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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고려의 속국이었다 (2023) - 정사(正史)로만 입증한 고려 제국사

동방박사님 2024. 8. 17.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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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일본은 한국·중국과 달리 진정한 기전체 정사가 단 1권도 없다. 자신들의 시대에 자신이 편찬하는 편년체 정사마저 아주 짤막하지만 윤색으로 범벅된 6국사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래서 세계 최고의 기전체 정사로 정평이 난 『고려사』의 기초자료가 소실 분서되었다며 침소봉대(針小棒大)·무중생유(無中生有) 허위 날조하여 가치를 폄하시킨 후 편년체 정사인 『고려사절요』가 『고려사』로 되었다고 완전히 왜곡해 민족적 열등감을 폭발시켜 왔다. 일본은 일본서기를 시작으로 나라 시대~헤이안 시대 중기까지 6개의 역사서(모두 기전체가 아닌 사료적 가치가 떨어지는 편년체)가 국가 주도로 편찬되었다. 이를 6국사(六國史)라고 부르며 일본에서 정사의 개념은 이 6국사만 의미한다. 『일본서기』, 『속일본기』, 『일본후기』, 『속 일본후기』, 『문덕천황실록』, 『삼대실록』이 6국사이다.

꾸준히 정사가 편찬된 한국이나 중국과 달리 일본은 901년 3대 실록이 편찬된 이후 국가에 의한 정사 편찬은 중단되었다. 한국과 중국에선 한 왕조가 멸망하면 다음 왕조가 전 왕조의 기전체 정사를 쓰는 전통이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역사 기록이 시작된 이후 왕조가 교체된 적이 없으므로 결국 자신들의 역사를 자신이 편찬한 셈이다. 따라서 중국이나 한국의 기전체 정사와 달리 굉장히 윤색이 심하다는 특성이 있다. 대표적으로 임나일본부설인데, 일본 주류 사학계에서도 제2차세계대전 패전 이후로는 6국사가 윤색이 있다는 것을 기본 전제로 깔고 본다.

이 책의 서지학적 지향점은 제갈공명의 천하삼분지계의 구상을 원용한 천하사관 삼분지계이다. 첫째, 『일본서기』 등 일본 사료를 텍스트로 삼는 셀프 축소·은폐·왜곡의 친일식민주류 강단사관이다. 둘째, 일본 극우 조작 유포 위서 『환단고기』 류를 기반으로 셀프 역사 희화화, 판타지 소설화로 귀결한 재야 사이비 민족사관이다. 셋째, 『고려사』, 『금사』 등 한중 정사(正史)와 브리태니커 영문백과사전 세계 공인 정사(正文)만을 근거로 문무대왕, 고려 태조, 세종대왕, 정약용, 신채호, 정인보의 맥을 잇는 강효백의 대한민족 정통사관이다.

목차

1. 태조 왕건 황제, 함께 새롭게 ‘함여유신’을 선포하다
2. 고려는 황제국 스모킹건 20
3. 호남차별 근거로 날조 악용된 훈요십조의 진실
4. 천안(天安)은 황제 국가의 도시 이름
5. 고려는 삼한+발해 4한 통일 제국
6. 고려 시대 만주는 우리 땅
7. 동만주는 고려의 직간접 통치 지역
8. 금(金)의 고려에 대한 무한 존경 보은 20선─ 근거: 『금사(金史)』
9. 일본 등 30여 개국 수장에게 조공받은 고려 제국
10. 일본은 고려 제국의 속국이었다
11. 정약용이 옳았다! 철리국의 위치
12. 강감찬을 ‘강한찬’으로 바로 모셔라
13. 세종의 최대 역점 사업, 한글 창제보다 『고려사』 편찬
14. 일제가 10리를 4㎞로 축소 조작한 까닭
15. 윤관이 산성을 쌓은 공험진은 흑룡강성 학북진
16. 왜곡 조작의 끝판왕, 일본의 왜구와 원구
17. 이성계는 두 번 압록강을 건너 고구려 옛 땅을 수복했다
18. 응답하라! 1023년 고려 제국
19. 新 아방강역고 고려 제국
20. 남녀평등과 휴머니즘의 유토피아 고려제국 ─ 형벌제도

저자 소개

저 : 강효백 (姜孝伯)
경희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대만사범대학에서 수학한 후 국립 대만정치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베이징대학과 중국인민대학 등에서 강의했으며 주대만대표부와 상하이 총영사관을 거쳐 주중국대사관 외교관을 12년간 역임했다. 상하이 임시정부에 관한 기사를 『인민일보』(人民日報)에 대서특필하게 했으며 한국인 최초로 기고문을 싣기도 했다. 지금은 경희대학교 법무대학원 교수(법학전문대학원 겸임교수)로 있다. 저서...

책 속으로

『사고전서』 속의 송대의 저명학자 곽약허(郭若?)의 『도화견문지 (????志)』(1080년) ‘고려국(高麗國)’ 편에는 “왜국은 일본국이다. 본래 이름인 왜를 부끄러워했는데, 동쪽 끝에서 스스로 일본이라 부른다. 지금 고려에 신하로서 속하고 있다(倭國乃日本國也, 本名倭, ??其名, 又自以在極東, 因號日本也. 今則臣屬高麗也)”로 기록해 일본을 고려의 속국으로 명시하고 있다. 일본은 고려를 대국으로, 고려 군주를 황제로 모셨다. 고려 제국의 군주들은 황제의 전용어인 조서, 성지, 칙령을 사용했다.

‘조서(詔書)’는 황제의 명의로 작성되는 공문서이다. 조서를 넷으로 세분하면 황제가 중앙정부에 하달하는 명령을 ‘조(詔)’, 일반 백성에게 하달하는 명령을 ‘칙(勅)’, 법제를 고치거나 상벌을 내리는 ‘제(制)’ 황제가 제후를 봉하는 명령을 ‘책(策)’이라 하였다. 이런 황제의 명령들은 통틀어서 ‘성지(聖旨)’ 또는 ‘칙령(勅命)’이라고 했다. 『사고전서』 속의 송대의 저명학자 곽약허(郭若?)의 『도화견문지????志』(1080년)

조서는 황제국에서만 사용되었으며, 제후국에선 교서(敎書)와 어명(御命)으로 불렸다. 황제국 고려(918~1274년)는 당연히 황제의 명령, 조서(조· 칙· 제· 책 포함)와 성지를 사용하였다. 원 나라 간섭기 이후와 조선 시대에는 조서를 쓰지 못하고 교서라고 했다. 조서의 명칭을 회복한 건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한 1897년 10월 12일 이후의 일이다.
· 태조가 조서(詔書)를 내리고 신하들이 사례하다.
─ 『고려사』 세가 제1권 918년(태조 원년) 918년 6월 16일(음)
· 고종이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농사가 바야흐로 바쁜 시기에 큰 가뭄이 들어서 해를 끼치고 있는데, 이는 진실로 형정이 잘못된 탓이므로 짐은 매우 두려워하노라.”라고 하였다.
─ 『고려사』 세가 제23 1242년(고종 29년) 9월 2일(음)
16세기 초까지 일본은 고려와 조선 군주에게 황제에게 올리는 표문을 바쳤다.
신하가 황제에게 올리는 공문을 ‘표문(表文)’이라 하고 제후나 태자에게 올리는 글을 ‘전문(箋文)’이라고 했다. 황제국 고려는 당연히 ‘표문’을 썼다. 그런데 고려가 제후국의 격식을 쓴 원 나라 간섭기 이후와 조선시대 전반기 16세기 초까지 일본과 유구국(琉球國, 지금의 오키나와현)는 고려와 조선 군주에게 신하가 황제에게 바치는 공문인 표문을 올렸다.(16세기 말 임진왜란 이전까지 일본은 조선을 상국(上國) 또는 대국(大國)으로 부르며 칭신(稱臣)했고, 신하가 황제에게 바치는 공문형식의 표문을 올렸다.)
· 무릇 표문을 올리는 경우 성상폐하를 칭하게 하고 전문을 올리는 경우에는 태자전하를 칭하도록 할 것이며, 제왕(諸王)은 영공(令公)이라 할 것이며, 중서령과 상서령은 태사령공(太師令公)이라 할 것이며, 양부(兩府)의 집정관은 태위(太尉)라고 할 것이다.
─ 『고려사』 제84권 지38 형법1 공첩상통식 외관 예의상정소
· 유구국 중산왕이 칭신하는 표문을 올리다.
김윤후 등이 유구국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중산왕(中山王) 찰도(察度)가 또 그 신하 옥지(玉之) 등을 보내서 신하를 칭하는 표문을 올리고 포로로 잡힌 우리나라 사람 37명을 돌려보내며 이어 방물(조공)을 바쳤다.
─ 『고려사』 세가 제45권 1390년(공양왕 2년) 8월 28일(음)
· 일본의 국승 현교가 칭신하며 표문을 바치다.

일본의 국승(國僧) 현교(玄敎)가 승려 도본(道本) 등 40여 인을 보내어 와서 방물을 바치며 칭신하며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하늘과 땅은 높으면서 넓기 때문에 만물을 덮어주고 실어 주며, 해와 달은 밝고 높이 비추기 때문에 만방을 환하게 해줍니다. 공자와 맹자는 인의에 근본을 두고 있기 때문에 모든 풍속을 가르치고 배양할 수 있으니, 이 셋과 같은 것들은 고금에 그 공을 나란히 할 만한 것이 드뭅니다. 가만히 듣건대 고려국왕 전하는 덕이 천지를 뒤덮고 밝기가 일월보다 뛰어나며 도가 공맹을 초월한다고 하였습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사방의 오랑캐 국가들과 초목과 금수가 패연히 그 큰 은택을 입었으니, 전하와 그 공을 나란히 할 만 한 자는 아직까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상서가 감응하여서 기린과 봉황이 길상을 바치고, 교외 풀숲에서 조화롭게 울고 있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현교는 멀리 태양 아래 일본 오랑캐 땅에 거하여 지극히 노둔하여 볼 만한 것이 없습니다. 다만 멀리서 화봉이 천추만세만만세(千秋萬歲萬萬歲)를 아뢰는 듯이 하여 예의상 조금이나마 잘못으로부터 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도본 등이 말하기를, “중국에서 일찍이 일본이 칭신하지 않았기 때문에 꾸짖었는데, 우리나라에서 대답하기를, ‘천하란 것은 천하의 천하인데 어찌 한 사람의 천하겠는가.’라고 하며, 끝내 칭신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대국(大國, 고려)에 칭신하는 것은 상국에 대한 의(義)를 사모해서입니다.”라고 하였다.
─ 『고려사』 46권 1391년(공양왕 3년) 10월 21일(음) 갑술(甲戌) 20

일본은 고려 말까지 오늘날의 대사격인 국승을 파견하며 자국(일본오랑캐 땅, 日下夷地)은 중국에도 칭신하지 않고 중국을 대국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고려 군주에 대해서는 ‘만세 만세 만만세’로 황제의 예로 경칭하며 자국을 고려의 신하 나라로 자칭 칭신하고 고려를 대국(大國)으로 사대하여 온 사실(史實)과 사실(事實)을 대외국호 고려공화국(대내 국호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정사(正史) 『고려사』에 명기하고 있다. 문화재청을 비롯한 관계 당국은 세계문화사상 전무후무한 자기 역사 말소, 자기 선조 모독 집단 패륜 죄행을 더이상 자행하지 말라. 한국사 최고 성군 세종대왕이 총편집장, 조선 최고의 엘리트 집단 집현전 학사들이 편집위원을 맡아 32년간 심혈을 기울여 집필한 기전체 정사 『고려사』를 하루빨리 국보로 승격시킬 것을 재삼 촉구한다.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일본은 한국·중국과 달리 진정한 기전체 정사가 단 1권도 없다. 자신들의 시대에 자신이 편찬하는 편년체 정사마저 아주 짤막하지만 윤색으로 범벅된 6국사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래서 세계 최고의 기전체 정사로 정평이 난 『고려사』의 기초자료가 소실 분서되었다며 침소봉대(針小棒大)·무중생유(無中生有) 허위 날조하여 가치를 폄하시킨 후 편년체 정사인 『고려사절요』가 『고려사』로 되었다고 완전히 왜곡해 민족적 열등감을 폭발시켜 왔다.

일본은 일본서기를 시작으로 나라 시대~헤이안 시대 중기까지 6개의 역사서(모두 기전체가 아닌 사료적 가치가 떨어지는 편년체)가 국가 주도로 편찬되었다. 이를 6국사(六國史)라고 부르며 일본에서 정사의 개념은 이 6국사만 의미한다. 『일본서기』, 『속일본기』, 『일본후기』, 『속 일본후기』, 『문덕천황실록』, 『삼대실록』이 6국사이다. 꾸준히 정사가 편찬된 한국이나 중국과 달리 일본은 901년 3대 실록이 편찬된 이후 국가에 의한 정사 편찬은 중단되었다.

한국과 중국에선 한 왕조가 멸망하면 다음 왕조가 전 왕조의 기전체 정사를 쓰는 전통이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역사 기록이 시작된 이후 왕조가 교체된 적이 없으므로 결국 자신들의 역사를 자신이 편찬한 셈이다. 따라서 중국이나 한국의 기전체 정사와 달리 굉장히 윤색이 심하다는 특성이 있다. 대표적으로 임나일본부설인데, 일본 주류 사학계에서도 제2차세계대전 패전 이후로는 6국사가 윤색이 있다는 것을 기본 전제로 깔고 본다.

이 책의 서지학적 지향점은 제갈공명의 천하삼분지계의 구상을 원용한 천하사관 삼분지계이다. 첫째, 『일본서기』 등 일본 사료를 텍스트로 삼는 셀프 축소·은폐·왜곡의 친일식민주류 강단사관이다. 둘째, 일본 극우 조작 유포 위서 『환단고기』 류를 기반으로 셀프 역사 희화화, 판타지 소설화로 귀결한 재야 사이비 민족사관이다. 셋째, 『고려사』, 『금사』 등 한중 정사(正史)와 브리태니커 영문백과사전 세계 공인 정사(正文)만을 근거로 문무대왕, 고려 태조, 세종대왕, 정약용, 신채호, 정인보의 맥을 잇는 강효백의 대한민족 정통사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