보았다. 그는 자신의 연행록인 『관화지觀華志』에 을해년, 즉 광서 원년에 미얀마가 7마리의 코끼리를 진공하였는데, 3마리는 죽고 4마리만 남았다고 기록했다.
--- p.36

1880년대 말 청나라는 내우외환으로 의례활동을 위해 코끼리를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이자성의 난 때도, 청나라가 북경을 점령할 때도 북경에 코끼리는 있었다. 여전히 유용한 존재로 쓰였다. 황제의 위엄을 높여 주고, 태평성대를 가장했다. 주변국의 조공으로 그것을 유지할 수 있었다. … 19세기 중반 들어 상황이 바뀐다. 서양이 중국의 주변을 하나하나 무너뜨렸다. 코끼리의 북경행이 점차 줄어들더니 결국 끊기고 만다. 심지어 청나라는 코끼리의 쓸모를 폐기한다. 이런 모습은 오랫동안 동아시아를 주도한 중화질서가 와해되고 있음을 그대로 보여 준다.
--- p.37

건륭제가 원명원에 공을 들일 때 조선의 왕은 영조였다. 영조는 검소하고 꼼꼼한 인물로 이궁에 힘을 쏟는 건륭제를 좋게 볼 리 없었다. 영조는 원명원을 진시황의 아방궁에 빗대며 청나라가 망할 징조라고 보았다.
--- p.40

조선 사람 최초로 원명원에 들어간 이는 황인점黃仁點과 홍수보洪秀輔였다. 이들은 정기 사행인 삼절연공행의 정사와 부사로 북경에 왔다가 1782년 정월대보름에 원명원에서 열린 상원절上元節 연회에 초청받는 뜻밖의 행운을 얻었다.…상원절 연회의 하이라이트는 산고수장각山高水長閣에서 펼쳐지는 불꽃놀이와 등불놀이였다.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장관이었다.
--- p.44

법장사 백탑은 조선 사신의 또 다른 흥취를 돋우었다. 바로 탑에 올라 제명을 쓰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나 여기 왔다 갔노라 하고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이러한 낙서를 시작한 이는 『노가재연행일기』로 유명한 김창업이다.…김창업은 1713년(숙종 39) 정월 초하루에 법장사를 방문했다. “탑 안의 제명題名은 남방인이 많은데 나도 상층에 ‘조선인 김모, 모년 모월 모일 와서 오르다’라 적었다.
--- p.52

법장사 백탑에 제명을 남기는 것은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 19세기에 이르면, 박지원처럼 전에 사신으로 왔던 가족이나 친척, 친구들의 이름을 접하는 것은 일상이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백탑 벽면에 조선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 차 붓을 대기 힘들 정도였다.
--- p.53

민간 속설에 따르면, 고린내는 ‘가오리초우高麗臭(고려취)’에서 왔다고 한다. 박지원도 그렇게 생각해 역정이 난 것 같다. 하지만 이는 속설일 뿐이다. ‘고린내’는 속이 상했다는 뜻의 ‘곯다’에서 온 말이다. 곯은 냄새가 줄여져 고린내가 됐다. 다만 당시 청나라 사람들은 조선 사람을 보고 냄새가 난다고 말하곤 했다.
--- p.55

북경에는 17세기 후반 영업을 시작한 용천당涌泉堂을 비롯해 18세기에 만들어진 정옥조당?玉?堂, 1854년에 개업한 항경당恒?堂 등 공중목욕탕이 성행했었다.…그런데도 조선 사람의 목욕탕 이용 기록은 참으로 귀하다.…목욕 경험을 기록한 것은 이항억의 『연행일기』밖에 없다. 이항억은 1862~1863년(철종 13~14) 정사 이의익李宜翼의 수행원으로 북경에 다녀왔다.
--- p.57

러시아인이 북경에 장기간 체류하게 되면서 조선 사신이 그들을 볼 기회가 많아졌다. 1749년(영조 25) 진하 겸 사은사의 부사 남태량南泰良은 아라사관의 ‘리파利波’라는 이에게 시 한 편을 써 주기도 했다. 역관을 중심으로 무역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주로 구입한 물건은 모피와 청동거울이었으며, 조선에서 인기가 많았다.
--- p.64

러시아인들에게 명나라 시절부터 조선 사신들이 머물던 회동관을 뺏겼다고 생각했다.…그곳은 조선 사신이 주로 머물던 곳이지만, 러시아 사절단이 오면 숙소를 내줘야 했다. 캬흐타 조약 이후에는 아라사관으로 바뀌어 온전히 러시아 사람들의 공간이 되었다. 조선 사신은 ‘야만스러운’ 오랑캐보다도 대접받지 못한다고 느꼈다.
--- p.65

1828~1829년(순조 28~29) 사행을 다녀 온 박사호朴思浩는 예수상을 봤으며, 서양그릇과 향로 등 기물을 봤으며, 자명종을 봤다. 아라사관의 러시아인과 필담을 나누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은 18세기 천주당 경험과 매우 유사하다. 아라사관의 꾸밈은 천주당의 화려함에 비교할 수 없었지만, 호기심을 채우기에는 충분했다.
--- p.66

현존하는 한국 최초의 사진은 1860년대 초 북경에서 촬영되었다. 이 사진은 현재 영국 소아즈SOAS(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가 소장하고 있다. 총 6장인데 영국인 의사이자 선교사였던 윌리엄 로크하트William Lockhart가 북경에서 수집한 사진이다.
--- p.72

사행을 떠나는 선비들은 청나라 문인에게 줄 선물로 부채를 가지고 갔다. 청나라 문인과 필담으로 대화를 나누고, 부채로 성의를 표했다. 텅 빈 부채는 그림을 나누고 시문을 주고받는 우정의 공간이었다. 1831년(순조 31) 한필교韓弼敎는 장인어른 홍석주洪奭周를 모시고 청나라 사행길에 올랐다. 그는 북경에서 청나라 형부주사刑部主事인 이장욱李璋煜을 만나 필담을 나눴다. 그때 그가 차고 있던 새 장식의 청동검을 이장욱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러자 이장욱은 부채3 자루에 시문을 지어 보답했다. 이장욱은 홍석주와도 교류했는데, 홍석주가 떠날 즈음 부채에 시를 지어 석별의 정을 나눴다.
--- p.96

1816~1817년(순조 16~17)과 1821년(순조 21) 두 차례 정사 신분으로 청나라에 사행을 다녀온 이조원李肇源 역시 〈청심환가淸心丸歌〉에서 청심환을 구하려는 모습을 “기뻐 날뛰고 땅에 엎드려 절하기도 하니, 죽을 뻔한 제 아비 병이 곧 나아서요. 목메어 울며 크게 탄식하기도 하니, 어미 병에 명약을 구하지 못해서라.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약에 달려 있으니, 도처의 수많은 사람들이 다투어 구하는구나”라며 생동감 있게 묘사했다.
--- p.98

연행록을 살펴보면, 조선 상인과 무역했던 북경의 점포는 20여 곳 되었던 것 같다. 북경 조선관 밖에는 조선 사신단과 장사를 하는 점포들이 있었다.…1855~1856년(철종 6~7) 북경에 온 서경순徐慶淳이 얘기하길, 회동관 “관문 밖 좌우의 몇 백 호 문미의 판대기에 천태天泰 인삼국이니 광성廣盛 인삼국이니 하는 명칭을 붙여 놓았으니, 모두 우리나라 물화를 서로 무역하는 곳이다.” 조선과 교역하는 청나라 상인들이 자신들의 점포명을 인삼국이라 할 정도니, 조선 인삼의 명성을 알 만하다.
--- p.105

교류의 장소로 인삼국을 가장 잘 이용한 이는 이상적李尙迪이었다. 그는 김정희의 제자이자 역관으로 청나라에 수십 차례 다녀온 인물이다. 우리가 잘 아는 〈세한도〉를 청나라에 가져 가서 발문을 받아 온 이도 바로 그다.
--- p.107

북경에서 자신의 시집인 『은송당집恩誦堂集』을 출판했다. 자신의 인맥 속에서 김정희의 〈세한도〉를 ‘재탄생’시켰다. 수십 명의 청나라 문인과 함께 〈세한도〉를 감상하였고, 그들이 써 준 제발문은 그림 속의 짙은 외로움을 뒤덮었다.
--- p.118

변무사란 중국에서 조선을 곡해하는 일이 있을 때 사실을 바로잡기 위해 파견하는 사신이다. 대표적인 예가 종계변무宗系辨誣이다. 명나라의 『태조실록』과 법전인 『대명회전』에는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로 우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기록이있었다. 이는 조선의 정통성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문제였다. 조선은 이를 바로잡기 위해 변무사를 파견해 수정을 주청했다. 하지만 명은 이를 거부했다. 조선은 계속해서 변무사를 파견하였고, 근 200년이 지난 선조 때가 돼서야 뜻을 이룰 수 있었다.
--- p.122

2004년, 3 · 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오세창의 아들 오일육 선생이 조부 오경석吳慶錫과 부친의 유물을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 기증했다. 이 중에 청나라 문인 277통의 서신을 묶어 정리한 『중사간독첩中士簡牘帖』 7책이 포함되어 있다. 청나라로 열두 차례 사행을 다녀온 오경석이 청나라 문인으로부터 받은 서신들이다. 그는 조선시대 외국인으로부터 가장 많은 서신을 받은 인물일 것이다. 현존하는 자료만으로는 그렇다.
--- p.133

책봉은 형식적인 절차처럼 보였다. 하지만 1696년(숙종 22) 숙종이 폐위된 희빈 장 씨에게서 태어난 이윤李?(훗날 경종)을 세자로 삼으며 사단이 일어났다.
--- p.154

강희제는 『대명회전』에 나온 “왕과 왕비가 오십이 될 때까지 적자가 없어야, 비로소 서장자를 왕세자로 세울 수 있다”는 조문을 들어 책봉을 불허했다.
--- p.158

숙종은 책봉이 거부됐다는 소식을 듣고, 정사 서문중, 부사 이동욱, 서장관 김홍정을 삭탈관직하고 문외출송하도록 했다. 문외출송은 한양 밖으로 내쫓는 형벌이다.…사신이 변통할 방법이 없었는데, 이러한 처벌은 너무 가혹했다.
--- p.159

1720년 왕위에 오른 경종은 다음 해 노론의 압박 속에 연잉군을 왕세제로 삼았다. 문제는 청으로부터 책봉을 제대로 받을 수 있는가 였다. 연잉군은 서장자도 아닌 이복동생이었다. 게다가 경종이 즉위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았고 나이가 서른세 살이었다.…누가 봐도 연잉군을 왕세제로 삼은 것은 뭔가 이상해 보일 만했다.
--- p.165

1689년 청과 러시아가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한 이후, 러시아는 정식으로 사절단과 상단을 북경으로 파견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사절단이 오거나 먼저 회동관을 차지하고 있다면, 조선 사절들은 머물 곳이 없었다. 공부工部는 그때그때 비어 있는 공간을 물색해 조선 사신들에게 제공했다. 회동관에 들어가지 못하고 머물렀던 곳으로는 독포사督捕寺, 융복사隆福寺, 법화사法華寺, 지화사智華寺, 북극사北極寺, 십방원十方院 등이 있다. 대부분 옛 사찰이었다.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멀리하는 조선의 유학자들이 오랑캐의 땅에 온 것도 억울한데, 사찰에서 머물렀다니 이런 굴욕이 없다.
--- p.188

조선 사신은 북경에 도착하면 외교문서인 표자문을 예부에 올려야 한다. 그 이후에는 예부와 ‘자문咨文’이라 불리는 문서를 통해 왕래했다. 이 과정에서 문서를 전달하고 예부상서의 뜻을 전하는 청나라 예부의 서반이나 통관의 힘이 셌다. 자문이 없는 상태에서 이들이 예부 내부의 일이나 황제의 뜻을 임의로 만들어내면 그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 p.197

조선의 정사와 부사 그리고 청의 예부상서와 예부시랑의 접촉을 제한하는 ‘인신무외교’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아편전쟁 이후부터이다.
--- p.202

1882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맺고 서로 상무위원을 파견하기로 했다. 조선의 상무위원이 파견될 곳은 천진이었다.
--- p.209

더 중요한 것은 상무위원의 지위 문제다. 청과 근대적 조약을 맺은 국가는 북경에 공사를 파견했다. 이들은 청나라 정부의 근대적 외교사무를 담당하는 총리아문의 총리대신과 동급이었으며, 국가 대 국가의 대등한 관계에 있었다. 여기서 조선 상무위원의 지위가 모호해진다. 조선은 청의 ‘속국’으로 대등한 관계를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청과 조선의 관계는 전통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근대적 통상사무를 처리해야 하는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그 대안이 바로 천진이었다.
--- p.210

1884년 4월 주진독리 남정철이 드디어 천진에 도착했다. 그는 북양대신 이홍장을 예방하고, 천진에 파견된 미국, 독일, 러시아 영사들에게 부임 사실을 알렸다. 독리督理는 오늘날 영사 역할을 하였으며, 종사관從事官은 부영사에 해당하는 직책이었다. 청나라로 들어오는 조선인의 관리와 분쟁을 조정하는 역할을 했다. 근대적 사무와 관련해 조선 국왕의 의견을 북양대신에게 전달하는 역할도 했다.
--- p.213

1895년 마지막 주진독리 이면상이 전쟁으로 북경에 묶여 있던 조공 사절단과 함께 귀국하면서, 천진 공관은 문을 닫았다. … 1899년(광무 3) 한청통상조약韓淸通商條約의 체결 이후 다시 운영되지 못했지만, 온전한 조선 정부의 재산이었다. 이면상은 철수 당시 천진 공관에서 일하고 있던 중국인 직원인 장준張俊에게 천진 공관의 관리를 위탁했다.
--- p.216

서태후의 육순 생신을 축하하기 위한 사신단의 공식 일정은 11월이 되면서 모두 마무리되었다. 하사품을 받고 조선으로 돌아갈 일만 남았다. 그러나 전쟁으로 귀국길이 막혀 돌아갈 방도가 없었다. …청나라는 이들의 귀국을 위해 일본과 조율하여 청나라 군함을 타고 이들이 귀국할 수 있도록 했다.…이들이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한 것은 5월 25일이었다. 한양을 떠난 지 근 1년이 다 되어서야 고국으로 돌아왔다.
--- p.225

청일전쟁 이후, 양국 간 정식 관계가 맺어지는 것은 1898년 9월 11일 한청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다. ‘통상’이라는 두 글자가 들어가긴 했지만, 이 조약이 통상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다.
--- p.232

의화단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이후에야 대한제국의 주청공사 파견 문제가 다시 논의되었다. 1902년 1월 30일 고종은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을 주청공사에 임명했다.
--- p.232

북경 공관은 1905년 11월 대한제국과 일본이 을사늑약을 체결하며 철수하는 운명을 맞이한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면서, 일본은 대한제국이 해외에 설치한 상주 공관은 모두 철수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상주 공관의 재산은 일본 정부 소유로 이전되었다.
--- p.239

상해 유학 시절 주요섭은 특출한 운동 능력을 보여 줬다.…1923년 11월 19일 자 [동아일보]는 11월 10일 남양대학에서 열린 상해 체육경진회 도보 경주 부문에서 주요섭이 2등을 차지했다고 보도했다.…1924년 12월 25일 자 [동아일보]는 중국 남방 8개 대학 연합마라톤대회가 상해 삼영리 거리에서 열렸는데, 주요섭이 1등을 차지했다고 보도했다.
--- p.243

노구교사건은 갑작스레 발발했고, 떠날 겨를도 없이 일본군이 북경에 들이닥쳤다. 이후 주요섭도 고초를 겪었다. 한동안 일본영사관 유치장에 갇혀 지냈다. 북경에서 독립운동을 하진 않았지만, 3 · 1운동에 참여했던 인물이 아닌가.
--- p.250

출판사 리뷰

“이 무슨 술수인고” 재미를 놓치지 않다

지은이는 다양한 연행록을 읽어내면서 무엇보다 ‘재미’ 방점을 찍어 소개하려 했다. 조선에서 보기 힘든 코끼리 관련 일화가 대표적이다. 훈련된 코끼리가 앞다리를 구부리면 마치 절하는 것 같은 데 착안해 청나라는 황실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 조회에 코끼리를 등장시켰단다. 베트남 등에서 조공 받은 코끼리는 일 년에 수백 석의 콩을 먹는 등 유지비가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19세기 후반 서양이 중국의 주변을 식민지화 하면서 코끼리의 북경행은 끊기고 말았다. ‘사라진 코끼리 사라진 청나라’에서는 조선 사신들의 코끼리 목격담을 전하면서 동남아시아에서 중화질서의 와해를 읽어낸다.(37쪽)

1860년대 초 러시아 공관에서 한국인 최초로 사진을 찍은 이항억이 카메라의 ‘렌즈’에 거꾸로 비친 일행의 모습을 보고 ‘이 무슨 술수인고’라고 감탄한 장면(76쪽)이라든가 연경의 명물 법장사를 방문한 조선 사신들이 백탑 벽에 저마다 이름을 남겨 나중에는 이름 적기 위한 붓을 대기 힘들 정도였다는 이야기(53쪽) 등도 흥미롭긴 마찬가지다.

뇌물도 불사, 조선 외교의 민낯을 드러내다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책의 1부 ‘유람하다’에 앞서 배치되어 있지만 사신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외교’였던 만큼 3부 ‘교섭하다’에는 사신들의 활약과 고충에 관한 이야기가 다양하게 나온다. 1863년 사행에 참여했던 역관 이상적은 추사 김정희의 제자로 스승의 〈세한도〉를 가져가 중국 문인들의 제발문을 받아온 인물이다. 그는 그런 인연을 활용해 태조 이성계 관련 기록이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종계변무宗系辨誣’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역할을 했지만 신분이 낮아 무시되었다.(126쪽) 그런가 하면 1696년(숙종 22) 숙종이 폐위된 희빈 장 씨에게서 태어난 이윤李?(훗날 경종)을 세자로 삼으며 청나라의 책봉을 받으려 보낸 사신들은 법에 어긋난다는 강희제의 반대에 부딪치자 재차 사신을 보냈다. 이들은 제독 등에 뇌물을 쓰려했지만 통하지 않자 숙소 앞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곡을 하며 처지를 알리기 시작한 것이다.(162쪽) 만주족을 오랑캐라 경멸하고, 체면을 중시하는 조선 사대부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귀국 후 자신들의 겪을 곤욕도 걱정됐지만 ‘책봉’은 그만큼 국운이 걸린 외교 이슈였다.

문 닫는 북경공관, 흔들리는 조선이 한눈에

밀려드는 외세에 조청 관계가 흔들리면서 연행에도 격랑이 일었다. 1882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맺고 서로 상무위원을 파견하기로 했지만 청의 ‘속국’이었던 조선의 상무위원은 대등한 대접을 받을 수 없었다. 결국 다른 열강들과는 달리 연경이 아닌 천진에 공관을 두어 전통적 관계를 유지하는 편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210쪽) 그런가하면 서태후의 육순 생신을 축하하기 위한 사신단은 청일전쟁에 휩쓸려 근 1년 만에 귀국할 수 있었고,(225쪽) 1905년 외교권을 일제에 빼앗긴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대한제국의 해외공관이 모두 철수하면서 북경 공관이 일본 정부로 넘어간 과정(240쪽) 등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가 곳곳에 실려 전근대와 근대의 조선 스러져가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지은이는 “연행록은 북학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이 책을 보면 그의 주장에 공감이 간다. 수많은 연행록에서 골라낸 이야기들은 흥미롭기도 하지만 교과서에 만나지 못하는 이야기릍 통해 적지 않은 생각거리를 준다. 그러기에 이 책은 지은이의 희망대로 여타 연행록을 읽도록 하는 마중물 구실을 톡톡히 할 수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