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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북] 서상륜 (한국인 최초 성경번역)과 소래교회

동방박사님 2024. 8. 10.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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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륜

서상륜의 초상

출생 1848719일 / 조선의 기 조선 / 사망 19261월 / 일제강점기의 기 일제강점기 / 성별 남성 / 국적 조선의 기 조선 일제강점기의 기 일제강점기 / 직업 선교사 / 종교 개신교

서상륜(徐相崙, 본관은 대구, 1848719~ 19261)은 구한말 및 일제강점기의 기독교인, 개신교 선교사로 한국교회사 처음 개신교 교회인 황해도 소래교회를 설립하고 새문안교회, 연동교회, 승동교회에서 초창기 조사와 집사로 일했다. 독립운동가 겸 교육자 서병호의 큰아버지이자 양아버지였다. 독립운동가 서재현의 양 할아버지이다.

13세에 부모를 잃고 의주와 만주에서 홍삼 무역 등 상업에 종사하다가 병에 걸렸을 때 스코틀랜드인 목사 매킨타이어(John McIntyre, 馬勒泰)의 주선으로 아일랜드장로교회 선교병원의 헌터(Joseph M. Hunter) 의사의 치료를 받은 뒤 매킨타이어의 전도로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존 로스(John Ross) 목사의 한글 성경 번역 작업에 잠시 참여하였다.

1882528일 로스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 권서 활동과 전도에 전념하였으며, 조선 말기의 초기 장로교 조사로 활동하였다. 188210월 국내에서 전도하기 위해서 의주를 거쳐 서울에 와서 전도하여 여러 개종자를 얻었으며, 1883년 소래에 내려가 1884년 정기적인 주일 예배를 주관하고 한국인이 세운 첫 개신교회인 소래교회를 창립했다.

생애 / 초기 활동

서상륜이 만주에서 만난 선교사 중 한 명인 존 로스

1848(헌종 14) 719일 그는 평안도 의주에서 서석순(徐奭淳)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동생으로는 서상우(서경조)가 있었다. 그의 출생에 대해서는 일설에는 726일에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본래는 한성의 양반 가문이었으나 서유묵(徐有默)의 대에 평안북도 의주에 정착하였다. 어려서 서당에 다니면서 한학을 배웠는데 이때 배운 한자 실력은 후일 그가 성경을 번역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콜레라로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중국을 드나들며 만주에서 동생 서경조와 함께 홍삼을 판매하는 한편 약재나 비단을 입수하여 국내에 판매하는 무역에 종사했다. 1878(고종 15) 행상으로 만주 뉴좡(牛莊)에 갔다가, 병에 걸렸을 때 매킨타이어 목사의 주선으로 아일랜드장로교회 선교병원의 헌터 의사의 치료를 받은 뒤 매킨타이어의 전도로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879년 김진기, 백홍준, 이응찬, 이성하 등이 세례를 받고, 로스와 매킨타이어의 한글 성경 번역 사업에 조력하고 전도함에 따라 서상륜도 번역과 전도 사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서상륜은 1882년 초 선양의 존 로스 목사를 찾아가 성경 번역에 5개월 간 참여하면서 인쇄 일도 도우며 성경과 기독교를 더 배우고 528일 로스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한국인으로서는 여섯 번째 개신교 세례 신자가 되었다. 로스는 1882106일 서상륜을 영국성서공회 상하이 지부의 지원을 받는 한국의 첫 권서로 임명하고 의주와 서울에 파송했다. 로스는 그에게 500여 권의 한글 복음서와 500여 권의 소책자를 주고 3개월 간 권서로 조선 국내에서 활동하게 했다.

성경 번역 활동 / 누가복음, 요한복음의 번역

1876년부터 만주에서 선교하던 영국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로스와 그의 매제 맥킨타이어가 1879년부터 이응찬(李應贊)과 여러 번역 조사의 도움을 받아 신약 성경의 한글 번역에 착수했다. 첫 한글 복음서인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의 번역이 1882년 봄에 완성되었는데, 그 최종 원고 작성에 서상륜이 참여했다. 이 두 복음서는 각각 3,000부가 출판되어 서간도와 조선에 배포되었다.

로스는 스코틀랜드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18815월 만주로 돌와와서 뉴좡은 매킨타이어에게 맡기고, 봉천(현 선양시)에 새로운 선교지부를 개척했다. 그는 한글 성경을 출판하기 위하여 문광서원(文光書院)을 설립했다. 로스는 1881년에 실험적으로 소책자 '예수셩교문답''예수셩교요령'을 출판한 후,1882년 봄에 순한글로 '누가복음''요한복음'을 출판했다

신약성경의 번역 활동

1884년 조선에 기독교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그는 한글 신약 번역에 참여했다. 1880년대에는 만주에 파견된 스코틀랜드 영국성공회의 로스 목사 등의 성서 보급 활동에 적극 동참하였으며 1887년 신약성경인 예수셩교젼서의 번역, 교열, 출판에 적극 참여하였다. 1884년에는 직접 국한문으로 번역한 예수셩교젼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서를 만주 심양(瀋陽)으로 가져가 심양 문광서원에서 책으로 간행, 인쇄하였고, 같은 해 국내에서 전도하려고 의주로 돌아와 조선 최초의 개신교 예배를 주관하였다

1887년에는 로스 번역 성서(Ross Version)라고 하는 신약성경 번역본을 입수, 만주에 가서 예수셩교젼셔라는 제목으로 간행하여 귀국, 신약성경을 보급하였다. 이는 대부분 중국어 신약성경을 조선식 국한문 혼용으로 번역한 것으로, 신약성경의 활판 식자와 인쇄도 주도하였다. 그는 성서를 만들어내는 데 그치지 않고 국내에 배포하는 것도 시도하였다

번역된 성경을 가지고 고향 의주로 돌아왔으나 쇄국정책으로 기독교의 전래를 금하던 때여서 외갓집인 황해도 장연군 소래로 피신하여 거기에서 전도를 하여 1883년 소래교회를 설립하였다.이때 그의 전도를 받고 교회에 나간 이 중에는 의주 출신인 최명오(崔明悟)가 있었는데, 그는 초기 장로교 조사(지금의 전도사)로 활동하였다. 이때 그의 전도를 받은 신도들 중에는 후에 한성으로 가 새뮤얼 모펫을 도와 연동교회(蓮洞敎會)의 헌당을 지원하고 초대 교인이 되었다

선교 활동

서상륜이 설립에 참여한 한국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

1883년 중국에서 구입한 성경전서들을 보따리에 싸서 입국을 시도하다가 국경지대에서 적발되어 의주군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러나 당시 의주부청의 집사로 근무하던 장로교 교인이었던 김효순(金孝順)의 도움으로 탈출, 고향인 의주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개신교 탄압이 계속되자 상황이 불리함을 깨닫고 동생 서경조와 함께 은신해 있다가 황해도 장연군 솔내(松川) 마을로 이주하여 교회를 세우고 전도활동을 시작하였다. 동생 서경조(후에 목사가 됨)와 함께 세운 이 교회가 한국 최초의 자생 개신교 교회인 솔내교회 또는 송천교회로 나중에 발음이 바뀌어 소래교회가 되었다. 한편 1887년 경성에 새문안교회가 설립될 때 설립교인 14명 중 13명이 그의 전도로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이었다. 동생 서경조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장로교회 목사가 되었다. 

1887(고종 24)에는 황해도 전역을 순방하던 미국인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가 장연 솔내에 와서 서상륜, 서경조, 정공빈 등 100여 명의 신자에게 한국 개신교 교회 역사 처음으로 세례를 집전하였다. 18986월 전도와 교회 설립 등에 대한 제한이 풀리자 서경조와 서상륜은 옹진군 백령면 연화리의 한학서당에 중화동교회(中和洞敎會)를 개설하여 설립, 예배를 인도하였고, 1899년 소래교회에서 건축자재를 구하여 40평의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그밖에 그는 만주의 헤이룽장성(黑龍江省)으로도 가 그곳에 사는 동포에게도 기독교를 전도하였다. 대한제국 수립 이후에는 한성에서 한국 최초의 개신교 예배 집회를 주도하기도 했다. 1887년 새문안교회를 창립할 때에도 참여하였으며, 말년에는 솔내 교회에서 전도활동에 전념하였다. 1907년에는 의병이 활동하자 고종의 특별 지시를 받고 상경, 의병 자체 해산을 촉구하는 선유칙서를 받아 전국에 보급하는 활동을 하였다. 대한제국 멸망 이후에는 관서, 관북 지방에서 성경을 보급하다가 1926년 아들을 따라 간 상해에서 생을 마쳤다

사후

부인에게서는 딸 서윤애만이 있었으므로 동생인 서경조의 둘째 아들 서병호를 양자로 입양하였다. 독립운동가 서재현의 양 할아버지이다

19369월 제25회 조선 장로교회 총회에서 그의 선교, 성경전서 번역을 기리는 기념비 건립이 결정되어, 1938년 그의 묘지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가족 관계

동생 서경조의 본명은 서상우이고 호는 경조인데, 후에 경조라는 아호를 이름처럼 사용하게 되었다. / 아버지: 서석순(徐奭淳) / 동생: 서경조(徐景祚, 본명은 서상우(徐相佑), 호는 경조(景祚)), 목사 / 조카: 서광호(徐光昊) / 부인: 이름 미상 / : 서윤애 / 양자: 서병호, 동생 서경조의 둘째 아들 / 양 며느리: 김구례(金求禮), 독립운동가 겸 중도 우파 정치인 우사 김규식의 처형 / 양 손자: 서재현 / 증손자: 서경석, 목사

기타

양 며느리 김구례(金求禮)는 독립운동가 김필례, 김순애의 언니이자, 독립운동가 김마리아의 고모였다. 또한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낸 우사 김규식의 처형이었다

김마리아의 아버지 김윤방(金允邦)은 본래 한학자였으나, 서상륜의 전도로 장로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신앙 전도, 계몽 활동에 동참하게 되었다. 출처 위키피디아

책소개

한국 “최초의 자생교회”“소래교회”를 세운 개척자 '서상륜'의 삶을 기록한 책이다. 서상륜은 1848년 평안도 의주에서 출생했다. 당시 조선은 쇄국정책으로 외교의 문이 닫혀 서양문화의 접근이 불가능하였으며, 나라 안은 가난과 온갖 전염병에 시달리며 문화와 문명의 세계를 모른 채 살아가는 백성이 많았다. 그때 의주에서 고려문을 드나들며 홍삼장사를 하던 서상륜은 1878년 만주에서 활동하던 로스와 매킨타이어 선교사를 만나 그들에게 조선말을 가르쳐 주는 일을 하다가 성경을 읽고 감동되어 로서의 전도로 예수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았다.

서상륜은 1882년 로스 선교사와 함께 최초로 「누가복음서」를 한글로 번역하였다. 그 후 서상륜은 자신이 번역한 「누가복음서」를 가지고 고향인 의주로 잠입하여 황해도 장연군 소래에서 전도 활동을 하다가 1883년 소래교회를 세움으로써 마침내 “한국 최초 자생교회”를 세우는 업적을 남겼다. 그는 1887년 새문안교회가 세워질 때에도 큰 공을 세웠으며 또한 관서, 관북지방의 권서로서 복음사역에 크게 기여한 후 1926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책은 한국 기독교선교역사에 초석을 이루며 빛을 드러낸 그의 위대한 업적과 숭고한 신앙을 조명한다.

목차

목차

발간사 _ 박경진
머리말 _ 김수진

1부 :: 조선의 첫 순교자 토마스 선교사
1. 한문성경을 조선에 전해준 구출라프 선교사
2. 인생의 첫 슬픔을 만난 토마스 선교사
3. 황해도 백령도에 머문 토마스 선교사
4. 대동강에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

2부 :: 로스 선교사와 고려문
1. 로스 선교사가 중국에 오기까지
 1) 고려문은 온데간데없고
 2) 고려문에서 조선인을 찾고 있는 어느 선교사
 3) 기독교로 개종한 의주 청년들
2. 서상륜, 고려문에서 예수를 영접하다
 1) 성경번역과 출판
 2) 첫 복음서가 조선 땅에 상륙하다
3. 로스 선교사의 로스행전
 1) 로스 선교사의 숨결을 찾아서
 2) 중국인들과 함께 살아간 로스 선교사
4. 두 번째 맞이한 안식년
5. 로스 선교사의 마지막 사역
 1) 조선에도 세례교인이 있다
 2) 마펫과 게일 선교사를 상면한 로스 선교사
 3) 여성을 축출하면 안 됩니다
 4) 중국인 선교에 생을 마친 로스 선교사
 5) 지금도 동관교회에 살아있는 로스 선교사

3부 :: 서상륜의 발자취
1. 서상륜의 행적
 1) 고향을 탈출하다
 2) 당골 마을에 기도소리가
2. 소래에 자생적 교회가 설립되고
3. 소래교회 부지는 당골 마을
4. 서상륜의 서울 나들이
 1) 선교사들, 조선에 입국하다
 2) 새문안교회 설립에 참여한 서상륜 형제
5. 천민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는 서상륜
6. 소래교회와 매켄지 선교사
 1) 소래와 함께한 선교사들
 2) 매켄지 선교사, 소래에 도착하다
 3) 소래교회와 협력했던 매켄지 선교사
 4) 십자가 기를 높이 달고
 5) 소래교회 건축에 참여한 동학도들
 6) 천국으로 돌아간 매켄지 선교사
7. 매켄지 선교사의 맥을 이어간 캐나다 선교사들
8. 전라도 고부에서 일어난 동학농민운동
9. 총회장으로 고별식을 거행하다
 1) 솔직하게 회개한 서상륜
 2) 총회장이 아니어도 총회장을 할 수 있다
10. 소래교회 복원
 1) 황해도 소래교회, 6 · 25전쟁으로 파괴되다
 2) 경기도 용인시에 소래교회를 복원하다

4부 :: 서경조 조사가 목사 되기까지
1. 서경조는 누구인가
2. 백령도 중화동교회 설립자
3. 최초로 축도한 서경조 목사
4. 새문안교회 동사목사가 되다
5. 상해에서 삶을 마감하다

5부 :: 해서제일학교
1. 소래교회, 야학당으로 출발하다
2. 해서제일학교로 발전하다
3. 해서제일학교 역대 교장들
4. 걸출한 인물을 배출한 해서제일학교

부 록
1. 한국 기독교 선구자 서상륜과 이수정 기념비 발기인 대회
2. 한국 기독교 선구자 서상륜과 이수정 기념비 건립예배 및 제막식
3. 기념비 건립위원 명단

저자 소개

저 : 김수진
 
1935년 전남 신안에서 태어났다. 장로회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단국대와 연세대 연신원을 거쳐 일본 도시샤대 대학워에서 신학석사, 미국 풀러 신학교에서 목회학박사, 미국 코헨 대학 대학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0년대 일본 유학 시절, 한국 교회사에 관한 일본인 스승의 연구와 지적 수준에 자극 받은 이후, 당시로서는 거의 미개척 상태에 있던 한국 교회사 연구에 헌신하기로 결심하여 지금까지 기독교 교회사가로 활동하고 있다.

한영신학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장신대 신대원, 대학원, 평택대 대학원, 대전신대 대학원에서 강의를 했으며, 한일교회역사연구회 및 호남기독교사연구회 회장이자 KNCC 교회연합일치위원회 전문위원, 예장사편찬위원회 집필위원, 사형제도폐지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5922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since 2010):티스토리]

소래교회

1895 년의 소래교회모습 .
황해도
황해도 장연군

소래교회 또는 솔내교회(松川-, 송천교회)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자생한 개신교 교회로 1883 황해도 장연군에 세워졌다.

설립

평안도 의주 출신의 서상륜은 인삼장사로 만주를 오고 갔는데, 영국 개신교 선교사 존 로스 목사를 만나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성경번역을 도왔다. 그의 동생 서경조와 서상륜은 황해도 장연구 대구면 송천리의 소래마을의 한 초가집에서 1883516일 한국교회사 처음으로 한국인이 스스로 개신교 교회를 세웠다. 그후 18958칸의 기와집 예배당을 건축하였고, 18968칸을 증축하였다. 이후 소래교회는 신임 서양선교사의 한국어 교육장소로, 동학농민혁명 기간에는 동학군의 피신처로 사용했다.

유산

대한예수교장로회 황해노회는 이 교회의 설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소래교회를 복원하기로 결정하고 총신대 양지캠퍼스에 증축된 소래교회를 재현하였다. 이 교회출신 장철수 목사에 따르면 원래 교회보다도 교회 높이가 약간 낮은 것으로 진술되었다.

책소개

이 땅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
축복과 은혜의 열매를 맺다


한국의 험악한 국난 속에서 우리 기독교회 혼난 속에서 장로교회의 아름다운 역사를 빛내주신 장철수 목사님께 무릎 꿇고 인사드립니다. 특히 장철수 목사님께서 백세가 되어서도 세례 받으신 한국의 모교회인 소래교회의 역사를 기록하여 출판하게 된 것에 놀랄 뿐입니다.전남 무안 복길교회, 전남 함평 백호교회, 목포시 목포교회, 서울 신일교회 그리고 신일기도원 등 아름다운 예수님의 발자취를 걸어오신 장철수 목사님의 빛나는 걸음 앞에 넘치는 감사를 담아 축하드립니다. _ 서기행 목사

『소래교회사』에는 이 땅의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선교의 횃불을 들었던 소래성도들의 신앙과 정신이 이 땅과 민족과 조국에 대한 애국적 헌신이 실려 있는 역사서로 앞으로 우리 사회를 이끌어갈 성도들이 북한에 소래목동교회가 세워질 때쯤이면 북한 선교의 기도가 현실 되리라 확신하는 바입니다. _ 이영원 목사 

목차

추천사
저자 소개
머리글

1장 소래교회와 장철수 목사

1. 대구면(大救面) 이름의 유래
1) 서대방 솔샘(松泉) 마을에 소래교회 설립
2) 동학란 때 구원의 역사
3) 서대방 향장 김윤오 집사
2. 대구면과 소래마을 위치
3. 소래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유래
1) 토마스 선교사와 순교자 김자평(金子平) 성도
2) 콜벳 선교사와 목동(牧洞) 출신 순교자 김자평 성도
3) 마티어 선교사와 순교자 김자평(金子平) 성도
4. 소래(松川)교회 설립의 역사적 배경

2장 소래교회 역대 교역자

1. 소래교회 설립자 서상륜 조사
1) 서상륜 성도 세례
2) 성경 번역과 인쇄
3) 전도
4) 서상륜 성도와 선교사의 만남
1. 소래교회 초대 장로, 초대 목사 서경조
1) 소래교회 설립
2) 장로장립
3) 목사 장립
4) 감사절 제정
5) 목회
3. 이승철(李承哲) 목사
4. 김응순(金應珣) 목사
5. 조응철 목사
6. 허간(許侃) 목사

3장 선바위골 예배처소

1. 선바위골 위치
2. 설립교인 김성섬(金聖贍) 집사 전도
3. 소래교회 설립예배

4장 아래소래 예배처소

1. 아래소래 위치
2. 아래소래 예배처소
3. 신앙교육
1) 성수주일
2) 사경회
4. 사회개화운동 실시(社會開化運動實施)
1) 미신타파와 제사폐지
2) 양력 지키기
3) 단발과 유색 옷 장려
4) 개량농사법과 펜윅 평신도 선교사
5) 구미포 선교사 휴양지와 명사십리 해수욕장
2. 동학란에서 구원
1) 동학란에서 소래교회 구원
2) 매켄지 목사 동학 해서지방 도접주 이돈선 구명
3) 소래교회에 내걸린 성 조지 십자기

5장 소래교회 예배당 건축

1. 예배당 건축과 헌당
2. 예배당을 T자로 8칸 증축
3. 소래교회 초대 담임목사 매켄지 선교사 순교
4. 사회개화운동
1) 해서제일학교
2) 식목
3) 도로정비
4) 3·1 독립만세운동

6장 새 예배당

1. 새 예배당 건축
2. 희년예배

7장 김성섬(金聖贍) 집사 가계(家系)

1. 김성섬(金聖贍) 집사
2. 장남: 김윤방(金允邦) 집사
1) 장녀 김함라 권사(金函羅, 1887~1975)
2) 차녀 김미염(金美艶) 의사
3) 삼녀 김마리아 열사(金瑪利亞, 1891~1944)
3. 차남: 김윤오(金允五) 집사(1853~?)
1) 외동딸 김세라
4. 삼남: 김윤열(?~1891년)
5. 사남: 김필순(金弼順)(1878년 6월 25일–1919년 9월 1일)
6. 장녀: 김구례
1) 남편: 서병호
7. 차녀: 김순애(金淳愛) 선생(1889~1976)
8. 삼녀: 김필례(金弼禮) 권사(1891년 12월 19일~1983년)

8장 소래교회에서 세운 지교회

1. 봉대교회(구미포교회)
2. 송탄교회
3. 서의동교회(西儀洞敎會, 서꼴교회)
4. 소래목동교회

맺는 글
참고문헌
소래목동교회 사진 인용 현황

저자 소개 

저 : 장철수
나는 해서제일학교 출신이며 한국의 어머니교회요 한국 교회의 심장과도 같은 소래교회에서 마지막 당회장 허간 목사에게 세례받고 집사 임명을 받았다. 공산정권에 의해 거룩한 이름 ‘대구면’과 ‘소래’가 말살되었고, ‘소래교회’와 ‘소래목동교회’도 허물어졌다. 언젠가 통일이 된다면 잃어버린 그 이름들을 되찾고, 그 땅 위에 소래교회를 재건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북녘에 있을 때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어느덧 많은 세월이 ...
 
편저 : 장형일
『소래교회사』의 편저자이다.

책 속으로

소래교회에서 해변 쪽으로 도로를 지나 100m 정도 내려오면 솔샘이 있다. 이 샘물은 불타산에서 지하로 수로를 만드시어 소래교회를 지나 솟아오르게 하였다. 그런데 이 샘물은 수량이 풍부하여 소래평야를 적시어 풍성한 곡식을 주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이 평야가 쓸모없이 버려진 땅이었는데 소래교회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히 보내신 김 판서 댁을 통하여 개간하게 하시어 옥토로 만들게 하셨다. 그 결과 소래마을은 풍요로운 마을이 되었다.

솔샘이 우리 가문에 주신 주님 사랑의 흔적은 놀랍게도 소래교회에서 분립하여 세운 소래목동교회를 통해 구원해 주신 것이다. 솔샘을 통해 소래마을을 풍요롭게 하셨던 것처럼 소래교회 서상륜, 서경조를 통해 대구면, 장연군, 황해도, 서울과 경기도, 경상도, 평안도, 함경도까지 전국적으로 직접 찾아가 복음을 전하여 많은 교회가 세워졌다.
--- p.27

당시 20대 청년이었던 황명대(黃命大)는 친히 목격하였던 것을 오문환 장로(1918년부터 토마스 목사 행적을 조사하며 200여 명을 면담한 후 1928년 토마스 목사 전을 출간)에게 “토마스는 죽기 전에 뱃머리에서 용감하게 홀로 ‘야소’를 외치며 남은 성경을 뿌렸다.”라고 증언하였다. 증언할 당시 80세의 고령이었던 그는 평양 부근 장로교회 신자였다. 이 대동군 대동강면 조왕리교회는 1932년 토마스 목사 기념교회로 선정되었다. 제너럴셔먼호가 불탈 때 당시 11세였던 최치량은 숙부를 따라 친척 김성집과 함께 구경 갔다가 토마스 선교사가 뿌린 성경을 들고 돌아왔다. 그때 20세였던 이신행도 한 권을 가지고 집으로 왔다. 그 후 그녀는 여자로서는 평양 최초의 교인이 되었으며 그녀의 아들인 이덕환도 장대현교회 장로로 시무하였다.

며칠 후 제너럴셔먼호에서 받은 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모두 체포하라는 관령(官令)이 내려졌다. 성경을 소지하고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태워버렸는데 영문주사로 있던 박영식은 사람들이 버린 성경을 수집하여 평양 대동문 안에 있던 자기 집 벽지로 사용하였다.
--- p.53

대상자는 일차적으로 서울에서 상업하고 있는 고향 친구들이었다. 서상륜 성도가 전도한 13명의 개종자를 얻어 로스 선교사에게 세례를 요청하였으나 로스 목사의 입국이 정치적 상황 때문에 불가능하여 세례를 받지 못했다. 1884년 세례받기를 원하는 신자가 79명으로 증가하여 다시 로스 선교사에게 조선으로 들어와 세례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때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같이 서상륜이 열심히 전도하고 있을 때 1884년 가을 알렌 의료선교사가 입국하였고, 1885년에는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입국하였다. 이때는 이미 서울에 삼백여 명의 신자들이 있었으나 교회가 없어 정식 예배는 드리지 못했다.

이후 언더우드 선교사가 1887년 9월 새문안교회를 세울 때 백홍준과 함께 언더우드 선교사의 초청을 받아 참석하였고, 설립 교인 14명 중 서상륜 성도가 인도한 교인 13명이 창립 교인이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씨를 뿌려야 할 때 이미 열매를 거두고 있다.”라고 본국에 보고하였다. 이때 새문안교회에서 백홍준과 함께 장로로 피택되었지만, 장로직을 가정적인 이유로 받지 않았다.

1887년 9월 27일(화) 새문안교회 창립 예배에 언더우드 선교사의 초청을 받고 참석하였던 존 로즈 선교사는 3년 후인 1890년 이렇게 회고하였다.
--- p.74

허간 목사는 1885년 9월 1일 백령도에서 출생했다. 교육가이며, 사회사업가인 허간 목사는 12세 되던 1897년에 예수를 영접하고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아 백령도 중 화동(中和洞)교회 집사로 교회봉사를 시작하였다. 청년 시절에 소래교회에서 세운 해서제일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봉직하며 훌륭한 인재를 많이 양성하였다.

1910년 한일합병 후 세부측량 때 일본 정부에서 백령도를 국유지로 만들어 백령도 도민의 생활권이 박탈되는 위기에서 청년 허간은 백령도 도민을 대표하여 정부를 상대로 5년간 재판한 결과 승소하여 백령도를 다시 민유지화(民有地化)함으로 백령도 도민의 은인으로 추앙(推仰)받았다. 1915년 11월부터 백령도 중화동교회, 사곶(沙串)교회 조사로 목회를 시작하여 1917년 장연 태탄교회(苔灘敎會), 무산교회(茂山敎會), 금동교회(金洞敎會), 사동교회(寺洞敎會), 가당교회(柯堂敎會) 등 5개 교회 조사로 시무하였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2년 반 옥고를 치르고, 재령군 미생촌교회(美生村敎會)에서 시무 중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23년에 제16회로 졸업하고, 4월 9일 황해노회 임시노회에서 목사 장립을 받았다. 목사 장립 후에도 미생촌교회에서 시무하였고, 이후 상거동교회(上居洞敎會), 강동촌교회(江東村敎會), 태탄교회(苔灘敎會), 이도교회(耳島敎會) 등에서 목회하였다. 신사참배가 굴욕적으로 이루어진 1938년 황해노회장으로 피선되어 난국을 극복했다.

1939년 한국교회의 어머니 교회인 소래교회 담임목사가 되어 시무 중 1942년 반동사상가로 지목되어 교역자 예비검속에 걸려 옥중에서 고역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석방되었다. 소래교회에서 시무 중 공산정권의 수립으로 목회자들의 감시가 심해지고 박해가 심해지자 월남하기로 결심하고 1947년 5월 23일 소달구지에 짐을 싣고 목동 우리 집(장철수 목사)으로 오셔서 밤에 뱃사공에게 부탁하여 백령도로 떠나도록 도와 드리고 나도 위험을 느껴 다음날인 1947년 5월 24일 밤에 월남하였다. 허간 목사는 백령도에서 토마스 전도 대원이 되어 옹진지구 여러 교회를 설립하고, 백령도 7개 교회가 연합하여 백령도 목회가 시작되었다. 1948년 황남노회를 창립하고, 백령도 성경학교를 설립(1948년 11월)하여 교장으로 봉직하며 교회지도자들을 양성했다.

1950년 6·25 전쟁 당시 공산군에게 체포되었으나 피살되지 않고 살아있다가 국군의 진격으로 자유의 몸이 되어 백령도 자체 치안책 임자가 되었다. 그리고 전쟁고아를 위한 자육원(慈育院)도 운영하여 자선 구제에 앞장섰다.
--- p.99~100

청일전쟁이 일어난 직후(1894년)에 도처에서 동학이 일어나 서양인 배척의 구호를 내걸고 예수교를 핍박하기 시작하였다. 장연지역 동학군은 기세가 매우 강하여 장연읍을 습격하여 군기고를 탈취하여 총검으로 완전무장을 하여 기세가 충천하니 많은 남자가 동학당에 가담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동학당으로 활동하며 주일에는 소래교회에 출석하여 교인으로 행세하였다. 이때 소래교회는 수백 명으로 교인 수가 급증하였다.

동학군의 해주 접주 김원삼이 동학군을 이끌고 서양종교를 믿는 지도자 서경조와 서양인 메켄지, 그리고 소래교회 교인들을 처치하러 30리 밖까지 진격해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소래교회 성도들은 모두 예배당에 모여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기도하던 서경조는 죽음을 각오하고 분연히 일어나 소래를 향하여 오며 이웃 동네에서 작폐가 적지 않은 동학의 두목 김원삼을 찾아갔다. 이때 동학의 두목 김원삼은 자기가 죽이려 하는 서경조가 자기 발로 찾아옴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자리를 같이하고 동학대전(東學大典)의 진리에 대해 깊이 토론했다. 김원삼은 자신도 완전히 해석하지 못하는 동학의 경문을 서경조가 해석하는 것을 보고 서경조에게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김원삼은 동학군들에게 “소래의 서경조와 메켄지를 안전하게 보호하라.”고 훈령을 내리고 소래를 침범하지 않고 곧바로 후퇴했다.
--- p.135

1895년 7월 23일은 매켄지 목사가 순교한 날이다. 독신으로 송천에 와서 오로지 선교에 열중하여 교회를 돕던 매켄지 목사에게 불행이 닥쳐왔다. 남의 집 사랑방에 거처하다가 조금이라도 불편을 덜기 위하여 예배당이 준공되기 전에 남자 부속실을 급히 꾸미고 거처를 옮겼다. 부속실에서 생활하던 중 열병에 걸려 교인들이 지성으로 간호하였으나 의료시설도 없고, 약품 공급도 원활하지 못한 시골이어서 병세가 점점 악화되었다.

어느 날 밤 총소리가 요란하게 마을에 울려 펴졌다. 사람들은 총소리가 난 예배당으로 달려가 매켄지 목사의 거처로 달려가 문을 두드렸으나 방안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고, 화약 냄새만 났다. 방문을 뜯고 들어가 보니 매켄지 목사가 죽어 있고 그의 옆에는 평소 지니고 있던 총이 놓여 있었다. 송천교회에서 첫 순교자가 난 것이다. 교회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예배당 뒤 500m 정도 떨어진 벌판에 안장했다. 그리고 커다란 하얀 차돌로 비석을 세웠다. 앞면에는 약력을 쓰고, 뒷면에는 밀알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성경 말씀(요 12: 24)을 중심으로 그의 순교 정신을 새겼다.
--- p.161

1919년 3월 1일 평양과 서울에서 독립 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황해도 일대를 돌며 독립운동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서울로 돌아온 3월 5일이 서울의 학생들이 남대문 역(현 서울역) 앞에서 격렬한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한 날이었다. 이날 독립만세 시위에 정신여학교 학생들도 다수 참석하였기에 일경의 방문 조사가 이루어졌고 그곳에 있던 김마리아 열사(烈士)도 독립만세 운동의 주모자라며 체포하여 남산골 한옥마을에 있는 악명높은 왜성대(倭城臺) 조선총독부 경무대로 끌려갔다. 무서운 고문 도구가 가득한 취조실에서도 김마리아 열사(烈士)는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배후와 연루자를 밝히라는 압박과 혹독한 고문을 하며 ‘일본 연호로 대답하라’는 말에 ‘나는 일본 연호는 모르고 서기밖에 모른다’라고 대답하였다. 또 재판관이 ‘피고를 무죄로 석방하면 독립운동을 하지 않겠는가?’라고 질문하자 ‘독립운동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느냐? 재판관은 자기 나라가 망해도 독립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말이니, 그런 온당치 않은 말이 어디 있소.’라며 도리어 꾸짖었다.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된 후 모진 고문을 당해 메스토이병에 걸려 평생 고통에 시달렸다.

일제 형사들은 김마리아 열사(烈士)와 동경 유학생 조직과의 관계를 캐고자 혈안이 돼 있었다. 날카로운 꼬챙이로 손톱 밑을 찌르는 고문은 시작에 불과했다. 대막대기로 머리를 때려 실신한 것도 여러 차례였다. 끝내 입을 열지 않자 실로 충격적인 고문을 감행했다. 김마리아를 죄수나 옥에 갇힌 사람들 앞에 옷을 벗기고 다니게 하고 심지어 죄수들 앞에 세워두고, 기어서 다니게 하여 최대한 수치심을 유발하였다. 그래도 입을 열지 않자 달군 인두로 한쪽 가슴을 수차례 지져 한쪽 가슴이 없어졌다. 이 사실은 김마리아 열사(烈士)의 수양딸 배학복이 간직해온 특별한 한복 저고리를 보여주며 한 증언이다.

간수가 김마리아를 데리고 법정으로 갔다. 일본인 재판관은 “너희의 소란으로 조선의 독립은 결코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 너는 복종해야만 한다. 앞으로는 현모양처(賢母良妻)가 되어라”고 말하였다. 후에 마리아는 이렇게 말하였다.

“재판관은 알았을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바로 그 현모양처란 말이 고문 후유증으로 죽어가던 나를 다시금 깨어나게 해준 것을.”

김마리아 열사(烈士)는 41세 때 기자들이 “왜 결혼하지 않느냐?”라고 물어보자 “나는 평범한 삶을 포기한 지 오랩니다. 비록 족두리는 쓰지 않았지만, 결혼한 거나 다름없죠. 일본 재판관이 현모양처가 되라고 했을 때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기로 했으니까요.” 대답하였다. 1919년 8월 4일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출감 후에도 조국 독립의 꿈을 잃지 않고, 더욱 강하게 활동하며, 정신여학교 동문과 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전국적 규모로 확대하고 활력을 불어넣었다. 김마리아 열사(烈士)는 연합회 회장을 맡고, 황애덕이 총무로 선임하여 활동하였고, 김마리아는 “본회의 목적은 대한민국 국권을 확장하는 데 있다.”라고 하여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임을 분명히 밝혔다. 국권 회복을 위해 독립운동 자금을 비밀리에 모금하여 1919년 11월 6,000원의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 p.197~198

김필례(金弼禮) 권사는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소래 구석몰에서 아버지 김성섬 집사와 어머니 안성은 성도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소래교회에서 설립한 해서제일학교(海西第一學校)를 졸업하고, 1903년 서울 연동여학교에 입학하여 두 번 월반하고, 1907년 연동여학교(蓮洞女學校) 1회 졸업생이 되었고 졸업 후 연동여학교 수학 교사로 재직하였다.

1907년 일본이 대한제국 군대 해산으로 무력충돌이 발생하자 오빠 김필순을 도와 부상병을 간호하면서 이 끔찍한 현장을 목격(目擊)하며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다. 1908년 관비유학생(官費留學生) 자격이 주어지는 일본 동경여자학원(東京女子學院,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기독교 학교) 중등부에 입학하여 역사를 전공하고 1913년 졸업하고, 고등부를 1916년에 졸업했다.

1914년 영화음악전문학교(英和音樂專門學校)를 같이 수학(受學)하였다. 1915년 4월 동경 여자유학생이 모여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東京女子留學生親睦會)”를 조직하고 김필례(金弼禮)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이 친목회는 단순한 친목회가 아니고, 한국여성계의 광명이 되어 스웨덴의 여성해방론자 엘렌 케이(Ellen Key)와 같은 이상적 부인의 삶을 창조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김필례 권사가 귀국한 후 조카 김마리아가 회장직을 이어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유학생 교양 잡지 “여자계”를 1917년 12월 출간하였다. 일본 유학 시절에 기독교 청년연합회(YWCA)에서 활동하며 식견을 넓혔다. 1916년 동경 여자학원 고등부와 영화음악전문학교(英和音樂專門學校)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4월부터 정신학교 교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1918년 6월 20일 의사 최영욱(崔泳旭)과 결혼하여 정신여학교 교사직을 사임하고, 시댁이 있는 광주에서 살게 되었다. 결혼 후 오빠 김필순이 치치하얼(濟濟哈爾, 제제합이)로 들어와 함께 일하자고 보내 온 제안이 의미와 보람이 크기에 반갑게 받아들여 흑룡강성(黑龍江省) 치치하얼(濟濟哈爾)에 봉사하러 갔다. 남편 최영욱은 병원 일을 하고, 김필례 집사는 주로 농사짓는 농민 동포들의 무지를 일깨우는 일을 열심히 했다. 이때 첫아이를 임신하게 되었다. 임신으로 인한 건강 악화와 시어머니의 곤경을 듣고 귀국해 광주 수피아여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 p.220~221

공산당의 박해를 피해 우리 가정까지 월남하니 소래목동교회는 또다시 문을 닫게 되었다. 소래목동교회 만이 아니고 북한의 교회들이 문을 닫았고, 주의 종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월남하여 남한에서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계승시키며 하나님나라를 확장하고 있다.

나도 믿음을 지키기 위해 월남하여 부천 농촌지도소에서 근무하면서 아들들에게 복음을 계승시키며 살던 중 6·25 전쟁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장인이 목회하고 있는 학다리에 도착하여 한숨 돌리고 있는데 공산군이 가까이 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장인, 처남, 나 이렇게 남자 세 명은 가족들을 학다리에 두고 부산으로 피난 가다 강진 송산교회에서 예배드리는데 공산군이 지나가 부산으로 가는 길도 막혀 산속에 들어가 숨었다. 산속에 숨어있으며 나는 장예숙을 장철수라 개명하고 새사람이 되어 내려와 가족이 있는 학다리로 돌아오는 길에 공산당에게 붙잡혀 죽게 된 순간 하나님께서 살려주시고 목회자의 길로 인도하셨다.

첫 목회지 복길교회는 공산군이 1950년 10월에 후퇴하며 마을 사람 149명을 잔혹하게 학살(성도 43명이 순교)당해 복길교회 성도들은 슬픔에 잠겨있었다. 나는 학살이 일어나고 3개월 후(1951년 1월) 복길교회에 부임했다. 하나님께서는 공산 정권에게 모든 것을 빼앗겼고,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나온 나를 보내셔서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마음을 주셔서 말씀을 전하며 성도들을 위로하였다.

또 하나님께서 나를 가정에서 예배드리는 미자립교회로 보내셔서 예배당을 건축하게 하시고, 총회신학교에 보내셔서 공부하고 1958년 2월 졸업(제7회)했다. 1960년 2월 12일에 목포노회에서 목사안수 받은 후 독천교회에서 당회를 조직하고 날마다 부흥되고 있을 때, 목포노회에서 해남 원진교회로 파송하였고, 다시 목포노회에서 목포교회로 파송하여 목회하였다.

나는 주님의 명령에 복종하며 목회하기를 원했고, 우리 가정의 형편을 고려하여 피하려 하지 않았다.

1971년 6월 6일 신일교회를 개척하여 2003년 6월 6일 은퇴할 때까지 32년간 목회하고 신일교회 원로목사와 경기노회 공로목사로 추대되었다. 2003년 은퇴 후에는 군 여단장이 문암교회 담임목사로 위촉하여 2013년까지 군 선교목회를 했다.

나는 목회를 하면서 고향 소래목동교회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면서 공산당에게 빼앗긴 소래목동교회를 통일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 재건하겠다는 생각을 명절에 만나면 아들들에게 말하였다. 그리고 경기도 포천군 문암리에 신일기도원을 세우며 “통일이 될 때까지 가문의 고향이라 생각하며 살아가자”라며 이십여 년을 살았다. 그런데 얼마 전 둘째 형일 장로가 “아버지! 아들 장가람 목사와 사위 장재우 목사가 할아버지 시대에 잃어버린 북한교회를 마음에 품고 기도하며 통일이 되면 복원할 청사진을 그리고 있어요”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소래목동교회가 자손들의 가슴속에서도 살아나고 있음을 느끼며 전율이 일어나 아들들과 소래목동교회 재건의 꿈을 공유하고 청사진을 그리며 지내니 더욱 갈망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할 때 블레셋 진영은 베들레헴에 있고, 다윗왕은 산성에 있으면서 다윗왕이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샘물을 갈망하여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꼬”라고 말하자 세 용사가 일어나 블레셋 군대를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온 사건이 떠 오른다. 다윗왕이 적군에 빼앗긴 베들레헴 우물물을 갈망한 것처럼 나도 공산정권에 빼앗긴 저 북녘땅에 있는 목자들의 샘물을 간절히 갈망하게 되었다.

남북통일이 되면 사랑하는 자손들이 목자들의 샘을 되찾고 재건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가문에게 사랑의 표로 주신 귀한 목자들의 샘물을 길어오는 꿈을 꾸니 가슴이 벅차오른다.
--- 본문 중에서
 
용인 총신대 소래교회 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