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전쟁교훈여행 (2010~) (여행)/4.일본군함도

군함도상륙

동방박사님 2017. 12. 9. 09:26
728x90

군함도의 역사

19세기에 석탄의 존재가 확인되었고, 1980년부터 미쓰비시 재벌의 소유가 되었다.석탄 채굴을 위해 주위를 매립하였고 다이쇼 시대이후에는 철근 콘크리트조의 주택이 건설되었다. 해상에서 본실루엣이 마치 일본 해군의 전함을 닮아 군칸지마 (군함도)로 불려왔다.1916년에는 일본에서 최초로 철근 콘크리트조의 집합주택 "30호동"이 건설 되었다. 5년후인 1921년 나가사키 신문도 당시 미쓰비시 중공업 나가사키 조선소에서 건설중이었던 일본해군의 전함과 비슷한 의미로 군칸지마로 불렀기 때문에 군칸지마라는 통칭은 다이쇼시대 무렵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무렵에는 아직 철근 콘크리트조의 고층아파트는 적었고, 대부부은 목조 단층집이나 2층집 이었다.태평양 전쟁이후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인 약 약 800명이 강제동원되었다. 석탄을 생산할 인구수가 부족하자, 일본정부는 한국에 실시된 "국가총동원법"을 통해 한구의 젊은이들을 강제 징용했다. 그들은 하루에 12시간씩 탄광에서 노역을 했다. 인구가 전성기를 맞었던 1960년대에는 5,267명이 하시마섬에 거주하여 인구밀도는 제곱킬로미터 당 83,600명으로 도쿄23구의 9배이상에 달했다. 탄광시설, 주택 외에 초중학교, 점포, 공원, 상원. 영화관, 이발소. 미용실, 사교장 등이 있어 섬안은 완벽한 도시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화장장, 장지 충분한 넓이와 시설이 잇는 공원은 섬 안에 없어서 하시마섬과 다카시마 사이에 있는 나카노시마에 건설되었다


군함도의 역사 2

1960년 이후에는 주요 에너지가 석탄에서 석유로 바뀌어 감에 따라 쇠퇴해 갔다. 1965년에 미츠세 구역의 신광이 개발되어 잠시 희복 되었지만 1970년대 이후의 에너지정책의 영향을 받아 1974년 1월15일 폐산하였다폐산 시에는 약 2천명 까지 줄었던 주민은 4월20일 까지 모두 섬을 떠나 하시마 섬은 무인도 가 되었다.다카시마 광업소의 잔무정리 등 탄광관련 시설의 해체작업은 1974년 말까지 이어졌다.현대에는 근대화 유산으로서, 그리고 다이쇼시대로부터 쇼와시대에 이르는 집합주택의 잔존물로서도 주목받고 있다 페허붐의 일환으로서도 여러 차례 화제에 오른다. 현재 무인화에 다라 건물의 붕괴가 진행되고 있다. 외벽에는 붕괴개소에 대해서는 일부 콘크리트로 수복이 진행되고 있다.군함도는 미쓰비시 마테리얼이 소유하고 있었지만. 2001년에 다카시미정에 무상으로 양도되어 현재는 나카사키 시의 소유지가 되었다. 건물의노후화 폐허화에 따라 위험한 곳이 많아 섬안으로 오랫동안 금지되었다.2005년 8월23일 보도 관계자에 한해 특별히 상륙이 허가되어 황페화가 진행되는 도내 각소의 모습이 각 매체에 소개되었다. 도내의 건축물은 아직 정비되지 않은 곳이 많지 어느정도는문제가 해결되어 2008년 나가사키 시에서 "나가사키시 하시마 견학시설 조례" 와 "하시마에의 출입의 제한에 관한 조례" 가 성립되었다. 이로써 섬의 남부에 정비된 견학통로에 한해서 2009년 4월22일 부터 관광객이 상륙, 견학이 가능해졌다. 이후 1개월간 4,601여 명 1년간 59,000여명이 상륙했다.일부에서 세계유산 등록 운동이 진행되어 2006년 8월에는 일본 경제산업성이 하시마섬을 포함한 메이지시대 산업시설을 지역 관광자원으로 사용하기위해 세계유산 등록을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2008년 9월 "큐슈" 야마구치의 근대화 산업 유산군"의 일부로서 세계유산 잠정 목록에 추가 기재가 확정되었고 2009년 1월 기재되었으며, 2015년 6월 정식으로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 되었다


지옥섬 군함도

일본인 아파트에서 떨어진 두 동짜리 열악한 건물에 수용된 조선인 징용자들에게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하시마는 가장 공포스러운 작업장으로 일명 "지옥섬"으로 불리웠다. 건물 창문네는 전부 쇠창살이 쳐 있었고, 부근에는 10m 높이의 감시탑이 있었다. 강제노역에 동원된 조선인들은 바다 밑 1Km 까지 갱도를 파고 둘어가야 했고 바닷물은 시도 때도 없이 밀려들었고 갱도안 온도는 30도, 습도만 95%가 넘으면서 흡사 지옥을 연상 시켰다. 이곳 지하에서는 유독가스가 유출되면서 조선인 강제징용자 94명이 숨졌다. 지옥섬에서의 탈출은 거의 불가능 했지만 노동착취를 견디지 못한 조선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탈출을 시도해 혜엄쳐 도망가다 빠져죽고, 일본인 노무관리자들에게 연행되어 고문당하거나 맞아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군칸지마 (일본측 설명)

나가사키 반도에서 서쪽으로약 4.5km. 미쓰비시 석탄광업(주)의 주력탄광이었던 다카시마에서 남서쪽으로 약 2.5km 나가사키항에서 남서쪽으로 약 19km 떨어진 앞바다에 위치한 "하시마"하시마는 남북으로 약480m, 동서로 약160m 둘례 약 1,200m 면적 63,000 제곱m의 작은 해저 탄광섬으로 울타리가 섬 전체를 둘러싸고 고층 철근 아파트가 늘어선 외관이 군함 " 도사와 닮았있는 모습에서 '군함섬"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틴광 폐광후 긴 시간 잠들어 있던 "하시마" 이지만 2009년 1월5일에 세계유산 잠정 리스트에 게재된 " 규슈 야마구치 근대화산업 유산군"의 구성자산의 하나로 또 다시 새로운 역사를 새기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시마의 역사 (일본측 설명)

하시마는 1810년경 석탄이 발견되어 사가번 소규모 채굴을 했지만 1890년 미쓰비시 합자회사가 경영하게되어 본격적인 해저 탄광으로서 조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출탄량이 증가함에 따라 인구도 증가하고 좁은 섬에서 많은 사람들이 생활하기위해 19`6년에는 일본에서 최초로 철근 콘크리트의 고층 집합주택이 건설되어 전성기에는 약5,300이나 되는 사람들이 살았으며 당시 도쿄도의 9배나 되는 인구밀도에 달했습니다.에너지 혁명에의해 에너지 수효가 석탄에서 석유로 옮겨 가 출탄량도 인구도 점점 감소하여 1974년 1월 폐광한후 같은해 4월에 무인도가 되었습니다.


하시마연표

1810년 : 하시마에서 석탄발견 (다카시마에서는 1695년에 석탄발견) 그무렵 하시마는 초목없는 수성암 여울 에 지나지 않았다

1870년 : 아마쿠사의 고아마 히데가 하시마광 뚫기에 착수, 그 후 사가번 후카호리 영주인 나베시마 마고로쿠로 등이 경영했다.

1887년 : 제1수경굴 뚫음 44m가지 개착하고 1897년 경네 화재에 의해 패쇄 되었다.1890년: 미쓰비시경영으로 넘어간다. 미쓰비시가 나베시마 마고로쿠로에서 10만엔에 매수하여 다카시마의 지점광산으로 1891년부터 채광을 시작했다.

1895년 : 제2수경을 뚫음 (168m까지 개착하고 1934년에 개수완료. 추가로뚫어 616m까지 이르렀으며 폐광때까지 채굴했다

1896년 :제3 수갱을 뚫음 616m까지 1935녀까지 채굴했다.

1916년 : 일본 최초의 철근 고층 아파트 완성

1925년 : 제4수갱을 뚫음 (370m까지 개착하고 평소에 배기용으로 사용, 제2수갱이 문제가 있을 경우에      는         그대용으로 사용되어 폐광때까지 채굴했다)

1934년 : 하시마 초등학교 완성1941년 : 년간 출탄 최고기록 41만 1,100톤 달성

1945년 : 석탄을 싣고 있던 하쿠주마루 배가 어뢰에 맞아 침몰한다.

1955년 : 다카하무라하시마와 다카시마마치가 합병하여 다카시마마치하시마가된다.

1965년 : 미쓰세신 갱도에서 출탄개시 (패광때까지 채굴한다)

1974년 : 1월15일 하시마광이 폐광 같은해 4월20일에 무인도가 되어 지금에 이름


작성자 : 박상수

참고자료 : 일본리플렛 변역 및 디지털 군함도자료관
































'06.전쟁교훈여행 (2010~) (여행) > 4.일본군함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군함도 (하시마)  (0) 2017.12.09
가까이 본 군함도  (0) 2017.12.09
선상에서 본 군함도  (0) 2017.12.09
다카시마 & 미쯔비시  (0) 2017.12.08
하시마 (군함도) 모형  (0) 2017.1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