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천주교성지 (2016~) <여행지>/2.인천.수원.의정부 (서울관구) 17

경기도. 구 김포성당

김포성당 ㅣ 金浦聖堂 등록문화재542호 김포시 북변동 261-3 김포성당은 걸포리 공소(公所) 로 시작하여 8.15광복 후 교세가 확장됨에 다라 1846년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1년후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제3대 신원식 루카 주임신부 및 교우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당시 마송에 주둔해 있던 해병대 이영우대령의 군(軍)장비 지원으로 1956년 12월27일 봉헌식을 가졌다. 본 성당은 한국전쟁 후의 석조건축물로서 정면 중앙상부의 종탑과 뾰족한 아치형태의 창호를 가지고 있다. 또한 입구는 둥근 아치형태를 하고 있으며 평면은 좌측과 우측에 부출입구가 돌출되어 있어 라틴십자형의 평면 형식을 하고 있다. 김포성당은 외형적인 아름다움은 몰론 화강석의 구조적 기법을 간직하고 있어서 건축학적으로 그 가치가 매우크다. 구..

강화도 갑곶순교성지

강화도와 한국 천주교회 강화도는 한국 천주교회 초기부터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1975년 조선 최초 선교사로 입국한 주문모 신부가 철종의 조모 송 씨(은원 군의 처)와 며느리 신 씨에게 세례를 준 것이 조정에 알려져, 왕족이었던 이들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게 된다. 이로 인해 강화도에 귀향해 살던 철종의 조부인 은원 군도 처형되었다. 또한 강화도는 19세기 후반 한국 역사에서 동서양의 사상과 문화가 만나 첨예한 갈등을 빚은 곳으로 상징되는 곳이기도 하다. 선교사들의 경유지 갑곶 해안 이후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면서 천주교가 유입될 때 이용되던 육로 통행이 여의치 않게 되자, 1845년 5월1일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고 주교의 명으로 선교사를 비밀리 입국시키는 해로를 개척하기 위해 서울 마..

순교자들의 행적 증거자 박순집 베드로

박순집 베드로 (1830~1911) 갑곶순교성지에서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시는 일에 일생을 바친 '신앙의 증거자, 박순집(베드로)의 묘가 모셔져 있다. 비록 참수 치명자는 아니나 그의 생에는 어으 순교자 못지않은 삶이었다. 새남터와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수 많은 순교자들의 유해를 목숨을 걸고 찿아 안장했으며, 후에 선교자들의 행적을 증언해 유해발굴과 시복시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1890년 인천제물포로 이주해 숙골( 현 도화동)에서 선종할 때 까지 전교활동에 힘쓰며 인천교구의 발전에 초석이 되었다. 박순집 베드로는1830년 10월 9일 서울 남문 밖 (전생서:현 용산구 후암동) 에서 순교자 박 바오로와 김아가다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부모의 신앙을 이어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때..

갑곶순교성지 (순교자:박상손,우윤집,최순복 3위비)

수많은 순교자들이 갑곶 진두에서 효수당하다. 1866년 병인박해로 강화도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1868년 프랑스 선교사를 입국시키는데 협력한 최인서, 장치선 회장과 박서방(박순집의 형), 조서방 등이 서울 포청에서 옥살이를 하다 강화 병영지 진무영으로 호송되어 효수당하게 된다. 1866년 대동강에서 통상을 요구하던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불에 타 침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대원군이 천주교를 박해하는 빌미로 삼았고, 이후 미국은 1871년 강화도를 공격하였는데, 이를 신미양요라고 한다. 특히 갑곶 나루터는 당시 많은 신자들이 목을 베어 말뚝에 달아매는 효수터가 되었다 이 째 미국 함대에 왕래한 박상 손, 우윤집, 최순복 등이 첫 번째로 잡혀가 이곶 갑곶 진두에서 효수되었다.

남한산성 순교성지

남한산성 순교 성지 남한산성은 한양의 군사적 요지로 천주교 박해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는데, 이미 신해박해 (1791년)때부터 신자들이 남한산성에 투옥되었다는 전승이 내려오고 있으며, 신유박해 때에는 첫 순교자 한덕운 토마스가 탄생하였다. 이어 기해박해와 병인박해에 이르기 까지 약 300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들이 참수, 교수, 장살 등의 방법으로 순교하였는데 안타깝게도 순교자들 가운데 일부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병인박해 때에는 이곳에서 백지사라는 특이한 형벌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사지를 묶고 얼굴에 물를 뿌린 뒤에 한지를덮는 일을 거듭하여 숨이 막혀 죽게하는 형벌이다. 너무 많은 신자들이 잡혀오자 피를 보는 일에 진저리를 낸 포졸이나 군사들이쉽게 처향할 수 있는 방법으로 고안해 낸 것이었다. 순..

경기도광주 천진암성지

경기도광주 천진암 성지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 앵자봉 기슭에는 조그만 암자가 놓여있었다. 어느 때인가 없어져 주춧돌만 남았던 이 보잘것없어 보이는 암자가 바로 한국천주교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천진암이다. 당시 천진암에서는 당대의 석학 녹암 권철신이 주재하는 강학회가 있었다. 권철신. 일신. 형제와 정약전. 약종, 약용 형제, 이승훈 등 10여명의 석학들은 광암 이벽의 참여와 함께 서학에 대한 학문적 지식을 종교적 신앙으로 발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1779 당시 이벽(세레자 요한) 정약전 21세, 이총억15세, 권철신 (암브로시오) 44세등 주로 10대와 20대 젊은이들이 모여서 그 당시 아주 생소하고 이상한 천주교 책을 읽고 실천하는 일을 하였다. 천진암 강학은 한국 천주교화 창설의 배..

광주퇴촌 천지암 천주성지

경기도광주 천진암 성지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 앵자봉 기슭에는 조그만 암자가 놓여있었다. 어느 때인가 없어져 주춧돌만 남았던 이 보잘것없어 보이는 암자가 바로 한국천주교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천진암이다. 당시 천진암에서는 당대의 석학 녹암 권철신이 주재하는 강학회가 있었다. 권철신. 일신. 형제와 정약전. 약종, 약용 형제, 이승훈 등 10여명의 석학들은 광암 이벽의 참여와 함께 서학에 대한 학문적 지식을 종교적 신앙으로 발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1779 당시 이벽(세레자 요한) 정약전 21세, 이총억15세, 권철신 (암브로시오) 44세등 주로 10대와 20대 젊은이들이 모여서 그 당시 아주 생소하고 이상한 천주교 책을 읽고 실천하는 일을 하였다. 천진암 강학은 한국 천주교화 창설의 배..

남양 성모성지

남양 성모성지 남양 성모 순례지는 병인년(1886년) 대박해 때 많은 순교자들이 피 흘리며 죽어간 무명 순교지이다. 이곳에는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는데 치명일기와 증언록에 기록이 전해지는 남양의 순교자는 충청도 내포 사람 김 필립보아 박 마리아 부부. 용인 덧옥달 사람 정 필립보, __ (중략)

이천 단원성지

이천 단원성지 김대건 신부의 사목활동지이며, 정은 바오로와 정베드로 순교자의 고향이자 묘소가 있는곳이다. 위치 : 경기도 이천시 호법면 이섭대천로 155번길38-13 (단천리357) 이천시 호법면 단천리에 위치한 단내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당시 광주 유수부인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정은 (1804~1866, 바오로)과 그의 재증손인 정베드로 (?~1866)고향이자 유해가 묻혀 있는곳이다. 광장 한편에 성가정상과 이천지역에서 태어나거나체포되어 순교한 5위 성인 순교비가 자리하고 있고, 그옆으로 계단을 오르면 말끔하게 단장된 순교자 정은 바오로와 정 베드로의 묘소가 나온다. 어농리 사적지와 불과 몇리 떨어져 있지 않은 단천리는 유서 깊은 교유촌이기도 하다. 이천 동산밑 (호법면 동산리)이 고향인 이문우 (요한..

용인 은이성지

용인 은이성지 은이는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살던 "숨은 이들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바로 이웃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자라난 골배마실 교우촌이 있으며, 문수봉 넘어 남서쪽에는 한덕골 교우촌과 미리내교유촌이 자리잡고 있었다. 은이교우촌이 언제 형성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1846년 48세로 포도청에 곤장을 맞고 교수형으로 순교한 충청도 출신의 한이형(1799~1846 : 라우렌시오) 성인기록에 보면 21세때(1819년) 혼인한 뒤 곧바로 은이마을로 이주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후 그는 은이 교우촌의 회장을 지냈다. 은이와 골매마실은 두 차례에 걸쳐 박해를 받게 되었다. 1839년의 기해박해로 김제준이 골배마살에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어 순교하였으며, 1846년의 병오박해 때는 공소회..

양평 양근성지2

양평 양근성지2 양근지방은 한국천주교회 창설의 요람이며 선교의 중심지이자 신앙 선조의 순교터이다. 양근지방은 한국천주교회 창설초기 권철신(암브로시오),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영향으로 많은 천주교신자가 배출되었다. 충청도 내포의 이존창(루도비코곤자가), 전라도 전주 초남의 유항검(아우구스티노) 등이 가장 대표적인 예다. 또한 양근에서 살던 윤유일(바오로)은 권철신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연구하면서 한국천주교의 첫 밀사로 1795년 주문모(야고보)신부를 맞아 들이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수원성지 복수원성당

수원성지 복수원성당 수원성지 복수원성당 2000년 대희년에 수원교구장 최덕기(성바오로) 주교님에 의해 토포청자리에 위치한 복수원성당(구 수원성당)을 중심으로 수원화성 전체가 순교성지로 선포 되었고, 하나님의 종 순교자 원프란치스코를 비롯한 수많은 순교자들과 무명 순교자들의 순교정신을 기리는 성역화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남한산성 순교성지

남한산성은 삼국시대 이래로 지리상 중요한 요충지였다. 조선중기인 1577년 (선조10)에 광주부가 설치되어 지방관부유(종2품)이 상주하다가 1623년 (인조1)에 유수부로 승격되면서 경관인 유수 (정 2품이 파견되었다) 이처럼 유수의 처소가 이전되면서 남한산성은 천주교 박해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고 박해때마다 여러 곳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 으로 끌려와 순교함으로써 잊을수 없는 "순교터"가 되었다. 최초의 박해인 신해박해 (1791년) 때부터 신자들이 남한산성에 투옥 되었다는 전승이 내려오고 있다. 신유박해 (1801년)때에는 이 곳에서 기해박해 (1839년)병인박해 (1866년) 에 이르기까지 약 300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하였는데 불행이도 그행적과 성명을 알수 있는 순교자 들의 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