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천주교성지 (2016~) <여행지> 57

용인 은이성지

용인 은이성지 은이는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살던 "숨은 이들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바로 이웃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자라난 골배마실 교우촌이 있으며, 문수봉 넘어 남서쪽에는 한덕골 교우촌과 미리내교유촌이 자리잡고 있었다. 은이교우촌이 언제 형성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1846년 48세로 포도청에 곤장을 맞고 교수형으로 순교한 충청도 출신의 한이형(1799~1846 : 라우렌시오) 성인기록에 보면 21세때(1819년) 혼인한 뒤 곧바로 은이마을로 이주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후 그는 은이 교우촌의 회장을 지냈다. 은이와 골매마실은 두 차례에 걸쳐 박해를 받게 되었다. 1839년의 기해박해로 김제준이 골배마살에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어 순교하였으며, 1846년의 병오박해 때는 공소회..

양평 양근성지2

양평 양근성지2 양근지방은 한국천주교회 창설의 요람이며 선교의 중심지이자 신앙 선조의 순교터이다. 양근지방은 한국천주교회 창설초기 권철신(암브로시오),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영향으로 많은 천주교신자가 배출되었다. 충청도 내포의 이존창(루도비코곤자가), 전라도 전주 초남의 유항검(아우구스티노) 등이 가장 대표적인 예다. 또한 양근에서 살던 윤유일(바오로)은 권철신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연구하면서 한국천주교의 첫 밀사로 1795년 주문모(야고보)신부를 맞아 들이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절두산 순교기념비

절두산 순교기념비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를 절두산으로 옮긴 이유가 프랑스 함대의 침략에대한 책임을 천주교 신자들에게 묻기위한 것 이었으므로절두산에서는 프랑스의 함대를 불러드린 혐의가 있는 신자들만 골라서 처형 하였다. 절두산에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하였지만 안타갑게도 이곳에서 순교한 것을 기록상 확인된 신자수는 29명 (무명순교자)뿐이다. 1866년 10월22일 효수형을 받은 이의송 (1866 10월22일 효수형을 받은 황해도 출신의 회장 박여래 (?~1866. 요한)등이 잘 알려진 순교자들이다.

절두산 순교성지

절두산 순교성지 병인박해때 수많은 천주교신자들이 피로 물들인 한강변에 우둑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순교성지이다. 절두산은 한강변에 우뚝 솟은 작은 암벽 봉우리로 1866년 병인 박해때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치명한 순교성지이다. 이곳은 조선시대 교통의 요지이자 병선의 훈련장이며 처형, 제사 진휼(흉년에 곤궁한 백성을 구제함)하던 곳이던 양화진의 동쪽에 봉우리로 원래 가을두 (加乙頭), 혹은 누에의 머리 형상을 했다고 하여 잠두봉 이라고 불렀다. 수많은 천주교인이 참수형으로 목 잘려 죽은 곳 이라는 으미의 절두산 (切頭山) 으로 불리게 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이곳에서 많은 신자를 처형한것과 관련이 있다.

수원성지 복수원성당

수원성지 복수원성당 수원성지 복수원성당 2000년 대희년에 수원교구장 최덕기(성바오로) 주교님에 의해 토포청자리에 위치한 복수원성당(구 수원성당)을 중심으로 수원화성 전체가 순교성지로 선포 되었고, 하나님의 종 순교자 원프란치스코를 비롯한 수많은 순교자들과 무명 순교자들의 순교정신을 기리는 성역화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화산천주교회(나바위성당)

화산천주교회(나바위성당) 나바위성당(羅岩聖堂)이라고도 한다. 전라도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이 성당은 1845년(헌종11) 상해(上海)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한 김대건(金大建) 신부가 강경포(江景浦) 부근에 상륙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초대 주임이었던 베르모렐(J. Vermorel)신부에 의하여 1906년에 건축되었다. 한양절충식(韓洋折衷式)의 이 성당은 당초에는 순수한 목조건축이었는데, 정면 5칸, 측면 13칸 크기에 정면과 양측면의 툇간이 마루로 되었고. 정면 중앙에 목조종탑과 십자가가 있었다. 1916년에 증축하면서 목조종탑을 없애고 고딕식 벽돌조 종각을 툇간에 덧붙여 증축하였으며, 이 때 목조로 된 벽을 헐고 벽돌로 쌓았고 양측면 툇간의 마루를 없애고 회랑(回廊)으로 만들었다. 그 뒤 두 차례의 ..

횡성 풍수원성당

횡성 풍수원성당 (橫城 豊水院聖堂) 풍수원마을이 형성된 연유는 1891년 신유박해이후 1893년 혹은 1803년경 경기도 용인에서 신태보 (베드로를 중심으로 40여명의 신자들이 8일동안 치난처를 찿아 헤메다가 정착하게 된 것이 그 유래로써 80여 년 동안 신자들은 성직자 없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1888년 프랑스 성직자 르베르 신부가 풍수원에 파견되어 본당을 창설, 초대신부로 임명되었고, 본당의 관할구역은 강원도 전역과 경기도 일부를 포함하는 12개군 29개 공소로서 신자수 2,000영명에 이르렀다. 르메르 신부가 본당의 터전을 딱은 후 예수 성심학교 출신으로 첫 사제로 서품된 정규하(아우구스티노) 신부가 부임하여 1943년 81세의 일기로 선종하기까지 평생을 풍수원 본당 신부로 사목하였고, 정규하 신부는..

남한산성 순교성지

남한산성은 삼국시대 이래로 지리상 중요한 요충지였다. 조선중기인 1577년 (선조10)에 광주부가 설치되어 지방관부유(종2품)이 상주하다가 1623년 (인조1)에 유수부로 승격되면서 경관인 유수 (정 2품이 파견되었다) 이처럼 유수의 처소가 이전되면서 남한산성은 천주교 박해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고 박해때마다 여러 곳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 으로 끌려와 순교함으로써 잊을수 없는 "순교터"가 되었다. 최초의 박해인 신해박해 (1791년) 때부터 신자들이 남한산성에 투옥 되었다는 전승이 내려오고 있다. 신유박해 (1801년)때에는 이 곳에서 기해박해 (1839년)병인박해 (1866년) 에 이르기까지 약 300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하였는데 불행이도 그행적과 성명을 알수 있는 순교자 들의 수는 ..

부산 오륜대 순교자 박물관 / 묘지

오륜대 순교자 박물관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박해때 참형을 받고 순교한 요한 이정식가족을 비롯한 천주교 신자 8명의 유해가 안치된 곳으로 1982년에 기념관을 건립하여 각종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오륜대는 한국순교자박물관은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의 얼이 담긴 귀중한 유물이나 유적이 점차사라져 가고 있을때. 수십년간 모아온 것을 특별한 관심과 순교자 현양의 열정으로 1982년 한국순교자 기념관을 건립하여 개관하여 2009년 박물관으로 새로 거듭났다. 박물관1층에는 순교자의 유물과 자료가 보관되어 있고 2층에는 성모성년 특별전시실, 선교2백주년 기념실, 민속 자료실이 설치되어 있으며 3층에는 김인순 (루갈다) 기증품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다.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유물가운데 무덤을 덮었던 횡대와 옥중..

대구 계산동성당

대구 계산동성당 이 건물은 서울과 평양에 이어 세번째로 세워진 고딕양식의 성당이다. 프랑스인 프와넬신부가 설계하였고 서울명동성당의 건립에 참여하였던 중국인들이 공사를 담당하여 1902년 완공하였다. 1911년 주교회성당이 되면서 종탑을 2배로 높이는등 증축을 하여 1918년12월 24일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 되었다. 평면은 라틴 십자형이고 종탑부에는 8각의 높은 첨탑이 2개를 대창구조로 세웠으며 앞면가 양측에는 장미창으로 장식하였다. 대구최초의 서양식건물이고 현존하는 1900년대의 건축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전북 전주 전동성당

전주 전동성당 한국 천주교회 최초순교지 윤지충, 권상연이 참수형을 당한 순교 터이며, 호남의 모태본당이다. 전동성당은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한 지 정확히 100년후 파리외방선교회 보두네 (프렌치스코 하이에르) 신부에 의해 세워졌다. 당시 보두네신부는 복자들의 순교를 지켜보았을 전주성 성벽과 흙으로 성당주춧돌을 세세웠다.전동 성당자리는 한국천주교회사적 으로 출중한 순교자를 낳은 순교자 가운데 한 곳이다. 특히 한국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복자 윤지충 (바오로)과 복자 권상연(야고보)은 1791년12월8일 전주 남문 밖 (현전동성당자리)에서 관장의 배교 권유와 회유를 단호히 거부하고 당당히 천주교가 진리의 종교임을 밝히면서 처형 되었다. 전동 성당 터는 전주 남문에서 경기전과 동문을 거처 중노송동으로 나가는 길..