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동양철학의 이해 (책소개)/1.동양철학사상

이제현 사집 : 고려 사(詞)를 대표하는 이제현의 작품 54수를 모두 수록

동방박사님 2021. 12. 21.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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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고려 사(詞)를 대표하는 이제현의 작품 54수를 모두 수록했다. 그의 사는 송사(宋詞)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소상팔경(瀟湘八景)과 송도팔경(松都八景)을 노래한 연작 사는 사물을 역동적으로 묘사하고 청각을 자극하는 다양한 표현을 사용해 평면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그림을 만들어 낸다.

목차

심원춘?장차 성도로 가면서
강신자?칠석에 비를 맞으며 구점에 이르러
자고천?신락현을 지나면서
자고천?9월 8일에 송도의 친구들에게 부치다
자고천?보리술을 마셨다
자고천?양주의 평산당
자고천?학림사
태상인?저녁에 가다
완계사?일찍 길을 나서다
완계사?황제의 주정원에서
대강동거?화음을 지나다
접련화?한 무제 무릉
인월원?마외에서 오언고의 사를 본뜨다
수조가두?대산관을 지나며
수조가두?화산을 바라보며
옥루지?촉 땅에서 중추절에 비를 만나다
보살만?배에서 밤에 묵다
보살만?배를 청신에 대다
동선가?두보초당
만강홍?상여 사마교
목란화만?장안 회고
목란화만?이 장군 댁의 벽에 쓰다
무산일단운?소상팔경 평사낙안 : 옥문관에는 주살이 많고
무산일단운?소상팔경 원포귀범 : 남쪽 포구에는 차가워진 조수 급하고
무산일단운?소상팔경 소상야우 : 조수 빠진 갈대 포구
무산일단운?소상팔경 동정추월 : 만리에 하늘은 물에 떠 있고
무산일단운?소상팔경 강천모설 : 바람 급해지고 구름 모습 어둡더니
무산일단운?소상팔경 연사모종 : 초 땅 교외에 가을장마 그친 뒤
무산일단운?소상팔경 산시청람 : 먼 산봉우리는 소라 천 개요
무산일단운?소상팔경 어촌낙조 : 먼 산봉우리에 저무는 해 머물러 있고
무산일단운?소상팔경 평사낙안 : 취중에 한 붓질처럼 성글다가 또 빽빽해지고
무산일단운?소상팔경 원포귀범 : 닻줄 풀어 회하 유역을 떠나서
무산일단운?소상팔경 소상야우 : 푸른 단풍나무는 어슴푸레하고
무산일단운?소상팔경 동정추월 : 너른 형악이 북쪽으로 임해 섰고
무산일단운?소상팔경 강천모설 : 초저녁 무렵 나그네 배를 돌려
무산일단운?소상팔경 산시청람 : 물기운이 가을 더위에 피어오르고
무산일단운?소상팔경 어촌낙조 : 비가 갠 긴 강물 짙푸르고
무산일단운?소상팔경 연사모종
무산일단운?송도팔경 자동심승 : 바위 곁으로 맑고 얕은 물을 지나
무산일단운?송도팔경 청교송객 : 향긋한 풀 자란 성 동쪽 길과
무산일단운?송도팔경 북산연우 : 수만 골짜기마다 안개 빛 움직이고
무산일단운?송도팔경 서강풍설 : 바다 건너오느라 바람 차고 빠른데
무산일단운?송도팔경 백악청운 : 봄바람 분 뒤 창포와 살구꽃이 나오고)
무산일단운?송도팔경 황교만조 : 보였다 사라졌다 개울물 휘돌아 흐르고
무산일단운?송도팔경 장단석벽 : 물에 꽂힌 바위 우뚝하고
무산일단운?송도팔경 박연폭포 : 햇빛이 빼어난 여러 봉우리를 비추니
무산일단운?송도팔경 자동심승 : 나이 드니 몸이 아직 건강한 것을 기뻐하고
무산일단운?송도팔경 청교송객 : 들의 절에는 송홧가루 떨어지고
무산일단운?송도팔경 서강풍설 : 눈은 강가의 지붕을 누르고
무산일단운?송도팔경 북산연우 : 아득히 푸른 하늘 멀리 펼쳐져 있고
무산일단운?송도팔경 백악청운 : 새벽에 청교역을 지나
무산일단운?송도팔경 황교만조 : 고전 길은 멀리까지 보이고
무산일단운?송도팔경 박연폭포 : 절벽에 휑한 굴이 뚫렸고
무산일단운?송도팔경 장단석벽 : 강마른 뼈대는 천 년을 서 있었고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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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에 대해
 
 
출판사 리뷰
사는 원래 성당(盛唐) 시기부터 널리 유행한 민간 가요였는데 송대(宋代)에는 사대부 문학의 하나로서 크게 유행했다. 고려에는 음악과 함께 전파되었다. 고려 예종(睿宗) 9년(1114)에 송 휘종(徽宗)이 사신을 통해 속악(俗樂)인 신악기와 악보 등을 전해 주었고, 11년(1116)에 다시 아악(雅樂)인 대성악(大晟樂)을 전해 주었다. 이렇게 전해진 당악(唐樂) 중에는 안수, 구양수, 유영, 소식 같은 북송 사인(詞人)의 사 작품이 수록되었는데, 이를 통해 고려에 사가 전파된 것으로 파악된다. 고려 사의 창작은 이러한 당악의 전파보다 조금 이른 시기에 이루어졌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13대 선종(宣宗)이 <하성조(賀聖朝)>를 지었다고 하고 16대 예종이 여러 차례 사를 지어 신하들에게 선사했다 한다. 다만 이는 기록에 불과할 뿐 사 작품은 전하지 않아서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없다.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최초의 고려 사는 이규보(李奎報)의 작품이다. 그러나 작품 수가 11수에 불과해 고려사를 대표한다고 할 수 없다. 작품 수와 질적인 면에서 고려사를 대표하는 이로는 단연코 이제현을 꼽아야 할 것이다. 이제현 사는 ≪익재집(益齋集)·익재난고(益齋亂藁)≫에 따르면 작품 수가 54수로(1수는 사패명만 전한다) 현전하는 고려 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활용한 사조 또한 15조로 다양한 편이다. 평가도 매우 높다. 사 비평으로 유명한 청대 학자 황주이(況周?, 1849∼1904)는 ≪혜풍사화(蕙風詞話)≫에서 “이제현 사의 …이러한 구는 북송과 남송 명가의 사 중에 두어도 거의 손색이 없다(益齋詞, …此等句, 置之兩宋名家詞中, 亦庶幾無愧色)”라고 평했다.
이제현이 사의 창작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배경으로는 연경에서의 만권당(萬卷堂) 활동을 들 수 있다. 고려 충선왕(忠宣王)은 양위한 이듬해인 1314년 원나라의 수도 연경의 사저(私邸)에 만권당을 세우고 당시 유명한 문인들과 교유했다. 이 가운데 조맹부, 장양호, 우집이 이제현과의 교유에 적극적이었다. 당시 원나라 문인은 시뿐만 아니라 사의 창작에도 능했는데, 특히 사적인 교유에서는 사를 많이 창작했다. 이들과의 교유를 통해 이제현은 사 창작의 필요성을 절감했을 것이다. 또 사를 자주 접하게 되면서 이를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이해도도 커졌을 것이다.
그는 여행 사를 많이 남겼다. 사를 통해 여행의 서막을 여는 것은 사의 기능과 역할의 새로운 면을 개척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사의 내용에서 사에 대한 창작 의지를 다짐하는 것도 독특한 면모다. 여행 중에 경험하는 좋은 경치를 ‘청아한 노래’ 속에 모두 들인다는 것은 여행과 사의 창작을 상호 연관해 언급하는 것으로, 이는 송대 이후 여행과 사의 창작이 상승 작용을 일으키면서 나타난 문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송대 여행 사는 부임지로 떠나며 나누는 송별의 정, 벼슬살이의 고단함, 귀양 가는 슬픔,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원망, 나그네의 외로움 등을 노래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사의 창작을 선언하며 떠나는 여행도 거의 없었고 사의 창작 의지를 다짐하는 내용의 사도 거의 없었다. 바로 이 점에서 이제현 사의 가치와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